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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뜻 | [3분 묵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_홍익학당.윤홍식 상위 227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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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의 근거가 되고, 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증거하는 일이니..’ 즉 ‘믿음으로써 무언가를 바라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증거한다’는.. 성경말씀을 함부로 건드리고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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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09 요한계시록) \”믿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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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7) – 히브리서 큐티(수정)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의심할 수 없이 확고한 실체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어서 내 눈에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세상에 있는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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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8/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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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6 KRV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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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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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5.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 Pensées

믿음이란 단어의 뜻을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를 사용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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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8/10/2022

View: 2791

믿음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 네이버 블로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에서 실상이란 말의 원어는 hypostasis 영어로는 substance(실체) 혹은 confence(확신)이다. 영어 속의 의미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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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8/2021

View: 725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 좋은친구교회

바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브리서 구절이다 … 막상 이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가 했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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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odfriendchurch.com

Date Published: 3/29/2021

View: 6207

[2014.08.10]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히브리서 11:1~10)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은 믿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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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ong.org

Date Published: 9/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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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묵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_홍익학당.윤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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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뜻

  • Author: 홍익학당
  • Views: 조회수 4,993회
  • Likes: 좋아요 98개
  • Date Published: 2018. 9.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Y1CYqLoe7I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이 암송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제대로 설명하기는 좀..

우선 ‘실상’이 꽤 어렵다. 흔히 믿음은, 어떤 실상이 따로 있(다고 보)고 그 실상을 믿거나 말거나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믿음이 곧 실상’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또 간혹 ‘우리가 지속적으로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걸 보면 우리에게 실상(!) 믿음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식으로 기가 턱 막히게 풀이되는 걸 보게 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또한 그렇다. ‘믿음이란 게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잘 증거한다’면 모르겠는데 ‘다름 아닌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니.. ‘세상에 보이지 않는 게 참 많은데 그 온갖 보이지 않는 것들은 다른 것 볼 것 없이 믿음이라는 개념의 존재만으로 입증 가능하다?’ ‘믿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인다?’ 내게 이런 믿음이 없지 않다고 종종 생각하기는 하지만..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영어성경의 가장 굵은 뿌리이며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 KJV)을 찾아보면, 지금 묵상하는 이 구절이 영어 흠정역에서 우리말로 거의 직역된 결과라는 느낌을 매우 강하게 받게 된다. 우리말 개역을 애써 의지하지 말고 영한사전만 펼쳐놓은 채 이 구절을 다시 음미해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체? 핵심? 질료? 근본? 근거?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

substance와 evidence는 운율을 맞춰 사용된 표현인데, 운율만 놓고 봐도 ‘실상’보다는 ‘근거’가 ‘증거’와 호응이 더 잘 되고 의미도 더욱 분명히 와닿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근거요.’ 다시 말해 (뭔가를) 바란다는 것은 믿음을 근거로 한다, 즉 믿으니까 뭘 바라게 된다는.. 해석이 훨씬 자연스러워지고 오해의 여지가 한결 줄어든다.

그러면 ‘증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증거(evidence)’를 기준 삼아 ‘근거’라는 새로운 해석도 유추해 냈는데 이제 와서 ‘증거’를 다른 말로 바꾸기는 좀 그렇고..

‘증거’를 ‘증거의 결과나 수단’으로 보지 말고 ‘증거 행위’로 이해하면 길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증거’를 ‘증거물’이기보다 ‘보증’ 또는 ‘증언’ 같은 ‘증거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게 숱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일일이 증거가 돼 주어야 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고, ‘믿음, 소신, 신념, 확신 등을 가진 사람은 갖은 보이지 않는 것도 힘써 증거한다’는 식으로 좀 더 자연스럽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지?

다 합치면 어떻게 될까? ‘믿음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의 근거가 되고, 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증거하는 일이니..’ 즉 ‘믿음으로써 무언가를 바라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증거한다’는..

성경말씀을 함부로 건드리고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나름 엄밀하게 따져 보았지만 여전히 위험성이 있음을 느낀다. 내 수준에서 하나님 말씀이 자연스럽게 다 이해가 된다는 것도 어찌 보면 문제다. 내가 하나님보다 수준이 높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Now faith is confidence in what we hope for and assurance about what we do not see.

‘믿음은 바라는 것에 대한 확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보장이다’. 영어성경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역본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에서는 나의 고민이 이미 어지간히 다뤄지고 일정하게 해결돼 있는 것을 본다. ‘evidence’와 운율은 같게 그대로 유지하면서 ‘substance’를 오역의 여지가 한층 적고 의미가 더욱 분명한 ‘confidence’로 바꿔 줌으로써 결국 흠정역으로 따져본 것과 다분히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알쏭달쏭함 가운데 가득했던 말씀의 신비함이 –그래서 뭔가 좀 더 있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허탈하게 사라진 느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이러한 해석이어야 이어지는 내용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고 믿음의 참된 본질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믿음은 내가 바라는 걸 있는 대로 이루어 주는 신비의 주문 같은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 근거해 바랄 것을 바라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착한 행실 가운데 드러내 증거함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일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7)

* 오늘의 말씀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브리서 11:1~7)

* 본문요약

※ 그동안 우리는 히브리서 3장부터 10장까지에서 구약의 대제사장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길고도 자세한 히브리서의 호소와 증거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인 10:32~39에서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니 어떤 시련이나 환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도리를 끝까지 붙잡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자고 다시 한 번 호소하였습니다.

이제 11장에서 구약의 백성들의 삶을 예로 들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믿음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을 손에 잡히는 현재적 실체와 같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으며,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도 않는 일에 경고를 받아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찬 양 : 342장(새 543) 어려운 일 당할 때

344장(새 545)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 본문해설

1. 신앙의 본질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입니다.

2) 선진들이(믿음의 선조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절) : 엘피조메논, 휘포스타시스

⚫ ‘바라는 것들’에 해당하는 ‘엘피조메논’은 현재분사로

계속해서 줄곧 소망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 ‘실상’에 해당하는 ‘휘포스타시스’는

‘의심할 수 없이 확고하게 구축된 객관적인 실체,

사람의 생각에 따라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객관적인 실체,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3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할 때

‘본체’의 뜻으로 휘포스타시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의 심판이나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일이니 아직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현재 생활 속에 현실화된 실상으로 그 구체적인 실체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확실하게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절) : 프라그마톤, 엘렝코스

⚫ ‘보지 못하는 것들’에 해당하는‘프라그마톤’은 ‘사실, 행위, 사건, 업무’로

하나님 나라나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사건으로 장차 다가올 주님의 재림과 심판의 때를 뜻하고,

⚫ ‘증거’에 해당하는 ‘엘렝코스’는 법률 용어로,

‘그것이 객관적인 실체임을 증명하는 것’을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였다’의 뜻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주님의 재림과 심판,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치 실험을 통해 얻은 확실한 증거처럼, 분명한 증거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확실한 증거물처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2절) : 에마르튀레데산

‘증거를 얻었다’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레데산’은 1절의 ‘엘렝코스’와는

전혀 다른 말로 ‘증거하다, 입증되다, 인정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선조들이 1절과 같은 믿음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2. 아벨, 에녹, 노아의 믿음(4~7절)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 하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셨습니다(그의 예물을 받으시고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 가셨으므로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증거를)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하여 경고하셨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그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 상주시는 이심을(6절) : 미스다포도데스

‘상 주시는 이’에 해당하는

‘미스다포도데스’는 ‘보상하는 자, 임금을 지불하는 자’를 뜻하는 것으로,

주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 자신을 상으로 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 묵상 point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절)

믿음이란 우리가 꿈에도 바라고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를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의심할 수 없이 확고한 실체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어서 내 눈에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확실히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그 하나님 나라를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2)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1절)

우리가 믿는 모든 것들은 다 장래의 일이므로 지금은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는 것도,

구원 받은 자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과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들어가게 될 지옥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이 모든 것들을

분명한 증거를 가진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단순히 그럴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장차 들어가게 될 그 하나님 나라가 지금 나의 현재 속에 함께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가 뜻하는 의미합니다.

예배드릴 때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처럼,

그 천국이 오늘 이 예배드리는 이 현장에 우리와 함께 하는 것처럼 믿고

그 기쁨을 주님께 표현합니다. ➠ 이것이 믿음이고 예배입니다.

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절)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저 우주의 별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 묵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보다 더 확실히 믿고 의지합니다.

내 눈 앞에 있는 것들은 곧 낡아져서 없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미래의 일을 확신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미래의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13).

그것을 바라며 마음속에 항상 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로마서 8:24~25)

2.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6절)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2절)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등 구약의 선조들이

이 믿음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고, 믿음으로 주께서 가지신 완전한 의를 선물로 받으며,

믿음으로 우리가 완전한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만한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말하기 전에 일반적인 믿음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1)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만 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멈춘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1 더하기 1은 2’ 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수준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지식을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는 믿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위의 경우보다는 조금 나은 것입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만 믿고,

그 사랑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내 문제를 간구하고 응답 받는 것에만 익숙해있습니다.

주께 나를 드려 헌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께 도움만을 받고 편안하게 예배드리기를 원할 뿐입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힘든데 나에게 더 무엇을 원하느냐는 식의 믿음 역시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3)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믿음

정통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무조건 ‘이단(異端)’으로 몰아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 때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믿음과 같은 것인지,

내가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말씀으로 자신일 비추어보아야 하는데,

이런 자들은 자기 생각이 가장 옳다고 믿고,

자기 생각과 다른 의견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신앙입니다.

마치 이슬람의 과격주의자들처럼 파괴적인 자들이 되기 쉽습니다.

4)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나를 드려 헌신하는 믿음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 헌신하며 영광 돌리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참된 믿음입니다.

내가 주께서 말씀하신 그 믿음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항상 자기 생각을 말씀에 비추어보고 묵상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은 항상 그때그때 회개하여 자기의 영을 정결하게 유지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께 찬양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6 절 )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을 찾고 또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주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찾고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말씀만을 믿고 행동하는 신앙

1)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려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4절)

아벨의 믿음은 예배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야 할 곳이

바로 예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자기의 양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단순히 좋은 것을 드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예배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였습니다.

아벨이 양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드린 것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예물 속에는 기쁨과 헌신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죄와 허물을 해결하지 않은 채 그저 와서 예배만을 드렸습니다.

예배에 참여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헌신도 기쁨도 없이 그저 예배에 참여만 했을 뿐입니다.

➠ 예배가 중요하지만 , 그렇다고 해서

예배 드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요술방망이는 결코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나의 예배를 통해 기뻐하심을 얻은 후에 그 영광이 우리에게 내려질 때

아벨처럼 주께 그 믿음을 인정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내가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먼저 회개하여 나의 영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벨처럼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 속에

나의 감사와 기쁨과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주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때

우리도 아벨처럼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며(5절)

에녹은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에녹에게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에녹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채로 그대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에녹에게 이런 특별한 선물을 주신 것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경고를 받아(6절)

노아 때에는 비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2:4을 보면 그 때에는 온 땅에 안개만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경험한 일이 없으니 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비가 와서 물이 산을 덥게 된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가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한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어 온 가족을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 묵상 :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는다면 그 믿음 있음을 행동으로 보이십시오.

믿는다면서 그 믿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거짓 믿음이 됩니다.

당신의 믿음이 산 믿음이라는 것을 당신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십시오.

* 기도제목

1.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아벨의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2. 에녹처럼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3. 노아처럼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고 신뢰하게 하옵소서.

4. 중보의 기도 : 육의 일에 분주하여 믿음의 길을 걷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히브리서 11: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

히브리서 11:1-6 KRV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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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5.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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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오늘은 히브리서 묵상 25번째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함께 나눕니다.

1. 말씀 읽기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2. 묵상

히브리서 11장은 성경에서 가장 다이나믹하면서 중요한 장입니다. 교회를 다닌다면 히브리서는 몰라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들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가장 위대한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이 가지는 독특함과 위대함을 자주 간과합니다. 오늘부터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히브서 11장의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1) 믿음은 무엇인가 ?

첫 번째 주제는 ‘믿음은 무엇인가?’입니다. 믿음이란 단어의 뜻을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를 사용하며, 영어의 ‘faith’의 어원이자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스티스’(πίστις)는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神)에 대한 믿음, 어떤 사람에 대한 신용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들은 영어 faith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간략하게 우리가 아는 ‘믿음’이란 의미로 받아도 될 것 같습니다.

‘바라는 것들’(ἐλπιζομένων)은 소망이란 단어에 뿌리는 두고 있습니다. ‘기대하고 갈망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는 중성 복수를 사용하여 ‘장차 올 세상’(2:5)이나 ‘영원한 안식’(4:1-11), ‘영원한 유업’(9:15), ‘하늘의 예루살렘’(12:22-24), ‘흔들리지 않는 나라’(12:38) 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상’(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은 ‘아래에 서다’에서 온 말로 ‘확신하다’는 뜻입니다. 왜 실상이라고 번역했는지 알 수없는 노릇이지만, 의미가 약간 다릅니다. 윌리엄 L. 레인은 실상을 ‘의심할 수 없이 확고하게 구축된 객관적 실체를 지칭’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확고하기 때문에 ‘실상’이라고 번역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갖는 몇 가지의 특징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ㄱ. 믿음의 주체

믿음은 주체는 자신입니다.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ㄴ. 믿음의 속성

그 다음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믿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ㄷ. 믿음의 대상(내용)

마지막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 또는 믿음의 내용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내용(약속)과 그 내용을 약속하는 존재인 하나님으로 구분됩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믿음의 대상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형성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정의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은 것(πρᾶγμα)들의 증거’라는 표현은 직역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유의해야할 단어는 ‘증거’(ἔλεγχος)입니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엘레그코’(ἐλέγχω)에서 왔습니다. ‘엘레그코’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폭로한다’는 뜻입니다. ‘증거’(ἔλεγχος)는 법정적 의미로서, 판결하다고, 폭로하다. 증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맥에 맞게 다시 풀어내 본다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확신(실상, ὑπόστασις)하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논리적으로 따져서 명백하게 선언(증거, ἔλεγχος)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해 정의하면서, 그것은 마음으로 확신하며, 이성과 삶으로 증명해 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2) 선진들이 얻은 증거

‘증거를 얻다’(ἐμαρτυρήθησαν)는 말은 ‘증거’ ‘증인’ 의 뜻을 가진 ‘마르투레오’(μαρτυρέω)에서 왔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입니다. 그들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도행전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 또는 제자들을 ‘예수의 증인’(μάρτυρες Ἰησοῦ)로 불렀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행 22:20, 계 2:13, 17:6)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지만, 초대교회에서 순교자(martyr)란 단어가 ‘증인’에서 왔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히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증거하다는 말은 ‘입증하다’는 말입니다. 로마 시대에 ‘입증하다’는 표현은 공적인 명예를 드러내는 단어였습니다. 즉 모두에게 확증되고 분명히 드러난 칭송받을 만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단어였습니다. 히브리서는 ‘선진들’이란 사람들을 통해 이미 그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증거를 얻었다는 말일까요? 쾨스터는 ‘입증하다’가 수동태형을 취해 ‘하나님을 가리키며, 그의 증거는 성경을 통해 전달된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들이란 말입니다. 선진들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들을 통해 확증한 것입니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윌리엄 L. 레인은 ‘확고한 믿음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증거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3) 믿음으로 안다 .

3절은 ‘믿음으로 안다’(Πίστει νοοῦμεν)를 문장 앞에 두었습니다. 3장을 구문 분해하면 이렇습니다.

ㄱ.믿음으로 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세계가 지어졌음을

ㄴ.나타나지 않았다. 보이는 것들로부터

ㄱ과 ㄴ의 구문은 상호적입니다. ㄴ은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ㄱ은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ㄴ은 ㄱ의 구문을 보강하고 있습니다. 3절의 문장은 ‘믿음으로 안다’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입니다.

우리는 창조를 무(無)에서 왔다고 하지만 무는 무일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지어졌다’는 헬라는 ‘카타르티조’(καταρτίζω)로 ‘어떤 것의 아래에 서다’는 말입니다. ‘카타’(κατά)라는 전치사는 어떤 무엇으로부터 연유하여, 향하여, 통하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복잡한 헬라어를 생각하지 않아도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깊이 생각하여 보이는 것들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언, 또는 증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셀무스가 말했던 신존재증명의 방법입니다. 만약 보이는 것들이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들이라면 3절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 집니다. 구약의 성막은 하늘의 성막을 본떠 만든 것입니다. 땅의 성막은 하늘의 성막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알게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들로부터 하나님을 추론할 수 없습니다. 인식의 과정은 보이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믿음이 작동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소개될 모든 구약의 인물들에게 ‘믿음으로’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히브리서 강해가 출간되었습니다.

그동안 묵상글로 함께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묵상글을 수정 증보하여 <히브리서 강해>란 제목으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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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히11: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개정개역)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공동번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에서 실상이란 말의 원어는 hypostasis 영어로는 substance(실체) 혹은 confidence(확신)이다.

영어 속의 의미들을 합치면 ‘실체적 확신’ (가상적 확신과 대비되는) 이라는 뜻이 된다.

쉽게 말하면 실현되는 확신, 실제로 이루어지는 확신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믿음은 바로 바라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는 확신’이다.

– 내일이 잔칫날이라고 하자.

잔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그러나 내일도 태양이 반드시 뜰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식구들은 오늘부터 전을 지지고 떡을 찐다.

내일의 잔치는 내일이 온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오늘의 현실이 된다.

이것이 바로 믿음, 즉 바라는 것의 실체다.

‘아직(yet)’이 ‘이미(already)’가 되는 것 –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2. 그리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증거라는 말의 헬라원어는 elengchos, 영어로는 evidence(증거) 혹은 proof(보증)이다.

–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집 안에 먹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세상 어딘가에 먹을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바로 나의 배고픔이라는 감각이다.

애당초 이 세상에 정말 먹을 것이 없다면 허기짐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보이지 않는 분, 보이지 않는 세계는 분명히 있다.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다.

그분과 그 세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급할 때든지 공허할 때에든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찾는다는 것은 믿기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3. 지금 히브리서 저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1절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말이 나오지만 3절에는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V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공동번역 성경은 이를 더 멋지게 번역했는데 (주보 전면을 보자)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 일단 이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다.

땅이라든지 사람이라든지 물건이라든지..

그런데 성경은 우린 눈에 보이는 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에 의해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 대신 이 세상을 유지하거나 지탱하는 더 중요한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 믿음이 먼저인가 아는 것이 먼저인가?

누가 나에게 어느 건물의 약도를 주었다고 하자.

처음 그 건물에 가려면 그 약도를 믿어야 갈 수 있다.

한번 간 다음부터는 알고 가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믿었기 때문에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아는 것이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3절 말씀대로 믿음으로 모든 세계(보이는 것)가 하나님의 말씀(나타나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지어진 줄은 알게 되는 것이다.

–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하여 대구동부교회 김서택 목사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여기 어떤 큰 건물에 있다고 하자.

그 건물을 유지하거나 지탱하는 철근이나 콘크리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은 벽지나 타일 같은 것들뿐이다.

그러나 벽지나 타일은 건물을 유지하는 실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보는 많은 것들은 모두 내부 장식에 불과하며 온 세상을 이루는 실체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속적인 존재, 즉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는 물건이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영속성이 없는 벽지나 타일에 불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귀에 들리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 눈은 어느 범위의 파장을 가진 빛 즉 ‘빨/주/노/초/바/남/보’ 계통의 색깔들(소위 가시광선)만 볼 수 있다. 그 범위를 넘어서는 빛 즉 자외선, 적외선 그리고 엑스레이선 등이 분명히 있지만 보지 못한다.

그래서 자칫 없다고 생각하다가 그 광선들에 의해 몸을 상하게 된다.

– 소리도 마찬가지다. 요즘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들을 많이 하는데 박쥐나 모기 등은 그 초음파를 듣지만 인간은 듣지 못한다.

그래서 자칫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수년전에 동남아시아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수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체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야생동물의 시체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이렇게 제한적인 인간의 감각 범위를 뛰어넘는 야생동물들의 감각 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만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제한적인 용량의 뇌를 사용하여 살겠다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고 무모한 사람이 없다.

– 이 세상 보이는 것들을 부여잡고 사는 사람은 마치 전세로 사는 집에 엄청난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과 같다고 하겠다.

나중에 주인이 집을 내놓으라고 하면 그 인테리어 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눈에 보이는 권력이나 학벌이나 직장이나 사업체 같은 것들을 붙들고 살아간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붙들어야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4. 이렇게 바라는 것들을 확증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장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참되고 옳게 살았다고 인정받은 믿음의 선배(조상)들이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 사람들의 믿음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V2 “선진들이 이로써(믿음으로써) 증거(하나님의 인증)을 얻었느니라.”

제일 먼저 소개된 믿음의 사람은 아벨과 에녹이다.

– 잘 알다시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둘째 아들, 즉 가인의 동생이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다.

농사짓는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식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양 치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가인은 시기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들에 있을 때 동생을 쳐서 죽인다.

– 많은 사람들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양치기는 제물로 양을 드리는 것이 당연하듯이 농사꾼은 곡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아벨의 제사에는 피 흘림이 있었지만 가인의 제사에는 피 흘림 즉 속죄의 상징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하나님은 훗날 모세에게 양이나 소를 주된 제물로 바치고 백성의 죄 사함을 위해 그것의 피를 제단에 뿌리도록 명령하셨지만 가인과 아벨이 살 당시는 아직 그런 제사법이 계시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사가 피를 흘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더 나은 제사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고기를 잡수시는 것도 아니고 곡물을 드시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미에 고기가 더 맞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우스꽝스러운 생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제물의 종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않는다.

– 제물이 담고 있는 핵심적 의미는 ‘믿음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본문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인정을 받았다”고 되어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그가 고기를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기를 믿음으로 바쳤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제물의 종류보다 제물을 드리는 아벨의 믿음의 자세를 보신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는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있다.

제물보다 먼저 아벨이라는 사람 자체를 받으셨고 가인의 경우에는 가인의 제물보다 가인이라는 사람 자체를 받지 않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인에게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 무엇을 보고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음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학자들은 아벨이 드린 양이 그냥 양이 아니라 ‘첫 새끼 양’이었고 그 첫 새끼 양의 고기 중에서도 그 시대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던 부위, 즉 첫 번째 등급의 부위인 기름을 바쳤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나님께 드릴 때 가장 처음 것, 즉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는 것은 아벨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가장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어쨌든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아벨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보았다.

그 믿음은 6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그 믿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고 인정받는 감격스러운 축복을 받았다.

그의 부모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평생을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그 죄인들에게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 ‘의인’이라고 불린 것은 보통 놀라운 축복이 아닌 것이다.

– 반면에 가인의 마음 중심에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대충대충 형식적인 제사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기 보다는 살아계실지도 모르니 그냥 보험 드는 셈치고 제물을 드렸을 가능성이 많다.

또 하나님인 당신을 진지한 마음으로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지도 않았다. 그냥 제물만 요구하는 신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제물 드리는 것을 신에게 세금 바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믿음이 없는 자는 도덕적 양심도 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시기심 때문에 동생을 살해하는 가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아벨에 이어 두 번째로 ‘믿음의 사람’이라는 인증서를 받은 인물은 에녹이다.

창세기 5장 22-24절을 보면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있다.

흥미로운 것은 65세 즉 아들 므두셀라를 낳을 때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이야기가 없고 그 후에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된 사실이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에녹은 ‘회개’의 모범이요 원조라고 알려져 있다.

즉 65세까지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죄로 얼룩진 생활을 하다가 므두셀라(아마도 첫 아들?)를 낳은 후에 크게 회개하고 그 후로는 일편단심 삼백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며 살았다는 말로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아벨이 예배의 제물로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다면 에녹은 회개한 후 일상생활 속에서 늘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보이는 사람과 일생동안 일편단심 동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삼백년을 동행하는 것은 정말 신실한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5절 후반부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증서를 받았다고 되어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의로운 자’로,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되었다.

– 그런데 뜻밖인 것은 아벨과 에녹이 인생의 마지막 모습에서 달랐다는 점이다.

아벨은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말하자면 믿음의 제사 때문에 젊어서 순교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면에 에녹은 삼백 육십 오세나 장수하다가 죽음도 맞지 않고 그냥 하나님에 의해서 지상에서 하늘로 옮겨졌다.

– 아벨과 에녹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은 사람인데 이 지상에서의 최후의 모습은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는 것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믿음 때문에 이 세상에서 평온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떠나는 복을 누릴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믿음 때문에 미움을 받다가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과 소원 성취를 위해서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데 그것은 믿음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아벨도 에녹도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인정(증거)’을 받았다고만 되어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몇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존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알아야한다.

그 인정 속에는 영원불멸한 참 행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주목해야할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아벨과 에녹은 지상 최후의 모습은 달랐지만 그러나 그들은 지금 똑 같이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에녹이야 죽지 않고 옮겨졌으니 지금 하나님 품에서 살아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아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4절 말씀이다.

지금도 말한다는 것은 아벨이 지금도 살아있다는 말인 것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살아서 지금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7. 여기 사진 한 장이 있다. 이 사진은 과거에 대한 증거다.

보였던 것에 대한 증거다.

과거는 보였던 것이고 이미 사라진 것이기에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것, 오지 않은 것이다.

요즘 차로 출퇴근하다보면 퇴계원과 의정부 사이에 남양주 별내 신도시가 한창 단지 조성 중에 있다.

이제 3,4년 후 그곳에 입주할 아파트를 지금 분양 중이라고 하자.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요 보이지 않는 희망 사항이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미래를 현실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모델 하우스다. 모델 하우스는 과거를 찍은 사진과 달리 미래를 찍은 사진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증거다.

사람들은 바로 이 모델하우스라는 증거를 믿고 거금을 동원하여 분양 계약을 하고 계약금과 중도금을 낸다.

아파트는 보이지 않은 미래이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델하우스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아파트의 실체가 된다.

그래서 현재 내 행동들을 결정하게 만든다. 분양 계약도 하고, 중도금 납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보이지 않는 미래의 집은 내 집이라는 현실이 되어간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므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천국의 모델 하우스를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죄사함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계약을 맺게 되고 아직 오지 않은 천국은 그 믿음을 통해 오늘을 지배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 오늘도 우리는 그 믿음으로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렇다면 두 가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므로 보이지 않지만 지금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는가?

둘째,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나에게 반드시 영원한 축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는가?

이 믿음이 없다면 결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최성호 목사 저서 '천국에 대한 바른 생각'>

[2014.08.10]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히브리서 11:1~10)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서울시민교회 부목사:홍 순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브리서 11:1~10]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말을 혹 들어보셨나요? 간절히 바라보고 마음에 그 꿈을 품고 있으면 이루어진다는 뜻이죠. 그 전에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있었죠. 된다고 믿으면 된답니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적극적 사고방식’이 유행을 했죠. 된다고 믿고 적극적으로 일을 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이런 책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하게 해야 될 필요가 있다 싶어서 1, 2, 3절 말씀을 근거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이런 책들이나 이런 가르침들이 좋은 가르침이고 또 실제로 그대로 따라 했다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 예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성공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뜻이죠.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되죠. 그런데 되지도 않을 일이지만 된다고 믿고 나서면 안 하는 것보다는 뭐가 되도 돼요. 그래서 차라리 못해요, 안 해요, 안 돼요 하며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순 엉터리라도 하면 된다,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이 좀 더 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봄의 법칙도 좋고, 긍정의 힘도 좋습니다만 혹시 이런 것에 대해서 비판의 소리가 좀 있기는 하더라도, 그 비판의 핵심이 무엇인지,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잘 살피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믿는다면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해야 된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 이런 말의 차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말은 참 좋은데 방향이 조금 비뚤어지면 결과가 더 나빠질 수도 가끔 있습니다. 게으른 것보다는 부지런한 게 낫잖아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커서 정말 못된 짓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배운 게 ‘게으른 것보다 부지런한 게 낫다’ 라서 참 부지런한 거예요. 못된 짓 하면서 부지런하면 어떻게 돼요? 부지런해야 된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데 방향이 약간 비뚤어지면 오히려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선조들의 예를 죽 전해 줍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삶이 가끔 들었던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설명하는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만약 다르면 어떻게 다른지, 이걸 알아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정말 간절하게 소망하고 꿈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과연 무얼 바라고 살았는지, 하면 된다고 하는 그 생각처럼 그렇게만 살았는지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란 말을 함부로 쓰는 경향이 있어요. 덮어놓고 “믿습니다!” 하거나 “믿습니까?” 그러면 “아멘”이라고 그러는데 어떨 때 보면 ‘그건 믿는다고 말하는 게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더러 있습니다.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거나 아니면 들어서 바로 아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의 대상을 두 가지로 명시해 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합니다. 믿음의 대상은 바라는 것, 즉 지금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했으니 볼 수 없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이게 믿음의 대상이란 얘기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은 믿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믿음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믿음으로만 가질 수 있고,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보거나, 만지거나, 배워서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적절한 도구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키를 알려면 자를 써야죠? 그런데 체중계를 가지고 오면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잖아요. 맛을 알고 싶으면? 맛을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먹어보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도구 쓰면 알 수 있나요? 요즈음 수박 같은 경우는 워낙 익숙해지면 귀를 가지고 맛을 알 수 있죠? 두드려 보면 맛이 있겠다, 없겠다, 짐작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수박의 맛을 알기 위해서 귀를 사용하는 것과 입을 사용하는 것을 비교하면 입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입을 사용할 수 없을 때 귀를 쓰는 것이죠. 고기가 맛이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아나요? 옛날 제 친구 중에 고기 파는 친구가 있었는데 고기에 칼을 대 보면 안대요. 특수한 예죠. 먹어봐야 아는 거죠. 그림이 값어치가 있는 그림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나요? 혀를 대보고 아나요, 눈으로 아나요, 귀로 아나요? 그림을 아는 데는 입이고 눈이고, 혀도 전혀 도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각을 동원해서 주변 사물을 인식하지만 감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그림은 감각으로 안 돼요.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와!” 하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봐도 몰라요. 그걸 깨달아 아는 사람의 눈은 눈이 아니고 머리예요. 머리로 그림을 보아야 그 진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외국어도 그래요. 어떤 사람은 외국말을 듣는 순간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그런데 모르는 우리는 몇 번을 들어야 그 말을 이해할까요? 모르는 말은 평생을 들어도 몰라요. 아는 사람은 한 번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들어보면 안다? 아니오! 아는 사람은 신경 안 쓰고 금방 들어도 알아듣는데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신경 써서 들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이런 예가 우리 주변에 굉장히 많아요. 저는 피카소 그림을 볼 때마다 감동은 안 오고 ‘이상하다? 우리 애들 호작질[낙서]보다 더 나은 게 없는데 저게 몇 억씩 할까?’ 이해가 안 돼요. 그림을 보고 평가할만한 눈이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이 우리 집사람에게 가방을 하나 선물했는데 명품 흉내를 낸 것이었나 봐요. 그런데 사 온 사람도 모르고 받은 사람도 몰라요. 우리 집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머, 이거 열어봐도 돼요?” 남의 핸드백을 왜 열어가지고 안을 뒤지느냐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집 사람이 놀랐답니다. 사 준 사람도 모르고 들고 다닌 사람도 모르는데 남이 왜 그러나요? 아는 눈, 엄밀히 말하면 머리가 있거든요. 저도 시내에서 핸드백을 많이 봤지만 “야, 그거!” 하는 백은 하나도 안 보이던데요? 왜요? 저는 봐도 아무 감동이 없어요. 명품 중에 제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렇죠. 볼 줄 아는 사람은 보는 순간 눈이 반짝 반짝 뜨인다네요. 우리 집사람도 교회 못 입고 오는 옷이 있어요. ‘사모님이 저렇게 고급 옷을 입고 다녀도 되나?’ 그래서 못 입고 있는 옷이 더러 있어요. 학교 근무할 때 보따리장수에게 산 거예요. 7만원 주고 산 옷인데 교회에서 “사모님, 이거 얼마 주고 산 옷이에요?” “7만원” 하니까 “아, 70만원 줬구나.” 이러더랍니다. 그걸 어떻게 입고 다녀요? 보따리장수한테 샀으니까 명품흉내 낸 것이겠구나 싶어요. 그런데 그걸 비싼 명품이라고 보니까 못 입고 나가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어떤 사람은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번쩍 뛰는 게 굉장히 많아요. 성가대 지휘자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목에 힘 빼세요. 턱에 힘 빼세요.”죠? 본인들은 ‘힘 안 줬는데, 힘 뺐는데?’ 하지만 지휘자는 매일 힘 빼래요. 자기 턱에 힘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자기도 몰라요. 그런데 지휘자는 소리만 듣고도 알아요. 힘이 들어간 소리인지 빠진 소리인지를 아는 귀가 있는 사람은 듣는 순간에 알아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몰라요. 이런 것들은 내가 본다고 아는 것 아니고, 듣는다고 아는 것 아니에요. 아는 사람의 말을 믿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귀가 뜨이거나 눈이 뜨이거나 이렇게 되면 그 때부터는 보여요. 감각과 관계된 것은 보든지 만지든지 맛을 보면 저절로 알아요. 그러나 지식이나 두뇌와 관계된 것은 부지런히 배우고 갈고 닦아야 알 수 있어요. 귀나 혀나 손을 대는 것은 바보입니다. 그림이 얼마나 좋은 건지 알려고 혀를 갖다 대면 세상에 이런 바보 없잖아요? 머리가 그 수준을 따라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고 머리를 쓰라고 그랬더니 벽에 못을 박는데 이마로 쿵쿵 찧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머리 쓰라고 했잖아?’ 그거 머리 쓰는 거예요? 대상과 적절하게 도구를 못 맞추면 이런 바보짓을 하는 겁니다.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고 그 위에 머리로 알 수 있는 게 있고 그 위에 영적인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은 믿어야만 알지, 배우거나 느껴서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아나요? 보면 알죠? 그러나 보면 안다는 것은 가장 피상적인 겁니다. 껍데기만 알고 짐작할 뿐이지 제대로 아는 게 아니에요. 겪어봐야 알죠? 맞아요. 그런데 몇 년이나 겪어보면 알아요? 결혼하고 30~40년 사시면 서로를 완벽하게 다 잘 아실 것 같아요? 죽을 때가 돼도 모르겠답니다. 사람을 알려면 겪어봐야 안다고 하는데, 이것조차도 사람을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묘한 영적인 부분이 있어서 믿어 줄 때만이, 그 사람을 믿어줘야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고 그 사람과 바른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보는 것도 중요하고 겪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어줘야 그 사람이 제 역할을 하고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제대로 됩니다. 가정에서나 회사에서나 어디에서나 사람을 믿어 주면, 믿어주니까 사기 치던데… 이러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어 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관계가 어렵습니다. 병중에 가장 골치 아픈 병이 의처증이나 의부증입니다. 못 믿는 병이죠. 의처증을 무엇으로 고치나요? 약이 없습니다. 의부증도 약이 없습니다. 사모님이 남편을 의심하는 거예요. ‘우리 목사님이 요즈음 다른 집사님하고 …’ 혼자 온갖 상상을 다 하는 거예요. 어떡합니까? 목사님이 사임해야죠. 고치는 유일한 방법이 믿어야 돼요. 안 믿어지는데도 고치려면 믿어야 돼요. 사람 사이에도 믿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일단 이런 식으로 병이 들면 고치는 방법이 없으니 정상일 때 관계를 잘 다져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디 있다고 해서 불안해지기 시작하면 길을 못 나가요. 실내에도 있어도 갑자기 천장이 내려앉으면 어떡하지? 이게 심해지면? 갈 곳이 전혀 없어요. 들판에 혼자 앉아 있을까요?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질까 겁이 나서 어떻게 다녀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정신병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믿음이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요? 보고 알겠다구요?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오실 분도 아니에요. 영적인 그 분을 우리의 감각이나 눈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으려 하지 말고, 알기 위해서 믿으라.”고 하신 겁니다. 당신 나 정말 사랑해? 증거 한 번 대 볼래? 이래서는 진짜 사랑하는지 절대 몰라요. 믿고 지내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 증거를 대서 이만하면 됐나? 응. 그래가지고 사랑한다? 애당초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믿는다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아는 방법입니다. 내 눈, 내 손, 내 머리로도 볼 수 없는 것,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죠. 그래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되는 말도 아닌데 “믿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번에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떼돈이 들어올 줄 믿습니다.” 그런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좋게 말해서 ‘자기 확신’일 뿐이죠.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11장에 죽 이어가는 겁니다. 믿어야만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첫 번째로 말씀 하는 것이 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말하죠. 믿어야 한다면 제일 처음 믿어야 할 게 뭐예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것을 믿으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이 조금 어려운 점이 있죠. 3절 뒤편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구절이 조금 어려워요. 보이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을 말하는 것이니까 금방 알겠는데 그럼 나타난 것은 뭐냐? 옛날 희랍사람들이 이런 것을 많이 가르쳤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실제 세상이 아니고 저 어느 곳에 따로 있는데 그 세상이 여기에 그림자처럼 비쳐진 것, 이게 우리 세상이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저 다른 어느 세상에서 이쪽으로 보인 것이 나타난 거예요. 이것 때문에 우리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히브리 기자는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타난 것’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한다면, 창조 이전의 창조 재료라고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은 이 물건을 만들기 전에 어떤 재료가 있었는데 그걸로 말미암아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만들어졌는데요? 바로 그 앞줄에 있잖아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렇게 말하죠.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우주 만물은 원래 뭔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형태를 바꿔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게 아니고 어떻게 됐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할 때에 제일 많은 지지를 받는 이론이 ‘대폭발’ 이론입니다. ‘빅뱅’이라고 말하죠. 이 우주는 원래 한 점, 아주 무거운 한 점이었는데 어느 날 이것이 뻥 터지는 바람에 지금도 그게 터져 나가고 있는 중이예요. 그렇게 해서 이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말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터지기 전에 있던 것, 그게 뭔지는 몰라요! 모르지만 뭔가가 있었는데 이것이 터지면서 우주가 생겨났다. 이게 오늘날 가장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게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믿어져야 그 다음 성경을 믿을 수가 있는 거예요. 성경을 읽으려고 펴는데 창세기 1장 1절이 도전을 합니다. 이거 믿을래? 말래? 이게 믿어지면 성경책 그 뒤에 있는 것을 다 믿을 수 있고, 이게 안 믿어지면 성경의 기적들 많이 나오잖아요? 다 믿을 수 없는 거예요. 한동대 예전의 김영길 총장이 자기가 예수 믿게 된 간증을 하게 된 이야기 중에, 미국에 있다가 사모님을 따라서 교회 붙들려 나갔나 봐요. 성경 읽으라고 해서 신약성경부터 읽었답니다. 제일 먼저 믿을 수 없었던 것이 가나 혼인잔치에 물로 포도주 만든 거예요. 자기 생각에 그랬겠죠. 무식한 사람들이 물이나 포도주나 다 물이니까 물로 포도주 되는 것은 쉽게 생각되는지 몰라도 과학자의 눈에는 물과 포도주는 전혀 다른 것이에요. 물은 H 2 O잖아요. 수소, 산소가 들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포도주는 C 2 H 5 OH 저도 이거 외운다고 애 먹은 겁니다. 포도주에는 H와 O와 C, 탄소가 들어있단 말이에요. 이런 것을 잘 모르는 무식한 대중은 물이나 포도주나 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과학자인 자기 눈에는 C가 그냥 들어왔다는 것은 말이 안돼, 믿을 수 없어. 무식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랬다는 거예요. 좀 더 넘어가면 기가 막히는 것 있죠? 이 사람들 생물 배우지도 않았나? 어떻게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걸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설명을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을래? 말래? 이거거든요. 왜요? 설명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역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렇게 설명하고 보여줘서 될 문제가 아닌데 이 분이 어쩌다가 창세기 1장 1절을 앞에 놓고 고민을 많이 했나 봐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과학자로서 많은 것을 살피고, 살피고 하는데 ‘아, 과학의 한계가 여기까지고 이 너머는 과학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구나!’ 어느 날 거기서 깨달음을 얻고 창세기 1장 1절이 믿어지더랍니다. 그걸 믿고 나니까 그 전에 안돼, 안돼, 말 안돼! 이랬던 것들이 전부 다가 ‘아니, 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그 분 같으면 이거는 아무 문제가 아니잖아?’ 그게 풀려 버렸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풀렸냐고요? 이게 설명이 안 돼요.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됐는지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참 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을래? 말래? 이걸 요구하시고 계시는데 여기 계시는 분들은 어떻게 그걸 믿어요? 믿어지면 복이고, 안 믿어지면 안타까워해야죠.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믿으면 아이를 고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 귀신들린 아이 아버지 있죠?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고 예수님께 아이를 맡겼던 그 분, 무조건 ‘믿습니다’ 해 놓고 자기 속을 보니까 별로 믿는 것 같지 않아. ‘예수님, 지금 내가 믿어야 이 아이를 고칠 수 있는데 내가 보니까 믿음이 없는 것 같아요. 나의 이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게 해 주세요!’ 이런 거거든요. 이런 마음조차도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정해 주시고 그들을 고쳐 주셨던 거죠. 믿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믿을래? 말래? 라고 물을 때에 믿어지게 해 달라고 하는 간절함, 아니 믿고 싶은 이 간절함,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시고 믿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얼마나 감사해야 되는지 모릅니다.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가 만드신 이 창조세계, 이걸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 사실을 믿고 그 하나님을 따랐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죽 길게 이어갑니다. 아벨이나 에녹이 나오고 노아나 아브라함이 나와요. 이 분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을 믿은 거예요. 노아의 경우에 120년 후에 홍수가 온다? 그걸 누가 믿어요? 도무지 말도 안 되고 믿을 수 도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믿는다. 이런 겁니다. 증거가 있어서 믿은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경우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말하죠. 내가 지금 가야 할 그 땅이 도대체 어떤 땅인지 알지도 못하고 간다. 이런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처음에 말씀드렸던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것, 바라보라는 거예요. 간절히 바라보고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무엇을 바라보라고 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그러는데 간절히 바라면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믿음으로 무엇을 얻느냐는 거죠.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얼 소망하느냐에 달린 거예요. 말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그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다시 말해서 간절히 소망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이건 성경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좀 전에 봤던 이 사람들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냐? 아니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약속, 보이지 않는 그 땅을 바라보고 나가면서 얼마나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믿고 힘들고 어렵지만 이 땅의 아픔들을 다 이겨내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이죠. ‘긍정의 힘’이라는 것,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좋은 생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무조건하고 할 수 있다면 된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아요.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된다? 그런지 안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해병대 정신이라고 붙여 놨어요. 해병대? 하면 된다! 포항에 해병대 훈련소가 있어요. 지나가다 보면 그런 글자가 많이 붙어 있어요. 여러분, 하면 됩니까? 안 된다고 하는 것보다는 낮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 하지 말고 무조건 하다보면 뭐가 되도 되기는 돼요.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것도 그런 것이냐?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시는 말씀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누가 하는 거죠? 내가 하는 것 아니에요. 능력을 누가 주시죠? 하나님께서 주셔요.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이런 뜻인데 이게 오해를 많이 받은 문구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왜 그 말을 했는지를 잘 생각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겁니다. 옥에 갇혀서 그를 돕기 위해서 빌립보 교회가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걸 받고 답장을 쓸 때 뭐라고 해야 되나요? ‘고맙다.’ 그래야 되죠? 고맙다고 하는 뜻으로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말을 하신 거예요. 무슨 뜻이냐면 ‘여러분들이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내게 헌금을 보내 주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형편이 좋든지 어떤 지간에 얼마든지 적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이 이런 헌금을 보내줘서 감사하다.’는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기만 하면 1,000명 모여 있던 교회가 당장에 2,000명이 된다? 이런 개념이 아니에요. 나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힘 주셔서 내게 맡겨준 사명은 너끈하게 감당할 수 있다.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다 할 수 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문맥은 놓쳐 버리고 무조건 ‘믿고 나서면, 한다 하면 된다’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아닙니다. 없는 것을 가지게 해 주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 주는 것이 믿음이라고 해도 그 믿음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는 아닙니다.“하나님만 믿고 확 일 한 번 저질러 봐.”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거든요. 뭐예요? 하나님께서 주실 것 믿고 그 똥차 버리고 새 차 뽑아 버려라. 그런 얘기거든요. 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대형교회를 건축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한 경우가 참 많아요. 그래서 경매에 넘어가고… 왜 그러나요? 자기 능력은 생각 안 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고 미련하게 밀어붙였는데 하나님께서 안 도와 주시더라, 그런 얘기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용감하게 밀어붙이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밀어 주시고 다 도와 주시나요? 옛날에 어떤 영화의 대사가 생각이 나요. ‘친구’라는 깡패 영화죠. 그 영화에서 나오는 유명한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내가 니 시다바리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도 안 하고 내 욕심 때문에 일을 무리하게 저질러 놓고 “믿습니다!” 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어요? “내가 너 뒤나 닦아주는 네 종이냐?” 이러시지 않겠어요?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시는 지를 잘 살펴서 그 말씀 따라 사는 것, 그렇게 살다보니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이 생기더라,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원하고 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고 있으니, 이런 아픔이나 어려움들은 이겨낼 수 있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안락함이나 부귀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라 갈 수 있다. 이런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거죠. 이 땅에서 부자로 사는 것, 또 호화롭게 사는 것, 괜찮아요. 능력 있으면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만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죠. 그래서 11장에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아니면 참 고생하면서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길게 설명합니다. 마치 계주처럼 설명을 해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믿음의 바통을 우리에게까지 이렇게 전해 줬다. 너희들이 나머지 주자들이니까 그 길을 잘 달려가라. 그렇게 당부하는 것이 이 믿음장, 11장의 이야기입니다. 계주 잘 아시죠? 마지막 주자가 바통을 들고 똑바로 가면 되는데 “엄마, 나 여기 있어!” 하다가 엎어지면 끝나는 거예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죽 하면서 이게 마치 계주와 같으니까 마지막까지 잘 가거라. 그러면서 잘 가는 방법을 12장에서 설명을 합니다. 12장 2절을 보시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에서 ‘믿음의 주’라는 이 주는 주인이라는 주(主) 자가 아니에요. 굳이 우리말로 풀이를 한다면 근원, 혹은 창시자 이런 뜻입니다. 믿음의 근원이요 믿음의 창시자인,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것은 도착점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음의 출발선이기도 하고 동시에 도착점이기도 한 바로 그 예수를 바라보고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예요. 예수님만 바라보고 잘 달려가면 문제가 없죠. 그런데 잠시 뛰어 가다가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면? 예를 들어서 물에 빠졌던 베드로처럼, 아니면 관중석에 있는 엄마 찾다가 엎어진 아이처럼, 그럴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만 사모하며,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렇게 열심을 다 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볼 것이 하나님이요, 예수님이다. 히브리서가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바라봄의 법칙? 좋아요. 무얼 바라보라고 하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다? 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굉장히 좋은 겁니다. 그런데 왜 할 수 있다고 말하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만 하면 되는 거다? 아니면 내 능력으로 한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힘주고 계시다는 이 믿음에서 ‘할 수 있다’고 그러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라’는 얘기죠. 그래서 우리 삶에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보기에는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냥 믿으라고?! 그러나 특별한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는 믿기만 하면 하나님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참 쉬운 방법이잖아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과목을 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보겠다고 하셨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다운 방법이고, 참 기묘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의 별을 따와라, 아니면 돈을 얼마를 내 놔라, 이런 방법을 안 쓰셨어요. 믿음으로! 그 믿음도 굳이 따지면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겠다는 얘기입니다. 똑똑하고 능력이 있을수록 불리한 방법이에요.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참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잘 달려가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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