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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의 의미 |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ㅣ김학철 목사,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ㅣ잘잘법 Ep.78 150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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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주 명토박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계좌도 갖고 있지 않고
통장도 없으세요
고린도후서하고 고린도전서에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어떤 자세로 하라고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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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및 교육 자료실 – 헌금에 대하여

2. 헌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헌금은 내 자신의 생활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표로서 예배를 통하여 바치는 제물입니다. 제물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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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apocmc.org

Date Published: 7/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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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헌금이란 – 성경적인 의미 알고 헌금합시다! – CTS기독교TV

정희진 기자, 신학적으로 헌금은 어떤 의미인가요? 기자) 네, 신학적으로 봤을 때 헌금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와 …

+ 더 읽기

Source: www.cts.tv

Date Published: 8/10/2022

View: 5177

헌금의 의미/고후8:1-9/이동원목사 – 네이버 블로그

헌금의 의미. 이동원 목사 2001-11-11. 교회 밖에 계신, 믿지 않는 분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기피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그 첫 번째가 교회에 나가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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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6/2022

View: 6740

기획기사 – [헌금에 대하여] 헌금(봉헌)이란 무엇인가?

‘헌금'()이라는 한글 뜻은 ‘바치는 돈’이다. ‘헌금’은 구약과 복음서에 나오는 ‘선물’이나 ‘바치는 물건’이라는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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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formedjr.com

Date Published: 3/2/2022

View: 8038

새신자 가이드10-헌금이란 무엇인가? – 디럭스웹바이블

헌금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대신 , 돈이나 물건으로 대신 바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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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ebbible.tistory.com

Date Published: 10/21/2022

View: 3551

헌금 종류의 출처 – 크리스찬 투데이

과거 구약의 헌금은 율법적인 의미의 헌금이지만 신약시대의 헌금은 속죄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입니다. 또 절기헌금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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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us

Date Published: 7/2/2022

View: 4222

성경이 말하는 헌금의 정의, 용도, 원리 – 유평교회

헌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입술뿐만 아니라 재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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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6/14/2022

View: 428

[교회용어 바로 알기] 헌금 vs 연보 – 국민일보

그러나 헌금과 연보는 어원과 단어의 쓰임에 많은 차이가 있다. 헌금(獻金·offering)은 성경에서 주로 ‘고르반(qorban)’과 ‘도라(dora)’라는 두 개의 단어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18/2021

View: 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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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돈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ㅣ김학철 목사,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ㅣ잘잘법 E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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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헌금 의 의미

  • Author: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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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7.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BTo1CoEbzU

성경적인 의미 알고 헌금합시다!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헌금 등 한국교회 성도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헌금을 드리고 있는데요. 성경적인 헌금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희진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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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인 헌금. 헌금은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남정산 성도 / 사랑의교회

양성자 집사 / 산정현교회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에 대한 응답이라는 헌금의 의미를 교회 현장에서는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적 헌금의 의미 중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을 묻는 질문에, 성도의 마땅한 의무라고 답한 목회자가 47.1%로 가장 많고, 구원과 영생에 대한 마땅한 보답이라는 응답이 30%, 복음사업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응답이 14.3%, 헌금을 성실히 내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는 응답이 8.6%로 뒤를 이었습니다. 목회자 10명 중 3명만이 성경적 헌금론을 바르게 알고 있는 셈입니다.

이같은 현상은 먼저 목회자들이 성경적 헌금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기 때문인데, 실제로 목회자의 56%가 헌금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아울러 체계적 교육을 받지 않고 헌금에 대해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 알았다는 응답이 58%로 가장 많고, 설교준비를 하다가 또 다른 사람의 설교나 강의를 통해서 알게 됐다는 응답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병선 박사 / 백석대 실천신학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헌신인 헌금. 본래 목적을 알고 드릴 수 있도록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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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헌금에 대한 정확한 인식 확립이 시급해 보입니다. 취재 기자와 함께 성경적으로 올바른 헌금 생활에 대해 자세히 짚어 보겠습니다.

정희진 기자, 신학적으로 헌금은 어떤 의미인가요?

기자) 네, 신학적으로 봤을 때 헌금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해 우리의 전 삶을 드리겠다는 헌신과 감사, 순종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상구 교수 / 백석대학교

앵커) 올바른 헌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목회자들이 헌금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부족하다니 안타깝습니다.

기자) 그렇습니다. 목회자 양성 기관인 신학대학원에서 헌금 신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과정은 거의 없습니다. 유일하게 예장통합 소속의 영남신학대 신학대학원이 ‘교회와 재정’ 과목을 개설해 놓은 실정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목회 실습 과목이나 교회 행정학 과목에서 부분적으로 교회재정에 대해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앵커) 그렇군요. 성경적인 헌금관이 약한 목회자들의 경우 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기자) 그렇습니다. 실제로 목회자 10명 중 6명이 헌금설교를 목회계획에 포함시키지 않으며, 10명 중 1명은 헌금설교를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헌금 설교를 피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물질에 초연하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 또 성도들이 헌금 설교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이유로 헌금 설교를 기피하는데요. 헌금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경우 헌금을 많이 하면 더 큰 축복을 받는다거나 하나님께서 헌금한 것의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갚아주실 것이라는 등 잘못된 헌금관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김상구 교수 / 백석대학교

앵커) 신학적으로 올바르고 건강한 헌금생활을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기자) 먼저 신학교에서부터 성서적인 기초교육이 이뤄져야 하며 기존의 목회자들에 대해서는 교단 차원에서 재교육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헌금과 관련된 말씀을 설교 중에 매끄럽게 가르치고, 연말에 설교계획을 수립할 때 헌금설교도 포함시키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또 교회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공개하면 목회자는 물질에 연연한다는 억울한 오해를 피할 수 있고, 성도들은 헌금에 대한 건강한 동기가 유발돼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앵커) 그렇군요. 헌금의 성경적 의미와 올바른 헌금생활을 위한 방법들을 알아봤습니다. 정 기자, 수고했습니다.

헌금의 의미/고후8:1-9/이동원목사

고후 8:1~9

헌금의 의미

이동원 목사 2001-11-11

교회 밖에 계신, 믿지 않는 분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기피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그 첫 번째가 교회에 나가니까 돈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설문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종교 개혁시대에도 같은 문제가 지적되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위시한 각종 헌금 강요가 매우 심각한 정도가 되자, 당시의 세상 인심은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루터의 종교 개혁의 시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인 캘빈은 그의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 바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 같은 것에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매우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별도의 헌금 시간도 갖지 않고 헌금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년에 많아야 두 번, 그렇지 않으면 한번도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이런 문제에 관해서, 저 자신이 마음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담을 안 주려는 시도가 만일 우리 교인들로 하여금 헌금을 소흘히 하도록 만든다면,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상급을 놓치게 만들었다면, 이것은 우리 교인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새로운 부담이 제 마음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돈은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돈은 인생의 가치관을 대표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나는 주머니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회심을 믿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고 구원받았다면 그 돈의 쓰임새가 달라질 수밖에 없지요.

제가 자주 하는, 좋아하는 얘기입니다마는, 미국의 어떤 침례 교회에서 침례식이 진행 중인데, 어떤 신사 한 분이 빨리 침례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뭘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제가 지갑을 어디에다 놓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이때 목사님이 그 교인에게 지갑까지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침례라는 것은 물 속에 들어갈 때 “나의 옛 사람은 죽었다!” 나올 때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가 되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었다면 과거에 돈을 나 자신만을 위해서, 내 향락을 위해서, 또 내 만족을 위해서, 욕심을 위해서 썼던 내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면 이제 돈을 하나님을 위해서도 쓰고 또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죠.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내가 이제 내 물질을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금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헌금한다는 것, 도대체 이 헌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마게도냐 지역 교인들이 헌금한 모본을 바울 사도가 칭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마게도냐까지 들려왔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나중에 설립된 교회였지만, 먼저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기쁨으로 헌금을 해서 보냈던 것입니다. 일종의 구제 헌금의 형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기회로 해서, 이것을 계기로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고린도후서 8장, 그리고 다음 9장에 걸쳐서 진정한 헌금의 의미와 실천을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치고자 시도했습니다.

헌금의 의미,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헌금은 은혜의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시면 은혜라는 단어가 다섯 차례 이상이나 등장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4절입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또 6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하라” 7절에도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 말합니다. 또 한번 더 나와요.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은혜라는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짧막한 본문에 계속 튀어나옵니다. 잘 아시는대로, 은혜라는 단어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들은 은혜를 받은데서 끝나지 않고,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제 은혜가 필요한 곳에 은혜를 나누어주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이웃들을 향해서 헌금을 했던 것을 가리켜서, 바울 사도는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받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또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은혜를 드리는 자, 다시 말하면 은혜에 응답하는 자가 되었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본격적인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제가 강조를 했습니다마는, 골로새서 1장 5절 이하에 보시면 바울 사도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날부터, 즉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깨달은 날부터 너희 믿음이 자라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경험함이 없이는 신앙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구나!” 하고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의 출발이지요.

바울 사도는 무엇보다도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어떤 행위로도 주님 앞에 설 수 없었던 우리를 주께서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느날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의 여정을 쭉 살펴보다가 유명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오직 나의 나된 것은, 내가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의 9절을 한번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부요한 분 아닙니까?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자요 만물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은 정말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부요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여기서 부요,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인 부요,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어요. 생명까지 주셨어요. 그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하심이라” 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희생, 그의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부요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요는 물질적인 부요가 아니예요. 우리가 예수믿고 삶의 의미를 느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이 넉넉한 의미에 있어서 부요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면, 이제 그 은혜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너희가 이 은혜를 성취하라”고 하며, “이제는 은혜 받은 자로서 은혜를 나누는 일에 힘쓰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헌금을 격려하고 있었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면 헌금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차라리 않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내가 은혜를 깨달은 자라면 기쁨으로 드릴 수가 있잖아요?

만약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드려야 한다면, 이 드림의 행위, 즉 헌금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의무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깨달은 자라면 이것은 짐이 아니지요. 그것은 기쁨입니다. 오히려 내가 인생에서 이렇게 쓰임받는 것을 감격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부모들이 그렇습니다마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어떤 훈련의 목적으로 심부름을, 오히려 한국의 아이들보다도 훨씬 더 어렸을 때 잘 시키잖아요? 그래서 잔디 깍는 것도 시키고, 집안 청소도 시키고 그러지요.

그런데 빌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부모가 심부름에 대한 어떤 댓가 얘기를 않하니까 좀 삐친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느날 자기부모에게 이 소년이 청구서를 보냈대요. 그 청구서에는 “잔디 깎기 5불, 집안 청소 5불, 아빠 심부름 4불… 합계 45불”이라고 썼답니다.

청구서를 받은 아버지가 빙그레 웃다가, 아버지도 아들에게 청구서를 하나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년이 아버지에게서 날라온 청구서를 받아보니까, “출생비 무료! 양육비 무료! 병원비 무료! 교육비 무료! 운동비 무료! 피복비 무료! 식생활비 무료! 여행비 무료! 합계 무료!” 라고 적혀 있었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지금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값없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주어지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오늘 우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헌금이라는 것은 그의 은혜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응답에 불과한 것입니다. 헌금은 바로 “은혜의 응답이여야 한다”라고 본문을 가르칩니다.

헌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둘째로 헌금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의 5절에 보시면,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헌금 드릴 때, 여러분들이 물질을 드린다고 생각하시면 않돼요. 먼저 드려야 할 것이 있어요.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리는 한 상징적인 표현이 바로 헌금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존재의 문제, 자기라는 존재의 문제, 그리고 헌신의 문제라고 가르칩니다. 즉 “나”라는 존재, 또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소유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냐라는 문제를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데, 십일조의 기원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어떤 설교자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십일조 내지 않으면 벌 받는다! 저주 받는다!” 라고 한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또 성서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그런 가르침이 있지마는, 그것이 신약적인, 그리고 복음적인 가르침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십일조 안 내도 절대로 저주 받지 않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러나, 십일조는 헌금의 좋은 가이드라인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가 어디에서, 어떻게 처음 기원했습니까? 창세기 14장에 그 얘기가 처음 나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전쟁포로가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종의 기습공격을 통해서 조카 롯을 구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한 거에요. 그리고 승전한 장군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귀로에서 아브라함이 이상한 인물 하나를 만납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분이 좋았겠죠.

그런데 그 다음에, 이 제사장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4장 20절에 보시면 이런 메시지를 띄웁니다. 그 메시지가 뭐냐하면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말씀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드렸지요. 이것이 성경에서 십분의 일이라는 개념이 처음 나오는 장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니까, 아브라함의 이고(ego)가 굉장히 고양(高揚)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 내 전략은 적중하지 않았는가? 역시 나는 머리가 좋아! 내 전략은 그대로 들어맞았어!”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또 사람들의 환영의 물결, 박수를 받으면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보내신 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이 메시지를 주는 거에요.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이 메시지의 핵심이 뭡니까? 네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분이 누구라고요? 하나님! “전쟁에 승리한 것이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해? 네 머리가 좋아서? 네가 그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지혜, 어디서 온 줄 알아? 싸울 수 있는 힘, 어디서 온 줄 알아? 네가 아니야, 저분이야! 높으신 하나님이야! 다시 말하면 전쟁의 승리의 원인이 네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야!” 이 메시지를 듣는 순간, 아브라함이 정신이 번쩍 난 거에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 때문에 승리했구나!” 이것을 깨닫는 순간,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기꺼히 멜기세덱에게, 제사장에게 드렸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러분 헌금이 왜 힘듭니까? 헌금할 때, ‘이게 어떻게 번 돈인데!’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좀더 생각을 해보세요. 다음 주일이 감사 주일입니다. 감사란 말을 영어로 Thank라고 그러죠? 그런데 이 Thank라는 단어는 또 하나의 단어와 같은 어근(語根) 에서 나왔어요. 그것은 Think 라는 단어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잘 생각을 해보셔야 돼요. 잘 생각을 해보면 돈 벌 수 있는 지혜,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돈 벌 수 있는 건강과 힘,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건강으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상황 때문에 벌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아니야, 네가 번 게 아니야, 나야, 나!” 이것 깨닫는다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꺼냐는 말이에요. 이 소유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됩니다.

유명한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면, 이런 재미나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영국 농부 하나가 소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아주 좋아 가지고 자기 부인한테 이렇게 말했대요. “여보, 송아지 두 마리나 낳았는데 내가 한 마리는 우리 것으로 하고, 한 마리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께 바칠꺼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소리 하니까 부인이 아주 기분이 좋았던 가봐요. 그래서 ‘아! 우리 남편이 신앙이 좀 생기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아주 시무룩해 가지고서 집에 들어오더니 부인한테 한다는 소리가 송아지 중에 한 마리가 죽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부인이 “어떤 송아지가 죽었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이렇데 대답하더랍니다.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지”

이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면, 또 나 자신도 주님의 것이라면, 기꺼이 나 자신의 존재를 주 앞에 다시 드릴 수가 있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의 문제는 결국 드림의 문제입니다. 나 자신을 주 앞에 드린다는 것입니다. 헌금은 은혜에 대한 응답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드림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진정한 헌금 정신은 사실은 헌신의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헌금이 바로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에요. 내가 나 자신을 주 앞에 드리는 거란 말이지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은 헌신 정신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내가 드린다는 것은 희생의 수준에까지 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네 번 째로 헌금의 의미, 그것은 사랑의 증명입니다.

…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8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9장에 보면 이런 헌금의 구체적인 몇가지 실천 사항들을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헌금에 대하여] 헌금(봉헌)이란 무엇인가?

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 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이번 기획기사는 ‘헌금’입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에 대한 강조로 유명한데, 너무나 왜곡된 이해와 일방적인 가르침이 많습니다. 이에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물질관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헌금을 예배와 직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려고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 6:21)는 주님의 말씀은 신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 편집위원장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외래교수

헌금(봉헌)이란 무엇인가?

들어가며!

우리는 매 주일 예배에서 헌금을 한다. 미리 준비한 까칠까칠한 돈을 가지런하게 챙겨 봉투에 넣어 헌금 주머니나 헌금함에 넣는다. 액수가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다. 예배 중간에 헌금하는 교회도 있고 교회당 입구에 헌금함을 놓고 예배당에 들어가면서 넣도록 하기도 한다. 헌금종류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추수감사헌금, 맥추헌금, 건축헌금 등. 어떤 사람이 여러 교회에서 찾아본 헌금 종류는 무려 71개나 된다고 한다. 많은 헌금 때문에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십일조 헌금을 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가난하게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산물이니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대체 헌금이란 무엇입니까? ‘헌금’은 무엇이고 ‘연보’는 무엇인가? 헌금은 목사 생활비와 교회 경영(?)을 위해 주는 ‘기부금’인가? 도대체 헌금이란 무엇인가? 헌금의 원리는 무엇이며, 헌금의 목적, 헌금의 방법, 헌금의 자세, 헌금의 양, 헌금의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다. 이런 저런 실제적인 질문은 ‘헌금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의외로 ‘헌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성경은 헌금에 대한 정의를 직접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헌금에 관한 수많은 책이 있지만, 속 시원하게 ‘헌금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헌금은 이런 저런 종류가 있고 구약과 신약에 이렇게 사용되었는데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해야 한다는 실용적인 책들이 대부분이다. 헌금이 주로 예배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배학 책을 뒤져보지만, 이상하게도 헌금에 관해 언급하는 책은 거의 없다. 가장 가까이 접하고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헌금! ‘헌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글은 ‘헌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찾아볼 것이다.

1. 용어의 문제

헌금?

성경에는 ‘헌금’이라는 단어가 구약과 신약에 몇 군데 나타난다(민 31:50; 대하 34:9, 14; 눅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눅 21:1)에서 ‘헌금’은 ‘선물’ 혹은 ‘바치는 것’(gifts & offerings)을 의미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헌금이라는 단어도 같다. ‘헌금’은 돈일 수도 있고(대하 34:9) 물건(패물,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고리, 목걸이)일 수도 있다(민 31:50). 자세히 보면 ‘헌금’이라는 단어는 주로 신약교회가 아니라,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나 ‘물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실제로 ‘헌금’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신약성경에서도 복음서에만 언급될 뿐 신약의 역사서와 서신서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헌금’()이라는 한글 뜻은 ‘바치는 돈’이다. ‘헌금’은 구약과 복음서에 나오는 ‘선물’이나 ‘바치는 물건’이라는 의미보다 좁다. ‘헌금’은 돈으로 축소되고 ‘헌물’(레 23:38; 5:15 등)의 의미는 빠져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와 한국어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헌금’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대 한국 교회가 예배 가운데 물건이 아니라, 대부분 ‘돈을 바치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니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선물’과 ‘바치는 것’의 현대적 적용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헌금’이라는 용어는 성경적 본래 의미를 부족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의 현실적 적용의 용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 ‘헌금’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분명히 빈약한 번역이니, 다른 좋은 번역을 찾아본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헌금’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고르반’이다. 이 ‘고르반’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헌금’(민 7:10)이라고 번역된 것 이외에도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헌물’(민 7:10), ‘제물’(겔 20:28)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헌’(레 1:3)이라고 번역되었다. 민수기 7장 10절에는 ‘고르반’이라는 단어에서 ‘헌물’과 ‘봉헌’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 을 위하여 헌물 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한 단어에 대한 서 너 가지 번역 가운데 가장 본질에 가까운 번역을 찾으라고 한다면 ‘봉헌’을 선택하고 싶다. 한글 ‘봉헌’()은 ‘(사물을 어떤 분에게)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침’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봉헌’이라는 단어는 ‘제물’, ‘(헌)금(돈)’, ‘(헌)물건’을 모두 포함한다. 가장 적절한 용어이다.

연보?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약성경에는 ‘봉헌’이나 ‘헌물’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엄밀하게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연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물론 ‘연보’라는 단어도 번역의 문제가 없지 않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주로 등장하는 ‘연보’라는 단어는 한 단어의 번역이 아니라, 다양한 헬라어 단어의 번역이다(롬 15:26; 고전 16:1-2; 고후 8:2, 20; 9:5, 11, 13). 우선 ‘연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교제’(koinonia, 롬 15:26; 고후 9:13), ‘관대함’(generosity, 고후 8:2), ‘복’(eulogia, 고후 9:5), ‘기부’(collection, 고전 16:1)라는 단어이다. 간접적으로 ‘연보’에 해당되는 표현으로 ‘섬김’(diakonia, 행 11:29 “부조”로 번역; 고후 8:4; 9:1, 12, 13 “성도 섬기는 일”)이라는 단어도 있다. ‘부조’(, help)는 ‘기부’(, contribution)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연보’()는 한글 뜻으로 ‘자기 재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다’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연보’의 의미는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으로 인해 극심한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마케도냐와 아가야 교회가 돈을 모아 도운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연보’는 성도와 교회 안에서 상호간에 ‘교제’하고 ‘관대함’으로 대하며 ‘기부’하고 ‘섬기는 행위’였다. 이 ‘연보’는 연보하는 자에게나 연보를 받는 자에게 ‘복’이다.

특별히 ‘연보’의 의미는 고린도전서 16장 1절에 나오는 “성도를 위하는 연보”의 ‘연보’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더 분명해 진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 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여기에 사용된 ‘연보’라는 단어가 ‘로게이아’(logeia)인데 ‘돈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단어의 라틴어 번역이 ‘콜렉타’(collecta < colligere ‘모으다’)인데 여기에서 ‘헌금’ 혹은 ‘연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컬렉션’(collection)이 유래했다. 이 ‘컬렉션’의 한국어 번역이 ‘헌금 혹은 ‘연보’이다. ‘연보’()의 뜻은 ‘자기 재물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다’이니 본문의 정황을 고려한 좋은 번역인 셈이다. 이 모든 용어를 종합해 보면 신약교회에서 ‘연보’는 ‘가난한 교회나 성도를 돕기 위해 모으는 돈 혹은 물건’(collection)이라고 보면 된다. 봉헌! 성경에 나오는 용어로 ‘헌금’, ‘연보’와 ‘봉헌’ 가운데 현재 우리 교회가 예배 가운데 돈을 바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적절한 용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봉헌’이다. ‘연보’라는 개념은 인간이 인간을 돕는 수평적인 것을 잘 표현이다. ‘헌금’은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수직적인 것을 표현한다. 그런데 ‘봉헌’(offering)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드릴 마음, 돈, 물질 모두를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에 사용될 용어로는 ‘봉헌’(offering)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어떤 사람은 ‘헌상’()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기도 한다. ‘헌상’은 ‘임금에게 물건을 받들어 올리다’는 뜻이다. 왕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하니 좋은 용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치다’(offering)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로는 ‘봉헌’(offering)이 있으니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봉헌’은 구약의 제사에서 나타난 의미와 신약에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2. 봉헌(헌금)의 원리 은혜의 원리 ‘봉헌’(offering)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제물이나 선물을 제공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셨다(창 4, 10, 12, 18, 21, 25). 미소 짖는 하나님! 활짝 웃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후 모든 작품을 완성하시고는 특별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했다. 모든 피조물이 조물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영광이고 복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극한 기쁨 자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이며 인간은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기쁨이고 행복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이 인간에게도 좋다는 뜻이다. 인간 존재 자체가 ‘봉헌’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 이 관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관계가 끊어지자 인간은 죽었다. 죽은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모두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진정한 의미의 ‘봉헌’은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 없는 멋진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애쓴다. 인간은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모든 돈과 재물과 건강을 자신의 것인 냥 착각하고 사용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봉헌’하지 않고 자신이나 우상에게 ‘봉헌’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죄와 비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봉헌’, ‘고르반’, ‘가까이 다가가다’, ‘to offer’) 수 없다. 은혜의 법이 아니고는 ‘봉헌’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이교에도 ‘봉헌’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봉헌’의 의미가 이교들의 그것과 정반대이다. 이교에서는 신에게 뭔가를 얻기 위해 뭔가를 바친다. ‘봉헌’을 통해 신과 하나가되거나 신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스스로 나아가 뭔가 드리고 복을 얻을 수 없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인간이 드리는 ‘봉헌’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 하나님이 먼저 주시고 그 응답으로 하나님께 봉헌한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없이는 인간의 ‘봉헌’은 불가능하다. 세상 종교는 인간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려 하지만,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다. ‘봉헌’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피의 제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제사제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들어 주신 것이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속죄제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봉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그 명령에 복종하여 응답하는 것 더 이상이 아니다. 속죄제사에서 우리가 뭔가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노여움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봉헌’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주신 은혜의 결과이다. 우리의 피가 아니라, 동물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선물이 바로 ‘봉헌’(gift & offering)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는 그 ‘봉헌’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지 우리 쪽에서 뭔가를 준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속죄제사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자. ‘봉헌자’가 자신의 두 손을 짐승의 머리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함으로 ‘봉헌자’와 짐승이 하나가 되어 ‘봉헌자’ 자신이 제단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짐승은 봉헌자의 ‘대리자’가 된다. 피를 흘린 제물을 제단 위에 완전히 태워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이 이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길을 열어 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화목하기 원할 때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봉헌’에 순종하면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절대로 제단에 불을 끄지 않도록 관리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렇게 ‘피의 속죄제사’ 조차도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하나님께 ‘봉헌’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봉헌’은 은혜의 법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길(방법)에 순종함으로 따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었다. 제사에서 순종이 빠진다면 헛될 뿐이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순종이 없는 ‘봉헌’은 빈 껍질일 뿐이다. 봉헌의 원리는 순종의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은 구약의 ‘제사’와 ‘봉헌’의 완전한 성취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되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하신 선물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셨다. 인간이 바친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제물을 바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제물로서 아버지의 택한 백성을 위해 대신 피 흘려 죽으셨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봉헌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은혜로운 ‘봉헌’의 의미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 곧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봉헌으로 구원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 하늘에 앉혀 주셨다(엡 2:4-6). 우리는 이제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릴(봉헌) 수 있다. 죄인의 신분에 있을 때에는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기에 드릴 것(봉헌)이 있다. 이 은혜의 원리에 봉헌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돈으로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헌금’이라고 부르지만, ‘봉헌’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은혜의 법에 따른 ‘봉헌’의 원리 때문이다. 주일 예배에서 순서를 정해 ‘헌금’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다’, 혹은 ‘봉헌 한다’는 뜻이다. 청지기의 원리 ‘봉헌’의 의미로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당신의 것을 맡기셨다는 청지기의 원리에서 ‘봉헌’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재물과 권세와 명예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 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 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 임이로다.”(시 50:9-12) 인간은 가진 없이 하나도 없다. 라는 말이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빈손으로 왔는데 뭔가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관리할 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4) 이 청지기의 감사의 원리에 봉헌의 의미가 숨어 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소유를 인간에게 맡겨 관리하게 하신다. “......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인간이 하나님의 소유를 맡아 관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복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파괴하고 생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스리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학대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방식하고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죄와 비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경영(엡 1:9, 3:1; 딤전 1:4)은 계속된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 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 ‘경륜’()은 ‘계획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경륜’은 ‘경영’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바로 이 ‘경영’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데 영어 ‘이코노미’(economy)가 여기에서 유래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영’(management)은 창세부터 말세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경영을 사람에게 맡기신다. 그래서 인간을 ‘청지기’라고 불린다. ‘청직()이’, 곧 ‘청지기’란 ‘오이코노모스’(oikonomos)인데 한 집안을 주인의 명령에 따라 다스리는 ‘집사’(steward)와 같은 자이다. ‘청지기’(oikonomos)는 주인의 ‘경영’(oikonomia) 철학에 따라 모든 재산을 맡아 관리해야 한다. ‘청지기’의 관리(to administer)와 경영(to manage)의 기준은 철저하게 주인의 뜻이어야 한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재산의 ‘관리자’(administrator) 혹은 ‘경영자’(manager)일뿐이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상의 모든 것을 잘 관리하고 경영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만한 그 어떤 소유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 재물, 명예, 권세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단지 위임 받아 관리하고 있을 뿐임을 지속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성경 역사 가운데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봉헌’(offering)이라는 부른다. 인간이 맡아 관리하고 경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봉헌’이다. 만약 ‘봉헌’이라는 모습이 없다면 인간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봉헌’이라는 방법,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일부, 지극히 작은 것을 드림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모여 예배한다. 그 때 자신이 가진 일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 이것이 ‘봉헌’의 의미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주일 예배의 ‘봉헌’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이다. 3. 봉헌의 목적 구약교회에 보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세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위해 봉헌했다(레위기의 제사제도). 하나님의 백성은 성막과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물질을 하나님께 드렸다(출 29:36-42; 30:36; 레 24:9). 둘째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봉헌했다(민 21-24; 신 18:1-5). 셋째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봉헌했다(신 14:28-29; 15:11; 16:11; 24:19). 신약교회에 보면 그리스도인이 예배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헌금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예배하는데 필요한 장소와 시설 유지를 위한 경비를 봉헌했다. 둘째, 교회에서 사역하는 교역자의 생활비를 위해 봉헌했다. 교역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넉넉한 생활비가 필요하다. 방문자들을 접대하는 일과 자녀의 교육비를 고려해야 한다. 셋째, 구제를 위해 봉헌했다(행 6장; 고후 8-9장; 약 2:15; 히 13:16; 갈 6:10). 이것은 교회 내에서 상호 구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 상호간의 구제도 포함한다. 고린도후서 8-9장에 보면 ‘연보’라는 말로 풍성한 구제가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 넷째, 복음전파를 위해 봉헌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협력했고 복음의 전파의 시초부터 사도가 하는 일에 참여했다(빌 1:5; 4:15). 4. 봉헌의 양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봉헌의 양은 구약시대의 규례를 보면 다양했다. 첫째, 땅의 소산(곡식과 열매)과 짐승의 1/10을 바쳐야 했다(레 27:30-32; 민 18:21-32).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 첫 번째 십일조는 먼저 하나님의 성소를 위해 일하도록 구별된 레위인을 위한 것이었다. 이 원리는 신약교회의 교역자를 위한 생활비를 지급하는 원리적 근거가 된다(마 10:9-10; 눅 10:7; 고전 9:13; 딤전 5:18). 두 번째 십일조는 매년 성소를 방문하는 비용을 위해 사용했다(신 12:4-19). 이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고아와 객과 과부와 노비, 그리고 레위인도 포함된다(레 16:11; 14:22-29). 세 번째 십일조는 매 삼년 마지막에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되었다(신 14:28-29; 26:12-15). 이 모든 십일조를 다 합치면 십일조가 소득의 23.3%나 된다. 그 외에도 첫 새끼와 처음 익은 열매와 처음 태어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출 22:30).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는 대신 레위인을 구별하여 드렸다. 첫 소산은 아론과 제사장에게 돌렸다(민 18:12).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서원예물(레 7:16), 감사희생(레 7:13, 15), 칠칠절에 드리는 자원하는 예물(신 16:10) 등이 있었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이 옛 언약의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혜와 사랑의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의 십일조 규례나 첫 소산을 바칠 필요는 없다. 대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봉헌한다. 이 점에서는 구약의 봉헌과 신약의 봉헌은 차이가 없다.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신약에 나오는 봉헌의 액수는 일관된 규칙이 없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행 11:29) 봉헌자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드렸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봉헌자의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가 봉헌 액수를 결정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 8:3) 봉헌자는 자신의 힘을 다해 봉헌할 것이지만 때로는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봉헌한다. 바리새인은 수입의 십일조(눅 18:12)를 했고, 삭개오는 모든 소유의 절반을 봉헌했고(눅 19:8), 가난한 과부와 바나바는 그들의 소유 전부를 바쳤다(눅 21:4; 행 4:37). 이 모든 예들을 살펴볼 때 봉헌의 양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없지만, 봉헌의 특징은 구약이나 신약교회가 다르지 않다. 물론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양과 액수가 정해져 있다. 현재 한국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십일조의 개념은 모세의 율법에 제시된 십일조의 개념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따른 십일조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1/10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만약 모세의 율법에 따른 십일조와 같은 원리로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자기 수입의 23.3%나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헌의 양으로서의 십일조는 어느 정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바쳐야 하는 지침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신학적 의미의 십일조라기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성도는 적어도 십일조 이상의 봉헌을 하는 것이 옳다. 봉헌의 액수는 은혜를 받은 데로 신앙 양심에 따를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는 봉헌을 많이 할 수 없다. 또 많이 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은 신자는 많은 봉헌을 하게 될 것이다. 영적 부요함의 정도에 따라 물질적 봉헌의 액수도 결정될 것이라는 뜻이다. 신약교회에서는 헌금액수를 강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봉헌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이고 은혜이기 때문이다. 5. 봉헌의 자세 봉헌의 자세는 ‘인색함’으로나 ‘억지’가 아니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새 언약의 시대의 봉헌은 성령의 법아래 있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지만, 성령님을 속일 수는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님을 속이려고 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 팔아 봉헌했다고 속였다. 봉헌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좋지 못한 자세로 봉헌하다가 오히려 멸망하고 말았다. 성령님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헌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다. 봉헌을 하나님과 흥정 하듯 해서도 안 된다. 무엇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봉헌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대학입학을 위한 헌금은 그 동기가 잘못된 것이다. 교회에 유행하는 수많은 제목의 헌금목록에는 이런 것들이 즐비하다. 봉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드리는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이다. 더 이하도 더 이상도 아니다. 성경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했다. 봉헌을 하는 구체적인 행위에는 우리의 마음이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 평가하신 것을 볼 때 잘 드러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가지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 21:2-4) 봉헌 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마음이 중요하니 굳이 돈을 봉헌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가난하지만 그 은혜에 대한 마음을 표시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바치기도 했다. 헌금의 기준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봉헌자의 마음과 자세가 결정한다. 그러나 대체로 재산이 많은 자가 교회에서 많은 금액을 봉헌하는 것이 옳다. 많이 받았으니 많이 바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지를 위해, 더 나아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많이 봉헌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아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했다.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헌하는 것이 복이다. 6. 봉헌의 장소와 때 개신교회는 봉헌을 예배 가운데 포함시켰다. 물론 종교 개혁가들의 신앙을 따르는 교회들도 예배 전 혹은 후에 헌금함에 봉헌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주류는 아니다. 예배가 언약의 갱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선물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 시간이 있다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예배 전 후 드나들면서 예배당 입구에 놓인 헌금함에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배 가운데 넣는 것은 예배의 의미와도 맞다. 예배는 언약의 갱신 예식으로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주시고 우리가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헌금 시간이 예배 시간 안에 배치되는 것은 옳다. 예배 가운데 봉헌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는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를 할 때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고 했다. ‘매주 첫날’(안식 후 첫 날)은 주일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20장 7절이나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보면 매주 첫 날에 모였는데 예배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모여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는 모임은 바로 예배이다. 이 예배에서 구제를 위한 연보를 한 것은 봉헌이 예배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비참에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봉헌하며, 또 우리에게 맡겨주신 청지기로서의 사역을 생각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표로서의 봉헌은 주일 공적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8. 봉헌의 삶 예배 가운데 드리는 ‘봉헌’은 끝이 아니다. ‘봉헌’은 모든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봉헌’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청지기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봉헌’은 삶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성경은 단순히 돈 몇 푼 하나님께 드림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모든 자비하심) 때문에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이것이 마땅한 예배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예배’는 ‘섬김’(service)의 다른 번역이다. 곧 ‘연보’ 혹은 ‘봉헌’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돈과 재물, 그리고 명예와 지위를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라를 위해 써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 예배 가운데 진심으로 봉헌하는 그리스도인은 돈과 재물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데 불신자와 다르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경영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것 같다.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적 단절로 인해 삶으로 봉헌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적다. 가정과 회사와 기관의 관리와 경영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부의 관리자가 되면 하나님의 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 애써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의 ‘봉헌’은 삶에서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봉헌’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이다. 9. 봉헌의 관리와 집행 어떤 사람은 교회 예배에서 ‘봉헌’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교회 재정의 관리와 집행이 투명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이 점에서 많은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봉헌’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봉헌’된 돈과 재물을 잘 관리하고 집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가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원칙과 원리를 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적 교회 재정과 집행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상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사회단체나 회사에서 하는 형식을 원용하는 경우도 있다. 좀 더 원시적인 경우는 목사가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경우이다. 성경은 재정의 관리와 관련해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다. 집사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장로교회는 집사회가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일을 한다. 개혁교회에서는 재정위원회가 교회 일반 재정을 관리하고 구제는 집사들이 책임진다. 특별히 성경은 집사가 구제의 일을 감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사도행전 일곱 집사는 구제를 위해 구별된 자들이 분명하지만, 단순히 구제만을 하지는 않았다. 스데반과 빌립 집사는 복음 전파하는 일에 오히려 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교회가 세워져 가면서 집사의 역할이 재정의 관리와 집행과 밀접한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발전과 더 불어 다양하게 전개되었지만, 종교 개혁가들이 오늘의 집사제도를 성경에 기초해 정착시켰다. 각 교회는 교회재정 원칙을 성경적 기초 위에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앞으로 성경적 재정 관리와 집행에 대한 신학적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새신자 가이드10-헌금이란 무엇인가?

1) 헌금의 정의

헌금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대신 , 돈이나 물건으로 대신 바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애굽에서부터 감사하며 그 대신에 하나님께 속전을 드렸다.

2) 헌금을 하는 이유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세기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말 3:7-10)

헌금은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서 예배에 있어서 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 집사가 헌금을 관리하여 교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 속에는 나의 시간, 노동, 땀, 기술, 노력, 생명, 생활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단순히 ‘돈’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명, 생활, 기술전체가 그 돈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돈과 더불어 나의 삶 전체가 바쳐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에 대하여 감사의 응답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해야 할까?

첫째, 헌금은 계획적으로 수입에 응해서 해야하고 희생과 기쁨으로,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관리자로, 각자가 풍성하게 가장 좋은 것, 즉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쳐진 것이기 때문에 정중한 신앙으로 해야 합니다. 헌금은 절대로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는 격으로 드려서는 안되고 또한 미신적으로 드림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일생생활 속에서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의 응답으로 드려야합니다.

셋째, 헌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헌금을 드리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처음 주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신앙적인 응답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순종의 정신으로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의 헌금을 받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바를 그의 뜻에 순종하여 제물로써 또는 헌금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헌금은 우리의 시간, 재능 등 전체적인 삶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공적 예배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헌금을 드리는 자세

하나님이 돈을 모으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자녀를 기르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헌금으로 하나님은 인간성을 가늠해 보실 수 있으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헌금을 해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의 헌금을 올바로 바치기 위한 열 가지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돈을 가지고 훌륭한 청지기 노릇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원리들은 알고 또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1) 헌금은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2) 헌금은 희생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연보궤에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를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 12:41-44)

(3) 헌금의 액수는 개인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고후 9:7).

(4) 헌금은 법이 아니라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고후 8:8).

(5) 헌금은 계획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고전 16:2)

(6) 헌금은 후하게 바쳐야 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고후 8:2)

4) 헌금의 종류

① 주일헌금 – 주일 아침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예할 때에 바치는 헌금입니다. 이 헌금은 일주일 동안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심과 사랑해 주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헌금입니다.

② 십일조 헌금 –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하나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재물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뜻에 따라 재물을 사용하겠다는 헌신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결과가 되지만 드리는 자에겐 풍성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말 3:8-10).

③ 월정헌금(주정헌금) – 한 달이나 한 주간에 얼마를 정해놓고 바치는 헌금입니다.

④ 절기헌금 – 부활절, 맥추감사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등 절기의 의미를 따라 드리는 헌금입니다. 특히 추수감사헌금은 1년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헌금이므로 힘을 기울여 드려야 합니다.

⑤ 기타 헌금들

신년, 생일, 입학, 졸업, 취직, 심방, 개업, 결혼, 장례, 범사에 감사 등 생활 속에서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입니다.

⑥ 특별 헌금들

특별헌금은 성경주일, 교회연합주일, 성소주일, 인권주일, 천재나 인재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하여 등 특별한 의향이 있는 주일에 따라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룩되기를 기원하며 또한 그것에 동참하는 뜻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특별헌금은 교회가 특수한 선교의 목적에 따라 정하며 신자들은 이에 따라 봉헌합니다. 여기에는 장학헌금, 국내외 선교를 위한 헌금, 농어촌 및 개척교회를 위한 헌금, 성전건축 등을 위한 헌금 등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헌금의 정의, 용도, 원리

제목: 성경이 말하는 헌금의 정의, 용도, 원리

설교자: 조정의

헌금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사는 돈을 받고 다니는데 교회는 돈을 내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그 말에는 교회에 내는 헌금이 회비나 세금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헌금의 정의를 바로잡아야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머릿속에 헌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주로 헌금이 어느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또한 헌금을 어떤 원리를 통해 드려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헌금은 교회에 내는 회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물입니다. 둘째, 헌금은 내가 생각하는 용도에 따라 쓰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주된 용도가 있습니다. 한 마음으로 그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그 원리대로 드려져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주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재물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으로서 우리의 이웃들에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재물을 이웃들에게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쓰면 되지 왜 굳이 교회에 내야 하는가, 왜 헌금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에 내는 헌금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필요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과부를 돌볼 것을 말하면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어머니를 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맡기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이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였고 비유 바로 다음에 하신 말씀이 “이와 같이 하라”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로 이웃에게 은혜를 베풀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국가가 요구하는 것들에 충성스럽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롬 13:7)” 우리가 가진 것으로 국가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 영역,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영역이 교회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고 많은 이들이 모이게 되자 교회 안에는 많은 필요가 생겼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집사를 세워서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던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들과 교회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우리의 재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가정의 필요에 모든 것을 공급하고 이웃이나 국가, 교회의 필요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이웃과 지역사회 또는 교회에 재물을 모두 갖다 바쳐서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뉴스에서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균형있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재물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구약 시대의 헌금의 원리와 신약시대의 헌금의 원리를 알아보고 그 공통점을 찾아보고 오늘날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헌금의 정의, 용도, 원리를 알기를 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교회가 없었지만 당시의 어떤 사람들을 오늘날의 교회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행 7:38)”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의 교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오늘날의 우리 교회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분명히 다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국가이자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어 있기에 구약의 배경과 오늘날의 배경은 바로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는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10분의 1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전체에서 십일조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이자 세금이었습니다. 곡식, 과일, 가축, 돈 등 모든 재물의 10%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지만 백성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관리들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지파인 레위 지파를 관리로 삼으셨습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48군데로 흩어져서 각 지파의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고 재판하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점령했을 때 레위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는 땅을 나눠 가졌고 레위인들은 백성들의 십일조를 먹고 살게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십일조입니다.

전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 제사가 있었는데 그것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백성들의 세금을 10%를 모았습니다. 여기까지 유대인들은 소득의 20%를 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매 3년마다 10%를 더 걷어서 과부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습니다. 이것을 계산해보면 매년 이스라엘 백성들은 23.3%를 내야 했습니다. 이에 추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 때 다 거둬들이지 않고 남겨서 가난한 자들이 먹게 했고,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세를 냈습니다. 그리고 매 7년 뒤 빚진 자들을 탕감해주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이스라엘은 매년 25%를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더 드리고자 하는 이들은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실제로 십일조를 성경말씀 그대로 적용한다면 오늘날 성도들도 25%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십일조를 권장하는 이유는 그만큼이라도 내라고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일조는 예물이었습니다.

단순히 세금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드렸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성되기 전, 아브라함 때부터 십일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20)”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이후에 얻은 재물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야곱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2)”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성되고 나서 그들이 제정한 법에 따르면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레 27:32)”고 합니다.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6-7)”

구약의 십일조가 갖는 세금으로써의 강제성과 정해진 비율은 오늘날에 바로 가져올 수 없는 규정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도 기억해야 할 원리입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인도자의 필요, 예식을 위한 필요,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1)” 레위인들은 땅도,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모든 삶을 이스라엘을 섬기는데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섬김을 받는 모든 백성이 십일조를 거둬서 레위인의 필요를 공급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4)” 구약의 십일조는 인도자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그들 역시 그것의 십일조를 또다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민 18:26).

두 번째 용도는 예식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기 위함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신 14:23-27)” 국가적인 행사를 위한 말씀입니다. 전 국민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필요한 물질을 공급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용도는 구제를 위함입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스스로 물질을 구할 수 없는 자들을 구제할 때 십일조가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인도자의 필요, 예식에 필요한 물질, 교회 안에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구약 십일조가 어떤 원리로 드려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구약시대의 헌금은 소득의 일정 부분인 25%를 드렸습니다. 강제성을 띄고 있었고 아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것을 훔쳤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십일조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약 25퍼센트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원리였습니다.

두 번째 원리는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십일조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 예물을 바친 것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바리새인은 구약의 십일조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화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십일조는 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십일조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단지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포함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로 그들은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드렸습니다. 매년, 또는 3년마다 있었습니다. 그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재물로 드리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드려진 헌금의 원리입니다.

신약에서는 어떨까요?

신약의 헌금도 역시 예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교회가 처음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많은 물질을 가져와서 사도들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물의 일정부분을 숨기고 거짓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도들 앞에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가져올 때는 경외심, 두려움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받은 재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8)”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

오늘날 헌금은 무엇입니까? 헌금은 세금이나 회비가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는, 두려움으로 가지고 나오는 예물입니다.

신약 헌금의 용도도 구약의 원리와 오늘날이 같습니다.

첫 번째 구제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5)”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4-35)” 헌금을 가지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줬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모든 사람들을 다 도와주었을까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8-10)” 가족이 돌볼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 돌보게 하라는 원리가 있었습니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제외가 되었습니다. 60세 이상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이 대상이었습니다.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제외되었습니다. 또한 선한 행실을 가진 사람, 구원받은 열매가 드러나는 과부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아서 열매가 드러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돕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의 광범위한 사역의 첫 번째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용도는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의 필요를 돕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8)” 구약의 레위인들의 필요를 공급한 것처럼 신약에서도 교회의 인도자들의 필요를 돕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먹고 살면서 교회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를 무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3-14)” 모든 정직한 인도자들은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되도록 스스로 필요를 공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약시대의 헌금은 어려운 성도를 구제하는데, 인도자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교회의 예식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시대 헌금의 원리도 구약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신약시대 헌금의 첫 번째 원리는 일정 부분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소득에 따라 그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구약은 특정한 비율이 있었고 강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세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각 영역에 모두 균형 있고 충성스럽게 재물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재물을 가지고 가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거짓된 마음으로 재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경외함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에 들린 재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재물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까워할 것도 인색하게 드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린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이가 용돈을 모아서 부모님께 선물을 사준다면 어떨까요?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는 기뻐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녀가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선물을 준다면 부모는 전혀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네 번째 원리는 정기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헌금은 선심 쓰듯 한 번씩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일어나는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찬양으로 예배드리고 설교를 들음으로 서로 교제함으로 예배드리듯 주님께 제물을 드림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바구니를 돌리는 교회에서는 전 성도가 헌금을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매주 하나님께 재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참 기쁘고 우리 삶에서 익숙해져야 할 부분입니다.

구약의 원리와 신약의 원리가 동일합니다. 그 정의에 있어서, 용도에 있어서, 원리에 있어서 같았습니다. 구약은 강제성이 있었고 신약은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한다는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재물을 얻기를 원하실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네 가지 정도의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부자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소출이 많아 창고를 짓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어떤 자이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부요한 자로 서기 원하시지 않으십니까? 우리를 부요케 하신 그분을 위해 그분 앞에 부요한 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을 주님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위해 돈을 쓰지 않고 아내가 뭔가를 사는 것을 아까워하면서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가식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입술뿐만 아니라 재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한 손에 재물과 한 손에 주님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인 것입니다.

셋째, 헌금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복이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호흡, 건강, 평안, 모든 축복들 그 많은 것들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얼마나 복됩니까?

넷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다고, 보상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할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되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드리니 건강하게 해주세요, 합격하게 해주세요’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합당한 때에 우리가 원할 때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살펴본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 인도자를 위해, 예식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소득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원하는 것과 가장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그분의 사랑을 강하게 경험하기 원하고 그분께 사랑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즐겨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즐겨내는 자가 되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기 원합니다.

[교회용어 바로 알기] 헌금 vs 연보

교회용어 중엔 기독교인에게조차 어색하고 낯선 말이 많습니다. 이제 교회는 우리만의 단어가 아닌 세상과 소통하는 용어나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미션라이프는 매주 1회 ‘교회용어 바로 알기’를 연재합니다. 이상윤 한세대 외래교수의 설명으로 낯선 교회용어나 말을 친절하게 풀어드리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교회에서 헌금과 연보라는 말을 혼용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대다수 교회가 헌금하는 통을 ‘헌금함’이라고 부르지만 적잖은 교회에선 ‘연보함’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헌금과 연보는 어원과 단어의 쓰임에 많은 차이가 있다.

헌금(獻金·offering)은 성경에서 주로 ‘고르반(qorban)’과 ‘도라(dora)’라는 두 개의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레 1:3, 민 31:50, 마 5:23∼24, 막 7:11) ‘예물’(레 1:2, 2:1) ‘헌물’(민 7:10)이라는 뜻이며 ‘도라’ 역시 ‘예물’(마 2:11, 5:23∼24, 8:4, 23:18, 19장, 히 5:1, 8:3∼4, 9:9, 11:4, 계 11:10) 혹은 ‘헌금’(눅 21:1, 4)이라는 말로 우리말 성경에 번역돼 있다. 어떤 본문에서 사용되든 이 두 단어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어놓아 남을 돕는다’라는 뜻을 가진 연보(捐補)는 한자적 의미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는 ‘로기아’(collection·모금) ‘하플로테스’(genero sity·관대) ‘유로기아’(blessing·축복)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성도를 위한 연보(고전 16:1)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고린도 교회의 연보(고후 9:5)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바울은 연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보다는 성도를 돕는 일과 교회 간의 물질적 도움을 주는 ‘코이노니아’(친교·협력)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연보’라는 말보다는 ‘헌금’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게 맞다.

이상윤 목사(한세대 외래교수)

약력=△영국 버밍엄대 신학박사 △필리핀 선교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늘푸른교회 담임 역임 △현 국제신학연구원

삽화=이영은 기자

키워드에 대한 정보 헌금 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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