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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여인 누가복음 | 성서학당 송태근 목사 마가복음 46강 옥합을 깨뜨린 여인ㅣ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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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당 송태근 목사 마가복음 46강 옥합을 깨뜨린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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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 옥합을 깨뜨린 여인(2003. 3. 30) – 신반포감리교회

그리고 여인에 관해서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누가복음은 그 동네의 죄인인 한 여인으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나사로의 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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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bp.or.kr

Date Published: 3/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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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7:36-50 <내게 있는 향유 옥합> – 마라나타99

그런데 그 때, 직업상 (부정한 여인)으로 추정되는 한 여인이 들어와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를 풀어서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옥합을 깨뜨려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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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rosslife.tistory.com

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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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 1~9 –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수요일에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나눕니다. 그곳에서의 예수님 마음과 향유옥합을 깨뜨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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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ovatochurch.com

Date Published: 4/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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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모음옥합을 깨뜨린 여자

마가복음 14:1-9. 1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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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irstkoreanchurch.org

Date Published: 12/9/2021

View: 1739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누가복음의 ‘그 여인’ – 크리스천투데이

바로 이 바리새인은 향유의 값어치/ 가격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옥합을 깨뜨린 그 여성이 예수의 발을 ‘만지는 것’에 관심하는 점이다. 특이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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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4/24/2021

View: 4050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바라보는 4복음서의 시각.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을 ‘한 여인’이라고만 말하지만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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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ch.kr

Date Published: 1/29/2021

View: 576

64.옥합을 깨뜨린 이유(지상에서의 마지막 수요일) – 네이버 블로그

이 여인은 누구인가요? 마가복음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12장에는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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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13/2022

View: 3924

옥합을 깨뜨린 여인 > 주일 오후 설교(누가복음) | 가락중앙교회

가락중앙교회 > 주일 오후 설교(누가복음) | * 본 단락은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기름을 부은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 다른 세 복음서에는 동일한 사건으로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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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arakcm.org

Date Published: 6/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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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6 옥합을 깨뜨린 여인 누가복음 The 91 Top Answers

주일설교 – 옥합을 깨뜨린 여인(2003. · 마라나타99 :: 누가복음7:36-50 · First Korean Church in Cambrge – 말씀 모음옥합을 깨뜨린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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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odaithanhmai.com.vn

Date Published: 6/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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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여인 (막 14:3-9) – 목회자료 – 기멀전

그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그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 게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으 며, 누가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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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2/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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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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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89WCSCCvghY

옥합을 깨뜨린 여인(2003. 3. 30)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명상하는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이 거룩하고 엄숙한 계절에 정치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청교도의 경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가공할 만한 폭탄 세례를 죄 없는 이락 국민들 머리 위에 퍼붓고 있다는 것은 실로 시성모독이고 아이러니 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저는 이 청교도의 빗나간 후손들과는 달리 옥합에 기름을 가득 담아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위에 부은 한 여인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중에서 마가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이것이 마태와 누가에게 기초 자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도 이 이야기를 다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당시에 이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마태복음만이 마가복음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고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내용은 비슷한 것도 있지만 서로 다른 배경과 인물은 그리고 있습니다. 가령 이 사건의 배경이 마가복음에는 문둥병 환자인 시몬의 집이고 누가복음에는 바리새파 사람인 시몬의 집이며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에 관해서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누가복음은 그 동네의 죄인인 한 여인으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나사로의 누이이고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그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서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는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복음서에 따라 달리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참다운 믿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 자료인 마가복음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신데 한 여인이 나타나서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의 값은 300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미불로 환산하면 500불 정도이고 우리 돈으로 약 60만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60만원이 그리 큰 돈은 아닐지 모르나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큰 부자도 아닐 터인데 그렇게 엄청난 금액의 향유를 조금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거기서 이 광경을 본 몇 사람이 값진 것을 낭비한다고 하면서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면 좋았겠다고 나무란 것을 보면 그 값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향유가 비싸고 아깝다고 하는 경제적 계산을 일삼고 있는 반면에 이 여인은 그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예수의 머리 위에 몽땅 부었다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아마 이 여인도 돈 아까운 줄 알 것이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좋다는 것쯤은 아는 지각 있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린 것은 아마도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 생명을 주신 은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와 헌신과 믿음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종교적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인간형을 보게 됩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유형의 인간들은 모두 예수님을 흠모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이 여인으로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소유 전체를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이 여인의 행동을 사시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물질적 타산에 골몰하는 사람들입니다.

여인의 행동은 참 신앙인의 것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비 신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신앙에는 계산이나 타산이 있을 수 없으나 나약하거나 불순한 신앙에는 항상 계산과 변명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면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것을 초월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소유 전체를 하느님께 바치는 헌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언제나 모험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유한하고 상대적인 세상에 살면서 절대적이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한한 모든 것을 바치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두 주인 곧 하느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태 6:24).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세속적인 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 즉 침식이나 휴식, 오락과 취미활동을 모두 반납하지 아니하고서는 큰 뜻을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차원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값지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즉 물질, 시간, 마음 전체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랑과 정의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값진 향유를 무가치하게 벼렸다고 판단하고 여인을 비난하는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도 하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일’이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값진 향유를 자기 머리 위에 붓는 그 모습을 보신 예수께서 마음에 충만한 기쁨을 맛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지난 날 죄를 지은 여자로서 주님의 용서의 사랑으로 인해 온전한 인간으로 변하여 정성을 바쳐서 주님께 헌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예수께서는 감개가 무량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녀의 순수한 행동이 감동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자연도 아름답고 젊은이들에게는 사랑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 차원 올라가서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 미의 절정이 있습니다. 예술의 세계는 우리의 청각과 시각을 미치도록 황홀하게 만드는 소리와 색깔로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시와 문학의 세계는 글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묘사해 줍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인간에게 심미적인 만족만 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아카데미 남자 주연상을 받은 영화 ‘피아니스트’는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폴란드 태생 유대인 피아니스트인 스필만의 생애를 극화한 것입니다.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프라하에서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던 스필만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치의 체포를 피하여 폐허가 된 어떤 건물 옥상에 숨었다가 불행하게도 나치 사령관에게 발견됩니다. 사령관은 스필만의 전직이 피아니스트인 것을 알고 그 건물에 남아있는 피아노를 치게 합니다. 스필만은 쇼팡의 폴랜드 무도곡인 그랜드 폴로네이즈(Grande Polonaise)를 너무나 아름답게 연주합니다. 이 음악에 감동한 독일 사령관은 스필만을 살려주게 되고 후퇴하기 전에는 먹을 것까지 가져다줍니다. 아름다움이 두 사람 모두를 아름다움의 극치에 이르게 하는 동시에 스필만의 생명까지 구하여 주었습니다.

예배도 예술과 같이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속삭임이고 찬송은 우리 마음에서 울러 퍼지는 참회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기도와 찬송의 진실함과 순수함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하느님까지도 감동케 하는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말과 소리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와 바하의 ‘미사곡 B단조’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의 행동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물론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미스 코리아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경건하고 헌신적인 행동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의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감격하여 순수하게 드리는 마음은 참 아름다음의 극치로 승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 나약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믿음 없음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삶이 주관을 잃어버리고 흔들리며 유혹을 자주 받게 됩니다. 삶이 질서를 잃게 되고 일관성도 살아지게 됩니다. 결국 산다는 것이 볼품없이 되고 마음의 기쁨과 환희는 상상 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아름다운 삶은 그림의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신앙의 나약함에 고착되지 아니하고 작은 믿음을 기초로 하여 최선을 다할 때 거기서 믿음이 자라고 그 작은 믿음이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것처럼 아름다움의 극치에 도달하는 계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상 아름다움의 절정에 오른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태어날 때부터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작은 믿음과 아름답지 못한 모습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은혜와 헌신을 통하여 큰 믿음과 아름다움의 극치에로 비약한 것입니다. 자연과 하나 되고 삶 전체를 하느님께 바친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 문둥병 환자와 함께 살다가 자기고 문둥병자가 된 성 다미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평생을 전도자로 살아간 존 웨슬리, 미국 흑백인 모두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M. L. 킹,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 등 이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신앙과 아름다움에서 시작하여 신앙의 절정과 함께 아름다운 삶의 극치를 보여준 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엄청난 값의 향유를 모두 예수님 머리 위에 부었다는 것은 방관자들의 말처럼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지 않는 무관심에서 나온 행동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참 이웃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이면서도 서로 연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하느님 사랑을 부르짖고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고 또한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 안에 그 뿌리를 두지 않으면 이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여인이 자기의 값진 것을 모두 바쳐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최선을 다하여 가난한 이웃도 사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여인은 주님께 드린 것 만큼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 두었으리라는 것을 믿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머리에 부어진 향유의 값을 따지고 있는 방관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합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사용하신 동사의 시상은 현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신앙도 현재적인 동시에 이웃사랑도 현재적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근거한 사랑은 언제나 현재적이어야 합니다. 나는 과거에 어느 누구를 사랑했다는 것은 사랑의 유골에 불과하고 미래에 어느 누구를 사랑하리라는 것은 사랑의 유령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은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표현될 때만 살아있는 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2주 전 일간지에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인 조범구 박사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는 지난 25년간 매월 둘째 토요일 마다 부산에 내려가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1400명을 무료 진료해 줌으로서 보령의료 봉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조용하고 수습은 성격의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여 수술 받을 수 없는 어머니들의 호소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어린이들을 보면서 그냥 등을 돌릴 수 없어 시작한 것이 25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 애들이 지금은 건강하게 자라서 결혼하고 인사 오는 청년들과 박사학위를 받고 논문을 들고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조박사는 기독교 신앙과 자기의 활동을 연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세브란스의과대학의 기독교 정신과 세브란스의 정신적 지주인 김명선 박사의 신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참된 믿음은 이웃 사랑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참 믿음과 참 사랑은 쌍둥이 형제와 같은 것입니다.

4.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 여인이 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14:8)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여기서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의 머리 위에 부은 행위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계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여인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사건을 미리 예측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지만 예수께서는 여인의 행동과 자기의 고난의 함수관계를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신앙의 행위는 부지불식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여인이 주님의 머리 위에 유향을 부은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의 시신에 유향을 바르고 장례를 치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가 인류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골고다와 무덤에 까지 주님과 함께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손에 있는 옥합을 보존만하고 깨뜨릴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헌신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옥합을 깨뜨리는 용기가 없다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성패는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옥합을 유효적절하게 깨뜨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의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것이 작고 보잘 것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은 주님의 고난을 통해 인류구원에 참여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까지 한국인 4명과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살인적이 폭탄이 비 오듯 하는 이락의 수도 바그다트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며 구호활동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퍼붓는 폭탄에 비하면 그들의 힘은 먼지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며 그것을 위해 위험을 불사한다는 것은 그 무고한 사람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값진 향유를 부은 이야기를 가지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죄 속에 빠졌던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고 그 기쁨과 감사를 주님께 되돌리므로 후세에 감동을 남기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의 존재와 소유 전체를 주님께 바치는 헌신적 믿음과 함께 아름다움의 극치를 나타냈습니다. 그의 믿음은 추상적인 것에 머물지 아니하고 자기와 함께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행위는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고난에 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순절에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옥합을 깨뜨리므로 ‘너희는 아름다운 일을 했다’, 그리고 ‘너희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는 주님의 응답을 듣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

이계준 목사

마가 14:3-9, 고후 2:12-17

First Korean Church in Cambridge

2/1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4 옥합을 깨뜨린 여자 (A Broken Alabaster Jar)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4:1-9

1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 이들이 말했습니다. “명절 동안에는 안 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킬 수 있어.”

3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있는, 문둥병에 걸렸던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병을 열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4 그러자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서로 말했습니다. “어째서 향유를 낭비하는 거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여자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만두어라. 어째서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7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원하면 언제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8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죽기 전에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1 It was now two days before Passover and the Festival of Unleavened Bread. The leading priests and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ere still looking for an opportunity to capture Jesus secretly and kill him.

2 “But not during the Passover celebration,” they agreed, “or the people may riot.”

3 Meanwhile, Jesus was in Bethany at the home of Simon,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 While he was eating①, a woman came in with a beautiful alabaster jar of expensive perfume made from essence of nard. She broke open the jar and poured the perfume over his head. / ①Or reclining

4 Some of those at the table were indignant. “Why waste such expensive perfume?” they asked.

5 “It could have been sold for a year’s wages①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So they scolded her harshly. / ①Greek for 300 denarii. A denarius was equivalent to a laborer’s full day’s wage

6 But Jesus replied, “Leave her alone. Why criticize her for doing such a good thing to me?

7 You will always have the poor among you, and you can help them whenever you want to.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

8 She has done what she could and has anointed my body for burial ahead of time.

9 I tell you the truth, wherever the Good News is preached throughout the world, this woman’s deed will be remembered and discussed.”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이 여자가 누구냐 하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이 여자의 아름다운 헌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1-2절 말씀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음모와 흉계 속에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 시키신 역사적인 날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을 말합니다. 이 때 누룩 (leaven)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반죽에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만들면 곧 딱딱하게 굳어서 먹기도 힘들고 맛도 없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면서 과거 조상들의 고난의 삶을 기억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라는 말씀이 상황의 급박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긴박하게 모임을 갖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이 일에 가담했고, 율법학자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다양한 이유들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 (blasphemy)를 범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도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도 있었습니다. 유월절 축제만 아니었으면 금방이라도 예수님을 체포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했다가 혹시라도 유월절 축제에 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戰慄, thrill)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유월절을 결정적인 타이밍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모든 유대인 가정에서 어린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하는 때를 맞춰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이번 유월절을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사람들은 혹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이번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실까요?’ 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하려고 누구든지 예수를 보거든 즉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1:56-57) 과연, 누구의 계획대로 될까요?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man’s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an’s strength).” (고린도전서 1:25) 맞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깥의 상황은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 시간에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시몬은 전에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만일 시몬이 그 때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기회가 없을 뻔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것을 드리는 일, 헌신하는 일, 섬기는 일은 절대로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 (누가복음 12:20)’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그 곳에 머물며 사업을 벌여 돈을 벌어 보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안개와 같아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14)

한창 식사가 진행 중일 때, 한 여자가 매우 비싼 향유가 든 옥합 (alabaster jar)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아이구, 왜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는 거지?” 하면서 향유를 아까워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몇 몇 사람들이 화를 냈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먼저 이의를 제기했고, 다른 제자들도 유다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유다의 계산에 의하면,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시가로 계산하면, 적어도 30,000 불 정도 되는 큰 금액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마가복음 말씀에서는 이 여자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가격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식사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면서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이 여자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So they scolded her harshly).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향유를 부은 이 여자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식사에 초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지금 자신을 만지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at kind of woman is touching him. She’s a sinner!” (누가복음 7:39) 이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이 찬송가 가사에도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이 여자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나와 있지만, 이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향유의 가격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향유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아깝다고 하지 않고 슬쩍 듣기 좋게 포장을 합니다. “Why waste such expensive perfume? It could have been sold for a year’s wages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이렇게 낭비하지 말고 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속 마음이 들킬까 봐 포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향유를 주님께 드린 여자의 신분을 문제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죄인의 신분으로 식사 자리에 갑자기 뛰어든 이 여자에 대한 불쾌감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식사에 예수님을 초대했던 시몬은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예언자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예언자였다면 이 여자가가 누군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지했을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런 생각 역시 예수님을 놓치고 있습니다.

두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씀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깨뜨린 옥합 속에 든 향유가 300데나리온이 나간다는 것을 이 여자가 모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이것입니다. “왜 이 여자는 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을까?” “향유를 부어 드린 대상인 예수님은 과연 누구냐?”

다행히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용서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용서 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 증거로 이 여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였다.” (누가복음 7:47)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왜 그 여자가 예수님께 그렇게 비싼 향유를 부어 드렸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즉석에서 이 여자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7:50)”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질문에 질문을 낳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경에 이해가 안 가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구세주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 바디매오는 어떻게 알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불렀을까요? 갈릴리의 어부들은 무슨 생각으로 즉시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문제를 속 시원하기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분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만이 나의 많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식사 자리에 와 계시다는 얘기를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옥합을 집어 들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옥합은 결혼을 앞 둔 여자들이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 모아 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에게 옥합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가면서 고이 모아 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이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여자는 옥합보다 자기의 죄를 용서 받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삶을 청산할 수만 있다면, 옥합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옥합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이런 결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옥합이 무엇입니까?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그 옥합을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깨뜨릴 것입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깨뜨릴 것입니까? 질문을 바꿔 볼까요?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깨뜨렸습니까? 주님은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를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많이 용서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적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주님은 이 여자를 편들어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원하면 언제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죽기 전에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6-8절) 유대의 장례 풍속 중에 죽은 사람의 몸에 향유를 발라주는 절차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니고데모가 ‘몰약과 알로에를 섞은 향유 (mixture of myrrh and aloes)’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9).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서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

예수님은 “이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내 머리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은 나의 죽음을 미리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행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도, 예수님 주변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여자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일이 된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도 그렇습니다. 더운 날,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찬물 한 잔을 대접한 일, 외로운 사람을 방문한 일,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 일, 주님은 이런 일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 하시면서 “이런 일들이 곧 나에게 한 일이었다 (마태복음 25:40)”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9절) 예수님께서 최고의 찬사를 이 여자에게 보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칭찬과 찬사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은 주님을 위해 나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바라보는 4복음서의 시각.

출처

원문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바라보는 4복음서의 시각

<4복음서의 주제>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구주이심을 증명함

마가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예-구주이심을 증명함

누가복음: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구주이심을 증명함

요한복음: 생명의 복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오신 하나님-구주이심을 증명함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은 4복음서의 아래 장,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8개 절)

마가복음: 14장 3절~9절 (7개 절)

누가복음: 7장 36절~50절 (15개 절)

요한복음: 12장 1절~8절 (8개 절)

다른 복음서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는데 7~8개 절을 할애한 반면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의 두배인 15개 절을 사용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이 우리의 죄들에 대한 용서와 용서함을 받은 자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므로 죄들에 대한 용서를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이 이 사건을 가장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 관한 4복음서의 기록이 4복음서의 주제와 어떻게 부합되는지 비교하여 보면서 주님의 풍성을 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시게 된 연유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다라고만 하고 거기에 왜 계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반면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식사하고자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초대하였다라고 말씀함으로서 주님께서 그 집에 계시게 된 연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자기의 집에 초대하는 자는 문둥병자, 즉 죄인입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누구의 집에 계셨는지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으며 단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으며 이곳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라고 말씀함으로서 생명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문둥병자, 죄인, 혹은 바리새인이라는 소극적 단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생명 안에서는 이곳이 누구의 집이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단지 베다니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곳입니다.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을 ‘한 여인’이라고만 말하지만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인’이라고 말함으로서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죄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문둥병이나 죄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마리아’라고 그 이름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감추어 주시지만 생명 안에서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또 밝히 드러내십니다.

향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 말하고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 말함으로서 이 향유가 매우 값지고 순수한 나드 향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향유가 든 옥합’이라고만 말할 뿐 값지다거나 순수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죽을 죄인에게 아무리 귀하고 값진 것이 자기의 손에 있다 한들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죽음을 앞둔 죄인에게는 값진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일 리트라’라고 말함으로서 그 품질뿐만 아니라 양까지도 정확히 밝히고 있습니다(일 리트라는 현대의 측량 단위로 약 340그램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죽을 죄인에게 있어서 향유가 제아무리 값지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생명의 관점 안에서 우리가 주님께 쏟아붓는 향유는 품질에 있어서뿐 아니라 그 양까지도 주님에 의해 정확히 계측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향유를 어디에 부었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과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과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구주이신 하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으며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뒤에 다가가 발치에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나서 그 발에 다정하게 입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먼저 주님의 머리에 몇방울의 향유를 부은 다음 나머지 향유로 주님의 발에 바르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린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한 사건을 바라보는 복음서들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누가 분개하였는가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의 제자들이 분개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몇몇 사람이 분개하며 서로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에 그분의 제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이 마태복음을 통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이 분개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대신에 누가복음에서는 자칭 의롭다 하는 죄인인 바리새인의 생각을,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을 배반함으로 생명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왕국 안에 있는 그분의 제자들의 시각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죄인인 사람과 생명의 원수인 사람의 시각을 각각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시기는 언제인가

연대가 다함이 없는 영원하신 왕-구주에게는 때가 의미 없으며 곧 죽을 죄인에게도 때가 의미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왕-구주이심을 말하는 마태복음과 죄들에 대한 용서의 복음인 누가복음에는 때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노예-구주이심을 말하는 마가복음에서는 유월절 이틀 전에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상에 않아 계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생명의 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6일전에 주님께서 베다니에 들어가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6천년 전 사람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우주의 베다니 마을인 이곳 죄인들의 땅에 들어오셔 죽은 사람을 생명이신 그분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약 경륜과 2천년 전 베다니 마을인 이 땅에 노예로 오셔서 죄인의 집 상에 앉으셨던 주님의 신약 경륜이 연상되었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에 대한 4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해 봄으로서 4복음서의 저자가 각기 복음서의 주제에 정확히 부합하는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고 기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명의 형제님들 안에서 역사하신 그 영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64.옥합을 깨뜨린 이유(지상에서의 마지막 수요일)

막14:3-9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수요일날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데 저녁때는 항상 영문밖으로 나오셔서 감람산에서 밤을 지새며 기도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가까이에 베다니마을이 있었으므로 저녁초대를 받아서 가셨던 것입니다.

문둥이 시몬은 그가 문둥병자였는데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은 것같습니다.

시몬에 대해서는 나사로의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였거나 혹은 마르다의 남편이라는 설이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르다가 시몬의 집에서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리아와 나사로가 그곳에 있었다고 요한복음12장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녁식사중에 마리아가 와서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그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나드향유는 아주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 이것을 팔면 삼백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는데 그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도와줄 수 있는데 말이다하면서 그 여자를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 저를 괴롭히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좋은 일이라는 것은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한 일이 온천하에 복음과 함께 전파되어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이 여인은 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까요?

요한복음12장에는 발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머리든 발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여인은 누구인가요?

마가복음에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12장에는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또는 예수님을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한 나머지 향유를 부어드렸을까요?

나드는 인디안 식물로써 잎파리와 줄기와 주로 뿌리에서 향유를 추출한다고 합니다.

이 향유는 옥합이란 석회로 만든 예쁜 병에 봉함되어져 있는데 그 향유가 기화되어서 날라가지 못하도록 밀랍으로 봉해놓았던 것입니다.

이 나드향유는 완전히 순수한(어떤 불순물도 섞인 것이 없는)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 시세로 300데나리온(노동자 1년치월급)을 홋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마도 여자의 전재산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여인이 다이아몬드반지를 가지는 것이 평생소원인 것처럼!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서 예수님의 발에 또는 머리에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옥합의 깨뜨림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계깊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믿지 않고 아니 믿고싶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해 자신이 소장한 재산목록1호인 나드향 옥합을 깨뜨려 주님에게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 당시 가장 비싼 이 향유가 로마의 여자들사이에서 많이 구매되어졌고 마리아도 로마상권을 통해 샀다고 합니다.

로마여자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100%순수한 나드향유는 그 시대의 부와 여자의 사치와 욕망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가 이 옥합을 깨뜨린 것은 그 시대에 풍미하고 있었던 여인의 욕망과 사치의 죄악을 깨뜨리고 자신을 순결한 마음을 주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드린 신앙이었습니다.

둘째 왜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에 든 가장 비싼 로마로부터 수입한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어드렸을 때 방안에 옥합으로부터 흘러나온 향유의 향기가 가득찼으며 그 향기에 식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취해버릴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백합화 몇송이만으로도 방안에 가득한 향기로 현기증이 날 정도인데 최상급 향유의 향기는 현란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이 분내어( indignant, be much sore displeased, ) 어찌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απώλεια

pernicious damnable )라고 말했습니다.

방안에 그윽히 퍼지는 향기​를 맡고 어떤 사람들은 분개하고 매우 화를 내고 기분나빠하면서 마리아의 행동을 정죄했는데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이 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행위는 아주 저주받을 일이고 악하고 파괴적인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했습니다.

삼백데나리온​은 앞에서 말했듯이 노동자 1년 연봉정도 된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하고 악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금새 머리로 향유의 가격을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악하고 저주받을 일이라고 한 것은 그렇게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한 꺼번에 소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동을 원하셨는지 원치 않으셨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가 향유를 부을 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원치 않으셨다면 마리아의 행위를 예수님이 막거나 저지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가 자신을 위해 향유를 부었을 때 막지 않으셨고 오히려 마리아의 일을 칭찬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의미로 마리아의 향유부음을 칭찬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말한 가난한 자를 돕는 일과 마리아가 자신에게 비싼 향유를 부은 것에 대해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일에 관하여 예수님은 언제든지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비싼 향유를 드리는 것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 어느 것이 가치있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를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을 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 즉 교회에다 바치는 것이 훨씬 복되다고 설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건축헌금으로 전재산을 다 바쳤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나중에 사업이 잘 되어 거부가 되었다는 간증까지 나오고 그것을 목사들이 예화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전재산을 교회에 다 바치는 것이 복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목사들이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성도들의 헌금을 교회로 모으는데 사용하라고 의도하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도우라고 했고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은 헌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지 않거나 매우 어리석게 여겨서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이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보다 가치없다고 여기는 악한 자들을 향해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지않고 가난한 자들을 아무리 많이 도와주고 구제하고 선행을 해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깊은 경의와 감사와 감격을 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깊은 경의와 감사와 감격을 표시한 것이 바로 나드향유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정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여겼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감하면서 죄없으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깊은 슬픔과 경외와 감사와 감격을 표시한 것입니다.

마치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셔서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누워계실 때 동방에서 온 점술사들이 깊은 경의와 감사와 감격의 표시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앞에 드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시며 왕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을 깊이 경외하고 감격하며 첫번째로 드린 예물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면 하나님이시며 왕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해 깊은 경외와 감사와 감격으로 드린 마지막 예물이 바로 마리아의 향유옥합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예물과 마리아의 예물은 단지 헌물이나 드림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나님되심과 구세주되심에 대한 증표이며 사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증표를 마치 세상에 썩어질 돈의 가치로 따지고 물질로 많고 적음을 비교하는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마리아의 향유보다 더 값비싸고 귀한 예물을 드렸다고 한들 정말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마리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마리아의 향유와 동방박사들의 예물은 예수님이 베들레렘구유에 계실 때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그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매우 특별하고 특별한 경우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이로운 순간을 잘 포착하고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한 행동을 취한 마리아를 어찌 예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의 향유를 거절할 수 있으실까요?

예수님은 기적적인 그 순간에 마리아의 기적같은 향유부음은 영원히 기념되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가치와 능력이 세상끝날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히 알려지고 전파되어져야 한다는 말씀이며 깊은 의미인 것입니다.

동방박사의 예물과 마리아의 값비싼 향유사건을 교회에 내는 헌금에 비유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이 두 사건을 헌금과 비교하여 누군가 설교했다면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롯유다나 악한 자들과 같이 폄하하고 가치를 하늘에서 땅바닥으 로 떨어뜨리는 불경죄를 짓는 것입니다.​

셋째 옥합을 깨뜨린 의미는 주님의 죽으심을 마음깊이 새기라는 뜻입니다.

옥합안에 담긴 나드향유는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거의 100%의 순결한 향유입니다.

나드향유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과 죄없으신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 비참한 죄인들​을 위해 그 몸을 찢으시고 부셔뜨려서 피를 흘리시며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원하신 것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으며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를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가막힌 비밀을 마리아가 알고 순전한 나드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에게 부어드렸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흐믓하시고 즐겁고 기쁘셨을까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의 비밀을 알았으니 그 사실이 세상에 퍼져나갈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기쁨으로 기꺼이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비밀을 알아준 여인이 바로 마리아였고 그 싸인이 바로 나드향유 옥합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옥합을 깨뜨린 것은 썩어질 세상의 부와 재물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십자가아래 묻어버리고 거룩한 믿음과 은혜로 덧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영광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엄청난 영광일까요?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입기 위해 세상의 욕망과 죄악과 거짓과 위선의 옥합을 깨뜨려버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입는 대신 세상의 것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곁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죄악의 병을 깨뜨리고 거룩함으로 덧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이유가 됩니다.​

(유튜브 사막의 생수)

옥합을 깨뜨린 여인 > 주일 오후 설교(누가복음)

* 본 단락은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기름을 부은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 다른 세 복음서에는 동일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마 26:6-13, 막 14:3-9, 요 12:1-8), 누가는 그와는 다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 즉 세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 직전에 베다니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누가복음은 그보다 훨씬 전인 갈릴리 2차 전도 기간에 있었던 일로 소개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일을 독자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심방을 가셨을 때의 일이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전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니고데모처럼 영적인 갈급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예수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혹시 개인적으로 해결 받아야 할 문제가 있었든지 말이다.

* 자기 집을 개방하는 심방은 그 심령이 열려 있음이요, 함께 먹고 마심은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길 원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목사와 성도 간의 형식적 관계를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이 하나 되는 관계를 이룸이 결국 심방이 갖는 영적인 능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이 심방을 꺼려하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심성 때문이요,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존경해서 대접하려고 모신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손님을 초대할 때는 손님을 상석에 앉히고, 손과 발을 씻는 물을 준비하며,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하고, 감람유를 머리에 부어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어야 하는데 이러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을 보면(44절) 별 준비 없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

* 특히 예수님에게 “선생님 말씀하소서 (40절)” 라고 한 걸 보면 믿음이 있다거나,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 초대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단지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나, 약간 평범하지 않은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 예의와 준비를 갖추지 않고서 손님을 초대하거나 맞이하는 것은 사실 결례다. 초대 자체가 대접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극진히 대접을 받으면 마음에 흡족함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은 초대는 사실 무시를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는가? 그러기에 대접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상대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대접을 함이 필요하다.

* 당시 유명 인사였던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으면 거기에 상응한 대접을 했어야 하는데, 이 바리새인은 그냥 집으로만 모셨을 뿐 아무런 대접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의 이름은 시몬(40절)이었다.

* 예수께서 조금은 찝찝한 기분으로 앉아 있을 때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바리새인의 집으로 찾아왔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 줄 알고 찾아올 정도이면 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던 듯싶다. 하긴 예수님께 뭔가를 해결 받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의 전하시는 말씀, 예수님의 행위, 예수님의 거취 등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예수님을 스토킹 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는 만큼 은혜와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입을 크게 여는 자가 더 많은 것으로 채움을 받는 것” 이다.

* 성경에 이 여인에 대해 죄를 지은 여인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여인은 동네에서 소문이 나빴고, 전해지기로는 그녀는 몸을 파는 여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녀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주시고, 저들의 죄를 사해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자신도 죄사함을 받고 싶은 갈망이 있어서 예수를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즉 그녀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고, 자기가 부족한 사람임을 깨달았으며,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를 용서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예수를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고 죄사함과 문제 해결에 대한 갈망이 결국 예수를 찾게 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 마음에는 예수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있는가? 예수님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다며 죽기 살기로 매달리고 있는가?

* 그녀의 손에는 향유를 담은 옥합이 들려 있었다. 향유는 매우 값진 물품이었기에 당시 여인들이 결혼을 위한 지참금으로 여겨질 정도였고, 옥합 또한 아름답고 귀하게 만든 그릇이었기에 여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자신의 중요한 일을 위해 오래 전부터 향유를 모았을 것이요, 하루하루 이 향유와 옥합을 보면서 나름 꿈을 키웠을 것이다. 우리가 저금통장을 보면서 마음 든든해하듯이 말이다.

* 그런 여인이 옥합을 들고 바리새인의 집으로 찾아와서 예수께서 앉아 계시는 자리 뒤편으로 다가와 서는 것이었다. 앞으로 나올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했고, 자기 스스로도 죄인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예수님 발 곁에 서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이 지은 죄가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 자기 죄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릴 정도의 심령이면 선한 심령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오늘날 자기 죄를 생각하며 얼마나 우는가? 강퍅한 심령으로 눈물이 마르지는 않았는가? 눈물을 흘려야 예수께서 그 눈물을 닦아 주실 텐데 생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는 심령이 강퍅하기 때문이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녀는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따뜻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일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적인 마음 때문일 것이다.

* 하긴 눈물을 보여도 될 사람이 있고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사람 앞에서 누가 눈물을 흘리겠는가? 혹시 우리 성도들은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정도의 사람이 있는가? 그 여인은 예수님의 넓은 품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요, 그래서 마음 편히 자기 마음을 열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녀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아드리며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대단한 헌신이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녀는 예수님께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사실 여인이 눈물을 보이고, 머리털을 풀어 내림은 수치를 무릅쓰고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표한 것이다.

*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복종과 존경, 겸손과 섬김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기 것을 내어 쏟는 헌신과 자기 비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물, 머리털, 향유가 예수님의 발만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다른 사람들은 눈물, 머리털, 향유를 더 값지고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여인은 달랐다. 자신이 갖고 이는 가장 소중한 것도 예수님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오늘날 우리는 소중한 것은 자신이 갖고, 덜 소중한 것은 주님을 위해 바치려 하지 않는가?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것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기 비움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까지 바쳐 봤는가?” 가 결국 신앙의 현주소가 아니겠는가?

* 그녀는 예수에 관해 듣는 열심- 예수께 나오는 결심 – 예수께 자복하고 회개하는 결단 – 발에 입을 맞추는 겸손 – 자기 것을 내어 놓는 헌신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믿음을 예수께서 보시고 인정해 주신 것이다.

* 여인의 갑작스러운 행동 때문에 바리새인도 당황했을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 혹시 예수가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 줄은 알아차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그 여인의 행동을 꾸짖고 그녀는 내 쫓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 만일 죄인이었던 여인의 헌신을 아무 소리도 없이 그냥 다 받는다면 예수님의 영적 상태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부정한 여인이 터치를 하면 상대방도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상대방의 선한 행동을 선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누가 헌신을 하면 인정하고 박수를 쳐줄 줄 알아야 하는데 시기하고 내리깎으려 한다. 그 사람의 헌신을 내려깎아야 자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헌신을 하지 않은 사람은 높아질 것도 없다. 그러기에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지혜인데 우리는 그것을 못한다. 자신의 헌신하지 못함을 말로라도 커버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이 속으로 이렇게 악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40절)” 고 말씀하셨다. 물론 바리새인의 잘못을 지적해 주시기 위한 공의의 마음도 있었지만, 그에게 삶과 진리를 일깨워주시려는 사랑의 마음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과 공의의 마음을 알까? 그래서 자기 그릇만큼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다.

* 바리새인처럼 속으로 생각하는 괄호 속의 이야기는 대부분 나쁜 말일 가능성이 높다. 좋은 말이면 왜 속으로 하겠는가? 우리는 늘 괄호 속의 말을 품고 산다. 그러나 그 괄호 속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지 않으면 언제나 실수를 하게 되고, 그 실수는 관계의 파괴를 가져오게 된다. 바리새인은 자기만 알고 있는 괄호 속의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해지만 예수님은 이미 아셨다. 이는 예수님은 마음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 괄호 속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지혜롭게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그냥 아무 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괄호 속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잘못과 풀어내는 미숙함의 잘못이 함께 드러나면 결국 관계의 파괴를 가져오기 쉽다.

*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알아듣기 쉽게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빚을 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이요, 다른 한 사람은 50데나리온이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주인은 이 두 사람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알고 둘 다 탕감해 주었는데, 둘 중에 누가 주인을 더 사랑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하셨다.

* 이에 대해 바리새인 시몬은 500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43절)” 고 말씀하셨다.

* 우리는 산수 계산은 잘하지만 자신의 삶과 신앙의 현 수준을 가늠하는 계산은 잘 못한다. 특히 자신이 많은 빚을 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자신을 의인의 자리에 세우려 한다. 자신을 의인의 자리에 세우니 상대는 늘 죄인의 자리에 앉히고 만다. 상대를 죄인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앉으려 하니 교만함이 가득한 것이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도 은근히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 우리는 자신이 탕감을 받은 존재임을 잊고 산다. 그 은혜를 잊고 사니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이요, 주제 파악이 안 되니 감사치 못하는 것이며, 감사치 못하니 원망하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빚진 자임을 깨닫고 고백함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빚진 자임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이 여인을 비교하여 말씀하신다. 그런데 막상 비교해 보니 자신이 의인이라고 여겼던 바리새인이 오히려 죄인이었고, 죄인 취급을 했던 그 여인은 오히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시몬과 여인은 둘 다 죄인이었으나, 여인은 드러난 죄인이요, 시몬은 감추어진 죄인일 뿐이다.

* 즉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도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눈물로 발을 적셨고, 바리새인은 수건도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머리털로 닦아 드렸으며, 바리새인은 공경과 환영의 뜻으로 입도 맞추지 않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더러운 발에 입을 맞췄고,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그녀는 향유를 부으며 최선을 다해 헌신하지 않았는가? 결국 여인은 최선을 다해 예수를 맞이하고 대접했으나 바리새인은 예수를 초청만 했지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패역함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 과연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인가?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상대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정죄한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상대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도 않은데 말이다.

* 예수께서는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포하셨다. 사하여졌으니 그녀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된 것이다. 오히려 의인임을 자처하던 바리새인이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착각하지 말고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주님은 죄의 분량을 탓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는 주홍 같은 붉은 죄도 양털과 같이 희게 만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 물론 그녀가 예수님에게 헌신의 행위를 보였기에 죄사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죄사함을 받을 만한 행위를 했기에 예수님께 인정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자기 사랑 자기가 받는 것” 이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미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기에 행위로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50절)” 는 말씀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평안이다. 이제 예전처럼 죄와 어둠 가운데서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빛 가운데 우뚝 서서 평안함으로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온전한 삶이다.

* 예수는 그 여인의 죄의 문제뿐 아니라 마음의 평안까지 허락하시면서, 그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로 허락하셨음을 알 수 있다. 즉 버림받은 여인에서 이제는 예수의 사랑을 받는 여인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이다.

* 그런데 이 여인의 죄사함의 은총 앞에서 바리새인과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은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49절)” 라고 말한다. 그것도 “속으로 (49절)” 말이다. 즉 여전히 괄호 속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 그래서 속으로 괄호 속의 이야기를 품는 것은 습관이다. 안 좋은 이야기와 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것도 습관이다. “죽어야 끝난다” 는 비극적인 절망이 없기를 바란다. 살아 있을 때 바뀌고 변해야 하는데, 험담과 시기와 질투와 괄호 속의 악한 마음을 언제까지 품고 살아가려 하는가?

* 죄사함을 얻고 평안함을 선물로 허락받은 여인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괄호 속 이야기만 끌어안고 눈 흘기며 살아갈 것인가? 지금 자신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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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4 옥합을 깨뜨린 여자 (A Broken Alabaster Jar) 김태환 목사

마가복음 14:1-9

1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 이들이 말했습니다. “명절 동안에는 안 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킬 수 있어.”

3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있는, 문둥병에 걸렸던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병을 열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4 그러자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서로 말했습니다. “어째서 향유를 낭비하는 거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여자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만두어라. 어째서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7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원하면 언제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8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죽기 전에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1 It was now two days before Passover and the Festival of Unleavened Bread. The leading priests and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ere still looking for an opportunity to capture Jesus secretly and kill him.

2 “But not during the Passover celebration,” they agreed, “or the people may riot.”

3 Meanwhile, Jesus was in Bethany at the home of Simon,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 While he was eating①, a woman came in with a beautiful alabaster jar of expensive perfume made from essence of nard. She broke open the jar and poured the perfume over his head. / ①Or reclining

4 Some of those at the table were indignant. “Why waste such expensive perfume?” they asked.

5 “It could have been sold for a year’s wages①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So they scolded her harshly. / ①Greek for 300 denarii. A denarius was equivalent to a laborer’s full day’s wage

6 But Jesus replied, “Leave her alone. Why criticize her for doing such a good thing to me?

7 You will always have the poor among you, and you can help them whenever you want to. But you will not always have me.

8 She has done what she could and has anointed my body for burial ahead of time.

9 I tell you the truth, wherever the Good News is preached throughout the world, this woman’s deed will be remembered and discussed.”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이 여자가 누구냐 하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이 여자의 아름다운 헌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1-2절 말씀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음모와 흉계 속에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 시키신 역사적인 날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을 말합니다. 이 때 누룩 (leaven)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반죽에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만들면 곧 딱딱하게 굳어서 먹기도 힘들고 맛도 없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면서 과거 조상들의 고난의 삶을 기억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라는 말씀이 상황의 급박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긴박하게 모임을 갖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이 일에 가담했고, 율법학자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다양한 이유들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 (blasphemy)를 범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도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도 있었습니다. 유월절 축제만 아니었으면 금방이라도 예수님을 체포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했다가 혹시라도 유월절 축제에 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戰慄, thrill)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유월절을 결정적인 타이밍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모든 유대인 가정에서 어린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하는 때를 맞춰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이번 유월절을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사람들은 혹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이번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실까요?’ 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하려고 누구든지 예수를 보거든 즉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1:56-57) 과연, 누구의 계획대로 될까요?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man’s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an’s strength).” (고린도전서 1:25) 맞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깥의 상황은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 시간에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시몬은 전에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만일 시몬이 그 때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기회가 없을 뻔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것을 드리는 일, 헌신하는 일, 섬기는 일은 절대로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 (누가복음 12:20)’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그 곳에 머물며 사업을 벌여 돈을 벌어 보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안개와 같아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14)

한창 식사가 진행 중일 때, 한 여자가 매우 비싼 향유가 든 옥합 (alabaster jar)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아이구, 왜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는 거지?” 하면서 향유를 아까워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몇 몇 사람들이 화를 냈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먼저 이의를 제기했고, 다른 제자들도 유다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유다의 계산에 의하면,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시가로 계산하면, 적어도 30,000 불 정도 되는 큰 금액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마가복음 말씀에서는 이 여자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가격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식사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면서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이 여자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So they scolded her harshly).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향유를 부은 이 여자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식사에 초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지금 자신을 만지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at kind of woman is touching him. She’s a sinner!” (누가복음 7:39) 이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이 찬송가 가사에도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이 여자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나와 있지만, 이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향유의 가격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향유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아깝다고 하지 않고 슬쩍 듣기 좋게 포장을 합니다. “Why waste such expensive perfume? It could have been sold for a year’s wages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이렇게 낭비하지 말고 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속 마음이 들킬까 봐 포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향유를 주님께 드린 여자의 신분을 문제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죄인의 신분으로 식사 자리에 갑자기 뛰어든 이 여자에 대한 불쾌감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식사에 예수님을 초대했던 시몬은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예언자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예언자였다면 이 여자가가 누군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지했을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런 생각 역시 예수님을 놓치고 있습니다.

두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씀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깨뜨린 옥합 속에 든 향유가 300데나리온이 나간다는 것을 이 여자가 모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이것입니다. “왜 이 여자는 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을까?” “향유를 부어 드린 대상인 예수님은 과연 누구냐?”

다행히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용서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용서 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 증거로 이 여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였다.” (누가복음 7:47)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왜 그 여자가 예수님께 그렇게 비싼 향유를 부어 드렸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즉석에서 이 여자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7:50)”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질문에 질문을 낳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경에 이해가 안 가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구세주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 바디매오는 어떻게 알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불렀을까요? 갈릴리의 어부들은 무슨 생각으로 즉시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문제를 속 시원하기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분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만이 나의 많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식사 자리에 와 계시다는 얘기를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옥합을 집어 들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옥합은 결혼을 앞 둔 여자들이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 모아 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에게 옥합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가면서 고이 모아 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이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여자는 옥합보다 자기의 죄를 용서 받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삶을 청산할 수만 있다면, 옥합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옥합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이런 결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옥합이 무엇입니까?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그 옥합을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깨뜨릴 것입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깨뜨릴 것입니까? 질문을 바꿔 볼까요?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깨뜨렸습니까? 주님은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를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많이 용서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적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주님은 이 여자를 편들어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원하면 언제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죽기 전에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6-8절) 유대의 장례 풍속 중에 죽은 사람의 몸에 향유를 발라주는 절차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니고데모가 ‘몰약과 알로에를 섞은 향유 (mixture of myrrh and aloes)’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9).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서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

예수님은 “이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내 머리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은 나의 죽음을 미리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행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도, 예수님 주변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여자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일이 된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도 그렇습니다. 더운 날,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찬물 한 잔을 대접한 일, 외로운 사람을 방문한 일,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 일, 주님은 이런 일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 하시면서 “이런 일들이 곧 나에게 한 일이었다 (마태복음 25:40)”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9절) 예수님께서 최고의 찬사를 이 여자에게 보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칭찬과 찬사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은 주님을 위해 나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 (막 14:3-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이틀전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 아 들어 가셔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그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가룟유다가 무슨 의사 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노라고 호되게 그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룟유 다를 도리어 책망하시면서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 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며 극구 칭찬을 하셨습니다.

복음서를 상고해 보면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사건 4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5절 이하에 보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는데 이스라엘 중 아무 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고, 마태복음 15장 21 절 이하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으 며, 누가복음 21장 2절 이하에 보면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를 모두 털어서 연보궤 에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도 옥합을 깨뜨려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은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네사람 중에 세사람은 여자이고 한사람은 남자입니다. 창 세기 3장에 보면 하와 할머니가 최초로 범죄한 후부터 여자들이 큰 수치심을 갖 고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자보다 여자들을 더 칭찬하셨습 니다. 율법 아래서는 여자들이 부끄러워야 하겠지만 복음 안에서는 여자들이 부 끄러워야 할 까닭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안을 살펴보면 남자들도 칭찬들을 만한 일을 하지만, 여자들이 훨 씬 많이 칭찬들을 일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남자 성도들 가운데도 하나님 의 말씀의 절대적인 능력을 확신하고 그 말씀을 아멘으로 순종하는 백부장과 같 은 훌륭한 믿음을 갖고 사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성도들 가운데 수로 보니게 여인처럼 자녀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사랑하는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달려와 주 다윗의 자손 이여,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못들으신척 지 나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자 그 여인을 안타깝게 여긴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거들었습니다. 그러 나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일 축해 버렸고 그 말을 들은 여인은 개 취급을 받았으나 대들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도리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 다. 아마 보통사람같으면 동냥을 주기 싫거든 바가지나 깨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개로 밖에 안보입니까라고 대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겸손한 믿음 으로 끝까지 예수님께 매어달려 간구하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조금 기분나쁜 말을 들었다하면 토라지고 조금 어려운 일을 당했다하면 예수님 께 대드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하여도 더욱 예수님께 매어달려 부르짖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옥합을 깨뜨리고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 부은 여인은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 향유는 3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한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값이므로 노동자가 1년동안 날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모아야 살 수 있는 참으로 소중한 것 향유였습니다. 그 여인에 게는 그것 이외 다른 것이 없었던 가장 값나가는 보배였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 들이 소중히 여기는 아파트나 단독주택 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쏟아서 만든 마지막 먹는 빵 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쓰다 남은 것을 주님께 드린 것 이 아닙니다. 빚을 갚고 생활비를 떼어 놓고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쓰 레기와 같은 것을 조금 드린 것이 아니고 가장 값진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 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어떤 성도 한분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헌금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가진 것이 없으므로 어떻게 헌금을 할까 하다가 폐품을 모아서 그것을 팔아 건축 헌금을 하기로 하고 몇년동안 모아서 건축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날밤 그 여인은 꿈에 하늘 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이 네 집 이다하고 폐품으로 만든 거적같은 집을 보여 주었습니다. ‘천국에는 황금보석으 로 아름답게 꾸며진 집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살 집은 이렇게 폐품으로 만든 거 지같은 집이라니.’ 들어갈 수 없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천사가 이런 말을 들려주 었습니다. 그대가 정성으로 지은 천국의 집은 폐품으로 만든 집이니라. 이 말 을 듣고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어쩔줄 모르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잠자 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값비싼 보화와 돈 뭉치는 장롱 속에 놔두고 폐품을 판 쓰레기와 같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다니’ 라는 생각이 들자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고 그 다음날 장롱속에 깊이 두었던 그 보화와 돈뭉치를 꺼내서 건축헌금으로 드렸다고 합니 다.

‘나의 모든 보배는 장롱 속이나 예금통장에 쌓였고 나의 평생 자랑은 아파트마 련하는 것 뿐이로다’가 아니라 오늘 우리는 `나의 모든 보배는 저 천국에 쌓였고 나의 평생 자랑은 십자가 뿐이로다’ 그렇게 찬양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을 본 가룟유다가 분개하면서 무슨 의 사로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라고 그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유다는 경제면에서 머리회 전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경제적으로 생각하면 신앙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난한 자들과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 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알뜰하고 실리적인 면을 추구하는 똑똑한 사람이었으나 주님께서는 똑똑 한 가룟유다보다는 어리석은 듯한 마리아를 더 소중히 여기신 것입니다. 가난한 수천명을 도와준다 할지라도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자가 없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 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는 사람입니다.

8절에 보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셨느 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는데 오늘 우리 는 어떠합니까 여러분과 저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 장례치를 일을 미리 생각하면 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너무도 가슴아픈 장례를 치렀습니다. 과거 민정당 시절에 전국청 년 분과위원장을 하셨고 또 정치연수원 교수를 지냈던 분으로 꿈도 많고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곽영조씨는 50살도 살 지 못하고 49살에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위암을 수술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악 화되어 재진을 받았는데 암이 식도와 창자에 번져서 손을 쓸 수가 없을 만큼 재 발이 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열하는 미망인과 자녀들의 통곡 하는 소리는 가슴을 찢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 고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간 것은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 보 냄을 받아 흙으로 지어진 육체 안에 머물러 있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땅에 있 는 장막집을 떠나서 하늘나라 영원한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생 들은 수고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갓난애가 요람에 태어날 때에 고고의 소 리르 지르고 태어납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울어댑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 까 나 아(아)자, 마리 이(이)자, 괴로울 고(고)자, 괴로움 많은 이 세상을 어떻 게 살아가랴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인생은 질병과 가난과, 시련과, 환난과, 고 통과, 마귀와, 죄악과 싸우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됩니다.

요즘은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합니다. 그 러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까 대학원을 졸업한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애써서 사업을 일으키고, 고생고생하면서 아파트나 단독주택을 마 련하면 이제 집을 마련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 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써서 마련한 아 파트나 단독주택에서 몇년이나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부 르시면 그 애써 마련한 아파트도 단독주택도 고스란히 세상에 놔두고 빈손 들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이 세상을 떠나 야 할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므두셀라와 같이 오래 살다가 가기도 하고 반면 어떤 사람은 주님처럼 젊은 나이에 부르심을 입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김은주권사님 미수(미수)축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88세 생신을 맞이해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 리 권사님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셔서 5 남매를 믿음으로 기르시면서 우리교회에서 30여년동안 꾸준히 주님을 섬겨오셨습 니다. 17년전에 여의도로 이사를 가셨지만 미국에 가신 일을 제외하고는 주일 한 번 범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으시니 제발 안내는 서시지 마십시 요라고 권해도 누구보다도 먼저 나오셔서 기쁨으로 주보를 나눠드리며 안내를 서 시는 모습을 볼 때 참 감사합니다. 택시를 타든 버스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누구 를 만나든지 예수믿으라고 열심히 전도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 얼마나 믿음이 좋 으신가를 생각해 보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권사님께 건강과 장수의 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오래 사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명해서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분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사시든 짧게 하시든 간에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입니다.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불 치의 병으로 입원을 해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간호하는 가족 에게 말하기를 온가족을 다 오라고 부르고 또 목사님도 오시도록 해서 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연락을 하여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목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이 장로님이 하시 는 말이 링겔주사를 빼고 빨리 퇴원 수속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가족 들이 깜짝 놀라서 아니 링겔주사를 빼면 돌아가시게 되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 냐고 말려도 얼마나 완강하게 명령을 내리시는지 할 수 없이 링겔을 빼고 퇴원 수속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퇴원을 하신 다음에 장로님은 가족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 니다. 내가 장로가 된지 30년이 되었지만 주님 앞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하나 님 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가기전에 마지막 마무리를 해야 되겠다. 장로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첫째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둘째로 전도하는 일이요, 셋 째로 교인을 보살피는 일이요, 네째로 물질로 봉사하는 일인데 어느것 하나 제대 로 한 것이 없으니 부끄럽기 그지없구나! 갈 날이 몇날 남지 않았으나 몸이 아파 서 전도할 수 없고 몸이 불편하니 교인을 보살필 수도 없구나 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 밖에 없는데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과 물질로 봉사하는 것 밖에 없구 나.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의 오분의 일을 교회에다가 바쳤습니다. 그 리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기도하시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하 나님 앞에 설 준비를 마친 마음에 하나님 앞에 가신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 러분 오늘 부르심을 입는다고 하면 부끄러움이 없이 주 앞에 설 준비를 하시고 계십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 다. 그 여인은 영원히 기념될 참으로 소중한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 가에 못박혀 자기를 깨뜨려 피를 쏟듯이 마리아도 자기를 깨뜨려 향유를 쏟은 것 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마리아에게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 되는 곳에는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붓는 사건이 오늘날도 나타나야 될 줄로 믿 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의 것은 한푼도 바치지 아니하면서 남의 것을 가지 고 생색이나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러시아 선교센타건립을 위해서 러시아 성도들을 초청하여 말씀과 선교보고와 간증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위해서 기도하고 러시아 선교센타 건립 헌금을 주앞에 작정하고 드렸습니다. 어떤 분은 삼백만원 을 작정하신 분도 있고 또 이백만원을 작정하신 분과 백만원 작정 하신 분 등 여 러분이 계셨습니다.

화요일날 심방을 가기 위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집사님 한분이 헐레벌 떡 달려 오시더니 급히 마련하느라고 봉투에 담지도 못하고 가져왔습니다하시 면서 백만원 뭉치를 제 앞에 내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저는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집이 압류되어서 가족이 함께 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하여 크게 감 동을 받고 이렇게 급히 돈을 마련해 가지고 이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가 지고 왔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떤 분이 전화를 주셨는데 주일날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아 제 아들의 장래를 위해 조금씩 모아둔 돈 이백만원이 있는데 그 것을 선교 센타 건립헌금으로 드리겠다고 하며 하나님 앞에 정성스럽게 헌금을 드렸습니다.

또 어렵게 사시는 분들도 백만원 또 그 이상 헌금을 작정하셔서 드리기로 하신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같은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 까 우리도 그 여인처럼 옥합을 깨뜨려 귀한 희생의 항료를 주님께 부으십시다. 그 리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그 아름다운 행위의 향기가 널리널리 퍼져나갈 것 이요, 우리 주님께 칭찬을 들을 것이요, 축복을 받을 것이며, 하늘나라에 가서 떳떳하게 주님 앞에 서게 되어 주님께 큰 상을 받게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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