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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음 주석 | 고난주간특새05/누가복음23:33-46/송태근목사 90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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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 주석 – Daum 카페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 본문에서 누가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준비한 모든 자료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뺀것이 없는 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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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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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누가복음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 어느 한쪽에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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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8/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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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 옛신앙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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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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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윌리암 맥도날드 ‘신자 성경주석’. 누가복음. 정 병 은 옮김. BELIEVERS BIBLE COMMENTARY. BY. WILLIAM MACDONALD.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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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ir.sermon-online.com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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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 주석 – 네이버 블로그

누가복음 1장 주석 · 1.사가랴는성전서 주의사자 나타남과계시받되. 세례요한태어남 알게되나 믿을수가없었도다. 그러나그계시는 이루어져 세례요한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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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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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1장 주석

누가복음 1장. 1:1-4 저술의 방법과 목적 1:5-25 천사에 세례 요한 탄생 예고 1:26-38 예수의 탄생 예언 1:39-56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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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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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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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8장

8:1 예수를 돕는 여인들 (누가복음 8:1-3) 우리는 이런 내용을 엿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의 “필생의 사업”은 무엇인가 ? ─ 그것은 “전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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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2/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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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특새05/누가복음23:33-46/송태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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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주석

  • Author: SamilChurch삼일교회
  • Views: 조회수 9,496회
  • Likes: 좋아요 79개
  • Date Published: 2018. 3.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7biNLA2FXo

누가복음 1장 주석

누가복음 제 1장

=====1:1

우리 중에 – 본절에서 ‘우리’는 구체적로 누구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사실 그리

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예수에 관한 나름대로의 산 체험

과 증거들을 보호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저자 누가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로 ‘누가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문의 ‘우리’와 접촉하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다고 하면서 적잖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니 지나친

논리적 비약을 하거나 사건을 임의로 축소, 확대하기도 하며 또한 특정 종파의 교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을 왜곡시키거나 새로운 기사를 꾸며내어 기록하기도 하

였다. 결국 이들의 기록은 모두 객관성과 정확성이 매우 부족해 ‘외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저서들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주

는데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개연성(蓋然性)이 전혀 없기 때문

이다. 누가가 여기서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기록에 객관성과

정확성과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예수의 목격자들(witnesses)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

은 뒤이어 나오는 2절과 함께 연결해 본다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우

리’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증인들임이 분명하다(Alford).

이루어진 사실(* , 톤 페플레로포레메 –

이 단어는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플레레스'(* )와 ‘가져오다’

의 뜻을 가진 ‘페로'(* )가 결합된 ‘플레로포레오'(* )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미 ‘성사된 일’, ‘성취된'(accomplished) 일이라는 뜻이다.

또한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어진 일’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때 이 말은 ‘벌써부터 예정되었던 계획을 따라 성취된 확실한 사건들’이라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다(Merrill C. Tenney). 한편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성취된’

(딤후 4:5, 17) 그리고 ‘확인된'(롬 4:21;14:15;히 6:11;10:22)으로 사용됨으로써 위

의 사실을 더욱 확증시켜 준다. 실로 예수의 생활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서두에서부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볼 수 있

다. 특별히 KJV는 이 부분을 ‘우리들이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들'(those things which

are most surely believed among u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예수의 생애를 통하

여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여 믿게 된 사실들’이라는 것으로서 앞으로 소개될 이 누가복

음이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말해준다. 실로 본서를 통해

누가는 사료(史料)들과 정확한 날짜를 비교적 소상히 언급함으로써 역사가로서의 면모

를 보여준다.

=====1:2

처음부터(* , 아프 아르케스) – ‘처음부터’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

프 아르케스’ 중 ‘아르케'(* )란 말은 ‘모든 일의 시작’에 대해 또는 ‘말해진

일들의 시작’에 대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라는 의미보

다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부터’라는 의미, 또는 ‘세례 요한의 활동의 시초에서

부터'(3:1, 2;행 1:21, 22;10:37)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의 공생애 시작부터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의 목격자들이다.

말씀의(* , 투 로구) – 여기서 이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

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말씀'(* , 로고스)은 다양하고 빈번하게 사용 된

다. 특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가 기술한 요 1:14에서는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었다”(incarnation)라고 기록하

고 있다. 이는 분명 말씀이 성육신보다 선재(先在)했음을 암시한다(Lenski).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천지가 창조되었으며(요 1:3), 그 말씀은 생명이있고 또 사람들의

빛이 된다고 설명한다(요 1:4). 또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한다(요 1:14). 이에 비해 본

문의 ‘말씀’은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복음이

다. 사실 고대 헬라의 작가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관시켜 그 중

요성 강조했었다. 행 1:1에서도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기술할 때 ‘행하시며’와 ‘가르

치시기를’이라는 말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어쨌든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그

복음의 말씀은 1절의 ‘이루어진 사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Liefeld).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 , 아우토프

타이 카이휘페레타이) –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내내 곁에서 목

격자되고 일꾼되었던 제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을 위해 그 같

은 사도적 증거(witnesses)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이 고백되고 있다. 여기서 ‘목격자’에 해당하는 ‘아우토프타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아우토스'(* )와 ‘보다’의 뜻을 가진 ‘호라오'(*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스스로 본 자’, ‘직접 자기 자신이 본 자’

(eyewitnesses, 목격자)라는 뜻이 된다(Robertson). 이는 곧 누가의 복음서 기록을 가

능케 했던 각종 정보를 제공해준 자들로서 그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직접

그분의 활동상을 목도한 산 증인이다. KJV는 이 부분을 ‘말씀의 일꾼'(minister of

the word)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실로 예수 공생애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외에 70인 전도대 및 예수를 수종들던 여인들(막 15:40,

41),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

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

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가 포함되

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복음의 권의와 내용상의 완벽을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 여기

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1절의 ‘우리’는 바로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이

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 본문에서 누가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준비한 모든 자료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뺀것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누가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자신에게 전해진 구전(Oral tradition)과 기록(Written

tradition)이 신빙성 있고 정확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전하여 준’

(* , 파레도산)은 제2 부정과거 복수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서 어김

없이, 확실히 건네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여기서 ‘구전'(口傳)을 가리

킬 수 있으나(고전 11:23;15:3) 반드시 구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24:20;행

1:20;3:13). 즉 이것은 구전과 기록 문서를 포함한 일종의 ‘전승'(*

, 파라도시스)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실로 누가는 최초 목격자와 일꾼들이 전해준

전승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 구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기에 복음에 있어서만은 직접적 증인이 아니었

다. 따라서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최초 증인의 확실한 보증 등의 신중을 기할 수밖

에 없었다.

내력을 저술하려고(* , 아나태사스다이

디에게신) – ‘저술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태사스다이’는 ‘차례로’, ‘잇달아’

라는 뜻을 가진 ‘아나'(* )와 ‘고정된 곳에 놓다’,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다’라

는 뜻을 가진 ‘타쏘'(* )의 합성어인 ‘아나타쏘마이'(*

)가 원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임의대로 복음을 기록함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차례대로 순서에 따라 편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력을’에 해당하는 ‘디

에게신’은 ‘디에게오마이(* , ‘완전히 인도하다’, ‘자세히 말하

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8:39;막 5:16;9:9;행 8:33;히 11:32) 이는 곧 내용을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함을 말한다.

붓을 든(* , 에페케이레산) – 이 단어는 ‘손을 대다’, ‘착수

하다’, ‘시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에피케이레오'(* )로서 흔히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의 의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실패나 비난에 유념치 않고 무엇을 시도하다’로 이해되곤 했다(Robertson). 이로 보

건대 이 일을 착수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뒤늦게 누가가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기록된 자료(Written

tradition)들이 부실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물론 누가는 자기 앞의 다른 기자(記者)

들의 불완전함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경쟁자적

입장에서 붓을 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에 관한 증인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방대한 정보와 심도깊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상세하고 정확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의도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여러

내용들을 본서에서는 다루고 있다(5:1-11;7:11-17, 36-50;8:1-3;10:25-37;15:1-32;19:

1-11;24:13-53). 또한 그는 기존의 기록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답습하지도 않았다. 오

히려 누가복음이나 각 기록들을 통해 확대되거나 모방된 외경들이 이단 교파나 특수한

종파 가운데서 사용되기도 했다(예:히브리인 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 결국 이 부분은 예수의 교훈과 행적을 담은 당시의 각 기록이 나름대로의

독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다른 기자들과 공동으로 인

식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자신도 감히 기록하겠노라는 복음서 기술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람이 많은지라 –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누

가는 분명히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느 누구의 기록된 자료를 참고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4복음서를 비교하여,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빼고 다른 부분을 놓고

본다면, 누가복음의 초반부는 누가가 독톡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기

서 1절의 ‘우리’와 연결하여 본다면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진다. ‘우리’는 누가가 기록

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누가가 ‘우리’와 많은 곳

에서 여러 활동을 했던 것을 보게 된다(행 16:10-17, 20:5-14;21:1-18;27:1-22). 렌스

키(Lenski)는 누가와 마가가 바울의 첫 투옥 중에 서로 접촉을 했고, 2차 투옥시에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우사이가 되었고, 따라서 둘

중 먼저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그 내용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므

로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볼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본서의 ‘우리’와는 긴밀

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저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기록은 많은 기록들 가운

데서 특별히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말 어미에 해당하는…

지라(* , 에페이데페르)고 하는 이 접촉사는 ‘…이므로’란 뜻의

‘에페이'(* )와 ‘확연히 알려진 것’이라는 뜻의 ‘데'(* ), 그리고 뜻을 깊

이하거나 강조하는데 쓰이는 후접사 ‘페르'(* ) 등이 합성된 단어로서 ‘…이므

로’, ‘참으로…이니까’, ‘생각해 보건대’라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가진 뜻으로 보아 앞선 사실이나 기존의 잘 알려진 일에 대한 회상과

확인을 나타내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이 곳에서만 나타난

다. 그러나 일반 헬라 문학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헤로도투스(Herodotus)나 디오니시

우스(Dionysius)의 역사서의 서두에서도 이 단어가 전통적인 문체로 사용되고 있다

(Robertson). 누가는 헬라인이었다. 그래서 헬라문학의 전통 양식에 따라 가장 격조높

은 고전 헬라어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1:1-4). 이에 대해 바클레이

(Baclay)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마치,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

으며 이 이야기에 대신할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1:3

그 모든 일을…자세히 –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가는 의사였다고 한다(골 4:14).

따라서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여기서 자신의 복음서 기록의 성격을 제시한다. 먼저 ‘그 모든 일'(* , 파

신)을 나타내는 원어는 중성 복수로서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 예수 중심으로 발생했

던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근원부터'(* , 아노덴)는 ‘처음부터

‘, ‘맨 시초부터’ 또는 ‘일찍부터'(행 26:5)라는 뜻으로, 2절의 ‘처음부터’란 말과 직

접 연관은 없으나 의미상 유사성을 지닌다. 아마 누가는 이 팔을 쓰면서 분명 본서

1, 2장에 언급된 탄생 기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자세히'(*

, 아크리보스)는 원래 ‘첨단’ 또는 ‘극점’을 의미하는 ‘아크론'(*

)에서 나온 말로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열정적 태도를 가리킨다. 본

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매우 정확하게’, ‘엄밀하게’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리고 뒤이어 나오는 ‘차례대로'(* , 카데크세스)는 ‘순서에 맞추어’, ‘

연속적으로’라는 뜻으로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서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시간순을

존중하여 연대기적 기술 방법을 택했다고 소개한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각 사건들을

시간적 배열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주제 의식을 갖고 신중히 체계화, 조직화

했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9:51-18:8은 주제에 의해 사건과 교훈이 나열되어 있다. 이

로 미루어 누가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따라 본 복음서를 기록해 나갔음이 밝혀진다. 즉

첫째, 역사성, 둘째, 정확성, 셋째, 논리적 일관성의 원칙에 따랐으니 이는 또한 누가

복음 전체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루어 살핀(* , 파레콜루데코티) –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따르다

‘, ‘집요하게 무엇을 탐구하다’는 등의 뜻으로서 고대 헬라어에서 흔히 사용되던 동사

의 완료 능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누가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기록에 대한 신뢰

감을 심어주기 위해 언급한 말로서, 누가는 복음서를 기술하기에 앞서 주도 면밀하고

도 심층적인 연구와, 정확하고도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기록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고 정확하

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도(* , 카모이) – 이는 ‘붓을 든 많은 사람'(2절)과 짝을 이루는 말로

서 누가 자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집필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

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 , 크라티스테 데오필레) – 누가

가 기록한 두 책(본서,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명시되고 있는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전

하는 바가 별로 없다. 혹자에 따르면 누가가 자신의 수신인의 진짜 이름 대신 가명으

로 사용한 것이거나 또는 상징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도

미티안 황제의 조카로서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였을 것으로도

추정한다(Streeter). 그렇게 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가명이 되고 만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하나의 고유명사(a proper name)이며 특히 누가가 그의 이름에 붙여 사

용하는 ‘각하’라는 명칭을 통해 볼 때 그가 실재(實在)한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

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리펠드(Liefeld)는 데오빌로가 누가의 학우이거

나 발행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E. J. Goodspeed, Grevdanus). 여기서 ‘데오빌

로’라는 이름은 ‘데오스'(* , ‘하나님’)와 ‘필레오'(* , ‘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라는 단어들의 합성어로서 이를 합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

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명칭을 듣고 혹자는(Origen, Bruce)

이것이 B.C. 3C 경에 흔히 사용되딘 이름으로서 어떤 특정 개인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

나님을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 즉 신앙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

만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한 성도의 이름이라는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할 뿐 상징적 이름이나 가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로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어서 있었는데 누가는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

해 자신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4절). 한편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

은 비록 본서는 데오빌로가 그 대표적 수신자로 밝혀져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직

데오빌로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헌정(獻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책을

권위있고 명성이 높은 한 개인에게 헌사하는 경우는 당시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그렇

게 함으로써 그 책은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었다(Julicher

Fascher). 더욱이 본서의 전반적인 기류는 탈(脫)유대적이요, 범세계적이라는 점을감

안할 때 누가의 복음서는 이방 세계, 특히 헬라주의에 깊이 물든 신앙인들에게 보내졌

을 뿐 아니라 그들을 발판으로 하여 전세계 모든 신앙인들에게로 지향하고 있다고 본

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각하'(* , 크라티스테)라는 말은 ‘지존하신

‘, ‘가장 고상한’이란 뜻으로서 형식적이고 친근하게 인사치레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

례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부분 어떤 특

정한 지위나 관직에 있는 신분이나 하나의 공식적인 직함으로 사용되고 있다(행

23:26;24:3). 따라서 본문의 데오빌로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

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Noval Geldenhuys,

Ramsay).

좋은줄 알았노니(* , 에돝세 카모이) –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이 3절 문장 서두에 온다. 여기서 ‘에돝세’는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뜻

에서 유래된 ‘도케오'(* )의 과거형이다. 실로 예수에 관해서 기록을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고, 주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또한 인간들에게도 큰 기쁨이다. 누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문장을 시작하고 있

다. 한편 KJV와 NIV를 통해서 보면 이 구절의 의미가 더욱 명백해진다. NIV는 이유를

나타내는 단어 ‘since’를 이 구절 문장 서두에 사용하고, KJV는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을 사용해 성경을 기록하는 일이 왜 좋은지를 밝히고 있다(It seemed good to me

also). 실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부터의 모든 일들을 거의 완벽할 정

도로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1:4

배운 바(* , 카 테케데스 로곤) – ‘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데스’는 ‘카테케오'(* , ‘귓가에 울리게 하다’, ‘말로

가르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로 미루어 데오빌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전으

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책의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

에게 이 복음서 기록을 의뢰하였을수도 있으며 아니면 누가가 기록한 이 책을 출간해

주었을 수도 있다(Henry, Liefeld, Geldenhuys). 한편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

지 않은 ‘로곤’은 ‘로고스'(* , ‘말씀’, ‘사건’)의 소유격 복수 형태이다.

NIV와 KJV는 이 단어를 ‘사실들’, ‘일들'(things)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알포드

(Alford)는 이 단어를 ‘말씀에서 표현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버운바’는

말씀을 통해서 배운 것들을 의미한다.

확실함(* , 텐 아스팔레이안) – 이 단어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 )와 ‘미끄러 넘어지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스

팔로'(* )의 합성어이다. 즉 ‘확실함’이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않고 견고

히 서는 것이다. 실로 우리가 믿고있는 복음은 우리를 견고히 세우고 온전케 하며 확

신을 같게 한다(딤후 3:15-17). 사실 분명하지 않은 바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누가는 진리에의 확신과 예수께 대한 ‘확실함’을 간직하

게 하기 위하여 붓을 들고 있다. 한편 이 책을 받아 볼데오빌로는 구전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것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따라서 구전을 통해 믿음이 성장한 그는 많은 이단

사상에 도전(挑戰)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는 유대교의 박해와 그리스도의 진리

를 위협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이단자들이 성행했다. 혹시, 데오빌로 역시 이런

영향에 위협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 해결

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누가가 기록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복음 기사를

통해서만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 기사가 이단 사상

들의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고, 또 때로는 중요한 공격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엡

6:11-18). 그리고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복음의 확실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Liefeld).

알게 하려 함이로라(* , 에피그노스) – 이 단어는’…에 부가하여’,

‘…에 더하여’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 )와 ‘알려고 배우다’, ‘알게 되다’

라는 뜻을 가진 ‘기노스코'(* )의 합성어 ‘에피기노스코'(*

) ) 의 부정 과거 형태로 사용되었다. 즉, ‘…을 철저히 알다’,

‘정확하게 알다’라는 뜻이 된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좀 더 분명

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더하려고 하였다. 기존의 지식에 완벽함을 더하는 것은 피

교육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교육자의 위치로, 또는 증인의 위치로 이끌어올리는 계기

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5

유대 왕 헤롯 때에 –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대헤롯(Herod the Great)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라는 의미가 된다.

그는 B.C. 37년 로마 제국 원로 회의를 세금 상납 및 치안유지 등의 약속으로써 매수

하고, 특히 당시 실권자인 옥타비우스(Octavius)와 안토니오(M.Antonius)를 등에 업음

으로써 유대 곧 팔레스틴 전체(4:44;6:17;7:17;23:5;행 19:37)의 분봉왕(分封王)이

되어 B.C. 4년에 그가 죽기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가 노릇을 하였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Idumean)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

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케함으로써 유더 백성들의 마음을 유화시

키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심지

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干

與)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다(마 2:1 주석 참조).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

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

과 어두움을 버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가(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

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아비야 반열 (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 여기서 먼저 ‘반열'(*

// , 에페메리아)이란 ‘…동안’, ‘때마다’, ‘만큼’ 등의 뜻을 지닌 전

치사 ‘에피'(* )와 ‘날’, ‘하루’ 등의 뜻인 ‘헤메라'(* )의 합성어로서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아론 자손 곧 제

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한편 24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다(대상 24:10).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8절 주석을 참조하라.

사가랴요 엘리사벱이라 –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

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엘리사벱(Elizabeth)은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

이시다’라는 뜻을 가고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출 6:23). 이들 부부

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

로 여겨졌다(Geldenhuys).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

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

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엘키사벱’이 이스

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출 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로 본다.

=====1:6

이 두 사람이…의인이니 – 이 말은 원래 구약적 개념으로서 율법적으로 온전한 자

에게 붙여진 관용구였다. 여기서 ‘의인'(* , 디카이오이)이란 ‘옳은’,

‘똑바른’, ‘정직한’ 등의 뜻을 지닌 ‘디카이오스'(* )의 변화형으로서,

특별히 이 말이 법률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정당한 판단에 따른 긍정적인 시인(是

認) 내지는 평가를 받은 자들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단어가 ‘하나님앞에'(in

the sight of God, NIV)라는 병행 문구와 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확

실시된다. 즉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바른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자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의인’이란 말이 ‘순전히 윤리적인 측면의 인격

에 대한 평가이기 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인격을 가리킨다’고 했다. 사실 인간이

그 인격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나설수 없다(롬 3:10). 그런 까닭에 성경적인 의

미의 ‘의’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서 그 죄와 죄의 대가를 제거하고 의로우신 예수 그

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디카이오스’의 의

미를 결정지어 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시며 그 말의 의미를 변치 않게 하시는 분이시

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의의 기준이시다(Wuest). 진정 인간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믿음’만으로 의인이 될 수있다(롬

3:20-24). 그런 점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벱은 본성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인이기 보다 바

로 ‘하나님 앞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서’ 의인임을 간과해서

는 안될 것이다. 한편 이 ‘의인’이란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

로 간주되었었는데 (창 6:9;7:1;18:23-28;겔 18:5-9)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경건

한 인물에게만 붙여졌다. 이것은 유대인의 이상형이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아

브라함, 이삭, 야곱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신약 성경에 와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

이 없는 자로라'(빌 3:6)고 자랑했던 바울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율법 시대의 의인관(義人觀)관에 따른 표현이었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단죄하는 복음관에서의 평가로 볼 수는 없다. 한편 이러한 구약적 의인관에서 볼 때

특히 누가복음 내에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벱,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

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Robertson).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

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겠는가?

계명과 규례(* , 타이

스 엔톨라이스 카이 디카이오마신) – 여기서 ‘계명’을 나타내는’엔톨라이스’는’명령’,

‘교훈’ 등의 뜻을 지닌 ‘엔톨레'(* )의 복수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부하

시고 지시하신 권위에 찬 명령들을 의미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이 ‘엔톨라이스’를 주로

‘계명’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다(롬 7:8-13). 그리고 ‘규례’를 가리키는 ‘디카이오마

신’은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 ‘공의를 행하다’는 뜻인 ‘디카이오오'(*

) )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께서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 ‘하나님께

서 만드시고 옳게 여기시는 것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결국 위의 ‘계명’과 ‘규례’는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룩하고 온전한 명령과 생활 규범들

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혹자(Bengel, Calvin)는 이 양자를 분리하여 ‘계명’

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심판의 근거가 되는 종교, 도덕적인 법령(法令)을, ‘규례’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의식적이고 제의적인 예법(禮法)을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보

고 있다. 이에 비해 또다른 학자들(Bruce, Lenski)은 이 양자를 대조시키지 않고 히브

리인들이 즐겨쓰는 셈어적인 중복 기법으로 보아 두 개념을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법령을 강조하기 위해 중복적으로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일 뿐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여기서 ‘흠이 없이(* , 아멤프토이)란 ‘비난

받거나 책망받을 것이 없이’라는 뜻으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켰다는 사실을

수식하고 있다. 실로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사가랴와 엘리사벱의 종교.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

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다.

=====1:7

엘리사벱이…무자(無子)하고 –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있는 7가지 유형을 기

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

(Barclay).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

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수태를 못하므로’라는 표현 가운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

는 ‘카도티'(* )란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 저자인 누가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행 2:45;4:35). 이 ‘카도티’는 대략 ‘…때문에’, ‘…만큼’, ‘왜냐하면’ 등

의 뜻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기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

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

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

을 감당해 갔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창17:16-17-사라;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

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1:8

마침…할새(* , 에게네토 데) – 이 말은 이야기를 상호 연결시

켜 주며 무엇을 소개시켜 주는 문구로서 히브리어의 ‘와에히'(* , ‘때마침 그

것이 일어났나’)와 유사한 표현이다. 특히 이 문구는 타복음서보다 본서에서 이야기들

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때 흔히 사용된다. 그리고 이 문구와 비슷한 ‘기노마이’

(* ) 역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쓰여진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서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복음서를 기술할 때 자신의 문학적인 역량

에 덧붙여 자신이 참고한 자료들을 하나하나 편집해갔음을 알 수 있다(Gaston).

반열(班列)의 차례대로 – 유대의 제사장들은 전체적으로 2만명 정도가 되고, 이들

은 종가(宗家)에 따라 24반열(division, 각 반열에 천명 정도)로 나눠진다. 이러한 제

도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라 할 수 있는 다윗 때에 정비된 것으로, 다윗은 초

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을 24가족(반열)으로 나누

고 그각 가족으로 하여금 1년에 1주씩 2차로 성전봉사를 하게 했다 (대상 23, 24장 ;

대하 8장).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바벧론 포로 당시에 일시 끊어져 포로 귀환하면서 4

반열만(하김, 예수아, 임멜, 바스훌) 귀국하게 된다(스 2:36-39). 그 후, 이 반열은

에스라의 주도하에 가능한한 본래의 모습대로 재조직하여 24반열의 이름만이라도 유지

하게 되었다. 사가랴는 그 중에 아비야의 반열로 여덟번째 반열에 속하게 된다. 그러

므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 반열은 다윗 당시의 그것과는 전혀 다

른것임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의 직무를…행할새 – 각 제사장 가족들은 그 해(年)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성전 봉사의 책무를 맡게 된다. 즉 제사장들 중 그해에 봉사할 임무를 맡게 되는 지사

장 가족은 일주일 동안씩(8일간;안식일에서 안식일까지) 일년에 두 번 성전을 섬기게

된다(J. Jeremias). 그러나 다음과 같은 유월절, 오순절,장막절 등 절기 때에는 제사

장들 모두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한 제사장 개인이 상번제(the daily sacrifice)를

위해 분향단에 향을 피운다는 것은 극히 희박한 경우이며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는 것

조차 큰 행운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의 수효(일설에는 약 2만명

정도였다고 함)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혹자(Farrar)에 따르면 한 제사장

이 평생에 두 차례에 걸쳐 성전 봉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제비가 자신에게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사장에게 있어 이 일은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영광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본문에는 직무를 맡은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 에난티 투 데우)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성전이 곧 하나

님의 임재 처소로 이해되었던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에 의한 묘사로 보아야 할 것

이다(합 2:20).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 이 말은 내용상 원래 8절에 부속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의

읽기대로 ‘제비를 뽑아…분향하고’라는 표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따라서’제사장의 전례’ 곧 ‘제사장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관습(* , 에

도스)’이란 8, 9절에 명시된 내용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라 볼수 있다.

제비를 뽑아(* , 엘라케) –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

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이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 )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

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뤼진 것이

다(신 18:10-12;수 18:6, 8).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민 26:55;수 14:2), 죄인을 찾아낼 때(수 7:14;삼상 14:42),첫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예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

타난다(행 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

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

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

하셨으나(잠 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

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다.

주의 성소에 들어가 – 여기서 ‘성소'(* ,나오스)란 성소(Holy Place)와 지

성소(the Holy of Holies)를 합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 )과 구별된다. 결국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

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이와 같이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마포

및 에봇으로 된 성의(聖衣)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분향하고 –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

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한다(시 141:2;계

8:3).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

호와 하나님께 흡향(吸香)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10절).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受胎告)를 받게된다.

=====1:10

모든 백성은…기도하더니 – 이 구절의 ‘모든 백성’에 대해 NIV는 ‘운집한 경배자

들'(all the assembled worshiper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라오스'(* , ‘백성’)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되고 있다. 예배자

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

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다. 이들의 첫째와 섯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다(Geldenhuys). 한편 이 백

성들 가운데 연로한 시므온(2:25)과 여선지자 안나(2:36)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Pulpit Commentary). 이 곳에 모인 백성들은 뒤에 21, 22절에 기록된 백성들과 일치

한다(Liefeld).

=====1:11

주의 사자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 )는 ‘사자’, ‘천

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곳에 따라 ‘사자'(12:9;마

2:13), 또는 ‘천사'(마 24:36;막 12:25;롬 8:38;고전 4:9;1:13, 14) 등으로 번역되었

다. 이 곳 외에도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한

다(1:26;2:9, 13, 21;12:8;15:10;16:22;22:43;24:4, 23).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행 10:4, 7;12:8-10).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

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메

시야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향단 우편 – 향단과 번제단은 다르다. 번제단은 성소 밖에 위치한다. 매일의 분향

은 성막뜰의 번제단 위에서, 제사는 성소안에서 드려졌다.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은 제

사를 드린다는 표시로 번제단에서 향단으로 불을 가져가 향을 사른다(Alford). 주의

사자는 향단과 떡상(진설병을 놓는 상) 사이에 나타났다. 성소를 들어가면 왼쪽에 떡

상, 오른쪽에 등대(촛대) 그리고 정면에 분향단이 있고, 그뒤에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

를 구분하게 된다(출 30:1-10;40:2-27, 아래 그림 참조).

=====1:12

놀라며 무서워하니 – ‘놀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타라크데'(* )

는 원형인 ‘타라쏘'(* )의 수동태 과거형이다. 그 뜻은 ‘요동하다’, ‘내

적 동요를 일으키다’, ‘마음의 평정을 없애버리다’이다(마 2:3;막 6:50;요 11:33).

‘무서워하니’에 해당하는 ‘포보스'(* )는 ‘두려움’, ‘놀람’, ‘경악’, ‘공포

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로 미루어 사가랴는 천사의 출현 때문에 마음

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놀랐음을 알 수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많은 사람들

의 공통된 현상이다(삿 6:22;13:22).

=====1:1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 )

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 )와 비교해 특별한 기

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NIV는 현재완료형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에이세쿠스데'(* )는 제1부정

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과거의 형태로, 과거에

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천사의 응답은 그 내용을 추정 가능하게 한다. 즉

그의 기도 내용은 자식이 없는 자신을 돌보실 것과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간구 이상으로 응답하신다. 즉

아들을 주시고, 메사아도 곧 오실 것인데, 그의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리

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사가랴에게 임한 축복으로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약 5:16)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준다. 요한(*

, 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 )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

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난'(* , 대상 3:24), ‘요아

네스'(* , 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

나이다. 성경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

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

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벧론 유수기(幽囚期)를 전후허서 뚜렷한 차

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

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1:14

너도 기뻐하고…기뻐하리니 – 이 부분은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

)와 ‘즐거워하다’로 번역된 ‘아갈리아시스'(* )가 연이어서 나

오는 문장이다. ‘아갈리아시스’는 ‘환희’ 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기

뻐서 뛰고 소리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을 암시한다.

=====1:15

주 앞에 큰 자 – ‘큰’에 해당하는 ‘메가스'(* )는 ‘위대한’, ‘덕스러운’,

‘권위있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0:25;딤 2:13). 이 말을 32절의 예수께 대해

큰 자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보면, 32절의 ‘큰 자’ 앞에는 ‘주 앞에’라는 수식어가

없음을 알수 있다. 결국 요한은 예수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

억할 수 있다(민 6:3, 4).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메시지와 일치하

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소주에 해당하는 ‘시케라'(* )는 강한 , 독주 등

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이 부분은 앞부분의 포도주와 소주라는 말과 어울려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별히 엡 5:18을 통해서 술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교를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의 성령 강조이다. 누가

복음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12회 사용되는데, 그 중 본장에서 4회(15, 35, 41, 67절)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누가의 저작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를 무려 41회나 사용하

고 있다.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은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또 한 가

지 놀라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1:16

이스라엘 자손을…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

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렘 3:7, 10;겔

3:19;단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

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

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눅 3:3)

=====1:17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 ‘심령’을 나타내는 ‘프뉴마'(* )는 ‘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성질 또는 영향력, 어떤 능력이나 애정, 감정, 욕구 등의 근

원’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내는 ‘뒤나메이'(* )는 ‘물려

받은 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을 의미한다. 더러는

‘기적을 행할 때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의미할 때도 있다. 즉, 요한은 엘리야가 지녔

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

것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야가 오시기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사 40:1;말 3:1-5;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요

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광야에서의 삶(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이나 지위고하(地位高河)를 막론하

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벧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는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

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

욱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신다(마

17:12;막 9:13).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돌아오게 하고 – 이 구절은 말 4:6에서 인용한 것으로

난해 구절에 속한다. 일단에서는 이 부분을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파괴된 이스라

엘 가정의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그 당시에는 로마와 결탁한 부모, 열심

당(Zealots)에 가담한 아들, 바리새파 형과 사두개파 아우 등 가정은 4분5열이 되어

있었으나 이 분열이 요한을 통해서 회복되리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매

튜 헨리(Mattew Henry)는 유대인의 믿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켜 이방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요한은 분열과 불신, 배타와 독

선 등을 끝내고 화합과 믿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줄 것이다.

주를 위하여…예비하리라 – ‘백성’이라는 헬라어 ‘라오스'(* )는 공관 복

음서에 49회나 사용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이 단어

를 ‘무리’, ‘군중’을 나타내는 ‘오클로스'(* )와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마 21:26) 이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

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

는 말이다(Liefeld). 여기서 요한의 사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1:18

어떻게 알리요…나이 많으니이다 – ‘어떻게’에 해당하는 ‘카타 티'(*

)는 ‘무엇에 의하여’라는 뜻이다(in what way, MLB).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하

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다. 20절과 연결하여 보면, 이것은 사가랴의 겸손이 아니고

불신의 소치임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마리아의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는

질문은(Haw shall this be, RSV) 45절로 미루어 천사의 메시지를 믿고 있음을 나타낸

다. 즉 사가랴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고, 마리아의 질문은 성취 방법에 대한 질문이

다. ‘늙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스'(* )는 나이많은 사람

을 지칭하는 말이다. 민 4:3;8:24, 25에 보면 레위인들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

러나야 된다고 하였다. 물론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날 정도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식

이 없다는 것에 대한 사가랴의 초조함이나 불신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1:19

천사가…가브리엘이라 –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

력’이라는 뜻이다. 성경상에서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단 8:16;9:21)과 ‘미가엘’

(단 10:13, 21;12:1; 유 1:9; 12:7) 둘 만이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이며 미가엘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

단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구약 외경 에녹서(Book

of Enoch)에는 4명의 천사장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은 미가엘(Michael), 라파엘

(Raphael), 우리엘(Uriel), 가브리엘(Gabriel) 등이다. 한편 ‘하나님 앞에 섰는’이라

는 말에서는 권위와 위엄(威嚴)이 느껴진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권위와 위

엄이 있긴 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내가

비록 천사장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자이고,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와 함께 만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

님의 심부름꾼으로 그 앞에 서있는 자이다.’

좋은 소식(* , 유앙겔리사스다이) –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유앙겔리조마이(*

)에서 왔다. ‘유'(* )는 ‘좋은'(good)을 뜻하며 ‘앙겔로'(*

)는 ‘메시지를 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합성어 ‘복음의

선포’라는 뜻으로 번역된다(Wuest). 그리고 ‘유앙겔리조마이’는 공관복음에서 모두11

회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10회나 사용되었다(본절;2:10;3:18;4:18,

43;7:22;8:1;9:6;16:16;20:1). 따라서 누가에게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다(Liefeld). 여기서 8절에 나타난 사가랴의 불신앙의 질문에 천사 가브리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헬라어 성경의 이 부분의 문법적 구조

에 따르면, 천사의 대답은 사가랴의 불신의 질문에 뒤이어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짐

으로써, 사가랴의 의심에 찬 말문을 막고 불신을 조기에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을 나타

낸다.

=====1: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내 말이 이루리라 – ‘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

‘(* )는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사용하는 불변사이다. 이 단어는 말을 강조할 때

나 좀 더 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

가 이 팔에 얼마나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나를 보게 된다. 의심의 결과는 벙어리가 되

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이 꼭 형벌이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에 대한 예시로 벙어리

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Alford). 또한 62절과 비교해 보면 사가랴는 벙어

리뿐만이 아니라 귀머거리까지 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의 벙어리됨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다.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는 오랜 침묵

을 통하여 의심의 질문을 던지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67-80절).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살펴보면 천사의 말은 이루어지도록 예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의 되는

날까지’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다른 어떤 사람이 거부한다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1:21

백성들이…기이히 여기더니 –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제사장이 오래 지체하게 되면 백성들은 제사장

이 어떠한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성

소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Alford). 탈무드(Talmud)에도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는 잠시 동안만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Lenski). 따라서 제사

장들은 가능한한 성소에서 속히 나와 백성들을 축복하고 해산시킨다. 이 구절에서 보

면, 분향이 행해질 때 밖에서 기도하던(10절) 백성들은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그들은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어떤 과오로 인해 죽지 않았나 걱정했을

것이다(레 10:1, 2)

=====1:22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는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다(민 6:24-26). 그러나 사가랴가 성소를 나오면서 시종 일관 침묵을 지키자 백

성들은 성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상(異像) – 헬라어에서 사용되는 ‘이상’ 또는 ‘환상’이라는 말은 모두 3개가 된

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에 해당하는 ‘와타시아'(* ), ‘보여지

는 것’을 나타내는 ‘호라마'(* ), ‘봄’, ‘외관’, ‘자태’에 해당하는 ‘호라시

스'(* )등이다. 이구절에서는 ‘와타시스’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상’이라는 말은 대개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본 것, 꿈이나 황홀경

중에 본 것, 혹은 선지자에게 계시된 것 등을 의미한다.

형용(形容)으로 – 사가랴는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기에 손짓, 몸짓으

로 그의 뜻을 전달하였다. 사가랴의 말 못함은 백성들에게 성소 안에서 그가 지체한

원인에 대한 충한 답변이 되었고 또 그가 이상을 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1:23

직무(* , 레이투르기아스) – 이 말은 원래 자신의 ‘공적인

사무’를 뜻하며 자신의 희생이나 비용으로 수행되는 ‘공적인 봉사'(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한다(고후 9:12;빌 2:17, 30;히 8:6;9:21). 특히 여기서는 제사장적 사역의 의미

를 나타낸다. 사가랴는 듣고 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수행한

다. 사가랴의 희생적인 직무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

다.

=====1:24

엘리사벱이…숨어 있으며 – 엘리사벱이 왜 숨었는가에 관해서는 본문에 밝혀져 있

지 않다. 자신이 나이들어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해서 숨은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삿 13:13, 14의 내용처럼, 임신한 자신을 부정한 생활에서 구별하고 이와 아울

러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봄

이 더 타당할 듯하다.

=====1:25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 이 구절에는 깊은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내 부끄

러움’이란 유대인 제사장 가문에서 아이가 없다는 세인(世人)들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창 30:23;삼상 1:6-10). 여성의 불임은 유대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수치였으

며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엘리사벱은 오랜 세월의 고통

가운데서 큰 결실을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기쁨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부끄러움(* , 오네이도스) – 이 말은 ‘비난’, ‘불명예’, ‘모욕’이라

는 뜻을 갖는다. 신약성경 중에는 본절에서만 사용된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치

심 정도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으로 빠뜨리는 치욕을 뜻한다.

없게 하시려고(* , 아펠레인) – 이 단어는 원형이 ‘아파이레오'(*

)로서 ‘치워버리다’, ‘가져가다’, ‘베어버리다’라는 뜻이다.

=====1:26

천사 가브리엘이…동네에 가서 – 타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치밀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음을 나타

낸다. 이제 본절로 부터는 예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갈릴리 나사렛 – 나사렛(Nazareth)이라는 동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갈릴리

지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받아볼 데오빌로나 그 외 이방 사람들은 작은 나라

의 작은 마을인 나사렛이 어느 지방의 어떤 곳인지 잘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사렛

은 앞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비교가 된다. 천사는 호화롭고 화려한 대도시를 찾아간 것

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외진 마을을 찾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요 1:46에 기록된 나다나

엘의 말을 기억할 수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극단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취급받던 동네가 나사렛이다. 예수는 공생애 이전의 삶의 대부분을 이 지

역에서 보내셨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70마일 떨어진 이스르엘 또는 에

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북편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다. 나사렛 뒷편에는 레

바논과 언제나 눈이 덮여있는 헬몬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산이 위치

했는데 이 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다. 현재는 이 지역을 ‘엔 나시라'(EN Nasirah)로

부른다(Geldenhuys).

=====1:27

요셉이라…마리아라 –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약혼)한다. 샴마이(Shammai)학파

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

납되지 않았다. 또한 정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본절과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

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처녀(* , 파르데논) – 이 단어는 원형이 ‘파르데노스'(*

)로서 ‘미혼녀’, ‘소녀’라는 뜻이다. 성경 외적 문헌에 의하면 이 말이 동정녀

만을 뜻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문맥과 특히 34절에 수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동정녀를 뜻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1:5-38의 주

제 강해 참조.

=====1:28

은헤를 받은 자여…함께하시도다 –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나타난 것(8-24

절)과 같이 마리아에게도 나타난다. 사가랴의 경우와 마리아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사

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는 평안과 주의 임재의 인사를 하지 않은 반면에(8-24

절) 마리아의경우에는 이 같은 천사의 인사가 있던 점이 차이가 난다. ‘은혜를 받은

자’에 허당하는 헬라어 ‘케카리토메네(* )는 그 어원이 ‘은

혜’를 뜻하는 어근 ‘카리스'(* )에서 온 말로서 완료 분사형으로 쓰였다. 이

완료 분사는 강한 현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는 ‘은혜를 받은

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Lenski). 한편 천사와 마리아 간의 대화는 세

차례에 걸쳐 전개된다. 1차 대화에서는(28, 29절) 천사의 은혜로운 인사와 이에 대한

마리아의 당혹감이 나타나며, 2차 대화(30-34절)에서는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천사의

재확인과 마리아의 설명 요구가 뒤따른다. 그리고 3차 대화(35-38절)에서는 천사의

대답과 마리아의 순종을 보여준다.

=====1:29

생각하매(* , 디엘로기제토) – 이 말은 원래 ‘별개의 논거

(論據)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합하다’, ‘추론하다’라는 뜻이며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리아는 놀라는 한편 모든 일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하

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1:30

천사가…무서워 말라 – 사가랴의 경우는 천사가 나타나는 순간 놀라고 무서워했으

나(12절)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무서워했다. 역시 두 상황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얻었느니라(* , 휴레스) – 이 말은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진 ‘휴리스코’

(* )의 단순 과거형이다. NIV는 이를 ‘발견했다'(have found)라는 현재

완료형으로 번역했고 렌스키(Lenski)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지

결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나 공

로를 요구하지 않는 채 주어진다(엡1 :6). 그러나 언제든지 주어지는 그 은혜를 발견

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여기서 헬라어의 단순 과거형이 사용되었음을

보아 마리아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미 은혜를 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31

예수라 하라 –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인 히브리어 ‘예호수아'(*

)의 헬라음으로서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출 24:13;삼

상 6:14;왕하 23:8;대하 31:15;학 1:1;슥 3:8). 이 이름은 주후 2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행 13:6;골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의 사용을 꺼렸기 때문인 것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

고 한 마 1:21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그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마21:11), ‘다윗의

자손'(마 27:37;막 10:47-48;요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1:32

큰 자 – 이 구절은 15절과 대구를 이룬다. 가브리엘은 요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예수께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어투를 사용한다. 요한에 대해서는 다분히 제한

적 어투를 사용했으나 예수께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경외로운 표현을 사용하였

다.(Liefeld).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 휘오스 휘프시스투) – 예수께

서 신적 기원(divine origen)을 지닌 메시야이심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말씀이다. ‘지

극히 높으신 이’는 35절에서도 나오는데 양자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

어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명칭, 특히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모두 아홉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일곱

번을 누가가 사용했다(본절, 35, 76;2:14:35;8:28;19:38).

그 조상 다윗의 위(位) –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

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

할 수 있다(3:31). ‘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 )은 ‘등받침이나

팔받침 또는 발등상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의 복수형은 왕이나 신

의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골 1:16). 여기서 다윗의 위는 왕되신 메시야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킨다. 요컨데, 예수는 예언된 바 그대로 다윗의 혈통

에서 태어나사(삼하 7:12-16;시 89:29;132:11;사 9:7)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 보이

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1:33

영원히(* , 아이오나스) – ‘시대’, ‘영원’ 등의 뜻인 ‘아이온'(*

)의 복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때때로 ‘오래 전부터'(70절), 혹은 ‘창세 이후로’

를 뜻하기도 하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

인다(55절;요 6:51). 특히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영원성’에 대한 암시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마 6:13;롬 1:25;히 13:8;유 1:25, H. Sasse, TDNT. I,

197-209).

야곱의 집(* , 오이콘 야콥) – ‘집’에 해당하는 ‘오이콘’은

‘오이코스'(* )의 단수 목적격으로서 ‘집’, ‘가족’, ‘가문’, ‘종족’의 뜻을

나타낸다. ‘야곱의 집’이라는 표현은 행 7:46에도 나타나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지만 더 정확히는 영적 이스라엘로(마 3:9;롬 10:10-13) 그리스도를 왕

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는 견행에 많은 학자들이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

(Lenski, Geldenhuys, 이상근).

왕 노릇 –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예수

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이다(고전 15:25;계

11:15).

그 나라(* , 바실레이아스) – ‘왕국’의 의미를 담고있는 이 단어

는 때때로 ‘왕권’, ‘왕정’, ‘통치’ 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

(喜樂)으로 가득한(롬 14:17) 하나님의 나라에 다름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

해서는 막 1:15의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

를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고(22:29), 우리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무궁하리라(* , 우크 에스타이 텔로스) – ‘무궁’을 나

타내는 ‘텔로스’는 ‘끝’, ‘목표’,’정지’ 등의 뜻을 가지며,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우

크’와 함께 사용되어 ‘정지되지 아니하리라’ 또는 ‘끝이 없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

‘영원’과 ‘무궁’을 연이어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과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시 45:6;단 2:24;7:14;요 12:34;계 11:15).

=====1:34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알지’에 해당하는 ‘기노스코'(* )는 히

브리어에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야다'(* )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4:1;19:8;삿 11:39). 이 동사는 현재 시상으로 사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포함

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나는 처녀이니'(since I am a virgin)

라고 번역한다. 즉, 과거에나 지금 이 순간에나 아무 남자도 알지 못한 처녀임을 말해

준다(Liefeld). 그러나 이 구절을 놓고 로마카톨릭이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로서 지

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에겐 육친(肉親)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마 12:46;막 3:31, 32).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의심하여 표적을 구한 사가랴와는 달리(18절)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취 방법을 묻는다(18절 주석 참조). 천사의 수태 고지

(announcement)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권

능을 믿는 믿음이 었었기에 이제 마리아는 천사의 전언(傳言)을 오히려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 누가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데, 1장, 2장에서만도

여섯번 이상을 언급한다(41, 67, 80절;2:25, 26, 27).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

하는 데는 세분히 동역자,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

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Lenski,

Barclay).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

생하셨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기적이었다.

능력(* , 뒤나미스) – 신체적, 지적, 영적 ‘힘’ 혹은 ‘가능성’을 의미

한다. 신약의 여타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대한 개념 또한 그리스도와 직접적

인 연관을 맺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메시야가 밀접한 연관을 나타낸다

(시 110:2;사 9:5;미 5:5). 이러한 능력은 일차적으로 왕적 능력이지만 선지자의 능력

도 포함된다(17절;24:19;미 3:8;행 7:12). 하지만 그리스도는 바로 전지 전능하신 하

나님의 본체이시라는 점에서 능력있는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이러한 점은 동정녀

잉태의 과정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

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잉태되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함

께하였으며, 당신의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친히 행해

보이셨다(4:14, 36).

덮으시리니(* , 에피스키아세이) – ‘그늘을 지우다’, ‘덮다’,

‘역사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피스키아조'(* )의 직설법 미래형이

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는 출40:38의 영광의 구름(the

shekinah glory)을 암시한다(Robertson). 또한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변화산

관련 기사에서도 구름이 덮힌 사실이 묘사되었다(9:34;마 17:5;막 9:7). 이 기록들에

서는 한결같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목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렸다고 되

어 있는데, 이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태어날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 구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의 아들 – 이 칭호는 예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막 1:11;9:7) 들린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에 의해(마 16:16), 귀신들에 의해(막 5:7) 그리고 로마의 한 백부장에 의해(막

15:39) 불리워졌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부자(父子) 관게를 암시하신 적이

많다(마 11:27;막 13:32). 하지만 예수는 단순히 한 아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독생자이

다(요 20:17). 아들과 아버지는 뜻과(요 4:34;6:38;7:28;8:42;13:3) 행위와(요14:10)

영생 수여의 면에 있어(요 10:30) 하나이다(요 5:19, 30). 이런점에서 이 칭호는 메시

야적 칭호임과 아울러 성부와 성자께서 그 기원과 성품에 있어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

한다(요 3:16;히 1:2).

=====1:36

네 친족 – ‘친족’에 해당하는 ‘슁게네스'(* )는 ‘동족’ 혹은 ‘친

척’이란 뜻이다. 엘리사벱과 마리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엘

리사벱은 레위인출신의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지만(5절)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도 레위

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서로 다른 지파사람들과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출 6:23;삿 17:7).

=====1:37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없느니라 –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 )

는 ‘생생한 목소리로 말해진 것’, ‘말씀’, ‘진슬’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동의

어인 ‘로고스'(* )에 비해 ‘계속적인’ 의미와 단일 개념을 강조한다. 한편

본절은 창 18:14과 마 19:26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천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된다. 즉 ‘하나님

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1:38

주의 계집종 – ‘계집종’을 뜻하는 헬라어 ‘둘레'(* )는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 )의 단수 여성형이다. 이 표현은 자식을 간구하던 한나의 기도

를 떠올리게 한다(삼상 1:11).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

치게 될 온갖 비난(非難)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삼상 3:18)나 다윗(삼하

7:25)의 전례를 연상시킨다(이상근).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이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世人)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37절)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1:39

마리아가…빨리 – 본절에 이르러 엘리사벱과 마리아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결

합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요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와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의가 집중된다(43절). 여

행길이 얼마나 걸렸는지, 어떻게 여행했는지, 누구와 함께 찾아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

다. 단지 그녀는 엘리사벱을 만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여행길을 재촉해 ‘빨리’ 갔다고

전한다. 아마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벱도 이적적 은혜에 의해 수태되었다고하는 소식을

듣고 그 기쁨과 놀라움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마리아가 엘리사벱을

방문하기 전에 마 1:18-25의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산중에(* , 오레이넨) – 이 단어는 해안에 접해 있는 유대 산지를 말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팔레스틴을 해안

지대, 평원 지대, 계곡 지대 그리고 고원 지대로 구분할 때, 사가랴의 집은 이 고원

지대에 위치했던 것 같다(이 상근).

=====1:40

문안하니 – ‘에스파사토'(* )의 기본적 의미는 ‘껴안다’인데, 여

기서 파생된 의미가 ‘…을 좋아하다’, ‘…에게 경의를 표하다’, ‘…를 환영하다’

등이다. 즉 이 인사는 포옹과 문안을 포함하는 매우 열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H.

Windisch, TDNT., I, 496-502, Lenski).

=====1:41

아이가…뛰노는지라 – 임선 6개월에 복중(腹中)의 아이가 뛰노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적 현상이다(창 25:22). 자연적인 것 같은 현상을 특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까닭은 이 순간의 태동(胎動)이 다른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것을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요

한이 복중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방문을 기뻐 뛰놀며(44절)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포스'(* )는 이 구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胎兒)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15에서는 예수로부터 영적 축복을

받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이 그의 모친 엘리사벱에게

도 역사해 그녀의 마음에 놀라움과 감사, 사랑을 가득 채워주었다. 엘리사벱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예언을 통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예언의 영은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난

바이다. 엘리사벱을 방문한 마리아, 그 인사를 들은 엘리사벱, 복중의 태아, 모두가

성령 안에 있었다(15절 주석 참조)

=====1:4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 오랜 산중생활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던 중 마

리아를 만난 데서 온 기쁨,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복중의 아이가 뛰는 사실에 대한 감

동 그리고 성령의 계시 등에 의한 복합적 감정의 표시로서 탄성을 발했을 것이다. 물

론 엘리사벱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

런데 마리아가 찾아와 인사를 하자 그 순간 계시에 의해서 모든것을 알게 되었다

(Lenski).

여자 중에…복이 있도다 – 엘리사벱은 마리아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 성령의 계시

에 의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 본절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아람어적

표현으로서(삿 5:24;아 1:8) 마리아가 세상의 모든 여자 중 가장 큰 축복을 받은자임

을 가리킨다. 물론 마리아의 축복은 그녀의 복중에 든 아기 곧 만백성을 구원하실 메

시야 때문이지 마리아 자신의 특별한 장점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카톨릭에서 마리아

를 성모로서 숭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1:43

내 주의 모친 –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 라고

한 곳은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신성(Deity)을 인성(人性)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예

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이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리아는 메시야요 주이신 예수의 어머니였, 하나님의 어머니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이

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다. 한편, 본서에는 ‘주'(Lord)라는

명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공관복음에 이 명칭이 166번 나오는데 그 중 95회가 누가

복음에서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기사를 보면 이곳 외에도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주’로 불리워졌다(76절 ;2:11). 여기서 이 말은 유대인들이 대망해 오던 바로

그 메시야를 지칭한다.

내게…어찌 된 일인고 – 엘리사벱의 이 말과, 후에 세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

신 예수께 한 말,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는 맥을 같이한다. 엘리사벱

의 이 겸손함이 예수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세례 요한의 겸손으로 이어진다.

=====1:44

네 문안하는 소리가…뛰놀았도다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서두에는 ‘이

유’를 설명하는 헬라어 ‘가르'( )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

한다.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엘리사벱 자신에게 임했다. 그리고 그 계시를 통해 마리

아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복중의 태아도 기쁨으로 뛰어놀았다. 한편

자신에게 있었던 그 비밀한 일을 엘리사벱이 알고 반응하며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이

낳을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엘리사벱의 복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자신

의 아이에게 경배하자 마리아는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5

믿은 – ‘피스튜사사'(* )는 원형이 ‘피스듀오'(*

)로 단순 과거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가 어느 한 순간만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서 신앙을 지켜온 여인임을 알 수 있다.

주께서…이루리라 – 이 문장에는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문두에 있는 ‘호티’이다. 이것은 ‘…하는 것'(that) 또는 ‘…이기 때

문에'(for because)라는 뜻이며 이 후자의 뜻으로 옮기면 더욱 생생한 의미가 드러난

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은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믿은 여인 곧 마리아가 복되다는 의미이다.

=====1:46

마리아가 가로되 – 46-55절까지는 ‘마리아의 찬가’라고 이미 알려져 있다. 이는

‘매그니피캣'(Magnificat)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역 성경에서 이

시의 앞 부분 첫단어로서 이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삼상 2:1-10의 한나

의 기도를 떠 올리게 한다. 플루머(Plummer)는 이 시를 한나의 시와 그 외에 다른 12

개의 구약성경 구절들과 서로 비교하고 있다. 이 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사항은 해

당 강해 부분을 참조하라.

찬양하며(* , 메갈뤼네이) – ‘위대하게 만들다’,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원문에서는 문장 제일 서두에 놓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 노래에 대해 본문 비

평학상이나 문맥상의 이유로 마리아가 부른 노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러는 라틴어

사본의 이 부분이 엘리사벱의 노래로 되어 있어 이를 엘리사벱의 노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삼상 2장에 나타난 한나의 상황과 자식이 없어 사

회적으로 수치를 당하던 엘리사벱의 상황이 유사하며, 노래를 지은 사람의 처지와 48

절의 내용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엘리사벱이 저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

나 이러한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다. 한나와 엘리사벱의 처한 상황이 서로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8절의 말씀은 마리아에게도 역시 적합한 말씀이다.

=====1:47

내 마음(* , 토프뉴마 무)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

뉴마’는 46절의 ‘프쉬케'(영혼)와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공히 인간의 지적, 정서

적, 의지적 생의 중심부를 말하며 때로는 ‘영혼’ 혹은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다. 굳이 그 의미를 구분하자면 ‘프쉬케’가 개인의 생리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

할 때 사용된 반면에 (벧전 2:11), ‘프뉴마’는 프쉬케보다 더 고등한 면을 나타냈

을 때 사용되었다(롬 8:16). 여기서는 이 두 용어가 별다른 의미의 구별없이 반복적으

로 사용된 바, 이는 반복을 통해 강조를 꾀하는 히브리식 관용법에 해당한다.

하나님 내 구주 –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자신의 노래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고백했

던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에 비교될 수 있다(합 3:18).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

수를 잉태하던 그 순간부터 원죄(Original Sin)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듯이 마리아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일 따름이다.

=====1:48

그 계집종의…돌아보셨음이라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한 후 마리아는 하나

님앞에 선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여기

‘계집종의 비천함’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목수의 아내라는 낮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인

식과 겸손에서 나온 고백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을 만한 별다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데 대한 감격과 겸손을

표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심령이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것이다(사

57:15).

보라 이제…일컬으리로다 – 마리아는 엘리사벱을 통하여 ‘복이 있다’는 소리를 이

미 들었다(42절). 그리고 후에도 한 여인에게서 ‘복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27).

또한 마리아는 성도들을 통해 대대로 복있는 여인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는 한 그녀의 영광은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이 구절의

의미가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리아

가 비천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소원을 간구하고 축복을 부탁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

다.

=====1:49

능하신 이(* , 호 뒤나토스) – ‘능하신 이’는 구약성경에서 ‘엘

쇄다이'(* )로 표현되어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창 17:1;욥

5;17;8:3등). 야훼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도는 곤궁에 처할 때에 도움을

얻기 위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신 8:17,

18;시 46:1;86:16;사 41:10). 하나님의 능력은 변덕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일관된 당신의 뜻과 공의로운 계획에 따라 행사되기 때문이다(사 5:16).

거룩하시며(* , 하기온) – 구약성경에서 거룩이란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

되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그분의 초월성을

뜻하며(출 3:4, 5) 또한 윤리적으로 무흠하신 성품을 뜻한다(레 11:44;벧전 1:16).

그리고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의식상의 존엄성과 관련되어 쓰인다(출 29:1). 특

히 신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뜻인 혤라어 ‘하기오스’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

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轉嫁)받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뜻하거나

(고전 1:30)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들의 윤리적

특성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롬 6:22;고후 7:1).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토스'(* )는

‘힘’, ‘권능’, 또는 ‘권능의 표현’, ‘전능한 행위’등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인간의

힘(신8:17), 활의힘(시 76:3), 심지어 바다의 힘(시 89:9)에까지도 관련되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능력(시 62:11;엡 1:19, 20;6:10;골 1:11;딤전 6:16)에 사용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능을 강조한다. 한편 ‘그의 팔’은 하나님의 전능

하신 능력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신 26:8;시 89:13;118:15). 여기서 마리아는

과거에 하나님이 교만하게 당신을 반대했던 권세가들을 물리치시며(출 15:1, 22;단

4:24-27) 겸손한 자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셨던 사실(창 41:16;단 1:8-21)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과 무관하게

천상(天上)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며, 또한 모든 불의

하고 왜곡된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로 잡히게 되리라는 사상이 이 노래 속에 강

렬하게 함축되어 있다.

흩으셨고 – ‘디에스코르피센’의 원형 ‘디아스코르피조'(* )

는 ‘흩다’, ‘낭비하다’, ‘탕진하다’의 뜻이다. 구약에서 이 말은 원수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22:15).

=====1:52

권세 있는 자를…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원어상 ‘권세 있는 자’는 ‘주권자’, ‘통

치자’를 뜻하며 ‘위'(位)는 ‘왕좌’, ‘보좌’를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압제자들을 그

들의 보좌에서 쫓아내셨으며’라고 옮겨질 수 있다. 마리아는 본절과 다음절에서 약자

와 강자 사이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

이 교만한 자를 징계하신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바로(출5:1-11), 고라와

그의 동료(민 16장), 하만(에6:6-14), 느부갓네살(단 4:24-37), 벧사살(단 5장), 아마

샤(왕하 14:1) 그리고 웃시야(대하 26:16)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성경은 권세나

부(부) 자체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

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권력과 부의 행사를

말한다. 교만하고 강한 자는 낮아지고 비천한 자가 높아지며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리라는 이 사상은 예수의 산상 수훈 가운데 표출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마 5:3-6

주석 참조).

=====1:53

주리는 자를…배불리셨으며 – 누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었으며(15:1-32), 당시의 특권층과 기득권자들에로의 부의

집중으로인해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다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

하였다. 예컨대, 가난한 자에게 임할 축복과 부자들에게 미칠 화에 관한 설교

(6:20-26),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등이 그러하며 본절 또한 그 중 한 예에

속한다. ‘배불리셨으며’에 해당하는 ‘에네플레센'(* )의 원형은 ‘엠

피플레미'(* )로서 ‘가득 채우다’, ‘만족케하다’는 뜻이다. 이 동사

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폭 넒은 용어이며 그릇에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웠음을 의미한다.

부자를…보내셨도다 – 본문에서 부자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된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사리 사욕에만 급급하는 자들에게는

켤코 은혜를 내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랑하는 부를 많이 가질수록 그들의

속은 그만큼 텅비케 된다. 더욱이 그들의 부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나

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부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면

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편, 이 모든 공의의 실현이 앞으

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실현되리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에 마리아는 이 찬송시

(讚頌詩)에서 계속 과거 시상을 사용하고 있다.

=====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 ‘종’에 해당하는 ‘파이도스’의 원형 ‘파이스'(*

)는 ‘어린아이'(소년, 소녀)란 뜻이며 혈통과 관련하여서는 ‘아들’, 사회적 신분과

관련하여서는 ‘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

도록 택하심받은 언약 공동체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존재 의의를 지닐수 있었으며, 이방인들은 이러한 언약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비로

소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구약 시대에는 ‘긍휼’과 ‘도움’이 원

칙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

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가 끊김으로써 소위 암혹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이 암흑을 뚫고서 구원의 새로운 빛이 임하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메

시야가 마침내 도래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의 대상은 이제 민족과 혈통의 구별을 초월

한 영적 이스라엘로 확대된 것이다(롬 9:6;갈 3:16;6:16). 사실상 이방인 구원은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 등).

기억하시되(* , 므네스데나이) – 이 말의 헬라어 원형 ‘밈네스

코'(* )는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등의 뜻으로서 언약하신 바

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창 9:15이하;출

2:24).

=====1:55

우리 조상에게…영원히 하시리로다 – 마리아의 찬양은 선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

님의 신실하심을 감사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과(창 12:3) 이삭과(창 26:3, 4) 야곱에게(창 28:14) 맺으신 약속대로 언약

백성을 도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들어 장래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함께 하시

리라는 강한 확신(確信)을 표명하고 있다.

=====1:56

마리아가…돌아가니라 – 36절에 의하면 엘리사벱은 이미 임신 6개월의 몸이었다.

이 이후에 마리아가 방문하여 3개월을 함께 보내었으니 엘리사벱은 임신 9개월이 되어

해산할 시기가 임박하였다. 마리아가 3개월이나 함께 있다가 엘리사벱의 해산을 보지

않고 돌연 집으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해산을 보고 돌아갔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엘리사벱의 해산 이전에 돌아갔을 경우, 그 이유 또한 확실히 제시할 수

없다. 여하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으로 요셉

과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게 된다(2:4).

=====1:57

엘리사벱이…낳으니 – 앞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수태에 관한 기사가 번갈아

가며 언급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그들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본절은 5-25절에

이어 세례 요한의 탄생 기사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1:58

함께 즐거워하더라(* , 쉬네카이론 아우테) – 지속적

인 즐거움을 묘사하기 위해 미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기쁨은 엘리사벱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 모두의 기쁨으로 옮아갔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

의 앞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탄생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바,

본절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기도 하다.

=====1:59

할례(割禮)하러(* , 페리테메인) –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할

례를 받았는데, 구약 시대에 이 할례가 갖는 의미는 여러가지였다. 1 하나님의 언약

에 대한 순종의 표. 2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표(삼상 17:26). 3 여호

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케 하는 표. 4 신약 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등. 하지만 세월

의 흐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신체적으

로만 할례를 받는 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소위 ‘마음의 할례’가 강조되었다(신

10:16;30:6;렘 4:4;겔 44:7).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하더니 – 생후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며 이때 아이의 이

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었다(59절;2:21). 따라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창 17:5), 야

곱이 이스라엘로(창 32:28), 혹은 사울이 바울로(행 13:9) 칭하심받게 된 때는 그들

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또한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에 이웃이

참여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유대 풍습이었고(릇 4:17)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

의 이름을 짓는 것도 유대의 한 풍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이 갖는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을 행

사했으며(창 2:19, 20) 한 성읍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그 성읍에 대한 통치권 확보

와 동일시되었다(삼하 12:28). 그리고 여자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자의 이름으로

칭해지길, 즉 남자의 보호 아래 놓여지길 구했으며(사 4:1), 하나님의 보호가 ‘하나님

의 이름으로 칭함받다’라고 표현되었다(사 63:19).

=====1:60

아니라 요한이라 – 엘리사벱은 자신의 반대가 관습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또 여자의

견해라하여 무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아니라’에 해

당하는 헬라어 ‘우키'(* )는 ‘정말로, 절대로 아니다’는 뜻이다. 엘리사벱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몇몇 주석가는 그녀가 남편 사가랴처럼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 주장한다(Meyer, Bengel). 그러나 그보다는 엘리사벱이 필담(筆

談) 형식을 통해 사가랴가 받은 모든 계시의 내용을 전해받아 알았을 거라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Bruce, Plummer, Lenski). 원문에는 ‘우키’ 다음에 바로 ‘알

라'(* )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이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오

히려’라는 뜻이며 부정어 ‘우키’와 함께 사용될 때는 ‘정반대로’의 뜻을 나타낸다. 한

편,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 ‘요한’이라는 이름은 다음 몇가지 사실을 암시한

다. 1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서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

의 은혜였다. 2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64절). 3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

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였다(3:10-14;마 3:5-6).

=====1:61

저희가 가로되…이름한 이가 없다하고 – 친척과 이웃 사람들의 생각에는 요한이라

는 이름이 부적합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가문에서건 전승되는 이롬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가문 중에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계시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친족들은 관례적으로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짓기를 청했

던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지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므로(15절) 그의 위대한 생애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였다.

=====1:62

그 부친께 형용하여…물으니 – 당시 사가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20절 주석 참조). 22절에서 누가는 ‘사가랴가 벙어리대로 있더니’라고 말하지

만 사용된 단어 ‘코포스'(* )는 ‘벙어리’뿐만아니라 ‘귀머거리’를 의미하기

도 한다(7:22).

=====1:63

서판(書板) – 표면에 밀랍(wax)을 얇게 칠한 작은 나무판(little-tablet)으로서 그

곳에 첨필(尖筆)로 글을 썼다.

그 이름은…기이히 여기더라 –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에 대해서 사가랴의 의견을

물었을 때, 사가랴의 대답은 ‘요한이라’였다. 이것은 사가랴의 의견이 아니었다. 이것

은 계시에 의해서 이미 주어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사

가랴가 귀거머거리였음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만일 사가랴가 엘리사벱과 주위 사람들

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었었다면 부인 엘리사벱과 똑같은 이름을 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64

이에 그 입이…찬송하니 – 사가랴의 믿음있는 단호한 태도와 순종은 결실을 맺고,

자신의 불신의 표적(sign)이었던 벙어리 상태에서 풀려나게 했다. 이로써 20절의 천사

의 말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사가랴는 그 혀가 풀리어 말할 수 있게 되자 먼저 하

나님을 찬양했다. 이 찬양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68-79절의 내용뿐만 아니라 지금까

지 되어온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며 지난 10여개월 동안 말 못했던 답답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크나큰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의 찬양이다. 아마 그는 장

장 10여개월에 걸친 침묵의 기간 동안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

의 불신에 대해 뉘우침과 아울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도리를 절실히 배웠을 것

이다.

=====1:65

다 두려워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 )는 ‘공포’가 아니

라 초자연적 사건에 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경외감’이다(12절 주석 참

조). 주위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진 일

을 목격한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의미이다.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는 예루살렘 주위의 한정된 지

역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따라서 때때로 그 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하다. 유대 본

령(本領)은 한 면이 약 70km되는 거의 정방형(正方形) 모양이었다. 유대는 특히 ‘산

지’로서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요새지가 600m에서 1,004m에 걸쳐 있다(헤브론의 북

쪽). 이 지역은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광야’ 또는 ‘사막’ 지대로서 샘이 거의 없어

항상 인구가 적었다. 한편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바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산간 지역 일

대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교역상(交易商)들이 항상 유대 주위를 통과했는데 이

교역상들을 따라 이 이야기가 점차 유대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1:66

마음에 두며 – 헬라어에서 ‘마음’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문 또는 낭설로 여기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것이다(47, 51절 주석 참조).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 이 아이가 선한 인물이 될지 악한 인물이 될지에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 섞인 물음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은

구절 ‘주의 손’이 이 질문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손(* , 케이르 퀴리우) – 구약은 창조에 있어서나 역사

진행 과정에 있어서 자주 하나님의 손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로

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은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은 개개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왕상 18:46). 그러므로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한다는것은 곧 하나님께

서 큰 권능으로 요한을 덧입히시며 돌보심을 의미한다.

=====1:67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본장 원문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관사를 계속

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을 계속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으로 지

금까지 되어온 모든 일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진행되어 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 역시 성령의 세밀하신 역사 아래 진행되어질

<세례요한교회의 벽에 있는 샤가랴의 찬가>

것을 시사하고 있다(15,41절 주석 참조).

예언하여 가로되 – 예언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지를 엿보게하는 구절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전개되는 사가랴의 축가(Benedictus)는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사역과 역사하심을 구원론적 차원에서 제시하고

그것을 교훈과 예언의 형식을 빌어 표현했다. 내용상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반부는 메시야를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후반부는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축가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찬가와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구절을 엮어 놓은 듯 한 인상을 준다(시 105:8, 9;106:45;111:9;사

42:7;렘 11:5;겔 29:21).

=====1:68

찬송하리로다(* , 율로게토스) – ‘율로게토스’란 말은 하나님께

서 그의 선하심을 베푸신 사람에게(42, 45절에서처럼 ‘복되도다’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64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68-79절은 찬송의 말씀이자 축복의 내용

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Liefeld).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 이스라엘이란 말은 17절과 77절에서 언급된 ‘주의 백성’

과 같은 말이다(54절 주석 참조).

돌아보사(* , 에페스케프사토) – 이 단어는 원형이 ‘에피스케

프토마이(* )로서 3인칭 과거 직설법으로 쓰였으며 ‘도움을

주시기 위해 살펴보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주권적 개입으로 그 백성들을 돌아보

사 그들을 은혜 가운데로 인도해 내신다는 사상을 짙게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

의 여러 의미 가운데는 ‘방문하다’, ‘탐구하다’, ‘찾아내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

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 백성들을 ‘방문하시거나’, ‘돌아보신다’

는 의미는 7:16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 영적인

의미가 강화된다(H.W.Beyer, TDNT., II, 599-622)

속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트로시스'(* )는 ‘구속’, ‘구원’,

‘해방’, ‘자유’ 등의 뜻이며 그 동사형인 ‘뤼트로’는 ‘몸값을 치르고 놓아주다’는 뜻

이다. 신약 시대의 한 파피루스에서는 이 단어가 ‘속죄금을 치르다’는 전문적 법률 용

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한 특정인이 죄인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그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인생의 죄값을 십자

가상의 저주로써 대신 치르시고 죄와 사망에서 인생을 구원해내신 것을 나타낸다. 특

히 이와 관련하여 신약 성경에서는 ‘값을 치르고 구원함’, ‘구속'(자)의 뜻인 ‘아폴뤼

트로시스'(* )가 주로 쓰인다(21:28;롬 3:24;8:23;고전 1:30;엡

1:7등). 한편 구속의 개념은 신.구약을 통털어 성경 전체에 폭넓게 깔려있다. 일반적

으로 구약에서 ‘구속(속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파다'( )와 ‘가알'( )의

번역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장자의 속건(贖錢)으로 돈 지불을 요구할 때 사

용했으며(출 13:2, 11-16),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출

21:8). 후자는 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땅을 회복하는 것이나(레 25:26;룻 4:4)

서원한 것을 도로 물리는 것을 말한다(레 27:13). 특히 이 말을 신학적 내지는 교리적

의미로 이해할 때, 구약에서의 구속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

다.

=====1:69

구원의 뿔 – 근동 지역에 사는 뿔가진짐승들은 매우 강한 힘을 지닌 것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래서 뿔은 흔히 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능력(왕상 22:11;단 8:3)과 왕권(단 7:23;8:20-22)을 상징하는 것이니 만큼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 곧 메시야를 가리킨다. 사가랴는 이 구원을 일종의

힘으로 생각한듯하며, 구약적 개념을 빌어 표현함으로써 이 구원자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온 바로 그 메시야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그 종 다윗의 집 – ‘집’이라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가족’과 ‘종족’으로

서의 뜻을 나타내기도한다(33절 주석 참조). ‘다윗의 집’은 27절과 2:4에서처럼 가문

이나 자손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표현이 사가랴 당시에 유대 전역에 있던 메

시야 사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와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세주가 이스라엘을 열방의 위협에서 건져내었던 다윗 왕가

중에서 나타난다는 사상이 유대 민족 사이에 팽배했었고 또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종 다윗’이라는 표현은 오실 메시야의 선재성(先在性)을 암

시하는 것이며 그처럼 위대했던 다윗도 그의 종이었음을 보아 그의 위대함과 놀라운

위치를 증거해 준다. 그리고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은시 132:17

의 말씀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메시야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70

거룩한 선지자의…말씀하신 바와 같이 – 이 문구는 단순한 삽입구가 아니라 히

1:1과 같이 예수의 메시야 역활이 구약에 기원을두고 있음은 물론 구약의 지지를 받는

것임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는 문구이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율법서나 선지서, 시가

서 등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언급된다(마 1:18-2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과 그 성취’

의 도표 참조).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에서의 ‘선지자’라는 의미도 문자 그대로의 선지자라기보다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Liefeld Geldenhuys).

=====1:71

원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드로스'(* )가 형용사로 쓰이면 ‘적

개심 있는’, ‘미워하는’이란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이 대부분 민족적이

고 정치적 성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사가랴는 원수라는 말을 로마 세력 혹은

로마의 사주를 받은 헤롯에 빗대어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축가가 구속

역사의 진행 과정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측면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원수’는 곧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훼방하는 사단과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마 13:39).

=====1:72

긍휼히 여기시며…언약을 기억하셨으니 – 본절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긍

휼이 언급된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언약 관계는 그 백성의 범죄와 완악성으로 인하여 오래전에 이

미 파기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73절에서 특별히 아브라함과의 언약

을 지칭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외에도 아담(창 3:15), 노아

(창 6:18), 이스라엘 백성(신 29:1-30:20), 다윗(삼하 7:5-16) 등과 더불어 구속사의

중요 시기마다 언약을 체결하사 신앙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심과 아울러 당신의 구

원계획을 약속의 형태로 제시해 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언약들은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로 통일되고 또한 성취되어졌다.

=====1:73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창 22:16-18의 내용으로서

그의 후손들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세

상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구원은 단지 이스라엘이 로마

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리라고 하는 정치적 해방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소위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

난하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믿음에 의한 것이

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맹세’는 72절의 ‘언약’과 더불어 교차 대구법적으로 구성

된 본 축가의 중심 위치에 놓여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과 그 언약에 대

한 하나님의 충실하심을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내고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에서 언약과 맹세가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밝혀주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

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다(시 106:45).

=====1:74

원수의 손 – 71절 주석 참조.

건지심을 입고(* , 뤼스덴타스) – 이 단어는 원형이 ‘뤼오마이’

로서 과거 수동형으로 쓰였으며 ‘글어내다’, ‘구출하다’, ‘구원하다’등의 의미를 나타

낸다. 하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헬라 세계의 불멸의 신들(Gods)과 또

그들과는 대조되는 유한한 인간 존재들과 같이 존재론적 법칙들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

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느 9:8), 자기 이름을 위하여(시 79:9), 그

리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바로 그의 이름이 구원자이시다(사

63:16). 본절과 75절 내용은 하나님이 그 신실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에 따라 언약을 주

권적으로 성취시키시는 이유 혹은 목적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은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적 또한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알게하는 것이라는 점에서(77절)

더욱 확연해진다. 한편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하심 가운데에서의 보호

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편에서의 믿음 혹은 신뢰가 요구된다(시 22:4, 5;34: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는자를 구원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아끼지 않으신다(W

Kasch, TDNT, VI. 998-1003).

=====1:75

종신토록(* , 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헤

몬). 헬라어 ‘파사스’는 원형이 ‘파스'(* )로서 복수 목적격으로 쓰였으며 ‘모

든’, ‘온’, ‘모두’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헤메라스’는 원형 ‘헤메라'(* )

의 복수 목적격으로 ‘날’, ‘낮’, ‘때’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우리

의 모든 날들’ 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지상에서의 우리의 평생을 의미한다.

주의 앞에서(* , 에노피온 아우투). 헬라어 ‘에노피온’은

‘…앞에’, ‘…의 목전에’, ‘…가운데’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문구의 의미는 ‘그

의 목전에서’ 또는 ‘그의 면전에서’가 된다. 이는 제의적인 용어로서 이 어구에 담긴

의미 가운데는 제사장적 섬김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가 본 구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된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

다. 즉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Lenski).

성결과 의(* , 엔 호시오테티

카이 디카이오쉬네) – ‘성결’에 해당하는 ‘호시오테티’는 원형 ‘호시오테스'(*

)의 단수형이다. 이 단어는 주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쓰이며 신약성경에서 ‘거룩함과 의로움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2회

나타난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구원의 시대에 사는 신자들의 삶을 묘사하며, 엡 4:24

에서는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가리킨다. ‘의’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사 5:7)로 사용되었으며, 랍비들에게 있어서

는 특히 가장 많은 공로가 쌓이게 되는 행위들 중 하나로서의 자선행위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

를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즉 소극적으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적극적으

로는 ‘성결과 의’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시 05:8, 9).

=====1:76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 중의

하나이다(32절 주석 참조). 그리고 ‘선지자’ 세례 요한은 두 가지 면에서 선지자보다

큰 자(마 11:11) 혹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1) 시대적인 위치의 면에서, 그는 신

약과 구약의 가교적(架橋的) 위치에 있었다. 그는 예수와 동시대에 살면서 친히 예수

의 권능을 목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즉 그는 복음의 여명이 동터오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2) 사역의 내용면에서,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구약에 탁월한 선지자들이 많

이 있었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평탄케하는 사역을 직접 수행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뿐이

었다. 한편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서 표현이 되고 요한은 ‘지극히 높으

신 이의 선지자’로서 표현이 되는 것은 현격한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서로

가 중요하고도 내밀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앞서 가서…예비히여 – 이 말씀은 사 40:3;말 3:1;4:5 말씀의 성취이며, 이 구약

말씀과 비교할 때 누가는 요한을 엘리야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진 자로서(1:17)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선구자였던 것이다(3:3-6;마 3:1-6).

=====1:77

주의 백성 – 17절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 54절 ‘그 종 이스라엘’ 주석 참조.

죄사함(* ,아페세이 하마르티온) – ‘사함’에 해당하

는 ‘아페세이’는 ‘용서’, ‘해방’, ‘탕감’의 뜻을 나타낸다. 성경상에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죄사

함’이라는 말이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의 대속 죽으심을 예표한 것이므로 반

복적으로 드려져야 했다. 그러나 흠없고 완전한 희생 양이신 예수는 단 한번의 희생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죄사함을 이루셨다(히 9:25, 26). 또한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용서하시고(사 1:18), 한번 용서한 죄는 기억치도 않으심으로써(사

43:25), 죄에 대한 앙금이나 미련을 갖지 않으시며 그 흔적을 조금도 남기시지 않으시

며(시 103:12;미 7:19), 완전하고도 무한한 죄사함을 이루신다(Lenski).

구원을 알게 하리니 – 구원을 알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행되어 나온 ‘죄사함’이다.

즉 회개와 함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구절에

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넘어선 보

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과

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누리며 참생명을 누리도록 피조되었으나 인간의 죄악된 행위

가 둘 사이를 갈라 놓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손을 내밀 때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기 때문이다(사 59:1,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의 행위 가운데는 철저한 회개와 죄사함의 요청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요한은 후에

그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된다(3:3).

=====1:78,79

돋는 해가…인도하시리로다 – 캄캄한 어둠을 물리치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관한 이미지는 이미 말 4:2에 나오며 사 9:2;60:1에는 ‘빛’으로 그리고 민 24:17에는

야곱에게서 나온 한 ‘별’로 등장한다. 이는 모두 흑암과 죽음을 몰아내고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를 도래케 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다.

임하여(* , 에피스케프세타이) – 이 단어는 68절에서는 ‘돌

아보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메시야의 도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를 뜻함을 암시한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 이 구절은 사 9:2을 인용하고 있다(마 4:16).

이는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제외하지는 않

는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누구를 막론햐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

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1) 전쟁이

나 투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평화(14:32;행 12:20), (2) 하나님과 인간간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화목(고후 5:19), (3) 심령의 평화(골 3:15)등을 의미한다. 이

평강은 신.구약을 통털어 풍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학적 개념이라 할 수있다. 특히

본절에서 메시야와 평강의 길은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사 9:6에서 메시야는

평강의 왕으로서 예언된 바 있으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하였다(롬 14:17).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영속적

이고도 완전한 평안을 성도들에게 끼치노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14:27).

인도하시리로다(* , 카튀뒤나이) – 원형 ‘카튜뒤노'(*

)는 ‘곧게 하다’, ‘똑바로 하다’, ‘바로 안내하다’ 등의 듯을 나타낸다.

즉 왜곡되고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똑바로 가게하는 것이다. 밝은 빛 가운데서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평강의 길은 주께서 가시는 길이며 그분께서

예비하신 길이다. 구원의 빛이 길을 잘못가지 않도록 우리의 앞을 비추어 평강의 길로

나가게 한다. 한편 이렇게 하므로써 사가랴의 찬가는 끝을 맺는다. 사가랴 찬가는 첫

말이 ‘찬송하리로다’로서 시작되어 ‘평강’이라는 말로 그 끝을 맺는다. 이는 하나님

과 우리의 관계가 ‘찬송’과 ‘평강’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을 반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으로써 그분과 인격적 교류를 갖고 그의 구원의 계획 속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평강을 얻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주시는 것은 평강이다.

=====1:80

자라며(* , 유크사넨) – 신체적 성장을 뜻하는 말이다. 요한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나타낸다.

심령이 강하여지며 – 요한은 신체적 성장과 아울러 영적으로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

다. 이 성장 과정은 예수의 성장 과정과 흡사하고(2:40, 52), 어린 사무엘이 성장할

때와도 유사하다(삼상 2:26).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린아이의 자라나는 것 역시 하나

님의 뜻가운데 있는 것이다.

빈 들에 있으니라 – 혹자는 요한이 사해(死海) 부근의 유대 광야 어느 곳에 있었던

에세네파(Essenes)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을 입증할 만한 별다른 자료가 발

견되고 있지는 않다. 요한은 에세네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요한은 곧 오실 메시야

의 도래를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에세네파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하

게 행동했다. 또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민족적 구원을 시도했지만 에세네

파 사람들은 사회를 외면하고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아울러 요한이 민족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를 집행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에세네인들은 개인 구

원의 수단과 방법에 집착해 철저한 금욕적 생활과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또한 쿰란

(Qumran) 공동체와 세례 요한을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아무

런 증거는 없으며 또한 요한이 머물렀던 지역이 어느 곳인지도 정확히 확인되고 있

지않다. 여하튼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다(모세, 엘리야 등). 요한은 광야에서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보낸 후에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전파한다(3:2, Geldenhuys, Liefeld).

헬라어 누가복음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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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이데페르 폴로이 에페케이레산 아나탘사스다이 디에게신 페리 톤 페플레로포레메논 엔 헤민 프라그마톤

개역개정,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새번역,1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말성경,1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려고 했는데

가톨릭성경,1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영어NIV,1 Many have undertaken to draw up an account of the thing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

영어NASB,1 Inasmuch as many have undertaken to compile an account of the things accomplished among us,

영어MSG,1 So many others have tried their hand at putting together a story of the wonderful harvest of Scripture and history that took place among us,

영어NRSV,1 Since many have undertaken to set down an orderly account of the event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

헬라어신약Stephanos,1 επειδηπερ πολλοι επεχειρησαν αναταξασθαι διηγησιν περι των πεπληροφορημενων εν ημιν πραγματων

라틴어Vulgate,1 quoniam quidem multi conati sunt ordinare narrationem quae in nobis conpletae sunt rerum

히브리어Modern,1 אחרי אשר רבים הואילו לחבר ספור המעשים אשר נאמנו בשלמות בתוכנו׃

성 경: [눅1: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우리 중에 – 본절에서 ‘우리’는 구체적로 누구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사실 그리 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예수에 관한 나름대로의 산 체험과 증거들을 보호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저자 누가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로 ‘누가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문의 ‘우리’와 접촉하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다고 하면서 적잖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니 지나친 논리적 비약을 하거나 사건을 임의로 축소, 확대하기도 하며 또한 특정 종파의 교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을 왜곡시키거나 새로운 기사를 꾸며내어 기록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의 기록은 모두 객관성과 정확성이 매우 부족해 ‘외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저서들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데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개연성(蓋然性)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가 여기서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기록에 객관성과 정확성과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예수의 목격자들(witnesses)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어 나오는 2절과 함께 연결해 본다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증인들임이 분명하다(Alford).

󰃨 이루어진 사실(*, 톤 페플레로포레메 – 이 단어는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플레레스'(*)와 ‘가져오다’의 뜻을 가진 ‘페로'(*)가 결합된 ‘플레로포레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미 ‘성사된 일’, ‘성취된'(accomplished) 일이라는 뜻이다. 또한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어진 일’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때 이 말은 ‘벌써부터 예정되었던 계획을 따라 성취된 확실한 사건들’이라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다(Merrill C. Tenney). 한편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성취된'(딤후 4:5, 17) 그리고 ‘확인된'(롬 4:21;14:15;히 6:11;10:22)으로 사용됨으로써 위의 사실을 더욱 확증시켜 준다. 실로 예수의 생활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서두에서부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KJV는 이 부분을 ‘우리들이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들'(those things which are most surely believed among u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여 믿게 된 사실들’이라는 것으로서 앞으로 소개될 이 누가복음이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말해준다. 실로 본서를 통해 누가는 사료(史料)들과 정확한 날짜를 비교적 소상히 언급함으로써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카도스 파레도산 헤민 호이 앞 아르케스 아우톺타이 카이 휘페레타이 게노메노이 투 로구

개역개정,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새번역,2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우리말성경,2 그것은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이며 일꾼이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과 같습니다.

가톨릭성경,2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영어NIV,2 just as they were handed down to us by those who from the first were eyewitnesses and servants of the word.

영어NASB,2 just as they were handed down to us by those who from the beginning were eyewitnesses and servants of the word,

영어MSG,2 using reports handed down by the original eyewitnesses who served this Word with their very lives.

영어NRSV,2 just as they were handed on to us by those who from the beginning were eyewitnesses and servants of the word,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θως παρεδοσαν ημιν οι απ αρχης αυτοπται και υπηρεται γενομενοι του λογου

라틴어Vulgate,2 sicut tradiderunt nobis qui ab initio ipsi viderunt et ministri fuerunt sermonis

히브리어Modern,2 כאשר מסרום לנו הראים אתם בעיניהם מתחלה ואשר היו משרתי הדבר׃

성 경: [눅1: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처음부터(*, 아프 아르케스) – ‘처음부터’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프 아르케스’ 중 ‘아르케'(*)란 말은 ‘모든 일의 시작’에 대해 또는 ‘말해진 일들의 시작’에 대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라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부터’라는 의미, 또는 ‘세례 요한의 활동의 시초에서부터'(3:1, 2;행 1:21, 22;10:37)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부터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의 목격자들이다.

󰃨 말씀의(*, 투 로구) – 여기서 이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말씀'(*, 로고스)은 다양하고 빈번하게 사용 된다. 특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가 기술한 요 1:14에서는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었다”(incarnation)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 말씀이 성육신보다 선재(先在)했음을 암시한다(Lenski).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천지가 창조되었으며(요 1:3), 그 말씀은 생명이있고 또 사람들의 빛이 된다고 설명한다(요 1:4). 또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한다(요 1:14). 이에 비해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복음이다. 사실 고대 헬라의 작가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관시켜 그 중요성 강조했었다. 행 1:1에서도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기술할 때 ‘행하시며’와 ‘가르치시기를’이라는 말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어쨌든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그 복음의 말씀은 1절의 ‘이루어진 사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Liefeld).

󰃨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 아우토프타이 카이휘페레타이) –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내내 곁에서 목격자되고 일꾼되었던 제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을 위해 그 같은 사도적 증거(witnesses)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이 고백되고 있다. 여기서 ‘목격자’에 해당하는 ‘아우토프타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아우토스'(*)와 ‘보다’의 뜻을 가진 ‘호라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스스로 본 자’, ‘직접 자기 자신이 본 자'(eyewitnesses, 목격자)라는 뜻이 된다(Robertson). 이는 곧 누가의 복음서 기록을 가능케 했던 각종 정보를 제공해준 자들로서 그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직접 그분의 활동상을 목도한 산 증인이다. KJV는 이 부분을 ‘말씀의 일꾼'(minister of the word)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실로 예수 공생애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외에 70인 전도대 및 예수를 수종들던 여인들(막 15:40, 41),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가 포함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복음의 권의와 내용상의 완벽을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1절의 ‘우리’는 바로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이다.

󰃨 전하여 준 그대로 – 본문에서 누가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준비한 모든 자료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뺀것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누가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자신에게 전해진 구전(Oral tradition)과 기록(Written tradition)이 신빙성 있고 정확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전하여 준'(*, 파레도산)은 제2 부정과거 복수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서 어김없이, 확실히 건네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여기서 ‘구전'(口傳)을 가리킬 수 있으나(고전 11:23;15:3) 반드시 구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24:20;행 1:20;3:13). 즉 이것은 구전과 기록 문서를 포함한 일종의 ‘전승'(*, 파라도시스)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실로 누가는 최초 목격자와 일꾼들이 전해준 전승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 구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기에 복음에 있어서만은 직접적 증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최초 증인의 확실한 보증 등의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 내력을 저술하려고(*, 아나태사스다이 디에게신) – ‘저술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태사스다이’는 ‘차례로’, ‘잇달아’라는 뜻을 가진 ‘아나'(*)와 ‘고정된 곳에 놓다’,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타쏘'(*)의 합성어인 ‘아나타쏘마이'(*)가 원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임의대로 복음을 기록함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차례대로 순서에 따라 편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력을’에 해당하는 ‘디에게신’은 ‘디에게오마이(*, ‘완전히 인도하다’, ‘자세히 말하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8:39;막 5:16;9:9;행 8:33;히 11:32) 이는 곧 내용을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함을 말한다.

󰃨 붓을 든(*, 에페케이레산) – 이 단어는 ‘손을 대다’, ‘착수하다’, ‘시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에피케이레오'(*)로서 흔히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의 의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실패나 비난에 유념치 않고 무엇을 시도하다’로 이해되곤 했다(Robertson). 이로 보 건대 이 일을 착수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뒤늦게 누가가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기록된 자료(Written tradition)들이 부실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물론 누가는 자기 앞의 다른 기자(記者)들의 불완전함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경쟁자적 입장에서 붓을 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에 관한 증인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방대한 정보와 심도깊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상세하고 정확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의도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여러 내용들을 본서에서는 다루고 있다(5:1-11;7:11-17, 36-50;8:1-3;10:25-37;15:1-32;19:1-11; 24:13-53). 또한 그는 기존의 기록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답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누가복음이나 각 기록들을 통해 확대되거나 모방된 외경들이 이단 교파나 특수한 종파 가운데서 사용되기도 했다(예:히브리인 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 결국 이 부분은 예수의 교훈과 행적을 담은 당시의 각 기록이 나름대로의 독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다른 기자들과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자신도 감히 기록하겠노라는 복음서 기술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사람이 많은지라 –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누가는 분명히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느 누구의 기록된 자료를 참고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4복음서를 비교하여,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빼고 다른 부분을 놓고 본다면, 누가복음의 초반부는 누가가 독톡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기서 1절의 ‘우리’와 연결하여 본다면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진다.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누가가 ‘우리’와 많은 곳에서 여러 활동을 했던 것을 보게 된다(행 16:10-17, 20:5-14;21:1-18;27:1-22). 렌스키(Lenski)는 누가와 마가가 바울의 첫 투옥 중에 서로 접촉을 했고, 2차 투옥시에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우사이가 되었고, 따라서 둘 중 먼저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그 내용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볼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본서의 ‘우리’와는 긴밀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저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기록은 많은 기록들 가운데서 특별히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말 어미에 해당하는… 지라(*, 에페이데페르)고 하는 이 접촉사는 ‘…이므로’란 뜻의 ‘에페이'(*)와 ‘확연히 알려진 것’이라는 뜻의 ‘데'(*), 그리고 뜻을 깊이하거나 강조하는데 쓰이는 후접사 ‘페르'(*) 등이 합성된 단어로서 ‘…이므로’, ‘참으로…이니까’, ‘생각해 보건대’라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가진 뜻으로 보아 앞선 사실이나 기존의 잘 알려진 일에 대한 회상과 확인을 나타내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이 곳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 헬라 문학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헤로도투스(Herodotus)나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역사서의 서두에서도 이 단어가 전통적인 문체로 사용되고 있다(Robertson). 누가는 헬라인이었다. 그래서 헬라문학의 전통 양식에 따라 가장 격조높은 고전 헬라어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1:1-4). 이에 대해 바클레이(Baclay)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마치,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에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에돜세 카모이 파레콜루데코티 아노덴 파신 아크리보스 카뎈세스 소이 그랖사이 크라티스테 데오필레

개역개정,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새번역,3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또는 ‘오랫동안’

우리말성경,3 존경하는 데오빌로님, 제 자신도 그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면밀히 조사해 당신을 위해 순서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3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영어NIV,3 Therefore, since I myself have carefully investigated everything from the beginning, it seemed good also to me to write an orderly account for you, most excellent Theophilus,

영어NASB,3 it seemed fitting for me as well, having investigated everything carefully from the beginning, to write it out for you in consecutive order, most excellent Theophilus;

영어MSG,3 Since I have investigated all the reports in close detail, starting from the story’s beginning, I decided to write it all out for you, most honorable Theophilus,

영어NRSV,3 I too decided, after investigating everything carefully from the very first, to write an orderly account for you, most excellent Theophilus,

헬라어신약Stephanos,3 εδοξεν καμοι παρηκολουθηκοτι ανωθεν πασιν ακριβως καθεξης σοι γραψαι κρατιστε θεοφιλε

라틴어Vulgate,3 visum est et mihi adsecuto a principio omnibus diligenter ex ordine tibi scribere optime Theophile

히브리어Modern,3 חשבתי לטוב גם אני החפש כל הדברים היטב מראשיתם לכתבם אליך בסדר תאופילוס האדיר׃

성 경: [눅1: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그 모든 일을…자세히 –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가는 의사였다고 한다(골 4:14). 따라서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여기서 자신의 복음서 기록의 성격을 제시한다. 먼저 ‘그 모든 일'(*, 파신)을 나타내는 원어는 중성 복수로서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 예수 중심으로 발생했던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근원부터'(*, 아노덴)는 ‘처음부터’, ‘맨 시초부터’ 또는 ‘일찍부터'(행 26:5)라는 뜻으로, 2절의 ‘처음부터’란 말과 직접 연관은 없으나 의미상 유사성을 지닌다. 아마 누가는 이 팔을 쓰면서 분명 본서 1, 2장에 언급된 탄생 기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자세히'(*, 아크리보스)는 원래 ‘첨단’ 또는 ‘극점’을 의미하는 ‘아크론'(*)에서 나온 말로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열정적 태도를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매우 정확하게’, ‘엄밀하게’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차례대로'(*, 카데크세스)는 ‘순서에 맞추어’, ‘연속적으로’라는 뜻으로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서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시간순을 존중하여 연대기적 기술 방법을 택했다고 소개한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각 사건들을 시간적 배열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주제 의식을 갖고 신중히 체계화, 조직화 했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9:51-18:8은 주제에 의해 사건과 교훈이 나열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누가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따라 본 복음서를 기록해 나갔음이 밝혀진다. 즉 첫째, 역사성, 둘째, 정확성, 셋째, 논리적 일관성의 원칙에 따랐으니 이는 또한 누가복음 전체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미루어 살핀(*, 파레콜루데코티) –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따르다’, ‘집요하게 무엇을 탐구하다’는 등의 뜻으로서 고대 헬라어에서 흔히 사용되던 동사의 완료 능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누가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기록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 언급한 말로서, 누가는 복음서를 기술하기에 앞서 주도 면밀하고도 심층적인 연구와, 정확하고도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기록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고 정확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 나도(*, 카모이) – 이는 ‘붓을 든 많은 사람'(2절)과 짝을 이루는 말로서 누가 자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집필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 데오빌로 각하(*, 크라티스테 데오필레) – 누가가 기록한 두 책(본서,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명시되고 있는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전하는 바가 별로 없다. 혹자에 따르면 누가가 자신의 수신인의 진짜 이름 대신 가명으로 사용한 것이거나 또는 상징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도미티안 황제의 조카로서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였을 것으로도 추정한다(Streeter). 그렇게 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가명이 되고 만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하나의 고유명사(a proper name)이며 특히 누가가 그의 이름에 붙여 사용하는 ‘각하’라는 명칭을 통해 볼 때 그가 실재(實在)한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리펠드(Liefeld)는 데오빌로가 누가의 학우이거나 발행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E. J. Goodspeed, Grevdanus). 여기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데오스'(*, ‘하나님’)와 ‘필레오'(*, ‘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라는 단어들의 합성어로서 이를 합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명칭을 듣고 혹자는(Origen, Bruce) 이것이 B.C. 3C 경에 흔히 사용되딘 이름으로서 어떤 특정 개인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 즉 신앙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한 성도의 이름이라는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할 뿐 상징적 이름이나 가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로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어서 있었는데 누가는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4절). 한편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비록 본서는 데오빌로가 그 대표적 수신자로 밝혀져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직 데오빌로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헌정(獻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책을 권위있고 명성이 높은 한 개인에게 헌사하는 경우는 당시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책은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었다(Julicher Fascher). 더욱이 본서의 전반적인 기류는 탈(脫)유대적이요, 범세계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누가의 복음서는 이방 세계, 특히 헬라주의에 깊이 물든 신앙인들에게 보내졌을 뿐 아니라 그들을 발판으로 하여 전세계 모든 신앙인들에게로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각하'(*, 크라티스테)라는 말은 ‘지존하신’, ‘가장 고상한’이란 뜻으로서 형식적이고 친근하게 인사치례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례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부분 어떤 특정한 지위나 관직에 있는 신분이나 하나의 공식적인 직함으로 사용되고 있다(행 23:26;24:3). 따라서 본문의 데오빌로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Noval Geldenhuys, Ramsay).

󰃨 좋은줄 알았노니(*, 에돝세 카모이) –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이 3절 문장 서두에 온다. 여기서 ‘에돝세’는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도케오'(*)의 과거형이다. 실로 예수에 관해서 기록을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고, 주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또한 인간들에게도 큰 기쁨이다. 누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문장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KJV와 NIV를 통해서 보면 이 구절의 의미가 더욱 명백해진다. NIV는 이유를 나타내는 단어 ‘since’를 이 구절 문장 서두에 사용하고, KJV는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구문을 사용해 성경을 기록하는 일이 왜 좋은지를 밝히고 있다(It seemed good to me also). 실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부터의 모든 일들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히나 에피그노스 페리 온 카테케데스 로곤 텐 아스팔레이안

개역개정,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새번역,4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말성경,4 이는 당신이 전에 배우신 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아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톨릭성경,4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영어NIV,4 so that you may know the certainty of the things you have been taught.

영어NASB,4 so that you may know the exact truth about the things you have been taught.

영어MSG,4 so you can know beyond the shadow of a doubt the reliability of what you were taught.

영어NRSV,4 so that you may know the truth concerning the things about which you have been instructed.

헬라어신약Stephanos,4 ινα επιγνως περι ων κατηχηθης λογων την ασφαλειαν

라틴어Vulgate,4 ut cognoscas eorum verborum de quibus eruditus es veritatem

히브리어Modern,4 למען תדע קשט האמרים אשר חנכת בם׃

성 경: [눅1: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배운 바(*, 카 테케데스 로곤) – ‘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데스’는 ‘카테케오'(*, ‘귓가에 울리게 하다’, ‘말로 가르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로 미루어 데오빌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전으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책의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에게 이 복음서 기록을 의뢰하였을수도 있으며 아니면 누가가 기록한 이 책을 출간해 주었을 수도 있다(Henry, Liefeld, Geldenhuys). 한편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로곤’은 ‘로고스'(*, ‘말씀’, ‘사건’)의 소유격 복수 형태이다. NIV와 KJV는 이 단어를 ‘사실들’, ‘일들'(things)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알포드(Alford)는 이 단어를 ‘말씀에서 표현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버운바’는 말씀을 통해서 배운 것들을 의미한다.

󰃨 확실함(*, 텐 아스팔레이안) – 이 단어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와 ‘미끄러 넘어지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스팔로'(*)의 합성어이다. 즉 ‘확실함’이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않고 견고히 서는 것이다. 실로 우리가 믿고있는 복음은 우리를 견고히 세우고 온전케 하며 확신을 같게 한다(딤후 3:15-17). 사실 분명하지 않은 바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누가는 진리에의 확신과 예수께 대한 ‘확실함’을 간직하게 하기 위하여 붓을 들고 있다. 한편 이 책을 받아 볼데오빌로는 구전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것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따라서 구전을 통해 믿음이 성장한 그는 많은 이단 사상에 도전(挑戰)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는 유대교의 박해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협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이단자들이 성행했다. 혹시, 데오빌로 역시 이런 영향에 위협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누가가 기록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복음 기사를 통해서만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 기사가 이단 사상들의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고, 또 때로는 중요한 공격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엡 6:11-18). 그리고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복음의 확실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Liefeld).

󰃨 알게 하려 함이로라(*, 에피그노스) – 이 단어는’…에 부가하여’, ‘…에 더하여’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와 ‘알려고 배우다’, ‘알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기노스코'(*)의 합성어 ‘에피기노스코'(*) 의 부정 과거 형태로 사용되었다. 즉, ‘…을 철저히 알다’, ‘정확하게 알다’라는 뜻이 된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더하려고 하였다. 기존의 지식에 완벽함을 더하는 것은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교육자의 위치로, 또는 증인의 위치로 이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에게네토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헤로두 바실레오스 테스 유다이아스 히에류스 티스 오노마티 자카리아스 엨스 에페메리아스 아비아 카이 귀네 아우토 에크 톤 뒤가테론 아아론 카이 토 오노마 아우테스 엘리사벹

개역개정,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새번역,5 유대왕 헤롯 때에, 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으로서, 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우리말성경,5 유대 헤롯 왕 때 사가랴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는 아비야 계열에 소속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내 또한 아론의 자손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벳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5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영어NIV,5 In the time of Herod king of Judea there was a priest named Zechariah, who belonged to 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his wife Elizabeth was also a descendant of Aaron.

영어NASB,5 In the days of Herod, king of Judea, there was a priest named Zacharias, of the division of Abijah; and he had a wife from the daughters of Aaron, and her name was Elizabeth.

영어MSG,5 During the rule of Herod, King of Judea, there was a priest assigned service in the regiment of Abijah. His name was Zachariah. His wife was descended from the daughters of Aaron. Her name was Elizabeth.

영어NRSV,5 In the days of King Herod of Judea, there was a priest named Zechariah, who belonged to the priestly order of Abijah. His wife was a descendant of Aaron, and her name was Elizabeth.

헬라어신약Stephanos,5 εγενετο εν ταις ημεραις ηρωδου του βασιλεως της ιουδαιας ιερευς τις ονοματι ζαχαριας εξ εφημεριας αβια και η γυνη αυτου εκ των θυγατερων ααρων και το ονομα αυτης ελισαβετ

라틴어Vulgate,5 fuit in diebus Herodis regis Iudaeae sacerdos quidam nomine Zaccharias de vice Abia et uxor illi de filiabus Aaron et nomen eius Elisabeth

히브리어Modern,5 כהן היה בימי הורדוס מלך יהודה זכריה שמו ממשמרת אביה ולו אשה מבנות אהרן ושמה אלישבע׃

성 경: [눅1: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유대 왕 헤롯 때에 –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대헤롯(Herod the Great)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라는 의미가 된다. 그는 B.C. 37년 로마 제국 원로 회의를 세금 상납 및 치안유지 등의 약속으로써 매수하고, 특히 당시 실권자인 옥타비우스(Octavius)와 안토니오(M.Antonius)를 등에 업음으로써 유대 곧 팔레스틴 전체(4:44;6:17;7:17;23:5;행 19:37)의 분봉왕(分封王)이 되어 B.C. 4년에 그가 죽기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가 노릇을 하였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Idumean)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케함으로써 유더 백성들의 마음을 유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干與)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다(마 2:1 주석 참조).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버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가(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 아비야 반열 (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 여기서 먼저 ‘반열'(*, 에페메리아)이란 ‘…동안’, ‘때마다’, ‘만큼’ 등의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와 ‘날’, ‘하루’ 등의 뜻인 ‘헤메라'(*)의 합성어로서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아론 자손 곧 제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봉사하였다. 한편 24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다(대상 24:10).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8절 주석을 참조하라.

󰃨 사가랴요 엘리사벳이라 –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엘리사벳(Elizabeth)은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출 6:23).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다(Geldenhuys).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엘키사벳’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출 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로 본다.

에산 데 디카이오이 암포테로이 에난티온 투 데우 포류오메노이 엔 파사이스 타이스 엔톨라이스 카이 디카이오마신 투 퀴리우 아멤프토이

개역개정,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새번역,6 그 두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어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

우리말성경,6 둘 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들이어서 주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습니다.

가톨릭성경,6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영어NIV,6 Both of them were upright in the sight of God, observing all the Lord’s commandments and regulations blamelessly.

영어NASB,6 They were both righteous in the sight of God, walking blamelessly in all the commandments and requirements of the Lord.

영어MSG,6 Together they lived honorably before God, careful in keeping to the ways of the commandments and enjoying a clear conscience before God.

영어NRSV,6 Both of them were righteous before God, living blamelessly according to all the commandments and regulations of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6 ησαν δε δικαιοι αμφοτεροι ενωπιον του θεου πορευομενοι εν πασαις ταις εντολαις και δικαιωμασιν του κυριου αμεμπτοι

라틴어Vulgate,6 erant autem iusti ambo ante Deum incedentes in omnibus mandatis et iustificationibus Domini sine querella

히브리어Modern,6 ושניהם היו צדיקים לפני האלהים והלכי תם בכל מצות יהוה ובחקתיו׃

성 경: [눅1: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이 두 사람이…의인이니 – 이 말은 원래 구약적 개념으로서 율법적으로 온전한 자에게 붙여진 관용구였다. 여기서 ‘의인'(*, 디카이오이)이란 ‘옳은’, ‘똑바른’, ‘정직한’ 등의 뜻을 지닌 ‘디카이오스'(*)의 변화형으로서, 특별히 이 말이 법률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정당한 판단에 따른 긍정적인 시인(是認) 내지는 평가를 받은 자들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단어가 ‘하나님앞에'(in the sight of God, NIV)라는 병행 문구와 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확실시된다. 즉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바른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자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의인’이란 말이 ‘순전히 윤리적인 측면의 인격에 대한 평가이기 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인격을 가리킨다’고 했다. 사실 인간이 그 인격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나설 수 없다(롬 3:10). 그런 까닭에 성경적인 의미의 ‘의’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서 그 죄와 죄의 대가를 제거하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디카이오스’의 의미를 결정지어 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시며 그 말의 의미를 변치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의의 기준이시다(Wuest). 진정 인간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믿음’만으로 의인이 될 수있다(롬 3:20-24). 그런 점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본성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인이기 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서’ 의인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이 ‘의인’이란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로 간주되었었는데 (창 6:9;7:1;18:23-28;겔 18:5-9)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경건한 인물에게만 붙여졌다. 이것은 유대인의 이상형이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신약 성경에 와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고 자랑했던 바울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율법 시대의 의인관(義人觀)관에 따른 표현이었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단죄하는 복음관에서의 평가로 볼 수는 없다. 한편 이러한 구약적 의인관에서 볼 때 특히 누가복음 내에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Robertson).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겠는가?

󰃨 계명과 규례(*, 타이스 엔톨라이스 카이 디카이오마신) – 여기서 ‘계명’을 나타내는 ‘엔톨라이스’는’명령’, ‘교훈’ 등의 뜻을 지닌 ‘엔톨레'(*)의 복수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고 지시하신 권위에 찬 명령들을 의미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이 ‘엔톨라이스’를 주로 ‘계명’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다(롬 7:8-13). 그리고 ‘규례’를 가리키는 ‘디카이오마신’은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 ‘공의를 행하다’는 뜻인 ‘디카이오오'(*) )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께서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옳게 여기시는 것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결국 위의 ‘계명’과 ‘규례’는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룩하고 온전한 명령과 생활 규범들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혹자(Bengel, Calvin)는 이 양자를 분리하여 ‘계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심판의 근거가 되는 종교, 도덕적인 법령(法令)을, ‘규례’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의식적이고 제의적인 예법(禮法)을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비해 또다른 학자들(Bruce, Lenski)은 이 양자를 대조시키지 않고 히브리인들이 즐겨쓰는 셈어적인 중복 기법으로 보아 두 개념을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법령을 강조하기 위해 중복적으로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일 뿐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여기서 ‘흠이 없이(*, 아멤프토이)란 ‘비난받거나 책망받을 것이 없이’라는 뜻으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켰다는 사실을 수식하고 있다. 실로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종교.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다.

카이 우크 엔 아우토이스 테크논 카도티 엔 헤 엘리사벹 스테이라 카이 암포테로이 프로베베코테스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아우톤 에산

개역개정,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새번역,7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이고, 두 사람은 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7 그런데 이들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둘 다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7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영어NIV,7 But they had no children, because Elizabeth was barren; and they were both well along in years.

영어NASB,7 But they had no child, because Elizabeth was barren, and they were both advanced in years.

영어MSG,7 But they were childless because Elizabeth could never conceive, and now they were quite old.

영어NRSV,7 But they had no children, because Elizabeth was barren, and both were getting on in years.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ουκ ην αυτοις τεκνον καθοτι η ελισαβετ ην στειρα και αμφοτεροι προβεβηκοτες εν ταις ημεραις αυτων ησαν

라틴어Vulgate,7 et non erat illis filius eo quod esset Elisabeth sterilis et ambo processissent in diebus suis

히브리어Modern,7 ולא היה להם ילד כי אלישבע עקרה ושניהם באו בימים׃

성 경: [눅1: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엘리사벳이…무자(無子)하고 –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Barclay).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수태를 못하므로’라는 표현 가운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카도티'(*)란 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 저자인 누가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행 2:45;4:35). 이 ‘카도티’는 대략 ‘…때문에’, ‘…만큼’, ‘왜냐하면’ 등의 뜻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기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창17:16-17-사라;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에게네토 데 엔 토 히에라튜에인 아우톤 엔 테 탘세이 테스 에페메리아스 아우투 에난티 투 데우

개역개정,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새번역,8 사가랴가 자기 조의 차례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우리말성경,8 어느 날 사가랴는 자기 계열의 차례가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섬기게 됐습니다.

가톨릭성경,8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영어NIV,8 Once when Zechariah’s division was on duty and he was serving as priest before God,

영어NASB,8 Now it happened that while he was performing his priestly service before God in the appointed order of his division,

영어MSG,8 It so happened that as Zachariah was carrying out his priestly duties before God, working the shift assigned to his regiment,

영어NRSV,8 Once when he was serving as priest before God and his section was on duty,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γενετο δε εν τω ιερατευειν αυτον εν τη ταξει της εφημεριας αυτου εναντι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8 factum est autem cum sacerdotio fungeretur in ordine vicis suae ante Deum

히브리어Modern,8 ויהי היום ויכהן לפני אלהים בסדר משמרתו׃

성 경: [눅1: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마침…할새(*, 에게네토 데) – 이 말은 이야기를 상호 연결시켜 주며 무엇을 소개시켜 주는 문구로서 히브리어의 ‘와에히'(*, ‘때마침 그것이 일어났나’)와 유사한 표현이다. 특히 이 문구는 타복음서보다 본서에서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때 흔히 사용된다. 그리고 이 문구와 비슷한 ‘기노마이'(*) 역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쓰여진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본서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복음서를 기술할 때 자신의 문학적인 역량에 덧붙여 자신이 참고한 자료들을 하나하나 편집해갔음을 알 수 있다(Gaston).

󰃨 반열(班列)의 차례대로 – 유대의 제사장들은 전체적으로 2만명 정도가 되고, 이들은 종가(宗家)에 따라 24반열(division, 각 반열에 천명 정도)로 나눠진다. 이러한 제도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라 할 수 있는 다윗 때에 정비된 것으로, 다윗은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을 24가족(반열)으로 나누고 그각 가족으로 하여금 1년에 1주씩 2차로 성전봉사를 하게 했다 (대상 23, 24장 ;대하 8장).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바벧론 포로 당시에 일시 끊어져 포로 귀환하면서 4반열만(하김, 예수아, 임멜, 바스훌) 귀국하게 된다(스 2:36-39). 그 후, 이 반열은 에스라의 주도하에 가능한한 본래의 모습대로 재조직하여 24반열의 이름만이라도 유지하게 되었다. 사가랴는 그 중에 아비야의 반열로 여덟번째 반열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 반열은 다윗 당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제사장의 직무를…행할새 – 각 제사장 가족들은 그 해(年)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성전 봉사의 책무를 맡게 된다. 즉 제사장들 중 그해에 봉사할 임무를 맡게 되는 지사장 가족은 일주일 동안씩(8일간;안식일에서 안식일까지) 일년에 두 번 성전을 섬기게 된다(J. Jeremias). 그러나 다음과 같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때에는 제사장들 모두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한 제사장 개인이 상번제(the daily sacrifice)를 위해 분향단에 향을 피운다는 것은 극히 희박한 경우이며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는 것조차 큰 행운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의 수효(일설에는 약 2만명 정도였다고 함)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혹자(Farrar)에 따르면 한 제사장이 평생에 두 차례에 걸쳐 성전 봉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제비가 자신에게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사장에게 있어 이 일은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영광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본문에는 직무를 맡은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에난티 투 데우)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성전이 곧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 이해되었던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에 의한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합 2:20).

카타 토 에도스 테스 히에라테이아스 엘라케 투 뒤미아사이 에이셀돈 에이스 톤 나온 투 퀴리우

개역개정,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새번역,9 어느 날 제사직의 관례를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우리말성경,9 제사장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사가랴는 주의 성전 안으로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가톨릭성경,9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영어NIV,9 he was chosen by lot,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priesthood, to go into the temple of the Lord and burn incense.

영어NASB,9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priestly office, he was chosen by lot to enter the temple of the Lord and burn incense.

영어MSG,9 it came his one turn in life to enter the sanctuary of God and burn incense.

영어NRSV,9 he was chosen by lot,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priesthood, to enter the sanctuary of the Lord and offer incense.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τα το εθος της ιερατειας ελαχεν του θυμιασαι εισελθων εις τον ναον του κυριου

라틴어Vulgate,9 secundum consuetudinem sacerdotii sorte exiit ut incensum poneret ingressus in templum Domini

히브리어Modern,9 וכמשפט עבודת הכהנים יצא גורלו להקטיר קטרת ויבא אל היכל יהוה׃

성 경: [눅1: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 이 말은 내용상 원래 8절에 부속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의 읽기대로 ‘제비를 뽑아…분향하고’라는 표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의 전례’ 곧 ‘제사장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관습(*, 에도스)’이란 8, 9절에 명시된 내용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라 볼수 있다.

󰃨 제비를 뽑아(*, 엘라케) –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이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뤼진 것이다(신 18:10-12;수 18:6, 8).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민 26:55;수 14:2), 죄인을 찾아낼 때(수 7:14;삼상 14:42), 첫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예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타난다(행 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하셨으나(잠 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다.

󰃨 주의 성소에 들어가 – 여기서 ‘성소'(*,나오스)란 성소(Holy Place)와 지성소(the Holy of Holies)를 합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과 구별된다. 결국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이와 같이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마포및 에봇으로 된 성의(聖衣)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 분향하고 –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한다(시 141:2;계 8:3).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호와 하나님께 흡향(吸香)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10절).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受胎告)를 받게된다.

카이 판 토 플레도스 엔 투 라우 프로슈코메논 엨소 테 호라 투 뒤미아마토스

개역개정,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새번역,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온 백성은 다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우리말성경,10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0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영어NIV,10 And when the time for the burning of incense came, all the assembled worshipers were praying outside.

영어NASB,10 And the whole multitude of the people were in prayer outside at the hour of the incense offering.

영어MSG,10 The congregation was gathered and praying outside the Temple at the hour of the incense offering.

영어NRSV,10 Now at the time of the incense offering, the whole assembly of the people was praying outside.

헬라어신약Stephanos,10 και παν το πληθος του λαου ην προσευχομενον εξω τη ωρα του θυμιαματος

라틴어Vulgate,10 et omnis multitudo erat populi orans foris hora incensi

히브리어Modern,10 וכל קהל העם היו מתפללים בחוץ בעת הקטרת׃

성 경: [눅1:1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모든 백성은…기도하더니 – 이 구절의 ‘모든 백성’에 대해 NIV는 ‘운집한 경배자들'(all the assembled worshiper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라오스'(*, ‘백성’)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되고 있다. 예배자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다. 이들의 첫째와 섯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다(Geldenhuys). 한편 이 백성들 가운데 연로한 시므온(2:25)과 여선지자 안나(2:36)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이 곳에 모인 백성들은 뒤에 21, 22절에 기록된 백성들과 일치한다(Liefeld).

옾데 데 아우토 앙겔로스 퀴리우 헤스토스 에크 뎈시온 투 뒤시아스테리우 투 뒤미아마토스

개역개정,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새번역,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

우리말성경,11 그때 주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영어NIV,11 Then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standing at the right side of the altar of incense.

영어NASB,11 And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standing to the right of the altar of incense.

영어MSG,11 Unannounced, an angel of God appeared just to the right of the altar of incense.

영어NRSV,11 Then there appeared to him an angel of the Lord, standing at the right side of the altar of incense.

헬라어신약Stephanos,11 ωφθη δε αυτω αγγελος κυριου εστως εκ δεξιων του θυσιαστηριου του θυμιαματος

라틴어Vulgate,11 apparuit autem illi angelus Domini stans a dextris altaris incensi

히브리어Modern,11 וירא אליו מלאך יהוה עמד לימין מזבח הקטרת׃

성 경: [눅1:1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의 사자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는 ‘사자’, ‘천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곳에 따라 ‘사자'(12:9;마 2:13), 또는 ‘천사'(마 24:36;막 12:25;롬 8:38;고전 4:9;1:13, 14)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곳 외에도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한다(1:26;2:9, 13, 21;12:8;15:10;16:22;22:43;24:4, 23).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행 10:4, 7;12:8-10).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 향단 우편 – 향단과 번제단은 다르다. 번제단은 성소 밖에 위치한다. 매일의 분향은 성막뜰의 번제단 위에서, 제사는 성소안에서 드려졌다.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다는 표시로 번제단에서 향단으로 불을 가져가 향을 사른다(Alford). 주의 사자는 향단과 떡상(진설병을 놓는 상) 사이에 나타났다. 성소를 들어가면 왼쪽에 떡상, 오른쪽에 등대(촛대) 그리고 정면에 분향단이 있고, 그뒤에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게 된다(출 30:1-10;40:2-27, 아래 그림 참조).

카이 에타랔데 자카리아스 이돈 카이 포보스 에페페센 엪 아우톤

개역개정,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새번역,12 그는 천사를 보고 놀라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우리말성경,12 천사를 본 사가랴는 깜짝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가톨릭성경,12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영어NIV,12 When Zechariah saw him, he was startled and was gripped with fear.

영어NASB,12 Zacharias was troubled when he saw the angel, and fear gripped him.

영어MSG,12 Zachariah was paralyzed in fear.

영어NRSV,12 When Zechariah saw him, he was terrified; and fear overwhelm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εταραχθη ζαχαριας ιδων και φοβος επεπεσεν επ αυτον

라틴어Vulgate,12 et Zaccharias turbatus est videns et timor inruit super eum

히브리어Modern,12 ויבהל זכריה בראותו אתו ואימה נפלה עליו׃

성 경: [눅1:1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놀라며 무서워하니 – ‘놀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타라크데'(*)는 원형인 ‘타라쏘'(*)의 수동태 과거형이다. 그 뜻은 ‘요동하다’, ‘내적 동요를 일으키다’, ‘마음의 평정을 없애버리다’이다(마 2:3;막 6:50;요 11:33). ‘무서워하니’에 해당하는 ‘포보스'(*)는 ‘두려움’, ‘놀람’, ‘경악’,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로 미루어 사가랴는 천사의 출현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놀랐음을 알 수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이다(삿 6:22;13:22).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톤 호 앙겔로스 메 포부 자카리아 디오티 에이세쿠스데 헤 데에시스 수 카이 헤 귀네 수 엘리사벹 겐네세이 휘온 소이 카이 발레세이스 토 오노마 아우투 요안넨

개역개정,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새번역,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우리말성경,13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가랴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가톨릭성경,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영어NIV,13 But the angel said to him: “Do not be afraid, Zechariah; your prayer has been heard. Your wife Elizabeth will bear you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ohn.

영어NASB,13 But the angel said to him, ” Do not be afraid, Zacharias, for your petition has been heard, and your wife Elizabeth will bear you a son, and you will give him the name John.

영어MSG,13 But the angel reassured him, “Don’t fear, Zachariah. Your prayer has been heard. Elizabeth, your wife, will bear a son by you. You are to name him John.

영어NRSV,13 But the angel said to him, “Do not be afraid, Zechariah, for your prayer has been heard. Your wife Elizabeth will bear you a son, and you will name him John.

헬라어신약Stephanos,13 ειπεν δε προς αυτον ο αγγελος μη φοβου ζαχαρια διοτι εισηκουσθη η δεησις σου και η γυνη σου ελισαβετ γεννησει υιον σοι και καλεσεις το ονομα αυτου ιωαννην

라틴어Vulgate,13 ait autem ad illum angelus ne timeas Zaccharia quoniam exaudita est deprecatio tua et uxor tua Elisabeth pariet tibi filium et vocabis nomen eius Iohannem

히브리어Modern,13 ויאמר אליו המלאך אל תירא זכריהו כי נשמעה תפלתך ואלישבע אשתך תלד לך בן וקראת שמו יוחנן׃

성 경: [눅1:1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 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와 비교해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NIV는 현재완료형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에이세쿠스데'(*)는 제1부정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과거의 형태로,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천사의 응답은 그 내용을 추정 가능하게 한다. 즉 그의 기도 내용은 자식이 없는 자신을 돌보실 것과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간구 이상으로 응답하신다. 즉 아들을 주시고, 메사아도 곧 오실 것인데, 그의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리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사가랴에게 임한 축복으로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약 5:16)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준다. 요한(*, 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난'(*, 대상 3:24), ‘요아네스'(*, 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성경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벧론 유수기(幽囚期)를 전후허서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카이 에스타이 카라 소이 카이 아갈리아시스 카이 폴로이 에피 테 게네세이 아우투 카레손타이

개역개정,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새번역,14 그 아들은 네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4 그 아이는 네게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며 많은 사람이 그가 태어난 것을 기뻐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영어NIV,14 He will be a joy and delight to you, and many will rejoice because of his birth,

영어NASB,14 “You will have joy and gladness, and many will rejoice at his birth.

영어MSG,14 You’re going to leap like a gazelle for joy, and not only you–many will delight in his birth.

영어NRSV,14 You will have joy and gladness, and many will rejoice at his birth,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εσται χαρα σοι και αγαλλιασις και πολλοι επι τη γεννησει αυτου χαρ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14 et erit gaudium tibi et exultatio et multi in nativitate eius gaudebunt

히브리어Modern,14 והיה לך לשמחה וגיל ורבים ישמחו בהולדו׃

성 경: [눅1:1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너도 기뻐하고…기뻐하리니 – 이 부분은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와 ‘즐거워하다’로 번역된 ‘아갈리아시스'(*)가 연이어서 나오는 문장이다. ‘아갈리아시스’는 ‘환희’ 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기뻐서 뛰고 소리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을 암시한다.

에스타이 가르 메가스 에노피온 투 퀴리우 카이 오이논 카이 시케라 우 메 피에 카이 프뉴마토스 하기우 플레스데세타이 에티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우투

개역개정,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새번역,15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그는 포도주와 독한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것이며,

우리말성경,15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 아이는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고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며

가톨릭성경,15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영어NIV,15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is never to take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and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even from birth.

영어NASB,15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he will drink no wine or liquor, and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while yet in his mother’s womb. ”

영어MSG,15 He’ll achieve great stature with God. “He’ll drink neither wine nor beer. He’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from the moment he leaves his mother’s womb.

영어NRSV,15 for he will be grea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must never drink wine or strong drink; even before his birth he will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15 εσται γαρ μεγας ενωπιον του κυριου και οινον και σικερα ου μη πιη και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πλησθησεται ετι εκ κοιλιας μητρο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5 erit enim magnus coram Domino et vinum et sicera non bibet et Spiritu Sancto replebitur adhuc ex utero matris suae

히브리어Modern,15 כי גדול יהיה לפני יהוה ויין ושכר לא ישתה ורוח הקדש ימלא בעודנו בבטן אמו׃

성 경: [눅1:1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 앞에 큰 자 – ‘큰’에 해당하는 ‘메가스'(*)는 ‘위대한’, ‘덕스러운’,’권위있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0:25;딤 2:13). 이 말을 32절의 예수께 대해 큰 자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보면, 32절의 ‘큰 자’ 앞에는 ‘주 앞에’라는 수식어가 없음을 알수 있다. 결국 요한은 예수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억할 수 있다(민 6:3, 4).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메시지와 일치하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소주에 해당하는 ‘시케라'(*)는 강한 , 독주 등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이 부분은 앞부분의 포도주와 소주라는 말과 어울려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별히 엡 5:18을 통해서 술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교를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의 성령 강조이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12회 사용되는데, 그 중 본장에서 4회(15, 35, 41, 67절)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누가의 저작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를 무려 41회나 사용하고 있다.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은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카이 폴류스 톤 휘온 이스라엘 에피스트렢세이 에피 퀴리온 톤 데온 아우톤

개역개정,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새번역,16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6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을 그들의 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6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영어NIV,16 Many of the people of Israel will he bring back to the Lord their God.

영어NASB,16 “And he will turn many of the sons of Israel back to the Lord their God.

영어MSG,16 He will turn many sons and daughters of Israel back to their God.

영어NRSV,16 He will turn many of the people of Israel to the Lord their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πολλους των υιων ισραηλ επιστρεψει επι κυριον τον θεο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16 et multos filiorum Israhel convertet ad Dominum Deum ipsorum

히브리어Modern,16 ורבים מבני ישראל ישיב אל יהוה אלהיהם׃

성 경: [눅1:1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이스라엘 자손을…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렘 3:7, 10;겔 3:19;단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눅 3:3)

카이 아우토스 프로엘류세타이 에노피온 아우투 엔 프뉴마티 카이 뒤나메이 엘리우 에피스트렢사이 카르디아스 파테론 에티 테크나 카이 아페이데이스 엔 프로네세이 디카이온 헤토이마사이 퀴리오 라온 카테스큐아스메논

개역개정,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새번역,17 그는 또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앞서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7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보다 먼저 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그 자녀들에게로, 순종치 않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로 돌아서게 할 것이다. 그래서 주를 위해 예비된 백성들을 준비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7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영어NIV,17 And he will go on before the Lord, in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to turn the hearts of the fathers to their children and the disobedient to the wisdom of the righteous–to make ready a people prepared for the Lord.”

영어NASB,17 “It is he who will go as a forerunner before Him in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TO TURN THE HEARTS OF THE FATHERS BACK TO THE CHILDREN, and the disobedient to the attitude of the righteous, so as to make ready a people prepared for the Lord.”

영어MSG,17 He will herald God’s arrival in the style and strength of Elijah, soften the hearts of parents to children, and kindle devout understanding among hardened skeptics–he’ll get the people ready for God.”

영어NRSV,17 With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he will go before him, to turn the hearts of parents to their children, and the disobedient to the wisdom of the righteous, to make ready a people prepared for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αυτος προελευσεται ενωπιον αυτου εν πνευματι και δυναμει ηλιου επιστρεψαι καρδιας πατερων επι τεκνα και απειθεις εν φρονησει δικαιων ετοιμασαι κυριω λαον κατεσκευασμενον

라틴어Vulgate,17 et ipse praecedet ante illum in spiritu et virtute Heliae ut convertat corda patrum in filios et incredibiles ad prudentiam iustorum parare Domino plebem perfectam

히브리어Modern,17 והוא ילך לפניו ברוח אליהו ובגבורתו להשיב את לב אבות על בנים ואת הסוררים לתבונת הצדיקים להעמיד ליהוה עם מתקן׃

성 경: [눅1:1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 ‘심령’을 나타내는 ‘프뉴마'(*)는 ‘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성질 또는 영향력, 어떤 능력이나 애정, 감정, 욕구 등의 근원’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내는 ‘뒤나메이'(*)는 ‘물려받은 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을 의미한다. 더러는 ‘기적을 행할 때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의미할 때도 있다. 즉, 요한은 엘리야가 지녔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것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사 40:1;말 3:1-5;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요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광야에서의 삶(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이나 지위고하(地位高河)를 막론하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벧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는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신다(마 17:12;막 9:13).

󰃨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돌아오게 하고 – 이 구절은 말 4:6에서 인용한 것으로 난해 구절에 속한다. 일단에서는 이 부분을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파괴된 이스라엘 가정의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그 당시에는 로마와 결탁한 부모, 열심당(Zealots)에 가담한 아들, 바리새파 형과 사두개파 아우 등 가정은 4분 5열이 되어 있었으나 이 분열이 요한을 통해서 회복되리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매튜 헨리(Mattew Henry)는 유대인의 믿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켜 이방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요한은 분열과 불신, 배타와 독선 등을 끝내고 화합과 믿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줄 것이다.

󰃨 주를 위하여…예비하리라 – ‘백성’이라는 헬라어 ‘라오스'(*)는 공관 복음서에 49회나 사용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이 단어를 ‘무리’, ‘군중’을 나타내는 ‘오클로스'(*)와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마 21:26) 이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Liefeld). 여기서 요한의 사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카이 에이펜 자카리아스 프로스 톤 앙겔론 카타 티 그노소마이 투토 에고 가르 에이미 프레스뷔테르 카이 헤 귀네 무 프로베베퀴이아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아우테스

개역개정,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새번역,18 사가랴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늙은 사람이요, 내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 말입니다.”

우리말성경,18 사가랴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말을 확신하겠습니까? 나는 늙었고 내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가톨릭성경,18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영어NIV,18 Zechariah asked the angel, “How can I be sure of this? I am an old man and my wife is well along in years.”

영어NASB,18 Zacharias said to the angel, “How will I know this for certain? For I am an old man and my wife is advanced in years.”

영어MSG,18 Zachariah said to the angel, “Do you expect me to believe this? I’m an old man and my wife is an old woman.”

영어NRSV,18 Zechariah said to the angel, “How will I know that this is so? For I am an old man, and my wife is getting on in year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ειπεν ζαχαριας προς τον αγγελον κατα τι γνωσομαι τουτο εγω γαρ ειμι πρεσβυτης και η γυνη μου προβεβηκυια εν ταις ημεραις αυτης

라틴어Vulgate,18 et dixit Zaccharias ad angelum unde hoc sciam ego enim sum senex et uxor mea processit in diebus suis

히브리어Modern,18 ויאמר זכריה אל המלאך במה אדע זאת כי אני זקנתי ואשתי באה בימים׃

성 경: [눅1:1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어떻게 알리요…나이 많으니이다 – ‘어떻게’에 해당하는 ‘카타 티'(*)는 ‘무엇에 의하여’라는 뜻이다(in what way, MLB).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하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다. 20절과 연결하여 보면, 이것은 사가랴의 겸손이 아니고 불신의 소치임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마리아의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는 질문은(Haw shall this be, RSV) 45절로 미루어 천사의 메시지를 믿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사가랴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고, 마리아의 질문은 성취 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늙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스'(*)는 나이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민 4:3;8:24, 25에 보면 레위인들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러나야 된다고 하였다. 물론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날 정도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사가랴의 초조함이나 불신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앙겔로스 에이펜 아우토 에고 에이미 가브리엘 호 파레스테코스 에노피온 투 데우 카이 아페스탈렌 랄레사이 프로스 세 카이 유앙겔리사스다이 소이 타우타

개역개정,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새번역,19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인데, 나는 네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보내심을 받았다.

우리말성경,19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다. 나는 이 좋은 소식을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다.

가톨릭성경,19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영어NIV,19 The angel answered, “I am Gabriel. I stand in the presence of God, and I have been sent to speak to you and to tell you this good news.

영어NASB,19 The angel answered and said to him, “I am Gabriel, who stands in the presence of God, and I have been sent to speak to you and to bring you this good news.

영어MSG,19 But the angel said, “I am Gabriel, the sentinel of God, sent especially to bring you this glad news.

영어NRSV,19 The angel replied, “I am Gabriel. I stand in the presence of God, and I have been sent to speak to you and to bring you this good news.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ο αγγελος ειπεν αυτω εγω ειμι γαβριηλ ο παρεστηκως ενωπιον του θεου και απεσταλην λαλησαι προς σε και ευαγγελισασθαι σοι ταυτα

라틴어Vulgate,19 et respondens angelus dixit ei ego sum Gabrihel qui adsto ante Deum et missus sum loqui ad te et haec tibi evangelizare

히브리어Modern,19 ויען המלאך ויאמר אליו אני גבריאל העומד לפני האלהים ושלוח אנכי לדבר אליך ולבשרך את זאת׃

성 경: [눅1:1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천사가…가브리엘이라 –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이다. 성경상에서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단 8:16;9:21)과 ‘미가엘'(단 10:13, 21;12:1; 유 1:9; 12:7) 둘 만이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이며 미가엘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단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구약 외경 에녹서(Book of Enoch)에는 4명의 천사장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은 미가엘(Michael), 라파엘(Raphael), 우리엘(Uriel), 가브리엘(Gabriel) 등이다. 한편 ‘하나님 앞에 섰는’이라는 말에서는 권위와 위엄(威嚴)이 느껴진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권위와 위엄이 있긴 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내가 비록 천사장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자이고,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와 함께 만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그 앞에 서있는 자이다.’

󰃨 좋은 소식(*, 유앙겔리사스다이) –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유앙겔리조마이(*)에서 왔다. ‘유'(*)는 ‘좋은'(good)을 뜻하며 ‘앙겔로'(*)는 ‘메시지를 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합성어 ‘복음의 선포’라는 뜻으로 번역된다(Wuest). 그리고 ‘유앙겔리조마이’는 공관복음에서 모두 11회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10회나 사용되었다(본절;2:10;3:18;4:18, 43;7:22;8:1;9:6;16:16;20:1). 따라서 누가에게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다(Liefeld). 여기서 8절에 나타난 사가랴의 불신앙의 질문에 천사 가브리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헬라어 성경의 이 부분의 문법적 구조에 따르면, 천사의 대답은 사가랴의 불신의 질문에 뒤이어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사가랴의 의심에 찬 말문을 막고 불신을 조기에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다.

카이 이두 에세 시오폰 카이 메 뒤나메노스 랄레사이 아크리 헤스 헤메라스 게네타이 타우타 안드 혼 우크 에피스튜사스 토이스 로고이스 무 호이티네스 플레로데손타이 에이스 톤 카이론 아우톤

개역개정,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새번역,20 보아라, 그 때가 되면 다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말성경,20 보아라. 너는 벙어리가 돼서 이 일이 일어날 그날까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다 이루어질 내 말들을 네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20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영어NIV,20 And now you will be silent and not able to speak until the day this happens, because you did not believe my words, which will come true at their proper time.”

영어NASB,20 “And behold, you shall be silent and unable to speak until the day when these things take place, because you did not believe my words, which will be fulfilled in their proper time.”

영어MSG,20 But because you won’t believe me, you’ll be unable to say a word until the day of your son’s birth. Every word I’ve spoken to you will come true on time–God’s time.”

영어NRSV,20 But now, because you did not believe my words, which will be fulfilled in their time, you will become mute, unable to speak, until the day these things occur.”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ιδου εση σιωπων και μη δυναμενος λαλησαι αχρι ης ημερας γενηται ταυτα ανθ ων ουκ επιστευσας τοις λογοις μου οιτινες πληρωθησονται εις τον καιρο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20 et ecce eris tacens et non poteris loqui usque in diem quo haec fiant pro eo quod non credidisti verbis meis quae implebuntur in tempore suo

히브리어Modern,20 והנה תאלם ולא תוכל לדבר עד היום אשר תהיה זאת תחת כי לא האמנת בדברי אשר ימלאו למועדם׃

성 경: [눅1:2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내 말이 이루리라 – ‘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는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사용하는 불변사이다. 이 단어는 말을 강조할 때나 좀 더 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가 이 팔에 얼마나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나를 보게 된다. 의심의 결과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이 꼭 형벌이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에 대한 예시로 벙어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Alford). 또한 62절과 비교해 보면 사가랴는 벙어리뿐만이 아니라 귀머거리까지 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의 벙어리됨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다.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는 오랜 침묵을 통하여 의심의 질문을 던지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67-80절).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살펴보면 천사의 말은 이루어지도록 예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의 되는 날까지’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다른 어떤 사람이 거부한다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카이 엔 호 라오스 프로스도콘 톤 자카리안 카이 에다우마존 엔 토 크로니제인 엔 토 나오 아우톤

개역개정,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새번역,21 백성이 사가랴를 기다리는데,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도 오래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말성경,21 한편 사람들은 사가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성전 안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가톨릭성경,21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영어NIV,21 Meanwhile, the people were waiting for Zechariah and wondering why he stayed so long in the temple.

영어NASB,21 The people were waiting for Zacharias, and were wondering at his delay in the temple.

영어MSG,21 Meanwhile, the congregation waiting for Zachariah was getting restless, wondering what was keeping him so long in the sanctuary.

영어NRSV,21 Meanwhile the people were waiting for Zechariah, and wondered at his delay in the sanctuary.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ην ο λαος προσδοκων τον ζαχαριαν και εθαυμαζον εν τω χρονιζειν αυτον εν τω ναω

라틴어Vulgate,21 et erat plebs expectans Zacchariam et mirabantur quod tardaret ipse in templo

히브리어Modern,21 והעם היה מחכה לזכריה ויתמהו כי אחר בהיכל׃

성 경: [눅1:2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백성들이…기이히 여기더니 –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제사장이 오래 지체하게 되면 백성들은 제사장이 어떠한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Alford). 탈무드(Talmud)에도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는 잠시 동안만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Lenski). 따라서 제사장들은 가능한 한 성소에서 속히 나와 백성들을 축복하고 해산시킨다. 이 구절에서 보면, 분향이 행해질 때 밖에서 기도하던(10절) 백성들은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그들은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어떤 과오로 인해 죽지 않았나 걱정했을 것이다(레 10:1, 2).

엨셀돈 데 우크 에뒤나토 랄레사이 아우토이스 카이 에페그노산 호티 옾타시안 헤오라켄 엔 토 나오 카이 아우토스 엔 디아뉴온 아우토이스 카이 디에메넨 코포스

개역개정,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새번역,22 그런데 그가 나와서도 말을 못하니까,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환상을 본 줄로 알았다. 사가랴는 그들에게 손짓만 할 뿐이요, 그냥 말을 못하는 채로 있었다.

우리말성경,22 사가랴가 밖으로 나왔을 때 말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습니다. 사가랴는 손짓만 했지 말을 못하는 채로 계속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22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영어NIV,22 When he came out, he could not speak to them. They realized he had seen a vision in the temple, for he kept making signs to them but remained unable to speak.

영어NASB,22 But when he came out, he was unable to speak to them; and they realized that he had seen a vision in the temple; and he kept making signs to them, and remained mute.

영어MSG,22 When he came out and couldn’t speak, they knew he had seen a vision. He continued speechless and had to use sign language with the people.

영어NRSV,22 When he did come out, he could not speak to them, and they realized that he had seen a vision in the sanctuary. He kept motioning to them and remained unable to speak.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ξελθων δε ουκ ηδυνατο λαλησαι αυτοις και επεγνωσαν οτι οπτασιαν εωρακεν εν τω ναω και αυτος ην διανευων αυτοις και διεμενεν κωφος

라틴어Vulgate,22 egressus autem non poterat loqui ad illos et cognoverunt quod visionem vidisset in templo et ipse erat innuens illis et permansit mutus

히브리어Modern,22 ויהי בצאתו לא יכל לדבר אליהם וידעו כי מראה ראה בהיכל וירמז להם ועודנו נאלם׃

성 경: [눅1:2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는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다(민 6:24-26). 그러나 사가랴가 성소를 나오면서 시종 일관 침묵을 지키자 백성들은 성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 이상(異像) – 헬라어에서 사용되는 ‘이상’ 또는 ‘환상’이라는 말은 모두 3개가 된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에 해당하는 ‘와타시아'(*), ‘보여지는 것’을 나타내는 ‘호라마'(*), ‘봄’, ‘외관’, ‘자태’에 해당하는 ‘호라시스'(*)등이다. 이구절에서는 ‘와타시스’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상’이라는 말은 대개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본 것, 꿈이나 황홀경 중에 본 것, 혹은 선지자에게 계시된 것 등을 의미한다.

󰃨 형용(形容)으로 – 사가랴는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기에 손짓, 몸짓으로 그의 뜻을 전달하였다. 사가랴의 말 못함은 백성들에게 성소 안에서 그가 지체한 원인에 대한 충한 답변이 되었고 또 그가 이상을 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카이 에게네토 호스 에플레스데산 하이 헤메라이 테스 레이푸르기아스 아우투 아펠덴 에이스 톤 오이콘 아우투

개역개정,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새번역,23 사가랴는 제사 당번 기간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말성경,23 직무 기간이 끝나자 사가랴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톨릭성경,23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영어NIV,23 When his time of service was completed, he returned home.

영어NASB,23 When the days of his priestly service were ended, he went back home.

영어MSG,23 When the course of his priestly assignment was completed, he went back home.[

영어NRSV,23 When his time of service was ended, he went to his hom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εγενετο ως επλησθησαν αι ημεραι της λειτουργιας αυτου απηλθεν εις τον οικ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3 et factum est ut impleti sunt dies officii eius abiit in domum suam

히브리어Modern,23 ויהי כאשר מלאו ימי עבדתו וילך לו אל ביתו׃

성 경: [눅1:2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직무(*, 레이투르기아스) – 이 말은 원래 자신의 ‘공적인 사무’를 뜻하며 자신의 희생이나 비용으로 수행되는 ‘공적인 봉사'(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한다(고후 9:12;빌 2:17, 30;히 8:6;9:21). 특히 여기서는 제사장적 사역의 의미를 나타낸다. 사가랴는 듣고 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수행한다. 사가랴의 희생적인 직무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메타 데 타우타스 타스 헤메라스 쉬넬라벤 엘리사벹 헤 귀네 아우투 카이 페리에크뤼벤 헤아우텐 메나스 펜테 레구사

개역개정,24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새번역,24 그 뒤에 얼마 지나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말성경,24 그 후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기를 갖게 돼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24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영어NIV,24 After this his wife Elizabeth became pregnant and for five months remained in seclusion.

영어NASB,24 After these days Elizabeth his wife became pregnant, and she kept herself in seclusion for five months, saying,

영어MSG,24 It wasn’t long before his wife, Elizabeth, conceived. She went off by herself for five months, relishing her pregnancy.

영어NRSV,24 After those days his wife Elizabeth conceived, and for five months she remained in seclusion. She said,

헬라어신약Stephanos,24 μετα δε ταυτας τας ημερας συνελαβεν ελισαβετ η γυνη αυτου και περιεκρυβεν εαυτην μηνας πεντε λεγουσα

라틴어Vulgate,24 post hos autem dies concepit Elisabeth uxor eius et occultabat se mensibus quinque dicens

히브리어Modern,24 ויהי אחרי הימים האלה ותהר אלישבע אשתו ותתחבא חמשה חדשים ותאמר׃

성 경: [눅1:2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엘리사벳이…숨어 있으며 – 엘리사벳이 왜 숨었는가에 관해서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 자신이 나이들어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해서 숨은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삿 13:13, 14의 내용처럼, 임신한 자신을 부정한 생활에서 구별하고 이와 아울러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할 듯하다.

호티 후토스 모이 페포이에켄 퀴리오스 엔 헤메라이스 하이스 에페이덴 아펠레인 오네이도스 무 엔 안드로포이스

개역개정,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새번역,25 “주님께서 나를 돌아보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내 부끄러움을 없이해 주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셨다.”

우리말성경,25 “주께서 이때에 이렇게 나를 돌아보셔서 사람들 사이에서 내 수치를 없애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25 “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영어NIV,25 “The Lord has done this for me,” she said. “In these days he has shown his favor and taken away my disgrace among the people.”

영어NASB,25 “This is the way the Lord has dealt with me in the days when He looked with favor upon me, to take away my disgrace among men.”

영어MSG,25 “So, this is how God acts to remedy my unfortunate condition!” she said.

영어NRSV,25 “This is what the Lord has done for me when he looked favorably on me and took away the disgrace I have endured among my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25 οτι ουτως μοι πεποιηκεν ο κυριος εν ημεραις αις επειδεν αφελειν το ονειδος μου εν ανθρωποις

라틴어Vulgate,25 quia sic mihi fecit Dominus in diebus quibus respexit auferre obprobrium meum inter homines

히브리어Modern,25 ככה עשה לי יהוה בימי פקדו אותי לאסף את חרפתי בתוך בני אדם׃

성 경: [눅1:2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 이 구절에는 깊은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내 부끄러움’이란 유대인 제사장 가문에서 아이가 없다는 세인(世人)들에 대한 부끄러움이다(창 30:23;삼상 1:6-10). 여성의 불임은 유대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수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오랜 세월의 고통 가운데서 큰 결실을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기쁨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 부끄러움(*, 오네이도스) – 이 말은 ‘비난’, ‘불명예’, ‘모욕’이라는 뜻을 갖는다. 신약성경 중에는 본절에서만 사용된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치심 정도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으로 빠뜨리는 치욕을 뜻한다.

󰃨 없게 하시려고(*, 아펠레인) – 이 단어는 원형이 ‘아파이레오'(*)로서 ‘치워버리다’, ‘가져가다’, ‘베어버리다’라는 뜻이다.

엔 데 토 메니 토 헼토 아페스탈레 호 앙겔로스 가브리엘 아포 투 데우 에이스 폴린 테스 갈릴라이아스 헤 오노마 나자렏

개역개정,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새번역,26 그 뒤로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보내시어,

우리말성경,26 그 후 여섯 달째에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 보내

가톨릭성경,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영어NIV,26 In the sixth month, God sent the angel Gabriel to Nazareth, a town in Galilee,

영어NASB,26 Now in the sixth month the angel Gabriel was sent from God to a city in Galilee called Nazareth,

영어MSG,26 In the sixth month of Elizabeth’s pregnancy, God sent the angel Gabriel to the Galilean village of Nazareth

영어NRSV,26 In the sixth month the angel Gabriel was sent by God to a town in Galilee called Nazareth,

헬라어신약Stephanos,26 εν δε τω μηνι τω εκτω απεσταλη ο αγγελος γαβριηλ υπο του θεου εις πολιν της γαλιλαιας η ονομα ναζαρετ

라틴어Vulgate,26 in mense autem sexto missus est angelus Gabrihel a Deo in civitatem Galilaeae cui nomen Nazareth

히브리어Modern,26 ויהי בחדש הששי וישלח המלאך גבריאל מאת האלהים גלילה אל עיר אשר שמה נצרת׃

성 경: [눅1:2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천사 가브리엘이…동네에 가서 – 타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치밀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음을 나타낸다. 이제 본절로 부터는 예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 갈릴리 나사렛 – 나사렛(Nazareth)이라는 동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갈릴리 지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받아볼 데오빌로나 그 외 이방 사람들은 작은 나라의 작은 마을인 나사렛이 어느 지방의 어떤 곳인지 잘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사렛은 앞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비교가 된다. 천사는 호화롭고 화려한 대도시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외진 마을을 찾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요 1:46에 기록된 나다나엘의 말을 기억할 수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극단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취급받던 동네가 나사렛이다. 예수는 공생애 이전의 삶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보내셨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70마일 떨어진 이스르엘 또는 에 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북편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다. 나사렛 뒷편에는 레바논과 언제나 눈이 덮여있는 헬몬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산이 위치했는데 이 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다. 현재는 이 지역을 ‘엔 나시라'(EN Nasirah)로 부른다(Geldenhuys).

프로스 파르데논 엠네스튜메넨 안드리 호 오노마 요셒 엨스 오이쿠 다윋 카이 토 오노마 테스 파르데누 마리암

개역개정,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새번역,27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처녀에게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우리말성경,27 한 처녀에게 가게 하셨는데 그 처녀는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마리아였습니다.

가톨릭성경,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영어NIV,27 to a virgin pledged to be married to a man named Joseph, a descendant of David. The virgin’s name was Mary.

영어NASB,27 to a virgin engaged to a man whose name was Joseph, of the descendants of David; and the virgin’s name was Mary.

영어MSG,27 to a virgin engaged to be married to a man descended from David. His name was Joseph, and the virgin’s name, Mary.

영어NRSV,27 to a virgin engaged to a man whose name was Joseph, of the house of David. The virgin’s name was Mary.

헬라어신약Stephanos,27 προς παρθενον μεμνηστευμενην ανδρι ω ονομα ιωσηφ εξ οικου δαβιδ και το ονομα της παρθενου μαριαμ

라틴어Vulgate,27 ad virginem desponsatam viro cui nomen erat Ioseph de domo David et nomen virginis Maria

히브리어Modern,27 אל בתולה מארשה לאיש אשר שמו יוסף מבית דוד ושם הבתולה מרים׃

성 경: [눅1:2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요셉이라…마리아라 –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약혼)한다. 샴마이(Shammai)학파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정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본절과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 처녀(*, 파르데논) – 이 단어는 원형이 ‘파르데노스'(*)로서 ‘미혼녀’, ‘소녀’라는 뜻이다. 성경 외적 문헌에 의하면 이 말이 동정녀만을 뜻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문맥과 특히 34절에 수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동정녀를 뜻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1:5-38의 주제 강해 참조.

카이 에이셀돈 프로스 아우텐 에이펜 카이레 케카리토메네 호 퀴리오스 메타 수

개역개정,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새번역,28 천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여인들 가운데서 너는 복이 있다. 주님께서……’

우리말성경,28 천사가 마리아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가톨릭성경,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영어NIV,28 The angel went to her and said, “Greetings, you who are highly favored! The Lord is with you.”

영어NASB,28 And coming in, he said to her, “Greetings, favored one! The Lord is with you.”

영어MSG,28 Upon entering, Gabriel greeted her: Good morning! You’re beautiful with God’s beauty, Beautiful inside and out! God be with you.

영어NRSV,28 And he came to her and said, “Greetings, favored one! The Lord is with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8 και εισελθων ο αγγελος προς αυτην ειπεν χαιρε κεχαριτωμενη ο κυριος μετα σου ευλογημενη συ εν γυναιξιν

라틴어Vulgate,28 et ingressus angelus ad eam dixit have gratia plena Dominus tecum benedicta tu in mulieribus

히브리어Modern,28 ויבא המלאך אליה החדרה ויאמר שלום לך אשת חן יהוה עמך ברוכה את בנשים׃

성 경: [눅1:2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은혜를 받은 자여…함께하시도다 –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나타난 것(8-24절)과 같이 마리아에게도 나타난다. 사가랴의 경우와 마리아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는 평안과 주의 임재의 인사를 하지 않은 반면에(8-24절) 마리아의 경우에는 이 같은 천사의 인사가 있던 점이 차이가 난다. ‘은혜를 받은 자’에 허당하는 헬라어 ‘케카리토메네(*)는 그 어원이 ‘은혜’를 뜻하는 어근 ‘카리스'(*)에서 온 말로서 완료 분사형으로 쓰였다. 이 완료 분사는 강한 현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는 ‘은혜를 받은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Lenski). 한편 천사와 마리아 간의 대화는 세차례에 걸쳐 전개된다. 1차 대화에서는(28, 29절) 천사의 은혜로운 인사와 이에 대한 마리아의 당혹감이 나타나며, 2차 대화(30-34절)에서는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천사의 재확인과 마리아의 설명 요구가 뒤따른다. 그리고 3차 대화(35-38절)에서는 천사의 대답과 마리아의 순종을 보여준다.

헤 데 에피 토 로고 디에타라크데 카이 디엘로기제토 포타포스 에이에 호 아스파스모스 후토스

개역개정,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새번역,29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히 여겼다.

우리말성경,29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당황하며 깜짝 놀라 ‘이게 무슨 인사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가톨릭성경,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영어NIV,29 Mary was greatly troubled at his words and wondered what kind of greeting this might be.

영어NASB,29 But she was very perplexed at this statement, and kept pondering what kind of salutation this was.

영어MSG,29 She was thoroughly shaken, wondering what was behind a greeting like that.

영어NRSV,29 But she was much perplexed by his words and pondered what sort of greeting this might be.

헬라어신약Stephanos,29 η δε ιδουσα διεταραχθη επι τω λογω αυτου και διελογιζετο ποταπος ειη ο ασπασμος ουτος

라틴어Vulgate,29 quae cum vidisset turbata est in sermone eius et cogitabat qualis esset ista salutatio

히브리어Modern,29 והיא בראותה נבהלה לדברו ותאמר בלבה מה היא הברכה הזאת׃

성 경: [눅1:2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생각하매(*, 디엘로기제토) – 이 말은 원래 ‘별개의 논거(論據)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합하다’, ‘추론하다’라는 뜻이며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리아는 놀라는 한편 모든 일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카이 에이펜 호 앙겔로스 아우테 메 포부 마리암 휴레스 가르 카린 파라 토 데오

개역개정,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새번역,30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우리말성경,30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가톨릭성경,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영어NIV,30 But the angel said to her, “Do not be afraid, Mary, you have found favor with God.

영어NASB,30 The angel said to her, “Do not be afraid, Mary; for you have found favor with God. .

영어MSG,30 But the angel assured her, “Mary, you have nothing to fear. God has a surprise for you:

영어NRSV,30 The angel said to her, “Do not be afraid, Mary, for you have found favor with God.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ειπεν ο αγγελος αυτη μη φοβου μαριαμ ευρες γαρ χαριν παρα τω θεω

라틴어Vulgate,30 et ait angelus ei ne timeas Maria invenisti enim gratiam apud Deum

히브리어Modern,30 ויאמר לה המלאך אל תיראי מרים כי מצאת חן לפני האלהים׃

성 경: [눅1:3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천사가…무서워 말라 – 사가랴의 경우는 천사가 나타나는 순간 놀라고 무서워했으나(12절)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무서워했다. 역시 두 상황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얻었느니라(*, 휴레스) – 이 말은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진 ‘휴리스코'(*)의 단순 과거형이다. NIV는 이를 ‘발견했다'(have found)라는 현재 완료형으로 번역했고 렌스키(Lenski)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지 결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나 공로를 요구하지 않는 채 주어진다(엡1 :6). 그러나 언제든지 주어지는 그 은혜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여기서 헬라어의 단순 과거형이 사용되었음을 보아 마리아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미 은혜를 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이 이두 쉴렘프세 엔 가스트리 카이 텤세 휘온 카이 칼레세이스 토 오노마 아우투 예순

개역개정,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새번역,31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우리말성경,31 보아라. 네가 잉태해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면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가톨릭성경,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영어NIV,31 You will be with child and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영어NASB,31 “And behold, you will conceive in your womb and bear a son, and you shall name Him Jesus.

영어MSG,31 You will become pregnant and give birth to a son and call his name Jesus.

영어NRSV,31 And now, you will conceive in your womb and bear a son, and you will name him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31 και ιδου συλληψη εν γαστρι και τεξη υιον και καλεσεις το ονομα αυτου ιησουν

라틴어Vulgate,31 ecce concipies in utero et paries filium et vocabis nomen eius Iesum

히브리어Modern,31 והנך הרה וילדת בן וקראת את שמו ישוע׃

성 경: [눅1:3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예수라 하라 –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인 히브리어 ‘예호수아'(*)의 헬라음으로서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출 24:13;삼상 6:14;왕하 23:8;대하 31:15;학 1:1;슥 3:8). 이 이름은 주후 2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행 13:6;골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의 사용을 꺼렸기 때문인 것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마 1:21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그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마21:11), ‘다윗의 자손'(마 27:37;막 10:47-48;요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후토스 에스타이 메가스 카이 휘오스 휲시스투 클레데세타이 카이 도세이 아우토 퀴리오스 호 데오스 톤 드로논 다윋 투 파트로스 아우투

개역개정,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새번역,32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우리말성경,32 그는 위대한 이가 될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영어NIV,32 He will be great and will be called the Son of the Most High. The Lord God will give him the throne of his father David,

영어NASB,32 “He will be great and will be called the Son of the Most High; and the Lord God will give Him the throne of His father David;

영어MSG,32 He will be great, be called ‘Son of the Highest.’ The Lord God will give him the throne of his father David;

영어NRSV,32 He will be great, and will be called the Son of the Most High, and the Lord God will give to him the throne of his ancestor David.

헬라어신약Stephanos,32 ουτος εσται μεγας και υιος υψιστου κληθησεται και δωσει αυτω κυριος ο θεος τον θρονον δαβιδ του πατρο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32 hic erit magnus et Filius Altissimi vocabitur et dabit illi Dominus Deus sedem David patris eius

히브리어Modern,32 והוא גדול יהיה ובן עליון יקרא ויהוה אלהים יתן לו את כסא דוד אביו׃

성 경: [눅1:3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큰 자 – 이 구절은 15절과 대구를 이룬다. 가브리엘은 요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예수께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어투를 사용한다. 요한에 대해서는 다분히 제한적 어투를 사용했으나 예수께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경외로운 표현을 사용하였다.(Liefeld).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휘오스 휘프시스투) – 예수께서 신적 기원(divine origen)을 지닌 메시야이심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말씀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35절에서도 나오는데 양자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명칭, 특히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모두 아홉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일곱번을 누가가 사용했다(본절, 35, 76;2:14:35; 8:28; 19:38).

󰃨 그 조상 다윗의 위(位) –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 할 수 있다(3:31). ‘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은 ‘등받침이나 팔받침 또는 발등상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의 복수형은 왕이나 신의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골 1:16). 여기서 다윗의 위는 왕되신 메시야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킨다. 요컨데, 예수는 예언된 바 그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사(삼하 7:12-16;시 89:29;132:11;사 9:7)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카이 바실류세이 에피 톤 오이콘 야콥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카이 테스 바실레이아스 아우투 우크 에스타이 텔로스

개역개정,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새번역,33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우리말성경,33 그는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성경,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영어NIV,33 and he will reign over the house of Jacob forever; his kingdom will never end.”

영어NASB,33 and He will reign over the house of Jacob forever,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영어MSG,33 He will rule Jacob’s house forever– no end, ever, to his kingdom.”

영어NRSV,33 He will reign over the house of Jacob forever, and of his kingdom there will be no end.”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βασιλευσει επι τον οικον ιακωβ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και της βασιλειας αυτου ουκ εσται τελος

라틴어Vulgate,33 et regnabit in domo Iacob in aeternum et regni eius non erit finis

히브리어Modern,33 ועל בית יעקב ימלך לעולם ועד ולמלכותו אין קץ׃

성 경: [눅1:3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영원히(*, 아이오나스) – ‘시대’, ‘영원’ 등의 뜻인 ‘아이온'(*)의 복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때때로 ‘오래 전부터'(70절), 혹은 ‘창세 이후로’를 뜻하기도 하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인다(55절;요 6:51). 특히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영원성’에 대한 암시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마 6:13;롬 1:25;히 13:8;유 1:25, H. Sasse, TDNT. I, 197-209).

󰃨 야곱의 집(*, 오이콘 야콥) – ‘집’에 해당하는 ‘오이콘’은 ‘오이코스'(*)의 단수 목적격으로서 ‘집’, ‘가족’, ‘가문’, ‘종족’의 뜻을 나타낸다. ‘야곱의 집’이라는 표현은 행 7:46에도 나타나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지만 더 정확히는 영적 이스라엘로(마 3:9;롬 10:10-13)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는 견행에 많은 학자들이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Lenski, Geldenhuys, 이상근).

󰃨 왕 노릇 –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이다(고전 15:25;계 11:15).

󰃨 그 나라(*, 바실레이아스) – ‘왕국’의 의미를 담고있는 이 단어는 때때로 ‘왕권’, ‘왕정’, ‘통치’ 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喜樂)으로 가득한(롬 14:17) 하나님의 나라에 다름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해서는 막 1:15의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고(22:29), 우리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 무궁하리라(*, 우크 에스타이 텔로스) – ‘무궁’을 나타내는 ‘텔로스’는 ‘끝’, ‘목표’,’정지’ 등의 뜻을 가지며,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우크’와 함께 사용되어 ‘정지되지 아니하리라’ 또는 ‘끝이 없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 ‘영원’과 ‘무궁’을 연이어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과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시 45:6;단 2:24;7:14;요 12:34;계 11:15).

에이펜 데 마리암 프로스 톤 앙겔론 포스 에스타이 투토 에페이 안드라 우 기노스코

개역개정,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새번역,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 ㉢처녀라는 뜻

우리말성경,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처녀인 제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가톨릭성경,34 마리아가 천사에게, “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영어NIV,34 “How will this be,” Mary asked the angel, “since I am a virgin?”

영어NASB,34 Mary said to the angel, “How can this be, since I am a virgin?”

영어MSG,34 Mary said to the angel, “But how? I’ve never slept with a man.”

영어NRSV,34 Mary said to the angel, “How can this be, since I am a virgin?”

헬라어신약Stephanos,34 ειπεν δε μαριαμ προς τον αγγελον πως εσται τουτο επει ανδρα ου γινωσκω

라틴어Vulgate,34 dixit autem Maria ad angelum quomodo fiet istud quoniam virum non cognosco

히브리어Modern,34 ותאמר מרים אל המלאך איך תהיה זאת ואני אינני ידעת איש׃

성 경: [눅1:3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알지’에 해당하는 ‘기노스코'(*)는 히브리어에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야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4:1;19:8;삿 11:39). 이 동사는 현재 시상으로 사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나는 처녀이니'(since I am a virgin)라고 번역한다. 즉, 과거에나 지금 이 순간에나 아무 남자도 알지 못한 처녀임을 말해 준다(Liefeld). 그러나 이 구절을 놓고 로마 카톨릭이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로서 지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에겐 육친(肉親)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마 12:46;막 3:31, 32).

󰃨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의심하여 표적을 구한 사가랴와는 달리(18절)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취 방법을 묻는다(18절 주석 참조). 천사의 수태 고지(announcement)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었었기에 이제 마리아는 천사의 전언(傳言)을 오히려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앙겔로스 에이펜 아우테 프뉴마 하기온 에펠류세타이 에피 세 카이 뒤나미스 휲시스투 에피스키아세이 소이 디어 카이 토 겐노메논 하기온 클레데세타이 휘오스 데우

개역개정,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새번역,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에게 태어날’

우리말성경,35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실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거룩한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가톨릭성경,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영어NIV,35 The angel answered, “The Holy Spirit will come upon you, and the power of the Most High will overshadow you. So the holy one to be born will be called the Son of God.

영어NASB,35 The angel answered and said to her, ” The Holy Spirit will come upon you, and the power of the Most High will overshadow you; and for that reason the holy Child shall be called the Son of God.

영어MSG,35 The angel answered, The Holy Spirit will come upon you, the power of the Highest hover over you; Therefore, the child you bring to birth will be called Holy, Son of God.

영어NRSV,35 The angel said to her, “The Holy Spirit will come upon you, and the power of the Most High will overshadow you; therefore the child to be born will be holy; he will be called Son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ο αγγελος ειπεν αυτη πνευμα αγιον επελευσεται επι σε και δυναμις υψιστου επισκιασει σοι διο και το γεννωμενον αγιον κληθησεται υιος θεου

라틴어Vulgate,35 et respondens angelus dixit ei Spiritus Sanctus superveniet in te et virtus Altissimi obumbrabit tibi ideoque et quod nascetur sanctum vocabitur Filius Dei

히브리어Modern,35 ויען המלאך ויאמר אליה רוח הקדש תבוא עליך וגבורת עליון תצל עליך על כן גם לקדוש הילוד יקרא בן אלהים׃

성 경: [눅1:3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 누가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데, 1장, 2장에서만도 여섯번 이상을 언급한다(41, 67, 80절;2:25, 26, 27).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는 세분히 동역자,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Lenski, Barclay).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기적이었다.

󰃨 능력(*, 뒤나미스) – 신체적, 지적, 영적 ‘힘’ 혹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신약의 여타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대한 개념 또한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메시야가 밀접한 연관을 나타낸다(시 110:2;사 9:5;미 5:5). 이러한 능력은 일차적으로 왕적 능력이지만 선지자의 능력도 포함된다(17절;24:19;미 3:8;행 7:12). 하지만 그리스도는 바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시라는 점에서 능력있는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이러한 점은 동정녀 잉태의 과정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잉태되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함께하였으며, 당신의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친히 행해 보이셨다(4:14, 36).

󰃨 덮으시리니(*, 에피스키아세이) – ‘그늘을 지우다’, ‘덮다’, ‘역사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피스키아조'(*)의 직설법 미래형이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는 출40:38의 영광의 구름(the shekinah glory)을 암시한다(Robertson). 또한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변화산 관련 기사에서도 구름이 덮힌 사실이 묘사되었다(9:34;마 17:5;막 9:7). 이 기록들에서는 한결같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목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태어날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 구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 하나님의 아들 – 이 칭호는 예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막 1:11;9:7) 들린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의해(마 16:16), 귀신들에 의해(막 5:7) 그리고 로마의 한 백부장에 의해(막 15:39) 불리워졌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부자(父子) 관게를 암시하신 적이 많다(마 11:27;막 13:32). 하지만 예수는 단순히 한 아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독생자이다(요 20:17). 아들과 아버지는 뜻과(요 4:34;6:38;7:28;8:42;13:3) 행위와(요14:10) 영생 수여의 면에 있어(요 10:30) 하나이다(요 5:19, 30). 이런점에서 이 칭호는 메시야적 칭호임과 아울러 성부와 성자께서 그 기원과 성품에 있어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한다(요 3:16;히 1:2).

카이 이두 델리사벹 헤 슁게니스 수 카이 아우테 쉰에일레펜 휘온 엔 게레이 아우테스 카이 후토스 멘 헤크토스 에스틴 아우테 테 칼루메네 스테이라

개역개정,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새번역,36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우리말성경,36 보아라. 네 친척 엘리사벳도 그렇게 많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라 불렸는데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째가 됐다.

가톨릭성경,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영어NIV,36 Even Elizabeth your relative is going to have a child in her old age, and she who was said to be barren is in her sixth month.

영어NASB,36 “And behold, even your relative Elizabeth has also conceived a son in her old age; and she who was called barren is now in her sixth month.

영어MSG,36 “And did you know that your cousin Elizabeth conceived a son, old as she is? Everyone called her barren, and here she is six months’ pregnant!

영어NRSV,36 And now, your relative Elizabeth in her old age has also conceived a son; and this is the sixth month for her who was said to be barren.

헬라어신약Stephanos,36 και ιδου ελισαβετ η συγγενης σου και αυτη συνειληφυια υιον εν γηρα αυτης και ουτος μην εκτος εστιν αυτη τη καλουμενη στειρα

라틴어Vulgate,36 et ecce Elisabeth cognata tua et ipsa concepit filium in senecta sua et hic mensis est sextus illi quae vocatur sterilis

히브리어Modern,36 והנה אלישבע קרובתך אשר קראו לה עקרה גם היא הרתה בן בזקנתה וזה לה החדש הששי׃

성 경: [눅1:3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네 친족 – ‘친족’에 해당하는 ‘슁게네스'(*)는 ‘동족’ 혹은 ‘친척’이란 뜻이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엘리사벳은 레위인출신의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지만(5절)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도 레위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서로 다른 지파 사람들과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출 6:23;삿 17:7).

호티 우크 아뒤나테세이 파라 투 데우 판 레마

개역개정,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새번역,37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우리말성경,37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다.”

가톨릭성경,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영어NIV,37 For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

영어NASB,37 “For nothing will be impossible with God.”

영어MSG,37 Nothing, you see, is impossible with God.”

영어NRSV,37 For nothing will be impossible with God.”

헬라어신약Stephanos,37 οτι ουκ αδυνατησει παρα τω θεω παν ρημα

라틴어Vulgate,37 quia non erit inpossibile apud Deum omne verbum

히브리어Modern,37 כי לא יפלא מאלהים כל דבר׃

성 경: [눅1:3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없느니라 –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는 ‘생생한 목소리로 말해진 것’, ‘말씀’, ‘진슬’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동의어인 ‘로고스'(*)에 비해 ‘계속적인’ 의미와 단일 개념을 강조한다. 한편 본절은 창 18:14과 마 19:26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천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된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에이펜 데 마리암 이두 헤 둘레 퀴리우 게노이토 모이 카타 토 레마 수 카이 아펠덴 앞 아우테스 호 앙겔로스

개역개정,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새번역,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우리말성경,38 그러자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마리아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가톨릭성경,38 마리아가 말하였다.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영어NIV,38 “I am the Lord’s servant,” Mary answered. “May it be to me as you have said.” Then the angel left her.

영어NASB,38 And Mary said, “Behold, the bondslave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And the angel departed from her.

영어MSG,38 And Mary said, Yes, I see it all now: I’m the Lord’s maid, ready to serve. Let it be with me just as you say. Then the angel left her.

영어NRSV,38 Then Mary said, “Here am I, the servant of the Lord; let it be with me according to your word.” Then the angel departed from her.

헬라어신약Stephanos,38 ειπεν δε μαριαμ ιδου η δουλη κυριου γενοιτο μοι κατα το ρημα σου και απηλθεν απ αυτης ο αγγελος

라틴어Vulgate,38 dixit autem Maria ecce ancilla Domini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et discessit ab illa angelus

히브리어Modern,38 ותאמר מרים הנני שפחת יהוה יהי לי כדברך ויצא מאתה המלאך׃

성 경: [눅1:3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주의 계집종 – ‘계집종’을 뜻하는 헬라어 ‘둘레'(*)는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의 단수 여성형이다. 이 표현은 자식을 간구하던 한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삼상 1:11).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갖 비난(非難)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삼상 3:18)나 다윗(삼하 7:25)의 전례를 연상시킨다(이상근).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이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世人)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37절)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아나스타사 데 마리암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타우타이스 에포류데 에이스 텐 오레이넨 메타 스푸데스 에이스 폴린 유다

개역개정,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새번역,39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가서,

우리말성경,39 그 무렵 마리아가 일어나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마을로 서둘러 갔습니다.

가톨릭성경,39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영어NIV,39 At that time Mary got ready and hurried to a town in the hill country of Judea,

영어NASB,39 Now at this time Mary arose and went in a hurry to the hill country, to a city of Judah,

영어MSG,39 Mary didn’t waste a minute. She got up and traveled to a town in Judah in the hill country,

영어NRSV,39 In those days Mary set out and went with haste to a Judean town in the hill country,

헬라어신약Stephanos,39 αναστασα δε μαριαμ εν ταις ημεραις ταυταις επορευθη εις την ορεινην μετα σπουδης εις πολιν ιουδα

라틴어Vulgate,39 exsurgens autem Maria in diebus illis abiit in montana cum festinatione in civitatem Iuda

히브리어Modern,39 ותקם מרים בימים ההם ותמהר ללכת ההרה אל עיר יהודה׃

성 경: [눅1:3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마리아가…빨리 – 본절에 이르러 엘리사벳과 마리아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결합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요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와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의가 집중된다(43절). 여행길이 얼마나 걸렸는지, 어떻게 여행했는지, 누구와 함께 찾아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그녀는 엘리사벳을 만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여행길을 재촉해 ‘빨리’ 갔다고 전한다. 아마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도 이적적 은혜에 의해 수태되었다고하는 소식을 듣고 그 기쁨과 놀라움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전에 마 1:18-25의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 산중에(*, 오레이넨) – 이 단어는 해안에 접해 있는 유대 산지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팔레스틴을 해안 지대, 평원 지대, 계곡 지대 그리고 고원 지대로 구분할 때, 사가랴의 집은 이 고원 지대에 위치했던 것 같다(이 상근).

카이 에이셀덴 에이스 톤 오이콘 자카리우 카이 에스파사토 텐 엘리사벹

개역개정,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새번역,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우리말성경,40 그리고 그녀는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가톨릭성경,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영어NIV,40 where she entered Zechariah’s home and greeted Elizabeth.

영어NASB,40 and entered the house of Zacharias and greeted Elizabeth.

영어MSG,40 straight to Zachariah’s house, and greeted Elizabeth.

영어NRSV,40 where she entered the house of Zechariah and greeted Elizabeth.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εισηλθεν εις τον οικον ζαχαριου και ησπασατο την ελισαβετ

라틴어Vulgate,40 et intravit in domum Zacchariae et salutavit Elisabeth

히브리어Modern,40 ותבא בית זכריה ותברך את אלישבע׃

성 경: [눅1:4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문안하니 – ‘에스파사토'(*)의 기본적 의미는 ‘껴안다’인데, 여기서 파생된 의미가 ‘…을 좋아하다’, ‘…에게 경의를 표하다’, ‘…를 환영하다’ 등이다. 즉 이 인사는 포옹과 문안을 포함하는 매우 열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H. Windisch, TDNT., I, 496-502, Lenski).

카이 에게네토 호스 에쿠센 톤 아스파스몬 테스 마리아스 헤 엘리사벹 에스키르테센 토 브레포스 엔 테 코일리아 아우테스 카이 에플레스데 프뉴마토스 하기우 헤 엘리사벹

개역개정,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새번역,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에, 아이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우리말성경,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받을 때 뱃속의 아기가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가톨릭성경,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영어NIV,41 When Elizabeth heard Mary’s greeting, the baby leaped in her womb, and Elizabeth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영어NASB,41 When Elizabeth heard Mary’s greeting, the baby leaped in her womb; and Elizabeth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영어MSG,41 When Elizabeth heard Mary’s greeting, the baby in her womb leaped. She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영어NRSV,41 When Elizabeth heard Mary’s greeting, the child leaped in her womb. And Elizabeth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41 και εγενετο ως ηκουσεν η ελισαβετ τον ασπασμον της μαριας εσκιρτησεν το βρεφος εν τη κοιλια αυτης και επλησθη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η ελισαβετ

라틴어Vulgate,41 et factum est ut audivit salutationem Mariae Elisabeth exultavit infans in utero eius et repleta est Spiritu Sancto Elisabeth

히브리어Modern,41 ויהי כשמע אלישבע את ברכת מרים וירקד הילד במעיה ותמלא אלישבע רוח הקדש׃

성 경: [눅1:4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아이가…뛰노는지라 – 임선 6개월에 복중(腹中)의 아이가 뛰노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적 현상이다(창 25:22). 자연적인 것 같은 현상을 특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까닭은 이 순간의 태동(胎動)이 다른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것을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이 복중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방문을 기뻐 뛰놀며(44절)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포스'(*)는 이 구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태아(胎兒)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15에서는 예수로부터 영적 축복을 받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이 그의 모친 엘리사벳에게도 역사해 그녀의 마음에 놀라움과 감사, 사랑을 가득 채워주었다. 엘리사벳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예언을 통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예언의 영은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난 바이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그 인사를 들은 엘리사벳, 복중의 태아, 모두가 성령 안에 있었다(15절 주석 참조)

카이 아네포네센 크라우게 메갈레 카이 에이펜 율로게메네 쉬 엔 귀나잌신 카이 율로게메노스 호 카르포스 테스 코일라스 수

개역개정,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새번역,42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고, 그대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말성경,42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중에 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도 복을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42 큰 소리로 외쳤다. “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영어NIV,42 In a loud voice she exclaimed: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child you will bear!

영어NASB,42 And she cried out with a loud voice and said,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fruit of your womb!

영어MSG,42 and sang out exuberantly, You’re so blessed among women, and the babe in your womb, also blessed!

영어NRSV,42 and exclaimed with a loud cry,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fruit of your womb.

헬라어신약Stephanos,42 και ανεφωνησεν φωνη μεγαλη και ειπεν ευλογημενη συ εν γυναιξιν και ευλογημενος ο καρπος της κοιλιας σου

라틴어Vulgate,42 et exclamavit voce magna et dixit benedicta tu inter mulieres et benedictus fructus ventris tui

히브리어Modern,42 ותקרא בקול גדול ותאמר ברוכה את בנשים וברוך פרי בטנך׃

성 경: [눅1:4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 오랜 산중생활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던 중 마리아를 만난 데서 온 기쁨,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복중의 아이가 뛰는 사실에 대한 감동 그리고 성령의 계시 등에 의한 복합적 감정의 표시로서 탄성을 발했을 것이다. 물론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마리아가 찾아와 인사를 하자 그 순간 계시에 의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Lenski).

󰃨 여자 중에…복이 있도다 –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 성령의 계시에 의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 본절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아람어적 표현으로서(삿 5:24;아 1:8) 마리아가 세상의 모든 여자 중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자임을 가리킨다. 물론 마리아의 축복은 그녀의 복중에 든 아기 곧 만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야 때문이지 마리아 자신의 특별한 장점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카톨릭에서 마리아를 성모로서 숭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카이 포덴 모이 투토 히나 엘데 헤 메테르 투 퀴리우 무 프로스 에메

개역개정,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새번역,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말성경,43 내 주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가톨릭성경,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영어NIV,43 But why am I so favored, that the mother of my Lord should come to me?

영어NASB,43 “And how has it happened to me, that the mother of my Lord would come to me?

영어MSG,43 And why am I so blessed that the mother of my Lord visits me?

영어NRSV,43 And why has this happened to me, that the mother of my Lord comes to me?

헬라어신약Stephanos,43 και ποθεν μοι τουτο ινα ελθη η μητηρ του κυριου μου προς με

라틴어Vulgate,43 et unde hoc mihi ut veniat mater Domini mei ad me

히브리어Modern,43 ומאין לי זאת אשר אם אדני באה אלי׃

성 경: [눅1:4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내 주의 모친 –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 라고 한 곳은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신성(Deity)을 인성(人性)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예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이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리아는 메시야요 주이신 예수의 어머니였지, 하나님의 어머니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다. 한편, 본서에는 ‘주'(Lord)라는 명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공관복음에 이 명칭이 166번 나오는데 그 중 95회가 누가복음에서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기사를 보면 이곳 외에도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주’로 불리워졌다(76절 ;2:11). 여기서 이 말은 유대인들이 대망해 오던 바로 그 메시야를 지칭한다.

󰃨 내게…어찌 된 일인고 – 엘리사벳의 이 말과, 후에 세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신 예수께 한 말,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는 맥을 같이한다. 엘리사벳의 이 겸손함이 예수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세례 요한의 겸손으로 이어진다.

이두 가르 호스 에게네토 헤 포네 투 아스파스무 수 에이스 타 오타 무 에스키르테센 엔 아갈리아세이 토 브레포스 엔 테 코일리아 무

개역개정,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새번역,44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우리말성경,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릴 때 내 뱃속에서 아기가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가톨릭성경,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영어NIV,44 As soon as the sound of your greeting reached my ears, the baby in my womb leaped for joy.

영어NASB,44 “For behold, when the sound of your greeting reached my ears, the baby leaped in my womb for joy.

영어MSG,44 The moment the sound of your greeting entered my ears, The babe in my womb skipped like a lamb for sheer joy.

영어NRSV,44 For as soon as I heard the sound of your greeting, the child in my womb leaped for joy.

헬라어신약Stephanos,44 ιδου γαρ ως εγενετο η φωνη του ασπασμου σου εις τα ωτα μου εσκιρτησεν εν αγαλλιασει το βρεφος εν τη κοιλια μου

라틴어Vulgate,44 ecce enim ut facta est vox salutationis tuae in auribus meis exultavit in gaudio infans in utero meo

히브리어Modern,44 כי קול ברכתך בא באזני והנה רקד בשמחה הילד במעי׃

성 경: [눅1:4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네 문안하는 소리가…뛰놀았도다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서두에는 ‘이유’를 설명하는 헬라어 ‘가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엘리사벳 자신에게 임했다. 그리고 그 계시를 통해 마리아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복중의 태아도 기쁨으로 뛰어놀았다. 한편 자신에게 있었던 그 비밀한 일을 엘리사벳이 알고 반응하며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이 낳을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엘리사벳의 복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자신의 아이에게 경배하자 마리아는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 마카리아 헤 피스튜사사 호티 에스타이 텔레이오시스 토이스 렐랄레메노이스 아우테 파라 퀴리우

개역개정,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새번역,45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우리말성경,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 이루어질 것을 믿은 여인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영어NIV,45 Blessed is she who has believed that what the Lord has said to her will be accomplished!”

영어NASB,45 “And blessed is she who believed that there would be a fulfillment of what had been spoken to her by the Lord.”

영어MSG,45 Blessed woman, who believed what God said, believed every word would come true!

영어NRSV,45 And blessed is she who believed that there would be a fulfillment of what was spoken to her by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45 και μακαρια η πιστευσασα οτι εσται τελειωσις τοις λελαλημενοις αυτη παρα κυριου

라틴어Vulgate,45 et beata quae credidit quoniam perficientur ea quae dicta sunt ei a Domino

히브리어Modern,45 ואשרי המאמינה כי המלא תמלא אשר דבר לה מאת יהוה׃

성 경: [눅1:4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믿은 – ‘피스튜사사'(*)는 원형이 ‘피스듀오'(*)로 단순 과거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가 어느 한 순간만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서 신앙을 지켜온 여인임을 알 수 있다.

󰃨 주께서…이루리라 – 이 문장에는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문두에 있는 ‘호티’이다. 이것은 ‘…하는 것'(that) 또는 ‘…이기 때문에'(for because)라는 뜻이며 이 후자의 뜻으로 옮기면 더욱 생생한 의미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은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믿은 여인 곧 마리아가 복되다는 의미이다.

카이 에이펜 마리암

개역개정,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새번역,46 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 ㉤다른 고대 역본들에는 ‘엘리사벳이’

우리말성경,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가톨릭성경,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영어NIV,46 And Mary said: “My soul glorifies the Lord

영어NASB,46 And Mary said: “My soul exalts the Lord,

영어MSG,46 And Mary said, I’m bursting with God-news;

영어NRSV,46 And Mary said, “My soul magnifies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46 και ειπεν μαριαμ μεγαλυνει η ψυχη μου τον κυριον

라틴어Vulgate,46 et ait Maria magnificat anima mea Dominum

히브리어Modern,46 ותאמר מרים רוממה נפשי את יהוה׃

성 경: [눅1:4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마리아가 가로되 – 46-55절까지는 ‘마리아의 찬가’라고 이미 알려져 있다. 이는 ‘매그니피캣'(Magnificat)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역 성경에서 이 시의 앞 부분 첫단어로서 이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삼상 2:1-10의 한나의 기도를 떠 올리게 한다. 플루머(Plummer)는 이 시를 한나의 시와 그 외에 다른 12개의 구약성경 구절들과 서로 비교하고 있다. 이 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사항은 해당 강해 부분을 참조하라.

󰃨 찬양하며(*, 메갈뤼네이) – ‘위대하게 만들다’,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원문에서는 문장 제일 서두에 놓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 노래에 대해 본문 비평학상이나 문맥상의 이유로 마리아가 부른 노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러는 라틴어 사본의 이 부분이 엘리사벳의 노래로 되어 있어 이를 엘리사벳의 노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삼상 2장에 나타난 한나의 상황과 자식이 없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하던 엘리사벳의 상황이 유사하며, 노래를 지은 사람의 처지와 48절의 내용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엘리사벳이 저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다. 한나와 엘리사벳의 처한 상황이 서로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8절의 말씀은 마리아에게도 역시 적합한 말씀이다.

메갈뤼네이 헤 프쉬케 무 톤 퀴리온 카이 에갈리아센 토 프뉴마 무 에피 토 데오 토 소테리 무

개역개정,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새번역,47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우리말성경,47 내 영이 내 구주 하나님을 기뻐함은

가톨릭성경,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영어NIV,47 an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영어NASB,47 And my spirit has rejoiced in God my Savior.

영어MSG,47 I’m dancing the song of my Savior God.

영어NRSV,47 an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헬라어신약Stephanos,47 και ηγαλλιασεν το πνευμα μου επι τω θεω τω σωτηρι μου

라틴어Vulgate,47 et exultavit spiritus meus in Deo salutari meo

히브리어Modern,47 ותגל רוחי באלהי ישעי׃

성 경: [눅1:4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내 마음(*, 토프뉴마 무)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는 46절의 ‘프쉬케'(영혼)와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공히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 생의 중심부를 말하며 때로는 ‘영혼’ 혹은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굳이 그 의미를 구분하자면 ‘프쉬케’가 개인의 생리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된 반면에 (벧전 2:11), ‘프뉴마’는 프쉬케보다 더 고등한 면을 나타냈 을 때 사용되었다(롬 8:16). 여기서는 이 두 용어가 별다른 의미의 구별없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바, 이는 반복을 통해 강조를 꾀하는 히브리식 관용법에 해당한다.

󰃨 하나님 내 구주 –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자신의 노래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고백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에 비교될 수 있다(합 3:18).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던 그 순간부터 원죄(Original Sin)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듯이 마리아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일 따름이다.

호티 에페블렢센 에피 텐 타페이노신 테스 둘레스 아우투 이두 가르 아포 투 뉜 마카리우신 메 파사이 하이 게네아이

개역개정,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새번역,48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48 그분이 자신의 여종의 비천을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복 있다 할 것이니

가톨릭성경,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영어NIV,48 for he has been mindful of the humble state of his servant. From now on all generations will call me blessed,

영어NASB,48 “For He has had regard for the humble state of His bondslave; For behold, from this time on all generations will count me blessed.

영어MSG,48 God took one good look at me, and look what happened– I’m the most fortunate woman on earth! What God has done for me will never be forgotten,

영어NRSV,48 for he has looked with favor on the lowliness of his servant. Surely, from now on all generations will call me blessed;

헬라어신약Stephanos,48 οτι επεβλεψεν επι την ταπεινωσιν της δουλης αυτου ιδου γαρ απο του νυν μακαριουσιν με πασαι αι γενεαι

라틴어Vulgate,48 quia respexit humilitatem ancillae suae ecce enim ex hoc beatam me dicent omnes generationes

히브리어Modern,48 ]94-84[ אשר ראה בעני אמתו כי הנה מעתה כל הדרות יאשרוני כי גדלות עשה לי שדי וקדוש שמו׃

성 경: [눅1:4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그 계집종의…돌아보셨음이라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한 후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여기 ‘계집종의 비천함’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목수의 아내라는 낮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인식과 겸손에서 나온 고백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을 만한 별다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데 대한 감격과 겸손을 표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심령이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것이다(사 57:15).

󰃨 보라 이제…일컬으리로다 –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하여 ‘복이 있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다(42절). 그리고 후에도 한 여인에게서 ‘복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27). 또한 마리아는 성도들을 통해 대대로 복있는 여인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는 한 그녀의 영광은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이 구절의 의미가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리아가 비천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소원을 간구하고 축복을 부탁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호티 에포이에센 모이 메갈라 호 뒤나토스 카이 하기온 토 오노마 아우투

개역개정,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새번역,49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우리말성경,49 이는 전능하신 그분이 내게 위대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시며

가톨릭성경,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영어NIV,49 for the Mighty One has done great things for me–holy is his name.

영어NASB,49 “For the Mighty One has done great things for me; And holy is His name.

영어MSG,49 the God whose very name is holy, set apart from all others.

영어NRSV,49 for the Mighty One has done great things for me, and holy is his name.

헬라어신약Stephanos,49 οτι εποιησεν μοι μεγαλεια ο δυνατος και αγιον το ονομ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49 quia fecit mihi magna qui potens est et sanctum nomen eius

히브리어Modern,49 ]94-84[׃

성 경: [눅1:4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능하신 이(*, 호 뒤나토스) – ‘능하신 이’는 구약성경에서 ‘엘 쇄다이'(*)로 표현되어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창 17:1;욥 5;17;8:3등). 야훼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도는 곤궁에 처할 때에 도움을 얻기 위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신 8:17, 18;시 46:1;86:16;사 41:10). 하나님의 능력은 변덕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일관된 당신의 뜻과 공의로운 계획에 따라 행사되기 때문이다(사 5:16).

󰃨 거룩하시며(*, 하기온) – 구약성경에서 거룩이란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되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그분의 초월성을 뜻하며(출 3:4, 5) 또한 윤리적으로 무흠하신 성품을 뜻한다(레 11:44;벧전 1:16). 그리고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의식상의 존엄성과 관련되어 쓰인다(출 29:1). 특히 신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뜻인 혤라어 ‘하기오스’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轉嫁)받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뜻하거나(고전 1:30)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들의 윤리적 특성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롬 6:22;고후 7:1).

카이 토 엘레오스 아우투 에이스 게네아스 카이 게네아스 토이스 포부메노이스 아우톤

개역개정,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새번역,50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50 그분의 자비는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가톨릭성경,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영어NIV,50 His mercy extends to those who fear him,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영어NASB,50 “AND HIS MERCY IS UPON GENERATION AFTER GENERATION TOWARD THOSE WHO FEAR HIM.

영어MSG,50 His mercy flows in wave after wave on those who are in awe before him.

영어NRSV,50 His mercy is for those who fear him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50 και το ελεος αυτου εις γενεας γενεων τοις φοβουμενοι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50 et misericordia eius in progenies et progenies timentibus eum

히브리어Modern,50 וחסדו לדור דורים על יראיו׃

에포이에센 크라토스 엔 브라키오니 아우투 디에스코르피센 휘페레파누스 디아노이아 카르디아스 아우톤

개역개정,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새번역,51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우리말성경,51 그분은 자신의 팔로 엄청난 일을 행하시고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가톨릭성경,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영어NIV,51 He has performed mighty deeds with his arm; he has scattered those who are proud in their inmost thoughts.

영어NASB,51 “He has done mighty deeds with His arm; He has scattered those who were proud in the thoughts of their heart.

영어MSG,51 He bared his arm and showed his strength, scattered the bluffing braggarts.

영어NRSV,51 He has shown strength with his arm; he has scattered the proud in the thoughts of their hearts.

헬라어신약Stephanos,51 εποιησεν κρατος εν βραχιονι αυτου διεσκορπισεν υπερηφανους διανοια καρδια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51 fecit potentiam in brachio suo dispersit superbos mente cordis sui

히브리어Modern,51 גבורות עשה בזרעו פזר גאים במזמות לבבם׃

성 경: [눅1:5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토스'(*)는 ‘힘’, ‘권능’, 또는 ‘권능의 표현’, ‘전능한 행위’등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인간의 힘(신8:17), 활의힘(시 76:3), 심지어 바다의 힘(시 89:9)에까지도 관련되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시 62:11;엡 1:19, 20;6:10;골 1:11;딤전 6:16)에 사용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능을 강조한다. 한편 ‘그의 팔’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신 26:8;시 89:13;118:15). 여기서 마리아는 과거에 하나님이 교만하게 당신을 반대했던 권세가들을 물리치시며(출 15:1, 22;단 4:24-27) 겸손한 자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셨던 사실(창 41:16;단 1:8-21)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과 무관하게 천상(天上)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며, 또한 모든 불의하고 왜곡된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로 잡히게 되리라는 사상이 이 노래 속에 강렬하게 함축되어 있다.

󰃨 흩으셨고 – ‘디에스코르피센’의 원형 ‘디아스코르피조'(*)는 ‘흩다’, ‘낭비하다’, ‘탕진하다’의 뜻이다. 구약에서 이 말은 원수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22:15).

카데일렌 뒤나스타스 아포 드로논 카이 휲소센 타페이누스

개역개정,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새번역,52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우리말성경,52 그분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여 주셨으며

가톨릭성경,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영어NIV,52 He has brought down rulers from their thrones but has lifted up the humble.

영어NASB,52 “He has brought down rulers from their thrones, And has exalted those who were humble.

영어MSG,52 He knocked tyrants off their high horses, pulled victims out of the mud.

영어NRSV,52 He has brought down the powerful from their thrones, and lifted up the lowly;

헬라어신약Stephanos,52 καθειλεν δυναστας απο θρονων και υψωσεν ταπεινους

라틴어Vulgate,52 deposuit potentes de sede et exaltavit humiles

히브리어Modern,52 הרס נדיבים מכסאותו וירם שפלים׃

성 경: [눅1:5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권세 있는 자를…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원어상 ‘권세 있는 자’는 ‘주권자’, ‘통치자’를 뜻하며 ‘위'(位)는 ‘왕좌’, ‘보좌’를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압제자들을 그들의 보좌에서 쫓아내셨으며’라고 옮겨질 수 있다. 마리아는 본절과 다음절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징계하신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바로(출5:1-11), 고라와 그의 동료(민 16장), 하만(에6:6-14), 느부갓네살(단 4:24-37), 벧사살(단 5장), 아마샤(왕하 14:1) 그리고 웃시야(대하 26:16)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성경은 권세나 부(부) 자체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권력과 부의 행사를 말한다. 교만하고 강한 자는 낮아지고 비천한

누가복음 강해

누가복음 강해 김효성 목사 2018년 2월 12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누가복음 서론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5장: 죄인을 부르심 6장: 가르치심 7장: 기적들을 행하심 8장: 기적들을 행하심 9장: 제자의 길 10장: 70인 전도자들을 보내심 11장: 기도를 가르쳐 주심 12장: 절대적 신앙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서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어휘, 문체 등의 특징 및 동일한 사람에게 책을 바친 것 등은 두 책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사도행전의 ‘우리’라는 부분들(행 16:10-17; 20:5-21:18; 27:1-28:16)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전도여행의 동반자이었음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코이네 헬라어에 익숙하였고 어휘가 풍부했다. 1) 이 두 책에는 의학적 용어와 질병이나 병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나타난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이었던 의사 누가라는 사실을 지지한다. 초대교회의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에는 “바울이 그의 전도 여행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의사 누가가 자기의 이름으로 세 번째 복음서를 저술하였다”고 써 있다.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바울의 동반자인 누가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하나의 책으로 기록했다” 2) 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와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이 책을 누가의 저작으로 돌렸다. 누가는 헬라인인 듯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누가를 유대인과 구별하여 언급하는 것 같다(4:10-11, 14). 그러나 그는 구전 자료들과 기록된 자료들을(1:1-4) 성령의 인도 아래 사용했을 것이며 사도들과 기타 증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많은 것을 듣고 확인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을 61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누가복음은 그보다 일찍 아마 주후 58년경 즉 바울이 가이사랴에 투옥되었을 때 즈음에 사도 바울 곁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세 번째 책이다. 복음서들의 목적은,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요 이를 통해 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20:30-31). 누가는 이 책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데오빌로의 지식을 확실케 하기 위함이라고 썼다(눅 1:1-4). 그리스도에 관한 참 지식은 참 믿음의 요소이다. 누가복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책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 가장 자세히 증거했다. 둘째로, 누가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과 교훈이 나온다. 사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기도하심에 대해 15번 나오는데, 그 중 11번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또 누가복음 11,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비유와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누가복음은 찬양과 감사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넷째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동정적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장), 탕자의 비유(15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3) 다섯째로, 누가복음은 여인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여섯째로, 누가복음은 복음서들 중에 가장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일곱째로, 누가복음에는 세계주의적 안목도 나타난다.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묘사되었고(2:32), 그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올라갔으며(3:38), 유대인들을 제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모범으로 제시되었다(10:25-37). 4) 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 . . . 누가복음의 인간 저자는 누가이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며 의사이었고(골 4:14; 딤후 4:11) 사도행전의 저자이었다. 그는 본문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한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NASB, BDAG) 이라는 원어( 페플레로포레메논 프라그마톤 )는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 (KJV) 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그들 중에서 이루어진 사실들이며 초대교회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이 지어낸 말들에 근거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들과 사건들에 근거한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사역자들이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 중에는 그의 말씀들과 행적들에 관해 글들을 남긴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자료들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과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참고함으로써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며 그것들을 확증할 수 있었다. 누가는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대략적인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당시 어떤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자임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본서의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본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본서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얻고 확신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자. 5-25절,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 . . .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했던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도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없지만(롬 3:11),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의롭게 산 의인들은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완전히 지키지는 못했어도, 짐승 제사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들을 힘써 지킨 자들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그들을 주목하셨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이런 부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욱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어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 . .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때에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였는데,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분향단 우편에 섰다.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자 천사가 말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말은 사가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노아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 생활로 믿음의 단련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본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에게서 잉태되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에 대해 네 가지 내용을 전하였다. 첫째,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둘째,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그는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넷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당신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오늘날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귀히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 . . . 사가랴가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말하자, 천사는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 ( 카타 티 )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이상(異像) 즉 환상을 본 것을 알았다. 그는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었다. 그 직무의 날이 다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 . . .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말했다.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여인이 자녀를 잉태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잉태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그들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자녀를 잉태케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1-25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확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증인들의 증언들과 그 글들인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확실함을 깨닫고 그 모든 진리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의롭게 살자.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 실제로 의롭게 살자. 셋째로, 의인에게도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의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부족이었다. 의인에게도 부족과 고민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그의 하시는 일들을 기다리자. 넷째로, 우리는 기도 응답을 믿자. 사가랴의 기도는 간절히 또 아마 오랫동안 올려졌던 것 같은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 되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힘써 기도하자.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이었지만, 벙어리가 되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잘 이해하고 의심하지 말고 다 믿고 또 힘써 행하자. 26-38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 . . .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 후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나타났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이었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일이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 언급한 것(2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되셨음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34절) 숫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순결한 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1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 . . . 천사는 마리아에게 들어가 말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 5) ”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자, 천사는 말하였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생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 . . . 천사는 또 말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는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가 어떤 자이며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자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리울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 . .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 포스 )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다. 잉태치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잉태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성탄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 (KJV, NASB, NIV) 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 . . .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 헤 둘레 퀴리우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마리아의 말은 그의 겸손과 그의 믿음과 순종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아름다웠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39-56절,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39-45절]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 . . .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있는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팔레스틴의 남쪽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잉태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그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도,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가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가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복되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여인이 훌륭한 아들을 둔 것도 복이지만,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46-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 . .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찬송하였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그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말씀하셨듯이, 그의 긍휼을 기억하셔서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낮고 비천함을 고백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종임을 고백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의 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하며 그의 초월성을 고백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의 성결성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그의 초월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언급하며 그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는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긍휼을 얻는 길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셨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그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마리아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졌는지!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지식이며(신 32:39),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가졌던 지식과 믿음이었다(삼상 2:6-7).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그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석 달은 임신한 여자가 입덧을 할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26-5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처녀이었던 마리아(27절) 사내를 알지 못했던(34절)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35절) 하나님의 능력으로(37절)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 그러므로 천사 가브리엘이 증거한 바와 같이, 마리아가 잉태한 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며(32절) 이러므로 마리아에게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다(35절).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였다(41절). 또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실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신 그는 메시아이시다. 천사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했다(31절).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죄인들을 그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천사는 또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며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말한다(33절).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예레미야 23:5-6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구주이시다. 죄인은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38절)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헌신하였다(38절, 45절). 그는 온갖 오해와 비난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과 긍휼과 공의를 고백하며 주께 헌신하자.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57-66절,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할례받음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 . . . 엘리사벳은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고 이웃과 친족들은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다. 8일이 되자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였는데, 그 모친이 대답하기를,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고 하고 그 부친에게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니 모두 다 기이히 여겼다. 이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 근처에 사는 자들은 다 두려워했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며 듣는 사람들은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고 말했다.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요한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으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중에서 더 견고해진다. 67-80절, 사가랴의 찬송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 . . .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입이 열린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贖良)하시며[구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참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속량(贖良)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이다.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킨다(렘 23:5-6; 겔 34:23-24; 호 3:5; 사 11:10 등). 뿔은 능력의 상징이다. ‘구원의 뿔’이란 ‘능력의 구주’라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가? 사가랴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이며, 또 사탄의 도구가 된 악의 세력들과 세상 권세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앗수르, 바벨론 등 이웃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었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구원얻을 영혼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맹세로 그의 긍휼을 나타내셨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 될 것이다. 또 구원받아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 . . .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아들 요한의 역할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의 역할은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선지자 즉 대언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죄를 각성시키고 그 죄를 버리게 하는 것, 즉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고(마 3:2)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눅 3:3). 사가랴는 요한이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메시아의 사역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 스플랑크나 엘레우스 ) [긍휼의 심정]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가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을 수 없다. 에베소서 1:7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가랴는 또 말한다. “이로써 돋는 해( 아나톨레 )[해의 돋음]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돋는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슬픔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킬 것이다. 구주 예수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지식과 의, 기쁨과 생명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결과는 평강이다. 구원은 평강의 길이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 . . . 아이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선포하는 설교자가 되려면 심령의 강건함이 필요하다.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속화된 제도적 종교 생활보다 많은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 훈련된 종들이, 배교되고 타협하는 교회들의 풍조에 비교적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더 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뿔, 곧 구주를 주셨음을 찬송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원수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모든 죄와 불행으로부터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죄사함의 구원이다. 죄사함은 구원의 방법이며 구원 자체이다. 죄가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마 20:28).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구원의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義)도, 조건도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이 아니고서는 세상에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 구원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돋는 해로 오셨다.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이며,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다. 이제 구원받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길 것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며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은 자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구원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자가 되자.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지옥]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의 때문에] 영생이니라.” 2장: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1-7절, 예수님의 탄생 [1-5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 . .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온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때이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역사상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물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다. 총독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다. 가이사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던 것 같다. 6)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약혼]한 [아내](전통본문) 7)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마 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마 1:20, 24)라고 표현하였다. 마리아는 임신한 지 여러 달이었다. 그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마 1:18; 눅 1:35).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 . . .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었을 때(마 2:1, 8, 16)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 )는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는 말로 마리아가 예수님 출산 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의 남동생들과 또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를 부당하게 높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평생 죄가 없었고 승천하였고 죄인들의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교리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은 심히 비천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구주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 탄생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탄생하신 것이었다. 여기에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 1:14)의 깊은 뜻이 있었다. 8-14절, 천사의 증거와 찬송 [8-10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 . . .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 날 밤, 그 지경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은 주의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천사는 역사상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 날 밤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은 그 천사를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연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그 천사는 목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였다. [11-12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 . . . 천사는 말하였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구주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불행과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표까지 주셔서 그 소식을 믿게 하셨다. 기독교는 많은 표적들로 확증된 진리이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 . . . 홀연히 하늘의 천사들의 큰 무리가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전통본문).” 8)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나 ‘낙원’과 동일하다(고후 12:2-4). 그 곳은 태양계와 은하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구주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의 원인과 그 결과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평안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참된 평안을 얻는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

15-20절, 목자들의 확인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 . .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그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들은 주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은 이 아기에 대해 들은 것을 다 알려주었다. 듣는 자들은 다 목자들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겼으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는 이와 같이 찬송이 있었다.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고 목자들의 찬송도 있었다.

1-20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동네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약속하셨었다. 본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동네로 호적하러 올라갔다고 말하며(5절) 또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다윗의 동네에서 구주가 나셨다고 말하였다(11절)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강보로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2절, “너희는 가서 강보에 사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16절, “[목자들은]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께서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짐승의 먹이통에 누이셨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것도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탄생 때부터 그러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했다(빌 2:5-8).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도 바울은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낮아지심이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모든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주의 천사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하였다(10-11절). 구주께서는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복된 일은 없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또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하였다(갈 1:4). 또 그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는 일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로다”라고 말하였다(14절).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를 통해 주신 구원의 결과는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안이 없는 세상에 평안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죄인들은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다(롬 3:16-17). 그런데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11:28). 또 그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요 14:27). 그러므로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살후 3:16). 우리를 죄와 불행과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자. 또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그 분만 주실 수 있는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자. 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감사하며 다른 이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21절, 할례를 받으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 . . . 할례할 8일이 되자,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그것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이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또 할례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자이시며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다. 22-24절, 마리아가 결례의 제사를 드림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 . . .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결례(潔禮)의 날이 찼을 때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결례의 날이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 출산 후 7일과 33일, 합하여 40일이 지난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케 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말씀대로 행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산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하였다.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 제물은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우리는 가난해지신 그를 통해 천국의 상속과 하나님 자녀 됨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25-35절,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 .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의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가 있었다. 사람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 우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보내 주시는 참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그리스도이시며 시므온은 그를 보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아기 예수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 . . 그때 시므온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하였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원’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그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요 1:29). 그는 세상 모든 족속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사 42:6; 49:6).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 . . . 시므온은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말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고’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고’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인간은 참으로 심히 죄악되고 악한 존재이다! 36-38절, 여선지자 안나의 감사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 . .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었다. 결혼을 15세쯤 했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당시 아마 106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예루살렘에서](전통본문) 9)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9절, 나사렛으로 돌아가심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 . . .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들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도착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관련하여,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이 생략되어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39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고 보인다. 21-39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주이시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함으로 다 구원을 받자. 또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사함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자.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죄사함받은 사실을 감사하며 이제는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경건한 성도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가치를 두고 살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자. 그는 영광의 천국을 떠나 이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출생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 난해지셨다(고후 8:9). 우리는 그의 겸비하심을 본받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자.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 . . . 본문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 10)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라셨다. 인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이 자라셨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하여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 뿐만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셨다. 아기 예수님의 심령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해지셨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라고 보인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로고스 )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께서는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하셨던 것 같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그에게는 원죄의 죄성과 연약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있는 불만과 저항심 같은 것이 없으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 . . .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3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혹은 조금 자라서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기 때부터 경건 훈련을 받으신 셈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전통본문) 11) 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소년 예수께서는 선생[랍비]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계셨고 듣는 자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지혜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서 엿보였다. 소년 예수께서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은 삼일 후 요셉과 그 모친이 소년 예수를 발견한 것이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고 선생들이 다 소년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47절의 ‘지혜’라는 원어( 쉬네시스 )는 ‘총명’이라는 뜻이며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 소피아 )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며,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48-50절]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 . . 그 부모는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말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아이야’라는 원어( 테크논 )는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보통의 말이다. 또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문(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에는 ‘집’이라는 말( 오이코스 )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 토이스 )만 있다. 생략된 명사는 단수명사인 ‘성전’이나 ‘집’보다 복수명사인 ‘일들’( 에르고이스 )이 더 가능하여 보인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 (KJV) 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소년 예수의 증거이다. 소년 예수께서 12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또 그는 12살 때에 벌써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 그 후 30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그의 사명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神性)의 신비, 즉 그의 인성과 그의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될 수 있으신지의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 . . . 본문은 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니라”고 증거하였다. ‘한가지로’라는 말( 메트 아우톤 )은 ‘그들과 함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그는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보내시며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섬기셨다.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는 원어 12) 는 그가 계속하여 그들에게 순종하셨음을 보인다. 소년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하였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소년 예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오늘 시대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들도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계명을 순종하는 자로 키워야 한다. [52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문은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증거한다.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 지혜가 자라셨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는 영혼의 활동들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자라셨던 것 같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 속에서 자라셨던 것 같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키가 자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그의 몸은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세의 성인이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은 죄 없는 인격, 흠과 결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셨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40-52절의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의 신성에 관해,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는 모친 마리아의 말에 대해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둘째로, 그의 인성에 관하여, 예수님은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하자.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는 신약성경과 특히 사복음서를 통해 그를 믿고 확신하고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본받고 우리 자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자. 우리는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한다. 특히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과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과 실천함을 통해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되기를 기도하자. 또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고 성경말씀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모범대로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어야 한다. 3장: 세례 요한의 사역 1-6절,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 [1-2절]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사역은 명확히 역사적 사실이었다. 본문에는 그들의 활동 시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되어 있다.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는 주후 14년부터 3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15년 되는 해는 주후 28년경일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파송한 유대의 총독이었고(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헤롯 안디바스는 예수님 탄생 때의 왕인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리의 분봉왕(영토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왕)이었다(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그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었고(주전 4년부터 주후 34년까지), 루사니아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주후 약 27년부터 28년까지).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안나스는 그의 장인으로서(요 18:13) 역시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이 증거한 대로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이나 그 이전에 탄생하셨고 주후 28년 초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곧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리시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그것은 영생의 말씀이며,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말씀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지자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비록 그들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도의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될 자는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대의를 파악하고 그 심령이 그 말씀으로 불붙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 곧 광야에서 요한에게 왔다. 광야는 비교적 세속 사회에 때묻거나 물들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조용히 하나님과 많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며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때때로 우리는 광야에서나 조용한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광야는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이 좋지 않은 거친 들판이다. 마태의 증거대로,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나간 것은 아마 당시의 제사장 사회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패된 사회 환경이나 심지어 부패된 교회 환경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3절]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그는 노방 전도 혹은 야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마태의 증거대로(마 3:5-7), 많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회각계각층이 죄악되고 사람의 본성과 삶이 죄악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회개는 죄사함을 얻게 한다.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또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기대할 수 없고 또 회개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명하셨고 사람이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세례’는 회개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물론 세례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의 표시요 고백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믿는 자는 세례받을 수 있고 또 세례받아야 하며 그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 . . 이 일은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와 같았다. 거기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았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것은 왕의 행차시 길을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의 길을 닦아야 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낮추고 불신앙과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깊은 골짜기들을 메우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사람이 자신의 교만과 높은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민에게 전파될 구원의 복음이다.

세례 요한은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서 일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신화적 내용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역사는 그 기초요 그 골격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믿고 확신하자. 기독교의 핵심은 죄사함의 구원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요긴한 진리는 죄가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의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며, 죄사함이 이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곧 죄사함의 구원이다. 모든 사람은 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죄사함은 긍휼하신 하나님 앞에 진심의 회개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치 않고서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과 악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는 자만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7-14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7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 . . .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뱀이 사람을 범죄케 한 후,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그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책망하셨다(마 23:33). 사도 요한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8). 이것은 다 영적인 표현이다. 요한은 또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 엄하고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은 인류 초기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나 후에 소돔 고모라 성의 심판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또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인 한 내용이다.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 . . . 요한은 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했다. 그는 회개하는 겉모습만 가지지 말고 참으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회개’라는 원어( 메타노이아 )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참 회개는 변화된 행위를 동반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불의와 악과 거짓의 삶을 청산하고 의와 선과 진실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참된 회개가 없이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며 우리가 그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큰 해가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 없는 구원의 확신은 오히려 그를 멸망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원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이방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이 주권적 처분에 따른 감당할 수 없는 그의 은혜이었다.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 . . . 요한은 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을 나무에, 하나님의 심판을 그 나무 뿌리에 놓인 도끼에 비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선한 행위들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에데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악인들을 마지막 날 지옥불에 던질 것이다. 지옥은 사탄과 악령들 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10-13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 . . .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은 대답하였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먹을것과 입을 것은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데, 그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참 회개는 구체적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행위의 변화이다. 남을 돌아보며 없는 자와 나누는 것은 회개의 증거이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그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강제로 징수하지] 말라”고 말했다. 세금받는 자들은 나라에서 정한 세금 외에 더 무엇을 징수치 말고 정한 세금만 징수하는 것이 옳고 양심적인 일이다. [14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 . . 군병들도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 그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거짓되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받는 요(料)[봉급]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했다. 군인들이 칼의 힘을 의지하여 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사람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칼의 힘을 악용하지 않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맺을 회개의 열매이다. 이처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공의와 선함과 진실의 행위들이다. 오늘날 정치가나 법조인이나 공무원이나 교육자나 사업가나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직, 선함, 진실이 요구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였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의 도덕적인 삶으로 나타내 보이어야 한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고 회개의 열매이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가 없는 헛된 확신을 다 버리자.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실히 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다. 주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바울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했다(롬 8:13).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했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모든 불의와 사악과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정직과 선함과 진실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고 구원에 합당하게 성실히 달음질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그 구원에 합당하게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 되었는지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15-17절,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 [15절]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 . . .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사 제국과 헬라 제국에 이어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정치적 불만족과 육신적 질병들과 경제적 가난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자요 구주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파하시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육신적 건강까지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모든 사람들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17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 . . .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그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 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자기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한과 장차 오실 분은 그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분은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많은 분이시다. 특히 그것은 기적을 행하심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운동은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그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고후 4:7-12). 둘째로,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이시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세례는 단지 죄씻음을 외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한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실제로 죄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중생(重生)시킨다. ‘성령과 불로’라는 말은 같은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불은 용광로에서 금을 제련하는 데 사용된다. 성령은 죄인을 깨끗케 하신다(고전 6:11; 딛 3:4-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셔서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키’는 타작할 때에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기구이다. 그의 타작마당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는 이 세상의 소유주이시며 또한 심판하실 권한이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자가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는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실 것이다. 알곡은 회개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쭉정이, 즉 회개치 않고 순종치 않은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에 대하여 “거기는 [악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8).

18-20절, 옥에 갇힘 [18-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 . . . 요한은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라는 말은 악인들의 회개치 않는 모습을 잘 나타낸다. 악인들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 요한은 옥에 갇혔고 거기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신적 능력의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잘 도우실 수 있다. 이 능력의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든든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시키신 분,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분이시다. 오늘도 그는 구원하실 자들을 이렇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의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심판자이시다. 알곡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회개하고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르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은 확실히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무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21-22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 [21-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 .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죄인들의 구주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심을 나타내신 것뿐이다. 그것은 청년 예수께서 메시아의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걸음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가 세례 받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 간구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볼 수 있는 형체로 내려오셨다. ‘비둘기같이’라는 말은 성령의 순결하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본체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이시지만, 두 분 간의 인격적 구별은 있다. 이제 예수께서 전도사역을 시작하려 하실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때 하늘로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나타나셨다. 하늘로서 난 소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변화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한번 더 친히 증거하실 것이다(눅 9:35). 성경의 일차적 목적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20:30-31). 23-38절, 예수님의 족보 [23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께서는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셨고 13)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은 실제상의 사실이 아니고 단지 족보상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요셉의 부친은 헬리이었다. [24-27절]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아람](전통본문)요, 14)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주신(눅 1:4) 증거의 책에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내용을 허용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둘 다 정확한 내용임을 믿는다. 그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추측들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족보의 전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의 어떤 부분을, 같은 사람이 다른 두 이름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養子) 제도나, 또 구약에 규정되어 있는 수혼(嫂婚) 제도(신 25:5-6)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여러 주석가들의 15) 추측대로 본장의 족보는 아마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일지도 모른다. 즉 23절의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장인이라는 말이다. 랍비들의 글에 마리아를 ‘헬리의 딸’이라고 부른 곳이 있다고 한다. 16)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킨 것은 그가 구약시대에 또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장차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증거하였고(사 11:1, 10; 렘 23:5, 6; 30:9; 33:15; 겔 34:23; 37:24; 호 3:5), 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예언하였다(창 12:2-3; 22:18). 더욱이, 누가는 메시아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하신 선언에서도 나타나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최초의 메시아 예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인간의 죄의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와 형벌을 대신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선언하신 대로 여인의 후손을 보내셨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또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의 자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신약성도에게 하신 약속들, 즉 예수님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 복된 영원한 생명 등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기뻐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친 음성의 증거 곧 그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무엇을 증거하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때에 이 중요한 증거를 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대해 친히 하신 증거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인류를 위해 보내주셨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귀한 것을, 우리의 외아들을, 아니 우리 자신을 드리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큰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차례이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독특한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분명히 사람이셨다. 그는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이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신비이며 기적 중에 기적이다. 넷째로,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를 보내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4장: 예수님의 전도 사역 시작 1-13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 . . .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셨고 날 수가 다하므로 주리셨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지만, 인간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후에 일하셨다면, 오늘날 성도들과 전도자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과 봉사생활, 특히 전도의 일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며 세상의 모든 죄악의 원인자요 후원자이다. 그는 세상의 거짓된 종교들, 헛된 철학과 사상들, 음란하고 죄악된 유행과 풍조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로 불린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자요(고후 4: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영이다(엡 2:2).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었다. 만일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지셨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구주의 자격이 없으셨을 것이다. 범죄치 않는 의인만 구주의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3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 . . 마귀는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첫 번째 시험은 떡 시험, 즉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먹는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서 기본적 문제이다. 사람은 먹는 것을 위해 일한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 대부분 먹는데 쓴다. 세상에는 아직도 먹는 것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귀는 이 기본적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했다. 마귀의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가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옳은 개념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진 자이시다. 신약성경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전능하신 신성이 있으시다. 또 그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서 몹시 배고프셨기 때문에 기적의 정당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부득이 행해진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그의 신성을 확증하였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록하기를( 케그랍타이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전통본문) 17) ”고 하셨다. 예수께서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권위로가 아니고 기록된 말씀의 권위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문제, 특히 마귀의 시험에 대한 대답이 됨을 잘 증거하셨다. 시편 119:105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됨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귀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이 됨을 증거하였다(엡 6:17).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영적 존재이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으며 행복을 위해 먹지만 여전히 불행하고 결국 늙고 병들고 죽는다. 떡은 몸을 위해 필요하나 영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떡은 사람의 죄 문제, 평안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요 생명이며,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요 죽음이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받자(엡 5:18). 그래야 신앙생활, 봉사생활을 잘 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자. 오직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자.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 . . . 마귀는 또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전통본문) 18)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말하였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이며 그것을 주겠으니 내게 절하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표현하였고(고후 4:4; 엡 2:2), 또 ‘온 세상은 악한 자[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말씀하였다(요일 5:19). 또 이 세상의 권세, 부귀, 영광은 마귀가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은 마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세상의 주권자이시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나 마귀는 예수께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절하라고 미혹하였다. 이 수법은 그 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마귀의 수법이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 시험에 넘어져 하나님 대신 마귀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하였고(약 4:4),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이다(요일 2:15).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 . .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히 그를 물리치시며 대답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전통본문). 19)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경건의 순수성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시험은 없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온화하고 유순함을 보여야 하지만, 예배 문제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마리아도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9-11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 . . 마귀는 또 그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또 하나의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즉 기적을 통해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라는 암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종교적 인기와 명예도 세상적인 것이다. 진실한 교훈과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겠으나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별 의미와 가치는 없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종교적 인기와 명예의 추구는 종종 기적의 추구, 혹은 과장된 기적 체험의 주장과 더불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인 것일 뿐이다. 마귀는 이번에 성경을 두 곳이나 인용하였으나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생각이 무의미할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성경 해석의 건전한 법칙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문법적 해석이고,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고, 셋째는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과 문장 구성과 문맥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며 해석하는 것이고,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참 저자가 성령이심을 믿는다면,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충돌시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기적을 구하라고 한 마귀의 제안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다른 부분의 분명한 말씀에 위반되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다.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들이 역사상 기적들을 통해 다 확증되었고 그것들이 다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실상 기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적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자.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났다. ‘얼마 동안’이라는 말은 마귀가 이후에도 필요할 때마다 그를 시험할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하였다면, 우리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6:41),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므로 “근신하라, 깨어라”고 교훈하였다(벧전 5:8).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충만함을 얻고 성경말씀으로 잘 무장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권세와 영광을 얻으려고 사탄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 권세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섬겨야 한다. 또 우리는 종교적 인기와 명예를 얻으려고 기적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14-30절,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 [14-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 . . .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성령의 권능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격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감화력뿐 아니라, 그의 기적의 행위들을 뜻하는 것 같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기간에 생긴 것으로 오늘날 예배당과 비슷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모였고 또 공적 문제들도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여러 회당들에서 가르치셨다. 가르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주된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참된 종교의 첫 번째 요소이다.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는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곧 고향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평소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습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성수주일, 성경 읽기, 기도하기, 새벽기도 등의 습관은 좋은 습관이다. 당시의 회당에는 예배실(‘바실리카’라고 부름) 앞부분에 강단(‘베마’라 부름)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거기에 서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7-19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 . . . 예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고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다.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읽으신 부분은 이사야 61장의 첫 부분이었다. 당시의 책은 오늘날과 달리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말아서 보관하다가 펼쳐서 읽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원어는 ‘주의 성령이 내 위에 계시니’라는 뜻이다. 전통본문에는 ‘나를 보내사’라는 말 다음에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며’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20)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의 말들은 영육으로 다 적용된다. 영적 문제는 육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이 상하고 마귀와 죄에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죄의 결과로 외적으로, 육신적으로도 가난, 슬픔, 병, 고통 등 불행한 처지에 떨어져 있다. 구주께서는 이런 인생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는 메시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가운데 없지 않았으나 메시아의 오심으로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고 주어졌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증거하였고(요 1:17),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고후 6:2). [20-22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 . . . 예수께서 회당에서 그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자 회당에 있는 자들은 다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주께서는 그 날 회당에서 책을 읽기만 하시고 설명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단지, 그는 앉으신 후 회당에 참석했던 자들이 다 그를 주목하자, ‘이 글( 헤 그라페 )(혹은 성경)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임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예언하신 메시아, 곧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또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다 그를 좋게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마태복음 13:54 이하에는, 그가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칠 때, 사람들은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목수 요셉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사람으로 오실 때 목수의 아들로 오시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그 요셉의 아들이 정말 메시아이신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를 배척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유 없이 그를 의심했고 무시했고 배척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시고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3:57에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는 비슷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으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진실한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하셨다.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단순히 교훈을 주려는 우화(寓話)들이 아니고, 믿을 만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의 긍휼을 주권적으로 베푸시되, 우상숭배적이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버려두시고 이방의 한 과부에게와 이방의 한 장군에게 긍휼을 베푸셨음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 . . . 회당에 있는 자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들의 불쾌와 분노는 그를 살해하려는 행동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미움은 살인이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그는 권세와 용기가 있으셨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육으로 가난해졌고 상했고 포로되었고 눈멀었고 억눌렸던 인생들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곧 평강과 자유와 기쁨의 구원을 주시는 자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아, 곧 인류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이히 여겼고 마침내 분이 가득하여 그를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실과 신성의 영광을 도무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영접하며 따르자. 또 오늘날도 성도들은 교회의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들을 그들의 인간적 약점만 보거나 바른 말씀을 싫어하여서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직분과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행하며 따라야 한다. 31-37절,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일 [31-32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 . . .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셔서 안식일에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28-29도,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증거한다. 그의 말씀은 매우 권위가 있으셨다. [33-34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 . . .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키는 악령이다. 이 세상의 음란한 풍조는 더러운 영들의 활동으로 더욱 확산되고 왕성하여진다. 그 사람은 크게 소리질러 말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증거하였다. 귀신 혹은 악령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는 못하나, 그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35-37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 . . . 예수께서는 꾸짖어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주께서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으신 것은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 대한 진리가 공개적으로 증거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 사실이 아직 공적으로 증거되지 말아야 하였다.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으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을 복종케 하시는 그의 능력과 권세는 확실히 신적 능력과 권세이었다.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 38-39절,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38-39절]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 . .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독신자가 아니고 결혼한 자이었다(고전 9:5).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께 구하자 예수께서는 가까이 서서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마태와 마가는 그가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증거한다(마 8:15; 막 1:31). 주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며 그 열병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그 열병은 예수께 복종하였다. 그 병은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시몬의 장모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병고침의 일이 즉각적이고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즉시 또 완전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는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 즉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열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생명체가 그의 말씀에 복종하였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시다. 생물계와 무생물계가 다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한다. 40-41절, 여러 종류의 병자들을 고치심 [40-41절]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 . . . 해 질 적에 각종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자를 데리고 나아오니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 ‘일일이 손을 얹으신’ 것은 개개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병고침 받음이 우연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임을 확실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것은 치료받는 자나 보는 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일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당신은 [그리스도] 21)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 귀신들이 자기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금하셨다. 그는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병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마 8:4; 9:30). 그 이유는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그가 병고치기 위해 오신 자로 오해될까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전체적인 문제 곧 죄사함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기독교는 외적 기적을 전하지 않고 내면적 기적, 곧 회개와 믿음, 구원, 인간 변화, 새 사람 됨을 전한다.

42-44절, 전도하심 [42-44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 나오셔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말리려 했으나 그는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말씀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그것은 마귀의 나라와 대조된다. 마귀의 나라는 어두움과 죄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빛과 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하고 그의 뜻과 그의 말씀을 지킨다. 자신의 전도 사명을 밝히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22)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를 믿고 구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며,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으며,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들에게 명령하셨고 심지어 열병에게도 명령하셨다. 그의 명령 앞에 귀신들은 복종하였고 열병도 복종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의 신성의 능력 곧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병고치는 일이 아니고 전도하는 일이셨다. 그는 병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명은 전도이셨다. 오늘도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병고침 곧 육신적 치료나 좀더 넓게 말한다면 밥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있지 않다. 참 기독교는 인간들의 완전한 치료, 곧 구원을 위하여, 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주셨고 그것과 더불어 부활과 영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약속하셨다.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며 또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자. 5장: 죄인을 부르심 1-11절, 제자들을 부르심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 . . . 무리가 둘러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은 밤에 고기를 잡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도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다.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크신 관심과 배려이셨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 . . . 그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대답하였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이미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42).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몬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 . . .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 디에레그뉘토 , 미완료과거)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친구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 . . .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일 뿐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참으로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 6:24).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이 허무한 세상임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과 천국이 이 세상과 돈보다 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택하신 영혼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는 그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를 물리치지 않으셨고 배 위에 앉으셔서 가르치셨고 시몬과 그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신기한 고기잡이를 통해 시몬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나 가득차게 고기를 잡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속의 물고기떼를 주장하셔서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그 물고기들이 잠간 동안에 그렇게 많이 잡히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고, 그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믿는 자마다 그를 따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맡은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드릴 것이다.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 . .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다. 나병 혹은 한센병은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이 변하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플레레스 레프라스 )[나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 병은 온몸에 퍼져 몸을 보기 싫게 만들었고 온몸의 감각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에게 나아갔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렀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많은 병고침의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 . .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 그는 마치 그 일 때문에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았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온몸에 나병 환처(患處)가 있는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몸에 손을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병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 . . 예수께서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 . . .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힘을 얻어야 한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가득한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병은 곧 깨끗해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나 사명은 병고침이 아니셨다. 그는 불쌍한 나병 환자나 기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주된 임무와 사명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심으로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목사들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능력을 받는 길이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 . . .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求道者)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 노모디다스칼로스 )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 노미코스 )나 ‘서기관’( 그람마튜스 )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곳에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는 병환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 . .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보인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믿음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 . . .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자의 믿음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수고하였고 용기 있게 행동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성경에서 병과 죄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물론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이 근원적으로는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러하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병이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병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로 세상에 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자들도 많고 병원들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자들도, 병원들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 .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 디아로기조마이 )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다’는 뜻으로 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의논까지도 아신다.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그러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인자(人子)는 그의 인성을 보인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신적 사역을 하셨다. [25-26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 . .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는 예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죄사함의 권세를 그가 가지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어 구원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죄와 병의 관련성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완전한 건강을 누릴 것이며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약 5:16). 그러나 우리는 병과 죄의 관련성을 알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도 본받자.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친구에 대한 사랑, 서로 협력함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런 믿음과 사랑과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27-32절,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심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 . . . 예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일꾼들을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셨다. 그 부르심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마 4:20, 22; 눅 5:11).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를 통해 밝히 주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대신하여 그 일을 계승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 . .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느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 .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성도의 교제의 차원이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교제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영적 교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심히 불경건하고 무지하고 죄악되었을 때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한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죄인들과 만나야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그들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만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대규모 전도집회들을 여는 빌리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방법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에서 탈선한 이단자들이며 그런 이단자들은 회개와 전도의 대상이지 결코 전도 활동의 협력자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귀한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레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세상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다 포기하였다.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하다. 그것은 가장 큰 보화이다. 우리는 남을 잘못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못 비난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인하고 성경적으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 . . .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왜] 23)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저희’는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함께 이런 질문을 한 것 같다(마 9:14).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을 본받아서(마 11:18) 또 더욱이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성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가장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한마디로 극기(克己)와 자기 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핍박과 환난의 현실 가운데서 항상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초두에 기록된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장립할 때 금식하였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장립식에 축하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둘 다 보존되리라]. 24) ” 이 두 비유는 새 것이 옛 형식에 적합하지 않음을 보인다.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비유하셨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들은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 즉 메시아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구약의 내용은 율법이며, 그것은 율법적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그것들 중 대표적인 것은 성전 제도와 제사 제도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은 복음이며, 그것은 새 제도와 규례와 형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의 옛 생활 방식에 맞지 않고 복음의 새 생활 방식에 맞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려야 했으나,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진심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뿐이다. 구약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규례들에 비하면, 신약의 형식은 아주 단순하고 영적이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영]에 있고[혹은 ‘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이나 신앙생활의 형식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 . . . 예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25)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26) 좋다 함이니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옛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일에서도 그렇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에서도 그렇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먹고 마셨듯이, 오늘날 그를 믿는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누리지 못하지만, 그를 아는 자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빌 4:4). 우리는 종교적 규례와 의식에 얽매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신약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의 구조나 신앙 생활의 형식은 구약 교회의 정교하고 상징적인 것들에 비교하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섬기지만, 또 의와 선과 진실 안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법을 행해야 한다. 6장: 가르치심 1-11절, 안식일 문제 [1-2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 . . . 안식일에[두 번째 첫 안식일에](전통본문) 27)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일들 말고 두 번째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제자들의 행위는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에게 그 떡을 주었고 그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한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 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 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 . .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일어나 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다. 그는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분기(憤氣)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였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오늘날 주일에 병환자들을 심방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품고 분노하며 함께 의논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누가 참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음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자.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암시한다. 과연 구약의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제7일 토요일 안식일은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변경되었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육신의 안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키며, 그 날에 물건을 사고 팔거나 육신적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에 부득이한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율법적으로만 생각하여,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행하는 자나 선을 행하는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2-16절, 사도들을 택하심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 . . .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열두 사도들을 택하여 세우시기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때때로 새벽에 기도하셨고, 밤에 기도하셨고 또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기를 힘쓰셨다. 특히 그는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집이나 동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지만, 산은 조용하므로 기도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악되고 부족 투성이인 사람들의 사회는 항상 시끄럽고 복잡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 산은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꼭 산이라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주께서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신비한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신비한 관계를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가지신 그는 참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와 교통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 사도 바울은 믿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살전 5:17). 우리는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빌 4:6, 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셨다면, 인간의 아들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더 자주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는가! [13-16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 . . .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님을 파는 자가 될 가룟 유다이었다. ‘사도’라는 원어( 아포스톨로스 )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신약교회의 기초석이 될 자들이었다(엡 2:20).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사역의 의미와 모든 구원 교리와 기타 교리들과 종말 예언들은 사도들의 서신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세우셨고(13절), 그들로 하여금 주와 함께 거하며 나아가 전도하게 하셨고 또 그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다(14, 15절). 여기에 사도들의 직무가 나타나 있고 그들을 세우신 주님의 의도도 드러나 있다. 사도들은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말씀을 잘 배우고 나아가서 주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고 말하였다(4절). 그러므로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보다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복음 진리를 파악하고 보수(保守)하고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14).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특히 목사는 일반 성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위해 쓰여지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은 다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온전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성도들은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을 존중하며 복종해야 한다(살전 5:12-13; 히 13:17).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요(요 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예수께서는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요 6:70), 마침내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감으로써(요 13:27)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을 받고 악한 자들에게 주님을 넘겨주었다(마 26:1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열두 제자들 중에 포함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통해 배신의 고통까지 경험하실 것이다. 가룟 유다가 사도들 중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목사들과 장로들 가운데 가룟 유다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런 자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주께서는 일찍이 거짓 교사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행위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마 7: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실생활에서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 자신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실함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언제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아뢰며, 쉬지 말고 기도하고, 특히 큰 일을 앞두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시시때때로 기도하기를 힘쓰셨다면, 우리같이 무능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종들은 얼마나 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하겠는가! 또 모든 성도는 기도로 늘 승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주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많이, 더 자세히 배우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히 거하고 온전한 인격자가 되어 주의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고 쓰임 받아야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임을 자신들의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은 오직 그의 행위들을 통해 분별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종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들을 돕고 그들을 따르며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와 은혜와 평강 가운데 힘있게 잘 진행될 것이다. 17-19절, 병자들을 고치심 본장 17절부터 끝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소위 ‘산상 설교’와 같은 때의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 둘을 같은 때의 말씀이라고 추측하지만, 서로 다른 때의 말씀이라고 보는 자들도 있다. 28)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말하지만, 본절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전도 사역 초기에 되어진 일로 보이지만, 본문의 사건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신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여진다. [17절]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 . .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는데, 그의 제자들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런 저런 동기로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에게 배우고 그의 교훈을 행하며 그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18-19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온 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 그를 만지는 모든 사람이 나았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가 행하신 이런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증거들이다. 20-26절,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20-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주린 자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하고 주리고 운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가진다고 본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울 때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잘 깨닫게 된다. 물질적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육신적 가난과 슬픔이 사람에게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고린도교회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야고보서 2:5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으며 우는 자가 웃게 될 때는 언제인가? 세상적으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은 하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며 영적으로 배부름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복은 더욱 크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때 그들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 영원히 배부름과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22-23절]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배척과 비난도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다. 악한 사람들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대적하였고, 또 그의 종들과 제자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또 성경의 바른 진리 때문에 받는 고난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할 때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하늘’은 마지막 심판 후에 있을 천국을 가리킨다. 마지막 심판 때에 제자들에게 상급이 있을 것이며 그 상급은 그들의 행위의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인데,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제자들에게는 큰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또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증거가 된다. 구약시대에도 참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었다. 세상은 항상 주의 진실한 종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며 주의 진실한 선지자들과 종들이 간 길이기 때문에 참된 제자들은 그런 고난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24-25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 . . . 예수께서는 화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 말씀도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된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으로 배부르고 웃는 자는 영적으로도 마음이 높고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義)를 구하지 않는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더 이상의 위로를 받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 지옥의 판결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영원히 아무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주리고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절]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진리의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진리의 사람은 참된 성도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은 진리의 사람인 표를 잃어버린 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런 칭찬을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하나는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들은 의인에게는 위로와 힘과 기쁨이 되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움과 고통과 찔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 바울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을 동시에 가졌고(고후 6:8), 또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었으나, 오네시보로라는 성도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딤후 1:15-18).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병자들을 공개적으로 고쳐주셨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또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것들은 기적들이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선생들의 가르침과 달랐다. 예수께서는 가난과 주림과 우는 것이 복되며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이 화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침은 현세 중심, 세상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 내세 중심이었다. 주님의 제자는 육신적 부요와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구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내세와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또 그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과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참 제자의 표시요 장차 천국에서 큰 상급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항상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 선포하고 실행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27-36절, 원수를 사랑하라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는 것은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 세상에 무저항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생각도 뛰어넘는다. 구약의 율법 레위기 19:18에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율법의 말씀보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29-30절]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그에게 끝까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도적질이나 강도질이나 폭력이나 살인을 정당한 일로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라일(J. C. Ryle)은, 이 말씀은 범죄의 억제를 금하신 것이 아니고 보복 정신을 정죄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29) 사회적으로는 법이 필요하고 범죄의 처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도 가능한 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주의 말씀은 사회에 치안 담당자나 경찰이 불필요하다거나 그들의 직분이 부당하다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평화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금하신 것이나, 모든 전쟁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가복음 22:36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말씀하심으로 칼의 필요성을 인정하였고,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칼을 가지고 사회 정의를 시행함을 증거하였다. 다수의 평안을 위해 범죄자들의 구속과 처벌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 경우에도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인권을 짓밟지 말고 그를 학대하지 말아야 하며 그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이다. 또,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이 아니고 정당방위적인 합법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위정자의 직분에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며, 그것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각 국가의 건전한 법들에 따라 특히 경건과 의와 평화를 유지해야 하므로 그 목적을 위해 지금 신약 아래서도 정당하고 필요한 경우들에는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23:2). 그러나 합법적 전쟁의 경우에도, 먼저 평화를 제안하고 불가피한 폭격 외에는 자제하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교훈은 특히 개인의 행위에 적용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보복 대신에 양보를 요구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하며 정당한 권리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악은 보복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 보복은 보복을 불러오고 피는 피를 불러온다. 주께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6:52). 우리는 악한 자들을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로마서 12:17-21은 이 원리를 잘 교훈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롬 5:6-8, 10).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우리는 그 명령을 거절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 앞에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 명령이 비록 높아 보이지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60).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죽였던 공산당원을 자기 아들로 삼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잘 참았다.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야 한다.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복음 7:12에 보면, 주께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결론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다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최선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대인관계에서도, 우리가 남에게서 이해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에게 먼저 잘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32-34절]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가치 있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빌린다’는 말은 ‘빌려준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본문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가르치신다. 성도들이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원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도들 간에는 장사나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의 교제는 순수한 것이 좋다. [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원수를 사랑하며 남을 선대하며 이자를 바라지 않고 빌려주는 자들에게는 상이 클 것이다. 그 상은 천국에서의 상을 가리킨다.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상급은 지상에서 행한 순종과 선행에 따라 차등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에 대한 약속으로 성도의 순종과 선행을 격려하신다. 또 이런 선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골고루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27절부터 36까지의 말씀은 요약하면 서너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남이 우리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남에게 먼저 잘 해주라는 것이다. 셋째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가 없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본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위요 처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 37-49절, 비판치 말고 선을 행할 것 [37-38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비판치 말라’는 교훈은 어떤 경우에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안디옥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하고 바른 길을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5:20은,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이 이단을 배격하라고 가르칠 때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전제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교회적 판단을 금하신 것이 아니고 개인적 판단에 대해 하신 것이며(매튜 풀), 그것도 언제든지 비판치 말라는 절대적 금지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견해나 행위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그에게 충고하거나 그를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비판이나 정죄 자체가 악은 아니다.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을 가진 자들 즉 목사나 장로들은 공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교인들을 판단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몇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위치에 있다. 남이 비판을 받을 만하다면, 우리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실상 다 부족이 많은 자이다. 만일 우리가 남을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둘째로,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 어려운 형편도 있다. 특히 우리는 남의 은밀한 마음이나 행위에 대한 동기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다. 고린도전서 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셋째로, 우리가 비판치 말아야 할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일들의 경우도 비판치 말아야 한다. 로마서 14:1-5,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또 성경적으로 명백한 잘못인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나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 일은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고, 단지 개인적으로 은밀히 충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은 또 사사로운 비판과 정죄를 버리고 남을 용서하고 구제하라고 교훈한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와 구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이신 명확한 뜻이다. 그것은 성도의 중요한 생활 규칙의 하나이다. 특히, ‘준다’는 말씀은 남을 구제하고 후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주라, 그리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음을 가리킨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이라는 표현은 밀가루를 되에 가득히 채워 주는 것 같은 풍성한 보상을 묘사하신 것이다. [39-40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로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소경이’라는 말은 무지한 인도자들을 가리키고, ‘소경을’이라는 말은 무지한 교인들을 가리킨다. 구덩이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와 그로 인한 낭패를 가리킨다. 진리의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이 없이 남을 인도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그가 인도하는 자들도 망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도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런 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도 되지 말아야 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는 말은 선한 뜻에서도, 나쁜 뜻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선한 선생에게서는 선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울수록 좋으나, 악한 선생에게서는 악한 영향을 받음으로 배우지 않을수록 좋을 것이다. [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작은 결함을 비유하고 ‘들보(통나무)’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결함을 비유한다. 사람은 자신의 큰 잘못과 결함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함과 잘못은 지적하기 쉽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큰 부족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고친 후에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고친 후에 형제를 권면해야 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지만(잠 27:5), 단지 자신의 큰 결함이 없을 경우에 그러한 책망이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3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사사로이 혹은 성급하게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요한 교회 문제, 진리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사사로이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남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신을 남을 용서하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지식과 실천이 없이 남을 지도하고 권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남의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먼저 자신의 큰 부족을 깨닫고 고친 자만이 남의 작은 부족에 대해 지적하고 그것을 고쳐줄 수 있다. 43-49절, 행위의 중요성 [43-45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나무와 열매는 사람의 인품과 행위를 비유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좋은 사람은 좋은 말과 행위를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말과 행위를 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 사람의 인품과 말과 행위는 같이가기 때문에, 사람의 인품은 그의 말과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평소 훈련을 통해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하고 선해야 한다. [46-49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전통본문) 30)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진대, 우리는 그의 가르치신 바들을 행하려 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말씀을 행하는 자는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는 홍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홍수는 환난이나 재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씀을 행하지 않는 자는 튼튼한 기초 없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다. 그는 환난의 날에 낙심케 될 것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계명 순종의 행위로 증거된다. 주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중요함을 교훈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선한 말과 행위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또 순종의 행위는 집을 튼튼히 짓는 것과 같다. 평소에 행함이 없는 자는 환난 중에 실패할 것이지만, 행함이 있는 자는 실패치 않고 승리할 것이다. 7장: 기적들을 행하심 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심 [1-3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 . . . 예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었다. 누가복음 4장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과 시몬의 집에서 중한 열병으로 아파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일과 해 질 때 집에 모여든 여러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신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다. 백부장(百夫長)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다. 이름 그대로, 그는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었다. 그는 물론 로마 사람이었다. ‘사랑하는’이라는 원어( 엔티모스 )는 ‘소중히 여기는’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이다. 충성된 종은 주인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이 병이 들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그 종은 결국 고침을 받았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다. 물론 그 종도 주인에게 충성했겠지만, 그 주인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 종을 소중히 여겼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다. 이 백부장은 종을 사랑하는 동정심과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4-5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 . . 그들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과 사랑이 가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돈을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 . . .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

[스크랩] 누가복음 1장 주석

누가복음 1장

1:1-4 저술의 방법과 목적

1:5-25 천사에 세례 요한 탄생 예고

1:26-38 예수의 탄생 예언

1:39-56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1:57-66 세례 요한의 출생

1:67-80 사가랴가 요한의 사역을 예언함

데오빌로 각하에게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히2:3 , 요15:27 , 막4:14 , 막16:20

(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딤전4:6 , 딤후3:10 , 행11:4

(눅 1: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요20:31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다

(눅 1: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눅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눅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대하8:14

(눅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레16:17

(눅 1: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눅 1: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눅 1: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단10:8 , 행10:4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눅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11:11 , 렘1:5 , 갈1:15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눅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말4:6

(눅 1: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창17:17

(눅 1: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눅 1: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겔3:26 , 겔24:27

(눅 1: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눅1:20

(눅 1: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눅 1: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왕하11:5 , 대상9:25

(눅 1:24)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눅 1: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창30:23 , 삼상1:6

예수의 나심을 예고하다

(눅 1: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눅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눅 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눅 1: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눅 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 1: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 1: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창18:14 , 렘32:17 , 슥8:6

(눅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눅 1: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눅 1: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 1: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1:28 , 눅1:48

(눅 1: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눅 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의 찬가

(눅 1: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1:28 , 눅1:42 , 눅11:27

(눅 1: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눅 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세례 요한의 출생

(눅 1: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눅 1: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롬12:15

(눅 1: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눅 1: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눅 1: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눅 1: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눅1:20

(눅 1: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눅 1: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눅 1: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눅 1: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눅2:19

사가랴의 예언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출3:16 , 룻1:6

(눅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 1: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눅 1: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눅 1: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눅 1: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눅 1: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눅 1: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 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눅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눅 1: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ㄱ 삼상20:1

누가복음서문(1:1-4)에 데오빌로 각하가 수신인으로 나타나는데 사도행전1:1 에도 두 번째 편지의 수신으로 나타난다. 이와 더불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은 유사성이 많이 있다는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어 원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은 하나의 책이었거나 한 사람(누가)이 저자라고 알려지고 있다.

바울 은 누가를 ‘사랑 받는 의사'( 골4:14 )로 소개했으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은 의학 용어들이 많다( 눅4:38 , 눅18:43 , 눅22:44 과 행3:7 , 행4:22 , 행9:18 , 행12:23 , 행13:11 , 행28:8 등). 또한 누가의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 의 시작부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 역시 누가의 기록으로 보고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가는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전체에 걸쳐 흐르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대인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한 수신인 데오빌로 역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른다. 마가와 마찬가지로 누가 역시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누가의 구속역사는 유대인에게 한정하지는 않는다. 누가복음에만 있는 사마리아 인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고( 눅10:30-37 ), 시므온 의 찬송 속에도 이방인을 언급하고( 눅2:32 ), 예수께서 사렙다 의 과부와 수리아인 나아만 과 같은 이방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눅4:25-27 ).

누가복음은 예수의 기도를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이 적고 있다( 눅3:21 , 눅5:16 , 눅6:12 , 눅9:18 , 28, 29, 눅10:21 , 22, 눅11:1 , 눅22:41 이하, 23:46). 이중 누가복음에서만 나타나는 기도가 일곱 개나 된다. 또한 찬양에 대해서도 기록하는데 영광 송( 눅2:14 ), 마리의 찬양( 눅2:29 이하), 그리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주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눅2:20 , 눅5:25 , 26, 눅7:16 , 눅13:13 , 눅17:15 , 눅18:43 ). 누가복음은 죄인들과 병자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도 가지고 있다. 누가 자신이 의사였기 때문에 그런지 병 고침에 대한 부분을 자세히 다루고( 눅1:57 , 눅4:27 , 눅4:35 , 눅5:20 등), 탕자의 비유( 눅15:11-32 )을 비롯해 세리장 삭개오 의 구원( 눅19:1-10 ), 십자가 에 달린 강도의 구원( 눅23:39-43 ) 등은 누가복음의 특징이다. 1:1-4 저술의 방법과 목적 누가복음 의 머리말은 빼어날 정도의 문장력과 문학적으로 흠이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누가의 서언은 여러 사람이 예수께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도 신중함으로 여러 자료들과 내용에 대해서 꼼꼼히 살펴서 썼다고 진술한다.

1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은 누가복음 전체에 걸쳐,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보여주신 그의 활동과 십자가 의 죽으심,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 의 역사를 말한다. 아울러 이 일에 목격자가 많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실 pragmavtwn (프라그마톤)은 “사건, 행위”가 이루어진 말로 명사(복수형)로 “사건들”을 말한다.

3절 근원 a[nwqen (아노-덴)은 “시간적인 시작”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누가 는 처음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뜻한다. 멀리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요 가깝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부터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누가 는 예수님의 탄생 부분을 다른 기자보다 더 세밀히 다루고 있다.

자세히 ajkribw'” (아크리보-스)는 “정확하게, 신중하게”( 행18:25 , 엡5:15 , 살전5:2 ) 차례대로 kaqexh'” (카덱세-스)는 부사로서 시간적으로 하나하나를 의미한다.

데오빌로 는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누가 의 후원자 였거나, 이 책을 잘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일 것이다. 각하 kravtiste (크라티스테)는 경칭의 하나로 보여지며 높여(존경)하여 부르는 당신을 뜻한다. 같은 단어가 행23:26 , 행24:3 , 행26:25 에서 보이는데 공직에 있는 관료중의 한사람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4절 배운 kathchvqh” (카테케오)는 “들리다, 알리다, 주입하다, 배우다”로 데오빌로 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거나 예수에 대한 상당한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태에서 누가 는 자세히, 확실하게 안내할 필요성을 느끼고 썼을 것이다. 1:5-25 천사에 세례 요한 탄생 예고

세례요한의 탄생에 관해서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과 같은 배열로 소개하였다. 부모가 소개되고(5-7, 26-27절), 한 천사가 나타났고(8-23, 28-30절), 징조가 주어졌으며(18-20, 34-38절), 자식이 없었던 한 여인을 통해서 잉태하게 된다(24-25절).

5절 유대 왕 헤롯 때에 헤롯 안티파스(B.C. 37-4)왕을 말한다.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모든 제사장 은 24반열로 나뉘어 있는데 ‘아비야’는 여덟 번째 반열이다( 대상24:10 ). 그런데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때 네 반열만 귀국했다( 스2:26-39 ). 그리고 다시 옛날 명칭을 따라 24반열로 재분류되어 각 반열은 매년 1주씩 2회를 봉사할 의무가 있다.

사가랴 는 제사장의 딸인 “엘리사벳”과 결혼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처녀하고만 결혼할 수 있었으나( 레21:14 )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할 필요는 없었다. 제사장 가문의 아내를 맞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6절에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경건한 부부라는 것이 잘 타나난다.

의인 divkaioi (디카이오이)는 “흠 없는, 거룩한”의 뜻으로 올바른 것을 말하거나 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부정한자들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의로운 자로서의 메시야 에 대한 예언에서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렘23:5 , 렘33:15 , 슥9:9 , 사53:11 ). 마태복음 29:19 에서는 빌라도 의 아내가 예수를 divkaio” (디카이오스) “결백하다, 도덕적으로 의롭다”라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좀더 광범위하게 족장들( 마23:35 ), 구약 성도들( 벧후2:7 ), 선지자들( 마13:17 )에 사용했으며 순교자들의 무죄한 피( 마23:35 )에 사용했다.

때로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 마10:41 )이나 구원을 받을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마25:37 ). 바울 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롬1:17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예수 외에 진정한 의인이 없다고 했다( 롬3:17 ).

11,12절 누가 는 천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다만 향단 우편 에 있었다고 전한다. 성경에서는 동편을 바라보고 있는 관점에 이야기하므로 이것은 남쪽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천사는 향단과 금 촛대 사이에 서 있었을 것이다.

14-17절 아이에게는 삼손 과 같이( 삿13:4 ) 포도주나 소주가 금지되었다. 이런 이유로 요한도 나실인( 민6:1-8 )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나 그런 언급은 없다.

천사는 구체적으로 태어날 아이에 대한 인품과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할 것을 이야기 해 준다.

① 많은 사람이 기뻐할 것이다.

② 주 앞에 큰 자가 된다.

③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한다.

④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다.

⑤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한다.

⑥ 엘리야 로 주 앞에 와서 예비한다.

15, 17 앞에 ejnwvpion (에노피온)은 누가 의 특이한 표현이다. 이 말은 누가복음 ( 눅1:15 , 17, 19, 75, 76, 눅4:7 , 눅5:18 , 눅13:26 , 눅15:10 , 18, 21, 눅23:14 등)과 사도행전 ( 행2:25 , 행4:10 , 19, 행6:6 , 행7:46 , 행10:31 , 33 등)에 35번 나타나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단 한번 요한복음 20:3 에 나온다.

1:26-38 예수의 탄생 예언

마1:18-25 비교하라

여섯째 달에 는 엘리사벳 이 임신한지 6개월이 된 때를 말한다. 여섯 달 전에도 엘리사에게 나타났었고 또 여섯째 달만에 아기에 대한 예언을 하러온 것이다.

27절 정혼 ☞ 을 보라.

28절 은혜 를 받은 라고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 에게 인사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의 계획을 결정하시고 천사로 대신해서 소식을 정하고 계신 것이다. 천사는 사가랴 에게 한 것과 같이 안심시켰다(13절). 은혜 kecaritwmevnh (케카리토메네)는 “은총, 축복”을 말한다. 이 단어는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발견된다. 은혜( cari” )는 누가복음 4:22 , 사도행전14:3 의 특성을 말해주며 사도행전 6:8 에서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묘사한다. 사도행전11:23 에서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지도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4:25 , 15:40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는 표현이고, 사도행전 15:11 에는 권고 형식으로 나타난다. 바울 은 이 단어를 값없이 주신다는 십자가 의 은혜로( 갈2:21 ) 선포하고 있으며 로마서 3:23-24 에서는 이 은혜는 죄인들에게 나타났고 구원의 전부( 고후6:1 )로 모든 성도들이 받은 것이다( 고전1:4 ).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고( 롬4:16 ), 믿음으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롬3:24 ).

골로새서 1:6 에서는 복음을 뜻하며 에베소서 1:6-7에서는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한다. 베드로전서 2:19-20 은 고난이 은혜로 나타난다.

31-33절 천사가 전해준 예수께 대한 예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사7:14 참고)

②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③ 저가 큰 자가 되고

④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⑤ 다윗 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삼하7:12 , 시89:29 참고)

⑥ 영원히 야곱 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⑦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삼하7:13-16 )

34-38절 마리아 는 메시야 가 오실 것이라는데 놀란 것이 아니고 동정녀를 직역하면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인데 처녀인 자신이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는데 놀랐다. 놀란 사실에 대해서 천사는 사가랴 의 경우와 달리 꾸짖지 않았다(20절). 마리아 는 천사에 말에 의심한 것이 아니라 동정녀인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가지게될 것인가를 궁금해했다. 천사는 성령이 임하여 하신다고 했다.

38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의 계집종 douvlh (둘레) “노예”( 눅1:48 )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수락했다.

1:39-56 마리아 의 엘리사벳 방문

계시를 받은 마리아 는 엘리사벳 을 방문해 세 달 동안(56절) 함께 있다가 요한 이 탄생하기 직전에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마리아 는 천사가 방문한 직후에 출발했던 것이다.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이 동네가 정확히 어디쯤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시골 동네에 살았던 것 같다.

41절 이 때에 엘리사벳 은 복중의 아이는 뛰어 놀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42절 큰 소리로 kraugh’/ (크라우게) “큰 소리, 외침”이었다. 그렇다고 악을 쓰거나 듣기 곤란한 소리보다는 하나의 시 같은 표현으로 아름답게 이야기한 것이다. 43절 주 kurivou (퀴리오스)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엘리사벳 이 마리아 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메시야임을 알았다( 시110:1 참고).

누가복음 은 주( kurivou )라는 명칭을 예수님을 표현할 때 제일 많이(13회) 사용했고 하나님과 예수를 칭한( 눅1:6 , 9, 11, 38, 45, 66, 76 2:9, 23, 24, 4:18, 10:39 등)것은 26번 나온다. 요한복음 5회, 마가복음 에서는 단 한번 이방 여인에 의해 사용된다( 막11:3 ).

부활 하신 예수께서 주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롬10:9 , 행2:36 , 행5:31 , 롬8:34 , 고전15:25 , 골3:1 , 엡1:20-21 이 있고 병행구절 히2:6 , 마28:18 , 시110:1 을 참고하라)이다. 골로새서 2:6 , 10에서는 주 그리스도는 모든 권위와 능력의 머리시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사용으로도 나온다( 고전7:10 , 12, 딤전4:15 , 고전9:5 , 히2:3 , 행11:16 , 행20:35 ).

주라는 단어나 언제나 무게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약에서 사용할 때도 이와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창조주로 행17:24 , 추수하는 세상의 주인으로 마9:38 , 전능하신 주로 계1:8 ).

누가복음 과 요한복음 에 나오는 kurivou 는 예수의 생애와 업적에 근거한 것이며 부활 사건 후에 결정적으로 예수께서 주님이 되심을 말한다( 시110:1 을 인용한 막12:35 ). 그래서 이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셨던 것처럼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골4:1 ).

36-56절은 마리아 의 찬송(라티어역의 첫 단어를 따서 망니피카트(Magnificat)라고 부른다) 구약의 언어로 된 찬송으로 한나 의 찬송( 삼상2:1-10 )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다.

56절 집으로 돌아가니라 앞에 원어에는 그녀( aujth'” )라는 단어가 있다.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니라]인데 마리아 가 아직 결혼하기 전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1:57-66 세례 요한의 출생

요한 의 탄생은 예언대로 탄생했다. 이 축복의 시간을 어머니와 친족들과 친구 들이 함께 나누고 누가복음 에 흐르는 긍휼 이란 단어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날의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59절 율법에 남자아이는 팔일에 할례 하도록 정해져있다( 창17:12 , 레12:3 ). 할례에 이어 아이의 이름을 짖는 문제에 봉착했다. 가족들 모두는 가문에 내려오는 가문의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나이 많은 제사장 들의 집안 어른들의 입장에 엘리사벳 은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나서기 어려울 때 그의 입은 닫혔고 결국 서판을 통해서 “요한”( !Iwavnnh” )이라는 이름을 적어 인정함으로 그 혀가 풀렸다.

1:67-80 사가랴 가 요한의 사역을 예언함

68절 찬송하리로다 Eujloghto;” (율로게토스)의 원래의 의미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자”( 시41:13 , 72:18, 106:48)이다. 신약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누가가 이곳에서 처음 사용했지만 이 단어는 롬1:25 , 9:5, 고후1:3 , 11:31, 엡1:3 , 벧전1:3 에도 나타난다.

돌아보사 ejpeskevyato (에페스케프사토)는 과거 직설법으로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살펴보신다”의 뜻으로 누가복음 7:16 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로 나타난다. 한군데 더 나오는 곳이 있는데 사도행전 15:14 “권고하신 것을”이다. 이 말은 눅7:16 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옳다.

사가랴 의 예언은 찬송시로 불러졌다. 네 개의 절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 메시야 를 보내주신 것에 대한 찬양의 권고(68-70절)

② 메시야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71-75절)

③ 요한 의 사역에 대한 묘사(76-77절)

④ 메시야의 구원(78-79절)에 대한 감사의 찬양 노래이다.

78-79절 돋는 해가…인도하시리라 이 말은 이미 구약의 민24:17 에 “한 별이 야곱 에게서 나오며”를 연상케 한다. 또한 말4:2 의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찬양하고 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 춘천 대우인력

메모 :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08장

8:1 예수를 돕는 여인들 (누가복음 8:1-3) 우리는 이런 내용을 엿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의 “필생의 사업”은 무엇인가 ? ─ 그것은 “전도”였다. 그는 그 일에 있어서는 지칠 줄 몰랐다. 그리고 이 후에 ─ evn tw/ kaqexh/j ─ 적당한 “시기”와 방법을 택하여 선행에 힘썼다(1절).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자기의 일을 갖다 놓고서는, 규칙적으로 그 일을 해 나간다. 그는 사업의 “순서” 또는 질서를 지켰다. 그래서 한 선행의 끝은 다른 한 선행의 시작이 되었다. 여기서는 이런 것을 관찰할 수 있다. 1. “어디서” 전도했는가 ? ─ 그는 “두루 다녔다” ─ diw,deue 말하자면 그는 “순회” 전도자였다. 어느 한 장소에서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광선을 사방에 폈다. Circumibat ─ 즉 그는 순회 여행을 했다. 마치 사사의 한 사람처럼 일했다. 아마 “새로운” 곳일수록 자기의 전도가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어디서” 전도했는가 ? ─ 그는 “두루 다녔다” ─ diw,deue 말하자면 그는 “순회” 전도자였다. 어느 한 장소에서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광선을 사방에 폈다. Circumibat ─ 즉 그는 순회 여행을 했다. 마치 사사의 한 사람처럼 일했다. 아마 “새로운” 곳일수록 자기의 전도가 더 잘 “받아들여지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는 “각 성(모든 도회지)을 두루” 다녔다. 어떤 성읍도 무시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다. 그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을 다녔듯이, 그 제자들은 지상의 모든 민족의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는 또한 “성읍”(도회지)에만 한정하지 않고, 평범한 시골민들이 사는 “촌”에도 갔다. 즉 “촌의 거민들에게도” 전도하신 것이다(사 5:11). 2. 그는 무엇을 전도했는가 ? ─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르쳐 주었다.” 즉 사람들 중에 지금 그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식은 “기쁜 소식”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 온 소식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충성”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는 모든 자들을 “기꺼이 자기의 보호하에” 두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인생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개혁”과 “화해”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는 기쁜 소식이었다.

3. 그의 수행자들은 누구였는가? “열 둘이 그와 함께 했다.” 즉 그리스도가 계실 때에는 그의 전도에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이 후에 기회가 오면 무엇을 전하고 어떻게 전도하는지를 그에게서 배우는 일에 함께 했고, 그리스도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보냄을 받음으로써 함께 하는 자들이었다. 그의 지혜를 들을 수 있었던 이러한 그의 종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그는 무엇을 전도했는가 ? ─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르쳐 주었다.” 즉 사람들 중에 지금 그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식은 “기쁜 소식”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 온 소식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충성”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는 모든 자들을 “기꺼이 자기의 보호하에” 두시려 하신다는 사실을 인생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개혁”과 “화해”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는 기쁜 소식이었다.그의 수행자들은 누구였는가? “열 둘이 그와 함께 했다.” 즉 그리스도가 계실 때에는 그의 전도에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이 후에 기회가 오면 무엇을 전하고 어떻게 전도하는지를 그에게서 배우는 일에 함께 했고, 그리스도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보냄을 받음으로써 함께 하는 자들이었다. 그의 지혜를 들을 수 있었던 이러한 그의 종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Ⅱ. 그는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어디서 조달했는가 ?” 그는 자기 친구들의 친절을 먹고살았다. 종종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동하면서 “자기들의 소유로 그를(한글은 복수-역주) 섬기던” “어떤 여인들”이 있었다(2, 3절). 그들 중 일부의 이름이 나와 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다른” 여인들이 있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열심이었고, 그래서 “그것(가르침)을 장려하는” 것이 자기들의 “정당”한 의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의 그 은혜를 입었으므로 또 “자비”를 베풀어서 많은 다른 자들도 자기들처럼 그런 은혜를 입기를 비는 자들이었다. 1. 대부분의 지역에 “그리스도의 회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권능과 자비의 기념비들이다. 그들은 “그에 의해서 악령과 질병을 고침 받은” 자들이다. 어떤 자들은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며, 우울하게 지냈고, 또 어떤 자들은 몸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 모두에게 유력한 치유자가 되어 주었다. 그는 그들의 몸과 영혼의 양편의 의원이시며, “그에게 고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자기들이 “그에게 보답할까”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그를 수종들어야 하며, 그것이 곧 우리가 다시 악에 빠졌을 경우 도움을 쉽사리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과 우리를 “구원해”주는 방편이 되었던 것, 곧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들어야 한다.

2. 그 중의 한 연인이 “일곱 귀신에게서 해방된” 막달라 마리아였다. 부정확한 숫자가 있는가 하면, 정확한 숫자가 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매우 사악했던” 여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앞에서(7:37) 언급되었던 그 “죄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 “그리스도의 회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권능과 자비의 기념비들이다. 그들은 “그에 의해서 악령과 질병을 고침 받은” 자들이다. 어떤 자들은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며, 우울하게 지냈고, 또 어떤 자들은 몸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 모두에게 유력한 치유자가 되어 주었다. 그는 그들의 몸과 영혼의 양편의 의원이시며, “그에게 고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자기들이 “그에게 보답할까”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그를 수종들어야 하며, 그것이 곧 우리가 다시 악에 빠졌을 경우 도움을 쉽사리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과 우리를 “구원해”주는 방편이 되었던 것, 곧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들어야 한다.그 중의 한 연인이 “일곱 귀신에게서 해방된” 막달라 마리아였다. 부정확한 숫자가 있는가 하면, 정확한 숫자가 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매우 사악했던” 여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앞에서(7:37) 언급되었던 그 “죄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탈무드경의 어떤 저작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는 “머리를 딴 마리아”란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녀의 부정함과 치욕된 시절을 나타내는 말이다. 왜냐하면 “머리를 땋는 것”은 “정숙한 단장”과는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딤전 2:9). 그러나 그녀가 과거에는 부정한 여인이었을지라도, 회개하고 개심 함으로써 그녀는 자비를 얻었고, 열심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에게도 용서받을 희망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한 과거에 악했던 자들은 회심하고 나면, 그것에 반비례하여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또는 그녀는 “대단히 우울했던” 여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슬픔 마음”을 지녔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요, 나중에 그녀는 베다니로 이사간 것이다. 막달라란 말은 “우울한 마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일 가능성이 짙다. 그런데 그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무덤에까지 대동한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절친한 친구요 총애를 받던 이 여인이 그 자리에 대동하지 아니했든가, 아니면 갔더라도 복음서 기자들이 그녀를 모르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어느 경우도 있을 법하다고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라이트푸트 박사의 거론이다. 그러나 이런 이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가 “갈릴리서부터 예수를 따라 온 여인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마 27:55, 56). 반면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베다니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3. 그들 중 다른 하나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이다. 그녀는 (혹자의 말에 의하면) 전에는 구사의 아내였으나 지금은 과부가 되었고, 좋은 여건 속에 살았다. 만일 지금도 구사의 아내라면, 우리는 그녀의 “남편”은, 비록 헤롯의 궁정에 기용되어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기 아내가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고 그리스도에게 재물로 봉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쾌히 허락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4. 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그리스도를 섬기는”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구주가 자신을 얼마나 낮추셨는가 함을 엿볼 수 있는 실례가 된다. 그는 그런 도움이 필요로 할만큼 비천한 데로 낮아지셨고, 그런 도움을 받아들이실 만큼 겸손하셨던 것이다. 그는 비록 부자였지만, 우리를 인하여 “그는 가난해졌다” 그래서 기부해 주는 자선금으로 살아나갔다. 그들 중 다른 하나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이다. 그녀는 (혹자의 말에 의하면) 전에는 구사의 아내였으나 지금은 과부가 되었고, 좋은 여건 속에 살았다. 만일 지금도 구사의 아내라면, 우리는 그녀의 “남편”은, 비록 헤롯의 궁정에 기용되어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기 아내가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고 그리스도에게 재물로 봉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쾌히 허락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그리스도를 섬기는”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구주가 자신을 얼마나 낮추셨는가 함을 엿볼 수 있는 실례가 된다. 그는 그런 도움이 필요로 할만큼 비천한 데로 낮아지셨고, 그런 도움을 받아들이실 만큼 겸손하셨던 것이다. 그는 비록 부자였지만, 우리를 인하여 “그는 가난해졌다” 그래서 기부해 주는 자선금으로 살아나갔다. 하나님의 섭리가 궁핍으로 몰아넣었을 때, 어떤 자들이 이웃의 자선으로 살아나가게끔 되어 남의 신세를 진다고 하여 결코 그들을 조롱하지 말라. 오히려 그런 자들로 하여금 호의를 구하게 하고, 그 호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자. 그리스도도 자기가 전도하러 들어간 도회지나 시골의 낮선 자들에게 부담을 지우기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과 자기의 제자들의 생계를 신세지는 편을 택하셨던 것이다. 말씀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에게 각종 좋은 것으로 교육해 주는 자들에게 상호부조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렇듯 아낌없고 활달한 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가지고 주님을 공경했다. 그리하여 저들은 자기들의 소유에 또한 축복을 가져왔던 것이다.

8:4 씨 뿌림의 비유 (누가복음 8:4-21) 앞 대목에서는 그리스도가 “전도”에 열심하고 있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했다(1절). 이 대목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는데 열심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4절). 그는 전도하시려고 “각성(各姓)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들의 마을에 왔을 때 그곳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 “각 동리에서 그에게로” 나아온 자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오기까지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고, 또 그가 “자기들”을 떠나더라도 만족하다고 생각지 않던 자들이요, 그가 자기들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만나고,” 자기들을 떠나려 할 때는 “그를 좇으려고”했던 자들이다. 또한 그는 “그에게도 나아온” 자들이 사는 그 마을에서 “나온” 자들에게로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도 있는가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게 나아올 만큼 열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따라서 그는 지극히 겸손했으므로, 그는 친히 그들에게 나아가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를 찾지 아니한 자들 속에서 발견된다”고 했기 때문이다(사 45:1). 마치 큰 대회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했다. 그물을 던져야 할 고기들이 풍부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배를” 준비했듯이, 그리스도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가르치기를” 기뻐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Ⅰ. “씨 부리는 자”의 비유 속에서는 말씀을 듣는 데에 필요하고도 우수한 법칙과 주의사항이 있으며, 그 해설과 의미 활용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두 번씩이나 자세히 살펴본 것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자, 1. 제자들은 그 의미에 대해서 “뜻을 물었다”(9절). 그들은 물었다.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의 내연(內延)과 외연(外延)을 알려고 애써서, 지식에 잘못이나 결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리스도는 그 비유가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밝히 깨닫게 해 주심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심오성과 의미를 잘 알게 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런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그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느니라”(10절). 제자들은 그 의미에 대해서 “뜻을 물었다”(9절). 그들은 물었다.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의 내연(內延)과 외연(外延)을 알려고 애써서, 지식에 잘못이나 결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그리스도는 그 비유가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밝히 깨닫게 해 주심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심오성과 의미를 잘 알게 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런 것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다. “그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느니라”(10절).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으려는 자들은, 자기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대한 특권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는 그런 때에 자기들에게 그 교훈의 뜻이 밝히 드러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하는 것을 알아서 중히 여길 줄 알아야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비유”로서 끝나고 마는 바로 그것이 ─ 그래서 그들은 단지 “감탄할” 말이다 ─ 우리들에게는 “알기 쉬운 진리”로 드러난다면, 우리들이야말로 행복한 자들이요, 영원토록 자유로운 은총에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진리에 의해서 “비추임을 받고” “다스림을 받으며,” 또한 그러한 형태로 우리는 지음을 받도록 “인도된다.”

(1)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에 대해서는 “토양”과 같다. 마음은 그것을 받을 역량이 있다. 또 그 열매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씨가 거기에 뿌려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도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와 “토양”을 병행시키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뿌려지지” 아니했다면, 우리가 성서 속에 “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리고 그 씨앗이 뿌려지지 않았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토양이 있은들 무슨 소용 있으랴?

(2) “씨뿌림의 성공” 여부는 토양의 성질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즉 그 토양이 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져 있느냐 없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됨됨이”에 따라서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도 되고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향기도 된다.”

(3) 마귀는 미묘하고 짓궂은 원수다. 그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유익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이다. 그는 “부주의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말씀을 빼앗아감으로써, “그들이 믿어 구원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만든다(12절).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에 대해서는 “토양”과 같다. 마음은 그것을 받을 역량이 있다. 또 그 열매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씨가 거기에 뿌려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도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와 “토양”을 병행시키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뿌려지지” 아니했다면, 우리가 성서 속에 “씨”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그리고 그 씨앗이 뿌려지지 않았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토양이 있은들 무슨 소용 있으랴?”씨뿌림의 성공” 여부는 토양의 성질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즉 그 토양이 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져 있느냐 없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됨됨이”에 따라서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도 되고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향기도 된다.”마귀는 미묘하고 짓궂은 원수다. 그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유익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이다. 그는 “부주의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말씀을 빼앗아감으로써, “그들이 믿어 구원받게 되는 일이 없도록” 만든다(12절). 이러한 사실이 부가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1] 우리는 “믿지” 않고는 “구원받지” 못한다. 복음의 말씀은 거기에 신앙이란 것이 혼합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2] 그러므로 마귀는 온갖 수단을 다하여 우리에게서 “믿음”을 앗아가려 하며,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었을 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게끔 만든다. 또는 그 말씀이 당장 우리에게 필요해진 때에, 잊어버리게 하거나 떠내려가게 만든다(히 2:1). 또는 다시 우리가 기억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그 말씀에 대한 나쁜 편견을 유발시키거나, 다른 데로 우리의 마음을 “돌린다.” “우리가 믿어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즉 우리가 믿어 “기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 온갖 일을 다하면서, 마귀는 믿고 “떤다.”

(4) 하나님의 말씀이 “부주의하게” 들려지는 곳에는, 역시 말씀에 대한 “경멸”이 있게 되기가 일쑤이다. 이 비유에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밟혔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5절). 실상 고의적으로 말씀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리는 자들은 그 말씀을 자기들의 발로 짓밟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계명을 경멸한다.”

(5) 말씀에 대해서 “다소”의 감명을 받았으나 “깊고” “지속적인” 감명을 받지 못한 자들은 시련의 시기가 오면 자기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만다. 그런 자들은 돌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뿌리가 없다(13절). 이들은 “잠깐 동안은 믿으나,”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뭔가를 고백하고 약속하나, “시험의 때가 오면 그들은 넘어져서” 좋은 출발점을 이탈하게 된다. 세상의 미소나 짓궂은 장난에서 시험이 오게 되면 그들은 쉽사리 정복되고 만다.

(6) “현생의 쾌락”은, 말씀이라는 좋은 씨앗에 대해서는 다른 요인들처럼 그 씨앗을 질식시켜 버릴, 위험하고 해로운 가시덤불과 같다.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데, 여기에 덧붙여 있는 것이다(14절). “현생의 염려에 휘말려 들지 않고,”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으며, 자기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죽은 자들임을 자랑하는 자들은 여전히 헛된 태만과 안일과 쾌락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늘과는 차단될 수가 있다. 감각의 환희는 영혼을 파멸시킬 수 있다. 아무리 합법적인 즐거움이라도 거기에 참석해 있는 자들의 즐거움이 바로 그러하다.

(7) 단지 열매를 맺은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완전에 이른 결실을 해야”하는 것이다. 즉 완전히 성숙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혀 열매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결실치 못한” 것이라 한 말을 여기서는 “온전히 결실치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at ─ 즉 견인(堅忍)이 일의 완성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8)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은 “정직하고 좋은 마음”을 말하여, 가르침과 계명을 받을 자세가 잘 된 마음이다(15절). 죄악 된 타락에 물들지 않은 마음, 하나님과 의무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 정직하고 부드러운 마음, “말씀을 듣고 떠는” 마음이 바로 착하고 좋은 마음이니, 그런 마음은 들은 것을 “이해하고”(마태복음에는 그렇다), 그것을 “받아들이며”(마가복음에는 그렇다), 그것을 “간직한다”(본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마치 토양이 씨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함과 같다. 또한 배가 음식물이나 약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도 하는 것과 같다.

(9) 말씀을 잘 간직하는 곳에는, “인내로써” 결실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견디는” 인내와 또한 “기다리는” 인내가 모두 필요하다. 즉 “말씀 때문에” 일어나게 될 “소동”과 “박해”를 감수하는 인내,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지속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10)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듣는 가를 조심하게” 될 것이다(18절). 우리가 들은 말씀에서 유익을 얻게 됨을 방해할 만한 것을 조심하며, 듣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말씀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부주의하거나 가벼이 듣지 “않도록” 조심하고 어떤 경우에든지 우리가 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나쁜 편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우리가 일단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우리의 정신 자세를 살펴서, 우리가 얻은 유익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우리는 “믿지” 않고는 “구원받지” 못한다. 복음의 말씀은 거기에 신앙이란 것이 혼합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마귀는 온갖 수단을 다하여 우리에게서 “믿음”을 앗아가려 하며,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었을 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게끔 만든다. 또는 그 말씀이 당장 우리에게 필요해진 때에, 잊어버리게 하거나 떠내려가게 만든다(히 2:1). 또는 다시 우리가 기억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그 말씀에 대한 나쁜 편견을 유발시키거나, 다른 데로 우리의 마음을 “돌린다.” “우리가 믿어 구원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즉 우리가 믿어 “기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서 온갖 일을 다하면서, 마귀는 믿고 “떤다.”하나님의 말씀이 “부주의하게” 들려지는 곳에는, 역시 말씀에 대한 “경멸”이 있게 되기가 일쑤이다. 이 비유에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밟혔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5절). 실상 고의적으로 말씀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리는 자들은 그 말씀을 자기들의 발로 짓밟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계명을 경멸한다.”말씀에 대해서 “다소”의 감명을 받았으나 “깊고” “지속적인” 감명을 받지 못한 자들은 시련의 시기가 오면 자기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만다. 그런 자들은 돌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뿌리가 없다(13절). 이들은 “잠깐 동안은 믿으나,”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뭔가를 고백하고 약속하나, “시험의 때가 오면 그들은 넘어져서” 좋은 출발점을 이탈하게 된다. 세상의 미소나 짓궂은 장난에서 시험이 오게 되면 그들은 쉽사리 정복되고 만다.”현생의 쾌락”은, 말씀이라는 좋은 씨앗에 대해서는 다른 요인들처럼 그 씨앗을 질식시켜 버릴, 위험하고 해로운 가시덤불과 같다.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데, 여기에 덧붙여 있는 것이다(14절). “현생의 염려에 휘말려 들지 않고,”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으며, 자기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죽은 자들임을 자랑하는 자들은 여전히 헛된 태만과 안일과 쾌락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늘과는 차단될 수가 있다. 감각의 환희는 영혼을 파멸시킬 수 있다. 아무리 합법적인 즐거움이라도 거기에 참석해 있는 자들의 즐거움이 바로 그러하다.단지 열매를 맺은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완전에 이른 결실을 해야”하는 것이다. 즉 완전히 성숙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혀 열매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결실치 못한” 것이라 한 말을 여기서는 “온전히 결실치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factum non dicitur quod non perseverat ─ 즉 견인(堅忍)이 일의 완성에 필요하기 때문이다.”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은 “정직하고 좋은 마음”을 말하여, 가르침과 계명을 받을 자세가 잘 된 마음이다(15절). 죄악 된 타락에 물들지 않은 마음, 하나님과 의무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 정직하고 부드러운 마음, “말씀을 듣고 떠는” 마음이 바로 착하고 좋은 마음이니, 그런 마음은 들은 것을 “이해하고”(마태복음에는 그렇다), 그것을 “받아들이며”(마가복음에는 그렇다), 그것을 “간직한다”(본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마치 토양이 씨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함과 같다. 또한 배가 음식물이나 약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간직도 하는 것과 같다.말씀을 잘 간직하는 곳에는, “인내로써” 결실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견디는” 인내와 또한 “기다리는” 인내가 모두 필요하다. 즉 “말씀 때문에” 일어나게 될 “소동”과 “박해”를 감수하는 인내,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지속하는 인내가 필요하다.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듣는 가를 조심하게” 될 것이다(18절). 우리가 들은 말씀에서 유익을 얻게 됨을 방해할 만한 것을 조심하며, 듣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그 말씀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부주의하거나 가벼이 듣지 “않도록” 조심하고 어떤 경우에든지 우리가 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나쁜 편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우리가 일단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우리의 정신 자세를 살펴서, 우리가 얻은 유익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Ⅱ.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이미 들은 사람들에게 대한 요긴한 지시 사항이 있다. 1.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대로 섬겨야”한다. 복음의 경륜을 위탁받은 사역자들, 곧 말씀으로 유익을 얻었고, 그래서 남들에게로 그런 유익을 끼칠 자격을 구비하게 된 자들은 자기들이 “불이 켜진 등경”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엄숙하게, 권위를 가지고 전도하고, 사람들은 형제애를 가지고 그들의 강론을 들어서, 그들의 불빛을 퍼지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등경”을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16절).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등불은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그들은 “선해야”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해야” 한다.

2. 지금 당장은 “은밀히” 되었고, 보이지 않는 샘에서 솟아났던 일도 멀지않아 “드러나서 알려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17절). 당신에게 “은밀하게” 맡겨진 일을 “당신 자신이” 밝히 드러내야 하리라. 왜냐하면, 당신의 조물주는 당신에게 당신의 재능을 묻어두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사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숨겨진 것이라도 “알게”하자, “당신이”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을 고발하는” 것으로 드러나서 당신의 부정함을 입증하는 증인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교화에 쓰느냐, 쓰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지속되든가 사라지든가 한다. “가진 자에게 주어지게 되리라”(18절). 은사를 가지고 그것으로 선행을 하는 자는 더욱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재능을 묻어 두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가지지 않은 자에게서는 “그 가진 것까지” 빼앗을 것이다(마가복음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즉 그가 “가진 줄로 알고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것이다(누가복음은 이렇게 되어 있다). 잃어버리게 될 은총은 단지 은총으로 “보이는” 은총일 뿐 “참된” 은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사람들이 “사용하지”않음은 단지 가진 “줄로 알기만”함과 같고, 종교의 허식은 결국 사라지고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서 나갔다. 그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2:19). 우리가 은혜를 신실히 간직하는 것은 우리 속에 “일의 뿌리”가 있게 하는 것임을 알자(욥 19:28 참조). 즉 그것이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아니하는 좋은 비결이다.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대로 섬겨야”한다. 복음의 경륜을 위탁받은 사역자들, 곧 말씀으로 유익을 얻었고, 그래서 남들에게로 그런 유익을 끼칠 자격을 구비하게 된 자들은 자기들이 “불이 켜진 등경”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엄숙하게, 권위를 가지고 전도하고, 사람들은 형제애를 가지고 그들의 강론을 들어서, 그들의 불빛을 퍼지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등경”을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16절).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등불은 사람들 앞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그들은 “선해야”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해야” 한다.지금 당장은 “은밀히” 되었고, 보이지 않는 샘에서 솟아났던 일도 멀지않아 “드러나서 알려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17절). 당신에게 “은밀하게” 맡겨진 일을 “당신 자신이” 밝히 드러내야 하리라. 왜냐하면, 당신의 조물주는 당신에게 당신의 재능을 묻어두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사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숨겨진 것이라도 “알게”하자, “당신이”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을 고발하는” 것으로 드러나서 당신의 부정함을 입증하는 증인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교화에 쓰느냐, 쓰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지속되든가 사라지든가 한다. “가진 자에게 주어지게 되리라”(18절). 은사를 가지고 그것으로 선행을 하는 자는 더욱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재능을 묻어 두는” 자는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가지지 않은 자에게서는 “그 가진 것까지” 빼앗을 것이다(마가복음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즉 그가 “가진 줄로 알고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것이다(누가복음은 이렇게 되어 있다). 잃어버리게 될 은총은 단지 은총으로 “보이는” 은총일 뿐 “참된” 은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사람들이 “사용하지”않음은 단지 가진 “줄로 알기만”함과 같고, 종교의 허식은 결국 사라지고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서 나갔다. 그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2:19). 우리가 은혜를 신실히 간직하는 것은 우리 속에 “일의 뿌리”가 있게 하는 것임을 알자(욥 19:28 참조). 즉 그것이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아니하는 좋은 비결이다. Ⅲ. “실행하는 자”가 됨으로써, 특히 그리스도가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인척보다도 실행자를 더욱 귀히 여김으로써 자기의 제자들에게 보여 준 본(19-21절)을 따라서, “말씀을” 신실하게 “듣는 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자들에게 커다란 격려의 말씀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두 번이나 살펴본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점을 관찰해 보자. 1. 많은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예수에게 시중드는 무리들이 많았으므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지만, 예수는 자기의 회중에게서 밀려나가려 하지는 않으셨다.

2. 그의 가까운 친척 중의 어떤 자들은 조금도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제때에 왔더라면 쉽사리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여 그를 “맞아들이는” 대산, “그를 보기도” 싫어하여 “밖에다” 세워 두었다. 많은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예수에게 시중드는 무리들이 많았으므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많이 모여들었지만, 예수는 자기의 회중에게서 밀려나가려 하지는 않으셨다.그의 가까운 친척 중의 어떤 자들은 조금도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제때에 왔더라면 쉽사리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여 그를 “맞아들이는” 대산, “그를 보기도” 싫어하여 “밖에다” 세워 두었다. 아마 그들은 어리석은 두려움이 들어, 그가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게 하려고, 방해하려는 생각만 했고, 그의 말이 중단되게 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친구들과 이야기하기보다는 자기의 일에 분주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자기의 “모친과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자기의 전도를 중단하고자 하지는 않으셨다. 그 전도가 그의 “먹고 마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자기의 가장 가깝고 귀중한 친척들이라는 사실을 쾌히 인정하셨다. 그런 자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더 중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친구들과 이야기하기보다는 자기의 일에 분주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자기의 “모친과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자기의 전도를 중단하고자 하지는 않으셨다. 그 전도가 그의 “먹고 마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자기의 가장 가깝고 귀중한 친척들이라는 사실을 쾌히 인정하셨다. 그런 자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더 중했기 때문이다.

8:22 풍랑을 이기신 그리스도 (누가복음 8:22-39) 우리는 여기서 이미 보아왔던 우리 주 예수의 권능을 입증해 주는 두 가지의 놀라운 사례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바람”을 지배하시는 그의 권능과 “마귀”를 지배하는 그의 권능에 대한 증명이다(막 4:5 참조). Ⅰ. 그는 바람을 제어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즉 인간들에게, 특히 바다에서는 더욱 무서운 공포를 야기시키는 “공중 권세”를 제어하는 권능이신데, 그 권세는 때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관찰해 볼 것이 있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바다로 나가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그가 바다를 잠잠케 하심으로써 바다에서 자기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자 함이었고, 그 바다 건너쪽에 있는 가엾은, 신들린 사람을 고쳐주는 자비를 보여 주시고자 함이었다. “그는 제사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다”(22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그리스도의 현존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면, 그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가 그들과 동행했다면, 그들은 어디를 가나 안심하고 전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라사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고 했다. 그가 거기에 가서 해야 할 선한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금 돌아서, 육로를 이용하여 그 바다(호수)를 건너가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배로” 감으로써, 그의 “깊은 기사(奇事)”를 보여 주실 수 있는 길을 택하셨다.

2. 고요히 바다에 나아간 자, 그리고 또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아간 자들도 역시 “풍랑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그 풍랑에서 지극히 큰 위험을 만날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광풍이 그 호수로 내리쳤다”고 했는데(23절), 이것은 다른 지역에는 없는 바람이 그 지역에만 출현했다는 듯한 표현이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기 때문에 배가 요동하게 되었고, 그들의 목숨은 위기에 빠졌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바다로 나가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그가 바다를 잠잠케 하심으로써 바다에서 자기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자 함이었고, 그 바다 건너쪽에 있는 가엾은, 신들린 사람을 고쳐주는 자비를 보여 주시고자 함이었다. “그는 제사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다”(22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그리스도의 현존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면, 그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가 그들과 동행했다면, 그들은 어디를 가나 안심하고 전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가라사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고 했다. 그가 거기에 가서 해야 할 선한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금 돌아서, 육로를 이용하여 그 바다(호수)를 건너가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배로” 감으로써, 그의 “깊은 기사(奇事)”를 보여 주실 수 있는 길을 택하셨다.고요히 바다에 나아간 자, 그리고 또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아간 자들도 역시 “풍랑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그 풍랑에서 지극히 큰 위험을 만날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광풍이 그 호수로 내리쳤다”고 했는데(23절), 이것은 다른 지역에는 없는 바람이 그 지역에만 출현했다는 듯한 표현이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기 때문에 배가 요동하게 되었고, 그들의 목숨은 위기에 빠졌다. 마귀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임금”이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바람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 마귀는 그리스도가 지금 그 호수 건너편에 있는 불쌍한 사람에게서 마귀의 군대를 내쫓으려고 호소를 건너려 하지만, 과연 말씀 몇 마디로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을 품고는,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물에 빠져 죽게 하려고 그의 배를 광풍으로 공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승리를 미리 막으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 폭풍 속에서도 “주무시고” 계셨다(23절). 그에게는 육체에 기운이 다소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자기의 일에 가능한 한 아무런 방해도 일어나지 않을 그런 길을 택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바다 가운데서도, 그 광풍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임재를 실제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는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들의 구제에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듯이 보였다. 아니, 만사가 최악의 사태로 변해가고 있는 때에도 그리스도는 자기들을 위해 나서지 않으려는 듯이 보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그들의 신앙과 인내심을 연단하시고, 그들이 구원이 막상 닥쳐왔을 때는 그들이 그 구원을 더욱 기쁨으로 맞을 수 있게 끔 하신 것이다.

4. 우리의 위험, 교회가 처한 곤경을 그리스도께 탄원하는 길은 그를 깨워서 우리 앞에 나서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24절). 저들은 소리쳤다. “주님, 우리가 죽겠나이다 !” 우리의 공포를 침묵케 하는 길은 그 공포를 그리스도께로 가져다가 그 앞에 내려놓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들, 그리고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그를 “자기들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죽도록” 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능히 가질 수 있다. 죄책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가엾은 자들에게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는다면, 나는 망하겠나이다 !”라고 부르짖는 길밖에는 구제책이 없다.

5. 그리스도의 업무는 “광풍을 잔잔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업무는 “광풍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지금 하셨다. 그는 그런 일을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땅 위에 평화를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 폭풍 속에서도 “주무시고” 계셨다(23절). 그에게는 육체에 기운이 다소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자기의 일에 가능한 한 아무런 방해도 일어나지 않을 그런 길을 택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바다 가운데서도, 그 광풍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임재를 실제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는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들의 구제에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듯이 보였다. 아니, 만사가 최악의 사태로 변해가고 있는 때에도 그리스도는 자기들을 위해 나서지 않으려는 듯이 보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그들의 신앙과 인내심을 연단하시고, 그들이 구원이 막상 닥쳐왔을 때는 그들이 그 구원을 더욱 기쁨으로 맞을 수 있게 끔 하신 것이다.우리의 위험, 교회가 처한 곤경을 그리스도께 탄원하는 길은 그를 깨워서 우리 앞에 나서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24절). 저들은 소리쳤다. “주님, 우리가 죽겠나이다 !” 우리의 공포를 침묵케 하는 길은 그 공포를 그리스도께로 가져다가 그 앞에 내려놓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들, 그리고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그를 “자기들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죽도록” 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능히 가질 수 있다. 죄책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공포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가엾은 자들에게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는다면, 나는 망하겠나이다 !”라고 부르짖는 길밖에는 구제책이 없다.그리스도의 업무는 “광풍을 잔잔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업무는 “광풍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지금 하셨다. 그는 그런 일을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땅 위에 평화를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는 “바람과 노한 물결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쳤다”(24절). 다른 경우에서처럼 차차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돌연히 “크게 잠잠해졌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마귀가 공중 권세를 잡은 임금인 양 날뛰지만 여전히 자기가 마귀를 사슬에 묶어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6. 우리의 위험이 끝나고 나면, 우리가 겁을 먹었던 일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전능에 대해서 찬양을 드려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 “풍랑”을 “고요”로 변화시키시자, “그들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했다”(시 107:30). 그리고 나서

(1) 그리스도는 그들의 과도한 공포를 책망하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25절).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믿음을 사용해야 될 때가 오면 다시금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자연의 현상이 불길해지면, 공포에 떨고 낙담한다. 하찮은 것이 그들을 낙심시켰다. 그때 “그들의 믿음은 어디에 있었는가?”

(2) 그들은 그의 권능 때문에 그에게 찬양을 드렸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풍랑을 무서워하던 자들은, 이제 그 풍랑이 물러가자, 그 풍랑을 침묵시킨 그리스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쩐 사람인가 !’ 하나라.” 아마 그들은 “주와 같은 신이 누구이오니까?”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다의 소리와 그 물결의 소리를 고요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이기 때문이다(시 65:7). 우리의 위험이 끝나고 나면, 우리가 겁을 먹었던 일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전능에 대해서 찬양을 드려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 “풍랑”을 “고요”로 변화시키시자, “그들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했다”(시 107:30). 그리고 나서그리스도는 그들의 과도한 공포를 책망하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25절).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믿음을 사용해야 될 때가 오면 다시금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자연의 현상이 불길해지면, 공포에 떨고 낙담한다. 하찮은 것이 그들을 낙심시켰다. 그때 “그들의 믿음은 어디에 있었는가?”그들은 그의 권능 때문에 그에게 찬양을 드렸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풍랑을 무서워하던 자들은, 이제 그 풍랑이 물러가자, 그 풍랑을 침묵시킨 그리스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쩐 사람인가 !’ 하나라.” 아마 그들은 “주와 같은 신이 누구이오니까?”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다의 소리와 그 물결의 소리를 고요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이기 때문이다(시 65:7). Ⅱ. 그리스도의 권능은 “마귀,” 곧 “공중 권세를 잡은 왕”을 제어한다. 이 이야기의 그 다음 대목에 가 보면, 그리스도는 “바람”을 명령하셨을 때보다 더욱 가까이 접근하여 마귀와 대결하심을 볼 수 있다. 바람이 조용해지고 나자, 그들은 그들이 소망하던 항구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들은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해변으로 나아갔다(26, 27절). 거기서 그리스도는 즉시 그의 일거리를 만났다. 그는 풍랑을 뚫고 끝까지 그 일을 수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에서 이 더럽고 악의에 가득찬 영들의 세계에 간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영들이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은 꼭 같은 식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악령들에 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1. 이 악령들의 수효는 대단히 “많다.” 이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의 이름은 자칭 “군대”였다(30절). “많은 마귀들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귀에” 걸려 있던 자이다(27절). 그러나 그를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던 자들은 아마 우리 구주께서 자기들을 공격하려고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 싸움이 “결정적인’ 전투가 되리라고 판정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풍랑으로 그를 저지시키려 했으나 불가능했던 점을 알았고, 이제는 이렇게 많은 더러운 귀신들을 그가 쫓아내지야 못하겠지 하고 바라면서 그를 패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군대”였든가, 아니면 적어도 군대로 여김을 받아서, “깃발을 든 군대”처럼 막강한 존재로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최소한 로마의 “제 2 군단”- 이들은 오랫동안 체스터(Chester)에 주둔했었다 -을 본따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은 legio victrix – 즉 승리하는 군대였다.

2. 그들은 사람들에게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편의와 행복을 싫어한다. 악마에게 잡혀서 오랫동안 고생하는 이 사람은 그들의 권세에 조정되어 “옷을 입지 아니하고, 집에 거하지도 아니했다”(27절). “의복”과 “주거”가 인간 생활의 2대 필수 요건 중의 하나였지만 말이다. 나아가 인간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므로, 그 악마들은 이 사람을 조종하여 “무덤 사이에 거하게” 했고, 본인에게나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의 생을 지겨워하는 자이 삶을 살아야 했고, “차라리 죽음을 원하게” 되었다.

3. 그들은 대단히 “강했고 힘이 셌다.” 통제할 수 없었고,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랑과 쇠사슬에 매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해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맨 것을 끊었다”(29절). 이 악령들의 수효는 대단히 “많다.” 이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의 이름은 자칭 “군대”였다(30절). “많은 마귀들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귀에” 걸려 있던 자이다(27절). 그러나 그를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던 자들은 아마 우리 구주께서 자기들을 공격하려고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 싸움이 “결정적인’ 전투가 되리라고 판정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풍랑으로 그를 저지시키려 했으나 불가능했던 점을 알았고, 이제는 이렇게 많은 더러운 귀신들을 그가 쫓아내지야 못하겠지 하고 바라면서 그를 패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군대”였든가, 아니면 적어도 군대로 여김을 받아서, “깃발을 든 군대”처럼 막강한 존재로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최소한 로마의 “제 2 군단”- 이들은 오랫동안 체스터(Chester)에 주둔했었다 -을 본따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은 legio victrix – 즉 승리하는 군대였다.그들은 사람들에게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편의와 행복을 싫어한다. 악마에게 잡혀서 오랫동안 고생하는 이 사람은 그들의 권세에 조정되어 “옷을 입지 아니하고, 집에 거하지도 아니했다”(27절). “의복”과 “주거”가 인간 생활의 2대 필수 요건 중의 하나였지만 말이다. 나아가 인간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므로, 그 악마들은 이 사람을 조종하여 “무덤 사이에 거하게” 했고, 본인에게나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의 생을 지겨워하는 자이 삶을 살아야 했고, “차라리 죽음을 원하게” 되었다.그들은 대단히 “강했고 힘이 셌다.” 통제할 수 없었고,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랑과 쇠사슬에 매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해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맨 것을 끊었다”(29절). 어떤 힘으로도 “다스릴”수 없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들은 사탄의 정부의 앞잡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셈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들의 매는 끈을 끊어버리자.” 이것이 그들이 하는 말이요, 심지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자기들의 가장 귀한 친구들에게도 그러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구속도 받기 싫어하며, 단지 자기들의 자신의 유익이란 것 외에는 무엇이든 거부한다. “그는 악마에게 몰려갔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정부 아래 있는 자들은 사람의 끈과 사랑의 유대에 의해서 “민첩하게 이끌린다.” 그러나 악마의 정부 밑에 있는 자들은 “강포하게 몰린다.” 4. 그들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해 몹시 격노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지독히 무서워했다. 그들이 사로잡고 있던 ” 그 사람이 – 그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한다 – 예수를 보자,” 괴롭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 그의 진노를 무마하면서, 그를 “지극히 높으신 자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했다. 실상 그는 그들에 비하면 무한히 높으시고, 너무나 어려운 분이다. 그러나 그와의 어떤 동명이나 계약을 맺는 것도 단호히 거부했다(그것만으로도 아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독적인 트집을 능히 침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고 말했다. 악마들은 그리스도에게 봉사를 한다거나 그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러나 그들은 그의 권능과 진노만은 무서워했다.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했다. 그들은 “구하노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만 말했다. 지옥을 고통의 장소로 두려워하기만 하고, 천국을 성결과 사랑의 장소로서 동경하지 아니하는 자들, “그들이” 하는 말투가 무엇인가를 깨닫자.

5. 그들은 완전히 우리 주 예수의 “명령”과 “권능”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들도 그 점을 알았다. 그들은 eivj to.n a;busson – 즉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는 마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저갱이란 그들이 고통받을 곳이요, 그리스도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흑암의 모든 권세들이 주 예수의 견제와 조정 아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이야말로 주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 그는 그들을 모두 쇠사슬에 묶어두고 계신다. 그는 원하시기만 하면, 그들을 “그들의 본향”으로 보내실 수 있다.

6. 그들은 남을 “해하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제 이 가엾는 사람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을 알고는, “돼지의 무리”를 점령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32절). 처음에는 사람에게 들어가서 사람을 불행으로 몰아넣더니, 악마가 이제는 모든 피조물에게 그와 비슷한 저주를 가져왔고,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의 적대심의 연장의 한 발로로서, 그가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게 되자 돼지라도 멸망시키려고 한 것이다. 악마는 사람들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이제는 사람들의 재물-때때로 이것은 본문에서처럼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이간시키는 거대한 유혹이 되고 만다-을 해치고자 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해 몹시 격노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지독히 무서워했다. 그들이 사로잡고 있던 ” 그 사람이 – 그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한다 – 예수를 보자,” 괴롭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 그의 진노를 무마하면서, 그를 “지극히 높으신 자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했다. 실상 그는 그들에 비하면 무한히 높으시고, 너무나 어려운 분이다. 그러나 그와의 어떤 동명이나 계약을 맺는 것도 단호히 거부했다(그것만으로도 아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독적인 트집을 능히 침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고 말했다. 악마들은 그리스도에게 봉사를 한다거나 그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러나 그들은 그의 권능과 진노만은 무서워했다.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했다. 그들은 “구하노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만 말했다. 지옥을 고통의 장소로 두려워하기만 하고, 천국을 성결과 사랑의 장소로서 동경하지 아니하는 자들, “그들이” 하는 말투가 무엇인가를 깨닫자.그들은 완전히 우리 주 예수의 “명령”과 “권능”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들도 그 점을 알았다. 그들은 eivj to.n a;busson – 즉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는 마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저갱이란 그들이 고통받을 곳이요, 그리스도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흑암의 모든 권세들이 주 예수의 견제와 조정 아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이야말로 주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 그는 그들을 모두 쇠사슬에 묶어두고 계신다. 그는 원하시기만 하면, 그들을 “그들의 본향”으로 보내실 수 있다.그들은 남을 “해하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제 이 가엾는 사람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을 알고는, “돼지의 무리”를 점령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32절). 처음에는 사람에게 들어가서 사람을 불행으로 몰아넣더니, 악마가 이제는 모든 피조물에게 그와 비슷한 저주를 가져왔고,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의 적대심의 연장의 한 발로로서, 그가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게 되자 돼지라도 멸망시키려고 한 것이다. 악마는 사람들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이제는 사람들의 재물-때때로 이것은 본문에서처럼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이간시키는 거대한 유혹이 되고 만다-을 해치고자 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허락을 내리면, 그 악마가 그 마을에 어떤 피해를 끼칠지를 알면서도, “그들에게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했다.” 악마는 허락을 받자마자 “돼지”에게 들어갔다. 그러자 곧 돼지 때는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했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로잡은 자들이 파멸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비로운 기적이다. 이런 경우나 다른 사례는 울부짖는 사자와 붉은 용이 삼킬 “것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7. 악마의 권세가 파멸되면, 그 악마에게 걸렸던 자는 회복되어 올바른 정신을 갖게 된다. 이것은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자들은 자기 통제를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악마가 나간 그 사람이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고 했다(31절). 악마의 권세 밑에 있을 때에는 예수의 “앞에서 도망”하려던 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 이것은 그의 “정신이 온전”하여졌다는 표징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점령하시면, 그는 우리의 자율적 통치를 보장하신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점령하면, 그는 우리에게서 자율적 통치와 자아의 향유를 몰수한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권세를 전복시키자. 그리고 “예수”의 권세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그에게 드리자,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것이 되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악마의 권세가 파멸되면, 그 악마에게 걸렸던 자는 회복되어 올바른 정신을 갖게 된다. 이것은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자들은 자기 통제를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악마가 나간 그 사람이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고 했다(31절). 악마의 권세 밑에 있을 때에는 예수의 “앞에서 도망”하려던 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았다.” 이것은 그의 “정신이 온전”하여졌다는 표징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점령하시면, 그는 우리의 자율적 통치를 보장하신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점령하면, 그는 우리에게서 자율적 통치와 자아의 향유를 몰수한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권세를 전복시키자. 그리고 “예수”의 권세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그에게 드리자,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것이 되는 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람에게서 군대 악마를 내쫓아 낸 기적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 이 사건으로 자기들의 돼지를 잃은 그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돼지 치던 자들이 성내와 촌,” 즉 도시나 시골에 모두 “가서 고했다”(34절). 아마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분노를 조장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악마 들렸던 자들이 어떻게 고침받았든가”를 보고했다(36절). 즉 그들은 그가 악마를 돼지에게 보냄으로써 구원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돼지를 악마들의 수중으로 몰아버리지 않고는 그 사람을 악마들의 수중에서 구해낼 수 없었다는 식의 나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이 되어진 일을 보려고 나아왔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했다”(35절).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37절). 그들은 그 진상을 보고 놀랐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들은 고통받던 자기들의 한 불쌍한 형제가 구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의 발광으로 인해 공포로 떨고 있던 그 지방의 해방보다는 돼지의 죽음을 더 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 사람의 발광은 실상 그 지방이 공안 방해였었다. 이 사건으로 자기들의 돼지를 잃은 그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돼지 치던 자들이 성내와 촌,” 즉 도시나 시골에 모두 “가서 고했다”(34절). 아마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분노를 조장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악마 들렸던 자들이 어떻게 고침받았든가”를 보고했다(36절). 즉 그들은 그가 악마를 돼지에게 보냄으로써 구원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마치 그가 돼지를 악마들의 수중으로 몰아버리지 않고는 그 사람을 악마들의 수중에서 구해낼 수 없었다는 식의 나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이 되어진 일을 보려고 나아왔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했다”(35절).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37절). 그들은 그 진상을 보고 놀랐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들은 고통받던 자기들의 한 불쌍한 형제가 구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의 발광으로 인해 공포로 떨고 있던 그 지방의 해방보다는 돼지의 죽음을 더 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 사람의 발광은 실상 그 지방이 공안 방해였었다. 그리하여 “온 무리가 그리스도께서 더나가 주시기를 구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또 어떤 심판이 닥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를 잊으려 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 고아무도 자기들을 그에게 복종시키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는 배에 오르사, 돌아가셨다.” 자기들의 돼지를 더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구주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에 대한 자기들의 소망을 잃게 된다.

(2) 그 사건을 통해서 고쳐진 그 불쌍한 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남들이 “두려워했던” 것만큼, 그리스도의 일행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있게 되기를” 구했다. “그로 인하여 악령과 병에서 고침 받은” 다른 자들도(2절) 역시 그리스도가 보호인과 선생이 되어 주기를 빌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찬양을 위해 살게 되기를 구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떠나 주기를 바라는 그 거칠고 잔인한 거라사인들에게로 돌아가서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오, 나의 영혼아, 이 죄인들과 함께 보이지 말지니라 !” 그 사건을 통해서 고쳐진 그 불쌍한 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남들이 “두려워했던” 것만큼, 그리스도의 일행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있게 되기를” 구했다. “그로 인하여 악령과 병에서 고침 받은” 다른 자들도(2절) 역시 그리스도가 보호인과 선생이 되어 주기를 빌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찬양을 위해 살게 되기를 구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떠나 주기를 바라는 그 거칠고 잔인한 거라사인들에게로 돌아가서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오, 나의 영혼아, 이 죄인들과 함께 보이지 말지니라 !”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를 대동하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베푸신 그 위대한 일(기사)을 그를 아는 자들에게 알리도록 하시고자 하셨다. 그럼으로써 그가 과거에 그 지방의 짐이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 지방의 축복이 되게 하려 했던 것이다.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기회가 되기 위하여는 우리의 영적 은혜와 위안이라는 만족까지도 부정해야 한다. 아마 그리스도는 이것을 알았을 것이다. 돼지를 잃은 그들의 분노심이 조금 사라지면 그 기적을 다시금 생각해 보고, 그 사람을 자기 마을의 산 기념비로 삼고, 그 사건에 대한 조언자가 되어 달라고 하리라는 것을.

8:40 야이로의 딸의 소생 (누가복음 8:40-56) 그리스도는 거라사인들에게 쫓겨났다. 그들은 그에게 싫증이 났고, 그래서 그가 없어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호수를 건너서 “갈릴리인들”에게 돌아오자, 그들은 “그를 영접했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자 마음을 다해 “환영했다”(40절).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은혜를 “원치 않지만,” 또 어떤 사람은 “원한다.” 거라사인들은 모이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호수 건너편에서 일을 마치시고, 이쪽으로 오셨을 때 또 다시 새로운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행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기회가 없어서 선행을 못하는 법이 없다. 가난한 자는 항상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 대목 속에 두 가지의 기적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을 본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그렇다. 그 하나는 야이로의 딸의 소생이요, 다른 하나는 혈루증 앓던 여인이-예수께서 무리와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 고쳐진 사건이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렇다. Ⅰ. 한 회당장이 그리스도에게 “공공연한 발언”을 했다는 점이다. 그 회당장의 이름은 야이로였고, 자기의 어린 딸이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말씨는 대단히 겸손하고 경외에 찬 것이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지만,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렸다.” 마치 예수가 자기의 “위에” 있는 상급자임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대단히 간곡한 간청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집으로”와 달라고 “간구했다.” 믿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더구나 “말씀”만이라도 멀리서 한 마디 “해 주시면” 낫겠다고 하던 백부장 정도의 “생각”에도 못 미치는 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요청을 들어 주셨다. 그래서 “그는” 그와 “함께 갔다.” 강한 믿음이야말로 칭찬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믿음이라도 결코 거부될 수 없다. 병든 자와 죽은 자가 있는 집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예수께서 가고 있는 도중, “무리가 그를 옹위했다.” 어떤 자는 그를 보려는 호기심으로, 또 어떤 자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몰려 나왔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고 “선을 행하고” 있는 동안, 무리가 모여들어 법석을 떤다하여 불평을 하지 말자.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조용한 위치를 지키려 할 것이다. Ⅱ.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그리스도에게 “은밀히 간청”한 일이 있다. 혈루증이 그녀의 몸을 좀 먹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재산을 좀 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기의 생활비를 의원에게 모두 써버렸다”(한글 개혁과는 다름 – 역주). 그러나 조금도 낫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이다(43절). 그녀의 질병은 공공연하고 말할 수도 없는(여인으로서 수치스러워서) 그런 병이었다. 따라서 그는 “무리 중에” 끼여서 그리스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이 기회를 이용한 것이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를 “감추기”가 더욱 유리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대단히 “강했다.” 그녀는 자기가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능히 고침을 받을 줄로 확신해, 그리스도를 마치 차고 넘치는 자비의 샘물이라 생각하여 자기가 치료약을 “훔칠”수 있을 것이요, 그는 그것을 “모르리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이리하여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고,” “도움을 입었고,” 그래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 잃어버림을 당하던” 자들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던 자들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즉시 건강이 찾아온 것을 발견했다. 즉 자기의 병이 고쳐졌음을 알았다(44절).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안락한 교제를 나누듯이 또한 그들은 incognito─즉 은밀하게 그와 연락하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식물(食物)을 먹으며,” “이방인은 개입하지 못하는” “기쁨을” 향유한다. Ⅲ. 이 은밀한 치유가 “발각되었으니, 그것은 그 의원에도 영광이요 환자에게도 영광이었다.” 1. 그리스도는 치유가 되었음을 알았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46절). 그리스도께서부터 나간 능력으로 고침을 받은 자들은 그 사실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치유가 되었음을 알았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46절). 그리스도께서부터 나간 능력으로 고침을 받은 자들은 그 사실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는 그 사실을 불평조로 말씀한 것이 아니었다. 즉 이 일을 통해서 자기의 힘이 “약화되었다”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듯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한” 태도로 말씀하셨다. 자기에게서 나간 “능력”이 뭔가 좋은 일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쁨이지 조금도 인색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마치 태양의 빛과 열에서처럼 그런 일은 얼마든지 그의 능력에 환영받는다. 또한 그에게 능력이 부족하여 “그에게서” 나갈 능력이 모자라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넘쳐흐르는” 샘물이기 때문이다. 2. 그는 불쌍한 환자는 자기의 치료와 자기가 입은 은혜를 인정했다. “그녀는 숨길 수 없는 자기를 알고는,” 그에게 “나아와 엎드렸다”(47절). 이것을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숨길 수” 없는 것, 곧 우리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와 고난이 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불쌍한 환자는 자기의 치료와 자기가 입은 은혜를 인정했다. “그녀는 숨길 수 없는 자기를 알고는,” 그에게 “나아와 엎드렸다”(47절). 이것을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숨길 수” 없는 것, 곧 우리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우리의 모든 죄와 고난이 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48절). “두려움”이 있는 곳에도 구원하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녀는 “자기가 그에게 손을 댄 연고로 일어난 일을 사람들 앞에서 고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짐으로써 자기의 병이 나으리라고 믿고 그렇게 했더니,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고침 받은) 환자들은 자기들의 경험을 남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3. 그 위대한 의원은 그녀의 나음을 확증해 주셨다. 그리고 평안히 돌려보냈다.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8절).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몰래, 계략을 써서 받아냈다. 그러나 그 속임수가 드러나자, 이삭은 그 축복을 의도적으로 비준해 버렸다. 그 축복은 “부정하게” 그리고 “비열하게” 얻어진 것이지만, “공명하게” 보장을 받았다. 여기에서의 치유도 그러하다. 야곱이 “축복을 받았고,” 그래서 “축복을 받게 되었으며,” 여기서도 그 여인이 이미 고침을 “받았고,” 그래서 그녀는 다시 고침을 받게 “되리라”는 선언을 들었다. 그 위대한 의원은 그녀의 나음을 확증해 주셨다. 그리고 평안히 돌려보냈다.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8절).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몰래, 계략을 써서 받아냈다. 그러나 그 속임수가 드러나자, 이삭은 그 축복을 의도적으로 비준해 버렸다. 그 축복은 “부정하게” 그리고 “비열하게” 얻어진 것이지만, “공명하게” 보장을 받았다. 여기에서의 치유도 그러하다. 야곱이 “축복을 받았고,” 그래서 “축복을 받게 되었으며,” 여기서도 그 여인이 이미 고침을 “받았고,” 그래서 그녀는 다시 고침을 받게 “되리라”는 선언을 들었다. Ⅳ. 이것은 야이로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으라고 하는 “격려”가 되었다. “비록 그의 딸은 이제 죽었고,” 이 소식을 가져온 자들은 이 일로 “선생을 더 괴롭게 마옵소서” 하고 예수께 부탁까지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그에 대한 열심”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대담한 용기도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뭔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을 하려는 자는 자기들이 생각하거나 그리스도께 구할 수 있는 일보다는 그리스도가 자기들에 베풀어주시는 위대하신 일에 더욱 의지해야 한다. 앓던 자가 죽었으니, 더 이상 기도를 할 필요나 어떤 수단을 강구해 볼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죽었지, 여전히 “믿기만 하면” 만사가 잘되리라는 것이다. Post mortem medicus ─ 즉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post mortem Christus ─ 즉 사후에 그리스도를 칭함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Ⅴ. 그녀의 생명을 소생시킬 “준비”를 했다. 1. 그리스도는 증인을 “선정”하셨다. 그들은 일어날 기적을 목격해야 할 자들이다. “무리”가 따랐지만, 그들은 아마 무례하고 시끄러운 자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많은 사람들을 신사의 집, 게다가 그 온 가족이 슬퍼하고 있는 그런 집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적합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되돌려 보냈다. 자기의 기적이 그들의 검사를 받아 불합격할까봐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사로와 과부의 아들을 “다 보는 가운데서” 소생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제자들 중 3총사,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과 부모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이 기적의 유일한 목격자들로 삼았다. 그들만으로도 진실성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한 수효였기 때문이다.

2. 그는 애곡을 “저지” 시켰다. “그들이 그 아이를 위해 울며 애통했다. 아마 그 딸은 그리스도는 증인을 “선정”하셨다. 그들은 일어날 기적을 목격해야 할 자들이다. “무리”가 따랐지만, 그들은 아마 무례하고 시끄러운 자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많은 사람들을 신사의 집, 게다가 그 온 가족이 슬퍼하고 있는 그런 집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적합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되돌려 보냈다. 자기의 기적이 그들의 검사를 받아 불합격할까봐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사로와 과부의 아들을 “다 보는 가운데서” 소생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제자들 중 3총사,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과 부모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이 기적의 유일한 목격자들로 삼았다. 그들만으로도 진실성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한 수효였기 때문이다.그는 애곡을 “저지” 시켰다. “그들이 그 아이를 위해 울며 애통했다. 아마 그 딸은 그 집안에서 매우 귀염받는 유명한 아이였고, 부모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에게까지도 매우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도는 “울지 말라”고 명했다.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 아이의 경우는, 그가 영원히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 아이는 곧 다시 생명을 찾게 되고, 마치 잠시 잠자다가 깨어난 것처럼 자기의 친지들에게 되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이 이 말씀은, 주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들에게 대해 “희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죽음이란 그들에게는 잠시 동안의 “잠”이요, “세월의” 모든 “수고”를 떠나 “쉬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멀지 않아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 부활은 “영원한 날의 영광”으로 다시 깨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애곡자들에 하신 말씀은 지극히 고무적인 말씀이었으나, 그들은 악하게도 가소롭게 여겼다. 그리고 “그 말씀을 비웃었다.” 여기에 바로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가 잇다. 죽음을 “잠”이라고 했대서 비웃는 자들은 구약 성서에 무식한 자들이다. 그러나 “저” 악한 것에서 “이렇게” 선한 것이 나옴으로써 그 기적의 진실성이 증명되었다. 그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그 아이의 소생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그들이 절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더 이상의 답변을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 “자기를 해명했다.” 그들도 만족했으리라. 그래서 다시는 그의 말씀을 비웃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모두 내어쫓았다”(54절:한글 개역과 희랍어 성경 Nestle 판에는 없음 – 역주). 그들은 이 놀라운 사건의 증인들이 될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즐거워 그가 하신 “말씀”을 듣고 즐거워(비웃음을 말함 – 역주)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그가 한 “일”을 보고도 역시 웃음거리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들은 당연히 쫓겨나야 한다. Ⅵ. 그 여자아이는 “죽음 자들의 회중을 잠시” 방문한 후 생명의 세례로 되돌아왔다. “예수는 손으로 잡아 그 아이를 일으켰다”(마치 우리가 잠자는 아이를 깨울 때의 행동이다). 그리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하셨다(55절).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의 손”은 “그의 말씀의 요청”에 상응하여, 그 말씀의 뜻을 현실화하였다. 또 본문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단지 암시적으로 말한 사실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즉 “그의 영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도 다시 돌아와 그의 몸에 생명력을 주어야 했다. 이것은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실재하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고, 그러므로 영혼은 불멸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죽음이란 것이 “주님의 등불”을 끄지 않으며, 오히려(빛을 가리어 일면만 비추는) “각등”속에서 그 등불을 끄집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아주 잘 지적해 주었다. 즉 몸의 kra/sij ─ 즉 기질 (temperament)이나 몸과 함께 죽은 무엇이 되돌아 온 것은 아니며, avnqupo,staton ti ─ 즉 어떤 본질적 실체 ─ 죽음 후에도 몸이 아니 그 어느 곳엔가에 실재하는 것 ─ 가 돌아온 것이라고 본다. 그 중간 시간에 그 아이의 영혼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영들의 아버지”의 손에 있었다. 영혼들은 모두 죽으면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녀(아이)의 영이 돌아오자” 그녀는 일어나서, 거동함으로써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또한 식욕이 있음을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아기가 새로 태아나듯이, 새로 소생한 자들은 그들이 “자라기 위해서 양식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 구절에, “그녀의 부모들이 놀랐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놀랐고, 그리스도를 비웃던 구경꾼들은 놀라지 않았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이상히 여길 수 있다. 아마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을 널리 공포하기를 원치 않았던 이유가 될 것이다(물론 그들은 그리스도의 겸손성을 보여 준 한 실례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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