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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설교말씀] 손계문 목사 57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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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날카롭고 뾰족한 성질들, 조금만 잘못해도 금방 지적해 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들, 우리의 예민한 성질들, 조금만 뭐라 하면 기분 나빠지고, 금방 속상해하는 성격들,우리의 편협한 성질들
상대방을 쉽게 오해하고, 여기저기 떠벌리는 성격들, 이게 언제 없어질까?
내 편 들어주지 않으면 원수가 되어 돌아서고….
아직도 우리가 이런 상태라면 어떡합니까?
아직도 이런 것 때문에 맘 상해하고 있다면 어떡합니까?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그런 문제로 속상해하고, 실족한다면 어떡합니까?
이 시대는 예수께서 주님의 신실한 자들을 찾으시러 곧 재림하실 역사의 종착지입니다.
순결하고 거룩한 신부로 준비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 [11HN 성서연구원]은 세속과 비진리가 교회 안에 밀려들어오는 이 시대에 진리의 울타리로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고 종교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그 순결한 복음으로의 회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시작한 진리의 개혁은 그 후예들에게 와서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진리의 빛은 개혁을 통해 앞으로 더 계속되어야 합니다.\r\r
오늘날 개신교는 그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뼈저린 희생을 치르며 지켜온 개혁 신앙의 귀중함을 망각하고, 성서적으로 명백한 오류임을 깨닫고도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신앙적 양심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개혁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원치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입니까? 현재 기독교 안에는 많은 교파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어떤 한 교리만 중요시하여 그 교파에 안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r
저희는 어느 교단(장로교, 신천지, 안식교, 침례교 등)에도 속하지 않고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명으로 성경의 진리와 참된 복음을 회복하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값싼 구원론과 교회성장, 기계적인 신앙으로 전락해버린 교회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 회개운동, 거룩운동, 재림운동을 하는 신앙 운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예수님의 증인들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해 보아야 할 엄숙한 시기입니다.\r
■ 11HN(열한시 의미): Eleventh hour 11시\r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유대시간으로 3시(오전 9시), 6시(정오 12시), 9시(오후 3시)에 장터에 나가 일할 사람들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일이 마쳐지지 않았는데 해가 저물려고 하자 급히 11시(오후 5시) 일꾼들을 투입시킵니다.\r
11시에 부름을(소명)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직전의 시대, 인류역사의 문을 닫기 1시간 전에 긴박하게 투입되어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표의 정체를 밝히고, 하나님의 영광의 사본인 십계명의 회복과 인간성소의 정결(죄를 승리하는 거룩한 삶)에 대한 복음, 그리스도와 사탄사이의 우주적인 대 전쟁, 재림 전 심판과 영원한 복음,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는 사명을 맡은 마지막 시대를 사는 교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을 위해 11시 백성은 오늘도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여깁니다.\r
■ 더 자세한 소개는 아래 링크를 확인하세요.\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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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3-7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 – Bible.com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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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5/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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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네이버 블로그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과 순종의 마음,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빌립보서2:1~11) 오늘 말씀은 읽을 때는 은혜가 넘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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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7/2021

View: 2641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 2:3-4) – 기독정보넷

본문 말씀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겸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겸손이라는 말을 원어의 뜻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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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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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냐? ”고 묻는다면.. – 기독일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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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11/9/2022

View: 6057

2019년 2월 17일 주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kpcw)

아내를 자기 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영어의 표현중에 “my better half”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말할 때 사용하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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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pcw.net

Date Published: 7/3/2022

View: 8811

(빌립보서 2:1-11) 남을 낫게 여기고

속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데 말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의인이시면서 하나님의 의 앞에 죄인인 자들의 주장 앞에 죄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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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7/14/2021

View: 4546

빌립보서 – 대한성서공회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 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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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korea.or.kr

Date Published: 7/29/2022

View: 4378

사회의 원리 – 마음의 두가지 유형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실의 마음이다. 예수그리수도께서 친히 세상에 오심 즉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심의 본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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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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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설교말씀] 손계문 목사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설교말씀] 손계문 목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 Author: [성서연구원]
  • Views: 조회수 32,6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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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3. 10. 3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1VHli-AD1t0

빌립보서 2:3-7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빌립보서 2:3-7 KRV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KRV: 개역한글 번역본 취소 성경 언어 한국어 언어 바꾸기 {{#items}} {{local_title}} {{/items}} ← 언어 취소 {{#items}} {{local_name}} {{/items}}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과 순종의 마음,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빌립보서2:1~11)

오늘 말씀은 읽을 때는 은혜가 넘쳤지만

묵상을 해보니 왜 이리 힘들기만 한지..

아마도 이 말씀이 내 삶을 뚫고 들어와 내 삶을 다스리는 데는

그만큼 어렵고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처음엔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가도

다른 사람과 비교되기 시작하면

점점 다툼이 되고 자랑이 되고 허영이 되어 버렸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또..

겉으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겸손한 척 했지만

속으론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며 교만하기 짝이 없었던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어디 그 뿐인가요..

“4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내 일을 다른 사람이 돌봐주기는 원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봐주는 것은 은근 슬쩍 모른척 외면했던 적은 얼마나 많았으며

또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케하기보다

나 자신의 기쁨을 충만케했던 적은 얼마나 많았던지..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게다가 수시로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 두 마음이 서로 갈등하다,,

결국은 예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닌..

나 편하자고 내 마음에 순종해버렸던 적이 대부분이 아니었던지요..

그런데 오늘..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7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는(8절)..

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잘 살든 못 살든

이렇게 숨쉬며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예수님은 어떻게 죽기까지 낮추시고 복종하며 마침내 지옥까지 내려가는 십자가 죽음을 이룰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은 날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복종하신

그 완전하신 겸손과 순종을 이루신

예수님의 위대하신 이름 앞에

참으로 무릎 꿇어 감사하며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계속 올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기

그렇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마침내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신..

그 완전하신 겸손과 순종을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 앞에

오늘은 진심으로 무릎 꿇어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을 버리지 못했고

겸손한 척했지만 교만하기 짝이 없었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보다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며 살았고

내 일은 다른 사람들이 돌봐주길 원하면서

다른 사람 일 돌봐주기는 모른척 무시해버렸고

주님의 기쁨보다 내 기쁨을 충만케 했고

예수님의 마음보다 내 마음에 순종했던..

참으로 겸손한 것도 순종하는 것도 아니었던

불완전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였던 내 모습..

이 시간 모두 회개하오니

이런 내 모습 부디 불쌍히 여겨주셔서..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완전하신 겸손과 순종을 이루신

예수님 모습 닮아가는 제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다른 무엇보다..제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이 주님 마음 내게 많이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할 최고의 덕목인 겸손함을

날마다 조금씩 더해 갈 수 있는 제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와

남은 나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고 다스려 주시길..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겸손하신마음 닮아가는 제가 되길..

간절히 소원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누군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냐? ”고 묻는다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만일 누군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제 자신, 목사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솔직히 내 생각과 사람들에 대한 평가와 기준이 허용하는 정도까지만 일 때가 많습니다. 때론 내 입장과 상황이 손해를 보지 않고 적당하게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이지요. 그래서 상대방이 도에 지나치는 행동을 하거나 정말 형편 없는 모습을 보일 때는 이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감정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빌립보서 2:5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남을 낫게 여겨야 되는 이유..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 다음에 빌립보서 기자는 설명을 덧 붙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의 마음은 우리를 낫게 여기시기 위해(구원을 위해) 십자가까지 복종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는 마음이 내게 있었는가? 솔직히 얼굴이 붉어집니다.

지난 목요일 생명의 삶 예화를 읽다가 마음에 다가와 지면에 옮깁니다. 이 예화의 얘기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의 현장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 고향인 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낯선 나라에서 외롭게 사신 어머니와 혼혈아로 한국 학교를 다닌 내게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미국인 기독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날 좋아할까? 생김새가 비슷하니 놀리는 아이들은 없을지도 몰라!’

첫 수업은 철자 수업이었다. “앞줄부터 시작이야. 스프링!” 선생님 말씀에 맨 앞 줄 아이가 대답했다. “에스 피 알 아이 엔 지!” “좋아. 다음! 요셉이는 앞으로 나와 봐.” 영어는 들을 줄만 알지, 철자를 모르는 나는 숨고만 싶었다. “얘들아, 선교사님 자녀인 요셉이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아주 잘 한단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어로 써 줄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칠판에 한글을 또박또박 적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내 이름도 써 줘!” 친구들의 이름을 적을 때마다 아이들은 박수를 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얘들아, 요셉이가 한국어를 참 잘하지? 너희도 선교사가 되려면 다른 나라 말을 이렇게 잘해야 한단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김요셉. 생명의 삶 9월 4일자 예화에서 인용.

예화에서 우린 낯선 나라에서 온 학생을 위해 학생의 마음으로 배려했던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작은 배려가 우리의 삶을 조금은 더 따뜻하고 풍성하게 해 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이 이 마음으로 한 주간을 호흡하고 살아가게 될 것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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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1-11) 남을 낫게 여기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의 합당한 삶은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마음 안에서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속사람’이라는 것과 ‘겉사람’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속사람은 본성이고 내용이며, 겉사람은 형식이고 행동이며 삶의 모양입니다. 겉사람은 어떻게 보면 실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정체성이 겉사람으로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사람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그 속사람이 무엇인지가 겉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본질은 속사람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속사람인 사람은 겉사람 즉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의 모양이 그리스도와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는 것을 신앙이고 믿음이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여긴다고 할 때 그것을 이루는 것은 그 속사람, 그 심령, 그 본성이 그리스도를 품고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동이나 다짐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스스로 어떻게 조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자기가 마음먹은 것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지키는 것이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뜻한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기려 해도 되지 않는 지경이 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하고 완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다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본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교회에 가지 않더라도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또 적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더러는 자기 다짐으로 적어도 남 앞에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며, 그런 삶은 스트레스가 심하므로 해소할 힐링도 필요한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근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온전히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못할까요? 심지어 밥만 먹고 운동만 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선수들을 보고 야유를 합니다. 남이 쓴 글에 댓글은 천하제일 비평가인 듯 댓글을 답니다.(정작 자신은 자신의 생각을 A4용지 한 장의 글로도 쓰지 못하면서) 이런 행동들은 모두 자기 안에 의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은 드리지 않으면서 자기 의만 주장하기 때문에 남이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운동경기를 관람하면서 실수하는 선수를 보고 야유합니다. 때로 옆에서 ‘너는 저 선수보다 못하면서 왜 야유냐?’라고 하면 ‘선수는 밥 먹고 운동만 하는데 잘해야지.’라고 답합니다. 명답 같지만 참 죄스러운 답입니다.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선수도 실수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운동’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육신을 드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성경에서 그러라고 하니 죽어서 천국가려면 그래야지!’라는 각오나 다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남을 낫게 여길 이유가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그렇지 않은데 겉사람만 신념으로 견딘다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속사람이 바뀌어야 하는데, 자기 속에는 자신만의 기준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제 아무리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우선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의로움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자리가 나고 그릇이 비워져야 그리스도의 마음이든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먹어도 우리 마음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은 새롭게 먹은 마음보다 먼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물러가라 외친다고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듯,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온전한 의로움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먼저 선악과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자신이 추구하는 선의 기준에서 앞선 사람을 보고 낫게 여기기는 합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그렇듯.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가진 선악의 기준은 단 하나가 아니기에 한 가지 기준으로 낫게 여기던 사람도 또 다른 기준으로는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만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마음,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에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보기 때문에 자신보다 낫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어느 한 구석도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 남을 나보다 못하게 여기는 마음을 한 올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죄인을 위해서 죄인이 되기까지 자기 육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나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고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부로 청소부 경력이 없는 새로운 신입 청소부가 왔습니다. 경력이 있는 청소부가 신입과 짝을 이루어 청소를 하러 갔습니다. 그러면 보통은 경력자가 신입이게 ‘여기 저기 닦고 구석구석 닦으라.’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법이 하나 있습니다. 신입에게 청소하라고 하고, 신입이 잘 수습하지 못한 것을 따라 다니면서 해결하는 법도 있습니다. 신입이라도 그 눈에 더럽고 깨끗한 것 정도는 볼 수 있다는 사실만 알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입이기에 모르는 그 건물 청소의 룰은 직접 보여주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되는 세계의 법, 곧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법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보다 내가 더 가지고 더 의로워도 그것을 상대를 섬기는 것에 사용하는데 상대를 무시할 이유가 없고, 다툼이 있을 이유가 없으며, 세상의 사람들이 죄로 여기는 어떤 죄도 자신이 범할 이유나 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2장 1-11절 말씀의 본질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 본성과 속사람이 되면 나타나는 겉사람의 모습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의 본질은 그 마음, 그 속사람과 심령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그것은 노력이나 다짐이나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자신이 조금만 솔직하다면 그 정도는 인정할 것입니다. 그것마저 인정이 되지 않는다면 엄청난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속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데 말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의인이시면서 하나님의 의 앞에 죄인인 자들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어 자기 육신을 드린 그리스도의 마음, 그것이 자기 본성이 되고, 속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Philippians 2: 1-11) He heals others

The living worthy of the gospel is that the righteousness and the will of God is the nature of a person who lives by his nature. The proper life of the gospel is only with the mind of Christ. Having the heart of Christ means that the identity of Christ has become a nature in the heart, and that is what it is to be a Christ.

In the Bible, it is called ‘inner man’ and ‘outward man’. The inner person is nature and content, the outer person is form, action, and the shape of life. The outer person seems to be an entity in some way. It is because all the identities of the person are measured by the outward person. But the outer person is not the essence. The essence is the inner man, because it is what appears in it, and what the inner person is, as an outer person.

That is why the Apostle Paul asked to have the heart of Christ in his heart. If the mind of Christ is the inner man, then the outward person, the behavior and life of the person, will be like Christ. When we think that living in Christ is faith, belief, and taking the cross and following Jesus, it is the inner, the spirit, and the nature of Christ to be like Christ and to be like Christ.

This is not an act or commitment. It is because the mind of man is not controlled by oneself. It is not that the word “My resolutions never last more than three days.” is wrong. Sometimes there is a man who keeps his mind well, but it is to keep and to try. It must be something that can not be done that it really means something is done. It is because it is perfect and complete. It does not require commitment, but to be born again. The nature must change.

Even if we do not go to church, we can hear people say, “Make others better than us.” Some people try to live that modestly, and some people do so at least in front of others. But as everyone knows, it is a very difficult job, a lot of effort is needed, and everyone knows that life is stressful and healing is needed. That is why it is not the nature of the fundamental person to consider others better than I do. It is the nature of Christ that if it is not born of Christ, it can not be achieved if it does not have the heart of Christ.

So why do not people think of someone better than me? Even boobs are eating and exercising, watching athletes watching and watching the players. The comments are written as if they were the best critics in the world (because you can not write your own thoughts on a single sheet of A4 paper). All of these actions have a righteous standard in you. He does not offer his body, but he claims to be his own, so he looks like someone else.

People look at the athletic games and look at the players who make mistakes. Sometimes I say, ‘Why are you hateful because you are not like that player?’ And he replies, ‘The player should be good at eating and exercising.’ It is a correct answer, but it is a sinful answer. It is because I do not think that ‘Athlete who is eating enough to eat and exercising is too difficult to make mistakes’. And that will not happen. Because I did not offer my body.

If you want to be better than me, you do not need to be determined or committed to be ‘dead in heaven’ to say it in the Bible. ‘ If you want to be better than me, you have to be in yourself for the good of others. It is not that the inner person is not someone who thinks that someone who is outsiders can endure with their own faith. In order to do so, the inner person must change, and if he has his own standards in his own way, he will end up with a “great grace” if he has any great faith in him.

Therefore, if you want to be better than me, you must first abandon your righteousness in yourself. It is because once the seat is set and the bowl is empty, it can fill the heart of Christ or anything. What we can not do with our minds is because we have a mind that we think is right before the new one. And it’s not just getting emptied. It is because darkness is not going back out to shout, but darkness because there is no light, and man has his righteousness which he claims to be right is not met with perfect righteousness.

Therefore, in order to make others better than me, we must solve the problem of good and evil. Because there is no way for me to have better standards than myself with the standards of self-good and evil. Sometimes I see people who are ahead of the line of good that they seek. Just like the rich people who think that money is all about life. But the problem is that the standard of good and evil that a man has is not one, so he who criticizes one criterion is criticized by another standard.

In this sense, the mind that takes care of others better than I am is only a person who is born of Christ, who is born again of Christ. For the heart of Christ is to be born again as a man who does not judge good and evil by his own standards. Christ is the heart of God, the standard of God’s righteousness. Because you have forsaken your own righteousness and have the righteousness of God, you can be considered better than yourself because you see God as righteous, not by your own standards.

Also, the heart of Christ is the heart of Jesus, who has been a sinner and sinner for the sinner. The mind is a mindless heart that ignores or ignores any corner. If you have a heart in your heart that makes you feel less than me, there is no man or law that can give you your body until you become a sinner for sinners. So the apostle Paul asked me to be better than me and to have the heart of Christ.

A new cleaner came to the cleaner who cleaned the building. Caregiver janitor went to clean with pair of new person. Then you will usually say, ‘Wipe it all around here and clean it everywhere’ so you are a newcomer. But there is another law. It is also advisable to clean up the new entrant, and follow up with the new entrant. If you know that you are new enough to see enough dirty and clean things in your eyes, you can. And the rules of cleaning the building that you do not know because you are new are to do the labor to show yourself. This is the law of the world, the law of Christ, in which the righteous is sinners for sinners.

If there is such a mind and law of Christ, I can not help but think that it is better than me. There is no reason to ignore the opponent, no reason to argue, no reason for the world’s people to commit sin, and no reason to commit sin. This is the essence of Philippians 2: 1-11. It is the identity of the Christ that Jesus is, and the appearance of the outer person when it becomes the nature and the inner man. Therefore, the essence of this statement is that the heart, the inner person and the spirit should be the life regenerated by Christ’s identity.

To make someone better than me, it does not come from effort, commitment or conviction. Perhaps if you are a little honest, you will admit that. It will take a great deal of time if it is not even recognized. The inner man is born again to Christ. If you want to be better than me, you can only be a person who is a righteous person in the world and who is a sinner before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who gives his body, that is, his nature, and that he is the inner man.

[빌립보서 2:7 ]

제 2 장

그리스도의 겸손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는 근본 하나님의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또는 형체 또는 보류

7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헬 , 생 또는 붙들어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 하라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또는 하느니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9 내가 디모데 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 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 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HANGL NOCR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적 인간관계의 가장 핵심은 바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인 사랑의 결사체이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교제 즉 성도의 교제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 방식은 바로 남의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결사체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참여하는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자유롭고 동시에 가장 사회적인 결사체이다. 교회는 잘난 자가 못난자를,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섬겨야 하는 운명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원적이고 자발적인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래서 모든 사회중에 가장 탁월하고 모범적인 사회이다. 본질적으로 사회란 모든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초로하는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감의 원리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관찰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본질적 원리다. 이러한 원리는 다음 세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의 기초에서 인간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두가지 유형으로 압축된다. 첫째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첫번째 유형을 겸손이라고 부르고 두번째 유형을 교만이라고 부른다.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방식을 겸손이라고 하고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 방식을 교만이라고 한다. 겸손의 정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교만의 정점에는 사탄이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사탄은 두가지 사회의 모형이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하는 사회와 사탄을 목표로하는 사회의 싸움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과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의 싸움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삶속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영적 전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기초적 원리에 따른 사회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한 인간관계를 기초로 해서 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이며 자유로운 동감의 참여에 의해서 실현되는 사회이며 오늘날 교회의 본질로서 이해된다. 반면에 사탄은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며 교만한 인간관계로서 지배와 정복을 목적으로 강제적이고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본질적으로 비사회적인집단적 유형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전혀 죄가 없는 분이지만 피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나서 본질적으로 죄로 멸망할 사람의 운명을 동감적으로 경험하며 인간을 사망과 운명의 처절한 지옥에서 자신의 혹독한 저주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해방하였다. 예수는 인간의 저주를 스스로 담당하면서 반대로 저주의 삶을 살아야하는 인간의 운명을 복된 존재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승리자가 되어서 모든 피조물에게 영광을 얻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장 5절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삶을 본받아서 항상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실의 마음이다. 예수그리수도께서 친히 세상에 오심 즉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심의 본질은 나를 남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데 있다. 내가 남보다 낮아지는 것은 남보다 내가 못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이 나보다 낫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남을 유익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겸손의 다른 얼굴은 바로 사랑이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남을 행복하게 유익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동시에 바로 나의 행복이요 유익이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 즉 겸손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주고 그를 영화롭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고 이러한 사랑은 다름 아닌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마음의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인 사회의 본질적 관계이다. 그래서 교회는 동감의 결사체요 사랑의 결사체요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의 교제의 모임이다.

반면에 사탄은 피조물이면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높여 부르고 스스로 저주에 떨어진 존재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이사야 14장 12-15절) 그는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을 무고하며 참소하는 자이며,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을 결코 참지 못하며 반드시 자기를 최고로 생각하는 병적인 강박과 집착에 시달린다. 사람의 교만한 마음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을 품고 먹지 말았어야 할 선안과를 먹음으로서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즉 만물을 창조하시되 보기에 좋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자신을 것으로 참칭하려는 욕심에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창조자요 입법자가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과는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벌거벗은 존재라는 사실에 사망이라는 형벌까지 감수해야만 하는 파멸가 저주의 존재로 전락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죄의 충동에 따라서 말할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느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로서의 왕적 수임을 오직 자신의 욕구와 소유를 채우려는 지배와 권력의 집단적 광기로 착각하며 어둠속에서 거칠며 고독하게 방황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의 근본에는 바로 스스로 하나님으로 참칭하며 멸망의 가증한 저주로서 사탄의 욕심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교만한 마음이요 교만한 마음은 반드시 추락한다. 자신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몰락을 야기시킨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장 18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누가복음 10장 15절).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큰 악은 바로 교만이다. 욕심, 그것이 얻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그리고 외식이란 교만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외식은 교만 중에서도 가장 교만한 것이며 자신을 겸손하게 보이려고 위장한 교만이라는 점에서 가장 악독한 교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외식에 대해서 그렇게 무섭게 저주를 한것이다. 외식이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탄의 마음이다.

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교만의 자리에서 겸손의 자리로 이행을 말한다. 겸손한 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이고 교만한 자는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가르친다:”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장 1-5절) 이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바리새인에게 다음으로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 삶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의 교훈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눈에 들보를 넣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보고 사는 존재이다. 자기 눈의 들보는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말하면서 산다. 눈에 티만 들어있어도 얼마나 아플까 그런데 자기 눈에 널판지를 넣고 다니면서 그 아픔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의 아픔에 대해서 말한다. 또 자기 눈은 들보로 완전히 가리워져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는 어떻게 그렇게 잘보는지…사실 들보로 가리워져 있으면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밝은 눈으로도 보기 힘든 티를 다른 사람의 눈에서 찾아 내는 불합리성 이게 인생이란 것이다.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기 눈을 덮고있는 관념을 따라서 판단하면 사는 것이 인생이다. 들보와 티의 비교는 양과 질적인 면을 다 포함한다.

먼저 양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아니 자기의 잘못은 아주 많이 알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다. 즉 정직한 자라면 인간은 타인의 허물보다 자신의 허물을 훨씬 많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은 자기가 알기때문에 자기의 허물과 죄가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죄가 머리털보다 많다”(시편 40장 12절)고 말한다.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자라면 자신의 얼마나 죄인인가를 잘 알것이다. 그런데 욕심으로 가리워진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오직 남의 죄를 찾기에 바빠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같은 죄를 찾으려고 안달이다. 들보처럼 커다랗게 허다히 늘린 자신의 죄는 보지 않고 세밀히 살펴야 겨우 보일듯 말듯한 남의 죄를 찾으며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은 들보에 가리워서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뺀다고 야단들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남다보 낫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행동하는 유형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인생은 바로 이렇게 행동한다.

교만한 마음은 결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언제나 자기는 남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다른 사람을 밑으로 내려다 보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 그 양과 크기에 있어서 들보만큼 큰 허물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남의 티만한 허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거짓되고 무정하고 잔인하고 포악한 마음이 바로 교만중의 교만 바로 외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허위의식이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관념으로 욕심으로 회칠한 관념의 세계다. 교만은 언제나 지배와 권력의 소유에 내몰리는 강박으로 우겨쌈을 당한 관념과 표상의 세계이다. 성경은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증거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복음 9장 39-41절)

이것이 바로 들보와 티의 질적인 차원이다. 즉 들보는 사실에 입각해서 엄청난 크기의 허물을 가지고도 자신의 허물에 가리워서 오히려 타인의 티끌만한 죄를 찾는다는 역설이다. 즉 눈에 들보가 있다면 아파서 눈을 뜨지도 못할것이요 동시에 들보의 크기에 가려서 아무것도 볼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보를 가진 눈은 그 크기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가리워서 보이지도 않으면서 밝은 눈으로도 찾기 힘든 작은 티를 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이다. 결코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에 따라서 생겨난 관념을 따라서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죄의 근거다. 결코 하나님이 아니면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인생의 비극이다.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헤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 입법자로 자처하면서 수많은 허물과 오류를 감추고 세계와 다른사람을 판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먼저 자신의 눈에 들보를 빼고 나서 밝히 보이면 그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뺄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세상을 사실에 따라서 관찰하는 눈을 가지면 바르게 판단하고 헤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을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수는 없는 법 먼저 스스로 사실에 따라 밝히 보고 그다음에 눈이 어둡거나 보지 못하는 자, 즉 관념에 의해서 왜곡된 삶을 사는 자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인에 비교해 볼때 그리스도인에게는 관념의 삶에 사실의 역전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사실에 따라 보고 산다는 것외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과 죄에 이끌려서 자기 뜻대로, 즉 관념에 따라서 임의로 살다가 하나님이 만들고 정하신 세계의 질서를 보고 관찰하고 사실에 따라서 사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회개이다. 만물의 자신을 중심으로 보고 살다가 이제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고 사는 것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되면 이제 사실을 관찰하게 되므로 비로소 인간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게 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레미야 17장 9절) 그리스도인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보혜사로서 하시는 일중의 하나 즉 바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일이다 이제 밝은 눈으로 보니 자신의 눈에는 들보가 있고 마음에는 엄청나게 많고 큰 허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작은 티끌만을 보게 되는 다른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런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삶의 자세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티가 있고 내눈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을 사실로 인식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실은 남보다 낫지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생각을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 사실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사람이며 여전히 교만한 자요 외식하는 자이다. 자기가 남보다 나은데 남이 나보다 나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바로 교만 중에 교만 바로 외식이기 때문이다.

들보와 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이제 아무도 판단할수 없게 된다. 즉 나는 들보로 가리워져서 볼수 없는 눈이니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볼수는 없기 때문이며, 나의 허물은 들보만큼 크기때문에 남의 티끌만한 허물을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사실의 차원에서 남의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이 시작되며 이는 사실의 삶이며 겸손한 삶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사실에 있어서 정직과 겸손이다 정직한 자는 내가 남보다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가르침에 따라서 내가 하나님에게 더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 되고 더 크게 용서 받은 사람은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이요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자발적으로 갖게 된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헌신된 마음이 모여서 이루어진 자유로운 결사체로서의 동감의 사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랑이다:”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4-7절) 교회는 겸손과 사랑의 자발적 결사체이면 자유로운 동감의 사회이다.

3. 위에 말하여진 사실에 기초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먼저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그 다음에 남의 일도 돌아보아 그리스도의 기쁨이 되게 하는 사랑의 마음이 말하여져야 한다. 교만이란 자신을 낫게 보이려는 허영심에 근거하고 이런 곳에는 반드시 분쟁이 생긴다. 분쟁은 다툼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기도 한다. 역사는 얼마나 많은 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가? 겸손한 마음 즉 남을 나보다도 낫게 여기며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도 무관심하지도 않고 동감적으로 즉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며 자유로운 양심에 따라 다른 사람의 삶에 동감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돌아보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 교회가 가진 진정한 사회적 결사체적 본성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 마음에 새겨진 동감적 존재이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이 동감이 엄청난 붕괴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어질 때 인간은 하나님의형상으로서 동감의 삶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존재가 된다. 나의 눈에 들보를 인식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의 일을 하면서 남의 일에 동감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유익에 기여하면서 전체의 삶의 유기적으로 실현하고, 무엇을하든지 남의 유익을 구하며 덕을 세우는 사랑의 정신을 따라 그리스도의 자발적 결사체로서 자발적이고자유로운 삶과 다른 사람에게 동감하는 마음을 양육하는 일이 바로 성도의 어머니이자 하나님 나라의 가장 탁월한 사회적 주체인 교회의 본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성에 있어서 하나의 사회이며 이러한 인간의 자발적인 결사체인 교회는 겸손과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예수와 및 함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과 교제하는 사회이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모든 사람을 사실과 동감의 삶으로 변화시키고 전 피조세계를 행복의 연대로 실현해가는 사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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