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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21 장 | 마태복음 21장 111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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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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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공 : CGN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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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

마태복음 21. … 제 21 장 …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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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15/2021

View: 5785

[개역개정] 마태복음 21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예수께서 스가랴서 9:9의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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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11/11/2022

View: 5933

마태복음 21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마태복음 21 ·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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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2/29/2022

View: 5679

2020/01/15(수) “마태복음 21:18-32” / 작성: 박성호

본문 마태복음 21:18-32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마른 무화과나무 사건(18-22) 28장으로 구성된 마태복음은 21장에서 27장까지 예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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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6/10/2022

View: 8705

마태복음 21장 주석 – Daum 카페

마태복음 제 21장 =====21:1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 갈릴리와 베레아 지경에서의 전도사역을 마치신 예수께 서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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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0/10/2022

View: 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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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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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 복음 21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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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578Q08jpTg

마태복음 21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1)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ㄱ)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막 11:15-19; 눅 19:45-48; 요 2:13-22)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ㄴ)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ㄷ)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ㄹ)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무화과나무가 마르다(막 11:12-14, 20-24)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막 11:27-33; 눅 20:1-8)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2)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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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것이요 2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020/01/15(수) “마태복음 21:18-32” / 작성: 박성호

본문 마태복음 21:18-32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마른 무화과나무 사건(18-22)

28장으로 구성된 마태복음은 21장에서 27장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증거합니다.

21장에서 23장까지는 주일에서 화요일까지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8-19)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이른 아침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곧장 길가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앞으로 가셨습니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함을 보시고는 그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선언하셨습니다. 이에 곧 무화과는 말랐습니다.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에는 당시는 무화과의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님이었음을 기록합니다.

(막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화과의 때를 모르고 말씀하신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무화과의 때를 누구보다 잘 아셨을 것입니다. 동시에 무화과의 특징을 잘아셨습니다. 꽃이 지면서 열매를 맺는 다른 실과들과는 달리 무화과는 곧장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무화과의 열매는 꽃으로도 불립니다. 수확의 때는 아니었지만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보며, 그 속의 열매를 기대해 봄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에 빗대어 지금의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씀신 것 입니다. 이를 알리 없는 제자들은 본질이 아닌 현상에 반응합니다.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새번역은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새번역 20)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서 말하였다.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당장 말라버렸을까?”

제자들은 그 순간 함께 계신 예수님이 아닌,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현상에 치우쳤습니다. 본질을 묻기 보다는 현상에 대한 질문이 이를 증거합니다.

예수님과 직접 동행하고 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의 말의 권위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 아닌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2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일주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붙들어야 할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현상에 매인 그들에게 믿음의 능력에 대해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셨습니다.

의심이 아닌 믿음의 능력을 강조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성전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실체(23-32)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앞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두 번 반복합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강한 의지가 그대로 표출된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덫과 같았습니다. 무슨 권위로 하는지 대답하지 않으면. 그의 권위는 실추되고 그간의 행적에 대한 비난과 정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권위를 주신분이 하나님이라 대답하면 그들은 신성모독으로 옭아맬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24-25A)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순수하지 못한 질문에 순결한 예수님은 지혜롭게 답하셨습니다. 그들의 허를 찌르는 역질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질문에 재차 질문하는 대답 방식은 당시 랍비들이 많이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은 순간 혼란에 빠졌습니다.

(25B-27)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진리가 아닌 자신의 유익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는 종교인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알지 못하노라’ 당시 유대 종교 최고 권위자인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오늘날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 공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대답입니다. 이로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던 이들의 민낯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28-32)

(28-30)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본문에는 두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먼저는 접속사의 해석부분입니다. 개역개정은 역접관계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이는 원어 δὲ 데 를 번역한 것인데,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느낌을 전합니다. 새번역, 공동번역, NIV 등은 이를 생략하고 곧장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새번역 28A)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공동번역 28A)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NIV 28A) “What do you think?

따라서 접속사의 의미보다는 이어 기록된 내용에 중점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어 개역개정은 두 아들의 대답을 원문과 반대로 기록했습니다. 원문에는 첫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대답한 후 뉘우쳐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했고,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한 후 포도원으로 가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새번역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새번역 29-30)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이어진 해석도 반대로 기록하고 있어, 메시지의 핵심을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31-32)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한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대답했지만, 이내 뉘우쳐 포도원으로 간 아들이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리들과 창녀들이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실체를 꼬집습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우리의 실체를 조명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겉은 순종하겠다 소리내지만 속은 불평과 정죄로 가득차 있지는 않은지, 작은 열매 하나 없이 잎만 무성해 그럴듯해 보이는 삶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함께 숙고하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믿음.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기를 결단할 때 오늘 우리의 삶은, 힘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현장이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진리 없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뒤에서의 모습이 다른 아들. 오늘 저희 모습과 꼭 닮아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닌 저희의 이러한 모습을 깨우쳐 주시고자 오늘의 말씀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와 용서를 구합니다.

부끄럽지만 믿음과 지혜, 겸손을 구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오늘 하루도 잠잠할 것을 소망하고 결단합니다. 우리 삶을 내어드리오니, 주님께서 일하시는 현장으로 마음껏 사용해 주십시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잎이 아닌 열매가 무성한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시다.

2. 믿음을 중심으로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3. 진리인 말씀을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지 헤아려 봅시다.

4.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며 지냈는지 돌아봅시다.

5. 나의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있었지는 묵상해 봅시다.

(작성: 박성호)

마태복음 21장 주석

마태복음 제 21장

=====21:1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

갈릴리와 베레아 지경에서의

전도사역을 마치신 예수께

서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

에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3차에 걸쳐 자신도 이미 예고한

바대로의 수난(受難)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벳바게> 향하여 길을 떠났다. 소경의 눈을 고치신

(20:29-34)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24Km로,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룻동안

에 걸어갈 수 있는 정도였으나 예수께서는 해발 약 900m의 이 군사도로를 통해 예루살

렘에서 약 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베다니에 도착, 하루 밤을 보내신 후에 그 다음

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벱바게에 도착하셨다. 생애의 마

지막 순간을 보낼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의 메시야되심은 사람들에게 더욱

더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끝내는 고난의

십자가를 향한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의 길이 바로 자신의 뜻이 아

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과 대속의 길이라고 하는 비장(悲壯)한 각오를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는 장엄한 순간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감람산 – 해발 약 800m에 위치해 있고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이 감람산(혹은

올리브산)은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 정도 그리고 시온 언덕(the hil

of Zion)보다 약 30m 정도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을, 남쪽

으로는 넓은 유대 광야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성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려

다 보이는 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생활의 주요 통행로(즉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으로 오는)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감람산은 슥 14:4에서 메시야 대망과 연관이 되고

있는데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가 그 내용이

다. 그래서 24:3에서는 감람산이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개림이 예언되는 장소로 등

장하고 있다.

벳바게 – 마가와 누가의 본문에는 ‘벱바게와 베다니’가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벱바게와 베다니가 동일한 지명(地名)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Barcley).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기 전날 밤에 이미 베다니에서 기숙(寄宿)하셨으므로

(요 12:1, 12) 이곳은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한 마을이 분명하다고 보는 것

이 오히려 적절하다. 즉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인근 마을이며, 감

람산 동편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곳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는 않았

지만 오늘날의 ‘케프르에트 투르'(Kefret Tur)가 이곳과 동일시 되고 있다.

두 제자를 보내시며 – 이 두 제자가 (1) 베드로와 요한(눅 22:8), (2) 야고보와 요

한, 혹은 (3) 고침을 받고 예수를 따랐던 여리고의 두 소경, 혹은 (4) 두 제자중의 한

사람이 나귀의 임자일 것이라고 하응 추측(Zahn) 등이 있으나 어느 견해를 취하더라도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

내시어 나귀를 끌어 오게 하신 이유에 있다. 즉 두 제자를 보내신 이유는 (1) 제자들

이 예수의 말씀대로 나귀를 구하러 갔을때 이미 준비된 나귀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장래 일을 예견(豫見)하시는 예수의 신

성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2)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까지 약 3Km가 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는 항상 걸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께서 이번에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유의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슥 9:9의 예언을 기억하고

그들의 선생인 예수께서 바로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더욱 더 확실히 깨닫게 하려는 것

이며 (3) 지금까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숨겨왔던 자세와는 달리 이제 그 사실을 예루

살렘의 사람들에게 공개하심으로써, 이미 3차에 걸쳐 예고한 바대로 예수께서 사람들

의 손에 넘기워져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게 될 인류구속의 사역이 임박해

왔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21:2

나귀와 나귀 새끼 – 두 마리를 언급하고 있는 마태의 본문은 70인역(LXX)을 참조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서의 슥 9:9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 표현

되고 있고, 마가와 누가에서도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하여

한 마리의 나귀만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탄 것을

증거하고 있으므로 마태의 본문에서의 어미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탄 사람이 없는 그 나

귀 새끼가 순순히 따라오게 하기 위한 용도로서 언급되었을 것이다. 한편 나귀와 나귀

새끼에 대한 마태의 표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이 있다. (1) 나

귀는 오랫동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온 유대 백성들을 그리고 나귀 새끼는 이러한 멍에

를 메지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이방인을 상징한다(Jerome, Justin,

Alford). (2) 나귀는 예수이전의 모세를 통한 신정정치(Theocracy)를, 나귀 새끼는 예

수 이후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해 형성된 어린 교회를 상징한다. 또한 예수께서 나귀

를 탔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나귀는 1차적으로는 예수

께서 자신이 구약 (창 49:10-12;민 24:17;사 9:6;11:1 이하;미 5:2)에서 이미 예언되

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온 메시야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슥

9:9의 메시야 예언을 완성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된 동물이다. 또한 2차적인 의미

로서의 나귀는 초라한 짐승이어서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일(왕하 9:13)이외에 이것을 탄 유대왕이 별로 없었던 점과, 세속적인 통치자들은 본

래 전쟁과 승리의 상징인 말을 타고 입성한다고 하는 점과 비교해서 ‘평화’와 ‘겸손’

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마가와 누가가 기록한 바대로 ‘아

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분의 순결한 품격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

서 그러한 속성의 나귀를 타신 메시야는 바로 순결한 평강과 겸손과 섬김의 왕이며 이

는 예수가 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21:3

주가 쓰시겠다 하라 – 본문의 경우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

,호 퀴리오스)라고 칭하신 것은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말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1) 마가와 누가에도 나타나고 있는 이번 경우의 ‘주'(Lord)는 ‘소유

주'(owner)를 의미할수도 있다. 그러나 눅 19:33에 의하면 ‘어찌하여 푸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그 임자들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 나귀의 소유주가 아니라고 하

는 사실은 분명하다. (2) 여기서의 ‘주'(主)는 ‘주 여호와’를 암시하는 말로 나귀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소유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가장 친한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주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온 해석은 (3)

‘주’라는 말이 나귀의 소유주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주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메시야로서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신적 속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 위한 자기 계시의 하나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점점 더 명백

히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한 그의 후기의 사역기간의 특징과도 잘 부합(符合)된다(D.A.

Carson). 예수는 수난의 일주간을 앞두고 자신이 온 인류의 구속주이자 왕이며 따라서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위에 순복(順服)해야함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써, 자신을 ‘주’로 부르시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게 하셨다.

즉시 보내리라 – 예수께서 이미 나귀를 예약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말에 따라 나귀를 즉시 보냈다고 하는 추측(Lange)은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벱바게와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이미 베다니에는 예수의 추종

자들과 친구가 있었을 뿐더러(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등) 그 나귀의 주인도 역시 예수

의 숨은 제자로 예수께서 나귀를 쓰시려는 용도(use)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보냈다고 하는 견해(Carr)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은 공생

애의 후반기를 보내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성과 신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사람들

로 하여금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려는 또 하나의 자기

계시(自己啓示)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21:4

선지자로 이루려 하심이라 – 마태가 예수의 사건이 구약성경의 본문의 성취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사용한 문구이다(1:22;2:15;4:14;8:17;12:17;21:4;27:9). 여기

서도 마태는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일이 바로 예수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實現)하는 것임을 나타

내고자 하였다. 즉 예수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바로 그 예언을 성취시킨 일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다.몇몇 사본에는 ‘선

지자’라는 말 다음에 ‘스가랴’나 ‘이사야’가 덧붙어 있다.

=====21:5

본절의 상반부 ‘시온 딸에게 임하나니’는 이사야 62:11를, 후반부는 슥 9:9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예언서들에 대한 정확하고 자구적(字句的)인 인용이 아

니라 다분히 신학적 관심과 의도가 첨가된 것으로, 예수의 나귀 입성을 사 62:11와 슥

9:9에 담긴 상징적인 두 의미로써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이 깃들인 마태의 주석

이라고 할 수 있다. 사 62:11의 구원 선포에 의하면 구원자는 마치 개선장군이나 정복

군주 또는 강력한 통치자의 모습으로 승리의 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 입성하고

있다. 한편 슥 9:9에서 메시야는 평강의 왕으로, 온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겸손히 입성하신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士師)들과 평화를 전하

는 전령(傳令)들이 사용하던 짐승인 나귀(삿 5:10;10:4)를 타고 오신다고 표현함으로

써 예수가 모든 피조물(被造物)들의 고대하던 진정한 구주이며 평화를 주시는 분이심

을 강조하고 있다.

시온 딸 – 예루살렘 및 그 주민 전체를 가리키는 구약의 시적(詩的) 표현이다. 특

히 ‘딸’이라고 하는 표현은 예루살렘이 이미 적(敵)으로부터 침입을 당하여 완전히 멸

망당한 것에 대해서 수치와 모욕을 당한 처녀의 심정으로 그곳 주민들을 상징한 것에

서 유래된 말로 ‘바벧론의 딸'(사 47:1), ‘두로의 딸'(시 45:12)의 표현도 있다. 한편

‘시온의 딸’을 거론하고 있는 사람의 의도에는 시온의 딸이 ‘누가 오는가를 알았을 때

크게 기뻐하리라’고 하는 생각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멸망의 참담한 폐허(廢墟) 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과 평화의 소식을 가지고 다가오는 메시야를 무관심과 신

앙의 상태에서 깨어나서 일어나 환영하라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또한 시온의 딸이

신약에서의 새이스라엘, 즉 교회에 적용되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헬라어 ‘카이'(* )는 ‘그리고’라는 뜻의 접속사이다. 어떤사람은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여 예수께서 ‘나귀 그리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번갈아 타시고 입

성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곧’으로 해석된 ‘카이’는 본래 ‘그리고’의 뜻인 히브리

접속사 ‘와우'(* )를 직역한 것으로 히브리어 ‘와우’는 ‘그리고'(and)의 뜻도 있지

만, 보다 상세한 내용은 부연(expatiation) 설명하는 절을 이끄는 경우에도 사용되었

다(히브리적 병행법)에 대해서 랑게(Lange)는 본문의 경우의 ‘곧'(카이)의 용법은 ‘보

다 자세한 묘사를 위한 해석’이라고 표현하였다. 더구나 출발지인 벱바게에서 예루살

렘까지는 1-3Km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나귀를 갈아탈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예수께서는 한 마리의 나귀만을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다고 하는 것이 올

바른 해석일 것이다.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 헬라어 ‘휘포쥐기온'(* )은 ‘짐을 나

르는 짐승’을 의미하는데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나귀(donkey)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막 11:2에는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으로 되어 그 순결성과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

으나 마태는 그 나귀가 아직 멍에를 메고 있지는 않으나 곧 무거운 짐을 메야 할 것임

을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나귀는 평화와 고난을 동시에 상징하는 짐승으로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예시(豫示), 상징하고 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멍에를

메야 할 나귀와 참으로 유사한 것이었다.

=====21:6

제자들이 명하신 대로 하여 – 이 구절은 제자들의 전체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부

분으로서 평행구절인 막 11:4-6에서는 이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21:7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 본문에서의 문제는 지시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아우톤'(* )이라고 하는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에 과연 그 지시대명

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우톤’이 (1) 나귀의 복

수, 즉 나귀와 나귀새끼(donkey and her colt)를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와 (2) 나귀 위

에 쌓아 놓은 겉옷들(garments)을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전자를 지

지하는 스트라우스(Strauss)는 예수께서 두 마리의 나귀를 함께 타셨다고 주장하며 프

릿체(Fritzsche), 플렉(Fleck#8), 알포드(Alford) 등은 예수께서 두 마리의 짐승을 번

갈아 타셨다고 주장한다. 후자를 지지하는 학자들로는 워즈워드(Wordsworth), 메이어

(Meyer), 카스탈(Castal), 베자(Beza), 플루머(Plummer)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두번

째 견해가 설득력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21:8

무리의 대부분(* , 호 데플레이스토스 오클

로스) – 정관사가 붙은 절대 최상급(最上級) 명사로 직역하면 ‘아주 많은 무리들’의

의미이다. KJV, NIV는 모두 ‘매우 큰 무리'(very great multitude;KJV, very large

crowds;NIV)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9절에 의하면 예수의 앞에서 가고 또 뒤에서 따

라가고 있는데, 요 12:12,13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 순례의 길을 나선 무리들

과 예루살렘 주민들로 구분될 수 있는 두 무리들이 모여 환호의 물결을 이루었으며 또

한 이들은 메시야를 대망(大望)하는 열정이 가장 고조된 상태에서 예수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겉옷을 길에 펴며 – 7절에서 제자들이 겉옷을 나귀 등에 얹은 것은 안장(鞍裝)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심히 부끄러운 가난의 표징’이라고 말하는 사

람이 있다(J. Calvin). 그러나 제자들의 이 행위, 즉 겉옷을 나귀에 얹어 놓는 것은

나귀를 탈 사람에게 대한 엄청난 경의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

도 있다. 한편 8절에서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예수를 왕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편 이와같은 사례는 왕하 9:13에서 예

후를 왕으로 선포할 때의 경우가 있었다. 여하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

여 순례의 길을 떠나온 종교적인 열망이 가득찬 이 무리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곧 로마의 압제(壓制)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

로 잘못 인식함으로써 예수를 평화의 왕이 아니라 정권을 잡을 통치자로서 환영하였던

것이다.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편 이와 같은 선례(先例)는

B.C. 165년에 성전을 재봉헌하고 시몬 마카베오가 입성하던 때에도 있었다(마카베오상

13:51;마카베오하 10:7).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초막절에 야

외에 초막을 짓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Lightfoot), 또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초막절기에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축제용의 작은 가지, 즉 ‘룰랍

‘(lulab)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막을 만들기 위한 나무는 달개지붕(lean-to)을

받쳐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큰 가지들이며 나귀 앞에 깔아논 가지들은 길가에 심

어놓은 종려나무의 잔가지에 해당한다(요 12:13). 여기에서 ‘베다’의 뜻인’에코프톤’

(* )과 ‘펴다’의 뜻인 ‘에스트론뉘온'(* )은 모두 미

완료형태의 동사로, 이 동사가 나타내고 있는 동작이 단 한 번에 끝나버린 과거의 행

위가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

라 예수를 옹위하는 무리들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어 나귀가 나뭇가지를 밟고 지나가는

것에 따라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나무에서 가지들을 꺾고 그것들을 자꾸 길에 깔아놓

는다고 하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낸다.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드는 것도 왕을 영접하는 고대의식중의 하나였다. 한편 가지를 흔든 이날

을 기념하여 초대 기독교도들은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불렀다.

=====21:9

소리 질러 가로되 – 무리의 환호 소리는 시 118:25,26에서 인용된 말이다. 시 118

편은 대찬양시(the Great Hallel), 즉 시 113-118편의 일부로서, 장막절, 수전절, 유

월절 때 사용되었다. 또한 무리들의 이 환호 소리는 예수 탄생시 천군 천사들이 불렀

던 찬양과도 흡사하다(눅 2:14). 한편 이들이 찬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길가에 있는

돌들이 오히려 소리질러'(눅 19:40) 인류 대속(代贖)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를 찬양하였을 것이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 )

를 음역한 것(삼하 14:4;왕하 6:26)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간구로 사용되었다

(Gundry, use of O.T.pp. 41-43). 차차 이 말은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기쁨, 환

호등의 의미가 함축된 일종의 구호(口號)가 되어 찬양의 송영이나 기쁨의 환호로 이해

되게 되었다(렘 31:7).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기쁜날에

해당하는 장막절의 일곱째 날을 ‘호산나의 날'(Hosanna Day)이라고 부른다.

다윗의 자손이여 – 마태에 의해 삽입된 호칭으로 그의 유대독자들을 의식하여 사용

한 표현이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어떤 사람도 결코 부정할수 없는 확고한

메시야에 대한 표현으로서 단순히 왕의 후손, 즉 왕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

서 예언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待望)해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고 하

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메시야 만세

‘의 뜻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말을 예수에게 대해서 사용한 것에 대해 심한 반

발을 보이고 있다(15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3절의 `주’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과는 달리 여기서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시는 이’라는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이 시 118:26은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서

로를 향해서 하는 인사말이었거나 혹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보일 무렵부터 기

쁜 마음으로 부른 노래였다고 한다.

=====21:10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장면(눅

19:41)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아마도 현재 ‘성 스데반의 문’이라고 불리우는

곳, 즉 성전 바깥 뜰로 들어가는 북쪽 입구의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을

것이다.

온 성이 소동하여 – 마태만이 언급한 이 소동에 대해 요 12:19에서는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고 표현하여 예수에 관한 소문으로 온 성이 들끓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

다. 사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 큰 명절을 지키기 위해 각 도시들에서 올라온 순

례자의 무리가 약 200-300만명 정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혼잡한 생활 가운데서 예수의

갑작스런 출현은 예루살렘을 극히 혼돈스럽게 했을 것이다. 전에 박사들의 예기치 않

는 방문으로 소동한 적이 있는(2:3) 이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군사지도자들은 ‘뜻하

지 않은 왕의 출현’으로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고 마음이 동요(動搖)되었으며 불안에

떨게 되었다.

이는 누구뇨 – 이 말은 예수가 실제로 예루살렘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

살렘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Bonnard). 이 말은 이런

큰 소동을 불러 일으킬 만한 사람인 이 사람의 정체(正體)가 과연 무엇인가하는 질문

이다.

=====21:11

무리가 가로되 – 예수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잘못된 대답, 즉 ‘선지자 예수’를

말한 것으로 보아 그 무리들은 갈릴리나 베다니로부터 예수를 좇아온 사람들이거나 아

니면 종려가지를 흔들고 예수를 영접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행렬 밖에 있던 사

람들로 예수를 메시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 이들의 대답에는 결코 선지자가 나올 수 없

는 천한 곳인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라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내포되어 있다. 이 선

지자가 종말론적인 선지자(the eschatological prophet)를 의미한다고 하는 암시는 결

코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의 대답 속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저를 메시야로 받

들고 있으나 실제로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는 강한 부정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이적(異蹟)을 행하고 그 가르침에 권세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을 보고(7:29)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만 또 한 사람의 선지자로 이해했을 뿐 고

대(苦待)해 온 메시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21:12

성전에 들어가사 – 마태와 누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에, 마가의 기

록에 의하면 입성하신 그 다음 날, 즉 월요일에 행해졌던 사건이다. 이 성전은 헤롯대

왕이 유대인들의 환심(歡心)을 사기 위하여 스룹바벧의 제 2성전을 개축한 것으로 주

전 19년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에 헌당되었고 주후64년에 이르러 완전히 새성전으로

완성되었으나, 얼마있지 않아(주후 70년)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멸되었다. 한편 예수께서 들어가신 곳은 ‘지성소'(* , 나오스)가 아

니라 ‘성전'(* , 히에론) 가운데서도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셨다. 이방인의

뜰은 지성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서는 특별히 먼 곳에서부터 와서 예

배를 드리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짐승, 나무, 새 포도

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賣買)되고 있었다.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 예수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권위를 위임받

고 있었다. 시장이 되어 버린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바꾸려는 예

수의 정화 행위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1) 대제사장 등 유대의 종교지도

자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칼빈(J. Calvin)에 의하면 성전에서 물건을 파

는 행위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도입되었다고 한다. 상인들은 장사할 장소를 얻기 위하

여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는데, 이 돈 중의 일부는 최종적으로 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의 돈궤에 들어가게 될것이다. 따라서 이 소매 상인들과 제사장들은 불가분의 관계이

며 그들의 상행위는 제사장들의 묵인과 권장 아래서 점차 커져갔는데, 특히 큰 명절

때에는 부당하게 가격을 매겨서 비싸게 물건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2)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희생제사를 거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전 정화 행위를 통해

서 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의 경배가 얼마나 구역질 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셨으며 성전이 물건 판매대와 환전대가 놓인 장터로 변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묵인할 수 없는 신성 모독(冒瀆)임을 보여주고 있다. 제물을 드릴

경우 그것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 대부분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산 경우는 의심

할 바 없이 깨끗하고 완전한 제물로 인정되는 반면에 집에서 가져온 제물들은 흠이 있

는 것으로 판단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실제로 성전에서 파는 제물들이 흠이 있고 잘못

된 제물일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까다로운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하

여 흠이 있는 제물을 그대로 제단에 바치곤 하였다.

돈 바꾸는 자들 – 출 30:13;레 27:3에 의하면 속죄제물의 값으로 다른 나라의 돈을

가져오는 것은 불법이었다. 돈 바꾸는 자들은 로마와 헬라의 표준화폐를 성전의 화폐

로 바꾸어 주었는데 이 화폐로 그들은 반 세겔(shekel)의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17:24-27).

비둘기 파는 자들 – 비둘기는 문둥병자가 치료를 확증받기 위해서(14:22)또는 여인

이 해산한 후 정결례를 행하기 위한 속죄제물로(레 12:6-8) 이용되었다. 그리고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신 드리는 제물이었다(레 5:7). 여

하튼 비둘기 등의 제물은 주로 여인들에 의해 판매되었다고 한다.

=====21: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사 56:7의 인용으로 `만민의’라는 용어가 빠진 문구이

다. 이사야의 본문은 이방인의 구원과 그들의 천국에서의 동참을 선포한 것으로 민족

주의적인 패쇄성이 극복된 문맥이며 하나님께서 성전을 이전 영광으로 회복하셔서 세

계 도처의 온 민족들이 그곳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마태의 문구에서는 성전의 본래적인 모습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와 예배 등이

행해지는 경건의 장소라고하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클레데세타이). 이는 `부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칼레오'(* )에서 유래한 말로 공공연히 선포되어 이젠 공식적으로

선언된 사실을 뜻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와 인준으로 인해 영원한 진리

로 인정되었음을 시사한다.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 렘 7:11의 인용으로, 예레미야는 성전이 악용되고 있

기 때문에 그 형벌로서 성전이 멸망당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유대에 있어서 강도의

굴혈은 보통 광야의 암벽에 있는 것으로 약탈자 혹은 열혈당원 등의 피난처가 되는 곳

이다. 렘 7:10에 의하면 사람들은 도적질과 살인, 간음, 거짓 맹세, 우상숭배를 일삼

으면서도 여호와의 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

편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주민들 중에도 예루살렘 안에서의 자신들의 부당한 행위는

성역(聖域)이라는 미명 하에 영원히 보호되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

수께서는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선언하심으로써 모든 장사꾼과 결탁

한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여질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도 또한 멸망될 것임을

암시하셨다.

=====21: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 마태만이 성전 안에서 아이들이 호산

나를 다시 외치게 된 치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눅 19:47에서는 예수께서 날마다 성

전에서 가르쳤다고 보고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는 예수께서 영적 소경이며 불구자들인

매매하는 모든 자들은 내어 쫓으시고 육신의 불구자들은 맞이하여 영을 고쳐 주는 기

이한 일을 행했다고 보고하였다. 즉 예수께서는 고침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성전을 기

도하고 찬양하는 집으로 만들게 하셨다. 또한 출입이 제한된 신체장애자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고침을 받게 함으로써 성전에 대한 그의 우위권, 즉 자신이 ‘성전 보다 큰이

‘(12:6)임을 입증하셨다.

=====21:15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 – `이상한’의 뜻인 ‘다우마시아'(* )는

비상한, 놀라운, 찬양할 만한 일들의 복수형으로서, 예수가 육체의 불구자들을 고치신

일 뿐만 아니라 성전을 숙정하신 일까지도 백성들에게 찬양받을 만한 일이었음을 암시

한다. 따라서 그가 행한 이러한 일련의 기이한 일들은 마땅히 메시야의 할 일들에 속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전에서 소리질러 하는 아이들 – 성전의 경내(境內)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성

전의 거룩함에 대한 모독이므로 즉각적으로 성전의 경비원들에게 제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승리의 입성시의 ‘호산나’ 찬미소리를 다시 한번 재현

(reappearance)하기 위하여 마태에 의해 특별히 첨가되었다. 예수를 반대하는 대적자

들이 아이들이 소리지른 것 그 자체를 제지하지 않고 다만 외쳐진 말의 내용에 대해서

분노한 사실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W. Argyle). 한편 소리를 지른 ‘아이’의 뜻

인 ‘파이디온'(* )은 젖먹이 아기인 `네피오스'(* )와는

달리 성전에서 율법과 탈무드를 배울수 있는 5세 이상의 아이들을 가리킨다. 잠 20:11

에 의하면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이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낸

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호산나 찬미를 기쁘게 여기셨다. 이미 소경들

(9:27;20:30)과 무리들(12:23), 이방 여자(15:22), 예루살렘의 무리들(9절)로부터 ‘다

윗의 자손’이란 메시야 칭호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이제 아이들에게까지도 찬미 받으심

으로써 명실공히 전유대인으로부터 왕이시요, 메시야라고 하는 고백을 받으셨다.

보고 분하여 –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분노는 예수가 성전을 숙정하신 일과 성전안에

서 불구자들을 고치신 일 때문에 발생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이적으로 인해

서 예수가 사람들로부터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수난 예고(16:21;20:18)에서 언급된

소위 산헤드린(sanhedrin) 공의회원들로 종교, 경제, 사회, 교육 등의 각 방면에서 고

유한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들의 감정을 자극시킨 성전에서의 이 사건은

곧 예수의 수난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21:16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 시 8:2의 인용이다. 일부의 해석자들은 시 8편이

메시야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는 견해를 피력(披瀝)하기도 하지만 이 시 8편은 예수께

서 자신에게 적용, 해석하심으로써 분명히 메시야적성격을 가진 것으로 취급(고전

15:27;엡 1:21;히 2:6)하셨다(F.J. Maloney). 다윗의 이시에는 원래 모든 혀가 침묵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을 빠는 젖먹이들을 들어 당신

의 능력을 선포하실 것이기 때문에 따로 대변자가 필요 없다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

었다(J. Calvin). 이처럼 이 시 8편은 주 여호와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삼은 고백이었

으나 예수는 이것을 자신, 즉 메시야에 대한 온전한 찬미로서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한편 앞 절에서 언급돤 대제사장들 및 서기관들과 대조되고 있는 이 어린아이와 젖먹

이들이라는 말은 11:25의 예수의 말씀(‘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을 상기시킨다. 한편 히브리어로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인 ‘올랄'(* )은 노닐 수 있을 만큼의 큰 아이를 의미하며 `야나크

‘(* )는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 여인들은 아이가 3살이 될때까지

젖을 먹인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본문에서 나온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간신히 노래

할수 있는 나이인 3살이상의 아이들로 보려는 델리취(Delitzsch)의 의견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들의 찬미는 그들이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부를 찬양을 암

시하며 예수는 이들 속에서 유대의 오랜 불신앙을 버리고 참된신앙 즉 예수를 메시야

로 고백하는 새이스라엘을 본다고 하는 어떤 학자들의 의견은 적절하지 못하다. 예수

의 말씀은 성숙한 어른의 찬양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돌들이 소

리 지르리라, 눅 19:40) 자기 스스로 찬양을 준비(準備)하시고 완전케 하신다고 하는

의미이다. 또한 젖먹이 아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울려 퍼진다고 한다면 이미 말할줄 아

는 사람들의 입에서 ‘호산나’ 찬양이 노래되어야 함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

분히 여겨 이를 갊’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 구약의 본문(시 8:2)에 의하면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

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報髓者)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

다’이다. 이 중에서 ‘권능을 세우다'(founded strength)이란 말씀이 70인역(LXX) 헬라

어 성경에서는 `찬송을 완전케 하다'(perfected praise)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마태의

본문에서는 구약과는 달리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힘찬 그리고 확신있는 ‘호산나 다윗

의 자손이여’라는 큰 찬송은 무지하고 불법한 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으나 동시에

예수에 의해 그들의 말을 잠재우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여기서 `온전케 하

셨나이다’의 뜻인 헬라어 `카타르티조'(* )는 본문에서 중간태형으

로 쓰여서(스스로를 위한 찬미를) `온전케 하다’ 혹은 `준비하다’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고 있는 레위자손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께서는 모든 만물로 하여금 당신만을 찬양하시도록 준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젖먹이 아이들로 하여금 그의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다고 하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시편 8편의 본문에서는 아이들의 합창이 대적자들의

입을 잠잠케 하지만 본문에서는 예수의 말씀이 그들을 침묵하게 하셧다. 즉 예수께서

는 아이들의 찬미를 기쁘게 받으심으로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

언된 메시야 찬양(`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사실, 곧

그들의 영적무지를 들어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21:17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유하시니라 – 아마도 예수는 감람산 동쪽 기슭의 나사로

와 그의 누이들의 집이 위치한 베다니에서 그의 수난의 마지막 며칠 밤을 유하셨던 것

같다(26:6;막 11:19;눅 21:37). 그가 예루살렘 성밖에서 숙박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1) 예루살렘성이 순례자들의 방문(訪問)으로 무척 붐볐기 때문에

베다니로 나오셨다고 하는 설이다. 로마 식민 시대 당시 유대 예루살렘의 명절에는 사

람들이 약 270만명 정도나 모였다고 한다. (2) 하나님이 정하신 때 즉 그가 체포, 구

금되고 사형의 시간이 될 때까지 유대 산헤드린이 그를 체포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위험한 예루살렘 성 안 보다는 성밖에서 유하셨다고 하는 설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 두가지 이유 때문에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셨을 것이다.

=====21:18

시장하신지라 – 이 구절 때문에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이른 새벽

에 나왔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와 베다니의 한 집에서 유숙하신 것이 아니라 길에서 노

숙(露宿)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또한 ‘시장하다’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

의 ‘인성'(人性)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께서는 신(神)이시며

인간의 육체는 임시로 취하셨기 때문에 아픔, 배고픔, 죽음등의 고통을 느끼시지 못한

다고 하는 가현설(Docdtism)을 반박할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 유대 율법에 의하면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다

고 하면 그 열매를 따먹는 일이 허락되어 있었다(신 23:24,25). 또 톰슨(Thomson)에

의하면 오늘날까지도 길가의 무화과나무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대로 취할 수 있도록 개

방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이 열매를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

고 부른다고 한다(Hendriksen). 여하튼 무화과나무는 풍요와 번영의 상징(왕상 4:25;

왕하 18:31)으로 나무 자체가 우람하고 보기에 아름답다. 밑 둘레의 굵기가 약 1m, 높

이가 5-6m나 되며 가지가 8-10m의 너비까지 뻗기 때문에 그 그늘은 기도와 명상과 휴

식의 장소로 이용되곤 한다(요 1:48). 또한 잎과 꽃이 무성하게 되었을 때 그 열매도

함께 열리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그 열매를 일년에 두번(태양력으로 6월과 9월) 혹은 세

번(6월과 8월과 12월) 딸 수 있다고 한다.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 푸른 빛깔을 띤 무화과열매들은 대개 6월까

지는 먹을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익지 않아서 6월에 먹기에는 매우 껄끄럽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었다. 따라서 보통잎이 있다는 것은 비록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매는 맺혔음을 암시한다. 마태는 이런 모든 것들을 그의 유대인 독자들이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라고 간결하게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막 11:13에 의하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본문의 해결점이 된다. 즉 그때가 무화

과의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왜 예수가 이 특별한 나무, 곧 잎이 무성하기 때문에 눈

에 잘 띄는 나무에 갔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 나무의 ‘잎들’은 바로 그것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의 시장기를 메

울 수 없으셨던 예수께서는 기억에 남을 만한 실물 설교의 기회를 포착(捕捉)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했는데, 그것은 제 철이든 아니든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열매가 있는양 무성한 잎만 자랑했지 실상은 아무 열매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6월에야 비로소 열매맺는 무화과나무임에도 불구하고 4

월에 벌써 그 잎을 냄으로써 ‘열매’에 대한 기대를 잔뜩 부풀리게 했던 이 나무는 다

음과 같은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1) 선민이라고 하는 자의식(自意識) 속에서 형식에

불과한 희생제사를 위해 부지런히 성전을 오고 갔지만 단 한 번의 진정한 희생제사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2)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신앙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이율 배반(二律背反)적인 생활 태도를 상징한다.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3) 크리스찬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사랑의 계명들은 실

천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찾는(7:21) 오늘날의 수 많은 교인(churchman)들

을 가리킨다.

이제부터 맺지 못하리라 –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틴에 있는 여러 나무들 중에서 사

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애용되고 있는 나무였으며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하곤

했다(호 9:10;율 1:7). 또 이 나무는 언약의 땅을 가리켜 ‘무화과나무의 땅’이라고 하

는 표현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며(신 8:8), 그 열매는 가나안으로 정탐(偵探)갔던 사람

들이 그땅의 비옥함과 번영을 증명하기 위해 가져온 산물(産物) 중의 하나였다(민

13:23). 그리고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평화와 안녕을 상징

하는 것이었다(왕상 4:25;미 4:4;슥 3:10). 그러나 여호와께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시고 쳐서 죽게 하실때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해당한다(시 105:33;렘 8:13;

호 2:12). 따라서 예수의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임박해 왔

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그가 삼년을 이곳 예루살렘에 와서도 열매(그리스도를 주로 고

백하고 따르는 제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나무(예루살렘)를 찍어버리겠다

고,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던 것이다(눅 13:7).

곧 마른지라 – 마가복음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그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곧 마르

지 않았다. ‘곧’의 뜻인 부사 ‘파라크레마'(* )는 물건을 살때 그 물건과

함께(`파라’) 돈(‘크레마’)을 지불한다고 하는 즉각적인 현금지불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의 본문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예수의 저주가 말해지는 동시에, 비록

그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연장일뿐 이미 그 본질상 마른나무로 바뀌었

다(교환)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사실은 결국 예수께서 지니신 신적 능력과

위엄을 보여 준다. 즉 예수께서는 종말의 때에 인류의 심판 주로 오셔서 그 외모(잎)

가 아닌 내면(열매)의 유무(有無)를 관찰하시고 그에 준해 심판하실 것이다.

=====21: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 막 11:21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 나무를 저

주하신 것을 생각해 내었다. ‘이상히 여기다’의 뜻인 ‘다우마조'(* )는

1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상(異常)하고 의아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워하

거나 찬양한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Moule, Idiom Book, p. 207).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 부사 ‘포스'(* )는 왜(why)의 뜻이 아니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how)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마를 수 있었는가 하는 감탄과 찬미가 섞인 물음이다. 그들은 예수가 무

화과나무를 저주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저주에 의해서 그 나무가 그대로

말라버린 눈 앞의 사실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1:21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믿음이 있고’는 가정법 현재시상이며 ‘의심치 아

니하면’은 가정법 부정과거시상의 중간태로, 믿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계속적인 결

단을 의미하며, 의심은 스스로와의 싸움이 과거의 단 한 번의 행동이 되어야 하는 것

임을 시사한다.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 눅 17:6에는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

에 심기우라’로 나타고 있는 이 실례는 마 17:20에도 등장하고 있다. 17:20에서는 효

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적은 믿음의 분량을 강조한 것에 반해서 본문에서는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Hill). 이 산이 뽕나무를 상징하는 것인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인지 혹은 감람산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관한 여러의견이 있으

나 감람산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런데 혹자는(Lane, Mark. p. 410) 이 감람산이

사해와 붙어있다는 이유로 예수의 이 말이 슥 14:4과 관련 있다고 보면서, 도래하는

종말론적 통치를 위해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것을 예수로부터 요청받고 있다고 하는

견해를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없어 보이는데, 왜냐하면 스가랴가 감

람산을 바다에 던지우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1:22

기도할 때에 다 받으리라 – 예수는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사건을 통해서 종말이

임박해 왔다고 하는 사실을 경고하는 한편 믿고 구하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교훈

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A. W. Argyle) 21절과 본문이 무화과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작업을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성전이 기도하는 집일 경우 그들이 준비한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서 다 받고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만 실제로 유대인들은 믿

음이 없기 때문에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열매없는 무화과나

무나 믿음없이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희생제사도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며, 반대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희생제사의 형식

을 갖추지는 못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열납(悅納)하시어 그분과 우리와의

화해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믿음’이란 결코

우리 스스로가 실제로 믿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 하나님의 뜻의 분별 및

그 뜻에의 순종과 관계된다(19:20).

=====21:23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 막 11:27에 의하면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이며 눅

20:1에 의하면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때로 시간적인 배경은 마가에 의하

면 화요일이 된다. 성전 곧 이방인의 뜰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그곳이 예루살렘이라

고 하는 점 때문에 그 주민들을 위한 본격적인 복음전파 행위가 되는 한편 또한 그곳

이 유대인 남자와 여자, 아이들 그리고 이방인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었

다고 하는 점에서 전세계인을 위한 복음전파의 사역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는 종교적 지위를 나타내

는 말이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이들 이외에도 서기관이 섞여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산헤드린(Sanhedrin)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복음

을 전파하고 그의 기이(奇異)한 교훈과 소문이 전파됨에 따라 그 소문의 진위(眞僞)를

파악하기 위하여 갈릴리까지 파견되었던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종교 진상조사단과 같은

임무를 띤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권위를 문제삼는 이들

의 메시지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도전이었고 이들의 숨겨진 의도는 예수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라고 하는 선언을 하도록 유도(誘導)하려는 것

이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이 첫번째 질문은 그리스도의 권세가 신적(神的)

인 것이냐 혹은 인간적인 것이냐 하는 것으로 10절에서 제시되었던 질문, 즉 ‘이는 누

구뇨’와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그들은 ‘이런 일’에 포함되고 있는 많은 표적을 보았

기 때문에 더이상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 2:18)라고 묻지 않고 대신

예수의 자격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음은 ‘이런 일을 하는 예수 당신은 스스로

를 하나님이 보내신 백성들의 선생이나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는가’의 뜻으로, 많은 표

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종교적 지위를 갖지 못한 예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강한 반발이 내포되어 있다.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 두번째 질문은 권세의 출처를 묻는 질문으로 첫번째 질

문 보다 본래적이며 그것을 포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대의 경우 백성들을 교훈할

수 있는 권한의 위임(委任)은 대개 산헤드린이나 탁월한 랍비가 그들의 정통적 교리의

정신에 입각하여 랍비가 될 사람의 교훈의 타당성을 시험하여 그 정통성이 입증된 후

에야 허락되었다고 한다(Edersheim). 물론 이 둘째 질문은 권세의 출처가 산헤드린이

냐 스스로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냐 사람에게서냐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

다. 따라서 예수의 답변도 이 두번째 질문, 곧 하늘에게서냐 예수 자신, 즉 사람에게

서냐에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21:24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이 질문은 동문서답도 아니며 대답을 회피하려

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저희들에게 가장 명확한 대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 하여금 묻는 바를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21:25

요한의 세례 – 세례 요한의 사역과 세례 요한과 예수와의 관계를 이중적으로 암시

하는 말로, 세례 요한은 그의 사역을 통해 참된 예언자로 대중적 인정을 받았었다. 그

리고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그를 믿어야할 것을 가르

쳤다(요 1:29-37;3:26-30).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여기서 ‘하늘로서’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로서’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완곡한 표

현이다. ‘하늘로서’라는 말은 저들이 용납해야 할 참된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사람

에게로서’는 저들이 무시할 만한 거짓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과 예수의 권위

의 출처는 동일한 곳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로서’였다.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 예수의 권위에 정면 도전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의 반격을 받아 스스로 딜레마(dilemma)에 빠지게 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

한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저희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계속해서’ 연구하는

모습을 ‘서로 의논하여’의 뜻인 ‘디엘로기존토'(* )의 미완

료시제가 잘 드러내고 있다.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 이는 예수가 대답할 것까지 미리 연구해 낸 말

이다. 즉 `요한의 세례’를 언급한 예수의 의도가 요한의 세례 및 사역의 주목적이 바

로 예수 자신에 대한 증거에 있다고 하는 점에 있다. 따라서 요한의 권위의 출처가 ‘

하늘에게서’라고 한다면 (1)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요한의 권위를 인정치 않았다는 질

책이 따를 것이며 (2) 그 다음에는 예수의 권위에 대한 의심까지도 책망받을 것이었

다. 그들은 바로 이것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21:26

백성이 무섭다 – 이 구절에서는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교만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그들은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위해야 할 하나님보다

는 오히려 상대적 존재인 인간들의 눈을 무서워했다. 백성들의 목소리는 종교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헤롯 궁전 내부에도 영향을 끼쳤다(14:5).

=====21:27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 가(可) 부(否)를 정하지 않고 모르는 척하는 이들의 위선

적인 태도는 참으로 악한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위선을 극복하는 답변 방법

으로 “오직 너희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7)고 가르치신 바 있다. 사실 국내의 종교 문제를 완전히 관장(管掌)하

고 있는 산헤드린의 직무 중의 하나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일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의 태도는 직무유기(職務遺棄)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고 있는 계시와 세례 요한의 증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책임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 것이다.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그들은 예수의 권위에 대해 질문을 제기(提起)했으

나 예수는 그들이 그런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를 문제삼으

셨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께서 그들의 답변을 거부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 `그러나’의 뜻인 접속사 ‘데'(* )는 앞의 문

장에 대한 반대 내용(역접)을 연결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알라'(* )와는 달리

앞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내용(전환)을 전개해갈 경우에 사용된다. 따

라서 이 문구는 ‘한편 다음과 같은 비유에 대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의

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확증시킬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라는 말은 마태가 예수의 비유를 소개할 때 혼히 사용하는 표현

(17:25;18:21)이다. 본 비유에서 이 말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역할 뿐만 아니

라 비유의 내용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므로써 이 산헤린의 공회원들로 하여금 비교적

객관적인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두 아들과 포도원을 가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상

징한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아버지’가 세리들과 창기들이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후

에는 믿고 따랐던 세례 요한을 상징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전자가 더욱 적

절한 해석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아들’이라는 표현을 법적 상속권이 강조된 용어 ‘휘

오스'(* )가 아니라 이 보다 훨씬 부드러운 단어인 ‘테크논'(* )

을 사용함으로써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비유의 이 두

아들들에 대해서 (1) 맏아들은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세례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

과 그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을, 둘째 아들은 스스로 죄

인임을 알고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온 세리와 창기를 상징한다는 견해

(Bruce, Calvin), (2) 맏아들은 이미 선민으로 선택받았음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둘째

아들은 새이스라엘 백성이 되려고 주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하는 주장

(Plummer)이 있다. 어찌되었든 본문에서 마태는 이 두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세례 요한과 예수를 거절한 유대지도자

들과, 율법을 완전히 실행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으나 예수

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서로 상반(相反)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

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 구약에서는 흔히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상징

적 표현이 되었는데(사 5:1;렘 12:10), 신약에서는 교회 혹은 세상의 의미로 사용되었

으며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든지 간에 그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다. 한편 ‘오늘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령은 긴박성(緊迫性)

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이미 어떠한 개획(schedule)이 있든지간에 이에 상관

없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할것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웃 사랑을 통한 복음전파의

사역은 그 일을 맡은 주의 성도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부여(附與)되고 있는 긴

급명령이다.

=====21:29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순종이 표현되고 있는 이 대답에는 ‘

내가(* ) 틀림없이 가겠다’고 하는 확신과 자발적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맏아

들은 부르심이 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응답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복종할 생

각도 없었고 이에 대해 뉘우칠 마음의 변화도 전혀 없었다. 이 모습은 바로 성전 안에

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 맹세를 이행치 않는

서기관, 바래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21:30

싫소이다 – 아버지의 면전에서 그 명령을 단호히 거절하는 이 표현은 어쩌면 하나

님 앞에서 공공연한 죄를 짓는 것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

어 아버지의 명령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명

령은 다른 모든 해야할 일보다 우선 순위에 있는 것이므로 ‘싫다’고 거절한 태도는 어

쨌든 잘못된 것이었다.

뉘우치고 갔으니 – 뉘우친 것에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다. ‘뉘우치다

‘라는 말에 사용된 ‘메타멜로마이'(* )는 마음과 생각과 의지

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가리키는 ‘메타노에오'(* )보다 약한 의미로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후회, 뉘우침, 나중에 유감(遺憾)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타멜로마이’, 즉 ‘뉘우치고’가 꼭 회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

도 뉘우쳤으나 스스로 목매어 죽어 버렸다(마 27:3-5). 그러나 본문의 둘째 아들은 양

심의 가책을 느낀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장소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의지’

를 실행하기 위해 포도원으로 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 전체, 즉 ‘뉘우치고 간’

바로 그 행동 자체가 올바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에오’가 되었다. 매튜 헨리

(Matthew Henry)에 의하면 ‘뉘우침’이란 말에는 ‘때늦은 지혜와 병 치료 후의 몸조리’

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 두 아들은 모두 죄인이다. 맏아들은 아

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은 거짓과 위선의 죄를 범했으며, 둘째 아들은 아

버지의 명령은 완전히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였다. 맏아들은 예의바른 자이지만 정직하

지 않은 자이고, 둘째 아들은 정직하지만 고집이 세다. 예수께서는 이 물음을 유대교

권주의자들에게 제기하심으로써 그들이 답변을 통해 스스로의 정죄를 선언하게 하셨

다.

세리와 창기들이 – 일종의 이스라엘의 천민 계층으로 그들은 완진히 죄인들이요 소

외받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 사회의 쓰

레기들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지던 부류이다. 한편 ‘세리’라는 말인 ‘텔로네스'(*

)는 ‘통행세 등을 착복하는 자들'(RSV, tax collector)로 보통 ‘강도’라는 말과 동일

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취급될 정도였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앞서가다’, ‘앞으로 인도하다’의 뜻인 ‘프로

아고'(* )를 ‘너희 보다 먼저 들어가리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세리와 창기

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만 ‘너희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하

는 사람이 있다(Bonnard, NIV도 이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이 유대종교지도자들, 율법주의자들에게도 여전히 소망이 되는 말씀이며 그들의 회

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먼저 회개하는 자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따

라서 나중에 회개하는 자들은 나중에라도(시기가 너무나 늦은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

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도 암시하고 있다.

=====21:32

요한이 의(義)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 두 아들의 비유와 23-27절의 예수의 권위

에 대한 논쟁과 연결시키는 구절이다. 요한은 회개한 죄인들이 지금 들어가고 있는 하

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쳤었다. NIV는 ‘요한은 의의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왔다’고 번역하였으나 ‘의의 도로 왔다'(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righteousness)고 함은 아마도 (1)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의미와 (2) 요한은 의로운 일을 행한 자, 즉 ‘의인’이었다고 하는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사실 `의’를 뜻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실행되는 의'(rightousness that is peacticed),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을 의미

한다(Hill, Przybylski). 따라서 요한이 의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

는 것은 요한의 사역과 죽음을 의로운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요한이 증거한

예수의 사역조차도 의로운 것임을 믿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의’는 좁은 의미의 윤리

(倫理)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넓게는 예수를 믿고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21:33

산울 즙 짜는 구유 망대 – ‘산울’은 야생동물이나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가시나무와 같은 식물로 두른 울타리나 또는 돌담을 가리킨다. 또 ‘즙 짜는 구유

‘(winevat)란 돌이 많은 땅을 원형으로 판 한 쌍의 옹덩이로 크고 깊은 것은 포도를

짜는 틀(히브리어로는 ‘갓’이라고 부름)로 사용하고 그 보다 작고 긴것은 도관을 통해

흘러나온 즙을 받아 놓는 (히브리어로는 ‘예케브’라고 부름)로 사용한다. 한편 ‘망대’

는 파수꾼이 약탈자와 이리, 여우의 침입을 막고 경고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것으로

때로는 포도나 포도즙을 저장해 놓는 창고 역할도 하였다. 구약 시대의 경우 포도원의

망대는 그 당시의 세워진 명물 중의 하나로서 때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포

도원 주인이 포도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비해 놓은 이 시설들에 대해서 칼빈(J.

Calvin)은 백성들의 신앙을 율법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보강(補强)하기 위해 덧붙여진

제사와 기타 다른 여러 의식(儀式) 등과 같은 ‘보조수단’이라고 보았다. 한편 벴겔

(Bengel)은 산울은 율법을, 즙 짜는 구유는 예루살렘성을, 망대는 성전을 상징하는 것

으로 각각 이해하였다.

세(貰)를 주고 타국에 갔더니 – 예수 당시에는 외지(外地)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로마인이 팔레스틴의 경작지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따라서 이 부재지주(不在地

主)로 인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러한 상황 설정(設定)

은 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소작지대'(小作地代)의 경우 주인과

소작인이 나누는 비율은 보통 반반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본문의 ‘타국에 가다’에 해

당하는 헬라어 ‘아포데메오'(* )의 문자적 의미는 ‘멀리 떠나있다’

혹은 ‘여행하다’로 본문에서는 집주인이 당분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집주인이 모든 설비를 구비해 놓고 가꾸던 포도원을 그

농부들에게 맡기고 오래 떠난 것으로 보아 그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가하는 사실

을 암시하고 있다. 주인의 오랜 여행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포도원의 나무들은 갓 심

은 포도나무들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갓 심기운 포도나무일 경우 첫 열매가 열

리기까지는 적어도 2, 3년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21:34

실과(實果) 때가 가까우매 – 과실을 얻을 만한 때를 가리키는 말로, 팔레스틴의 포

도는 대개 7월부터 포도송이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다음달 8월이면 작은 포도송이가 완

전한 포도알이 되어 보통 9월에 따게 된다. 본문에서의 이 말은 성도들이 부지런히 성

결의 삶을 살므로써 ‘성령의 열매(갈 5:22)를 얻게 되었을 때’ 혹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게 되었을 때’등을 의미할 수 있다.

그 실과를 받으려고 – 마가복음에는 ‘포도원 소출 중 얼마'(막 12:2)로 표현되고

있으며, 소작료를 지불할 때는 계약에 따라 돈이나 생산물 중의 일부로 지불하는데,

계산 방식은 (1) 수확량의 일정비율로 서로 나누거나 (2) 풍작이든 흉작이든 정해진

양의 소출(所出)을 바치는 경우가 있다.

자기 종들을 보내니 – 마가와 누가는 한 번에 한 명씩의 종를 보냈다고 기록했으

나 마태는 한 번에 여러명의 종을 보내었다고 하였다. 아마 마태는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이같은 복수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렘 35:15에

의하면 여호와는 그의 종 모든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악의 길

에서 돌아서게 하려 하였다.

=====21:35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거늘 – 마가와 누가는 심히 때리고 소작료도 주지

않고 거져 보냈다고 표현한데 반해서 마태는 매를 맞은 사람, 죽임을 당한 사람, 돌로

맞은 사람 등등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농부들의 악행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

다. 본문의 세 가지 행악이 거론된 것에 따라 처음 주인이 보낸 종들이 다만 3명에 불

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어떤 사람은 때리는 것은 예레미야가 당한 것에(렘

20:1,2), 죽인 것은 이사야에(히 11:37), 돌로 친 것은 스가랴(대하 24:20,21)에게 관

련시키지만 이러한 고통을 당한 선지자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따라서 각각의 행

악들은 모든 선지자들이 각각 당하였던 행악(行惡)과 박해(迫害)의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거론된 것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본문과 연관시켜 심한 채찍질하는 것(문자 그대로는 가죽을

벗겼다는 말로 피가 흐르도록 때리는 태장(苔杖)을 가리킨다. 고후 11:24 참조), 살해

하는 것, 죄인처럼 돌로 치는 것 등의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니 –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1:37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 이 비유의 클라이막스(climax)에 해당하는 부분으

로, 아들을 보내기까지의 주인의 태도는 자신이 고용한 악한 농부들에 대한 지극한 인

내심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농부들의 철저한 사악함이 저절로 드러나고

있는 문구이다.막 12:6에 의하면 이 아들은 ‘사랑하는 아들이며 최후로 보낸 사자(使

者)’에 해당한다. 그러나 주인이 보낸 같은 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종으로,

예수는 아들로서 비교되었다.

=====21:38

이는 상속자니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 악한 농부들은 마땅히 주인에게 갚아야

하는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 뿐만 아니라 포도원의 소유권을 빼앗으려고 모의

하였다. 예수께서는 여섯달 동안이나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종교당국자들

이 자신을 죽이리라고 하는 예언을 해 오셨는데(16:21;17:23;20:18), 이제 당사자들

앞에서 그들의 속생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셨다. ‘자 죽이고’라는 표현은 요셉의 형

들이 그의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할 때 사용하던 용어를 연상케 하는 것(창

37:20)이다. 특별히 이 용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불법적으로 모인 공회에서

예수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밀때 그대로 사용되었다(요 11:47-50).

=====21:39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 마가복음의 경우 포도원 안에서 죽이고, 밖에

내던졌으나 마태와 누가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바뀌었다. 이는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요 19:17;히 13:12) 예수의 수난사건과 이 비유를 좀더 연관

되게 하기 위해서 마태와 누가가 각색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A. W. Argyle),

또한 알포드(Alford)는 예수께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넘겨져 심판받은 사실을

암시한다고 본다.

=====21:40

주인이 올 때에 – 주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성령 혹은 부활하신 성자의

재림), 또는 그 시기가 언제인가( 예루살렘 멸망때( 혹은 최후심판 때)하

는 물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징벌의 때가 임했음을 알리는 표현이다.

=====21:41

이 악한 자들을 진멸(殄滅)하고 – 비록 이 결론은 예수의 비유를 듣는 종교지도자

들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 내리신 결론으로, 예수와 그들은 동일

하게 악한 농부를 정죄하고 있다. 한편 ‘악한 자들을 진멸한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헬라어 ‘카쿠스 카코스'(* )의 뜻은 ‘악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면서 파멸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NIV에서는 유사음을 사용한 헬라어의

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 ‘비참한 종말을 당하게 하다'(wretches wretched end)의

의미로 번역해 놓고 있다.

=====21:42

너희가 성경에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이 표현은 신약성경 중에서는 예수의 입을

통해서만 나오는 표현이다(12:3;19:4;21:16;막 12:10). 예수께서 이러한 말을 하시는

경우는 모두 성경이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경우이다. 본문의

내용은 시 118:22를 인용한 것으로, 행 4:11;엡 2:20;벧전 2:7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척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그를 영접함을

표현하는 증거로서 사용되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 – 시 118편은 다윗이 모든 건축자들, 즉 사울과 그 추종자들의

세력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쫓겨 다니는 삶을 살았으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왕

으로 세우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견고케 하셨다고 하는 내용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시는(118편)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된 것으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여

러 강대국으로부터 학대와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퉁이의 돌, 즉 선택

받은 민족으로 삼으시고 축복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예수 당시의 건축자들, 즉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등의 지도자들은 다윗의 원

형(原形)이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되신 예수를 내어 버렸다. 예수는 ‘건축자들의 버

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는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본 비유에서 당신께

서는 악한 농부로 비유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에 의해 새이스라엘을 건설할 그들의

메시야로서 적합치 않다고 하여 버림을 받은 돌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지붕이나 건물 바깥계단 혹은 성벽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돌(Derrett)로, 건물의 상부구조를 유지하고 그 모양을 결정짓는다. 따라

서 다른 모든 돌들은 이 돌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스라엘

과 예수, 모든 성도와 예수와의 관계가 건축물과 모퉁이 돌과 같음을 시사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건축의 비유는 교회의 그것에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분명 예수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신 동시에 교회의 머리, 즉 교회의 주인(골 1:18)이시

다. 따라서 모퉁이 돌의 비유는 교회론적인 것인 동시에 기독론적인 것이다. 실로 하

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의해 배척당하신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사 영광받게

하셨으며 신령한 건물로 지음을 받는 영적 공동체인 성도들의 모임에 모퉁이 돌이 되

게 하셨다(엡 2:20-22)

=====21:43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 –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치가 유대 지도자들의

권세 밖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

로서의 자격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혈통상의 전환을 의미하

지는 않는다(행 13:46;18:5, 6;벧전 2:9).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의 권세로 율법을 전

달하던 특권을 가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 권한을 박탈당하고 그 나라의 의와 성

령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이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특권과 사명을 갖게 되었

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빼앗긴 너희’는 율법사, 서기관 등이며 하나

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로 볼 수 있다.

=====21:44

이 구절은 사 8:14, 15와 단 2:35의 내용을 그 배경으로 한다. 실로 예수는 모퉁이

의 돌로서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지만 악한자들에게는 멸망을 가져다 주는 돌이 되신

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칼빈(Calvin)은 이 돌을 유대 백성들의 외고집의 돌멩이로

이해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견고하심으로 그돌을 파멸케하시고 더욱 더 영광을 얻

으실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 돌위에 떨어지는 자’와 ‘이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의 경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견해들이 있다. (1) 전자를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자라고 보고, 후자는 그리스도예

수의 비천한 출생과 지위 때문에 실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를 향해 공

격적으로 대적해 오는 자라고 하는 견해(A.C.Williams)와 (2) 전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歪曲)된 지식으로 인해 그를 용납치 않는 자, 후자는 예수와 그의 말씀을 전면적

으로 부정하는 자라는 견해(Bruce)와 (3) 전자는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해

모의를 꾸미는 사악한 자들이며, 후자는 그리스도를 넘어 뜨리려고 질주(疾走)해 오다

가 그분께 떨어지는 자, 즉 그 분의 강력한 반격(反擊)을 받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

고 보는 견해(Calvin)와 (4) 전자는 그돌에 대해서 반항하는 자, 후자는 그 돌이 추궁

하여 심판한 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Barclay)가 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의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예수의 심판 선언의 맥락 속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 ‘돌 위에 떨어진다’고 함은 예수의 말씀을 믿지 못하

는 그들의 불신앙이 스스로에게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박살내다’로 번역되는 헬라어 ‘쉰들라스데세타이(*

)가 의미하는 바는 그대로 해를 당하여 파멸에 이르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의 뜻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종말의 때를

예언하시는 것으로, 그날에 악한 자들은 키질의 결과로 날아가 버리는 쭉정이와 같이

구별되어 영원한 불구덩이로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3:12;시 1:4).

=====21:45

비유를 듣고 – 지금까지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 두 비유는 어디까지

나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경고의 말씀이다. 두 비유를 통해 드러난 사

악한 인물들이 바로 종교 지도자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듣고

아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잘못된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하기는 커녕 오

히려 예수를 죽이고자 완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1: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지금 예루살렘 성안

에 있으므로 성전 경비원을 불러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

한의 경우와도 같이 예수를 의의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 하여 공식

적인 석상에서 체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훗날 가룟유다의 배반에 의해 산에

계신 예수를 밤에 은밀히 체포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이것은 백성들에 대한 예수의

지지도(支持度)가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요 11:53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의회원들도 나사로가 부활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謀議)하

고 그 명분을 찾기 위해 계속 예수를 따라다녔음을 보게 된다. 실로 그들에게는 이미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를 체포하기 훨씬 이전부터 예수를 죽일 죄목과 명분이 구상, 모

의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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