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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 장 강해 | 로마서강해 | 로마서 6:1-14 | 나도 죽은 십자가 | 유기성 목사 4360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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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주석 – 로마서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로마서 제 6장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 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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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마서 6 장 강해

  • Author: 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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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kes: 좋아요 709개
  • Date Published: 2019. 3.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3rFBdpAimA4

로마서 6장 주석

로마서 제 6장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

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

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

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

)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

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

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

거리로 바꾸는 자들(유 1:4)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

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

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

에 이르게 되었다(고전 5, 6장).

=====6:2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

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

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

에서(3:8, 9)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

(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

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

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

고 본다.

죄에 대하여…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

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 )를 ‘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

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

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

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

를 종종한다(11절 ;7:4, 6;갈 2:19;골 2:20;3:3).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

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다. 이

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

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

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

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

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6, 14, 16, 17절 주석 참조).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

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

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

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

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

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

고 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

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

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6:4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

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

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

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

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

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Murray).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

, 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

한다(갈 5:24;골 2:12).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

다(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

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

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

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

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

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

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

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는 것”이라는 말씀과(요 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

=====6:5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Black)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

인 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

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Murray)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 )가

‘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

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

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

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Hendriksen, Barmby).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

메다'(* )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

(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

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後者)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를 RSV는 ‘확실히

되리라'(shall certainly be)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

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

한다(Murray, Meyer).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

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

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

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

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엡 2:1;골 2:13) 본질적으로 마음

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6절),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

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

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세

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

미도 된다(갈 2:20).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

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고

후 4:11;골 2:20).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

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

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

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

는 의미가 된다.

=====6:7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

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

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

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

(Halakah)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

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행 22:3)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正統)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

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ughan, Liddon).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

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

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

을 얻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赦免)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본절을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

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에 자기

의 죄를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2:10).

=====6:8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

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

(Murray).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聖化)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

(* )은 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we shall live;KJV, RSV)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

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

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 , 조에)은 장래에 일어난 구속 사건의 모

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

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

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 )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

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6: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아니하

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 )는 ‘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

려 KJV는 ‘우케티’를 ‘더이상…않다'(no more)로 RSV는 ‘결코…아니다'(never)로 번

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自

意的)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

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聖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

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

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즉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

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고전 15:12-17).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

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

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

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

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

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8:3)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

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

, 테 하마르티아)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창 2:17)이 아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사 53:4-6). 또한 본절의 ‘단번에’

(* , 에파팥스)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

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

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

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反復的)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once for all, RSV)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

사를 완성하셨다(히 7:27;9:12;10:10).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

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을 ‘하나님

으로 말미암아'(throught God), 혹은 ‘하나님 안에서'(in God)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Calvin, Chrysostom) 이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

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Murray, Meyer, Hendriksen). 우선 본절의 ‘하

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

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

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

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3:8, 14).

=====6:11

본절에 대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

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

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have deied)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have

risen).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

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

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가지 해야 한다”고 하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 – 본

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

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礎石)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

용에 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참조하라.

여길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제스데'(* )는 현재 명

령형 복수 2인칭으로 ‘권고’로 해석해도 되며 ‘명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사용된 동사가 명백히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본절도 권고형보다는 명

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

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6:12

그러므로 –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1, 2a 절)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피력했던 진술들을(2b-11절)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

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

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죄에 대한 성

도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

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

노릇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이전과 같이 성도들에게 왕노

릇할 수는 없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인이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

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짓된 가장(假

裝)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본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도는 의

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

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 몸’의 ‘죽을’은 헬라어로 ‘드네토'(*

)이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mortal;KJV, RSV).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

니하는 ‘생령'(生靈)을 가졌었다(창 2:7).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

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렇기에 바

울은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몸의 사욕(私慾)을 순종치 말고 –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 몸에

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挑戰)을 받게 된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

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한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

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편 ‘순종치 말고’라

는 말은 난폭하고 불같은 정욕대로 행할 것을 사단이 강요한다는 암시를 함축한다. 사

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죄의 심각성과 타격적인 지배성을 상기할 수 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

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바 있다(마 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

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

하게 거부해야 한다.

=====6:1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지체’라는말은 12절의 ‘죽을

몸’이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의의 병기'(*

, 호플라 아디키아스)란 표현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특히 바울은 ‘병기’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각 지체가

불의를 행함에 있어서 도구적인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制御)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

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 ‘너희 자신’은 ‘너희 죽을 몸'(12절)과 ‘너

희 지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란 표현

은 11절 내용의 반복으로, 성도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의 신분임을 상기시

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

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

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자는 바울이 몸의 지체를 악에 대항

하고 의를 위해 전쟁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생각하게 된 것이 그의 선생들이나 스토

아 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Black).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희

박하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한 개념을 영적 전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군사적 삶에 비유하는 표현법을 즐겨 사용

했다(고전 9:7;고후 6:7;엡 6:10-20;살전 5:8;딤후 2:3).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투쟁하기 위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싫어할 때, 이미 그는 자기의 몸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

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하나

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할 수는 없다. 한편 ‘주관치

못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퀴리유세이'(* )는 미래 능

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미래 시제인 것은 단순히 장래에 되어질 일을 언

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확증(確證)한다. 즉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법'(* , 노모

스)이 ‘은혜'(* , 카리스)와 대비되어 있으므로 이 ‘법’은 ‘법칙’이나 ‘세상

적인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이 ‘율법’과 ‘은혜’를 대비시킨 것은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이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이 사실은 8:1, 2에서 바울이 선포했듯이 그리스

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

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6:15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 이 질문은 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절은 1절과 같은 질문이지만, 1절은 문제의 제

기이며 본절은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을 재확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주제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

고 또한 강조점의 차이로 1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좋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며, 본절은 ‘죄에서 해방되어 은혜 아래 있으므로 계속 죄를 지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자에 대한 반론이다. 한편 ‘죄를 지으리요’라는 표현도 역시 1

절의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자세한 것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럴 수 없느니라(* , 메 게노이토) –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질

문한 사항에 대해 강한 부정의 대답을 하고 있다. KJV는 이 문구의 헬라어 ‘메 게노이

토’가 지닌 강력한 부정의 뜻을 살려 ‘하나님이 금하신다'(Good forbid)라고 해석하였

고 RSV는 ‘결코 그렇지 않다'(By no means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당연히 방종한 마음과 생활을 거부하고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해

야 한다.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 )는

‘청지기’ 또는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 )와는 달리 철저히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를 가리킨다(slave;RSV, NIV).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노예로

바치면 이미 그는 자기 몸에 대한 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주인에 대한 철저한 복

종만 있을 뿐이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영적인 차원에서 사람은

‘죄의 종’이든지 ‘순종의 종’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한'(계 3:15)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엄격한 의미에서 ‘죄의 종’에

속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죄의 종’과 ‘순종의 종’이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죄의 종’은 ‘불순종의 종’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곧 ‘불순종의 아들들'(엡

5:6)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이들은 벧리알의 자손들로(신 13:13;삿 19:22) ‘불법의 사

람’이요, ‘멸망의 사람’이다(살후 2:3). 그리고 또 다른 대조로서 ‘사망’과 ‘의’가 언

급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죄의 종’과 ‘순종의 종’에게 각각 주어지는 열매다. 23절 말

씀과 연관지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한다(살후 1:9). 반면에

‘의’는 ‘사망’과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영생’으로 대치해도 무난하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혹자는 본절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하나님께

로 돌아온 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게 하신 하나

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주석했다(Hendriksen).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교회가 성화(聖

化)된 모습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 이하에 계속된 바울의 진

술은 성화의 진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된

신분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사망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했으므로

(5:17) 그의 생명에 동참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니고 있던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성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 혹자는 본 구절이 딤후 1:13의 ‘바른 말’과 딤

전 1:10의 ‘바른교훈'(딤후 4:3;딛 1:9;2:1)과 같이 복음 중에서 윤리적인 부분에 대

한 설명에 속한다고 단언한다(Murray).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을 따르면 곧이어 언급되

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는 선언이 믿음에 의한 것이 아

니라 윤리적인 본을 순종함으로써 주어진 결과임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기독

교를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초래하며 반(反)복음적인 가르침이다. 따라

서 ‘교훈의 본’은 복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으로 순종하여 – 이 표현은 바울이 10:10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

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과 ‘순종’을 동

일 선상에서 설명한다(히 3:18, 19;4:2, 6). 따라서 본 구절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또는 ‘마음으로 믿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서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치

중하면 인간 행위가 강조되며 바울이 그동안 강조했던 ‘믿음’과는 별개(別個)인 것으

로 오해하기 쉽다.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 성도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

여졌으며(6절),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은 그는 죄에서 벗어났다(7절). 이런 이유로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종이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둘로데테’

(* )는 단순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순과거 시제

는 어떤 동작이 불확정직임을 나타낸다. 즉 동작의 결과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내지 않

는다. 바울은 성도가 ‘의에게 종이 된’것을 단순과거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7절의 ‘교

훈의 본’, 곧 복음을 믿은 결과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육신'(* , 사르크스)은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질

수 있는 ‘몸'(* , 소마)과는 달리 이 세상의 존재 양식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

과 더불어 멸망당할 자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육신’은 ‘영'(성령)과 대

립을 이루면서 연약함과 허무 가운데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Ridderbos). 따라서 본

절은 본 서신을 받아보게 될 로마교회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예를 들었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에 대한 예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의 신분이 하나님의 신실

한 종이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종과 주인과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과 같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표현

을 갈 3:15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전에 너희가…불법에 이른 것같이- 본 구절은 1:18에서 3:18까지 바울이 언급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

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거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

스'(* )가 ‘성화’를 의미하는지 ‘성결'(holiness)을 의미하는지에 대

한 견해가 학자마다 다르다. 혹자는 고전 1:30;살전 4:3, 4, 7;살후 2:13;딤전 2:15;

히 12:14;벧전 1:2 등을 근거로 ‘하기아스모스’가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성화’

(sanctification)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룩’ 또는 ‘성별’을 뜻한다

고 이해한다(Murray, Barmby).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구절들 중에 살전 4:3, 4, 7과

딤전 2:15은 단순히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밖의 것들은 그렇

지 않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하기아스모스’의 접미사 ‘모스'(* )는 ‘활

동’을 의미하는데, 이 ‘활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1:30;6:11에서 ‘하기아스모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거룩’을 의미하며 이 ‘거룩’함이 ‘의’와 ‘구속’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전가됨을 가

르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를 ‘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와 ‘구속’과 ‘거룩'(성화)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

(8:23)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13절) 당연히 ‘거룩함에 이

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성화)이 구원

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

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

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

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聯合)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

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2:14, 15). 그래서 칼빈(Calvin)은 “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

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6:21

그 때에(* , 토테) – 바로 앞절에서 언급한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성경은 ‘열매'(* , 카르폰)에 대해 말할 때

‘선한 열매'(마 3:8;요 4:36;갈 5:22;빌 1:11;약 3:17)와 ‘악한 열매'(22절;7:5)를 구

분한다. 혹자는 여기서 바울이 ‘선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Murray, Barmby).

그리고 본절의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었다’란 대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

한 해석은 그다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

란 표현이 죄의 종이었던 때를 의미하므로 ‘열매’를 달리 해석하지 않고 ‘열매’란 표

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본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

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죄의 종으

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가 아니었던가 ?”일 것이다.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표현은 17절에서 20절까지의 진술이 그리스도

를 믿고 있으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에 거하자'(1절)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 성

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했었으

나 하나님을 알면서부터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그는 지난 날의 일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죄의 종이 된 결과는 오직 ‘사망’만 있을 뿐이다. 혹

자는 이 ‘사망’이 ‘영원한 사망’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지만(Barmby),

(1) ‘사망’이 ‘영생’과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22, 23절), 그리고 (2) ‘마지막’이

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사건인 대심판에 대한 암시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사

망’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6:22

그러나 이제는 – 이 표현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것

이다(3:21 주석 참조). 지금까지 바울은 죄에게 종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그

결말에 대해 설명했으나 본절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전환(轉換)시키고자 이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18절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해방

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6절).

하나님께 종이 되어 –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

야 한다. 이 ‘의’는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에게 이루어졌지만, (2) 연약한 육

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바울이 18절에서는 ‘의에게’라고 언급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

께’라고 언급했을 뿐이지 그 두 단어는 본질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도 19절에서와 마찬가

지로 ‘하기아스모스'(* )이다. 이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

(sanctfic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

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

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 )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

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

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성화)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

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고전 1:30;6:11) 동시에 ‘성화’를 수행

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의’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

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5:24;6:47, 54).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 –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삯’에 해당하는 헬

라어 ‘와소니아'(* )는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

(Hendriksen, Murray, Calvin, Barmby, Black).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

(눅 3:14;고전 9:7)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

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 ,

카리스마)와 대조되고 있다. 이 ‘은사’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

는'(4:6)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

에서 해방되어(18, 22a절)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22b절)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

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의’,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

코 자랑할 수 없다.

헬라어 로마서 6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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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운 에루멘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 히나 헤 카리스 플레오나세

개역개정,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새번역,1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말성경,1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가톨릭성경,1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은총이 많아지도록 우리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영어NIV,1 What shall we say, then? Shall we go on sinning so that grace may increase?

영어NASB,1 What shall we say then? Are we to continue in sin that grace might increase?

영어MSG,1 So what do we do? Keep on sinning so God can keep on forgiving?

영어NRSV,1 What then are we to say? Should we continue in sin in order that grace may abound?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ι ουν ερουμεν επιμενουμεν τη αμαρτια ινα η χαρις πλεοναση

라틴어Vulgate,1 quid ergo dicemus permanebimus in peccato ut gratia abundet

히브리어Modern,1 אם כן מה נאמר הנעמד בחטא למען ירבה החסד׃

성 경: [롬6: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거리로 바꾸는 자들(유 1:4)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전 5, 6장).

메 게노이토 호이티네스 아페다노멘 테 하마르티아 포스 에티 제소멘 엔 아우테

개역개정,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새번역,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성경,2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그대로 살겠습니까?

가톨릭성경,2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서는 이미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 살 수 있겠습니까?

영어NIV,2 By no means! We died to sin; how can we live in it any longer?

영어NASB,2 May it never be! How shall we who died to sin still live in it?

영어MSG,2 I should hope not! If we’ve left the country where sin is sovereign, how can we still live in our old house there?

영어NRSV,2 By no means! How can we who died to sin go on living in it?

헬라어신약Stephanos,2 μη γενοιτο οιτινες απεθανομεν τη αμαρτια πως ετι ζησομεν εν αυτη

라틴어Vulgate,2 absit qui enim mortui sumus peccato quomodo adhuc vivemus in illo

히브리어Modern,2 חלילה לנו כי מתנו לחטא ואיך נוסיף לחיות בו׃

성 경: [롬6: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에서(3:8, 9)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 죄에 대하여…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를 ‘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를 종종한다(11절 ;7:4, 6;갈 2:19;골 2:20;3:3).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6, 14, 16, 17절 주석 참조).

에 아그노이테 호티 호소이 에밮티스데멘 에이스 크리스톤 예순 에이스 톤 다나톤 아우투 에밮티스데멘

개역개정,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새번역,3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3 그리스도와 연합해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해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합니까?

가톨릭성경,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침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영어NIV,3 Or don’t you know that all of us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영어NASB,3 Or do you not know that all of us who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Jesus have been baptized into His death?

영어MSG,3 Or didn’t you realize we packed up and left there for good? That is what happened in baptism. When we went under the water, we left the old country of sin behind; when we came up out of the water, we entered into the new country of grace–a new life in a new land! That’s what baptism into the life of Jesus means.

영어NRSV,3 Do you not know that all of us who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3 η αγνοειτε οτι οσοι εβαπτισθημεν εις χριστον ιησουν εις τον θανατον αυτου εβαπτισθημεν

라틴어Vulgate,3 an ignoratis quia quicumque baptizati sumus in Christo Iesu in morte ipsius baptizati sumus

히브리어Modern,3 או האינכם ידעים כי כלנו הנטבלים למשיח ישוע למותו נטבלנו׃

성 경: [롬6: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쉬네타페멘 운 아우토 디아 투 밮티스마토스 에이스 톤 다나톤 히나 호스페르 에게르데 크리스토스 에크 네크론 디아 테스 돜세스 투 파트로스 후토스 카이 헤메이스 엔 카이노테티 조에스 페리파테소멘

개역개정,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4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4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침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영어NIV,4 We were therefore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we too may live a new life.

영어NASB,4 Therefore we have been buried with Him through baptism into death, in order tha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through the glory of the Father, so we too might walk in newness of life.

영어MSG,4 When we are lowered into the water, it is like the burial of Jesus; when we are raised up out of the water, it is like the resurrection of Jesus.

영어NRSV,4 Therefore we have been buried with him by baptism into death, so that, just as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by the glory of the Father, so we too might walk in newness of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4 συνεταφημεν ουν αυτω δια του βαπτισματος εις τον θανατον ινα ωσπερ ηγερθη χριστος εκ νεκρων δια της δοξης του πατρος ουτως και ημεις εν καινοτητι ζωης περιπατησωμεν

라틴어Vulgate,4 consepulti enim sumus cum illo per baptismum in mortem ut quomodo surrexit Christus a mortuis per gloriam Patris ita et nos in novitate vitae ambulemus

히브리어Modern,4 לכן נקברנו אתו בטבילה למות למען כאשר נעור המשיח מן המתים בכבוד האב כן נתהלך גם אנחנו בחיים מחדשים׃

성 경: [롬6:4]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Murray).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 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갈 5:24;골 2:12).

󰃨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과(요 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

에이 가르 쉼퓌토이 게고나멘 토 호모이오마티 투 다나투 아우투 알라 카이 테스 아나스타세오스 에소메다

개역개정,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새번역,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5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사람이 됐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같은 부활로도 그분과 연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영어NIV,5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like this in his death, we will certainly also be united with him in his resurrection.

영어NASB,5 For if we have become united with Him in the likeness of His death, certainly we shall be also in the likeness of His resurrection,

영어MSG,5 Each of us is raised into a light-filled world by our Father so that we can see where we’re going in our new grace-sovereign country.

영어NRSV,5 For if we have been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we will certainly be united with him in a resurrection like his.

헬라어신약Stephanos,5 ει γαρ συμφυτοι γεγοναμεν τω ομοιωματι του θανατου αυτου αλλα και της αναστασεως εσομεθα

라틴어Vulgate,5 si enim conplantati facti sumus similitudini mortis eius simul et resurrectionis erimus

히브리어Modern,5 כי אם נדבקנו בדמיון מותו אכן גם נהיה דבוקים לתחיתו׃

성 경: [롬6:5]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Black)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Murray)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가 ‘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Hendriksen, Barmby).

󰃨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메다'(*)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後者)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를 RSV는 ‘확실히 되리라'(shall certainly be)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Murray, Meyer).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투토 기노스콘테스 호티 호 팔라이오스 헤몬 안드로포스 쉬네스타우로데 히나 카타르게데 토 소마 테스 하마르티아스 투 메케티 둘류에인 헤마스 테 하마르티아

개역개정,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새번역,6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말성경,6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해져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

가톨릭성경,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어NIV,6 For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영어NASB,6 knowing this,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that our body of sin might be done away with, that we should no longer be slaves to sin;

영어MSG,6 Could it be any clearer? Our old way of life was nailed to the Cross with Christ, a decisive end to that sin-miserable life–no longer at sin’s every beck and call! What we believe is this:

영어NRSV,6 We know that our old self was crucified with him so that the body of sin might be destroyed, and we might no longer be enslaved to sin.

헬라어신약Stephanos,6 τουτο γινωσκοντες οτι ο παλαιος ημων ανθρωπος συνεσταυρωθη ινα καταργηθη το σωμα της αμαρτιας του μηκετι δουλευειν ημας τη αμαρτια

라틴어Vulgate,6 hoc scientes quia vetus homo noster simul crucifixus est ut destruatur corpus peccati ut ultra non serviamus peccato

히브리어Modern,6 באשר ידעים אנחנו כי נצלב אתו האדם הישן אשר בנו למען תבטל גוית החטא לבלתי היותנו עוד עבדים לחטא׃

성 경: [롬6:6]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엡 2:1;골 2:13) 본질적으로 마음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6절),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

󰃨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도 된다(갈 2:20).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고후 4:11;골 2:20).

󰃨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된다.

호 가르 아포다논 데디카이오타이 아포 테스 하마르티아스

개역개정,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새번역,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7 이는 죽은 사람은 이미 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영어NIV,7 because anyone who has died has been freed from sin.

영어NASB,7 for he who has died is freed from sin.

영어MSG,7 (SEE 6:6)

영어NRSV,7 For whoever has died is freed from sin.

헬라어신약Stephanos,7 ο γαρ αποθανων δεδικαιωται απο της αμαρτιας

라틴어Vulgate,7 qui enim mortuus est iustificatus est a peccato

히브리어Modern,7 כי אשר מת הוא נקה מן החטא׃

성 경: [롬6:7]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Halakah)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행 22:3)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正統)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ughan, Liddon).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赦免)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본절을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에 자기의 죄를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2:10).

에이 데 아페다노멘 쉰 크리스토 피스튜오멘 호티 카이 쉬제소멘 아우토

개역개정,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새번역,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말성경,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가톨릭성경,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영어NIV,8 Now if w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will also live with him.

영어NASB,8 Now if we hav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shall also live with Him,

영어MSG,8 If we get included in Christ’s sin-conquering death, we also get included in his life-saving resurrection.

영어NRSV,8 But if we hav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will also live with him.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ι δε απεθανομεν συν χριστω πιστευομεν οτι και συζησομεν αυτω

라틴어Vulgate,8 si autem mortui sumus cum Christo credimus quia simul etiam vivemus cum Christo

히브리어Modern,8 והנה אם מתנו עם המשיח נאמין כי גם נחיה עמו׃

성 경: [롬6:8]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Murray).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聖化)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은 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we shall live;KJV, RSV)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 조에)은 장래에 일어난 구속 사건의 모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에이도테스 호티 크리스토스 에게르데이스 에크 네크론 우케티 아포드네스케이 다나토스 아우투 우케티 퀴리유에이

개역개정,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새번역,9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말성경,9 우리가 알기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죽지 않으시고 죽음이 더 이상 그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가톨릭성경,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영어NIV,9 For we know that since Christ was raised from the dead, he cannot die again; death no longer has mastery over him.

영어NASB,9 knowing that Christ, having been raised from the dead, is never to die again; death no longer is master over Him.

영어MSG,9 We know that when Jesus was raised from the dead it was a signal of the end of death-as-the-end. Never again will death have the last word.

영어NRSV,9 We know that Christ, being raised from the dead, will never die again; death no longer has dominion over him.

헬라어신약Stephanos,9 ειδοτες οτι χριστος εγερθεις εκ νεκρων ουκετι αποθνησκει θανατος αυτου ουκετι κυριευει

라틴어Vulgate,9 scientes quod Christus surgens ex mortuis iam non moritur mors illi ultra non dominabitur

히브리어Modern,9 באשר ידענו כי המשיח אחרי אשר נעור מן המתים לא ימות עוד והמות לא ישלט בו עוד׃

성 경: [롬6:9]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는 ‘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려 KJV는 ‘우케티’를 ‘더이상…않다'(no more)로 RSV는 ‘결코…아니다'(never)로 번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自意的)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聖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즉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고전 15:12-17).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8:3)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호 가르 아페다넨 테 하마르티아 아페다넨 에파팤스 호 데 제 제 토 데오

개역개정,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새번역,10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0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 사시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영어NIV,10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영어NASB,10 For the death that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that He lives, He lives to God.

영어MSG,10 When Jesus died, he took sin down with him, but alive he brings God down to us.

영어NRSV,10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 γαρ απεθανεν τη αμαρτια απεθανεν εφαπαξ ο δε ζη ζη τω θεω

라틴어Vulgate,10 quod enim mortuus est peccato mortuus est semel quod autem vivit vivit Deo

히브리어Modern,10 כי אשר מת מת לחטא פעם אחת ואשר חי חי הוא לאלהים׃

성 경: [롬6:10]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 테 하마르티아)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창 2:17)이 아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사 53:4-6). 또한 본절의 ‘단번에’ (*, 에파팥스)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反復的)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once for all, RSV)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다(히 7:27;9:12;10:10).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throught God), 혹은 ‘하나님 안에서'(in God)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Calvin, Chrysostom) 이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Murray, Meyer, Hendriksen). 우선 본절의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3:8, 14).

후토스 카이 휘메이스 로기제스데 헤아우투스 에이나이 네크루스 멘 테 하마르티아 존타스 데 토 데오 엔 크리스토 예수

개역개정,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새번역,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말성경,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십시오.

가톨릭성경,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영어NIV,11 In the same way, count your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영어NASB,11 Even so consider yourselves to be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영어MSG,11 From now on, think of it this way: Sin speaks a dead language that means nothing to you; God speaks your mother tongue, and you hang on every word. You are dead to sin and alive to God. That’s what Jesus did.

영어NRSV,11 So you also must consider yourselves dead to sin and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υτως και υμεις λογιζεσθε εαυτους νεκρους μεν ειναι τη αμαρτια ζωντας δε τω θεω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τω κυριω ημων

라틴어Vulgate,11 ita et vos existimate vos mortuos quidem esse peccato viventes autem Deo in Christo Iesu

히브리어Modern,11 וכן גם אתם חשבו אתכם מתים לחטא וחיים לאלהים במשיח ישוע אדנינו׃

성 경: [롬6:1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본절에 대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have deied)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have risen).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 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가지 해야 한다”고 하였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 – 본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礎石)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참조하라.

󰃨 여길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제스데'(*)는 현재 명령형 복수 2인칭으로 ‘권고’로 해석해도 되며 ‘명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사용된 동사가 명백히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본절도 권고형보다는 명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메 운 바실류에토 헤 하마르티아 엔 토 드네토 휘몬 소마티 에이스 토 휘파쿠에인 타이스 에피뒤미아이스 아우투

개역개정,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새번역,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말성경,12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 몸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고

가톨릭성경,12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영어NIV,12 Therefore do not let sin reign in your mortal body so that you obey its evil desires.

영어NASB,12 Therefore do not let sin reign in your mortal body that you should obey its lusts,

영어MSG,12 That means you must not give sin a vote in the way you conduct your lives. Don’t give it the time of day.

영어NRSV,12 Therefore, do not let sin exercise dominion in your mortal bodies, to make you obey their passions.

헬라어신약Stephanos,12 μη ουν βασιλευετω η αμαρτια εν τω θνητω υμων σωματι εις το υπακουειν αυτη εν ταις επιθυμιαι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2 non ergo regnet peccatum in vestro mortali corpore ut oboediatis concupiscentiis eius

히브리어Modern,12 אם כן אפוא אל תמלך החטאת בגופכם אשר ימות לנטות אחריה בתאותיו׃

성 경: [롬6:1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 그러므로 –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1, 2a 절)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피력했던 진술들을(2b-11절)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했다.

󰃨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이전과 같이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는 없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인이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짓된 가장(假裝)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본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도는 의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 몸’의 ‘죽을’은 헬라어로 ‘드네토'(*)이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mortal;KJV, RSV).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니하는 ‘생령'(生靈)을 가졌었다(창 2:7).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렇기에 바울은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 몸의 사욕(私慾)을 순종치 말고 –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 몸에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挑戰)을 받게 된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한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편 ‘순종치 말고’라는 말은 난폭하고 불같은 정욕대로 행할 것을 사단이 강요한다는 암시를 함축한다. 사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죄의 심각성과 타격적인 지배성을 상기할 수 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바 있다(마 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메데 파리스타네테 타 멜레 휘몬 호플라 아디키아스 테 하마르티아 알라 파라스테사테 헤아우투스 토 데오 호세이 에크 네크론 존타스 카이 타 멜레 휘몬 호플라 디카이오쉬네스 토 데오

개역개정,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새번역,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 ㉣또는 ‘무기’

우리말성경,13 또한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자처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가톨릭성경,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영어NIV,13 Do not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sin, as instruments of wickedness, but rather offer yourselves to God, as those who have been brought from death to life; and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him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영어NASB,13 and do not go on presenting the members of your body to sin as instruments of unrighteousness; but present yourselves to God as those alive from the dead, and your members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to God.

영어MSG,13 Don’t even run little errands that are connected with that old way of life. Throw yourselves wholeheartedly and full-time–remember, you’ve been raised from the dead!–into God’s way of doing things.

영어NRSV,13 No longer present your members to sin as instruments of wickedness, but present yourselves to God as those who have been brought from death to life, and present your members to God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3 μηδε παριστανετε τα μελη υμων οπλα αδικιας τη αμαρτια αλλα παραστησατε εαυτους τω θεω ως εκ νεκρων ζωντας και τα μελη υμων οπλα δικαιοσυνης τω θεω

라틴어Vulgate,13 sed neque exhibeatis membra vestra arma iniquitatis peccato sed exhibete vos Deo tamquam ex mortuis viventes et membra vestra arma iustitiae Deo

히브리어Modern,13 ]31-21[ גם אל תכינו את אבריכם להיות כלי עול לחטא אך תכינו את נפשכם לאלהים כחיים מעם המתים ואבריכם כלי צדקה לאלהים כי החטא לא יוכל למשל עוד בכם יען אינכם תחת יד התורה כי אם תחת יד החסד׃

성 경: [롬6:1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지체’라는 말은 12절의 ‘죽을 몸’이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의의 병기'(*, 호플라 아디키아스)란 표현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특히 바울은 ‘병기’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각 지체가 불의를 행함에 있어서 도구적인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制御)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 ‘너희 자신’은 ‘너희 죽을 몸'(12절)과 ‘너희 지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란 표현은 11절 내용의 반복으로, 성도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의 신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기 때문이다.

󰃨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자는 바울이 몸의 지체를 악에 대항하고 의를 위해 전쟁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생각하게 된 것이 그의 선생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Black).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한 개념을 영적 전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군사적 삶에 비유하는 표현법을 즐겨 사용했다(고전 9:7;고후 6:7;엡 6:10-20;살전 5:8;딤후 2:3).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투쟁하기 위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싫어할 때, 이미 그는 자기의 몸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하마르티아 가르 휘몬 우 퀴리유세이 우 가르 에스테 휘포 노몬 알라 휘포 카린

개역개정,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새번역,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4 죄가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할 것인데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영어NIV,14 For sin shall not be your master, because 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영어NASB,14 For sin shall not be master over you, for 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영어MSG,14 Sin can’t tell you how to live. After all, you’re not living under that old tyranny any longer. You’re living in the freedom of God.

영어NRSV,14 For sin will have no dominion over you, since you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αμαρτια γαρ υμων ου κυριευσει ου γαρ εστε υπο νομον αλλ υπο χαριν

라틴어Vulgate,14 peccatum enim vobis non dominabitur non enim sub lege estis sed sub gratia

히브리어Modern,14 ]31-21[׃

성 경: [롬6:14]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할 수는 없다. 한편 ‘주관치 못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퀴리유세이'(*)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미래 시제인 것은 단순히 장래에 되어질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확증(確證)한다. 즉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다.

󰃨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법'(*, 노모스)이 ‘은혜'(*, 카리스)와 대비되어 있으므로 이 ‘법’은 ‘법칙’이나 ‘세상적인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이 ‘율법’과 ‘은혜’를 대비시킨 것은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이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이 사실은 8:1, 2에서 바울이 선포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티 운 하마르테소멘 호티 우크 에스멘 휘포 노몬 알라 휘포 카린 메 게노이토

개역개정,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새번역,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NIV,15 What then? Shall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By no means!

영어NASB,15 What then? Shall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May it never be!

영어MSG,15 So, since we’re out from under the old tyranny, does that mean we can live any old way we want? Since we’re free in the freedom of God, can we do anything that comes to mind?

영어NRSV,15 What then? Should we sin because w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By no means!

헬라어신약Stephanos,15 τι ουν αμαρτησομεν οτι ουκ εσμεν υπο νομον αλλ υπο χαριν μη γενοιτο

라틴어Vulgate,15 quid ergo peccavimus quoniam non sumus sub lege sed sub gratia absit

히브리어Modern,15 ועתה מה הנחטא יען איננו תחת יד התורה כי אם תחת יד החסד חלילה׃

성 경: [롬6:15]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 이 질문은 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절은 1절과 같은 질문이지만, 1절은 문제의 제기이며 본절은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을 재확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주제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강조점의 차이로 1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좋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며, 본절은 ‘죄에서 해방되어 은혜 아래 있으므로 계속 죄를 지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자에 대한 반론이다. 한편 ‘죄를 지으리요’라는 표현도 역시 1절의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자세한 것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질문한 사항에 대해 강한 부정의 대답을 하고 있다. KJV는 이 문구의 헬라어 ‘메 게노이토’가 지닌 강력한 부정의 뜻을 살려 ‘하나님이 금하신다'(Good forbid)라고 해석하였고 RSV는 ‘결코 그렇지 않다'(By no means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당연히 방종한 마음과 생활을 거부하고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크 오이다테 호티 호 파리스타네테 헤아우투스 둘루스 에이스 휘파코엔 둘로이 에스테 호 휘파쿠에테 에토이 하마르티아스 에이스 다나톤 에 휘파코에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새번역,16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6 여러분이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든지 순종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돼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돼 의에 이릅니다.

가톨릭성경,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영어NIV,16 Don’t you know that when you offer yourselves to someone to obey him as slaves, you are slaves to the one whom you obey–whether you are slaves to sin, which leads to death, or to obedience, which leads to righteousness?

영어NASB,16 Do you not know that when you present yourselves to someone as slaves for obedience, you are slaves of the one whom you obey, either of sin resulting in death, or of obedience resulting in righteousness?

영어MSG,16 Hardly. You know well enough from your own experience that there are some acts of so-called freedom that destroy freedom. Offer yourselves to sin, for instance, and it’s your last free act. But offer yourselves to the ways of God and the freedom never quits. All your lives you’ve let sin tell you what to do.

영어NRSV,16 Do you not know that if you present yourselves to anyone as obedient slaves, you are slaves of the one whom you obey, either of sin, which leads to death, or of obedience, which leads to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κ οιδατε οτι ω παριστανετε εαυτους δουλους εις υπακοην δουλοι εστε ω υπακουετε ητοι αμαρτιας εις θανατον η υπακοης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16 nescitis quoniam cui exhibetis vos servos ad oboediendum servi estis eius cui oboeditis sive peccati sive oboeditioni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16 הלא ידעתם כי לאשר תתנו את נפשכם להיות עבדיו לסור למשמעתו הן עבדים אתם לאשר תשמעו לו אם לחטא אלי מות אם למשמעת אלי צדקה׃

성 경: [롬6:16]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는 ‘청지기’ 또는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와는 달리 철저히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를 가리킨다(slave;RSV, NIV).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노예로 바치면 이미 그는 자기 몸에 대한 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주인에 대한 철저한 복종만 있을 뿐이다.

󰃨 죄의 종으로 사망에…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영적인 차원에서 사람은 ‘죄의 종’이든지 ‘순종의 종’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한'(계 3:15)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엄격한 의미에서 ‘죄의 종’에 속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죄의 종’과 ‘순종의 종’이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죄의 종’은 ‘불순종의 종’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곧 ‘불순종의 아들들'(엡 5:6)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이들은 벧리알의 자손들로(신 13:13;삿 19:22) ‘불법의 사람’이요, ‘멸망의 사람’이다(살후 2:3). 그리고 또 다른 대조로서 ‘사망’과 ‘의’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죄의 종’과 ‘순종의 종’에게 각각 주어지는 열매다. 23절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한다(살후 1:9). 반면에 ‘의’는 ‘사망’과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영생’으로 대치해도 무난하다.

카리스 데 토 데오 호티 에테 둘로이 테스 하마르티아스 휘페쿠사테 데 에크 카르디아스 에이스 혼 파레도데테 튀폰 디다케스

개역개정,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새번역,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우리말성경,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받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

가톨릭성경,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영어NIV,17 But thanks be to God that, though you used to be slaves to sin, you wholeheartedly obeyed the form of teaching to which you were entrusted.

영어NASB,17 But thanks be to God that though you were slaves of sin, you became obedient from the heart to that form of teaching to which you were committed,

영어MSG,17 But thank God you’ve started listening to a new master,

영어NRSV,17 But thanks be to God that you, having once been slaves of sin, have become obedient from the heart to the form of teaching to which you were entrusted,

헬라어신약Stephanos,17 χαρις δε τω θεω οτι ητε δουλοι της αμαρτιας υπηκουσατε δε εκ καρδιας εις ον παρεδοθητε τυπον διδαχης

라틴어Vulgate,17 gratias autem Deo quod fuistis servi peccati oboedistis autem ex corde in eam formam doctrinae in qua traditi estis

히브리어Modern,17 אבל תודת לאלהים כי הייתם עבדי החטא ואחר שמעתם בכל לבבכם אל תכונת הלקח אשר נמסרתם לו׃

성 경: [롬6:17]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혹자는 본절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주석했다(Hendriksen).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교회가 성화(聖化)된 모습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 이하에 계속된 바울의 진술은 성화의 진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된 신분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사망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했으므로(5:17) 그의 생명에 동참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니고 있던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성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 혹자는 본 구절이 딤후 1:13의 ‘바른 말’과 딤전 1:10의 ‘바른교훈'(딤후 4:3;딛 1:9;2:1)과 같이 복음 중에서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에 속한다고 단언한다(Murray).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을 따르면 곧이어 언급되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는 선언이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본을 순종함으로써 주어진 결과임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를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초래하며 반(反)복음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교훈의 본’은 복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 마음으로 순종하여 – 이 표현은 바울이 10:10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과 ‘순종’을 동일 선상에서 설명한다(히 3:18, 19;4:2, 6). 따라서 본 구절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또는 ‘마음으로 믿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서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치중하면 인간 행위가 강조되며 바울이 그동안 강조했던 ‘믿음’과는 별개(別個)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엘류데로덴테스 데 아포 테스 하마르티아스 에둘로데테 테 디카이오쉬네

개역개정,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새번역,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8 죄에서 해방돼 의의 종이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영어NIV,18 You have been set free from sin and have become slaves to righteousness.

영어NASB,18 and having been freed from sin, you became slaves of righteousness.

영어MSG,18 one whose commands set you free to live openly in his freedom!

영어NRSV,18 and that you, having been set free from sin, have become slaves of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λευθερωθεντες δε απο της αμαρτιας εδουλωθητε τη δικαιοσυνη

라틴어Vulgate,18 liberati autem a peccato servi facti estis iustitiae

히브리어Modern,18 שחררתם מידי החטא לכן השתעבדתם לצדקה׃

성 경: [롬6:18]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죄에게서 해방되어 – 성도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졌으며(6절),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은 그는 죄에서 벗어났다(7절).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종이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둘로데테'(*)는 단순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순과거 시제는 어떤 동작이 불확정직임을 나타낸다. 즉 동작의 결과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가 ‘의에게 종이 된’것을 단순과거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7절의 ‘교훈의 본’, 곧 복음을 믿은 결과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안드로피논 레고 디아 텐 아스데네이안 테스 사르코스 휘몬 호스페르 가르 파레스테사테 타 멜레 휘몬 둘라 테 아카다르시아 카이 테 아노미아 에이스 텐 아노미안 후토스 뉜 파라스테사테 타 멜레 휘몬 둘라 테 디카이오쉬네 에이스 하기아스몬

개역개정,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새번역,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 ㉥그, ‘육신’

우리말성경,19 여러분의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대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의 지체를 부정과 불법의 종으로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처럼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십시오.

가톨릭성경,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영어NIV,19 I put this in human terms because you are weak in your natural selves. Just as you used to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in slavery to impurity and to ever-increasing wickedness, so now offer them in slavery to righteousness leading to holiness.

영어NASB,19 I am speaking in human terms because of the weakness of your flesh. For just as you presented your members as slaves to impurity and to lawlessness, resulting in further lawlessness, so now present your members as slaves to righteousness, resulting in sanctification.

영어MSG,19 I’m using this freedom language because it’s easy to picture. You can readily recall, can’t you, how at one time the more you did just what you felt like doing–not caring about others, not caring about God–the worse your life became and the less freedom you had? And how much different is it now as you live in God’s freedom, your lives healed and expansive in holiness?

영어NRSV,19 I am speaking in human terms because of your natural limitations. For just as you once presented your members as slaves to impurity and to greater and greater iniquity, so now present your members as slaves to righteousness for sanctific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19 ανθρωπινον λεγω δια την ασθενειαν της σαρκος υμων ωσπερ γαρ παρεστησατε τα μελη υμων δουλα τη ακαθαρσια και τη ανομια εις την ανομιαν ουτως νυν παραστησατε τα μελη υμων δουλα τη δικαιοσυνη εις αγιασμον

라틴어Vulgate,19 humanum dico propter infirmitatem carnis vestrae sicut enim exhibuistis membra vestra servire inmunditiae et iniquitati ad iniquitatem ita nunc exhibete membra vestra servire iustitiae in sanctificationem

히브리어Modern,19 כדרך בני אדם אני מדבר מפני רפיון בשרכם כי כאשר לפנים הכינותם את אבריכם לעבודת החטאה והרשע להרשיע כן עתה הכינו את אבריכם לעבודת הצדקה להתקדש׃

성 경: [롬6:19]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육신'(*, 사르크스)은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질 수 있는 ‘몸'(*, 소마)과는 달리 이 세상의 존재 양식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과 더불어 멸망당할 자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육신’은 ‘영'(성령)과 대립을 이루면서 연약함과 허무 가운데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Ridderbos). 따라서 본절은 본 서신을 받아보게 될 로마교회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예를 들었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에 대한 예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의 신분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종과 주인과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과 같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갈 3:15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 전에 너희가…불법에 이른 것같이- 본 구절은 1:18에서 3:18까지 바울이 언급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거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스'(*)가 ‘성화’를 의미하는지 ‘성결'(holiness)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견해가 학자마다 다르다. 혹자는 고전 1:30;살전 4:3, 4, 7;살후 2:13;딤전 2:15;히 12:14;벧전 1:2 등을 근거로 ‘하기아스모스’가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성화'(sanctification)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룩’ 또는 ‘성별’을 뜻한다고 이해한다(Murray, Barmby).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구절들 중에 살전 4:3, 4, 7과 딤전 2:15은 단순히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밖의 것들은 그렇지 않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하기아스모스’의 접미사 ‘모스'(*)는 ‘활동’을 의미하는데, 이 ‘활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1:30;6:11에서 ‘하기아스모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거룩’을 의미하며 이 ‘거룩’함이 ‘의’와 ‘구속’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전가됨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를 ‘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와 ‘구속’과 ‘거룩'(성화)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8:23)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13절) 당연히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성화)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호테 가르 둘로이 에테 테스 하마르티아스 엘류데로이 에테 테 디카이오쉬네

개역개정,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새번역,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말성경,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의에 대해 자유스러웠습니다.

가톨릭성경,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영어NIV,20 When you were slaves to sin, you were free from the control of righteousness.

영어NASB,20 For when you were slaves of sin, you were free in regard to righteousness.

영어MSG,20 As long as you did what you felt like doing, ignoring God, you didn’t have to bother with right thinking or right living, or right anything for that matter.

영어NRSV,20 When you were slaves of sin, you were free in regard to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τε γαρ δουλοι ητε της αμαρτιας ελευθεροι ητε τη δικαιοσυνη

라틴어Vulgate,20 cum enim servi essetis peccati liberi fuistis iustitiae

히브리어Modern,20 כי בעת היותכם עבדי החטא חפשים הייתם מן הצדקה׃

성 경: [롬6:20]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聯合)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2:14, 15). 그래서 칼빈(Calvin)은 “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티나 운 카르폰 에이케테 토테 에프 호이스 뉜 에파이스퀴네스데 토 가르 텔로스 에케이논 다나토스

개역개정,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새번역,21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우리말성경,21 그러나 여러분은 그때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그런 일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이는 그것들의 마지막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21 그 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영어NIV,21 What benefit did you reap at that time from the things you are now ashamed of? Those things result in death!

영어NASB,21 Therefore what benefit were you then deriving from the things of which you are now ashamed? For the outcome of those things is death.

영어MSG,21 But do you call that a free life? What did you get out of it? Nothing you’re proud of now. Where did it get you? A dead end.

영어NRSV,21 So what advantage did you then get from the things of which you now are ashamed? The end of those things is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ινα ουν καρπον ειχετε τοτε εφ οις νυν επαισχυνεσθε το γαρ τελος εκεινων θανατος

라틴어Vulgate,21 quem ergo fructum habuistis tunc in quibus nunc erubescitis nam finis illorum mors est

히브리어Modern,21 ומה אפוא הפרי שהיה לכם אז מן המעשים אשר עתה תבשו מהם כי אחריתם המות׃

성 경: [롬6:2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그 때에(*, 토테) – 바로 앞절에서 언급한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성경은 ‘열매'(*, 카르폰)에 대해 말할 때 ‘선한 열매'(마 3:8;요 4:36;갈 5:22;빌 1:11;약 3:17)와 ‘악한 열매'(22절;7:5)를 구분한다. 혹자는 여기서 바울이 ‘선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Murray, Barmby). 그리고 본절의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었다’란 대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다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란 표현이 죄의 종이었던 때를 의미하므로 ‘열매’를 달리 해석하지 않고 ‘열매’란 표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본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가 아니었던가 ?”일 것이다.

󰃨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표현은 17절에서 20절까지의 진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에 거하자'(1절)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했었으나 하나님을 알면서부터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그는 지난 날의 일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죄의 종이 된 결과는 오직 ‘사망’만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 ‘사망’이 ‘영원한 사망’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지만(Barmby), (1) ‘사망’이 ‘영생’과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22, 23절), 그리고 (2)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사건인 대심판에 대한 암시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사망’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뉘니 데 엘류데로덴테스 아포 테스 하마르티아스 둘로덴테스 데 토 데오 에케테 톤 카르폰 휘몬 에이스 하기아스몬 토 데 텔로스 조엔 아이오니온

개역개정,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새번역,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말성경,22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가톨릭성경,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어NIV,22 But now that you have been set free from sin and have become slaves to God, the benefit you reap leads to holiness, and the result is eternal life.

영어NASB,22 But now having been freed from sin and enslaved to God, you derive your benefit, resulting in sanctification, and the outcome, eternal life.

영어MSG,22 But now that you’ve found you don’t have to listen to sin tell you what to do, and have discovered the delight of listening to God telling you, what a surprise! A whole, healed, put-together life right now, with more and more of life on the way!

영어NRSV,22 But now that you have been freed from sin and enslaved to God, the advantage you get is sanctification. The end is eternal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22 νυνι δε ελευθερωθεντες απο της αμαρτιας δουλωθεντες δε τω θεω εχετε τον καρπον υμων εις αγιασμον το δε τελος ζωην αιωνιον

라틴어Vulgate,22 nunc vero liberati a peccato servi autem facti Deo habetis fructum vestrum in sanctificationem finem vero vitam aeternam

히브리어Modern,22 אכן עתה בהיותכם משחררים מידי החטא ומשעבדים לאלהים יש לכם פריכם לקדשה ואחריתו חיי עולם׃

성 경: [롬6:2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그러나 이제는 – 이 표현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3:21 주석 참조). 지금까지 바울은 죄에게 종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그 결말에 대해 설명했으나 본절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전환(轉換)시키고자 이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18절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해방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6절).

󰃨 하나님께 종이 되어 –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야 한다. 이 ‘의’는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에게 이루어졌지만, (2)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바울이 18절에서는 ‘의에게’라고 언급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께’라고 언급했을 뿐이지 그 두 단어는 본질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도 19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기아스모스'(*)이다. 이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sanctfic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성화)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고전 1:30;6:11) 동시에 ‘성화’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의’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5:24;6:47, 54).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타 가르 옾소니아 테스 하마르티아스 다나토스 토 데 카리스마 투 데우 조에 아이오니오스 엔 크리스토 예수 토 퀴리오 헤몬

개역개정,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새번역,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말성경,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가톨릭성경,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영어NIV,23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영어NASB,23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fre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영어MSG,23 Work hard for sin your whole life and your pension is death. But God’s gift is real life, eternal life, delivered by Jesus, our Master.

영어NRSV,23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fre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3 τα γαρ οψωνια της αμαρτιας θανατος το δε χαρισμα του θεου ζωη αιωνιος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τω κυριω ημων

라틴어Vulgate,23 stipendia enim peccati mors gratia autem Dei vita aeterna in Christo Iesu Domino nostro

히브리어Modern,23 כי שכר החטא הוא המות ומתנת חסד אלהים היא חיי העולם במשיח ישוע אדנינו׃

성 경: [롬6:2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 –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삯’에 해당하는 헬라어 ‘와소니아'(*)는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Hendriksen, Murray, Calvin, Barmby, Black).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눅 3:14;고전 9:7)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 카리스마)와 대조되고 있다. 이 ‘은사’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4:6)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18, 22a절)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22b절)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의’,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코 자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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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의 생활, 성화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한다; 즉 복음과 칭의의 현실적 효과를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았고, 또한 그와 함께 산다는 것이 핵심이다.

본 장을 이해하는 데 주의할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던지 하나님께 대하여 종이 되었다는 것은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서 죄의 영향이 완전히 소멸되었음 꼭 뜻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9절에서 적고 있듯이 이는 ‘주장하는 권세’ 곧 주권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주권을 논하는 테두리, 영역은, 17절에서 ‘마음’이라고 적은 바 우리 영혼의 심장이다. 그랬을 때, 불신자는 죄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절대적 대권 아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위치에 두셨냐는 것 뿐이다. 불신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셨지만, 신자는 그리스도 안의 은혜가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신 것이다.

1–5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는 죄에 계속하여 거하는 것이 불가능함

2절: 여기서 “죄”는 우리의 부패를 나타낸다; “죄성”이라고 해도 된다 (12절 설명 참조).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나중에 9–11절에서 보겠지만,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 죄의 영향이 소멸되었다고 꼭 볼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더 상세히 적고 있다); 하지만, 19절에서 적고 있듯이, 그 영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영생이 자리잡고 있다; 반대로 불신자는 죄로 인한 사망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불신자는 계속해서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데,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악순환에서 또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을 주장한다.

3절: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주권에 대하여 죽었는데, 이것은 우리와 예수님이 하나로 연합 되었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다. 여기서 “합하여”는 into이다.

4절: 예수 믿기 전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고, 오히려 부분적으로나마 남아있던 하나님의 형상의 영향을 간혹 받기도 한 상태였는데, 반대로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요, 죄는 영향을 끼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다. 속죄는 영화를 위한 수단이다; 그리스도께서 메시아가 되신 ‘목적’은 우리를 그와 함께 그 처럼 살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속죄를 최종 목적 처럼 생각하기 쉬운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목적을 이루는데에 부족하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 그 은혜 아래 들어간 자는 죄에 계속 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4절을 통해 사도는 우리에게 성화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만세 전에 예정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그 안에서 택하신 이유는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울의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는 ‘구원 받은 것이 감사하니 이제라도 힘을 내서 열심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자’는 식의 반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밀고 가시는 영광의 길에 대해 ‘아멘’으로, ‘예, 과연 그것이 제가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저를 주장하소서’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행보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5–11절: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음을 알아야 함

5절: 죄의 주권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동시에 새 생명의 주권 아래 들어간 것은 물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에도 참예하기 때문이다.

9–11절: 죄에 대해서 죽었다던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9절에서 언급하듯이 ‘주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신자는 죄가 주권을 행사하고,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신다. 이는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통치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대권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절대적 대권 아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위치에 두셨냐는 것이다. 불신자는 죄로 인한 죽음이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셨지만,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이 주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두신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장 8절)

그러므로 죄의 주권에서 벗어났고 (the vigor of sin is destroyed), 이제는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실체를 분명히 알고 확신하라. 이는 마치 본디 죄의 왕국에서 태어났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로 옮기워진 것과 같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로새서 1장 13절)

죄의 왕국과 접전 중이라 그 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있어도 다시는 죄의 주권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특히, 다시는 죄가 우리를 옭아 메는 족쇄인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9절 참조)! 죄의 영향력 까지 없애는 것이 성화의 길이고, 이를 성경은 “땅의 지체를 죽이는” (Mortification of the Flesh; 로마서 8장 13절) 것으로 표현했다.

“for though the mortifying of the flesh is only begun in us, yet the life of sin is destroyed, so that afterwards spiritual newness, which is divine, continues perpetually.”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1절의 ‘여길지어다’라고 번역된 번역된 λογίζομαι는 ‘그런 줄로 대충 여기고 살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분명히 알고 거기에 의거해 모든 것을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죄값을 치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듯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또한 나를 죄의 주권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향해 걷게하신다는 것을 또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나를 죄책에서 면제해 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또한 해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행보를 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 주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고 그 자각 위에서 모든 것을 행해야 할 것이다.

12–14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행함

12–13절: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다시는 죄의 주권 아래 있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갈 일이 아니다. 여기서 “몸”이라고 한 것은 6절의 옛 사람과 통한다. “죽을”이란 헬라어로 mortali (영어로 mortal) 곧, 죽기로 작정된, 죽음에 이르도록 저주 받음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죽었다”(dead)고 말할 수 있다.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죄가 죽을 몸으로 “너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Let not sin therefore reign “you” in your mortal body); 이는 그 사욕을 좇지 않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Still further, he gives the name of sin to the original depravity which dwells in our hearts, and which leads us to sin, and from which indeed all evil deeds and abominations stream forth. In the middle, between sin and us, he places lusts, as the former has the office of a king, while lusts are its edicts and command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어떻게 하면 사욕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나의 의지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한다 (13절). 나를 거룩의 길로 하나님께서 밀고 가고시겠다고 알리셨기에 (6절) 나의 지체를 그 분의 뜻에 따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호세아 14장 8절)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활용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사도행전 13:43)

의의 도구 정도가 아니라 의의 “병기”(arma, 헬라)로서 죄를 대적하는 병기로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죄의 사욕을 좇으면 그것은 마치 죄에게 우리 수족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죄에게 종 노릇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의 명령에 손발을 놀릴 일이다!

“As the soldier has ever his arms ready, that he may use them whenever he is ordered by his general, and as he never uses them but at his command; so Christians ought to regard all their faculties to be the weapons of the spiritual warfare: if then they employ any of their members in the indulgence of depravity, they are in the service of sin. But they have made the oath of soldiers to God and to Christ, and by this they are held bound: it hence behoves them to be far away from any intercourse with the camps of si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4절: 죄가 죄인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에 근거해서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주권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율법의 정죄를 피했기 때문이다. 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율법이 우리에게 선언할 수 있는 모든 정죄와 형벌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는 자이며, 그에게는 죄가 다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Vobis non dominabitur,’ ὀυ κυριεύσει — shall not be a lord over you, shall not have power or authority or control over you; or, it may mean, shall not domineer over you, so as to retain you, as it were by force, under its power: and the reason given favors this idea; for he says,’Ye are not under law, but under grace.’ Law is the strength of sin; and by law it binds its subjects under its service.” (John Owen, footnote in Commentary on Romans by John Calvin)

첨언하자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다시는 율법을 상전으로 모시고 그것을 통해 의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15–19절: 율법이 아닌 은혜이기에 더더욱 죄를 짓는 것이 불가함

14절에서 사도는 또한 특이한 말을 하는데 바로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더 이상 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이 7장에서 이어진다. 여기서는 당분간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더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죄를 짓겠는가를 논박한다.

15절: 그렇게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죄를 범하겠는가? 율법의 정죄 기능에서 자유하다는 것이지 교육적 기능까지 없어진 것은 아님을 배울 수 있다.

16–18절: (16절) 원인과 결과를 헛갈리지 말자; 종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는 누구에게 순종하는지 보면 누구의 종인지 안다는 단순한 진리를 언급할 뿐이다.

16, 17, 18절에서 의인화한 “죄”를 19절에서는 “부정과 불법”이라고 표현했다. 죄인에게 있는 모든 부패의 총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대비해 16절의 “순종”이라던지 18, 19절의 “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 심령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죄의 종이라면 그 주인으로 부터 사망을 물려받을 것이요, 순종의 종이 되면 그 주인으로 부터 의(righteousness)를 물려받는다 (16절). 의에 이른다는 것은 칭의(justification)에 이른다는 뜻이 아니다. 의와 칭의는 구별되는데, 이렇게 비슷한 단어로 우리말 번역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6절에 ‘순종의 종‘이라 표현한 것을 18절에서는 순종의 열매를 따라 ‘의의 종‘이라고, 19절에서는 순종의 대상을 따라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이 모든 말은, 앞서 9–11절에서 논한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죄의 종이라던지 순종의 종이라던지를 논하는 테두리 곧, 죄 혹 은혜의 주권이 역사하는 장소는, 우리 심령의 가장 깊은 곳이라는 점이다 — 이를 17절에서 우리 말로는 ‘마음’이라고, 영어로는 heart라고 번역 하였다. 이것을 보고 신자의 인격적 활동에 죄의 영향이 소멸되었다고 꼭 볼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7장에서 더 상세히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영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영생이 자리잡고 있지만, 불신자는 죄로 인한 사망이 자리잡고 있다.

결국 16절에서 사도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앞서 (14절) 율법에서 자유케 됨으로 죄가 우리에게 주권을 부리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은혜의 주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는데, 주권이 바뀐 이상 죄를 더 멀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종의 종으로 만드신 것이고, 그로써 죽음을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이룬 것은 —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 하나님이시다 (17절). 17절에 교훈의 “본”이라고 번역된 것은 manner, fashion, pattern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실패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16절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16절에서 ‘순종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을 18절에서는 ‘의의 종’이라고 표현했다; 열매로 원인을 기술한 것이다. 16절의 논리를 따르자면 18절은 17절의 결과가 아닌 원인이다. 영어 번역(ESV)은 이를 조금 더 명확히 했다.

그러므로 17–18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케 하셨고, 또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게 하셨다.”

“If the Son shall free you, you shall be free indeed.” (John 8:36.)

사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순종케 하셨는지 언급함으로써, 외부에서 규율하는 율법과 비교하여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 얼마나 더 우월한지 보이고 있다.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면 죄를 더 짓기는 커녕 근원적인 데서 부터 죄를 미워하게 된다.

19절: “육신이 연약하므로” — 즉 우리의 연약 때문에 — ‘전에 죄에게 내어준 것 처럼 의에게 내 주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지만, 실상 죄에게 내어준 것 보다 훨씬 더 열심으로 의에게 내주어야 한다고 사도는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영혼의 심장에 자리 잡은 새 생명이 우리의 행실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지체를 의에게 ‘내주라‘고 하였는데, 이는 13절의 ‘드리라‘와 원문에는 같은 단어이다; 우리의 힘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이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한 바 성신님을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장 16–18절)

20–23절: 은혜 아래서 비로소 성화와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

20절: 대조법, 즉 우리가 이제는 죄에 대해 자유하고 의의 종이 되었다. 전에는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 특히 의가 우리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고, 죄의 전적인 주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안에서 다시는 죄가 우리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의가 우리를 주장한다.

21절: “그 때”란 예수님 믿기 전. “부끄러워 하나니”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은 신자의 특징 중 하나다.

22절: “마지막”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최종 도착지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의 대가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영어 번역은 이를 조금 더 잘 표현했다.

23절: “죄의 삯”과 대비하여 ‘의의 삯’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 (free gift)”라고 표현한 것을 주의하라. 또한 “영생”을 주어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주의하라; 다시 말해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을 가져온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22절과 연계해서 내리는 결론은 칭의와 성화, 영화 —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It may however be hence inferred with certainty, that our salvation is altogether through the grace and mere beneficence of God. He might indeed have used other words — that the wages of righteousness is eternal life; and then the two clauses would correspond: but he knew that it is through God’s gift we obtain it, and not through our own merits; and that it is not one or a single gift; for being clothed with the righteousness of the Son, we are reconciled to God, and we are by the power of the Spirit renewed unto holiness. And he adds, in Christ Jesus, and for this reason, that he might call us away from every conceit respecting our own worthiness.” (John Calvin, Commentary on Ro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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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강해 설교말씀] 성화(聖化)의 이유(롬 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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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이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거듭남으로 중생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났으니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화는 태어난 사람이 성장해 나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성화(聖化)의 이유(롬 6:1-23)

1-11절, 세례의 원리

[1-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에이스)[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에이스)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지만(5:20)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없다’는 말은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성도가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해 죽은 자가 어떻게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있겠는가?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한 것이다. 세례는 첫째로 죄씻음을 표시하고 확증하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고, 죄씻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져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그를 믿는 우리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그와 연합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이치에 반대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4-5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함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며, 그의 부활의 생명이 그와 연합된 이들 속에 역사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죄 가운데, 즉 영적 죽음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구원받은 자들은 새 생명을 받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구원받은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옛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옛 자아, 곧 구원받기 전의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옛 사람이 죽은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죄의 몸’은 ‘옛 사람’과 같은 뜻으로 죄성(罪性)의 주체를 가리킨다. 이제 죄의 몸인 옛 사람은 죽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새 사람이 살았다. 우리의 구원은 죄 안 짓게 하는 구원이다. 그것은 죄에 대해 죽는 구원이며 의를 향해 사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구원의 목적과 방향에 역행하는 것이다.

[8-1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또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삶으로 나타난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거룩함은 구원의 당연한 과정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영원히 사시고 다시 죽지 않으시듯이, 예수 믿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고 범죄치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 단번에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죄와 사망은 설 곳이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향해 사신 것이었다. 이제 죄와 사망은 끝났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만이 그에게 있다. 그의 부활의 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성도의 거룩한 삶 곧 성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가 의미하는 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 곧 성도의 성화(聖化)의 당위성을 증거한다. 그것은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죄의 몸인 옛 사람이 죽었고 새 사람이 새 생명 안에서 산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산 자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죄와 결별하고 산 자처럼 의와 거룩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2-23절, 순종의 원리

[12-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몸의 욕심들로 말미암아 그것에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는 몸의 욕심들을 통해 활동한다(약 1:15). 몸은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므로 죄가 몸을 주장치 못하도록 욕심들을 통제하고 절제해야 하고 죄에 복종치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몸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지체’는 몸의 부분들, 즉 눈과 귀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킨다. 성도는 이제 몸의 모든 부분을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며 더럽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만지고 그런 곳으로 갔을지라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몸을 거룩하게 드리고 의롭고 선한 것만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도가 자기 몸을 죄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하기 때문이다. 또 죄가 그를 주관치 못하는 이유는 그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책임과 그 형벌이 제거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말한다.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는 법적인 구원이다. 성도는 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이미 얻었다.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다’는 원어(메 게노이토)는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바울은 6:1-2에서도 성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게 대답했었다. 그는 여기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 하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다시 한번 분명하게 대답한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짓는 생활을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성화는 성도의 당연한 길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9-10).

[16-17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가 거룩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순종의 원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의 종이 된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 죄 안에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 안에 살다가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구원받았던 처음 순간을 언급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는 본래 죄에게 순종하고 죄만 짓고 살았던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이었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이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다. ‘마음으로’라는 원어(에크 카르디아스)는 ‘마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라는 뜻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에 근거하여 우리의 모든 죄는 씻음 받고 우리는 단번에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았다. 우리는 죄에게서 자유케 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19-22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 속에 남은 죄성을 가리킨다.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에게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면이 필요한 것이다. 성도는 성화(聖化)가 당연한 목표라는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성도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만 지었기 때문에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 맺은 열매라는 것은 더러운 죄들이었으므로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그 결국은 사망이었다. 진실로, 모든 죄들은 비록 범죄할 당시에는 혹시 즐거워보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것들이다. 의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죄는 수치와 후회를 남길 뿐이다. 이제 성도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인해 죄에게서 해방되었다. 죄의 종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나님께 종이 되는 자유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마 11:30).

거룩함의 열매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당연한 열매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반드시 성화(聖化)를 동반한다. 법적인 구원에 실제적 구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출생한 아기가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 일이듯이, 중생한 성도가 지식이 더하고 거룩하여지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이고 당연한 성화는 성도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도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른다.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과 거룩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생과 한 줄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끊어질 수 없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정상적 과정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23절]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영생임이니라].

성도가 영생을 확실히 얻을 것이라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죄에 대한 대가(代價), 즉 보응과 형벌이 죽음이지만 택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말씀은 복음 진리의 요약과도 같다.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우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죄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성화는 성도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위해 힘써야 한다. 거룩은 구원의 본질이요 목적이며 방향이다. 우리는 의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룩함을 이루어야 한다.

[민수기 히브리어 원어 성경 강해] 레위 아들 게르손 고핫 므라리(민 3: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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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설교말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다”(롬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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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6장 설교말씀 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다라는 말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다”(롬 6:1-11)

● 명제 :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 목적 : 우리도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고 무덤에서 주님과 부활로 연합되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죄가 청산되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원죄이고 또 다른 죄는 자 범죄입니다. 이것을 청산하려면 믿음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원죄가 해결되고 행위의 회개로 자 범죄를 해결합니다. 주님은 이 문제를 청산해 주시려고 육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육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받은 자는 주님과 연합된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으면 함께 살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서 부활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여 평생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롬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느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냐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자 범죄를 계속해서 지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원죄가 사라진 사람입니다. 원죄가 사라졌다는 것은 영원한 심판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가 이 세상에서 자 범죄를 계속해서 지으면 안 됩니다. 율법주의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더 짓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를 주장하고 있으니 은혜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하고 있습니다.

롬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은 말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냐는 말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이것을 반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어 죄에 거함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는 자들에게 죄를 허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자 범죄를 짓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자 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반복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냐고 합니다. (세례를 받은: טבל 타발 2881 담그다, 적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담가져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세례는 내가 받고 싶지 않다고 해서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받고 싶다고 해서 받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받게 됩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성령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물세례는 교회에 들어와 세례 학습을 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내가 학습 공부를 했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공부하지 않아도 오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주님과 함께 장사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나도 또한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장사되었나니: קבר 카바르 6912 매장하다)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무덤에 묻혀 장사되었습니다. 이렇게 장사된 것도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묻히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나는 새 생명을 소망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새 생명: חדש 하다쉬 2319 새롭게 하다, 새로 만들다) 주님과 함께 무덤에 들어가 연합되어 부활됨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다쉬는 완전히 새롭게 탄생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히브리어 문법은 강조 수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하에 완전한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변화되기 싫어도 변화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새 사람으로 바뀌기 싫어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완전히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게 해 줍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내가 완전히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면 주님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됩니다. 어떤 이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이런 자는 교회는 나오지만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입니다. 아직 설 죽은 자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완전하게 연합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주님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완전하게 연합되지 못합니다. 주님과 같은 부활의 모습으로 연합된 자는 영화의 몸을 가진 자입니다. 속사람이 완전히 부활되어 주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이 가능합니다.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자는 절대 주님과 부활의 모습으로 연합할 수 없습니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율법의 행위 아래에 있던 시절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아직도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죄의 몸이 죽어: אבד 아바드 6 멸망하다, 죽다, 소멸하다) 죄의 몸이 죽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멸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완전히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면 원죄가 더 이상 나에게 역사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원죄를 완전하게 소멸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종노릇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롬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 원죄에서 벗어나 의롭다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고 칭해주셨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נקה 나카 5352 비우다, 깨끗하다, 무죄로 하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죽고 원죄에서 벗어나 나는 완전히 죄가 없는 무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내가 의롭게 되려고 열심히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력이 헛수고라고 말합니다.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거룩한 상태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다시 원죄 상태로 돌아가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이제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살 줄을 믿게 됩니다. (믿노니: אמן 아만 539 확실하게 하다, 믿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살 것도 믿게 됩니다. 이 믿음은 내가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입니다. 사역 능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끄시는 믿음이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믿게 됩니다.

롬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죽지 않습니다. 사망이 다시 주님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부활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죽음이 주님을 엄습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겉 사람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몸입니다. 이 몸을 통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됩니다. 구원받고 나면 나의 속사람이 영원히 주님과 연합하여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영화의 몸으로 부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롬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 나의 원죄와 자 범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여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되셨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주님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부활됩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되었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나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서 자 범죄를 짓는다고 해도 이것으로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징계만 있을 뿐입니다. 원죄가 해결된 사람은 이제부터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과 항상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시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주관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평생 동행하시고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의 삶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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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다.

김.형익 목사 / 벧샬롬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하고 GP선교회 한국대표, 인도네시아 주재 선교사, 죠이선교교회 (미국)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생명의말씀사 간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의 저자

사도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5:20)에 대한 반론을 다룬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지어도 되는가?”하는 문제다(1). 이것은 소위 율법폐기론 혹은 반율법주의 논리다. 사도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의 교리로 대답한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도가 함께 죽었다는 의미다(3~4).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2).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어찌 죄를 지으면서 살겠는가(2)? 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이것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새로운 삶이다(4~5).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죄에게종노릇하고 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6). 여기서 ‘옛 사람’은 아담과 연합한 죄인의 실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율법의 저주와 형벌 아래 있는 존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의 사람을 가리킨다.

그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그리스도 안에서 그 죗값이 치러졌다.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사람’이다.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를 그리스도를 바라보듯이 바라보신다. 죄를 지은 적도,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여겨주신다. 성도는 이렇게 죄의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되었다(7).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지 아니하심과 같이 영원한 생명을 사는 자다(8~9).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겨야 한다(11).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얻은 새로운 신분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가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락할 수 없다(12). 오직 자기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13). 죄가 더 이상 신자를 지배할 권리를 가지고 있은 것은, 신자가 은혜의 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14).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신자로 하여금 죄를 더 짓게 할 수 있을까(15)? 그럴 수 없다. 누구에게 순종하느냐가 누구의 종인가를 결정한다. 죄에게 순종한다면 그는 죄의 종이며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은혜의 원리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는 의에 이르게 될 것이다(16).

바울은 다시 말한다. 신자는 누구인가? 그는 본래 죄의 종이었는데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자다(17~18). 그러므로 신자는 이제 자기 몸을 과거처럼 부정과 불법을 행하는데 드리는 대신의에게 드려 거룩함에 이르는 존재다(19). 과거에 죄의 종이었을 때, 사람은 의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삶을 살았다(20). 그 때 맺은 열매는 오직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다(21). 그러나 성도는 이제 죄로부터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며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 결국 영생에 이르는 복된 신분을 얻었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

이 복음의 객관적 사실—복음—의 렌즈로 성도가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성도 안에는 여전히 죄의 본성적 잔재가 남아 있어서그것과 싸워야 하지만,사도는 그것을 ‘죄의 몸’(6), ‘죽을 몸’(12)이라고 부른다.죄는 신자를 주인으로써 다스리지 못하고 오직 죄의 몸, 죽을 몸을 다스리려고 할 뿐이다(14). 그러므로 신자는 죄가 자기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힘써 싸워야 한다(12).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부적절할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도의 논리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시이고 인(印)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뿐 아니라 죽은 옛 사람을 장사 지내는 의식이다. 거듭난 사람이 거듭나기 전과 같이 살 수 있는가? 성경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고, 의를 이루고 싶은 갈망을 주며 거룩에 이르는 소원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이전처럼 죄 가운데 편안히 살 수 없다. 유대인이 가진 율법은 죄를 이기게 할 힘이 없었지만,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은혜는 죄와 죽음을 정복한다. 당신은 이 은혜를 경험하고 사는가?

“하나님 아버지, 저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은혜, 저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존재가 되었기에 죄가 더 이상 저희 존재를 주장할 수 없게 된 은혜를 감사하옵나이다. 그러므로 죄가 저희 죽을 몸 곧 죄의 몸을 주장하지 않도록 거룩을 위한 싸움을 날마다 감당하는 삶을 살도록 은혜를 풍성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1년 7월 1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로마서 서론 1장: 사람의 죄 2장: 하나님의 심판 3장: 칭의(稱義)의 방법 4장: 아브라함의 예 5장: 칭의(稱義)의 결과 6장: 성화(聖化)의 이유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8장: 성령의 인도하심 9장: 은혜로 택하심 10장: 신앙고백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3장: 사회적 의무, 이웃 사랑, 빛의 생활 14장: 서로 덕을 세우라 15장: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 16장: 인사 서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하나님의 감동으로, 아마 고린도에서 기록한 편지로서(롬 15:19, 23-26; 16:1; 행 19:21) 바울의 13권 혹은 14권의 서신들 중에서, 아니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구원의 복음을 가장 논리적으로 밝히 증거한 매우 중요한 책이다. 본서의 저자 는 사도 바울이다(1절).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순교자 저스틴, 폴리갑 등은 본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교회역사상 본서의 바울 저작성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본서의 저자는 본서 끝부분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북서쪽 해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였고 이제는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행적과 일치한다(행 19:21; 20:22; 24:17 등). 본 서신을 받은 로마교회 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천주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고 25년간 그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함께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말하였다. 1)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로마교회가 베드로와 바울, 두 영광스러운 사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였다. 2) 터툴리안은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으며 또 후에 그곳에서 순교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거나 25년간 그곳에서 사역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베드로가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필경 그에게도 문안했을 것이고, 또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사역했던(롬 15:20) 그가 그 교회를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이 로마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셋째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사도 바울이나 기타 다른 제자들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들이 로마로 올라가 살면서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견해는 다 가능하다고 본다. 본 서신의 저작 장소 와 연대 에 관하여, 본 서신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고(1:10),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견고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를 원하였다(1:11, 13). 그는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그리로 가고 있었다(15:25-27). 또 그가 ‘식주인[집주인] 가이오’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는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다고 보인다(고전 1:14). 그러므로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주후 56년경에 썼을 것이다. 로마서의 특징적 주제 는 구원 이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이치에 대해 증거했는데, 1, 2장은 구원의 필요성으로서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3-5장은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에 대해, 6-8장은 거룩하여짐(성화, 聖化)에 대해, 또 9-11장은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 얻은 자들의 삶에 대하여 교훈하였다. 구원 얻은 자들은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1장: 사람의 죄 1-7절, 복음 안에서 문안함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했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신분이다. 그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또 자신을 그의 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와 주님이시다. 우리는 사람이나 돈이나 쾌락의 종이 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에게 즐거이, 온전히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사도(使徒)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이다.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배신했으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았다(행 1:26). 사도행전에서 예외적으로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사도들’이라고 두 번 불리었다(행 14:4, 14 원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고 말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해설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전달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었다(엡 2:20). 그러므로 신약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잘 파악하기 위해 사도들에게로, 즉 그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가리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교훈과 노선이 바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한 사람의 천주교 신부이었지만 성경의 확실한 지식과 확신으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수 있었다. 다른 개혁자들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도 참된 교회들과 종들은 오직 성경으로 가야 한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으로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구약성경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약속하였었다. 창세기 3:15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나 창세기 12장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씨’나 창세기 49:10에 예언된 ‘ 실로 ’[안식의 사람]나 이사야 9:6의 신적 아기의 탄생이나 미가 5:2의 그의 근본이 태초인 자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예표의 말씀들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눅 24:27, 44). [3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 자손]에서 나셨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인성(人性)과 참된 신성(神性)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본절의 ‘육신’이라는 원어( 사르크스 )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참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그의 몸만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이 아니고, 그의 영도 그러하셨다. 즉 그는 몸과 영혼을 가진 참 사람이셨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언들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 1:1)는 말로 시작된다. [4절] 성결의 영( 프뉴마 하기오쉬네스 )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 계신 거룩한 신성(神性)의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인성(人性)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神性)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는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하심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5:1-4,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 .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반드시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인정하다’는 원어( 호리조 )는 ‘확정하다, 선언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선언되셨다’라고 번역하였다 (KJV, NASB, NIV) .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인정되고 확정되고 선언되신 것이다. 이 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을 증거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중심 인물이시며 복음 자체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대속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다. 그는 슬픔과 불행, 절망과 허무, 죽음의 그늘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시다. 그 안에 구원과 영생, 기쁨과 소망이 있다. [5-6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또 은혜는 사도의 직분에도 관계된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도 무자격한 자들이다.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었다. ‘믿어 순종케’라는 원어( 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 )는 ‘믿음의 순종을 위해’라는 뜻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가 순종 곧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물론 행위로도 순종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곳곳에 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였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인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무리 중에 들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부르심’은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그의 양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만 그의 부르심을 입고 그들은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7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편지하노니](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작은 글씨로 첨가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있을지어다’라고 번역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며 성도(聖徒,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긍휼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진 무리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성화를 이루어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성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평안’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결과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의 전달자는 사도들이며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자이시다. 그는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사역을 이루셨다. 이 배교의 시대에 우리는 그의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을 통해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예수님 믿고 죄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그를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은 가장 존귀한 구원의 복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을 깨닫고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을 더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과 거룩하여짐과 온전해짐, 즉 우리가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필요하다. 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평안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이 필요하다. 8-17절,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원함 [8-10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먼저 로마의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의 감사의 이유도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형통과 번창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주위의 형제들이 구원 얻은 사실과 그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과 믿음의 소문이 주위에 퍼져나감을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긴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구원받았고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바울은 또 ‘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표현한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영에 있다. 영은 인격의 주체이며 몸은 영의 도구이다. 기독교는 단지 몸의 종교가 아니고 영의 종교이다. 우리의 중생한 영의 새 성향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늘 주장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감사와 쉬지 않는 기도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사역을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하며 또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로 갈 좋은 길 얻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약 4:15). [11-12절] [이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원함이니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서로의 안에 있는](원문)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한 이유는 그들 보기를 심히 원했기 때문이며, 그가 그들 보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다. ‘신령한 은사’는 방언이나 병 고침 같은 은사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들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말씀 사역이었다. 그 말씀 사역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소망은 어린아이의 시기를 벗어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자라며 견고케 된다(골 1:28-29). 오늘날 목사들의 사역의 목표와 임무는 바로 성경의 바른 강해이다. 바울은 또 서로의 견고한 믿음을 인해 서로 위로를 얻기를 원했다. 이것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한다고 겸손히 말했다. 성도의 교제란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 서로 안에 있는 믿음을 인하여 피차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살전 5:14). 이것이 영적 교제이며 교제의 유익이다. 우리의 교제는 단지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말고, 이렇게 같은 믿음의 확인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약간의](원문)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그가 로마로 가기를 원한 또 하나의 목적을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한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영혼 구원의 열매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거창하게 많은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약간의’ 열매 즉 몇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또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열매는 로마의 성도들의 인격의 온전해짐과 선행을 포함한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격이 온전해짐과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3).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했다. 여기의 ‘빚’은 전도의 빚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배운 자에게나 못 배운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우리나라 사람에게나 다른 나라들의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택함 받은 자들만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을 것이지만, 우리의 전도 대상에는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해야 한다. [16-17절] [이는] 내가 [그리스도의](전통사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아니함이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함이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원했다.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능력’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이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다른 수단으로가 아니고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고전 1:21-24).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이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또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바이었고(신 6:25),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어긴 상태이었다. 이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 곧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범죄함으로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은 모든 사람과 세상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다. 사람의 가장 큰 복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 문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과 성경을 통해 명백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義)를 복음에 나타내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이루신 의(義)이다(단 9:24; 롬 10:4; 고전 1:30).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의(義)를 주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치이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을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것, 곧 속죄신앙은 죄인이 구원 얻는 신앙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그 교인들을 견고케 하기를 원했다(11절). 우리의 믿음과 인격은 성경말씀으로 견고해져야 한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오며(롬 10:17) 말씀은 영의 양식과 같고(마 4:4) 일정한 음식보다 귀히 여겨야 한다(욥 23:12). 그것은 우리의 신앙 지식을 확실케 하며(눅 1:4)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딤후 3:14).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골 3:16).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견고해져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서로의 믿음을 인해 위로 얻기를 원했다(12절).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서로 위로하는 자가 된다(고후 1:3-4). 성령께서는 위로자로 우리 속에 계신다(요 14:16).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도들의 교제는 서로의 참된 믿음 때문에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16절).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자들은 다 복음에 빚진 자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고 죄인들은 그 복음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의 영혼이라고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다. 18-27절, 우상숭배와 정욕의 죄 로마서 1-2장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많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때문이다. [18-19절]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나타남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본문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많은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많은 죄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 바울은 사람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가로막는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진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게 되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리를 대항한다. 사람의 죄는 불경건과 불의로 요약된다. 모든 죄는 불의이며 그 중에 하나님에 대한 죄가 불경건이다. 불의는 불경건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의(義)요,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나 어긴 것이 죄이다. 죄들 중 불경건은 근원적 죄이다. 다른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므로 여러 가지 죄를 짓는다.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속에 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알려주셨다. 그것이 사람의 종교성, 하나님 의식, 양심, 이성 등이다. [20절]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됨이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오묘막측한 천지만물의 존재는 전지전능한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작은 건물 하나도 지은 자가 있는데, 천지만물이 우연히 생겼다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말이다. 천지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신성(神性)을 알게 해준다. 자연만물은 사람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게 만든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떨어졌기 때문에 진노하신다. ‘하나님을 알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보인다. 무신론자도 전쟁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의식하며 살지만, 그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또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심히 어두워져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사람의 근본적인 무지(無知)이며 어리석음이다. [22-23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새들과 짐승들]와 버러지 형상[기는 것들]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그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세상의 진행과 목적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역사상 천재적 사상가들의 결론은 보통 사람들의 결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을 다 무지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사람의 무지의 대표적 증거가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 세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이시며 그의 영광은 썩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영광이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우상숭배는 불경건과 무지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라는 말은 불경건이 모든 정욕의 죄의 원인임을 보인다. 하나님은 인류의 도덕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부도덕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덕성의 회복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 악을 떠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정욕의 죄 가운데 버려두셨다. 그는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구원하실 능력도 있고 그들을 버려두실 권한도 있다. 왜 자신들을 구원치 않으시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지금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자연만물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경건한 마음을 마음의 정욕과 더러움에 버려두셨다. 정욕의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그것은 불경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한 징벌이다. 죄는 죄를 더한다. 불경건한 사회는 음란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징벌이다.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바른 말을 가리키고, ‘거짓 것’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말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말을 헛된 우상의 말로 바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들을 조물주 대신 혹은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앞에 절하지만, 우상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죽은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복과 화를 주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이 신이며 사람이 신인가? 돈이 얼마나 헛되고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는 재벌의 자살이나 병원 중환자실이나 장례식장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돈의 종이 되어 돈을 위해 살며 자신만 사랑하며 의지하다가 허무하게 죽어간다. 사람은 이런 헛된 것들을 극복해야 한다. 영원히 찬송 받으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며 그에게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26-27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 파데 아티미아스 )[저열한 욕망]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아스케모쉬넨 )[상스러운 행위들]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사람들의 죄들 가운데 두드러진 죄는 저열한 욕망의 죄 즉 음란의 죄이다. 바울은 여성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로 쓴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순리대로 쓴다는 말은 성년이 되어 결혼하여 정상적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며, 역리로 쓴다는 것은 정상적 결혼생활을 이탈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특히 여성들의 간음, 음행, 매춘, 동성애 등을 가리켰다고 본다. 바울은 남성들의 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로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남성이 남성으로 더불어 상스러운 행위들을 하였다. 이것은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라고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욕구는 이렇게 심히 변질되고 부패되었다. 동성애의 죄악은 옛날 소돔성과 고모라성 사람들의 죄악이었다(창 19장). 또 옛날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런 죄악이 있었다(레 18장). 또 고대 헬라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죄악이 보편적이었다. 키케로(Cicero)는, “[동성애의] 행위는 헬라인들 가운데는 보편적이었고, 그들의 시인들과 위인들, 심지어 지식인들과 철학자들도 그런 일을 행했고 그것을 자랑했다. . . . 그것은 어떤 특정한 도시들만의 풍습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풍습이었다”라고 말했다( 투스쿨란 토론집 4:33; 반즈 노트 , p. 554).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성애에 대해 ‘상당한 보응’을 내리셨다. 소돔성과 고모라 성은 유황불비로 잿더미가 되었고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멸망당했다. 고대 헬라와 로마도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에이즈 (AIDS) 질 병의 세계적 유행은 동성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심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은 경건과 도덕성의 완전한 회복인데, 그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해야 한다. 우리는 우상숭배치 말아야 한다. 돈이나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나 과학이 우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참 하나님,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의를 버리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이 음란한 세대에서 특히 음란, 간음, 매춘, 동성애의 악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늘 깨끗이 씻음 받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28-32절, 여러 가지 죄악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 에피그노세이 )[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 아도키몬 눈 )[부패된 생각](NASB, NIV)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세상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지식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지만 그들은 그 지식을 거절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부패된 생각에 내버려두셨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부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거절하는 자는 결국 여러 가지 죄악들에 떨어진다.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의 뿌리이다. [29절] 곧 모든 불의, [음행](전통본문), 3) 추악( 포네리아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詐欺)[속임],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불경건의 결과, 사람들에게는 모든 불의가 가득하다. ‘모든 불의’는 뒤에 열거된 여러 죄악들을 포함한다. ‘불의’(不義)는 모든 죄악들의 대표적 명칭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요, 불의(不義)는 그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모든 불의를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음행이 가득하다. 사람의 죄악들 중에 우상숭배 다음으로 두드러진 죄악은 음행이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마 12:39). 하나님께서는 결혼 제도를 주셨고 사람에게 성적 순결과 깨끗하고 단정한 삶을 명하시며 음행을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악이 가득하고 탐욕이 가득하다. 악은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물질적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하게 살라고 명하시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한다. 또 탐욕은 세상의 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일종의 우상숭배이다(골 3:5). 탐욕은 사람으로 다른 죄들을 짓게 하는 원인이 되며 거기서 각양의 죄들이 나온다. 성도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고 사모한다면 허무한 세상의 것들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또 ‘악의’(惡意)가 가득하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하며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또 ‘시기, 살인, 분쟁’이 가득하다. 시기는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살인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요일 3:15). 또 사람은 욕심 때문에 살인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분쟁한다. 시기와 미움, 사랑 없음, 자기 중심적임, 상대방을 무시함, 오해함 등이 분쟁을 만든다. 사람들은 또한 ‘속임과 악독’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순복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람들은 또 ‘수군수군한다.’ 이것은 은밀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남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하며 뒤에서 그에 관해 수군거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30절]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비방한다’는 말은 남의 명예에 해가 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비방은 교만과 시기와 미움 등에서 나온다. 사랑은 이웃의 모든 허물을 덮지만(잠 10:12), 미움은 이웃에 대한 비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에 금이 가고 가정이나 단체나 교회나 사회가 파괴된다. 사랑은 건설하는 덕이요, 미움과 비난은 파괴하는 악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라는 원어( 데오스튀게이스 )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뜻일지도 모르지만 (BDAG) 인간 관계의 죄를 말하는 문맥상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들’이라는 뜻 같다 (Thayer) . 모든 악이 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이지만 특히 남을 거짓되이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악이다. 또 사람들은 ‘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이다. 거만함과 교만함과 자랑함, 이 세 단어들은 뜻이 서로 가깝다. 교만은 마귀의 죄악이고(딤전 3:6) 죄인들의 특성이 되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고 자신을 주인과 왕으로 여기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과 왕이시므로, 교만은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요 매우 근본적 죄악이다. 거기서 남을 멸시함과 자랑이 나온다. 사람들은 또 악을 도모하며 계획한다. 이것은 실수의 악이 아니고 의도된 악, 계획된 악이다. 고의적인 악행은 실수로 범하는 악행보다 더 악하다. 부지 중에 범한 죄와 고의적인 죄는 벌이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또 부모를 거역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지 않은 자녀들은 부모를 거역한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 본성이다. 아이들은 엄한 교훈과 징계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잘 길들여지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어릴 때부터 교훈과 징계의 매로 아이들을 교육하라고 말한다(잠 23:13-14). 사람의 부패된 인간성은 사랑의 매를 통해 비로소 조금 제어되고 고쳐질 수 있다(잠 13:24; 22:15). [31절] 우매한 자( 아쉬네투스 )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는 자요](전통본문) 4) 무자비한 자라. 사람들은 우매하여 참된 지혜와 지식, 총명과 이해력이 없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추구하여 얻지만, 참으로 알아야 할 지식, 곧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왜 여기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매한 인생의 모습이다. ‘배약(背約)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 불신실한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데는 부득이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불신실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특히 사람의 불신실함은 시간이나 돈에 대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신실한 인격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려 한다. ‘무정한 자’는 인정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는 인정이 있어 보이지만, 다른 많은 경우 무정함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님을 저버리며 아내를 학대한다. 힘센 자는 약한 자를 학대하고 그의 것을 빼앗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입한다. 또 사람들은 원통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잘 풀지 않고 또 보복하려 한다. 사람은 서로 화해하기 어렵고 마음을 달래기 어려운 존재이다. 이런 부족 때문에 때때로 인간 관계가 허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와도, 그가 사과하면, 언제나 즉시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이게 변하였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교묘하게 빼앗는다. 또 그들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악을 행하며 또 거칠고 폭력적이고 사악한 자들이 되었다.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쉰유도쿠시 )[칭찬하느니라, 기뻐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자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알고 있다. 이런 공의는 그들의 사회법들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고 그들의 양심의 법에도 기록되어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몸의 죽음 정도가 아니고 그들의 몸과 영혼이 받을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계 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만 이런 죄악들을 행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가증한 뻔뻔함과 완악함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들은 심히 죄악되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죄들에 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내어 버려두셨다(24, 26, 28절). 사람들은 모든 불의, 음행,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속임, 악독이 가득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거만하고 교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계획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지혜와 총명이 없고 약속을 어기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무자비하며 게다가 악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하는 뻔뻔함까지 있다. 이런 모든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을 미워하고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죄악들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한다. 사람의 죄들은 어떻게 씻음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이 씻음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제는 모든 죄를 멀리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장: 하나님의 심판 [1-3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사람은 자기도 악하면서 남의 악함을 판단하기 잘한다. 그러나 그에게 바른 판단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 그를 옳은 자로 만들지는 못한다. 남의 잘못을 잘 지적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판단의 행위가 그를 정죄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같은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은 자기도 정죄받아야 할 자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악인이든지, 그를 판단하는 자든지, 혹은 그를 심문하고 벌을 주는 재판관이든지 하나님의 공의롭고 두려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4-5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남의 죄를 판단하면서 자신은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죄인보다 더 악한 자이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상적 이야기가 아니고 장차 온 세상에 임할 한 사건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 사실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증거한다. [6-8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엑스 에리데이아스 )[혹은 ‘이기적 야망으로’(NASB)]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그의 심판은 공의롭다. 그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신다. 선을 행하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한두 번 선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계속 선을 행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복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구원받을 자들은 참고 선을 행하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사모하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 속에는 다투며 당을 짓는 이기적 야망이 있다. 그들은 사람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헛된 것만을 더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복종치 않고 당을 지어 진리와 다투며 불의를 좇고 온갖 악을 행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노와 분으로 보응하실 것이다. [9-10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 스테노코리아 )[곤경, 심한 고생]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평안]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육신에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혼에 더욱 그러하며, 악인은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될 것이다(눅 16:23-25). 악에 대한 이러한 보응은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도 의인의 심신(心身) 곧 육신과 영혼에 다 적용되며, 또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다 적용된다.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며 세계적이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다 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전통과 특권 때문에 그들을 편벽되이 취급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학력이나 직업, 재산이나 가문, 사회적 신분 등 외적 조건을 보고 편벽되이 그를 판단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롭게, 공평하게, 공정하게 심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2-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편벽되이 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는데도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다 그들이 행한 대로 공의롭고 공평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었느냐, 율법을 알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켰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6:25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킨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며 그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율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대로 행해야 한다. [16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내용 속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진리가 있음을 증거한다. 심판은 두려운 진리이지만, 기독교의 근본 교리이며(히 6:1-2) 복음의 기본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다(요 5:22; 행 17:31).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은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여기에 모든 사람의 구원의 필요성이 있다. [17-24절]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형식]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 한 지도적인 인물을 가상적으로 들어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 유대인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 그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긴다. 그는 율법 지식과 진리의 형식을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남을 가르치는 유대인이 도적질하거나 간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그 유대인 때문에 그의 하나님을 욕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형식적인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교인이라는 이름, 더욱이 직분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악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 없이 교인이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교인이라는 이름보다, 또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의롭고 선한 인격과 삶임을 알고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25-29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 디카이오마 )[의(KJV), 요구(NASB, NIV)]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 그람마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할 때 가치가 있지, 율법을 범할 때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무할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할례자가 율법을 어기면 그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하지 않겠는가? 할례의 의미와 가치는 율법을 행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가르친다(신 10:16; 렘 4:4). 그것은 마음의 모든 더러움과 완고함을 베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심령의 거룩한 변화인 중생(重生)을 가리킨다. 진정한 기독교는 마음과 내면성의 종교이며 변화된 심령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죄악된 마음 상태로부터 새로워지고 깨끗해지는 마음의 변화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장차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고(요 5:22) 아들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행 17:31; 딤후 4:1; 사도신경). 요한계시록 22:1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5절). 사람은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고 불의를 좇는 자는 진노에 이를 것이다(6-8절). 주께서는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도 다 심판하실 것이다(16절). 요한계시록 20:13,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외식을 미워하신다. 성도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자라는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옛날 유대인들처럼 결코 형식적 교회 생활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외식자들에게 화를 선언하셨고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해야 한다. 3장: 칭의(稱義)의 방법 1-18절, 모든 사람이 죄인임 [1-2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들 중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통해 온 세계의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었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성경 저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들을 계시하셨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보관하며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특권이었다. 시편 147:19-20,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3-4절]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신실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어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보관의 특권에 차질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폐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 거짓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들과 심판에서 의로우시다. [5-6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여서 그 불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불의하실 수 없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가 불의하시다면, 어떻게 심판자가 되실 수 있겠는가? 의롭지 못한 심판자는 참된 심판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일지라도, 또 그들의 죄와 부도덕함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범죄하는 한 그들은 마땅히 정죄(定罪)받아야 한다. [7-8절] 그러나[왜냐하면 5)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않겠느냐 함이라.]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定罪)받는 것이 옳으니라. 본문은 5, 6절을 보충 설명한다. 사람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게 드러났을지라도 그의 거짓말이 어떤 선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며 선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지 목표가 선하고 옳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방법도 선하고 옳아야 한다. 이 말씀은 전도를 위해 자유주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들과 협력하는 어떤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오류를 잘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바른 목표를 가져야 하고 바른 방법도 사용해야 한다. 바른 목표를 위해 올바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9절]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임을 증거하였다. 그는 1장에서는 주로 이방인의 죄를, 2장에서는 주로 유대인의 죄를 증거했다고 보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죄인들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10-12절]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과 사람’(神人)이신 예수님만 예외이실 뿐이다. 사람들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죄가 없으시다(히 4:15; 벧전 2:22; 요일 3:5). 그 외에 하나님의 계명에 완전히 일치하게 산 자, 참으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 의인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도(창 6:9; 욥 1:1; 겔 14:14) 완전한 의인은 아니었다. 또 깨닫는 자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지 못함으로 이리저리 치우쳤고 헛되고 무가치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이 쌓은 선한 업적이라는 것도 실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영원히 가치 있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13-15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이 구역질나는 나쁜 냄새를 낸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더럽고 악취나는 것들뿐이다. 또 사람들의 혀는 속이는 혀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에 숙련되어 있다. 또 그 입술에는 남을 죽이는 독이 있고 그들의 말들은 남을 저주하는 악독으로 가득하다. 또 그들의 발들은 남을 죽이기에 빠르다. 참으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무능력해졌다. [16-18절] 파멸과 고생[불행]이 그 길에 있어 평강[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죄인인 사람들의 길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고 그들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죄인들의 죄악된 삶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건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악을 버리고 떠남도 없고 참된 의(義)와 선(善)도 없다. 그런 자들에게 파멸과 불행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현실이며 우리가 구원 얻기 전 상태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들과 성경을 주셨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해 주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들을 감사히 받고 읽고 다 믿고 다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참되시고 진실하시고 신실하시다. 디모데후서 2:13,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우리의 삶의 목표와 그 방법도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 한다. 셋째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심령이 심히 부패되어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하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셨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다(렘 13:23). 인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넷째로, 죄인들의 길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고 그들의 심령에는 평안이 없다. “파멸과 불행이 그 길에 있어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는 죽음과 불행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다. 사람이 천국에서 영생과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려면 죄사함과 의(義)의 구원이 필요하다. 19-31절, 칭의(稱義)의 방법 [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의 역할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여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판정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말이 없다.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기독교 복음은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한 소식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므로 구원이 필요했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와 대조하여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시대에 증거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는 행위의 의, 즉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의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율법과 별개로 주시는 한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의이다. 이 의(義)는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에 이미 증거된 바이었다. 구약성경은 ‘행하라’는 도덕법을 강조하지만, 제사들, 유월절 어린양, 성막 제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도 증거하였다. 그 은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증거될 것이었다. 구약성경은 또 메시아의 속죄사역으로 인한 의(義)를 직접 예언하기도 하였다. 이사야 53:11,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주간]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영원히 속(贖)하여지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異像)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믿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모든 자 위에](전통본문) 6)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義)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이다. 신약시대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구나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의(義)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을 위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23-24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되었음이니라]. 본문은 모든 믿는 사람들이 차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까닭을 말한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단지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義)는 행위로 얻는 의(義)와 대조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값없이 거저 얻는 의이다. 이런 의가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구속(救贖)을 이루셨기 때문이었다. ‘구속’(救贖)이란 값을 주고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 즉 죄의 책임 곧 죄책(罪責)과 형벌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힐라스테리온 )[유화제물(宥和祭物)]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앞절의 말씀을 좀더 설명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고 그의 피를 믿는 것이다. 피가 생명이므로 피흘림이 죄를 속(贖)한다(레 17:11). 유화제물(宥和祭物)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크신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죽음으로 누그러지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한 의미이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심으로라는 뜻이다. 물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난 후에 짓는 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무조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면 그런 판단 자체가 불의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예수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의로운 판단이시요 의로운 행위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인한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의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 믿는 자들이 받는 의(義)의 정당함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轉嫁)시키셨으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은 이 의롭다 하심은 성도가 실제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법적으로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성도들에게 죄가 없다는 무죄(無罪) 판결을 내리심과 같다. 물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또한 새 생명을 받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성도는 비록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이 있다.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성도의 의가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속죄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에,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다.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의, 복음 안에 나타난 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는 받는 사람 편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의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사람들의 행위의 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행위와 관계가 없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기조마이 )[간주하노라(NASB, NIV), 판단하노라, 결론을 내리노라(KJV)]. 본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기본적 진리를 다시 결론적으로 단언하였다. [29-31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 진리는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나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구원 진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효력 있는 진리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충돌치 않는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요 예언과 성취이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복음으로 이끄는 인도자 역할을 한다. 사실,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죽음이었고(갈 3:13)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었다(롬 10:4).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세상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율법은 단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나 율법을 지켜 구원받지는 못한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구속(救贖)의 죽음을 죽으셨고 또 유화(宥和)제물이 되셨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 25절, “화목제물[유화제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고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셋째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 이것이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이다. 4장: 아브라함의 예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성경도 증거한 바이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그 증거로 들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이라는 말은 행위를 가리킨다.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수이다. 의롭다 하심이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지만, 의로운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으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위는 서로 구별되고 대조된다. 믿음은 행위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의로운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참 믿음은 경건하고 정직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불완전하므로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 코리스 에르곤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증거한 다윗의 시를 인용했다. 그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32:1-2이다. 그것은 사람이 죄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지만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보인다. 이와 같이, 의롭다 하심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9-10절]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인가 후인가?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나오고(15:16), 창세기 16장은 그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고 증거하며,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가 99세라고 증거한다(17: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13년 이전이었다고 보인다. [11-13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저희도] 7)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할례 받을 뿐 아니라 또한](원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後嗣)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받은 의를 확증하는 표이었다.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할례자는 단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을 가리키지 않고, 육신의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 그 후손이 온 세계에 충만하리라는 약속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적용되고 그들을 다 포함하는 뜻이 있다. [14-16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後嗣)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카타 카린 )[은혜에 의거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다. 여기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은 다시 대조된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믿는 자는 율법에 순종하며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율법 순종의 행위와는 구별된다. [17-18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믿음의 성격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자이시다. 그는 무(無)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 곧 창조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 소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뜻한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다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드러날 때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신을 신뢰한 것일 뿐이다. [19-22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이미]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생각하지 않고](전통사본) 8)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백세가 되어 자기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만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며 의탁하는 것이다. [23-25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때문에]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도 같은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셨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의 무엇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다윗도 행위로는 부족과 실수가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용납함을 받았다. 이와 같이, 죄인들은 자신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가 할례의 규례와 율법을 받은 것은 그가 받은 의를 확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할 뿐이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믿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이시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신약 성도들이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을 때, 그들은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것과 같다. 5장: 칭의(稱義)의 결과 1-11절, 칭의(稱義)의 결과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누리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디카이오덴테스 , 과거분사)이라는 원어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점진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고 단회적임을 보인다. ‘누리자’라는 말( 에코멘 ) 9) 은 전통사본들의 다수에는 ‘누리느니라’( 에코멘 ) 10) 고 되어 있다. 칭의의 결과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과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큰 특권이며 복이다. 그것은 에녹과 노아와 욥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창 5:21-24; 6:9; 욥 29:4).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칭의를 받은 은혜를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사람은 이제 칭의를 받은 은혜 안에 서 있다. 모든 성도는 이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하며, 결코 이 은혜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칭의 받은 은혜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그를 통하여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칭의의 결과 중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은 장차 올 영광스런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신과 견고한 소망에서 나온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롬 3:23),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 곧 부활과 천국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부활과 천국의 영광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이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鍊鍛)( 도키메 )[연단된 인격]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평안할 때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환난이 성도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여 몸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에 대한 그의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 [5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도의 소망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헛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다. 성도의 소망이 확실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표이시며 확증이시다. [6-8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善人)( 투 아가두 )[그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확증하셨음이니라]. 우리가 불경건과 죄 가운데서 연약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이며 그 사랑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사랑인가! ‘그 선인’은 앞에 말한 ‘의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확실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 성도가 장래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이며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므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오고 그의 마지막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다. 성도는 천국을 확신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한다. 칭의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과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며 살고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항상 기뻐하며 산다.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성경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은혜 때문이며 환난 중에 낙심치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도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그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진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로부터의 구원도 확신하게 되었다. 12-21절, 영원한 생명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에프 호 )[이는](Thayer, NASB)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이르렀음이니라]. 창세기 3장의 증거대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 아담의 첫 범죄는 아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인류의 대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의 결과로 모두가 죽게 되었다. [13-14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사람의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율법이 없었던 모세 이전에도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15-16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왜냐하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죽었을지라도]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넘쳤음이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定罪)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dikaivwma)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살았고,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정죄(定罪)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였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인류를 지배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풍성히 받아 영생을 얻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 )[한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본절이 이 단락의 요점임을 보인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라는 말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가 생명임을 보인다. 의와 생명은 함께 간다. 죄는 사망이요 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결과는 영생,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15절부터 18절까지 반복되는 말씀은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어떻게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아담의 죄는 온 인류의 죄이었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 원죄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그러나 정반대의 내용으로, 본문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어떻게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풍성히 넘치도록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많은 사람을 대신한 속죄’이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셨고(마 20:28), 그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 피이었다(마 26: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된 것이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는 불순종이다. 죄악된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다. 순종은 의요 불순종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과 의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순종하는 의인이며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그러했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최고의 모범이시다. 그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율법을 주신 자로서 친히 율법을 준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의 순종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의가 되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의 안에 거해야 하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거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잠잠히 믿고 순종하되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진 진리가 진리일진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훈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20-21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가 적었으나 율법을 알게 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 본성의 전적 부패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풍성했고 넘쳤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의 크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큰 죄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눅 7:47). 이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얻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죄들은 크고 많고 심각했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는 컸고 풍성했고 놀라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다 죄인 되었고 정죄(定罪) 되었고 죽게 되었다. 아담은 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시조(始祖)이며 언약의 대표자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처음에 주셨던 명령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은 인류를 대표하여 받은 명령 곧 행위언약이었다. 그 언약에서의 실패는 그 개인의 실패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실패이었다. 그것이 원죄(原罪)라는 것이다. 둘째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 셋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죄는 죽음이요 의는 생명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 6장: 성화(聖化)의 이유 [1-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강한 부정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에이스 )[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에이스 )[안으로]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지만(5:20)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성도가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해 죽은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첫째로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였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죄씻음을 표시하고 확증하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고, 죄씻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져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그를 믿는 우리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그와 연합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이치에 반대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4-5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함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며, 그의 부활의 생명이 그와 연합된 이들 속에 활동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죄 가운데, 즉 영적 죽음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구원 얻은 자들은 새 생명을 받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구원 얻은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옛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옛 자아, 곧 구원 얻기 전의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옛 사람이 죽은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죄의 몸’은 ‘옛 사람’과 같은 뜻으로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이제 죄성을 가진 몸인 옛 사람은 죽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새 사람이 살았다. 우리의 구원은 죄 안 짓게 하는 구원이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 구원이며 의를 향해 사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 얻었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구원의 목적과 방향에 반대로 가는 것이다. [8-1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전통본문) 11)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또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생활로 나타난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의 생활이 완전치 못할지라도, 거룩함은 구원의 당연한 과정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영원히 사시고 다시 죽지 않으시듯이, 예수님 믿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고 범죄치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 단번에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죄와 사망은 설 곳이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향해 살아나신 것이다. 이제 죄와 사망은 끝났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생활만 그에게 있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 곧 성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12-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몸의 욕심들로 말미암아 죄에 순종치 말고] 12)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는 몸의 욕심들을 통해 활동한다(약 1:15). 몸은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므로 죄가 몸을 주장치 못하도록 욕심들을 통제해야 하고 죄에 순종치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성도는 자기 몸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3절의 “너희 지체”라는 말에 ‘지체’는 몸의 부분들, 즉 눈과 귀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킨다. 성도는 이제 몸의 모든 부분을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며 더럽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만지고 그런 곳으로 갔을지라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몸을 거룩하게 드리고 의롭고 선한 것만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14절] [이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도들이 자기 몸을 죄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하는 이유는 그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책임과 형벌이 제거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말한다.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는 법적인 구원이다. 성도는 이미 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얻었다.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 바울은 6:1-2에서도 성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고 강하게 대답했었다. 그는 여기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이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한번 더 분명하고 강하게 대답한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죄짓는 생활을 할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성화는 성도의 당연한 길이다. 성도는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죄를 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9-10). [16-17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둘째로 순종의 원리로 설명된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의 종이 된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 죄 안에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 안에 살다가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구원 얻었던 처음 순간을 언급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는 본래 죄에게 순종하고 죄만 짓고 살았던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이었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을 얻었다. ‘마음으로’라는 원어( 에크 카르디아스 )는 ‘마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와’라는 뜻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에 근거하여 우리의 모든 죄는 씻음 받고 우리는 단번에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았다. 우리는 죄에게서 자유케 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19-22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 속에 죄성이 남아 있음을 가리킨다.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에게 죄성이 남아 있으므로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면이 필요하다. 성도는 성화(聖化)가 당연한 목표라는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성도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만 지었기 때문에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 맺은 열매라는 것은 더러운 죄들이었으므로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그 결국은 사망이었다. 진실로, 모든 죄들은 비록 범죄할 당시에는 혹시 즐거워보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것들이다. 의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죄는 수치와 후회를 남길 뿐이다. 이제 성도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인해 죄에게서 해방되었다. 죄의 종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나님께 종이 되는 자유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마 11:30). 거룩함의 열매는 구원 얻은 성도에게 당연한 열매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반드시 성화(聖化)를 동반한다. 법적인 구원에 실제적 구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출생한 아기가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듯이, 중생한 성도가 지식이 더하고 거룩해지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인 성화는 성도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도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른다.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과 거룩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생과 한 줄 위에 있고 그 줄은 끊어질 수 없다. 구원 얻은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는 과정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정상적 과정이 없다면, 그는 구원 얻지 못한 자일 것이다. [23절]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영생임이니라]. 성도가 영생을 확실히 얻을 것이라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죄에 대한 대가(代價) 즉 죄의 보응과 형벌이 죽음이지만 택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말씀은 복음 진리의 요약과도 같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장은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 즉 성화(聖化)의 이유를 증거한다. 첫째로,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을 때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죄의 몸인 옛 사람이 죽었고 새 사람이 새 생명 안에서 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산 자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죄와 결별하고 산 자처럼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순종의 원리로 설명된다. 즉 그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우리로 범죄케 할 수 있는 죄성(罪性), 곧 죄악된 성질과 성향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원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방향이고 성도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의 도덕법과 신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교훈들에 순종함으로써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고 성화(聖化)를 이루어야 한다.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1-3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음란한 여자]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음란한 여자]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증거한다.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음란한 여자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쪽이 죽었으므로 그와의 부부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이다.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고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저주와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목적은, 부활하신 주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인격과 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은 구원 얻기 전의 상태를 가리키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라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죄의 정욕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구원 얻기 전에는 죄성이 우리를 지배하였고 죄의 정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기관들에 역사해 우리로 사망에 이르는 행동을 하게 했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되고 변명으로 무마되었다.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NASB, NIV)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얽매였던 것’이라는 말은 율법의 규례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바울은 6:14에서도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강조하면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으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였고(3:23, 25),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다(5:1). 바울은 그 책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와 방종에 떨어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다. 그 자유는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의와 거룩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이다. 의롭고 거룩한 삶, 이것이 구원의 방향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어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앞에 6:15에서도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5:13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하였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라는 말에서 ‘영’이라는 말은 성령을 가리키며 (NASB, NIV) ,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조문을 가리킨다고 본다(고후 3:6도 비슷함).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큰 힘이 된다. 때때로 성도에게 죄와 연약이 있으나 그가 낙심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의와 거룩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이 자유가 큰 힘이 되는 것이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제까지 말한 내용이 율법을 정죄(定罪)하는 인상을 줄지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이 죄인가?’라고 묻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이 없었다면 사람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다. [8-11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율법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지만, 죄가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우리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 같고 죄가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된 성질과 행위들이 드러난다. 전에 율법이 없을 때는 죄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나 자신의 존재가 살아 있는 것 같았으나, 율법이 이를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면 율법을 통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고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심히 죄악됨을 깨달을 뿐이다. 영생에 이르게 할 율법이 실제로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는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고 죽게 하였다. [12-13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자체는 죄악되지 않다. 율법은 실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신령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디모데전서 1:8에서도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말했다. 율법은 바른 정신으로 사용하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선하고 유익하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었을 수 없다. 단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그 선한 율법으로 우리를 죽게 한 것이다. 이로써 죄가 심히 죄악됨을 드러낸 것뿐이다. [14-1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는 선악간의 싸움이 있다. 바울은 ‘나는’ ‘나의’ ‘내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싸움을 표현한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 속에 있는 선악간의 싸움이다. 성도에게는 육신의 연약성 곧 죄성(罪性)이 남아 있다. 이 죄성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행치 못한다. 율법은 영적이지만, 나는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이다. 나는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려 있고 때때로 원하는 것을 행치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다. [16-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율법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6절이나 8:1에도 쓰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를 가리킨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에게 있어서 범죄의 주체는 참된 자아가 아님을 증거한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속사람’(22절) 혹은 ‘새 사람’(엡 4:24)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생명 안에서 살려 하지만, 성도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어 율법을 거슬러 죄를 짓게 한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참된 자아의 행위가 아니고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18-20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육신’이라는 원어( 사르크스 )는 ‘몸’( 소마 )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성도의 남은 죄성은 육신 즉 몸에 있다고 보인다. ‘원함이 내게 있다’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선을 원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새 사람의 소원이요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성향이다. 구원 얻은 사람만 이러한 소원을 가진다. 구원 얻기 전에는 이런 소원이 없었고 단지 때때로 양심의 가책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구원 얻은 후에도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다. 이것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죄성과 연약성인 것이다. 선을 원하는 것은 참된 자아요, 선을 원치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성이다. 그것이 우리 몸에 남은 옛 사람의 성질인 것이다. [21-23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 누스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성도는 자신 속에 두 가지 모순된 성향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는 참된 자아의 소원으로서 선을 행하려 하는 성향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몸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다. ‘속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의 참된 자아를 가리킨다. 중생한 참 자아는 ‘마음’( 누스 ) 곧 생각(mind)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다른 한 성향이 있어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온다. 성도 속에는 이 대립된 두 가지 성향이 있어 항상 내면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24-25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 누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의 탄식은 성도들의 탄식과 신음이다. 마음의 성향과 육신의 성향의 싸움으로 성도는 피곤해진다. 성도는 당연히 이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과 성화는 이러한 싸움과 탄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죄에 대해 점점 죽고 의에 대해 점점 산다. 하나님의 구원은 효력이 있고 승리적이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지만, 성도들이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의롭다 하심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義人)으로 인정받았다. 성도는 때때로 죄에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의를 이미 얻었고 최종적 구원과 영생도 보장되어 있다(롬 8:30; 빌 1:6). 이 최종적 구원은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조문에 따라 행하지 않고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담대히 의와 거룩을 행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의 육신에는 아직 죄성이 남아 있다. 구원 얻은 성도에게는 이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면적 싸움이 항상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7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때때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하고 신음하며 탄식한다. 그러나 성도는 탄식과 신음 속에서 점점 거룩해져간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도는 이미 얻은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기업의 보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과 자유 속에서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행해야 한다. 8장: 성령의 인도하심 로마서 8장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 곧 성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1-14절, 성령을 따라 삶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사본) 13) 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나를](전통본문) 14) 해방하였음이라. ‘이제’는 구원 얻은 후를 가리키며, ‘육신’은 사람의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이요 육신 즉 몸의 죄성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고 진실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비록 부족과 연약은 있지만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시는 영생을 가리킨 것 같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가리킬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셨으므로 성도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 디카이오마) [의(KJV), 요구(NASB, NIV)]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하나님의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는 표현은 구원 얻은 자들을 묘사한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루신 이 의를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셨다. [5-8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KJV, NASB, NIV)을 좇는 자는 영[성령](KJV, NASB, NIV)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본절의 육신과 영은 단지 사람의 육체와 영을 가리키지 않고 몸의 죄성과 성령을 가리킨다.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단지 몸과 영의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의 영이라도 영육이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는 몸의 죄성의 영향을 받아 영의 기능들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연약과 부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내면적 싸움은 육신의 죄성과 성령의 대립이다. 사람은 몸의 죄성을 따라 살면 그 결과는 죽음이지만, 성령을 따라 몸의 죄악된 욕심을 죽이며 산다면 그 결과는 의와 생명과 평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 즉 몸의 죄성을 따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람은 심히 죄악되며 무능력해졌다. 그러므로 본성 그대로의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화는 본성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된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KJV, NASB)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구원 얻은 자 속에 오셔서 거하신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복이며 신약 성도에게 주신 특권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그 속에 거하시는 성도는 더 이상 육신 즉 죄성을 가진 몸에 불과한 자가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자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계시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은 동일시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다시 증거된다. 참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은 자이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도가 될 수 없다. 오순절파는 이 점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10-11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성령께서는] 의를 인하여 산 것( 조에 )[생명](원문, KJV)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신성(神性)으로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계신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과 같고 또 어느 날 죽게 될 것이지만,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명을 시작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령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성도들 속에 계시다면 성도들은 장차 그 영으로 인해 부활할 것이다. 성도의 부활은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셨듯이,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도 마지막 날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할 것이다. 성도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그 일을 보증하신다. 성도들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12-14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KJV, NASB, NIV)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구원 얻은 우리는 죄성을 가진 몸에 빚이 있어 몸의 욕구대로 살아야 할 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께 빚을 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신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셨고 새 생명을 주셨다. 지옥 갈 죄인을 천국 가게 하신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은 진 자이다. 성도는 죄성을 가진 몸의 욕구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 말씀은 가상적 경고이다. 이 말씀은 중생한 성도가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 사람이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듯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지 구원 얻은 성도들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택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부르신 모든 사람은 영광에 이를 것이다(롬 8:30). 그러나 성도가 계속 죄를 짓는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으로 몸의 죄악된 행위들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성화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속에 거주하신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14절의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13절의 ‘영’이라는 말이 성령을 가리킴을 보인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를 위해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의지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들 속에 남아 있는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며 그들을 감동하시고 지도하시고 거룩한 생활을 하게 도우신다.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둘째로, 이렇게 구원 얻은 성도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1절). 참으로 중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쓸 것이며, 비록 그들에게 실수와 부족이 없지 않을지라도,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셋째로, 성화(聖化)는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죄성을 죽임으로써 조금씩 이루어진다. 성화는 단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이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물론, 우리도 힘써야 한다. 15-39절, 양자(養子) 됨과 영화(榮化) [15-17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 아람어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양자(養子)의 영’ 곧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자(親子)이시고 예수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마음을 일으키셨다. 우리의 영의 이런 진심의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다. 또 자녀들이 부모의 기업을 상속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을 상속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상속자로 묘사되었고 우리도 그와 함께 천국을 상속받을 자로 묘사되었다. 영광의 천국은 성도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마태복음 25: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 받은 후에 영광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다. [18-21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은 천국의 영광이며 부활과 영생의 영광이다. 요한계시록 21:10-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고린도전서 15:42-43,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성도들이 장차 누릴 천국과 영생의 영광은 그들이 현재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아름답고 영원할 것이다.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피조물들’은 동식물의 세계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광스런 부활체를 입은 성도들, 곧 영화(榮化)된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지금은 동물들도 식물들도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지만, 그 날이 오면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에는 피조물들에게도 죽음이나 질병이나 썩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2-25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자들을 가리킨다. 모든 피조물과 거듭난 성도들은 함께 탄식하며 성도들의 몸의 구속(救贖) 즉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기다리며 사모한다. 우리는 다 죄와 죽음과 불행이 영원히 사라질 그 날을 사모한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로 시작된 구원은 성화(聖化)로 진행되며 마침내 영화(榮化)로 완성될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거듭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해지고 영광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법적인 구원 곧 칭의(稱義)와 양자(養子)는 영화(榮化)의 단계에서야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즉 실제로 죄와 죄성이 전혀 없는 구원이 될 것이다. 지금은 죄와의 싸움, 죄성과의 싸움이 있지만, 그때에는 그런 싸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영화의 단계는 아직 미래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한다. 성도는 법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장차 완전한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광의 구원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완전한 구원이며 그 영광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그 영화의 단계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 [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지 알지 못하지만, 이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실패치 않고,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쇠잔해지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 기도를 잘 들으실 것이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이 진리가 확실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것 안에는 낙심할 만한 일도 있고 실패한 일도 있고, 심지어 실수하고 범죄한 일도 있을 것이나, 그것들조차도 선을 이루는 데 사용된다. ‘선’은 일차적으로 성화(聖化)를 가리킨다. 성도의 일생은 영적 훈련과 성장의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말은 구별하여 사랑하신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주권적 행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 곧 선택된 자들만 그에게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6:37, 44, 65).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셨다. 그의 예정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표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함으로 그것을 상실하였고 이제 구원으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은 죄 없는 거룩한 형상이다. 또 본문은 예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히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과거시제).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시제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하신 바이며 지금 섭리하시는 바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또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성령께서 그들 안에 오셔서 도우시는 것이다. [31-32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일’은 구원의 일, 특히 영화를 가리킨다. 세상에서도 최고 권력자가 어떤 이를 위하면 그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우주의 최고 권력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자를 대적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사람의 최대의 대적자는 사탄인데 심지어 사탄도 욥기 1장에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사탄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성도들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 증거는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인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 외의 것을 무엇이든지 주시지 않겠는가? [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이시도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본문은 칭의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효력이 지금도 있음을 증거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을 송사하거나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속죄를 확증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간구하심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와 의(義)를 계속 적용하시는 행위이다. [35-37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성도들의 구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크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근거한 성도들의 구원은 영원한 보장을 가진다. 성도들의 생활은 고난의 생활이지만, 성도들은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괴롭힘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다. 성도들의 구원과 승리는 완전하고 확실하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치 않고 끝까지 보존되고 성도들은 성화(聖化)를 이루고 마침내 영광에 이를 것이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넉넉한 승리를 단언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영광의 구원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인치심에서 확증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성도들에게 부어졌고 그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인 영화는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낙심치 않고 담대히 행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16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둘째로, 성도들이 얻은 구원은 장차 영광에 이르는 구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구원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듯이,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 사는 동안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지만 장차 영광의 부활의 몸을 얻고 영광의 천국에서 복된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도 고대하는 바이다. 그 영광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망 중에 그 영광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구원의 완성 곧 영화(榮化)는 확실하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성화를 이룬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는 영화(榮化)가 확실히 보장된다. 성도들은 넉넉히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 9장: 은혜로 택하심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9장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였고 이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과 은혜에 근거하였음을 증거했다.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였다. 사람이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자매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친척들이나 같은 민족에 대해 더 친근함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특히 먼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지 못한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들의 구원에 대해 매우 큰 안타까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5절]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養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온갖 특권을 누린 특별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었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영광의 표들과 언약들과 율법과, 성막과 성전 예배 즉 제사 제도와, 약속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적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다. 그러나 그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던 민족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고 또 예수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다. [6-9절] 또한[그러나](NASB)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그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된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그의 자손으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그 자손들이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명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은(창 25:1-6)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오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자손들만 언약의 자손들로 간주되었다. [10-13절]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또한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을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고 선과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됨이 육신의 혈통이나 그들의 선한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선택으로 되는 것을 증거한다. 사람의 행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사 64:6). 사람의 구원은 그의 선행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즉 그의 은혜의 선택에 있다(딤후 1:9). [14-16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출 33:19)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므로 구원하실 자를 임의로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그가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된다. 구원은 사람의 소원이나 노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7-18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출 9:16)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도 하시고 강퍅케도 하신다. 구원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은 사람들 속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19-24절]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말대답]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토기장이가 진흙 덩어리로 귀한 그릇이나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결정할 권한이 있으시다. 실상, 악인의 멸망은 그 자신의 죄와 직접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이 아니다. 악인들은 스스로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셨다. 또 구원 얻는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얻은 것뿐이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으로 말한다면, 우리나 저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 죄사함과 의를 주셨다. [25-29절]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호 2:2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호 1:10)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사 10:22)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이는 그가 그 일을 이루시고 의로 그것을 속히 이루실 것임이라. 이는 주께서 땅 위에서 속히 이루실 것임이니라](전통본문) 15)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사 1:9)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오직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남은 자들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있으며 오직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30-3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전통본문) 16)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전통본문) 18)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원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가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행위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멸망할 자들이다. 사람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두셨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율법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질 것이나,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도 바울은 비록 그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의 형제와 골육 친척의 구원을 원하였다.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는 주 예수님 믿지 않고 지옥 갈 우리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들을 향해 간절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지도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6절).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18절).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은 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을 것이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얻음을 거절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했다가 실패하였다. 30-32절,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에 의지함이라.”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10장: 신앙고백 [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마음에 소원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2-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종교적 열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義)가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알지 못하고 단지 종교적 행위의 열심으로 의(義)를 이룰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 없는 열심은 종교적 형식주의나 위선에 떨어지기 쉬울 뿐 참된 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두 종류의 의(義)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자기의 행위로 이루는 의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행위의 의는 심히 불완전하다.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모르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이루려 하고 그것을 의지하려 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대속 사역을 가리키며 그 내용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완전한 의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의가 없었던 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 [5-8절]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무덤]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행함으로 이루는 의이다. 신명기 6:23,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신명기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지 못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한 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 성도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 [9-13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마음으로 믿어져](원문)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입으로 고백되어](원문)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기본적인 내용은, 예수께서 주님이신 것과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의 기적들, 속죄, 재림 등을 믿을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주를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얻는다. 구원에 있어서 신앙고백은 필수적이다. 사람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자발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요 6:37, 44). 또 구원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11절),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12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참된 믿음과 신앙고백이 중요하다. [14-17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전통사본) 18)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선택된 자들은 자동적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전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말씀을 통해 생기며 전도는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파송하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전도라는 수단을 통해 구원하신다. 전도와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는 정상적이고 필수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교회는 전도자를 부르고 훈련시키고 세우고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어디든지 파송해야 한다. 전도자의 발걸음은 귀하고 아름답다. 또 교회는 파송된 전도자를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전도의 필요성은 말씀의 필요성이다. 전도는 말씀 전파이다. 믿음은 복음의 말씀의 바른 지식을 통해 생기기 때문이다. [18-21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신명기와 이사야서를 인용하였다. 신명기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사야 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전파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에 순종치 않고 그 말씀을 거슬러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을 불러 옛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유대인들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다가 실패했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다니엘 9:24,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얻었고 이제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은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가족들과 함께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셋째로, 사람은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 보냄을 받아야 전할 수 있고 전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복음을 들어야 복음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구원 얻을 수 있다(14, 15절).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가복음 16:15-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전도해야 한다.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6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만일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리라](KJV, NKJV). 19)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바울 자신도 그러했다. 옛날에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는 배교의 시대이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두셨다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교회들이 배교한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종들과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을 것이다. [7-12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신 29:4; 사 29:10).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시 69:22-23).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 백성 중 소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으나, 남은 대다수는 완악하여져서 그를 거절하고 그를 믿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기 나게 되었다.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들의 풍성한 구원이 되었다면, 장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온 세상이 얼마나 더 충만한 구원의 복을 누리는 일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암시했다. [13-16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을 구원함으로 자기 골육 이스라엘 사람들로 시기케 하여 그들 중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원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제사하는 곡식 가루의 처음 한 줌이 거룩하면 그 전체가 거룩하며,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거룩하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고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약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에 참여하였다. [17-18절]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참감람나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가지들 중 다수가 꺾이었고 그 대신 돌감람나무 같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고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원나무 같은 유대인들을 향해 자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19-24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仁慈)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끼지 않고 꺾어버리셨다면 접붙임 받은 가지들인 이방인 신자들도 꺾어버리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仁慈) 안에 거하지만, 불신앙과 죄 가운데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처분이 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불신앙 때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거든 하물며 원가지들은 얼마나 더 잘 접붙임을 받겠는가? [25-26a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비밀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지만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국가적 대회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아닐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충만한 수의 사람들이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암시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말이 단순히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총수를 의미한다면 구태여 ‘비밀’이라고 표현할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와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가 대조되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와 ‘온’ 이스라엘이 대조되는 것을 생각할 때도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국가적 회개를 암시한다고 본다. [26b-29절]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사 59:20-21).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회복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었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날이 올 수 있고 올 것이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는다. 이방인들은 전에는 불순종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이와 비슷하게 유대인들은 지금 불순종하고 있으나 훗날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불순종 가운데 버려두심은 그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33-36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 에이스 아우톤 )[주를 위함]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원의 복음 진리를 다 해설한 후에 이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고 부요하심과 그의 판단과 행하심의 깊고 측량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피조물인 인생이 어찌 창조자를 다 이해하며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실상 억만 분지 일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만큼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알며 이해하며 전하며 설명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하신 그 내용은 오늘날 신구약 66권의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주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진리를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처리하시며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에 있어서 그러하시다. 이것은 웅대한 세계적, 우주적 진리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은혜로 택하신 자들을 남겨두셨다. 그는 엘리야 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역사도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다. 오늘날 배교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이 있음이 확실하다. 교회들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 속에 있지만, 이런 교계의 풍조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옛신앙을 소유하고 옛길을 붙든 자들이 세계 곳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대하며 또 우리 자신이 그런 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구원의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복음은 이방 세계로 전파되었고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 같은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한 구원의 계획이 증거되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는 완악할 것이나,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25-26절).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암시하며, 여기에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다. 셋째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작정과 섭리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 믿고 의지하고 그 긍휼 안에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2절, 헌신(獻身)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로기켄 )[합당한] 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구원 얻은 자의 생활에 대해 교훈하면서 첫째로 헌신에 대해 말한다. 헌신(獻身)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몸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의 손과 발,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와 힘, 우리의 시간과 돈,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포함한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몸과 같이 움직인다. 몸이 없으면 이런 것들도 없다. 몸을 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헌신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복음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의 소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크신 자비와 사랑과 은혜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헌신을 ‘산 제사’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제사와 대조되는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신 오늘날에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구약시대의 번제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했으나, 또한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도 상징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어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죄를 짓지 않는 삶이다. 이런 헌신 곧 거룩한 삶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라고 불렀다. 어떤 형식의 예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거룩한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합당한 예배라는 뜻이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 누스 nou'”)[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헌신자가 행해야 할 바를 몇 가지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불경건하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 마태복음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세상은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였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행 2:40).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본받는다면, 우리는 결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 수 없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구원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방향으로의 생각의 변화이다. 그것이 중생이다. 또 ‘변화를 받으라’는 원어( 메타모르푸스데 )는 현재 명령형으로 우리의 생각의 변화가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야 함을 보인다. 성도의 영적 성장 곧 성화는 생각의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에베소서 4:22-23도, “너희는 유혹의[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계속 새롭게 되어]”라고 말한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현재부정사)도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고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성화(聖化)는 깨달음의 성숙 과정이다. 사람의 연약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도의 생각과 깨달음에는 변화가 있다. 생각의 성숙은 평생 진행될 것이다. 구원 얻기 전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 중심적이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정욕적이었으나, 구원 얻은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져서 성경에 교훈된 대로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을 생각하고 경건하고 도덕적인 것만 생각하는 자들이 되었고 또 그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그 내용이 선하며 그것을 믿고 행한 결과도 선하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신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빈번히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달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해야 하고 비록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20: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거리낌 없이 다 전하였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밝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구원과 온전함을 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치 말고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에서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신구약 66권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순종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헌신함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獻身)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을,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와 힘을, 우리의 시간과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며, 우리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쳐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듯이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여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희생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는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다(행 20:28; 고전 6:20).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의가 되었고 그를 믿는 우리는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을 날마다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계속 생각의 변화, 생각의 성숙함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 곧 신구약 66권의 책에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귀히 여기며 주야로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그 모든 말씀을 다 믿고 그 모든 말씀을 다 소망하고 그 모든 말씀을 힘써 행해야 한다. 헌신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3-13절, 그리스도인의 생활 [3-5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소프로네인 )[바르게, 건전하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바르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이 있다. 각 지체는 자기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눈은 눈의 역할을, 입은 입의 역할을, 손이나 발은 손이나 발의 역할을 잘할 때 몸은 평안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도 각 사람이 자기 위치를 지키며 충성할 때 평안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27,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勸慰)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 하플로테스 )[단순함(KJV), 너그러움(NASB, NIV)]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각각 다르며 각 사람은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예언하는 자는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 오늘날에 설교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거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해야 한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해야 한다. 교회 직분자들은 섬기는 자들이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에, 권위(勸慰)하는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구제하는 자는 단순함과 너그러움으로 해야 한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하고,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9-10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선한 것을 붙들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6,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거짓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거짓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 악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며 선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미가 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우애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대속하셨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서로를 먼저 존경해야 하고 또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또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잠언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0-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시간을 최선용하라]. 때가 악하니라.” 직장 다니는 자나 사업하는 자는 자기의 일에,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주부들은 음식 만드는 일이나 집안 살림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다(요 6:27-29). 우리는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며, 또 지교회에 속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임들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고 전도와 봉사의 일들에도 참여하고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 성도들의 소망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이것들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소망하고 그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또 우리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질병들, 경제적 곤란, 자연적 재난, 핍박 등 여러 가지 환난들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 확실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우리는 평안할 때 하나님께 찬송하지만, 환난 날에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3-16,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길이다. 우리가 기도에 항상 힘쓰면 어떤 어려운 일이 와도 낙심치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13절]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성도의 필요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우리는 성도의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다. 신명기 15:7-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 . .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는 어려운 교우나 이웃, 또 손님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후하게 대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장로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가르치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들었다(딤전 3: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바르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임을 기억하고 결코 자기 위치를 벗어난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위치에 맞게, 겸손하게, 바르고 건전한 생각을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이기도 하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서로 우애하고 서로를 먼저 존경하고 또 피차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세상 일에도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각자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하지만, 특히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계명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과 복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신하고 소망하고 즐거워하며 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들을 참아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성도들을 돌아보며 구제하기를 좋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14-21절, 선으로 악을 이기라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성도는 자기를 핍박하고 심히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롬6장 1-21장 로마서 강해 3권 -마틴로이드 존스-강대식 목사 요약

롬6장 1-2

1장 서론적 분해 (로마서강해 3권) 마틴 로이드 존스 2010-05-19 강대식 목사 한가족교회 http://afamily.ijesus.net

“청교도의 길” http://blog.daum.net/kds2012

“청교도연구회” http://cafe.daum.net/ps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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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1-2)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를 분해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인기있는 방식은 1-5장은 칭의, 6-8장은 성화, 9-11장은 유대인과 종말의 문제, 12-16장은 실제적인 권면과 적용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계적일 뿐 아니라 로마서가 말하지 않는 것을 로마서에다 갖다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온 힘을 기울여 밝힐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제목 밑에 이러한 모양으로 아주 교묘하게 구분짓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에 가서는 문제를 보다 복잡미묘하게 할 뿐이다. 성경 해석의 철칙은 본문 말씀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말씀 속에 없는데 우리 마음 속의 어떤 틀을 거기에다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하게 정돈하고 알파벳 글자수와 같게 하는 것 등은 도움이 되겠지만 성경 말씀 자체를 희생시켜 가면서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제해야 하는 것은 6장이하에서 새로운 대목을 시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서를 그럴듯하게 쉽게 세분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6;1에서 성화의 주제를 다루기 시작한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런즉 무슨 말을 하리요?”. 이제껏 말해 왔던 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 문제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 그가 말할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말해 온 것에서 야기되는 문제이다. 5장 전체의 주제를 재음미해봐야 한다.

(로마서의 장 구분도 16세기경에야 된 것이며 정확하지도 못하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5장에서 사도가 말하는 주제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주제였다. 처음 네 장에서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위대한 교리를 말했고 5장의 주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칭의가 아주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구속을 보장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5장 내내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통치 아래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장래는 확실히 보장되었고, 모든 축복으로 인도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그 문제에 대하여 종결지은 것이 아니고 8장 마지막에 가서야 끝을 낸다.

6장에서부터 무언가 잠깐 멈출 필요를 느꼈으며, 극히 중요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진로를 바꾼 것이다. 5:20-21은 대번에 두 가지 특별한 난제를 야기시킨다. (롬5:20-21)“(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둘 다 율법에 관한 문제이다. 첫째는, 율법을 제치고 은혜 일변도의 진술이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닌가? 율법폐기론으로 무율법주의롤 인도하기 쉬운 교훈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율법은 이제 전혀 가치없고 쓸모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계획과 체계에 있어서 율법이 차지하는 기능과 위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6장과 7장에서 행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장은 5장과 8장 사이의 삽입구적인 장이다. 5장과 8장의 주제는 동일한 것이요, 계속되는 것이다.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 시작한다. 이 진술은 5장 마지막과 연결되는 것이지 7장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8장은 5장이 끊긴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6장과 7장은 본 주제를 벗어난 탈선이 아니라 삼입대목이다. 5장에서 야기되는 난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6장은 첫 번째 난제인 율법폐기론의 위험성을 다루고, 7장은 두 번째 난제, 율법의 위치와 기능을 다룬다. 그런 다음 칭의의 결국에 대한 위대한 주제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8장 초두에서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6,7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성화를 다루고 있다는 견해를 철저히 배격한다. 6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4절과 15-23절이다. 첫 부분에서, 순수하고 교리적인 방식으로 율법폐기론의 위험을 다루고 둘째 부분에서 실제적이고 체험적으로 다룬다. 첫째 부분을 세분하면 1-2절은 문제를 제기하고 보편적인 답을 한다. 3-11절은 보다 상세한 답변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설명한다. 12-14절은 이상의 모든 것을 비추어서 개관적인 호소를 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를 마음 속에 넣어두는 것이 언제나 좋다. 전체의 개념에 상응하지 않게 부분을 해석해서는 결코 안된다.

1절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 특별한 오해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리가 전해질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이런 오해나 질문은 생길 수가 없다.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매우 위험하다.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로 되어진다는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장한다. 만일 우리의 설교가 그런 오해와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참으로 설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에 대하여 이런 반기를 든 적이 없다. 그러나 마틴 루터에게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형식적이고 죽은 기독교는 언제나 그런 식의 도전을 해왔다.

2절의 답변,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의 뜻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신칭의를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울이 1-5장에서 말한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칭의 뿐만 아니라,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은혜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며, 그렇게 행동하기는 더욱 어렵다. 은혜의 임무는 우리들을 죄의 문제와 왕노릇 아래에서 건져 내어 은혜의 왕 노릇 아래로 옮겨주는 것이다. 5;21,“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진술들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진술을 비슷한 형태로 반복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절에서, 6-8절에서, 10,11절에서, 그리고 11절에서는 권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살리요”라는 진술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죄에 대하여 죽은”은 부정과거형 동사로서 한번 일어나서 다시는 변개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자로서의 우리의 과거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일단 일어나고 변동될 수 없는 사실을 말한다. 6,7,8,10,11절에서도 같은 동사형을 쓰고 있음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여기에 너희에게 영원하며 단번에 일어난 일이 있노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중단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시작할 때에 일어난 것이다.

롬6:3 그리스도와의 연합[3장] 로마서강해3권 2010-06-02 —————————————-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2절의 엄청나고 놀라운 진술에 대한 대답을 3-11절에서 하고 있다.

5:12-21에서 “우리가 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그 개념을 함축했다.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로 인하여서이다.

3-11절은 그것을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극적이고, 가장 위안을 주는 것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6장을 읽으면서도 이 교리를 놓치는 것은 ‘세례 받은’이란 말만을 보고 다른 것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 받은’에 대한 해석;

① 성례주의자 해석. 세례를 받아야 중생한다는 가르치는 교리. 세례행위 자체가 수세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합시킨다고 한다. 이것은 마차 뒤에 말을 갖다 놓는 격이다. 이것은 사제주의와 교회를 추겨 세우게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만인제사장주의를 가르친다. 세례는 생명과 연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인치는 것이다. 에디오피아의 내시의 경우, 고낼료의 경우, 빌립보 간수의 경우가 그랬다.

② 서약의 세례. 죄의 생활을 뉘우치고 동시에 새 삶의 길을 서약한다는 것.

③ 그리스도의 영향권 내로 세례 받았다는 주장. 조상들이 홍해를 지날 때 ‘그,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는 영향권 차원 에서만 아니라 연합, 영적 연합의 차원에서이다.

④ 세례는 구원하는 효과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의 표라고 주장. 그러나 세례는 어린 가지를 원목에 접붙일 때 일어나는 류의 연합을 의미한다.

⑤ 세례란 연합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 장사하는 표로 물 아래로 내려가고, 부활하는 표로 물 위로 다시 나온다는 것. 그러나 바울은 세례로 말미암아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세례는 어떤 일을 성취한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끌어 준다.

우리를 그리스도에 병합시키고 연합시키는 세례는 고전12:13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장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몸이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연합되어 있고 우리는 서로 모두 연합되어 있다. 그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성령에 의한 세례로 이루어졌다. 성령의 세례(baptism with the Spirit)가 아니다. 그것은 놀랍고 신비로운 성령의 사역이다.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사역과 같다.

갈2:20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도 동일한 연합 교리를 말해 준다. 세례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고 접붙일 때 성령에 의해서 수행되어지는 세례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는 이는 성령이시다.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세례도 바로 그것이다. 구원 중 가장 영광스러운 국면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사활을 좌우하는 연합이다.

“알지 못하느냐”.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지식임을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교리를 높은 수준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에 관한 영광스러운 사실은 내가 아담에게서 건짐을 받고 그와의 관계를 끊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나에게 오는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우리에게 새생명의 씨를 주시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은 동시에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영이시다. 이 구절들을 체험의 차원에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체험이 아니라, 신분과 조건과 지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지위만이 있을 뿐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없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지 않았으면 구원받은 사람일 수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전체에게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골2:10)고 말한다. 언제 그랬다는 말인가? 지금이다! 앞으로 충만하여질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안에서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느낌과 체험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 있다. 그리스도는 지금 여러분의 “의와 지혜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시는 것이다. 지금이다.

이러한 것들은 더욱더 체험하여 나갈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한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하다. “너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에게 사실인 것은 너희에게도 사실이다. 너희는 그것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너희에게 사실이 되어 있다.” 여러분의 최종적인 구원과 완전한 구속의 보증은 바로 그것이다.

“티나 주름잡힌 것 등 그러한 모든 것에서” 구원 받을 것을 보증하는 것도 그것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나의 거룩함이 되시는 것이다. 내가 이 순간에 죽는다 하여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고, 의롭다 함을 입는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그 모든 것이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행하신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살으심 안에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롬6장 3-4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함축하는 것들 [4장] 로마서강해3권 강대식 목사 한가족교회 2010-06-09 —————————————-

(롬6:3-4)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그에게 연합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에 우리는 동참자가 된 것이다.

1.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서 함께 연합되었다.

우리가 겪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아담이 실제적인 죄를 지었으나 우리는 모두 그 안에서 죄를 지었으며, 그와 함께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이제 여기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가 행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있어서 함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며 그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강조해야 할 것은 이것은 주관적이거나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6장을 강해할 때 그릇되게 나가는 것이 이 점에서 이다. 그들은 체험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생각하고 고집한다. 그 때문에 이 롬 6장은 ‘성결집회’에서 부단하게 쓰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취급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거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취급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되어진 것이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기정사실화 된 것을 말한다.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었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의 신분은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무엇이 아니다.

그것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또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기있는 가르침은 “여러분은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더 깊은 영적 생활과 더 큰 축복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이제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고 말한다.2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하여’라고 말한다. 그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 이것이 논증의 전체 요점이다.

갈2:20보다 더 자주 잘못 해석되고 잘못 적용되는 성구가 없다. 여기에서는 칭의 외에 다른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화와 관련해서 이 구절을 사용한다. “너는 구원받았으나 삶 가운데서 승리를 얻지 못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충만한 체험을 하고 있지 못하다. 너는 제 2단계로 들어가기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충만한 축복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성화의 일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라고 강권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바울은 어떤 비상한 성자나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칭의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과 이것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롬 6장의 가르침과 정확히 같다.

10절에서 그 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죄의 체계와 영역과 통치에 대하여 영단번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도 역시 죄의 체계와 영역과 통치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같이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연합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과는 하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죄의 왕노릇과 맺고 있었던 우리의 관계와 같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사지냄에서 연합되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뿐 아니라 그의 장사지냄에 있어서도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장사는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이다. 장사는 이생과 이 세상에 대한 관계가 종결되었음을 선하는 선언장이다. 우리 주님께서 장사되셨을 때, 그가 이 세상과 그가 탄생하였을 때 가지신 삶에 대하여 가잔 관계, 즉 율법 아래 속하고, 죄의 체계와 권세 안에 들어오셨던 삶의 관계가 종결되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자기가 자원하여 고의적으로 가지셨던 죄의 통치와 죄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우리도 세례 받음으로 그와 함께 연합되었으므로 함께 장사되었다. 죄의 왕노릇과 체제로부터 장사된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해석해 준 것이다. 우리가 죄의 왕노릇과 통치와 그 체제 아래 있던 우리의 신분이 끝났음을 표명하는 것이다.

3. 우리는 그의 부활하심에도 그와 함께 연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라고 하였다. ‘아버지의 영광’이란 ‘아버지의 권능’을 말한다. 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데서 가장 놀랍고 특이한 방식으로 나타낸 바 되었다는 것이다. (엡1:19-20)“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부활이 선포하는 것은 나타난 바 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다. 부활은 이 엄청난 능력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부활이 말하는 주는 바는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능과 왕노릇에 의하여 붙잡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행2: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그 통치를 완벽하게 이기셨다고 하는 궁극적인 증거이며, 죄에 대한 관계를 청산하셨다고 하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주님은 부활의 결과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신다.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우리에게도 같은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엡2:5-6)“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나는 그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었고, 그와 함께 살아났다. 나는 새 체제 안에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통치와 체제에 대한 관계를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청산하셨듯이,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 사도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사력을 다하여 십자가에 달려 스스로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우리는 이 지위에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 그것은 되어질 것이 아니다. 현재 되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죄의 왕노릇 아래에도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과 영원히 관계를 끊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보좌에 앉은 바 되었다(엡2:6).

3,4절은 2절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의 반복이다. 이것이 얼마나 정확히 일어났으며, 어째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사실이어야만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어느 누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논박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면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장사지냄과 함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부활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다. 너희는 더 이상 죄의 통치와 죄의 체계에 대하여 하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우리가 죄 가운데서 더 거하겠는가?

믿는 ‘우리를 향한’ 이 지극히 큰 능력과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한 부활의 능력으로 폐해진 죄의 통치와 왕노릇이 다시 우리를 사로 잡을 수가 결코 없다.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죄의 삶을 살게끔 허락되어 있지 않다.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치 못하리니’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의 결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 뿐 아니라 그의 부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동참한다. 우리는 새생명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롬6장 5-6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음 5장 강대식 목사 2010-06-16 [로마서강해3권] 한가족교회 —————————————-

(롬6:5-6)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이 말하는 구조를 정확하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2절에서 전제를 설정하여 놓고 3,4절에서 그것을 단단하게 확정시키고, 5절에서 아주 미소한 차이로서 그것을 재진술한다. 6,7절에서 첫 번째 항목을 8-10절에서 두 번째 항목을 보다 상세하게 다시 풀어나간다.

‘만일’은 의문이 아니라 ‘때문에’의 뜻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연합하다’의 뜻. ‘함께 자라다’ 즉 본질적인 연합으로서 함께 자람을 의미한다. ‘연합된 성장’의 의미이다.

‘본받음’. 우리의 죽음과 부활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하지 않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독특성과 고유함을 지니고 있다. 사도는 마음으로 이 구별을 하라고 ‘본받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본받은 것이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같은 구별이 8:3에 있다. 주님이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지 죄있는 육신으로 오시지 않은 것과 같다. 그에게 문자적으로 일어난 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와 함께 죽지 않았고 그가 죽으실 때 겪으신 고난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와 가진 영적인 관계 때문에 그의 실제적 죽음이 가져온 결과와 귀추가 우리에게 미쳤다는 것이다. 아담과의 관계에서와 동일한 병행이다. 죽음과 부활의 결과와 모든 덕을 우리는 전부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부활하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연합한 자가 ‘되리라’. 되리라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말한다. 11절에서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 언제요? 지금이다. ‘되리라’도 그와 함께 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죽고 살아났듯이 우리도 죽고 산 것이다. 미래사가 아니다.

‘그의 부활을 본받아’. 4절 끝에서 말한 ‘새생명’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살아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와 죄의 폭군 밑에 있는 옛 생명에 속하지 있지 않다. 10절의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심,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1절에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미래까지도 포함한다. 우리의 구원은 몸의 영화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빌3:20-21“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하였다”하고, 그것을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에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이라고 더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이미 못박혔다.

‘알거니와’. 우리가 친숙하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어야 할 어떤 것을 연상케 하기 위한 것, 강한 어조이다. 사도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교인들에게 이 말을 썼다. 찰스 핫지는 “이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반대이다. 이것은 체험적인 지식이 아니요 믿음의 지식 이다. 성경에서 밝혀진 지식이요, 믿음이 있으면 확신하고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체험의 지식이라면 기다리게 될 것이고, 믿음의 지식이라면 지금 살게 될 것이다.)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이 용어처럼 자주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성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 ‘우리 옛사람’을 죽이고 ‘옛 사람’을 제거시키려고 기를 쓰며 산다. 골방이나 산의 은둔자로 살게 한 것이 바로 이 투쟁이고 몸의 지체를 절단하기까지 하는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이 ‘옛사람’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적 본성과 육체적인 모든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육체적인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생 이전에 있었던 도덕적인 존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정욕을 가진 육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전 사람’을 의미하지도 않다. 그러한 것을 의미하면 다른 성경들에 비추어서 반드시 절망적인 혼란에 처하게 된다. 5:12이하의 문맥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옛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전에 있었던 사람이요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누누이 말하고 있다. 내가 되돌아 볼 수 있는 옛 사람은 내가 아담 안에 있을 때의 사람이다. 그것은 나의 옛 인간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나 죄의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내게 있다. 그러나 옛 사람이 가버렸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께서는 영단번에 죽으셨다(10절). 나의 옛 사람도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엡4:22-24, 골3:9-10, 갈5;24. 이 진술들을 손상시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엣 사람의 내가 아담 안에 있었던 나의 옛 인간 존재, 율법 아래 있었고, 정죄 아래 태어났고, 아담과 함께 죄를 지었고, 그래서 아담의 죄의 결과들을 다 함께 거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더 이상 그 옛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첫 열매가 되신다. 그는 새 종족의 머리이시다. 나는 이 새 종족의 한 성원이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으라’는 ‘옛 사람의 특성을 벗으라’는 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벗으라고 할 리가 없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만일 너희가 옛 사람이 죽었으면 그 옛 사람처럼 살지 말라. 그러니 그것을 벗어버리고 옛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계속 믿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어떤 존재인 줄 알라. 너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고 새 사람이다. 그러므로 네 신분이 새 사람이니 새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다. 성년에 이른 사람을 예로 든다.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말한다. ‘당신은 어른이니 어른답게 구시오’. 갈5:24에서 바울이 아주 분명하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이는 나와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옛 사람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옛 인간존재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영단번에 죽었다. 이 진술의 객관적인 성격을 꼭 붙들어야 한다.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름받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는 요청이 없다. 내가 하라고 요청을 받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아담 안에 있는 것 같이 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화방식이다. 옛 사람을 제거하려는 일을 결코 하지 말자. 옛 사람은 가버렸다. 이는 체험해야 하지 않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체험이 승리가 될 때는 여러분이 그것을 믿을 때만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은 것처럼 해야 한다. 99세의 남자와 90세된 그의 아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체험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뿐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체험적인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받게 하시고 연합시키신다. 나는 말씀에서 그것을 발견하므로 그런 줄 아는 것이다. 내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아는 것은 말씀이 나에게 말씀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전혀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은 대로 그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내가 죄인이요, 죄가 내 안에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다. 나에겐 “그러므로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말씀을 믿으면, 그 결과로서 영광스러운 체험이 따라 온다. 먼저 말씀을 믿으면 그것이 진리라는 증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초하여 서라.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약속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서라. 그 약속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의 지위상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취하고 믿는다. 나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셨다고 하신다. 나는 그와 함께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와 함께 다시 살아 그와 함께 새생명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깨닫고, 새생명의 증거를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붙들어야 할 것은 옮겨졌다는 것과 이런 일들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 강론일: 2010-06-23 * 제목: 6장 자유함을 입음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6-7)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즉 ‘죄의 몸이 죽는(멸하는) 것’과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함이다. “죄의 몸이 죽어”는 “죄의 몸이 효력을 잃고 꼼짝 못하게 하고 무능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해석해야 한다.

“죄의 몸”이 무엇인가? 옛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죄를 갖고 있는 우리의 육체인 몸을 의미한다. ‘현재 육체적인 상태에 있는 우리 안에 거하는 죄’를 의미한다. 여전히 죄와 사망이 우리 안에 다스리고 있는 형태로서의 몸을 말한다. ‘인격으로서의 나 자신’과 ‘죄의 몸’과의 구별이 있어야 한다. ‘죄의 몸’이라는 의미는 그 죄가 여전히 왕노릇하며 다스리지만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지는 않고 단지 나의 몸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죄는 그를 지배하는 완전한 지배력을 얻었다. 5:11-21에서 그것을 명백히 살펴보았다. 즉 그의 전체인 몸, 정신, 영을 지배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아닌 모든 사람에게 그렇다. 그는 ‘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이다. 죄가 다스리고 있다. 그에게 속한 육적, 동물적 부분이 그를 다스리고 있다. “전에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의 유혹에 순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위는 무엇인가? 나 자신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되어 그와 더불어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왕노릇과 다스림으로서의 죄에 대해 죽었으며 그것과 단절했으며 죄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죄가 아직도 나의 몸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 나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졌다. 옛사람은 지나갔으며,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이다. 그것이 나에 관해 참된 것이다. 그것이 나에 관해 참된 진실일지라도 나의 몸, 나의 육적 몸에 관해서는 진실이 아니다. 죄는 나의 육적 몸에, 나의 지체에 아직도 있다. 죄는 나의 육체의 율법으로 역사하며 나의 기관인 몸의 부분과 ‘나의 지체’에 그것의 영향이 있다.

죄는 몸에 그 영향력을 남겨두고 있다. 나는 스스로 하나의 영적 존재로서 철저하게 영원히 죄의 영향권 밖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셨다. 그러나 그 약속된 땅에 어떤 민족들 남겨 두셨고, 그의 백성들은 그들과 싸워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옛 백성들을 그 수준에서 다루셨던 방방식과 그의 백성들은 지금 영적 수준에서 다루시는 방식 사이에는 놀라운 균형을 이룬다. 몸은 아직 죄와 타락의 영향에서 구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구원 받은 것이다.

몸이 본질적으로나 천성적으로 죄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해둔다. 몸 자체에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전에 나의 인성 전체를 지배하였던 죄가 지금 나의 몸의 지체를 주관하고 있을 따름이요,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 안에 있는 나, 영혼으로서의 나, 나의 인격으로서의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몸은 본능과 성향 등을 가지고 있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성 본능, 식욕 등 자연적 본능들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의 몸의 차이. 그리스도의 몸은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모든 본능과 모든 기능과 능력과 성향이 온전한 조화와 바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나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우리를 지배하고, 폭군과 같이 압제하며, 우리를 휘몰아가는 몸의 요소들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욕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욕을 가진 피조물이며, 그렇게 태어났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 태어났기 때문이며 그의 타락한 본성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죄는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도 몸에게 그 세력을 행하고 있다. 인간 자체는 구원받았는데 , 그의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으며,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8:23)고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아직 체험되지 않았다.

‘죄의 몸’은 뒤에 나올 ‘육신’과 같은 의미다. ‘육신’은 몸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죄와 악에게 지배되고 사용되어지는 것으로의 몸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삶 동안 죄가 거하는 것으로서의 몸이다. 그러므로 6:6에서 사도는 사실상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뒤에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가 아직 지배하는 몸에서까지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러하니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죄의 노예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그는 자기 몸을 죄가 다스리게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12, 1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다. ‘옛 사람’과 ‘죄의 몸’ 사이의 구별은 명확하고 중요하다.

‘옛 사람을 반대하여야 한다’는 사람은 엄청나 넌센스이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옛 사람에 대하여 죽는다’ 하는 사람도 넌센스이다. 이미 죽어서 영원히 가버린 사람이 죽어가다니요. 어떤 이는 ‘우리의 죽어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점차적인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이 영단번에 죽었을 뿐 아니라 장사지낸 바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저 위대한 아브라함 카이퍼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의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까지 옛 사람의 무덤을 파는 사람입니다”고 말했다. ‘옛 사람’은 죽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며, 그를 위하여 무덤을 팔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무덤 안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 옛 사람을 죽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구원받고 풀려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에 대하여 영단번에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옛 사람’은 옛 본성의 의미하지 않는다. 옛 본성이 의미하는 바는 ‘죄의 몸’이다.

하이델베르그 신조 제43장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온 더 많은 결과들은 무엇이냐?” “그의 죽음으로 해서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와 함께 장사 되었다.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육신의 부패한 성향들이 더 이상 우리 가운데서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옛 사람은 육신이 아니다. 옛 사람은 ‘부패한 본성’이 아니다. 옛 사람은 아담적 본질이요, 옛 인간이다. 육신은 죄의 몸이요, 죄가 아직도 폭군노릇을 하고 있고 아직도 죄가 남아있는 몸이다. 그러나 은혜의 왕노릇 아래서는 몸까지도 구원을 받을 보장을 받았다.. 그러나 몸이 영화되는 날까지는 이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다른 말로 해서 몸, 육신 안에 있는 죄를 다루는 방식은 지금이라도 여러분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 강론일: 2010-06-30 * 제목: 7장 죄에서 벗어남 * 책명: 로마서강해3권 —————————————-

(롬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 6:6과 엡 4:22-24의 조화의 난제가 있다. 롬 6:6에서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

그것은 옛 사람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요 영원히 끝난 일이다.

그러나 엡 4;22-24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한다.

같은 어휘라 할지라도 같은 의미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는 이미 영단번에 죽어 버려 사라져 버린 것을 벗어 버리라고 권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엡 4:22의 “너희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에서 ‘옛 사람’은 옛 사람의 특징이 되는 언행심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벗어야 할 것은 옛 사람의 ‘언어 생활’ 또는 행동 양식이지 옛 사람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거듭났다. 너희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마치 옛 사람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인양 행동하지 말라. 너희답게 살라. 더 이상 너희답지 않게 살지 말라”. 그래서 롬 6:4과 엡 4:22-24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문맥이 그 점을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게 한다.

엡 4;22은 행동과 윤리에 관심이 있고 롬 6;6은 옛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다.

6절의 가르침은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는 죄가 내 몸을 여전히 사용하는 것을 무능케

하고 무력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친다. ‘죄의 몸’의 좋은 해석은 옛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옛 사람과 죄의 몸 사이의 차이는 나의 ‘옛 자아’와 나의 ‘옛 본성’ 사이의 차이이다.

아더 웨이는 옛 사람을 전의 자아로, 죄의 몸을 옛 본성으로 번역하였다. 아주 훌륭한 번역이다.

우리 자신이 우리 본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도의 논증을 따라 갈 수 없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진리는 우리의 자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내 옛 자아가 사라졌으며 나는 새로운 자아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만이 나의 옛 본성을 다룰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결정적이고 경이로운 진리이다.

나의 옛 본성의 문제는 내가 내 옛 자아가 가버렸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훨씬 쉬워진다.

내가 새 사람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 내 몸, 즉 바울이 ‘죽을 몸’이라고 부른 내 몸에

아직 남아 있는 이 옛 본성을 다루기에 더 좋은 위치에 있게 된다.

죄는 더 이상 내 안에 있지 않고 내 지체 속에만 있다.

듣든 중 가장 자유를 주는 말이 아닌가! 그것이 사도의 주장이고, 그것이 구원방식이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떨어질 때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의문을 가짐으로써 불행해한다. 사도는 여기서 그런 식의 의문이 잘못이라고 못박고 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죄를 지을 때마다 너희의 구원 문제를 들먹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장 마지막의 장엄한 클라이막스).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의롭다 함을 받았고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다.

하나님의 양자이다. 죄는 나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회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어째서 죄를 짓는가? 죄가 내 지체 속에 있으며, ‘죄의 몸’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죄의 몸’을 나에게서 제거시킬 구원을 누리고 있다. 바울은 ‘우리 옛 사람’,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지를 의심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 ‘옛 사람’을 다시 불러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어 심지어 장사되어, 영원히 사라진 ‘옛 사람’을 다시 불러오는 것에 불과하다.

6절이 확실해야 7절에 나아갈 수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일 경우 그분은 의롭다 함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는 흠정역 번역대로 ‘자유함을 얻었음이라’로 해야 한다.

‘죽은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죽은 사람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자명한 진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사람이 죽을 때, 그가 죽음으로써 그는 죄에서 벗어나 방면되며, 죄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사람이 죽을 때 그는 죄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죄와 함께 일하는 율법의 관할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죽는 순간 죄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흠정역이 옳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죄에서, 죄의 모든 영역과 체제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자유롭다.

그래서 6,7절을 함께 놓을 수 있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모든 방면에서 죄에게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마다 죄의 권능과 죄의 왕노릇과 죄의 노예제도와 죄의 폭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2절로 돌아가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는 우리가 ‘죄의 통치와 왕노릇에 대하여 죽음’을 의미한다.

그는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죄는 아직도 죽을 몸에 거한다. 그러나 나의 참된 자아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의 지체 속에 거하는 것이다. 내 몸, 내 육신 안에 거하는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과 같다.

죄의 관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죄가 사람에게까지 왕노릇하였다”. 사망까지만 이다.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고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벧전 4:1-2는 로마서 6장의 대목과 정확히 병행하는 말씀이다. (벧전4:1-2)“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죄를 그쳤다’는 더 이상 죄의 지배나 죄의 통치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라고 완벽하게 표현한다. 바울과 베드로는 모두 다 같은 일,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단번에 하나의 존재, 하나의 영혼과 전인으로서 죄와의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다.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비록 우리가 여기 몸 안에 있지만, 비록 우리는 죄가 몸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죄에 떨어지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나는 구원받은 것이다.

내가 지금 분명히 구원받은 것같이 영광 중에서 분명히 거하게 될 것이다.

침체를 극복하고 실패를 극복하는 길은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과 우리가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우리의 구원을 의심케 하는 마귀에 대한 처방은, 우리가 죄를 짓거나 말거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죄가 한 인격(신분)으로서의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죄가 여러분을 다시 자기의 왕노릇 밑에 끌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죄는 다만 우리의 몸에 남아 있다. 그 몸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라. 나는 한 사람, 한 존재, 한 인격으로서 한 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나는 이미 죄의 지배와 왕노릇과 죄의 통치와 관계를 끊었다.

죽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동적으로, 정한 이치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유-“죄에서 벗어나 자유케 된다”.

* 강론일: 2010-07-07 * 제목: 8장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8-10)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열쇠가 되는 구절은 5절이다. (롬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7절은 5절 상반부에 대한 해설이요, 8-10절은 5절 하반부에 대한 해설이다.

죽음은 소극적이요 부활은 적극적이다.

8절은 5절 하반부의 반복에 불과하다. 아주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는 표현 때문에 넘어져서는 안된다.

부활의 믿음을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다.

이 ‘믿는다’는 말은 사실상 ‘나는 그 사실을 안다’, ‘확신한다’ 말 대신에 온 것이다.

8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반드시 우리는 그와 함께 살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연합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반드시 그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살 줄을 (믿노니)’의 미래시제의 문제.

우리의 장래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전혀 잘못된 것이다.

사도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에게 되어진 것이다.

현재 우리 가운데 되어진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더 이상 죄의 체제와 영역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았다”는 것도 현재 우리의 것이다. 병행 구절들을 본다.

4절,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서이다.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언제? 미래 부활까지 미루어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

이것이 전체 요점이다.

엡2:1-4,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것을 행하셨으며)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육체적인 의미에서는 미래이다.

현재 되어진 것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갈2:19–20도 마찬가지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부활한 후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그러하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현재 말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것은 정확히 여기 롬 6장에서 보는 바와 같다.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전적으로 새생명을 향하여,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새 체제 안에 있는 새생명에 대하여 살아났다는 것이 보편적인 전제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새롭고 부활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9-10절은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우리와 우리의 체험’을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체험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사실인 것만을 숙고해야만 한다.

또한 이 죄악의 관계 문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만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진리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우리의 현재 지위가 이 시점에서 사도의 관심이다.

체험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11절에 가서야 체험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 분명하기까지는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해서 결코 명확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사셨으며”. 누가 살리신 것인가? 4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아버지의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스런 능력’이란 의미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만족하셨다는 적극적인 증거이다. 부활은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 사명하신 일을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을 전 우주에 선포하심이요 공포하심이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신다”.

그 이유는 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영단번에 그것을 행하셨다.

부활이 그것을 증명한다. 부활은 그가 일을 마치셨으며 목적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이것은 엄청난 진술이다.

죽음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거나 세력을 부리지 못한다.

그가 율법을 마치셨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죽음은 그가 율법 아래 있는 동안만 간섭할 수 있었다. 율법을 떠나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의 부활은 그가 율법을 다 이루셨으며,

결국 율법이 사망 안에서는 더 이상 그를 접촉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는 그가 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들어왔던 죄와의 관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권세로서의 죄, 왕노릇하는 것으로서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단번에” 죽으셨다. 그 의미는 ‘오직 단 한번’, ‘영단번에’, ‘단번에 영원히’ 이다. 반복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죄에 대하여 죽었을 때 그는 그것을 영단번에 행하셨다. 그리고 그 일이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결코 그가 다시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였다.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차례씩 같은 일을 행하였다.

여기 주님께는 그렇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가 그런 분으로 그런 일을 하셨기 때문에 또한 그가 그 일을 완성하신 방식 때문에, 그는 한 행동으로서 그것을 영단번에 이루셨다. 반복이 필요 없다.

앞으로도 반복이 있을 리 없다. 이와 같은 나는 “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아는 것이다.

* 강론일: 2010-07-14 * 제목: 9장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0-11)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의 사망의 관계에서 구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영단번에 이루셨다. 그는 둘째 아담이 아니다. 마지막 아담이다. 다른 아담이 필요치 않다. 그는 마침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는 영단번에 죽으셨고, 죄와 사망에 대하여 영단번에 그 관계를 청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그리스도께서 지금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체제에서 살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좌와 사망의 체제에 계셨었던 적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 다른 체제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체제에서만 살아계신다. 10절 상반절과 하반절은 대조를 이룬다. 우리 주님은 짧은 기간 동안 영광의 체제에서 벗어나 ‘죄와 사망’의 체제로 들어오셨다. 그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체제에 있지 않다.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다’(딤전3:16). 그는 완전히 그의 영원한 영광을 되찾으셨으며, 그가 나오셨던 영역과 체제 속으로 다시 들어가신 것이다. (계1: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엡1:20-23)“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진술의 상세한 해석에 나아가기 전 명심해야 할 세 가지 원리들이 있다. 첫째 원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들에게도 진리라는 것. 우리와 그는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함께 장사되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이라는 두 말이 그 점을 증거한다.

둘째 원리, 11절의 진술은 비체험적이라는 것. ‘여기라’는 말 자체가 그 점을 분명히 증거한다.

셋째 원리, 이 구절이 거룩한 삶과 성화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

“여기다”. ‘네가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라’ ‘너희 앞에 가져다 놓으라’ ‘결론짓다’의 의미. 쿠에이즘(자기 자신에게 계속 말하면 더 좋게 느끼기 시작할 거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우습게 만들고 만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설득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결론이요 추론이요 하나님의 논리적 귀결이다. 쿠에이즘의 반대요, 우리는 거짓된 개념을 제거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피할 수 없는 추론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친히 이루실 수 있다고 결론 지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정직성에 기초한 논리이다.

“너희 자신”. 우리의 본질적 인격의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별된 인격, 우리 모두를 구별되고 다른 사람으로 만든 인격, 우리라는 개인들을 의미한다. 나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것도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문제. 내가 결론지어야 되고 여겨야 되고 항상 내 안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처럼 남용되고 잘못 해석하는 구절이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다섯 가지. ① 그리스도인들로서 나의 의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죄를 위하여 죽었다고 믿으며, 그가 죄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에 대하여 즉는 것이 너희의 의무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나에게 사실인 것은 그리스도에게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말은 순전히 불가능하다.

②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명령도 아니요, 죄에 대햐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으니 그리스도인들도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강권적인 명령으로 해석하였다.

③ 내 안에 있는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죄가 죽었다고 여기라는 의미도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죄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고 하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체험에서 그와 같은 하나의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도의 진술은 죄가 죽었다든지, 죄가 우리 밖으로 근절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죄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다. 죄는 근절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체질 밖으로 뿌리 뽑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몸과 육신 안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④ 죄에 대하여 승리를 얻는 동안만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이다. 이들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정말로 죽어 있는 것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한 승리를 얻게 될 것이고, 승리를 얻는 동안은 죄는 실로 여러분이 관심을 두는 정도까지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승리를 얻는 길은 이 구절을 되뇌이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는 사실상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체험적인 면으로 넘어간 것이며, 우리 주님과의 병행구 때문에 체험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은 나의 체험과 일상생활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⑤ 나를 죄에 대하여 죽게 만드는 것은 이 사실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만일 네가 여기는 이 일을 계속하게 되면,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정말로 죽게 될 것이다’. 사도는 실제적으로 그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정확히 사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적극적인 이 말씀은 권면이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인정하고 여기라”고 하고 있다. 주 예수 자신에게 진리인 것이 우리에게도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을 ‘여기는’ 것이 아니고 사실인 것을 그렇게 여겨야 한다. 나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진 하나의 사실인 것을 여겨야 한다. 그 사실이란, 내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율법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이것-나의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은 단번에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나를 위하여 성취된 일이다. 나는,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합하여 세례받게 한 성령의 역사 때문에 이 지위로 오게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결과들을 거두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구절은 어떤 일을 성취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위하여 영단번에 이루어진 일을 깨달으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나의 체험에 관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있는 영역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나도 죄와 사망의 체제 가운데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전에 잠깐 동안 그 체제에 들어오셨다가 이제는 아닌 것처럼,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더 이상 그것에 속하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 밖으로 나왔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 상세히 다루어 나갈 큰 원리이다. 우리는 이렇게 ‘여겨야’ 한다. 이 사실을 우리에 관한 진리로 여겨야 한다. 그것은 체험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영원토록 죽었던 것과 같이, 나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고 그것을 내 앞에 끊임없이 견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영역 가운데서 살지 않고 다른 영역에 속하여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다.” 이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나의 서있는 위치요, 나의 지위요, 나의 신분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 이것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체제이다.

* 강론일: 2010-07-21 * 제목: 10장 죄의 왕노릇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죽음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해석의 원리; 1)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2) 이 구절이 체험인 진술이나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식의 차원에서부터, 죄를 어떻게 제거할까 하는 문제부터 시작하면 안 된다. 이미 우리들의 지위나 신분으로 확정된 사실을 깨닫고 부단히 우리 앞에 가져다 놓고 기억하라는 권면이다. 죄에 관하여 어떤 일을 하라는 권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가 단호히 믿어야 할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체험하지’ 않는다. 듣고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했던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믿고 그것에 복종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 안에 죄를 의식하면서 죄에 대하여 참말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직도 가공할 죄인임을 느끼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아브라함이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듯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①우리가 죄와 사망의 체제와 왕노릇에 대하여 영원히 죽었음을 부단히 인식하여야 한다. ②우리가 영단번에 그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고 인식해야 한다. ③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망이 그를 다시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망이 다시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진술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라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끊임없이 그것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확정하는 말씀들이 있다.

(롬8: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요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11:25-26)“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한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죽었으며 장사되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이 모든 구절이 바울이 여기서 ”사망이 다시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그의 진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망은 우리 주님을 더 이상 지배하지 않으며, 사망은 우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이 중요한 교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망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주도적인 권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사망이 우리에게 법적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통하여, 우리는 사망의 지배에서도 역시 구원받은 것이다. (히2:14-15)“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결코 사망의 두려움에 매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났을 때 가지고 있었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가 아직도 우리 몸 속에서 죄와 접촉하고 있지만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롬8:1)“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좌함이 없나니”라고 했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사망까지도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재림 때에 지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은 사망을 통과해야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법적 요구로는 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 속에 어떤 비통함이나 어떤 고통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잠자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품에 잠들게 될 것이다. 죽음의 공포도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롬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나이가 들어 중추신경이 흐려지고 두뇌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고 그런 상태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자기기 믿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독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는 사망을 통과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죽지 않는다.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순전히 육체적인 문제로 인하여 잘못 인도되는 일이 없기 바란다. 바울처럼 사망이 하나의 ‘유익’이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리라” 죽는 것이 유익하면, 죽음은 그에 대하여 어떤 지배도 가질 수 없다. 그는 죽음의 면전에서 미소지을 수 있는 것이다. 사망이 그를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즉각 인도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간주하여야 할 것들이요, 우리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는 것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차지할 영광이 무엇인지,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맨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실천적인 교훈을 얻는 것으로, 우리와 죄, 우리와 사망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죄가 다시는 나를 그의 노예나 포로삼지 못한다. (요일3: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계속 죄 가운데서 거하며 죄를 계속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 것은 그가 노예로서 짓는 것이 아니고, 그릇된 것을 하기로 선택하는 자유인으로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노예로서 ‘굴레에 매여’ 죄지으며, 포로로 잡혀서 죄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다. 새로운 영토에 속하여 있다. 그는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엄청난 의미이다. 산을 3분의 2쯤 올라가다 넘어진 것이다. 산 아래서 넘어진 것과 같지 않다. 죄를 지었으니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다. 다시 산밑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남은 높이를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죄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정상에 가까이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위이다.

그는 더 이상 그가 옛날에 있었던 곳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오르는 위치, 다른 체제에 속하여 있다. 그는 새 체제에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다시 노예 신분으로 가지 않는다. 그는 노예로서 죄짓지 않고, 자유인으로서 죄짓는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해방을 얻은 노예들에 관한 예.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났는데도, 특히 늙은 노예들은 자기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계속 잊곤 하였다. 습관과 관례에 따라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 모든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진리인 것을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라고 자꾸만 말하는 것이다. 굴레가 없어졌고, 이제 그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의 모든 지위와 조건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교훈에서 진수가 되는 부분은 그것을 인식함에 따라서 체험속에서 점점 사실이 되어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비그리스도인이었던 시절과 죄의 삶을 영위하였던 때를 돌이켜 보라. 죄에 대한 태도가 변하였다. 배교자도 하나님의 자녀요 타락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다르다. 그는 비참하고 정죄감을 느끼고 불안해 한다. 비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즐기며 좋아하기만 할 것이다. 배교자는 돌아올 것이다. 죄를 계속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멈추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죽음과 무덤을 향하여 똑바로 서서 그들을 도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 이기셨고,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며,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청산하였으며, 죄와 사망에서 자유로워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 강론일: 2010-07-28(수) * 제목: 11장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 책명: 로마서강해3권 —————————————-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적극적인 진리인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고 하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것은 영역의 변화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체제와 하나님의 영역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체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이 작용하는 체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5:21의 진술이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체제 속으로 살리심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는 바”(엡2:6) 되었다.

우리는 죄의 체제와 세력과 죄의 모든 왕노릇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은혜의 권세 아래 있게 된 것이다.

1)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을 우리 앞에 부단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섰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존전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그의 존전에 나아감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의 자녀요, 그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요, 그의 아주 특별한 관심을 받는 자들이다. 이를 완전히 진술한 구절은 요17:23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진술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엄청난 진술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2) 그래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 대한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롬5: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6:11은 5:2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다. 하나님의 최상의 선물과 하나님의 가장 값진 축복들이 우리의 것이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들’.

우리는 아담이 처음에 알았던 그 교제보다 더 큰 교제를 누리고 있다. 아이삭 왓츠,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후예들이 자기 조상 아담이 잃었던 것보다 더 많은 축복들을 자랑하네(찬송)”.

3)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안에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특별한 대상들이다. (롬8:28)“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창세전부터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위대한 계획 속에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 답변은 엡1:4에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구원계획의 전체 목적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흠이 없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4) 더욱 이 목적이 우리 안에서 역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신비스러운 방씩으로 그 안에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우리가 그에게 접붙여졌으며 그로부터 생명을 받고, 그 안에 있다. (엡4: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요6:35)가 되는 것이다. 중국 내지선교의 개척자였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가장 많은 해방을 주는 말은 ‘결코-아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그의 계획을 내 안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이” 하기 위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을 두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빌2:12-13)“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는 의지를 지배하시고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의 마음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모든 신자의 삶에는 그런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이 ‘역사하심’은 시작되고, 그로부터 계속되어 나가는 것이다.

③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엡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같은 능력이다. (엡3:20-21)“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순간 우리는 이 능력에 대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함을 내기 위하여 의도되고, 주 앞에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기 위하여 의도된 능력이다.

④ 그 목적이 완전히 이루어짐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함이라”(빌1:6). 어떤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만큼 확실하다. 어째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가?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를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성령의 목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것이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능력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결과는 보증되는 것이다.

5)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긴다면, 그 효과는 ① 다음 번에 죄에 빠지게 될 때에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자문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은혜 속에 있다가 또 밖으로 나가곤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구원받았다가 못받았다가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우리는 죄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훨씬 더 심각하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인 범법이 아니다. ② 죄에 대한 관계와 하나님께 대한 두 관계를 바르게 보게 될 것이다. 나의 느낌과는 상관 없이 나는 죄에 대하여 결별하였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체제 안에 살고 있다. 그 사실을 믿고 붙잡고 행동하라. ③ 이것을 깨닫게 되면 죄의 가공할 권능 때문에 느끼고 알았던 옛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 절망감을 제지하는 유일한 길은 로마서 6장 특히 이 11절의 가르침이다. 전체 그리스도인 삶 가운데서 가장 해방감을 체험을 알게 하는 것이 6장이다.

④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은 기쁨과 소망감을 안겨 준다. 우리의 지위를 깨닫게 될 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 거룩한 웃음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될런지 모른다. 느헤미야가 그의 절망적인 백성들을 깨우쳤듯이 ‘주의 기쁨’이 오게 되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힘이 되는 것이다”(느8;10). 나는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 영혼에 있다. 나는 더욱 더 강한 힘으로 변할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⑤ 현재 나와 이 세상이 어떻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표는 확실하고 명백하다는 것을 안다. 아무것도 그것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것이 로마서의 위대한 메시지이며, 성경 전체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기 ‘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광을 향하여 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나는 여러분에게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여러분이 죄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나니’ 라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당할 것을 준비하라. 그는 죄에 계속 거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요, 거기서 잡아 끌어 올릴 것이다. 질병으로 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자를 빼앗아 갈 수도 있다. 또한 사업을 무너뜨리실지 모른다. 또한 여러분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밝은 희망과 전망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그는 여러분을 먼지처럼 만드실 수도 있다. 그대로 방치하여 두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실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다. 그것을 깨닫기만 하면 자신 앞에 그것을 항상 놓고 잊지 않기만 한다면 앞으로는 실패하지 않게 할 것이며, 모든 것을 새로운 가운데서 보게 하고 사도 요한과 같이 장래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게 하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을 정결케 할 힘을 주실 것이다.

* 강론일: 2010-08-011 * 제목: 12장 신약의 성결 교훈방식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바울서신에서 “그러므로”란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다.

1) 교리는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란 말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1-11절에서 개진한 교리들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요13:17). 교리가 삶과 행동과 윤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심판 날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전13장).

2) 실천적인 대목은 이전 교리적인 대목을 바로 이해하였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하고 반드시 서로 상통하여야 한다.

3) 그리스도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알게 한다. 너희와 너희 죽을 몸, 분명히 이 둘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바울이 죄로 너희에게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하고 있다. 죄의 몸은 우리 몸에 남아 있는 죄를 의미한다. 글자 그대로 육신적인 몸이다. 그것은 죄짓기 쉬운 우리의 본성이 아니다. 저 위대한 칼빈마저 죄있는 본성으로 해석한다. 우리 자신은 구원 받았다. 죄는 여전히 몸에 남아 있다. 우리 자신은 이미 죄의 영역과 죄의 체제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러나 죄는 오직 몸에 남아 있다. 하지만 몸이 영화롭게 되고 죄가 완전히 끊어지고 영원토록 없어질 날이 온다.

바울의 모든 권면은 우리가 우리의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거나 통치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왕노릇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가 죽을 몸에 있을 동안에는 언제나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몸을 통하여 우리를 지배할려고 기를 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죄는 본능을 사욕으로 바꾼다. 자연적인 본능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죄는 자연적인 본능들을 비정상적인 정욕과 사욕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것을 막고 제지하여야 하며,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처리하지 못하면 죄가 곧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우리 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진술이 그렇게 많은 것은 이 진리 때문이다.

롬6:19, 7:18, 20, 23, 24, 8:23, 12:1, 고전6;13.

4)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학적 교리 로 우리들을 안내해 준다. 신약의 성화교리에서 제1의 원리는 우리가 실천에 옮겨야 하는 무슨 일이라는 것이다. 권면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성화란 위로부터 받아지는 선물이 아니다. 제2원리는 성화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런 구원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약의 교훈 방식은 ‘포기하라’고 하지 않는다. 행동하라는 권면을 한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의 고통은 죄와 싸우고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물론 당신은 패배한다. 거기서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포기할 것 밖에는 없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그로 하여금 네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도록 하라. 그분은 여러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며 당신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려움을 더 이상 겪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백여년 동안 복음주의적인 교단에서 일반화되고 편만된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과 “죄로 너희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될까? 그것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지의 행동을 요청하는 권면이다.

그 가르침은 비성경적이고, 실로 많은 성경적인 교훈을 무시한다. 그것은 신약의 후반부를 필요없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투쟁을 멈추고 주님으로 하여금 그의 승리하는 삶을 우리 가운데 살게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신서마다 상세하게 실제적 권면을 한다. 도적질하지 말라. 어리석은 변론을 버리라, 서로 거짓을 행하지 말라고 한다.

어떤 이는 묻는다. 당신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법 아래 있지 않으며, 죄의 권능 아래 있지 않으니 우리의 성화는 절대적으로 보장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 하실 거라고 우리를 설득하였다. 그것을 강조하여 놓고, 이제 당신이 말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려는가?”라고 묻는다. 조화시키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큰 일을 성취하신다. 그것이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빌2:12-13을 보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것이 신약의 성화 방식이다.

성화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성화는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아 교리로부터 추론들을 끌어냄에 따라 이루어져 나간다. 이미 설정된 교리의 결과로 어떤 것들이 필연적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하는가? 여러분의 죽을 몸에 있는 죄를 이기기를 갈망하는가?

첫째로 교리를 이해하라. 교리에 분명치 못하면 ‘그러므로’로 나아갈 수 없다. 1-11절의 말씀을 이해했는가? 교리를 이해하는 것-그것이 출발점이다. 교리를 이해한 뒤에도 그 교리를 부단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라’- 끊임없이 그런 것으로 간주하고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라. 그리고 나서 그것으로부터 필연적인 추론들을 끌어내라. “이제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나는 내게 일어난 이 모든 것에 비추어서 어떠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교리는 우리들에게 성결에 대한 참된 동기들을 제공한다. 어째서 내가 죄로 나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해서는 안되는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목적은 거룩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안다. 우리가 죄에 거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떻게 죄와 동행할 수 있겠는가? 동기들은 그러하다. 이것이 내가 성화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명예,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가 나의 행동에 달려 있다. 내가 내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게 내버려 둔다면 나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와 나의 구주와 내가 속한 하늘의 가정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다.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방식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며,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우리의 손에 하나님의 가정의 모든 명예가 달려 있는가를 말해주는 진리이다. 그 진리를 이치를 따져보고 행할 것을 알라고 한다.

진리는 나로 하여금 나의 놀라운 지위를 부단히 생각하게 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았다. 내가 “죄가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것들을 깨달을 때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적으로 모순되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고백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죄의 왕노릇을 허용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스스로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이 목적을 하나님은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고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 고린도 교회에는 죄로 자기 죽을 몸에 왕노릇 하도록 내버려 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6).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그는 이 목적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대적한다면 우리가 매맞고 징계당한다 하여도 놀라서는 안 된다. 그것이 병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 어 어리석고 더 야비한 짓이 어디 있는가?

성화의 권면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게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우리 속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교리는 이미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자보다 너희 안에 있는 자가 더 크다”고 말하였다. 어떤 핑계도 댈 수가 없다.

우리는 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죄의 왕노릇을 멈추게 할 지위에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피하리라”“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라”(벧전5:8,9)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를 정복하고 물리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적할 힘을 주셨다. 1-11절의 영광스러운 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러므로 죄로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아야 한다.

* 강론일: 2010-08-17 * 제목: 13장 우리를 하나님께 드림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내주지 말라”는 우리의 의지를 향하여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요, 할 수 있는 것이다. 성화하려면 무엇을 행하는 것을 멈추라고 하는 가르침과는 상충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죄를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잘못이고,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다만 투쟁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길 뿐’이라고 한다. ‘그럴 때 주께서 그 사람 안에서 그 일을 행할 것’이라고 한다. ‘가장 큰 오류는 죄와 싸우려는 시도이며, 우리의 할 일은 그런 노력을 중단하는 것이다.“ 13절 말씀과 이 가르침은 합치되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이 문제는 긴박하고 사활을 좌우하는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스스로 굴복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모든 삶을 소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13절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의지를 행사하여 어떤 일은 행하고 어떤 일은 행하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13절 말씀은 소극적인 부분과 적극적인 부분으로 나눠 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내주지 말라”.

죄는 언제나 자기의 기회를 고대하고 있는 큰 원수이다. 반드시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죄라는 이 원수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지체는 죽을 몸의 부분들이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기능과 성향들이 내재하고 있다. 지능, 생각하는 힘, 논리적인 능력, 상상력, 정서를 포함한다. 12절에서 하나로 묶어 죽을 몸에 대하여 말한 다음에, 이제 그 죽을 몸의 성분이 되는 부분들을 말한다. 이 몸의 활동 가운데서 어떤 간단한 부분이라도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인 죄에게 내어주어서는 안됨을 강조하고 있다.

“내주다”는 ‘임의대로 하게 내버려 두다’의 뜻이다. ‘불의’는 영원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대하여 반대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 몸의 어떤 기능이든지 죄의 도구로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힘과 에너지와, 내 말과, 내 욕구, 내 마음, 내 생각, 내 상상이나 내 감정이나-이 모든 것은 나의 부분들이고 내 인격의 표현이다. 어떤 것이라도 죄의 이용물이 되어서도, 죄를 위해서 쓰여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다. 죄와 마귀가 우리를 얻으려는 위협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리 몸의 체제를 얻을 수 없으면, 마음을 얻을려고 할 것이고, 그것이 안되면 상상력을 통하여 하고, 그것도 안되면 교묘한 방식으로 정서를 통하여 그 일을 시도한다. 우리 자신을 전체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반드시 지체들과 부분들도 조심해야 한다. 우리 중 이 특정한 권면과 명령을 유별나게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몸으로 아니했을지라도, 상상속에서 즐기는 것도 지체의 부분을 죄에 넘겨 주어 죄가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의 큰 원수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능력들과 기능들과 성향들이 그 자체로는 선하고 해롭지 않다. 그것들은 선하게 혹은 악하게 사용될 수 있다. 과거에 자기의 마음과 두뇌와 재간, 상상력, 말과 웅변의 은사 등,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죄의 종으로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은, 이제 정확히 같은 힘들을, 의와 하나님께 대하여 무기들과 종들로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가 중생할 때 새 ‘지체’ 새 기능들을 받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과 같다. 차이는 그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죄의 편에서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사용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권면은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치 말라, 어떤 기능이나 힘도 죄가 애용하도록 결코 허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1~11절에서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같이 우리도 죄에 대하여는 영원히 죽은 자요, 사망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영원히 단번에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드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

기독교와 도덕의 차이는, 도덕은 하지 않아야 할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기독교는 언제나 적극적인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죄에게 드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드릴 수 있다. 어째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 같이”. 그리스도인 외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는 없다. 불신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땨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부활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

“드리라”는 ‘그를 봉사하는데 자신을 내어준다’, ‘자신을 그의 뜻에 맡긴다’의 의미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임의대로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특권인지 알고 놀란 일이 있는가? 우리는 살았기에 하늘 군대의 성원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십자군에 종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후5: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는 말씀도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왜 자신을 드린 후에 우리 모든 지체들과 모든 기능들을 드리라고 하는가? 이것은 성화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자신을 드렸어’하고는 지체들을 드리는 것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에 율법폐기론으로 떨어지고 만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뿐 아니라 지체들 모두를 남김없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의 모든 됨됨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우리가 희망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맡겨져야 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의 영광과 찬양을 위하여 산다. 하나님의 계획은 의로우시다. 우리의 지체는 ‘의의 무기’로 드려져야 한다. 적극적으로 또한 능동적으로, 우리는 이 의의 십자군, 하나님의 십자군인 진리의 십자군에 종사해야 한다.

성화와 성결 방식에 대한 신약적 교리와 관련하여 중대한 원리들 이 이 구절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우리가 성결과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죄와 극렬한 싸움과 전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성결 교훈이 우리의 주관성을 기초로 가르쳐지고 있다. ‘여기 투쟁하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패배하고 불행한 내가 여기 있노라’ 하는 식이다. ‘진료소로 오라’고 광고한다. ‘당신이 필요한 것은 진료소, 영적 병원으로 오는 것이며, 여기서 당신의 질병과 아픔이 치료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의 구절들을 볼 때 어떤 진료소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병원, 막사가 아니라 전쟁터를 발견한다. 의사가 아니라 주임상사가 필요하다. 연병장에서 단정치 못하게 걷고 있다. 비참하게 느끼고 자신의 연약에 대하여 말한다. ‘나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소리쳐 알려주는 특무상사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이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을 일이 없다.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군대에서 우리가 어떤 신분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인식하자. 너희 자신을 바쳐라. 이곳은 진료소가 아니다.

오늘날의 기독교회의 주요 문제는 교회가 진료소나 병원과 같은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는 데 있다.

우리가 영혼의 볼거리와 홍역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자신에 대하여 말하며 우리의 기분과 주관적인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와 악의 나라와 대항하여 싸우는 의의 왕의 생각을 잊었다. 사람들은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하기를 잘한다. 저는 대답한다. 위대한 (성경말씀의)켐페인을 바라보시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시오. 잠깐 동안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잠시 당하는 고통을 잊으시기 바란다. 군대 안에서 싸우시기 바란다. 필요한 것은 진료소가 아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우리가 전투장에 있으며 우리는 한 장엄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화는 섬김의 문제이지 내 주관적 기분이나 상태의 문제가 아니다. 내 느낌, 내 실패, 내 성공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성결은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의 문제이다 . 우리의 존재 전체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 중 어떤 부분도 죄를 섬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원수와 화친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성결을 가르치는 신약적 방식이다. 우리들 거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진료소가 아니라 자기 부하들을 통솔하는 특무상사의 말과 명령과 경고와 경계를 듣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교훈은 그처럼 오랫동안 성결과 성화교훈을 지배하여온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성화는 쉽지 않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신약성경은 말한다. “담대하라, 남자답게 굳세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악한 일에 맞서라”. 이런 것들은 전부 군사적인 명령이다. 진료소와 병원을 생각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개시하신 큰 작전의 차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그 작전에서 하나님은 승리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로다”(롬8:37).

우리의 마음의 맨 윗층에 자리 잡아야 하는 생각은 왕과 그 왕을 위하여 일하는 것 이다. 내 영혼의 상태와 조건은 나와 그와의 관계 만큼 크지 않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의 나라에 내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 무기력하고 감상적인 생각,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병적인 생각, 우리를 돕는 것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접근방식을 전부 없애 버리시라!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악한 것이다. 오히려 사도가 여기서 표현한 바대로 강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위치를 바라보자. 사도 바울은 실로 어느 곳에서나 성화의 문제에 관련한 가르침에서 언제나 그것을 지적한다. 우리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면, 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죄가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도 못하게 할 것이며, 어떤 지체나 어떠한 기능이라도 ‘불의의 무기’로 죄에 드리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 강론일: 2010-08-25 수

* 제목: 14장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상기함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2-14)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성결과 성화에 관련한 신약 교훈은 특징적인 원리들을 설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첫째 원리, 성결과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부터 출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진료소, 병원으로 여기고 있다. 오히려 교회는 병영 막사와 같은 곳이다. “남자답게 굴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어려움을 참으라” 이러한 권면들을 신약성경에서 부단히 발견한다.

둘째 원리, 이 문제를 하나님을 섬기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이요, 도구요, 무기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고무되기만 하면 개인의 성결과 성화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우리의 영적 상태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우리는 부르심의 차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나라에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널리 만연되어 있는 불건전한 진료와 주관적인 접근방식에 대한 건전한 신약적 접근방식이다.

셋째 원리, 신약은 언제나 성결 교리와 성화 교리를 나타낼 때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 1-11절까지 이 일을 해왔다. 그리스도가 죄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에게 속한 우리도 역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라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새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처럼 드리십시오. 우리는 우리 속에 새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와 같은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불신자는 자신의 힘과 능력 밖에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새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죽을 몸 안에 있는 죄와 우리 밖에 있는 죄를 저항할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그렇게 말하며, 아주 담대하게 죄를 저항하라고 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게 권면하고 명령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할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생명과 능력과 힘과 권능을 받았기 때문에, 신약이 아주 논리적으로 조리가 맞게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지체를 죄나 불의를 위한 무기로 드리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다른 무엇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을 위하여 그것을 하실 수 있도록 하시오”라고 가르치는 병원이나 진료소로 가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는 싸워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믿고,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능력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화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생각나게 하고, “자, 이제 가자, 그 일을 하라”고 말한다.

넷째 원리, 다른 모든 것을 생각하기 전에 언제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죄인 중 괴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제일 큰 관심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성결이 아니다. 우리의 첫째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에 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서를 뒤바꾸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 관해 너무 많이 관심을 기울인다. “나는 여기서 죄와 싸우고 있으며, 패배한다. 죄가 너무나 힘이 센데 비해 나는 너무 약하다. 어디에 나를 이기게 하는 방법이나 다른 무엇을 가르치는 교훈은 없는가?”

‘나는 승리의 생활을 원하고 해방되기를 원한다’ ‘나는 이 ~을 원한다’.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요, 모두가 주관적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우선적이면서 최고로 생각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이 방식으로 삶을 바라볼 때만 이다. 거룩함에 대한 참된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비참하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거룩해짐의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거룩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6). 우리는 제1차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해져야 한다. 성결과 성화에 관한 어떤 교훈들은 하나님의 영광부터가 아니고 우리와 우리의 필요들로부터 출발하는데, 이것은 비성경적이고, 심각하게 비영적이다. 제가 볼 때 그런 주관적인 접근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수년동안 방황하게 하는 것 같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 그런 타이틀 자체가 그릇된 접근을 암시한다. (handbook to happyness,영적치유의 핵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가 더 훌륭하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상태와 감정들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 아마 성결의 가장 높은 수준은 욥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 도달되는 것이다. (욥13:15)“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하나님의 영광이여!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에서 맨 먼저 눈에 띄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성결과 성화에 관한 모든 관심의 최고 이유여야 한다.

14절은 중요하면서 영광스러운 진술이다. 6장의 첫 번째 대목의 마지막 구절이다. 1절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이요, 첫 대목의 요약이다. 잘못된 해석은 12,13절에서 말한대로 행하면 그 결과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다.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나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이다. 바울이 이미 하라고 한 일을 하도록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12,13절의 권면과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근거를 말한다. 어째서 내가 죄로 나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내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아야 하는가?

대답은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엄하고 적극적인 권리주장이다.

바울은 현재 나에게 사실이고 미래의 내게 사실이 될 것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죄가 우리를 주장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말한다. 죄가 여러분을 주관치 못할 것이다.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그 은혜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그 은혜는 정복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하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죄에서 완전히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완전하고 흠없고 부끄러울 것이 없이 영화된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성결에 대하여 가장 큰 자극제가 되는 것은 신약에 의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 안에서 성결을 이룩하게 하는 신약적인 방식이다. 신약은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신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진리들을 깨달으라. 그 진리들을 깨달아 죄를 대적하여 서라.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말게 하라. 너희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라. 너희가 은헤 아래 있고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과 영화가 확실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성결을 북돋아 주고 자극하고 고양시키는 것은 없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에 전적으로 동조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여러분은 병원이나 진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교육과 이 정보와, 이 명령이 필요하다. 은혜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라. 다시 새 언약의 조항들을 읽어 보라. 그리고 권리증서를 읽고 그것을 자랑하는 자처럼 살아가라. 자기의 모든 침체와 절망과 낙담을 잊어버리고, 장차의 영광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나는 영광을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것을 고대하고 있어. 나는 서둘러서 그가 정결하신 것처럼 나 자신을 정결케 해야겠어. 난 장차 올 그 큰 날을 준비해야만 해, 그래서 내가 그 앞에 서게 될 때 부끄럽지 않아야지”. 성결과 성화의 가장 큰 촉진제가 이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방식이다. 이것들을 깨달으라. 이것들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를 볼 것이고, 그와 같을 것이다. 여러분의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은 죄를 미워하고 죄에 속한 모든 것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죄를 저항하고 “마귀를 대적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여러분을 피할 것이다”. 여러분의 좌우명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니라”가 될 것이다.

* 강론일: 2010-09-01 수 * 제목: 15장 생명으로 설명된 소유권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5-16)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장의 첫 대목인 1-14절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였다면 성화에 관한 신약 교훈의 진수를 포착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성화와 영화를 보장한다. 성화는 체험이 아니고 성경의 권면들을 행하는 것이다. 이 교리들을 알고서 그전보다 죄를 더 미워하게 되었는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대면할 때 새로운 확신을 주었는가? 은혜 안에서 자라는 일과 주를 아는 것에 진보하였는가?

그것이 진리로 거룩하여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리를 아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전체 태도를 변화시킨다. 죄가 우리를 공격하고 넘어뜨리려고 위협할 때, 이 진리를 앎으로 죄를 정복하고 이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죽을 몸에 남아서, 세상과 마귀 안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죄를, 더 큰 확신과 더 큰 확증과 더 큰 승리감으로 저항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제까지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 교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발로 서서 자기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하는 교리이다. 또한 이 교리는 은혜의 왕노릇의 능력 아래 그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교훈은 그로 하여금 승리케 하고, 그의 승리를 즐거워하게 한다.

이재 두 번째 대목(15~23절)으로 넘어 온 것이다. 바울은 진리에 충성하였고 교리를 설교하였기 때문에 무섭고 극심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법 없이 은혜 아래 있다고 하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예나 지금이나 이 교리가 지극히 위험하다고 한다. 법 없는 방종과 무범함을 조장할 거라고 한다. 또한 이 교리로 인하여 율법폐기론으로 빠져드는 자들이 있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이신칭의를 전혀 설교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와 도덕을 설교할 뿐이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죄 짓다’의 바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고집스런 죄를 의미한다. 죄의 상태에 계속 머물고, 계속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나 가끔 죄 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정된 죄의 생활을 의미한다. ‘죄와 함께 동행하는’, ‘죄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 죄 안에 계속 거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요일 3장의 ’죄짓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아는 것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실족케 하는 것은 없다.

“법 아래”. 율법을 지키느냐 한지키느냐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그는 법 아래 있다. 그는 자기의 공로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우리 구원이 우리 행위와 공로로 결정된다는 입장에 우리가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것이요,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런 추측 자체가 전혀 생각조차 할 값어치가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사도가 쓰고 있는 단어는 종이 아니라 노예이다. 그는 사실상 사람의 죄의 노예든지 은혜의 노예든지 하라고 말하고 있다. 6장의 전체 논증은 ‘은혜의 왕노릇’과 ‘은혜의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노예주, ㄸ또한 노예 주인의 의하여 행사되는 것 같은 권세이다. 죄는 그러한 권세를 행사한다. 은혜도 그러하다.

“혹시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에 대칭하여 순종이란 말을 놓고 있다. 아주 의도적이다. 그 목적은 한 순간이라도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메시지에 사람이 죄의 삶을 영위케 하는 것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이하고 기괴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무법하다거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법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법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 것이라고 저는 답변한다. 오히려 그것은 순종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율법 없는 자가 결코 아니지만, 옛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무율법주의자’ 라는 의미도, 전혀 율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이런저런 율법 아래 있다. 이 모든 것은 순종이라는 말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순종이라는 말은 사도가 16절에서 죄의 반대로 사용한 말이다.

흥미로운 요점이 있다. 사망의 반대는 생명인데 사도는 ‘의’를 말하고 있다. 의도적인 것이다. ‘의’ 대신 ‘생명’을 썼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충돌되었을 것이다. 순종이 생명에 이른다고 말한다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6장 마지막 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한다. 영생은 순종의 결과가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순종이 의에 이르고, 순종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영위케 하였던 의의 생활로 인도한다고 말한 것은 아주 옳다.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순종은 바로 그 의로 인도한다.

16절은 논증인데 몇가지 전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우리 자신들을 어떤 권세에 드린다면 그 세력의 노예가 된다. 내 자신을 어떤 권세에 판다면 나는 그 권세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내가 속하게 되는 권세는 자기의 노예를 향하여 주는 소유주의 권세이다. 전체적이고 독재적인 권세이다. 그 권세는 내가 행할 바어ㅘ 내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결정한다. 둘째, 두 궁극적인 전제주의적 세력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죄요, 하나는 순종이다. 이것이 사도의 대주제이다. 그는 5:12부터 그것을 시작했다. “두 지위만 있을 뿐이다.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도 안에 있든지 뿐이다”. 5:21에서 “죄의 왕노릇 아래 있어 사망에 이르든지, 은혜의 왕노릇에 속하여 의에 이르러 영생에 이르든지 둘 중 하나이다.” 중간지대란 없다. 모든 인류는 죄의 노예든지 순종의 노예든지이다. 셋째, 죄와 순종, 이 두 세력은 전적으로 다르고 서로 철저하게 반대되어 있다. 이것이 논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둘 다 노예 소유주요 상전이다. 죄와 순종의 차이는 마귀와 하나님의 차이이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이다. 이 편은 무법천지와 모반이요, 저편은 하나님의 의와 진리이다. 본질상 그들은 영원토록 반대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을 산출하고 순종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인 의를 산출한다. 넷째, 둘의 노예가 동시에 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은혜의 노예이면서 동시에 죄의 노예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충돌하고, 서로 배제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에게 속한 노예가 될 수 없다”(마6:24). 다섯째, 결국 우리가 행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의 지위가 무엇인가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바로 인하여 이다! 그의 생황방식이 죄의 왕노릇 아래 있는지, 은혜의 왕노릇 있는지를 보여준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그들의 열매로 알아 보아야 한다. 선과 악은 섞이지 못하고 섞을 수 없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듭나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 안에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순종과 의와 거룩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여준다. 그것은 죄를 계속 짓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거니와”(요한12서1:6).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2:4).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성결과 성화를 가르치는 방식이다. 진료소에서 편안히 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죄의 노예든지, 순종의 노예든지이다. 너희 신앙고백이 어떠할지라도, 너희의 이해와 지식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의 열매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웃음거리요, 거짓말이요,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거짓된 도전을 해오는 자를 변박하고 물리치는 방식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는 그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방식에 의하여 그가 누구의 노예인지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것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은 그 안에 나쁜 열매가 아닌 좋을 열매를 내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은혜의 노예요, 순종의 노예요, 하나님의 노예라면, 그것을 저절로 나타날 것이며, 반드시 순종하는 행위와 거룩한 행동에서 스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왜냐하면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고, 은혜가 자기의 목적을 이룰 것이며, 무엇보다 순종과 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 강론일: 2010-09-08 * 제목: 16장 믿음과 순종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성경 가운데 크게 뛰어나고 가장 중요하고 중추와 같은 구절. 15절의 질문에 16절의 보편적 원리로 답하고 그것을 17절에서 적용하고 있다. 우리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어 하는 두 세력이 있다. 누구든지 동시에 이 두 세력 모두 아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16절).

17절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보여준다. 세 원리로 나누어 강해한다.

1) 그리스도인은 큰 변화를 이룩한 사람이다. ‘너희’가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아니하다. 너희는 이제 전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5:12-21에서 바울은 우리가 아담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아담의 본성을 물려 받은 것을 입증하였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본성으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는 어떤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필요가 있다.

신약은 너희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삶의 개선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고 한다. 중생, 새로 지음받은 것이 진수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창조물)이라”. 이것은 구원에 관한 신약의 전형적이고 특이한 용어이다.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변화의 크기이다. 우리는 반드시 일어난 변화의 위대함에 대한 어떤 합당한 변화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이다. ‘너희가 순종하였다’-의지가 있다. ‘마음으로부터’-정서가 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이지가 있다. 기독교가 이단이나 거짓 종교와 운동과의 차이이다. 이지와 지성에만 흥미를 느끼는 철학자들이 있다. 감정과 정서의 영역에만 감동시키는 운동들이 있다. 의지에만 직접 호소하는 윤리적인 교훈과 운동들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1:11)은 어찌나 크고 위대하든지 그것은 전인을 수반하고, 전체 인격을 다룬다. 우리의 마음과 이지와 의지가 감동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2) 이 변화가 너무 커서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본질상 죄의 노예였다. ‘죄의 종이더니’.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시편)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였다. 자연인이 자유를 운운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애석한 것이 없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죄의 노예로 태어났다. 노예라는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영광스런 복음을 믿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노예 주인이 그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니’. 우리는 모든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식들이다. 전적인 죄의 노예요, 마귀의 노예요, 어두운 나라의 노예이다. 물론 노예 중에 난폭한 죄를 짓지 않는 훌륭하고 의젓한 노예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해야 할 일’에 얽매여 있다. 관습의 노예요, 사회의 노예이다. 마귀는 우리가 노예인 이상 외모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른 쪽이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전에는 그러하였으나 이제 더 이상 결코 그렇지 않다.

너희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노예이다.” 18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것.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사람은 언제나 노예이다. 그는 죄의 노예로 태어났고, 두 번째 출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사람은 죄와 사단의 노예이거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거나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신자는 전에 옛 어둠과 죽음의 나라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의 나라의 법과 권세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는 마귀에게 속하여 있었으나 이제는 의와 순종과 하나님 편에 속한 모든 것의 종이 된 것이다. 이 점이 분명한가? 가장 큰 변화이다.

이 큰 변화가 어떻게 오는가? 하나의 즉각적인 매개체는 ‘교훈의 본’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교훈의 본이란 ‘교리의 형태’, ‘교리의 양식’이라고 변역할 수 있다. 이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고통이 오고 부흥이 지체되는 것이다. 교훈의 본의 본질, 내용이 무엇인가? 단순히 죄사함의 메시지 만은 아니다.

복음전도의 메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롬1:16-18)“(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복음 전도에서 죄문제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지 않아야 한다. 그 다음에 구원을 성취하려고 하는 인간의 사력을 다하는 노력인 전적으로 소용없음을 말해야 한다. 바울은 1,2장과 3장에서 이 일을 한다. 그 다음에 이 완전한 절망과 소망없음과 낙담 가운데서 피할 길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것이 메시지요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이다. 그것이 그 큰 변화를 가져온 즉각적인 매개체이다.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가? 하나님의 성령은 이 말씀, 메시지, 이 교훈의 본을 가지사 우리를 그 속에 넣으시고, 그 교훈의 본이 우리에게 역사한다. 부분은 우리를 짓되 그 모양 그대로 지었다. 성경과 복음의 말씀은 즉각적인 매개체요, 사용된 기구이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과 확실성은 내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가 나를 옛 죄의 틀에서 건져 내어 이 새 틀에 넣었다는 바로 이것이다. 새 틀은 그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가 완전해지기까지 그 속에 나를 넣어두셨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여 우리를 짓기 시작하면, 그는 중도에서 그만 두고 떠나시지 않는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함이라”(빌1:6). 나는 결국 ‘점이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그런 것이 없을 때에야’ 그 틀에서 나올 것이다. 나는 완전해지고, 거룩해질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다.

3)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교훈의 본’을 믿었다가 아니고 순종하였다고 말한다. 교훈을 지적으로 믿기만 하는 것은 생명에 아무런 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아직도 죄의 노예들이요, 전적으로 육신적인 사람들이면서 성경읽기를 즐기고, 다른 이들의 말잇기 퍼즐하는 것처럼 교리를 가지고 희롱하는 자들이 있다. 칭의와 성화를 따로 떼어 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적적으로 악한 것이 없다.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보편화된 가르침이다. 성화도 칭의처럼 믿음으로 받으라고 한다. 그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에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은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이다. 필연적으로 어떤 변화된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최고 목표는 단순히 우리를 용서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니” 무엇을 위하여?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무엇을 위해?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믿어 순종케 하려고”(롬16:26).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순종이다. 순종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믿음은 어느 것이든지 쓸모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순종한다. 순종은 더디거나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그 요구에 있어서 너무 엄중하다고 느끼는 것은 불쌍한 일이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깊은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그는 교훈(교리)의 ‘틀’속에 있다.

그것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회개할 것과, 죄를 떠나 ‘임박한 진노를 피할 것’,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한 노예요, 행복한 노예이다. 따라서 그의 최상의 욕망은 하나님과, 우리 죄 때문에 세상에 오셨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죄의 노예들이었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출되어 이 신성한 틀, 교훈의 본에 넣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그의 모든 지시를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다.

* 강론일: 2010-10-1 금 * 제목: 17장 새생명의 원리 * 책명: 로마서강해 3권 —————————————-

(롬6:16-18)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6,17절에서 자기의 논증을 매듭 짓고 18절은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요약한 것이다. 18절이 진리이니까, 19절의 호소를 할 수 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18절은 권면이 아니다. 스스로 죄에게서 벗어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지위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두 번째 체험에까지 나아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진리인 것이 아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를 문자 그대로 우리 속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죄가 남아 있지 않다거나, 우리는 완전히 죄와 관계를 끊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된 본성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옛 사람’과 죄의 본성 사이의 구분을 기억하라. 우리는 옛 사람과 영원무궁토록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본성에 관해서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12절에서 상고한 바와 같이 죄의 본성은 아직도 우리의 “죽음 몸에” 남아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시험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결코 ‘죄된 몸’,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죄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 우리는 의의 노예이고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벗어났고, 구원받았으며, 더 이상 종의 지위에 있지 않다. 17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어떤 사람도 죄의 노예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분명히 위대하고 중대한 진술이다. 그것은 6장 전체의 논지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권능과 왕노릇하는 세력으로서의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는 더 큰 세력에 의해서 그로부터 해방되었다. 적극적인 국면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잘된 번역은 ”너희가 의에게 노예로 인치게 되었느니라“이다. 여기서 의란 단순히 도덕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원래의 의, 가장 고도의 도덕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옳음, 성결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의에게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의 권세와 통치와 의의 영향 아래로 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생하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켜 놓는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비성경적이고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죄의 노예인 것을 멈추는 순간부터 우리는 의의 노예인 것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한쪽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른 쪽에 있는 것이다. 다시 난다는 것은 새생명의 윈리가 우리 안에 놓여진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의의 원리이다.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시 우리 속에서 일하기 시작한 원리요, 그것은 신적인 권능과 함께 일한다. (빌2:12-13)“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약4:5)“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으시는데 그것은 의의 씨앗이다. 그것이 우리 속에서 일하고 있으며, 성령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점없고 흠없게 되기까지 그 과정은 계속되어 나갈 것이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일을 행하신다.

어느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하지 않는다면 징계와 벌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황폐하여질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신적 사역의 전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케 하며 거룩하게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진리를 통하여 못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의의 노예 신분 아래 있으며 그래서 그가 그것을 시행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지위이다. 우리는 틀 속에 넣어지게 된 것이다. 은혜가 우리를 꽉 붙잡았으며 우리를 죄의 사슬과 죄의 왕노릇에서 건져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영광스럽게 포로로 잡히게 했다. 그것은 의에 대하여 노예가 되게 하였다. 그것은 은혜의 권능이요,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은혜의 왕노릇’이다. 우리는 그 은혜의 위엄과 견고한 팔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구속은 도덕에 대하여 필수적이다. 사람은 본성으로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엄청난 죄의 힘에 의하여 조정받는 강력한 충동을 가진 피조물이다. 그는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며 죄의 왕노릇 아래 있다. 지적 휴메니스들은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믿는 것보다는 훨씬 부도덕하다. 완전히 자기중심적이다. 죄는 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가공할 능력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어둠을 사랑하며 그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빛을 싫어한다. 본성적으로 완전히 소망이 없다. 선한 충고나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구원할 어떤 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의 근본적인 필요는 선한 것을 행할 힘이다.

역사적 증거가 있다. 구속 교리의 진리를 가장 깊이 깨닫던 시대가 영국이 아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다. 가장 최선의 법과 질서와 도덕에 대한 최고 관심을 보이고 선한 행실과 행동을 가장 많이 나타냈던 때가 개신교 개혁이 있은 바로 다음 세대인 엘리자베스 시대였다. 또한 청교도 시대에 도덕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구속교리를 믿고 그 교리들에 지배되고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을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에서 구한 것은 구속의 교리들을 믿었던 웨슬리의 복음적 대각성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개인들의 증거도 있다. 죄의 노예였으며 전적으로 어리석고 야비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새 삶을 영위하였다는 역사의 큰 증거들이 있다. 그들이 믿었던 구속의 교리가 그들의 삶에 큰 능력으로 임한 것이다.

지적으로 학문적으로 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현명한 신사들이 완전히 실패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절망적인 실패자를 구원할 유일한 힘은 구속의 힘뿐이다. 하나님만이 그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데 있다. 신약성경의 교리들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말하는 교리들이다. – 성육신의 교리, 구속의 교리, 대신 속죄의 교리. 새생명과 새 본성과 새 탄생과 새 출발을 주신 것을 가르치는 중생과 회심의 교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우리 속에 살게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힘을 주신다는 교리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구원받고 자기 발고 서게 되는 방식이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오직 이들 기독교 교리들로 말미암아 알 뿐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구원도 없고 도덕성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율법으로도 “죄를 깨달을 수”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것이 들어왔고 이 구속, 이 하나님의 은혜, 이 의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값없는 은혜로 임하였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왜냐하면 우리안에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도덕과 성결을 향한 욕망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구속이 도덕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고 하지만, 신약성경은 구속이 사람 속에 의를 향한 주림과 목마름을 창조해낸다고 말한다. 신약은 구속이 도덕과 성결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삶의 최고 동기, 소위 사랑과 감사의 심정을 산출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행하셨음을 깨닫는다. 또한 은혜에 보답하려고 한다. 도덕과 성결에 대한 가장 위대한 자극은 우리를 위하여 죽었고 우리 대신 자신을 내어 주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속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힘을 공급한다. 모든 성도들이 증거하고,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이 완전하게 증거한다. 아이삭 왓츠, “아, 놀랍고 신기한 사랑에 내 혼과 생명, 내 모든 것을 다 드리네”. 이것은 강제가 아니다. 즐거운 자유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다. 그것은 고역이 아니다. 그를 섬기는 것은 완전한 자유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주를 기뻐한다는 것은 구속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것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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