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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과 아벨 설교 | (어린이설교)가인과 아벨 : 죄를 다스려요! 402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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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인과 아벨 – 죄를 다스려요! (Kain and Abel – Rule over Sin)
본문 창세기 4장 1-15절 (Genesis 4:1-15)
내용: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물을 가져와 제사를 드렸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과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어요. 가인은 화가 났고, 죄 짓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두었어요. 가인의 마음 속의 죄는 점점 더 커져서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어요. 큰 죄를 지은 가인은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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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장 – 가인과 아벨 – 새벽기도 설교 | 동탄영락교회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했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로 얼룩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그 결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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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tynch.kr

Date Published: 4/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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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차이 (창 4:1-15) – 기멀전

다시 말해서 가인은 땅의 소산, 즉 땅에서 얻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싫어하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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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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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4절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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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설교)가인과 아벨 : 죄를 다스려요!
(어린이설교)가인과 아벨 : 죄를 다스려요!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가인 과 아벨 설교

  • Author: 허니맘의꿀보다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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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dURO_gC0Jyk

창세기 4장 – 가인과 아벨 – 새벽기도 설교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했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로 얼룩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그 결과에 대한 기록으로 죄의 심각한 파괴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먼저, 가인과 아벨은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3-5절).

가인과 아벨이 선택한 제물은 각각 그들의 직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아벨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 반면, 가인은 그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린 까닭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두 가지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이 아벨의 제물에 대해서는 ‘양의 첫 새끼’ 라고 기록함으로써 제물에 아벨의 깊은 정성이 담겨 있음을 강조하는 반면,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단순히 ‘땅의 소산’이라고 기록함으로써 가인이 제물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본문에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제물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도 함께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하나님 중심의 제사였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자기를 생각하는 인간 중심의 제사였기에 하나님께 외면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그것을 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정성도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자의 제시를 받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한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신들과 같이 인간이 바치는 제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기뻐하고 화를 내는 그런 거짓된 신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 16: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예물을 드릴 때 마지못해 하거나 형식적으로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예배는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제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1:4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시고 자신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자 심히 분해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5절).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은데 대하여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거짓된 제사를 드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마음에 분노를 일으켜 하나님을 원망하고, 동생에 대한 시기심만 불태운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가인의 시기심은 극에 다다라 결국 동생을 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8절).

특히 하나님께서는 시기심으로 이성을 잃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죄가 먹이를 덮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맹수와 같이 우리를 헤치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7절).

실제로 인간은 죄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 문 앞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악한 생각을 조금만 가져도 즉시 충동질하여 범죄하게 함으로써 죄의 종으로 삼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 앞에 있는 맹수를 경계하듯이 죄의 유혹과 욕망을 억제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의 제사는 열납된 반면 가언의 제사는 외면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똑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성도의 예배와 예물은 기쁘게 받으시는 반면 어떤 성도의 예배와 예물은 외면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까, 자기중심의 예배입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심으로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14-15절).

여러분, 가인은 인류 최초의 ‘형제 살해’라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고, 적반하장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가인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살인죄를 범한 이후에도 그에게 찾아 가셨고, 그를 심판하는 가운데서도 그에게 보복이 가해지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셨으며, 그것을 확증하는 표까지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한 죄인에게까지 오래 참으시며 끝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는 끝이 없습니다(시 108:4).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로우심을 악용하여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악용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멸시하는 행위로써 하나님의 심판 날에 임할 진노를 그 머리 위에 쌓는 것과 같습니다(롬 2:4.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 모든 죄악된 행실을 끊고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으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지만, 또한 공의로우셔서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 날에 그에 합당한 형벌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에 있는 놋 땅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6절).

여기서 ‘놋’은 ‘유리, 방황, 요동’ 이라는 뜻으로 ‘기쁨, 환희’를 의미하는 ‘에덴’과 대조되는 도망과 추방의 땅임을 암시해 줍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이 이후 늘 방황하며 불안한 삶을 살았음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은 아무리 풍부하고 견고한 안전이 보장된다 할지라도 결코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을 따르는 삶, 그 안에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을 삶으로써 아름답고 경건한 문화를 세워가며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오늘,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 (창 4:1-15)

I.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를 반기지 않으셨는가?

창 4장은 인류 최초의 살인극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을 왜 죽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제사에 있었습니다. 두 형제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지만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셨을까요?

많은 목사님들이 두 형제가 드린 제사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은 땅의 소산, 즉 땅에서 얻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싫어하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짐승의 희생제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제사였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것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양이나 송아지 혹은 염소와 같은 짐승들을 잡아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셨던 제사가 짐승의 희생제라는 해석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땅에서 난 곡식 제사를 아주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5대 제사 중에 하나인 ‘소제’라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는 땅에서 난 양식을 드리는 제사였습니다(레 2: 1-16; 6: 14-23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짐승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곡식 제사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동물 제사만 열납하시고 식물 제사는 배척하신다는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본문 말씀을 아무리 조사해봐도 그 대답이 명확치 않습니다. 단 한 가지 희미한 단서가 있다면 3-5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3-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러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아벨과 그 제물’–Abel and his offering–이라는 부분과 ‘가인과 그 제물’–Cain and his offering–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것은 아벨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벨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아니, 순서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보다도 아벨이라는 사람을 먼저 열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물리치신 것은 가인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사람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아니, 순서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배척하시기 전에 가인이라는 사람부터 먼저 배척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반기신 이유는 그 제사의 내용이 동물 제사였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조건 열납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반기지 않으신 이유가 곡식 제사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인이 동물 제사가 아닌 땅에서 난 식물 제사를 드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사가 거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아마 두 형제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쪽의 제사는 받으시고 다른 쪽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봅시다.

II.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무엇인가?

⑴ 두 형제는 인격과 삶이 서로 달랐습니다.

여러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이 무엇을 제물로 해서 바치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아벨은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었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물보다 먼저 그의 신앙 인격을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경우에는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 즉 가인이라는 인격이 문제였습니다. 이미 제사를 드리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가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인의 마음 속에는 동생과의 묘한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잠복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아무리 좋은 제물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은 하나님의 의에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 1서 3: 1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그렇습니다. 가인의 신앙 인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본문에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생의 제사는 열납되었지만 자신의 제사는 열납되지 않자 제일 먼저 안색이 변했습니다. 질투심과 분노가 마음 가득 차 올랐던 것입니다. 결국 시기심과 증오심을 이기지 못한 가인은 들판에서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까? 우리의 인격과 신앙과 삶이 함께 접목된 예배를 기뻐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사 1: 11-17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좋은 제물을 무수히 많이 바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지 않으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삶이 서로 따로 떨어져 놀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힐책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옳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왜 열납되지 않았습니까? 자기 동생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 증오심을 품은 채 제물만 드렸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물은 옳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이 삐뚤어졌던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 23: 3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아벨을 분명히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왜 반기셨습니까? 그의 마음이 정직했고 그의 삶이 경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드린 제물 이전에 그의 인격과 삶이 온전했기 때문에 먼저 아벨이라는 의인을 받으셨고 제물은 저절로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호 6: 6은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또한 시 51: 17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마음이 떠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의로운 삶이 뒷받침되지 않은 예배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물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삶이 먼저 열납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4: 23-24 참조)가 되게 하십시오!

⑵ 두 형제는 신앙이 서로 달랐습니다.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의 신앙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막연히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나 히 11: 4은 두 사람의 차이는 신앙의 차이였음을 매우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아벨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물을 고르는 일에 아주 신중했습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흠이 없고 가장 귀한 것을 골랐습니다. 양의 첫 새끼를 선택했습니다. 양 안에서도 가장 좋은 것 중의 좋은 것 기름을 성별해서 드렸습니다.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성의가 부족했습니다. 땅에서 난 소산물을 아무렇게나 바쳤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아니면 땅에서 얻은 곡식물을 바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양의 첫 새끼를 잡고 그 기름을 짜내서 바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수고와 정성을 요할 것입니다. 곡식물이 훨씬 더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아벨이 바친 양의 첫 새끼는 장차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 1: 36)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또한 양을 잡을 때 나오는 피는 장차 그리스도의 피를 예시(豫示)합니다. 그리하여 히 9: 2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양이 흘린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더더욱 흔쾌히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습니까? 아벨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예배를 열납하십니까? 믿음이 들어가 있는 예배입니다. 히 11: 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가 열납되기를 원하십니까? 신실한 믿음으로 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반기실 것입니다!

⑶ 두 형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달랐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인공은 아벨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벨에 대해서는 겨우 몇 줄 정도 밖에 설명하지 않지만 가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인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했을 때 가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진짜 주제는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느냐 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은 분이시기에 주권(主權)을 가지고 계십니다(사 64: 8; 렘 18: 1-6 참조).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최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린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안 받으실 수 있습니다. 열납하시느냐 열납하시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사안이지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제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이유를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납하시고 않으시고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정말로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두 형제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초점을 가인에게 집중할 경우 가인은 세 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가인은 대번에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먼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인은 왜 자기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옳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가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부터 먼저 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동생인 아벨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었습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살의(殺意)를 품게 된 것입니다. 이미 얼굴에서부터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로, 아벨을 죽였습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충고를 주십니다. 옳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에 죄가 가인의 마음 속에 들어왔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면서 죄를 다스리라, 즉 정복하라고 충고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8절에 보면 들판에서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요 친형제 살해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가인은 두 가지 죄를 저질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친동생을 죽였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가인이 “칼로 아벨의 목을 따서 죽인 것”–“sliced the throat”–으로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분노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 15: 19에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가 모두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질투심과 분노 때문에 자기 형제를 살해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다음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얼마나 뻔뻔스러운 태도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모습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습니다. 아마 가인은 팔짱을 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똑바로 쳐든 채로 하나님께 대들었을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는 내 동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 알지 못한다고 잡아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여기에서 철저하게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책임(Irresponsibility)! 이것이야말로 아담과 가인을 거쳐 오늘 우리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원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인 것입니다!

자기의 범죄 사실을 부인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대십니다. 10절에 보면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에 대한 징벌을 주시는데 12절을 보십시오. 장차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내지 아니하며 가인은 땅에서 피하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저주를 듣고서야 가인이 조금 정신을 차리는 듯 싶습니다. 13-14절을 보세요.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에 떠는 가인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15절에 보면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벌을 일곱 갑절이나 받게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죽임을 면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III. 가인 편에 설 것인가? 아벨 편에 설 것인가?

결론을 맺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그 이후 전개될 인류 역사를 요약해줍니다. 지구 한 모퉁이에 가인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공로와 행위를 높이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경쟁심과 시기심과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찬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반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지구의 또 한구석에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벨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들의 마음과 삶 전체를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의를 사모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누구 편에 서 계십니까? 가인의 편입니까? 아니면 아벨의 편입니까? 가인의 후예가 되느냐? 아니면 아벨의 후예가 되느냐는 여러분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기왕이면 아벨 편에 서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창세기 4장 성경 인물 설교말씀]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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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4장 성경 인물 설교말씀 중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 4:1-5)

창 4:1-5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나의 신앙과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로 끝나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에게 말씀을 접목해 보고 나의 생활에서 말씀대로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출생부터 다르게 나타납니다. 가인은 아담이 스스로 들어가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낳은 자녀가 가인입니다. 그래서 1절에 하와는 득남하였다고 말합니다.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하와와 동침하매’ 라는 단어 뒤에 원전에는 את(에트 853)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뜻이 그것 자체, 그일 자체,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와와 동침한 사건을 지시대명사로 강조합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자신이 능동적으로 스스로 들어간 사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와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את(에트 853)입니다. 이 뜻은 함께, 곁에, ~에게,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해 결국 영적으로 죽은 삶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 곁에 있기를 원하고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인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득남하였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קנה(카나 7069)입니다. 이 뜻은 돌아오다, 득남하다, 얻다, 만들다, 가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 1인칭, 단수를 사용하면서 아들을 완벽하게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다시 불순종의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고,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만들기를 바라고 생명과를 가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득남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의 열매로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니라’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אמר(아마르 559)입니다. 이 뜻은 부르다, 인정하다, 아뢰다, 청하다, 선포하다, 생각하다, 외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담은 자신 스스로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즉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불렀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뢰면서 용서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 그리고 말씀을 다시 생각하고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이러한 심정으로 아들을 얻었다고 하나님을 부르는 심정으로 가인을 불렀습니다.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하와가 둘째 아들 아벨을 낳는데 이제는 자신의 생각으로 낳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감동을 주셔서 아벨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자녀가 아벨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아벨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아벨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이스라엘의 형제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 예수님도 똑같은 유대인의 손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0:11-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이것을 볼 때에 아벨은 예수님의 구속사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출생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사역 능동으로 시켜서 나오게 됩니다 . 그러나 인간적인 아들은 단순능동으로 사람이 스스로 낳게 됩니다.

아벨은 양을 치게 되고 가인은 농사를 짓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입니다. 보리나, 밀을 재배하여 먹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농사를 짓지 않고 양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농사를 지어야만 먹고살 수가 있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으면 죽습니다. 처자식도 먹일 수가 없습니다 . 그런데도 아벨은 양을 치고 있습니다. 양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고기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이 고기를 언제부터 먹습니까? 홍수심판이 끝난 다음에 고기를 음식으로 주십니다.

창 9:3-4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아벨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 양을 쳤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양을 쳤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양을 쳤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양을 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위해서 양을 쳤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양을 쳤습니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타락했을 때에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습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죽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대신 누가 피를 흘려야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죄악 된 인간이 살 것을 말씀합니다. 그것도 스스로 만들어 입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입혔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 아벨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피의 제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먹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기 위하여 애써가면서 양을 쳤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것이 안 되는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 그런데 아벨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양을 치면서 하나님만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기억했습니다.

가인은 어떻습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입니다. 농사는 자신이 짓는 대로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됩니다. 열심히 농사를 짓는 만큼 자신의 열매가 됩니다. 그러니 정신없이 열심히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

눅 12:16-21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부자가 자신의 욕심만을 부리면서 살다가 영적인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일에만 사는 부자가 하나님께서 영혼을 거두어 가시면 결국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가인의 삶이 이런 삶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욕심에 싸여 인생을 살았지 영원한 천국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평소에 살았던 인생입니다.

위 영상을 보시면 가인과 아벨에 대해서 참고가 됩니다.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세월이 흐른 뒤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기에 ‘지난’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קץ(케츠 7093)입니다. 이 뜻은 끝, 마지막, 종말, 끝날,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열심히 세상에서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끝 날이 오고, 마지막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이것이 결말이 날 때입니다.

‘후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היה(하야 1961)입니다. 이 뜻은 치다, 계시다, 만나다, 따르다, 이루다, 얻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즉시로 자신 스스로 능동적으로 열심히 주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하고 완전한 삶을 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마지막 때에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으로 자신을 치면서 회개하고, 죄를 미워하고, 구원을 얻으면서 사는 인생을 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 라는 것은 결국 마지막 종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는데 이것은 결말을 짓는 제사입니다. 그때에 제사를 받으시는 사람이 있고, 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제사를 받으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받지를 않습니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 그렇게 되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삶을 세상에서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하나님이 오실 때에 알려주십니다.

‘땅’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אדמה(아다마 127)입니다. 이 뜻은 흙, 토지, 티끌, 세상, 본향,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곳입니다. 결국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린다고 해도 진노 받고 저주받은 소산입니다.

그리고 흙은 죄지은 자가 머리에 회개하기 위하여 뿌리는 재료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속한 사람은 티끌처럼 마지막에 날아 가버리는 것이고, 세상에 본향을 두고 사는 사람은 마지막에 심판 받고 죽게 됩니다 . 우리는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천국에 본향을 두고 살아야 마지막 날에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소산으로’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פרי(페리 6529)입니다. 이 단어는 전치사를 사용하면서 땅의 저주받은 곳으로부터 열매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이 뜻은 과실, 산물, 결실, 자손, 행실, 행위, 갚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것은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가지고 온 과실과, 결실들이고, 그 행위와 행실을 그대로 갚아주시게 됩니다. 결국 죄악으로 인한 곳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모두가 악입니다. 하나님이 받지를 않습니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아벨도 시간이 흐른 뒤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의 제사를 상징합니다. 아벨은 양을 제물로 삼아 드렸습니다. 양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모든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서 죽어가는 것이 양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이었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였습니다 . ‘첫 새끼’는 בכורה(베코라 1062)입니다. 이 뜻은 첫 새끼, 장자의 명분, 처음 난 것,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벨은 가장 귀한 처음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열심히 기르고 양육하여 드린 가장 값진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을 하늘에서 보내시고 장자의 명분으로 처음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입니다 . 아벨은 이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이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나의 온 마음과 목숨을 다해서 드리는 제사 예수님의 피의 은혜와 공로를 의지하여 드리는 제사 이 제사를 하나님은 받습니다.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기름은 חלב(헬레브 2459)입니다. 이 뜻은 기름진, 살진, 아름다운,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기름은 가장 좋은 부분이고,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고, 살진 부분입니다. 기름은 감사의 생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 아벨은 가장 값진 인생을 드렸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늘 감사의 생활을 하고 우리의 값진 시간을 드리고, 값진 인생을 드려야 합니다. 힘이 넘치는 젊은 때에는 자신의 욕심에 빠져 살다가 죽을 때쯤 되어 하나님께 와서 말년을 드리는 이런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 나의 값진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알찬 시간은 자신의 노동과 돈 버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자투리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됩니다.

‘제물을 받으셨으나’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שעה(샤아 8159)입니다. 이 뜻은 응시하다, 둘러보다, 눈을 돌리다, 쳐다보다, 앙모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즉시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보는데, 능동적으로 스스로 완벽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제물을 응시하시고, 둘러보시며, 다른 곳에 마음을 두시다가도 눈을 돌리시고 쳐다보십니다.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를 않습니다. ‘받지’라는받지’ 단어가 있습니다. 아벨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받지를 않으셨습니다. 가인의 제물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분노했습니다. ‘분하다’는 이 단어는 חרה(하라 2734)입니다. 이 뜻은 분하여하다, 맹렬하다, 성내다, 분노하다, 불평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니 즉시로 분을 내고 불평하고 맹렬하게 성을 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이 제사는 마지막 제사입니다. 다음 기회에 회복할 기회가 전혀 없는 제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들면서 화를 내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고 한다면 다음에 잘 드리자 라고 생각을 하지만 기회가 없다고 생각을 하니 도저히 분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 우리의 신앙과 믿음도 마지막 주님 오실 때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회복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욕하고, 주님을 무시하고, 대들고, 분노합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가인의 모습이 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교회에 나온 다고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인처럼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 우리도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안색이 변하니’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נפל(나팔 5307)입니다. 이 뜻은 죽다, 무너져 내리다, 죽임을 당하다, 쳐 죽이다, 사로잡아가다, 끌려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심판을 받으니 죽게 되고 죽임을 당하게 되고, 쳐 죽이고 지옥의 불로 사로잡혀가고, 끌려가니 안색이 변하는데 즉시로 완전하게 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을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과 믿음도 늘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벨의 제사가 되도록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매일 의지하고 겸손하게 세상에서 살지만 나의 욕심에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드리고 첫 것을 드리고 더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삶을 살아야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인색하게 가인처럼 드리면 결국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하고 마지막 날에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받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의 제사를 받지 않으면 나는 지옥의 불로 떨어지고 맙니다. 더 이상 회복할 수 있는 기회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평소에 준비해야 합니다 . 기름을 매일 같이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이 오신 후에는 혼인잔치 집의 문이 닫혀지고 미련한 다섯 처녀가 와서 문을 두드려도 절대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가인의 삶이 아니라 아벨의 삶이되기를 바라고 제사도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날마다 드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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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장 주석 강해설교]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후손들(창 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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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4장 주석 강해설교 중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후손들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습니다. 가인이 화가 나서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결국 가인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 가인의 족보가 제일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구속사 관점에서 보면 선택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5장에 아담의 후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선택받은 자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고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후손들(창 4:1-26)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得男)하였다 하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은 아내와 동침하였고 아내는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다. ‘동침한다’는 원어(야다)는 ‘안다’는 뜻으로 ‘성 관계를 가진다’는 뜻도 있다. 아담은 첫아들 가인을 얻었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원어(에스 예호와)는 ‘여호와의 도움으로’라는 뜻이다.

[2절]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다. 농업과 목축업은 인류 역사의 아주 초기로부터 있었던 가장 오래된 직업들이었다.

[3-4a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원어(미케츠 야밈)는 ‘날들의 끝에서’라는 뜻인데, 상당히 많은 날들이 지난 것 같다. 영어 성경들은 ‘시간이 지나면서’(in the course of time)(NASB, NIV)라고 번역한다.

어느 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다. 훗날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곡식 제사 즉 소제는 정당한 제사의 한 방식이었다. 한편,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으며 후에 그것도 모세의 율법에 규정될 정당한 제사 방식이었다.

[4b-5a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 ‘열납한다’는 원어(솨아)는 ‘유의한다, 존중한다.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존중하고 인정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과 그들의 제물에 대해 차별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4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기록한다.

아벨이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는 그의 제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이라고 본다.

첫째로, 아벨의 제물은 정성 어린 제물이었다. ‘첫 새끼’는 짐승 중에 가장 귀한 것을 가리킨다. ‘기름’이라는 원어(켈렙)도 ‘가장 좋은 부분’이라는 뜻이 있다. 민수기 1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소득의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주고 레위인들은 그들이 받은 모든 예물 중 그 아름다운 것을 취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다(29-32절). 거기에 세 번이나 나오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원어가 바로 이 단어이며 영어성경들은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번역하였다(KJV, NASB, NIV). 신명기 6:5는 우리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명하였다. 잠언 3:9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라고 교훈한다. 아벨은 바로 이런 정신으로 정성 어린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둘째로, 아벨의 제물은 피가 있는 제물이었다. 그것은 믿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제사이었다. 아벨은 자신이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며 장차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속(代贖)하며 구원할 구주를 보내실 것을 믿고 바라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면서 입히신 가죽옷을 통해 깨달았든지, 혹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말미암아 받은 진리이었을 것이다. 죄인이 오직 대속하실 구주의 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진리이다(창 8:20; 레 1장; 히 9:7, 12; 10:19; 고전 11:25; 계 13:9). 그러므로 레위기 17:11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말하였고, 히브리서 9:22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두 가지 조건을 교훈한다 고 보인다. 하나는 정성이고 , 다른 하나는 속죄의 피이다 . 특히 속죄의 피는 성경 전체에 계시되어 있는 근본적인 진리이다. 죄인은 죽어야 마땅하지만,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아벨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예표이다 .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셨다(마 20:28). 우리는 그의 피로 죄씻음과 거룩함을 얻었다(히 9:12; 10:10, 14).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5b-8절, 가인이 아벨을 죽임

[5b-7a절]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 ‘안색이 변하였다’는 원어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그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엎드려 회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교만하였고 심히 분노하며 얼굴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그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며 그것이 정당치 않다고 지적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는 구절의 원어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열납되지 않겠느냐?”라고 번역되기도 한다(Syr, Vg, KJV, NIV). 하나님의 말씀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포한다.

[7b절]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사람이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선과 악,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선을 행치 않으면 악을 행케 될 것이며 악을 피하려면 선을 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큰 죄를 짓는 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4:17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말한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원어는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며 너는 그를 다스릴 것이라”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KJV). ‘그의 소원’은 아벨에 대한 소원 즉 아벨을 이기고 지배하려는 소원을 가리키며 또 그는 아벨을 다스릴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으로 보인다.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그들이 들에 있었을 때 가인은 일어나 그 아우 아벨을 죽였다. 그의 교만과 불쾌함은 분노와 시기심과 미움으로 발전했고 마침내 살인의 행위로 나타났다. 이것이 인류 역사 최초의 살인 사건이었다.

죄가 전혀 없었던 세상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살인이라는 추한 죄악이 나타났다. 선하게 창조되었던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 속에 이런 무서운 죄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시기와 미움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육신의 일들을 행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갈 5:19-21; 계 21:8; 22:15).

본문은 인간의 죄성을 증거한다 . 가인 속에는 교만과 시기심과 미움과 분노가 있었고 그것은 살인에 이르게 하였다 . 이것은 모든 죄인들에게 있는 죄악 된 성질이다. 우리는 이런 죄악성을 경계해야 한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며 그런 자는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요일 3:15). 또 본문은 의인의 죽음을 증거한다 . 인류의 역사상 많은 무고한 자들, 특히 순교자들의 억울한 피흘림이 있었다(마 23:35; 계 6:9-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9-15절, 가인에게 내리신 벌

[9-10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찾아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거짓말을 하며 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하였다.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벨의 억울한 죽음을 변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지라도, 그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살인 사건을 다 알고 계셨다.

[11-12절]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인에게 징벌을 선언하신다. 그 징벌은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저주는 두렵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내용이었다.

첫째는,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이다. 농사의 수확은 인간 생활에 필수적 요소인데, 땅이 다시 효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물질적인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는, 너는 땅에서 떠돌며 방랑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원어(나 봐나드)는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자’라는 뜻이다(BDB).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사람이 안정이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방랑하고 방황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13-14절]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징벌이 너무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또 그는 장차 떠돌며 방랑하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 이것은 악인들의 두려움이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나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친다(잠 28:1).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그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표를 주어 만나는 자들에게 죽임을 면케 하셨다. 그 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그가 살인자에게 주신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셨다.

본문은 죄의 결과를 증거한다 .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은밀한 죄를 다 알고 계셨고 그 죄에 대해 벌하셨다. 가인은 이전같이 땅의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며 ( 물질적 벌 ) 떠돌며 방랑할 것이며 ( 환경적 벌 ) 죽음의 두려움을 가질 것이다 ( 심리적 벌 ). 우리는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

16-26절, 가인의 자손들과 셋의 아들 에노스

[16절]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가인은 하나님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앞을 떠나 나갔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섬기는 일을 멀리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가인의 후손들에게서는 경건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주신 셋의 아들 에노스 때가 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줄 몰랐다.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 놋이라는 원어는 ‘방랑, 떠돎’이라는 뜻이다. 그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는 말씀은 에덴동산의 위치를 추측케 만든다. 만일 에덴동산이 오늘날 지중해 지역이었다면, 에덴동산에서 네 강이 발원하였다는 말씀(창 2:10-14)이나 그가 에덴 동편에 거했다는 말씀과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역이 이전에 높은 산악 지역이었다가 후에 지형의 큰 변화로 바다가 되었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17-18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가인은 그 아내와 동침하였고 에녹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인류의 초기에는 가족들 간의 결혼이 불가피하였다. 성경은 꼭 필요한 내용을 선택하여 쓴 역사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들이 많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아담이 창조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고, 그때에는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많은 딸들이 이미 출생되어 있었을 것이다. 가인은 에녹을 얻은 후에 한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불렀다. 그가 성을 쌓은 것은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녹은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22절]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하였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여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는 것 즉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는 하나님의 뜻이다(딤전 3:2). 그러나 라멕은 특이하게 두 아내를 취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절제되지 않은, 악한 육신적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멕의 아들들에게서 다양한 직업이 나타났다. 라멕의 첫째 부인인 아다의 첫아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가 장막에 거한 것을 보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유목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는 유목민들의 조상인 셈이다. 둘째 아들 유발은 수금과 통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는 음악가와 연주가들의 조상이었다. 라멕의 둘째 부인인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 즉 대장장이 혹은 철공업자이었다.

[23-24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그가 그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말했고 가인을 위해 벌이 칠 배일 것이라는 하나님의 긍휼의 배려를 인용하며 자신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가인의 6대손 라멕 속에는, 가인 속에 있었던 악하고 과격한 감정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가인보다도 더 뻔뻔스러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25절]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아벨이 죽은 후, 아담은 다시 아내와 동침하였고 하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셋이라고 불렀다. 셋은 하와가 지은 이름이었다. 셋이라는 원어는 ‘둔다, 놓다’는 단어(쉬스)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이것은 아벨이 죽은 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일 것이다. 창세기 5:3은 아담이 셋을 얻은 것이 그의 나이 130세 때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의 생활이 얼마 동안인지 모르지만 약 10년 정도만 잡고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성장에 약 60-70년만 잡아도 아벨이 죽은 후 50-60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 될 것이다.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은 아들 에노스를 낳았는데, 그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후반부를 다시 번역하면, “그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더라,” 즉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5:6에 의하면, 셋이 아들 에노스를 낳은 때는 그의 나이 105세 때이었다. 아담이 셋을 낳은 것은 130세 때이며 셋이 에노스를 낳은 때가 105세 때이니, 아담과 하와가 몇 세에 범죄했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범죄한 지 적어도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또 아벨이 살해된 지 상당히 세월이 흐른 후에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이다. 범죄한 아담과 그 자손들은 영적으로 매우 무디어져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찾지도 않았다(시 14:1-3; 49:12, 2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가인의 자손들을 통해 인류 사회는 다양화되고 있었다 . 가인은 성을 쌓았다. 가인의 7대손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목축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통소 잡은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이었다. 이와 같이, 가인과 그 자손들에게서 건축업, 목축업, 음악가, 철공업 등 다양한 일들이 나타났다. 가인의 자손들에 대한 기록은 셋의 아들 에노스 때의 일과 대조된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성경의 강조점이 있다. 가인 자손들의 문제점은 불경건과 부도덕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고 살인까지 했다. 가인의 자손들은 세상일에는 힘썼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며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각자의 재능과 직업을 따라 일상생활을 해야 하지만 ,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따라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해야 한다 .

[역대상 5장 주석 설교말씀] 요단 동편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대상 5: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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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자를 위한 땅의 외침

< 1 >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얻었습니다. ‘동침하다’는 히브리어는 ‘야다’인데, 이는 ‘안다’, ‘이해하다’ 등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 말은 ‘성관계를 갖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만, 성관계가 인간적 친밀감과 온전한 앎의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출산한 하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가인, 곧 ‘얻음’이라는 의미로 붙인 것인데, 이 말은 동시에 ‘창’(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삼하 21,16).

우리말 성경에는 ‘남자 아이’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에는 ‘한 남자’(이쉬)를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남자라는 말을 신생아에게 사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요. 그래서 주석학자들은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나, 가인 이야기에서는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온 것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녀평등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후 아담과 하와는 아벨이라는 이름의 동생을 낳았는데, 아벨은 히브리어로 ‘헤벨’인데, 그 뜻은 ‘숨’, 또는 ‘허무’를 의미합니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설명이 없지만, 이 이름의 뜻에서 우리는 그가 짧은 생을 살 것이라는 암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창 4,2). 이로써 전혀 다른 생존방식을 갖는 개별적인 직업들에로 인류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분열은 제단의 분열로 이어졌고, 인류의 형제애가 파괴될 만큼 심각해질 것을 암시합니다.

< 2 >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고 합니다. 약 7만 년 전에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고, 약 12,000년 전에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고, 약 500년 전에 시작된 과학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 수도 있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 Peter Paul Rubens, 「Cain Slaying Abel」(1608년 혹은 1609년) ⓒWikipedia

오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성경의 창세기,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12,000년 전에 발생한 농업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농업혁명 이전, 인간은 250만 년 간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사는 방식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이 대략 1만 년 전 달라진 것이지요. 인간은 씨를 뿌리고, 작물에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좋은 목초지로 양을 끌고 갔습니다.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경 터키 남동부, 서부 이란, 에게 해(海) 동부 지방에서였습니다. 밀을 재배하고 염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9,000년경이었습니다. 완두콩과 렌즈 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 포도는 기원전 3,500년에 재배가 시작되었고, 밀은 기원전 4,000년부터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농업혁명은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기원전 13,000년경, 사람들이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먹고 살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여리고 오아시스 주변 지역이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기껏 1백 명 정도의 건강하고 영양상태가 비교적 좋은 방랑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기원전 8,500년 야생식물이 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이 오아시스에는 1천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겼다고 합니다.

< 3 >

농부였던 가인이 목자였던 아벨을 살해한 이 사건은 바로 이런 농업혁명기의 사회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에게 땅에서 거둔 곡식을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습니다. 주목할 것은 가인과 아벨이 따로 따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제의의 차이는 단지 제물의 차이가 아니라, 공동체의 종교와 생활의 차이도 드러냅니다.

농부는 정착생활을 하지만, 유목민은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토지와 집에 대한 큰 집착이 없었습니다. 유목민에게 집은 언덕과 시내, 숲과 열린 하늘을 포함하는 땅 전체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종일 작은 밭이나 과수원에서 일했고, 가정생활은 나무나 돌, 진흙으로 지어져 면적이 몇 십 제곱미터에 불과한 비좁은 구조물, 즉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내 집에 대한 애착과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 된 존재의 심리적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편애의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곡식제물보다 동물제물을 더 좋아하셔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른바 유목 문명과 농경 문명 사이의 문화적 충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두 문명 사이의 우열을 다투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경작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히브리서 11장 4절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보도한 것을 근거로, 종교개혁자들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마음이 가인보다 아벨이 더 낫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이 아무런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제물을 받아들일지 말지, 어떤 제물을 반기실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지 인간이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이신 하나님은 ‘은혜롭고 싶은 자에게는 은혜롭고, 자비롭고 싶은 자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출 33,19)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신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신 것에 대해 가인은 몹시 화가 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얼굴이 아우에게 향하는 것을 시기했던 것이지요.

사람만이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물론 자기감정을 잘 감출 수 있어 도무지 얼굴을 보고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지만, 사람의 얼굴은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1890-1981)이 말한 것처럼, ‘얼골’, 곧 ‘얼이 들어있는 골짜기’와 같아,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나는 자리이지요.

화가 난 가인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이 되었는지 하나님은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절박해지셨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위기에 처한 아들에게 퇴로를 열어주려는 아버지다운 말씀입니다. 비록 제물이 받아드려지지는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가인이 버림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떳떳한 사람은 얼굴빛이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했다는 올바르지 못한 일이 무엇인지 성경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신 이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후 가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꾀어내 쳐 죽였습니다. 오래 전에 독일에서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 라는 질문을 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람은 맞아 죽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영상매체의 영향이겠지만, 사람이 총에 맞아죽든지, 칼에 맞든지, 주먹으로 맞아 죽는 것만 보아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다른 죽음의 형태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가인에게 묻습니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이 죽은 것을 몰라서 물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위치를 물은 것이 아니라, 가인의 마음과 행동을 물은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위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질문이지요.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은 타자(동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아담은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당돌하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형으로서 동생을 지키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은 동생에 대한 책임을 타자 혹은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피, 곧 생명은 여전히 살아서 울부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류 역사상 최초의 형제살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우를 죽인 형 가인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형벌을 내리십니다: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은 가인에게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가혹한 것은 가인이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곧 살해당할 운명이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가인은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시며,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에덴의 동쪽 어디에 놋이라는 지역이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놋’이라는 지명에서 히브리어 ‘nod’, ‘떠도는’(12절)이라는 뜻을 재발견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놋’이라는 지역은 ‘휴식이 없는 땅’을 상징합니다.

< 4 >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 이야기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왜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반기시면서, 형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을까? 곡식 제물보다 피 흘리는 동물 제물을 더 좋아하셨기 때문일까?

둘째,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자, 몹시 화가 난 가인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르셨단 말인가? 하나님은 가인의 아우 살인을 막으셨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치 아담과 이브가 금지한 열매를 먹을 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을 수도 있었는데 왜 막지 않으셨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셋째,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후, 죽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무고한 사람의 피를 받아 마신 땅도 더 이상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악이 땅, 곧 자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 5 >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 가인과 아벨은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사이의 역사적 갈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시기와 폭력, 화와 (형제)살인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원형론적으로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악의 또는 적대감, 반감, 적의, 원한. (2) 적극적인 해악, 위해, 가해. (3) 다른 사람이 소유한 이점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야기되는 반감과 억울한 감정.

‘시기’에 대하여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인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시기는 고유한 인간본성으로, 시기심에 사로잡힌 자는 고통과 고뇌에 빠질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행복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린다. 시기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스스로에 대한 도리에도 어긋나는 감정이다. 또한 시기가 자기 자신에게도 해로운 이유는 자기 장점이 다른 이의 장점에 비해 하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기는 사람들이 가장 부정하고 싶은 욕망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시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 좁고, 비열하며, 쩨쩨하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는 ‘결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밀리에 계획되는 음모의 성격을 띱니다. … 뭐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악의, 냉혹하고도 은밀한 적의, 이룰 수 없는 열망, 숨겨진 증오와 원한이 시기의 중심에 덕지덕지 매달려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서 일단 벗어난 인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데, 그것은 형제 살인이었습니다. 인간은 불가항력적인 힘(악마적인 세력)에 사로잡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인간 본질의 일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벨 살해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인신(人身) 제사였다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제사), 즉 제단에서 죄를 저질렀다는 데 가인이 저지른 죄의 가공(可恐)스러움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인 존 도미닉 크로산은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을 당시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장남이 상속권을 가지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대항문화의 시각에서 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형 이스마엘(창 16,11) 대신에 동생 이삭을 선택하시고(창 17,19), 형 에서(창 25,25) 대신에 동생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것이(창 25,26) 그것이지요. 하나님이 강력한 가부장제를 뒤집어엎는 결정은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창 25,23)라는 선언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형인 가인보다 동생인 아벨을 선호하신 사건은 바로 그런 문화적 도전을 예비적으로 경고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가인의 아벨 살해 이야기는 농부가 목자를 살해하고, 첫 번째 도시를 세웠으며, 그 후 폭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된 사실의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죄를 다스릴 수도 있는 자유의지와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는 피할 수 있습니다. 폭력이 점차 확대되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그런 폭력의 확대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문명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폭력은 인간 본성에서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폭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며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아벨 살해는 최초의 형제살인의 사례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의 원초적 기원을 죄로 간주한다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죄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동생을 살해한 가인을 하나님께서 처벌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땅이 농부 가인을 저주한 이유는 그가 동생의 피를 뿌려 땅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농부로부터 다시 수렵채취 생활자로 전락했습니다. 인간 행위로 인한 귀결이 하나님의 처벌로 잘못 해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넷째,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가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인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불순종하여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게 된 것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신 것처럼, 유랑하는 신세가 된 두려움에 사로잡힌 가인에게 하나님은 표를 찍어 주셔서,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표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문신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표는 동생을 살인한 죄인인 가인도 하나님에 의해 보호되는 신비스런 보호관계를 지시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피의 외침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 억울한 희생은 자연이 보복한다는 것, 하나님은 살인자도 보호하시면서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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