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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의 죽음 | 바울의 순교 장면 12702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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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전도 여정에서 유대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몰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파선도 세 번이나 당했다. 밤과 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며 표류한 적도 있었다. 바울은 결국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 때 로마에서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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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마지막 생애와 순교 – 다음블로그

사도 바울의 마지막 생애와 순교 한낱 죄수로써의 로마에서의 바울의 재판은 선뜻 고소자가 나타나지 아니한데다가 네로는 물론 그 재판관들 마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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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4/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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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사도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가? – GotQuestions.org

사도들의 죽음에 관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교회의 전통적인 이야기는, … 사도 바울은 주후 67년에 로마의 악한 황제인 네로에 의해서 고문 당하고 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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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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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출생과 순교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누가에 의하면 바울은 소아시아의 동남쪽에 있는 로마제국의 지방 행정 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행 22:3). 또한, 바울은 출생할 때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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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8/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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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탐방]사도 바울이 걸은 마지막 길 – 뉴스파워

사도 바울의 참수터를 찾아가는 나의 마음에도 애통하고 안타까운 비가 내렸다. … 사도행전 등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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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power.co.kr

Date Published: 2/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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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순교한 오스티아(딤후 4:9-13을 묵상하며)

…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렐리아 성문을 나가 에우르(Eur) 방향으로 가면 바울의 순교한 장소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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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2/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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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사후관 – 죽음과 죽음 이후 (3) – 에큐메니안

주제로 읽는 성경, ‘죽음과 죽음 이후’, 오늘은 사도 바울의 사후 세계관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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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cumenian.com

Date Published: 12/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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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성경은 각 사도들의 죽음에 대해 …

그 때 요한은 밧모섬에 있는 감옥에서 광석 캐는 일을 하도록 처벌받는데, 그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씁니다. 사도요한은 후에 석방되어 현재의 터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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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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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고고학 이야기(7) > 교회와목회 | (재)기독교서회

(행 9) 그때부터 죽음은 바울의 곁을 바짝 따라 붙었다. 바울을 변심한 것으로 본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행 9:23) 다마스커스를 탈출한 바울은 그때부터 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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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lsk.org

Date Published: 7/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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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순교 장면
바울의 순교 장면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도 바울 의 죽음

  • Author: 여호와로이2TV
  • Views: 조회수 7,64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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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1.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LfBjhxj0iD0

사도 바울의 길을 따라서 <하> 바울의 생가에서 만난 바울

그리스도교에서 ‘바울(바오로)은 칼’로 통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성령의 칼은 하나님(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했다. [성 바오로 수도회 제공]

이달 1일 터키 남부의 해안도시 다소(타르수스)로 향했다. 2000년 전, 다소는 로마 식민지였다. 지중해에서 가까워 교역이 활발한 큰 무역도시였다. 사도 바울은 거기서 태어났다. 덕분에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서 자랐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동시에 로마시민권자였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굳이 요즘으로 치자면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재미동포’쯤 되는 셈이었다. 그건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시선과 그의 죽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 제국은 이방인에게만 십자가형을 선고했다. 예수와 베드로가 십자가형에 처해 진 것도 로마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그는 십자가형이 아니라 참수형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너무도 모욕적인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권자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울은 지독한 유대교 율법주의자였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됐을까. 바울은 터키와 시리아, 그리스를 훑으며 무려 7만㎞를 달렸다. 목숨을 건 전도 여정, 그 에너지의 원천은 어디였을까. 바울의 여정을 좇는 순례길, 그걸 찾고 싶었다.

다소에 있는 바울 생가 터의 옛 우물. 순례객들이 생가 터에서 바울의 자취를 더듬고 있다.

◆바울의 고향, 다소=버스는 터키의 광활한 들판과 산맥, 호수를 지났다. 그리고 바울의 고향, 다소에 도착했다. 보슬비가 촉촉이 내렸다. 도시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우산을 받쳐들고 바울의 생가 터로 갔다. 마당에는 옛날에 쓰던 우물이 하나 있었다. 순례객들은 손으로 줄을 돌리며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물이 무척 맑았다. 순례객들은 두레박에 든 물을 마시며 ‘바울의 자취’를 더듬었다.

바울은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이렇게 생긴 거리를 걷고, 저렇게 생긴 나무 아래서 쉬었을 것이다. 바울의 집안은 천막을 만들어 팔았다. 지금도 다소에는 염소 가죽을 이용한 천막제조업이 성하다. 바울의 집은 부유한 편이었다. 당시 다소에도 큰 대학이 있었으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갔다. 정통 유대교 교육을 받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생가 터에서 나왔다. 거리를 걸었다. 생가 터 옆에 공원이 하나 있었다. 공원의 입구에는 터키어로 ‘SAINT PAUL PARKI(성 바울 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울과 예수, 그리고 12사도들은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는 예수를 본 적도 없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됐을까.

◆스테파노의 죽음과 바울=예수가 죽은 지 2년쯤 지나서였다. 예루살렘에 있던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좇던 스테파노(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다.

스테파노는 유대 법정에서 “예루살렘 성전 예배는 우상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며 유대교의 율법을 정면으로 비판하다가 성밖으로 끌려나가 돌에 맞아 죽었다. 바울은 그 현장을 지켜봤다. 스테파노는 사람들이 돌로 칠 때도 무릎을 꿇고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던 예수의 목청과도 통했다.

스테파노의 죽음은 바울에게 무엇이었을까. 바울은 충격을 받았을까, 아니면 분노했을까. 스테파노의 죽음을 통해 바울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다시 보기 시작했을까. 구원의 통로라고 믿는 유대교 율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도 저렇게 당당하고 온화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니. 어쩌면 바울에게 그 죽음은 거대한 물음표가 아니었을까.

그 사건 직후 예루살렘에선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이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외곽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바울은 그들을 쫓았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감옥에 처넣었다. 바울은 다마스커스(현재 시리아 영토)까지 쫓아갔다. 거기서 바울은 말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사울(바울의 유대식 이름)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은 그 목청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다소의 거리를 걸으며 그 순간을 묵상했다. 그랬다. 그건 바울의 율법, 바울의 신념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종교의 율법과 계율은 늘 방편이다. 그걸 너무 세게 움켜쥐면 이념이 되고 만다. 율법이 이념이 될 때 신앙은 박제가 된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늘의 음성을 통해 바울에게 던져진 물음은 ‘예수냐, 율법이냐’였다. 그건 갈림길이었다. 숨 쉬는 생명이 될 건가, 아니면 율법의 박제가 될 건가.

◆바울의 물음, 바울의 회심=하늘의 음성을 들은 바울은 눈이 멀었다고 한다. 성경에는 ‘사흘간 앞을 못 보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사도행전 9장9절)고 기록돼 있다. 구원의 통로라고 믿었던 율법에 대한 믿음이 와르르 무너진 바울에겐 모든 것이 암흑이었을 터이다. 그 암흑을 헤쳐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됐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사도행전 9장18절)고 한다.

다소의 거리에 바람이 불었다. 그랬다.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다. 생명에 눈 멀고, 진리에 눈 멀 때 우리의 눈도 비늘에 덮인다. 그러니 예수를 박해하는 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예수를 박해한다. 예수의 가르침에 눈을 감고, 예수의 이웃에게서 고개를 돌리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예수는 묻는다. “○○야, ○○야,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우리는 바울처럼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때마다 우리의 가족,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이웃이 그 답을 대신 한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예수를 박해하는 순간은 로마 시대만이 아니었다. 종교가 세상의 권력이 됐던 중세 때만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고 ‘나의 뜻’을 고집하는 그 모든 순간이 예수를 박해하는 순간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 순간 물을 뿐이다. “나는 지금 예수를 외면하고 있진 않나. 나는 지금 예수를 박해하고 있진 않나.” 그걸 묻고, 또 물을 뿐이다.

바울은 그렇게 회심했다. 그리고 내달렸다. 바울은 전도 여정에서 유대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몰매를 맞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파선도 세 번이나 당했다. 밤과 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며 표류한 적도 있었다. 바울은 결국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 때 로마에서 죽임을 당했다.

버스에 앉아 바울의 생가를 바라봤다. 다시 눈을 감았다. 무엇이었을까. 목숨을 걸고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건 진정 무엇이었을까.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순례객의 가슴도 때렸다. 그랬다. 그건 종교의 틀, 종교의 껍질이 아니었다. 율법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교회의 벽돌도 아니었다. 그건 생명이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20절)고 바울이 고백했던 영원한 생명이었다. 버스는 다소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 때까지 말이다.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다소(터키)=글·사진 백성호 기자

바울이 국외 선교 시작한 곳

터키에 한국서 세운 예배당

안디옥개신교회 10주년

터키 안디옥에 세운 안티옥개신교회에서 10주년 기념예배를 올리고 있는 광림교회 신도들.

지난 2일 터키 남부의 안디옥을 찾았다. 2000년 전 바울은 여기서 ‘예수’를 전했다. 베드로도 이곳을 방문했다. 박해 시절, 험한 돌산의 동굴에 숨어서 초기 사도들은 교회를 꾸렸다. 지금도 안디옥에는 ‘베드로 동굴 교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베드로 전도 여정의 베이스캠프였던 안디옥은 현재 터키 땅이다. 인구의 98%가 무슬림이다. 안디옥은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이슬람 세가 더욱 강하다. 그런데 시내 한가운데 십자가가 걸린 건물이 하나 있다. 2000년 6월 광림교회(담임 김정석 목사)에서 터키정부의 허가를 얻어 합법적으로 세운 안디옥개신교회다. 정부 허가는 얻었으나 예배는 볼 수 없었다. 4년 뒤 종교비자를 얻고서야 비로소 선교를 할 수 있었다.

이날 안디옥개신교회에선 창립 10주년 기념 예배가 열렸다. ‘바울의 여정’을 좇던 광림교회의 순례객 60여 명과 안디옥 현지인 120여 명이 참석했다. 그 중에는 이슬람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터키인도 더러 있었다. 3년 전에 파송돼 안디옥개신교회의 목회를 책임지고 있는 장성호 선교사는 “2008년과 지난해 각각 5명의 터키인이 세례를 받았고, 올해도 몇 명이 받기로 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10주년 기념예배는 영어와 터키어로 진행됐다. 김정석 목사는 “안디옥 개신교회는 1세기 안디옥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복음을 전한 것처럼 더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안디옥은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국외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말이 처음 언급된 지역이기도 하다.

안디옥(터키)=백성호 기자

사도 바울의 길을 따라서 바울, 그리스 신들과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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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암(知岩) 박용덕의 행복한 세상 만들기

사도 바울의 마지막 생애와 순교

한낱 죄수로써의 로마에서의 바울의 재판은 선뜻 고소자가 나타나지 아니한데다가 네로는 물론

그 재판관들 마저 향락에 빠져 긴급한 일 외에는 재판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리하여 서기 61-

62년까지 2년동안 재판은 무기연기되었으며 바울이 있는 그의 감옥인 자유로운 샛집은 바울 사

도의 복음사역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누가와 아리스다고는 바울집의 형편을 알리고 디모데는 마게도냐를 다녀오고 두기고는 에베소

에서 아시아의 소식을 전해오고 또한 바울의 편지를 가져갔습니다.애바브라는 골로새교회를 세

우고 소식을 전해왔으며 마가는 로마에 와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비상이 걸려있는 셈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이르러 바울은 1차 재판을 받았지만 논증과 변호가 성공한 셈이 되어 무죄석방되었

고 바울은 자유한 몸이 되어 63-66년까지 마게도냐전도에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런 시기에 로마시에 대화재가 일어나 시가의 14구 중 3구가 9일간 속수무책으로 불타버리는 사

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인 네로는 백성들로부터 의심을 받는 자기의 책임을 엉뚱하게 그리스도인들에

게 돌려댔습니다. 이리하여 누명과 오해를 받은 무죄한 그리스도인들은 짐승의 가죽을 둘러 쓴

다든지 들개에게 끌리거나 십자가에 못박히고 더러는 사람에게 기름을 붙여 횃불을 만들기도

하는 환난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사도 베드로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 마게도냐의 총독이 바울을

잡아가면 큰 공을 세우는 일이 된다고 생각하여 사도 바울을 붙잡아 로마로 호송했습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쇠사슬에 매이고 1차의 자유로운 감옥살이 때와는 달리 엄혹한 감방에 갇히

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온 오네시모는 바울을 찾아가다가 형을 당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누

가는 바울의 수종자(당시에 죄수가 자기를 수발하는 종을 둘 수 있었음)라는 사실로 가까스로

죽음의 화를 면했습니다.

바울의 2차 재판이 있었는데 그의 죄목은 로마성 화재의 음모죄였던 것입니다.또한 바울이 설

파한 종교는 기괴망측한 종교로 백성을 혼란케 하는 인도를 무시한 죄라고 덮어씌워 사형선고

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바울에 대한 Donald G Miller의 진술에 의하면 ‘바울은 이미 늙어 허리가 약간 굽었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잡혔으며 여러날 동안의 엄혹한 감옥살이로 인하여 병색이 가득하였다. 그

러나 그는 승리자만 가질 수 있는 기상으로 씩씩하게 사형 장소까지 나아갔다.’고 썼습니다.

당시의 사형 집행장소는 로마시의 교외가 되는 오스틴거리였는데 지금 거기는 로마시내의 번

화가 거리가 된 셈입니다.

이때 사형관은 사도 바울에게 마지막으로 바울의 마음을 회유했지만 실패했고 바울은 그리스

도와 그의 소망에 대한 확신을 재확인 당한 후 사도 바울은 단두대 위에서 교수형의 이슬로 사

라졌습니다.

바로 이 사형집행 장소에는 오직 누가만 있었습니다. 누가는 너무 슬퍼서 잠시 머리를 아래로

떨구고 있다가 머리를 들었을 때 이미 바울 사도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

니다.

바울이 살아 생전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한

바 있는데 이것이 실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가게 되면 사도 바울의 순교의 이유

를 확실하고도 선명하게 알게 되어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순교 당한지 거의 2,000년이 지났을 때 이.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

니다. ‘오늘날 이같은 위기에 있어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울과 같은 자로 하나님의 사물

에 대한 깊은 체험을 가진 자와 그리고 진지함과 영성으로 충일한 군대이다. 성화된 사람, 자기

희생의 사람이 필요되나니 용감하고 진실한 사람, 그의 마음 가운데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

리스도를 닮아가며 거룩한 불로 감동함을 받은 입술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하는 일꾼이 요구된

다.'(복음사역자 61)

참고: 사도 바울은 평생에 3차에 걸처 아시아와 유럽대륙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차는 45-

47년 사이에 아시아(행 13:4-14:28)에, 2차는 49-52년 사이에 유럽(행 15:36-18:22)에,

그리고 3차는 53-58년 사이에 역시 유럽(행 18:23-21:16)에 복음을 전했습니다.[끝]

성경은 사도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가?

질문

성경은 사도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가?

답변

성경은 오직 야고보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2:2). 헤롯 왕이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하는데 아마 참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죽음을 맞이한 상황들은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관련이 있지만 우리는 이런 설명들에 대해 너무 많은 무게를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죽음에 관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교회의 전통적인 이야기는,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요 21:18)의 성취로서 로마에서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내용은 다른 사도들의 죽음에 관해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이야기입니다.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은 부상 때문에 고통 받으며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로마의 박해의 물결이 있는 동안 기름이 끓는 큰 가마솥에 처해져서 순교를 맞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후 요한은 밧모섬에 있는 광물을 캐는 감옥에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밧모에서 예언적인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나중에 사도 요한은 자유롭게 되어 지금 현재의 터키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늙어서 죽었는데, 평화롭게 죽은 유일한 사도입니다.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공식적인 사도는 아닙니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부인하지 않자 성전의 남동 쪽 꼭대기(약 30미터의 상공)에서 던지어 졌습니다. 그의 원수들은 야고보가 추락 후에도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곤봉으로 때려서 죽였습니다. 이 꼭대기는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데리고 갔던 곳으로 여겨집니다.나다니엘이라고도 알려진 바돌로매는 아시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터기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고 아르메니아에서 설교하다가 순교하였는데, 살이 벗겨지도록 죽을 때까지 채찍에 맞았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 모양의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일곱 명의 군사들이 그를 심하게 채찍질을 한 후, 극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위해 끈으로 그의 몸을 십자가에 묶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안드레가 십자가로 이끌릴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반겼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 행복한 순간을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십자가는 거기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틀 동안 그를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설교했습니다. 사도 도마는 인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하다가 어느 날 거기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배신자 유다를 대신해서 선택된 사도 맛디아는 돌에 맞고 참수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후 67년에 로마의 악한 황제인 네로에 의해서 고문 당하고 참수되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신뢰할만한 증거는 없습니다.사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들 모두가 믿음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도 그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짓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위해 죽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끔찍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려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었다는 엄청난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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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에 의하면 바울은 소아시아의 동남쪽에 있는 로마제국의 지방 행정 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행 22:3). 또한, 바울은 출생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행 22:28). 이는 곧 그의 가족이 로마 사회의 특권층에 속했었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정통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당대 최고의 학문을 섭렵한 자였다.

아마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에서 전문적인 율법학자인 랍비가 되는 훈련을 받으며 지낸 것 같다. 특히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이는 곧 그가 힐렐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유는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주전 10년경에 유대교에는 두 학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힐렐 학파’였고, 또 하나는 ‘샴마이 학파’였다.

이들은 바리새파 구전 율법의 계승자들로서 장로들의 유전을 전하였다. 그러나 율법의 해석에는 둘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힐렐 학파는 대체로 부드럽고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반면에 샴마이 학파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전문적인 유대교의 훈련을 받은 바울은 아마도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 되는 과정 중에 있었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의 활동은 종교적인 일에 집중되었던 것 같다. 자신의 자청인지 아니면 공의회가 요구해서인지는 모르나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매우 열심을 내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갈 1:13, 고전 15:9).”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에도 그를 돌로 치는 일에 공모하였고(행 7:58),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도 공모하였으며(행 8:3), 주님의 제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떠나기도 했다(행 9:1~2).

그런데 바로 그때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결정적으로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바울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다메섹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핍박자 사울에서 예수의 제자 곧 사도바울로 변화되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은 그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바울은 이후 선교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하였다. 바울은 힘든 선교 여정 속에서도 교회들을 위해 많은 서신서를 써 보내어 위로와 격려, 권면과 책망, 교훈과 경고 등을 전달하였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 극적인 회심을 한 후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대략 33년 동안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주후 34~67). 그가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난 시점은 주후 47년경이다. 그는 자기의 서신서에서 자신의 1차 선교 여행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누가의 저술인 사도행전을 토대로 그의 1차 선교 여행의 행적을 재구성해 보면 바울은 구브로 – 남소아시아 – 안디옥의 경로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선교 여행은 주후 49년경으로 남소아시아 지방을 거쳐 마케도니아의 여러 도시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바울은 다시 아가야 지방을 가서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갔고 그곳에서 대략 1년 6개월 정도 거하며 복음을 증거하였다(행 18:11).

2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울은 안디옥에 얼마간 머물다가 갈라디아와 부루기아 지역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격려하였다(행 13:23). 이후 그는 에베소로 갔다. 에베소는 그가 2차 선교 여행 시에 방문한 곳이다. 바울은 3차 선교 여행 시에 이곳에서 3년을 머물렀다. 선교 여행 중에 가장 긴 시간을 이곳 에베소에서 보냈다.

결국, 바울은 적대적인 유대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천부장의 허락하에 영문 층계에 서서 스스로 변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행 22:30~23:10). 특히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베스도에 의해 심문을 받을 때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겠노라고 호소하였다(행 25:11).

로마로 압송된 바울은 가이사 앞에서 재판받을 날을 기다리며 2년 동안 연금 상태에 있었다(행 28:30~31). 그 가운데서도 그는 상당한 자유를 허용받았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유스럽게 만날 수가 있었다. 심지어 방문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도 하였다. 후에 바울은 다시금 체포되어 로마에서 두 번째 구금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바울은 구금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는 주후 67년경이다.

[현장 탐방]사도 바울이 걸은 마지막 길: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newspower.co.kr)

▲ 사도 바울 순교 교회와 바울이 마지막 걸었던 로마 도로. 길을 보존하기 위해 줄로 막아져 있다. © 이동근 그날 로마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날도 이처럼 비가 왔을까? 사도 바울의 참수터를 찾아가는 나의 마음에도 애통하고 안타까운 비가 내렸다.

지난 9월 꿈에 그리던 서유럽을 여행사 투어로 다녀왔다. 영국, 파리, 스위스, 이태리 일정 12일 동안 내내 날씨가 좋았는데 마지막 날 로마 일정에는 비가 내렸다.

이날은 마침 주일이어서 아내와 나는 호텔방에서 찬양과 말씀 묵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로마 관광을 떠났다. 첫 방문지가 사도바울이 순교한 참수터였다.

사도행전 등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공회 앞에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한 후 58년경 체포되어 가이샤라에 호송되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바울의 가슴에는 주님께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이르신 것처럼 로마 선교 열정이 있었고. 로마 시민권자이기에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하며 로마황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기 요청했다. (행 25:11)

이로인해 사도 바울은 바다의 풍랑으로 배가 깨어져 멜리데 섬으로 구조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AD 61년경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2년동안 가택연금을 당했으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운데 군사가 그를 지키고 있었지만 방문자를 만나고 복음을 전파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수감생활을 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행 28:16)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행 28:23)

이 기간 바울은 4개의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으며 63년경에는 잠시 석방되어 성도들을 둘러보기 위해 소아시아로 갔다.

▲ 사도 바울이 참수 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 조각 © 이동근 그러나 AD 64년 7월 19일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이로인해 당시 기독교의 지도자 바울은 제 1순위로 소아시아에서 체포되어 왔다.

갑자기 체포된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 로마의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 마메르티(mamertimum) 감옥에 갇혔는데 베드로 역시 이곳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남아있는 이 감옥은 훨씬 악조건 환경이었고 죄수들은 혹독한 구금 생활을 보내야 했다.

우리 일행은 직접 이 감옥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바라보며 설명을 들었다.

바울도 자신의 마지막이 임박한 것을 알고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 전서와 후서를 써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며 자기의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리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로니라.”(딤후4:6-8)

결국 사도바울은 반기독교 세력의 심장부인 로마에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린 것이다.

그 당시는 성 안을 신성시하였기에 성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 바울의 목이 참수되었을 때 떨어진 목이 세 번 튀었고, 그 튀어 오른 자리마다 샘이 터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뜨레 포타네 (Tre Pontana) 세 분수 교회가 세워져 있다.

또 그의 무덤은 성 밖에 있는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또는 성 바오로 대성당 (St. Paul’s outside-the-walls)에 묻혀있는데 로마 베드로 성당에 이어 가장 큰 기념 성당이라고 한다.

그날 우리 일행들은 관광버스에서 내려 내가 살고 있는 시애틀의 비 같은 가랑비를 맞으며 참수터로 향했다. 먼저 놀랜 것은 그동안 유럽 관광지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행객들과 관광버스들이 몰려있었는데 이곳에는 우리 일행 외에 다른 10여명 정도만 있을 정도로 한산했다.

참수 교회가 있는 수도원 입구는 Via Acque Salvie 길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문만 서 있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양옆으로 가로수가 서있는 조그만 시골길 같은 조용한 길을 걸어가니 입구에 하얀 대리석 조각으로 한 인물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사도바울을 먼저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이 조각상은 바울이 아니고 수도사인 St. Benedict 였다. 조각상 밑에는 이곳은 평화와 기도의 장소라고 경고하고 있다.

▲ 바울이 참수당한 후 목이 3번 튀긴 곳에 샘이 터지는 그림 © 이동근

복잡한 도심을 벗어난 수도원은 정말 들어오자마자 적막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주었다. Acque Salvie 길을 따라 더 들어가니 정식 수도원 입구인 Arch of Charlemagne 아치 문이 서 있었다.

이 아치는 샤를마뉴 서로마 제국 황제 기념 수도원 아치이고 수도원 안에는 바울 참수 교회를 포함 3개 건물이 있었다. 마침 아치 입구 길바닥에 젊은 집시 여성이 빈 깡통을 들고 구걸하고 있었는데 다른 관광지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아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어서 동정심이 더 큰 것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수도원 3개의 건물 중 왼편은 베르나르도 클레르보의 수도원이고 오른편은 ‘천국의 계단 교회’로 불리는 Church of Santa Maria Scala Coeli 교회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황제의 목욕탕을 건축한 후 건축에 참가했던 1만여명의 그리스도 군인들과 노예들이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수도원 3개 건물 중 가장 작은 이 교회는 1138년 성인 베르나르도 클레르보가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를 드리다가 천사가 수많은 영혼들을 계단을 통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려가는 형상을 보았다고 하여 이런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교회 지하로 내려가니 16세기에 지은 San Zenone과 순교한 군인들을 위한 제단이 있었다. 특히 이 제단 벽에는 두 개의 작은 창문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왼쪽은 Dia 여신을 위한 작은 이교도 제단을 볼 수 있고 오른쪽은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이 참수되기 전에 죄수로서 수감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San Zeno와 순교 군인들 그리고 수감된 사도 바울의 프레스코화가 있었으나 이제는 바울 그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이곳이 바울이 수감되어 옥중 서신을 썼던 감옥이라고 까지 잘못 알고 있으나 수도원 웹사이트 설명에서도 이곳은 바울이 참수 전 대기하던 곳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앞에서 설명한 마메르티(mamertimum) 감옥 입구에는 분명히 바울과 베드로가 수감되어 있던 곳이라고 입구에 새겨져 있다.

참수를 앞두고 바울이 대기했던 곳이라면 바울이 마지막 기도하던 곳일 것이다. 바울은 이때 어떤 기도를 하였을까?

▲ 입구조차 초라한 수도원 입구 © 이동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14:8)

죽으나 사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원하며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기쁘게 고대하던 바울을 생각하면서 나도 감히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원했다.

드디어 두 번째 교회를 지나 다시 조금 더 걸어가니 세 번째로 맨 끝에 바울 순교교회 (Church of the martyrdom of St. Paul)가 나왔다. 이곳이 바로 AD 67년 6월 29 일 바울이 참수 당한 곳이다.

특히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이며 영적인 장소인 바울 순교 교회에 들어가기 직전 도로 10미터 정도는 옛 로마 도로로 보존되어 밟지 못하게 줄로 막아져 있어 우리는 옆으로 피해 가야 했다.

이 도로를 보며 당시 사도 바울이 사형수의 몸으로 이 로마 도로를 마지막으로 걸어서 사형장에 끌려갔다고 생각하니 정말 참담한 심정으로 걸었다.

▲ 바울 참수 교회 내부. 왼쪽 아래 철망으로 가려져 있는 곳에 참수 돌기둥이 있다. 그 왼쪽 옆으로 머리가 튀어 샘이 솟아난 기념 제단이 3개가 있다. © 이동근

순교 교회당에 들어가니 오른쪽 벽에는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죽는 그림과 대리석 부조가 있고 왼쪽 벽에는 바울의 목이 베이는 장면이 생생히 조각되어 있었다. 또 바울의 목이 떨어진 후 3번 튄 곳에서 물이 터지는 그림도 있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어서 훨씬 고통스럽고 잔인한 십자가형을 당했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여서 그래도 쉽게 죽는 참수형을 당했다.

특히 부조 조각에서는 두 손이 뒤로 결박당하고 무릎이 꿇린 채 돌기둥 위에 바울의 목이 올려져 칼로 참수 되는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 정말 끔찍했다.

교회 안은 한쪽으로 참수 돌기둥이 쇠창살로 둘러져 있었고 그 옆으로 3개의 샘터 기념 제단이 정렬되어 있는데 서로 같은 거리이나 바닥 높이가 조금 다르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 샘물이 나온 샘터 기념 제단에는 잘라진 바울 머리 조각도 있었다.

수도원 설명에 따르면 바울의 순교로 3개의 샘이 터진 것은 고고학적인 발견과 여러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또 출처가 미상이지만 신빙성 있는 보고서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참수 당시 눈이 가려졌고 양 무릎이 땅에 꿇렸으며 목이 참수 돌기둥 위에 올려진 후 참수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큰 소리로 3번 히브리어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동시에 그의 목과 머리에서 우유 같은 액체가 터져 나와 사형집행인 옷과 땅을 적셨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교회 안에 있는 예배당 좌석에서 기도시간을 갖는 바람에 좀 늦게 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우리 곁에 있던 외국인 2명과 우리들에게 직원이 쇠창살을 열어주어 무시무시한 참수 돌기둥을 직접 보고 어루만질 수 있었다. 정말 바울의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사람 키보다 적은 돌기둥을 자세히 보니 한쪽이 마모가 돼 있었다. 그 이유는 수많은 기독교도들을 죽일 때 목을 그 돌기둥에 얹고 큰 칼이나 도끼로 내려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 사형 묘사 조각에서도 망나니의 칼이 조금 밖에 없었는데 큰 칼이 부러져 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한다.

▲ 바울이 참수당한 돌기둥, 한쪽이 많이 마모되어 있다. © 이동근

아내 이은배 전도사와 나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그 장면 앞에서 다시한번 사도 바울의 목 베임이 헛되지 않도록, 그 피가 이 땅에서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작은 바울이 되어 오직 믿음 안에서만 살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왕성하고 견고하게 세워 나가기를 소원해 보았다.

정말 끔찍하고도 안타깝게 바울은 참수되었지만 그 흘린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이렇게 뿌려진 바울의 피의 복음으로 인하여 로마 제국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고 바울을 참수했던 로마제국이었으나 그후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기독교 문화가 꽃 피우게 되었으며 특히 이방인인 우리들까지 그 귀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닌가!

2000년 전에 세워진 로마라는 제국은 막상 돌아보니 그동안 알고 있었던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로마 한 셋집 가택연금과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에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당시엔 겨자씨처럼 작았지만 이제 로마를 통해 기독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고 확장되는 하나님의 뜻이 바울의 순교로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바울의 그 피의 복음은 2000년 이라는 시간을 지나 대륙과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까지 접해진 것처럼 사도행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번에 하나님의 은혜로 고대와 중세기에 세계를 호령하였던 유럽을 돌아보면서 영국 박물관, 프랑스 루블 박물관, 베르사이유 궁전, 에펠 탑, 개선문, 바티칸, 베드로성당,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미켈란젤로 그림 등 화려한 성당이나 미술, 조각 작품들과 르네상스 발상지 피렌체, 물의 도시 베니스와 폼페이 그리고 카프리 섬보다도 나는 바울의 초라한 참수터에서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렸고 더 큰 감동과 도전이 밀려와 그곳에서 복음 열정으로 펄펄 뛰던 바울의 심장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이고 큰 축복이었다.

▲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이동근

로마에서 사도 바울 순교 교회를 돌아보면서 사도바울이 유라굴라 광풍을 뚫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여 복음을 외친 로마와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 생전에 가야할 로마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가야할 로마는 어디인가? 그곳은 지난해 내가 단기 선교로 다녀왔던 멀리 아프리카 잠비아 선교지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의 로마가 있다.

특히 이번 여행 일행들 중에는 믿지 않거나 교회를 다니다 중단 한 분들이 많아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는데 이들 뿐만 아니라 많은 여행객들이 사도 바울 참수터를 방문하고 고귀한 사도바울의 순교를 통해 구세주인 예수님을 믿기 바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바울 순교 교회를 떠나니 바로 앞에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걸었던 로마 도로가 다시 펼쳐졌다. 그 길을 걸으면서 언제가 우리에게도 가야할 마지막 길이 있다는 것을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 마지막 길을 걸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하고 예수님으로 부터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한다.

다시한번 내가 좋아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묵상해본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동근: 뉴스파워 시애틀 본부장. 시애틀 뉴비전 교회(담임 천우석 목사) 시무장로. 전 중앙일보 시애틀지사 편집국장. 전 월간 신앙지 ‘새하늘 새 땅’ 발행인 저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 상,하권. 서북미 여행가이드(2018), ‘아름다운 오리건’, ‘아름다운 워싱턴’, ‘비,눈,바람 그리고 튤립’. 대한민국 국전, 일본 아사히 신문 국제 사진전, 홍콩, 한국 국제 사진전 입선, 오리건주 오리거니안 신문 사진전 1위. 미국 개인 사진전 개최. 이메일:[email protected] ▲ 바울의 목이 튕겨서 샘이 터진 곳에 세워진 기념 재단. 중앙에 바울 머리 조각이 있다. © 이동근 ▲ 천국 계단 교회 지하에 있는 기념 제단. 철망 창문 뒤는 바울이 수감된 감옥이 아니고 사형자에 끌려간 바울이 대기하며 마지막 기도를 했던 곳이다. © 이동근 ▲ 수도원 입구 아치 문 아래 젊은 집시여성이 깡통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다. © 이동근

죽음과 죽음 이후 (3)

< 1 >

주제로 읽는 성경, ‘죽음과 죽음 이후’, 오늘은 사도 바울의 사후 세계관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로 꼽힙니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 선교를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세계 종교가 되게 한 디딤돌 역할을 했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핵심적인 신학 이론이 발전하는데 중차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산 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을 주실 것이요,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롬 2,6-11)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 이후로 유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신다는 것이지요. 심판은 미래, 죽음 이후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증언합니다. 편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울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뚜렷이 구분된 ‘3층’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거하시고, 이제는 부활한 예수님도 거하시는 ‘저 높은 곳’이 있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사는 땅, 즉 ‘이 아래’가 있고, 그 다음에는 죽은 자들이 거하는 ‘한참 아래’ 층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후 50년 경, 가장 먼저 쓴 편지로 알려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예수님은 이 땅의 층에서 사시다가 죽어서 ‘저 아래로’ 내려가셨다가, ‘위로’, 즉 하나님이 계시는 층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다시 ‘아래로’, 저 한참 아래에 있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셔서, 그들과 함께 ‘위로’ 들려 올라가실 터인데, 여기 가운데 층에 거하는 자들, 곧 그 때 이 땅 위에서 살아남아 있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구름 위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살전 4,13-18)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들이 모두 이른바 ‘스올’, 그늘 진 곳에 다 함께 잠들어 있다는 유대의 전통적인 사후세계관을 계승하고 있습니다(살전 4,13-14).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 있는 신자들의 들려올려짐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종말론적 사후 세계관을 동시에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삼층천을 본 사도 바울 ⓒGetty Image

< 2 >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죽으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간다”고 합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이 장막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고후 5,1-3).

바울은 우리가 죽으면, 곧 육체라는 장막을 벗으면, 죽음을 삼킨 생명을 덧입고,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집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바울도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육체라는 장막을 벗을지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집이 세상의 장막집을 덮을 것(고후 5,3-4)이라고 표현합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진다는 것이지요(고후 5,4).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바울의 표현이 모호한 것은, 그의 관심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의 관심은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 있든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고후 5,9).

그렇다고 바울이 심판을 안 믿은 것이 아닙니다(사진 6, 최후의 심판). 바울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하고,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한다”(고후 5,10)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고, 곧 역사의 종말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곧 온다고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가 금방 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역사의 종말과 심판이 지체되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각자가 죽는 순간 곧바로 억울함을 설욕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곁으로 즉시 불려 올라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갑작스런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살전 5,3). 다시 말해 심판의 날에 완전히 소멸할 거라는 말이지요.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소멸’, 이것이 바울이 생각한 믿는 이들과 안 믿는 이들의 사후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예수님의 묵시론적 사후 세계관은 점차 흐릿해지고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삶과 죽음을 더 이상 종말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죽음 직후 이루어질 상과 벌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영원한 기쁨을 누리지만, 죄인들은 영원한 고문을 당할 거라는 개념이 확고해지면서, 마침내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바울 이후의 초대 교회에서 사후 세계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mail protected]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도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성경은 각 사도들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가?

사도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성경은 각 사도들의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가? 성경은 사도 중 야고보에 대한 죽음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2). 헤롯 왕이 야고보를 칼로 죽게 했다고 했는데, 아마 머리를 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사도들의 죽음은 오래된 교회 관련 기록들 밖에 의지할 수 없으므로, 이런 자료에서 벗어난 다른 이야기들의 신빙성은 좀 떨어집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X모형이 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8). 다음은 가장 잘 알려진 다른 사도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했고, 요한은 로마 대박해 기간 동안에 끓는 기름 솥에서 순교를 맞이하다, 결국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합니다. 그 때 요한은 밧모섬에 있는 감옥에서 광석 캐는 일을 하도록 처벌받는데, 그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씁니다. 사도요한은 후에 석방되어 현재의 터기로 후송됩니다. 그는 늙어서 죽었는데, 평화롭게 죽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 (공식적으로 사도는 아니지만)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지 않았는데, 그 때 템플 (Temple) 지역의 동남쪽에 있는 100피트 높이의 탑에서 떨어뜨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야고보를 밀친 사람들이 야고보가 떨어진 후에도 생명이 붙어 있음을 보고, 채찍으로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 탑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 데리고 올라갔던 그 탑이라고 합니다.

나다니엘이라고도 불리는 바돌로매는 소아시아로 간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터기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다 아르메니아에서 간증하던 중 채찍에 맞아 순교하였슶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 형의 십자가에서 순교하였는데, 일곱 명의 군사가 살이 벗겨지도록 심하게 채찍질을 한 후, 고통을 더 길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묶어 두었다고 합니다. 안드레를 따랐던 자들이 고백하기를,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이런 말로 죽음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 행복한 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성하게 된 것이다.” 안드레는 죽는 날까지 2틀 동안 십자가에서 그를 고문했던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사도 도마는 인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다니는 선교 여행 중 그곳에서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합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해서 선택된 사도 맛디아는 돌에 맞은 후 참수 당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문을 당하고 결국 67년도에 로마 네로 황제에게 참수당했다 합니다. 다른 사도들에 대한 전해지는 말들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사도들 모두가 그들의 믿음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도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거짓을 위해 기꺼이 죽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면서까지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가장 진실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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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순교자 바울 사도의 죽음-

우리는 바울 사도가 한 사역의 마지막 부분을 고고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제는 그의 순교에 관하여 서술하여 보려고 한다.

1. 순교의 현장에 등장한 사울(바울)

바울 사도는 처음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성경에 나타난다. 바울 사도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테판을 유대교인들이 돌로 쳐 죽일 때에 그들을 도우며 스테판이 살해당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다.(7:58; 8:1)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대제사장의 공식 허가를 받고 다마스커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는 도중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서 극적으로 회심을 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하여, 다마스커스에 있는 회당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설교하였다.(행 9) 그때부터 죽음은 바울의 곁을 바짝 따라 붙었다. 바울을 변심한 것으로 본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행 9:23) 다마스커스를 탈출한 바울은 그때부터 죄수로 로마 도시에 들어 올 때까지 줄곧 죽음의 협박에 시달렸다.

스테판의 순교가 A. D. 32년경이라고 단정 한다면, 바울 사도는 그 후 약 35년 동안 전도길에서 이런저런 죽음의 위기를 셀 수 없이 많이 넘기면서 고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도시 근교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사역은 예루살렘에 있는 순교의 현장에서 로마에 있는 순교의 현장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2. 순교를 예견한 바울 사도

로마에서 옥살이를 하는 바울 사도의 말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추론이 가능하다.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 간 때를 A. D. 62년이나 그 근처로 본다면, 그는 2년간 거기에 있었는데, 재판이 실행되지는 않은 것 같다. 로마법에는 고소인이 법정에 나와서 고소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로마는 근거 없이 고소하여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소인이 정확한 범법사실을 확실하게 법정에 제출하는 법을 A. D. 61년에 원로원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므로 유대에서 고소인들은 로마에 와야만 재판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말했다시피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행 28:18-20)

그들의 대답은 유대에서 바다를 건너 로마에 편지를 보내거나 사람이 오거나 해서 바울을 고소하거나 나쁘게 말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행 28:18-21)

이로 미루어 보아서 유대에 있는 유대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유대를 떠나 죄인이 되어 로마로 간 후에 그를 죽이려는 의지가 흐지부지 되었거나, 국내의 복잡한 일들 때문에 바울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을 쓸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바울이 로마에서 이년 간 지내는 동안에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A. D. 60년대 초반이 지나면서 유대에서는 열혈당이 득세를 하고 로마와 대항하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협을 하였고 결국 A. D. 68년에는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로마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A. D. 70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파괴하였다. 그 즈음에 완공된 예루살렘 성전이 5년 정도 서 있다가 파괴되고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의 시초에서 유대교인들이 로마에서 바울 사도의 재판을 진행하기에는 벅찬 일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바울은 아마 A. D. 64년쯤에는 로마에서 풀려 나 다시 선교활동을 한 것 같다. 디도서가 기록된 것이 A. D. 66년경이고, 바울이 크레테 섬을 다녀갔고 디도를 임명하여 거기에서 교회들을 세우도록 한 것이라면 바울의 사역은 로마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딛 1:5)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니코폴리스에 있는 자기에게로 오라고 했다.(딛 3:12)

그랬는데 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바울 사도가 자신의 순교를 예견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쓴 글에서 그가 임박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개역개정)

순교를 예견하고 있는 그의 글은 짧지만 분명하고 비장하며 그리스도를 만날 확신에 차 있다. 이것은 바울이 다시 한 번 로마에서 죄수로 감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로마에서 두 번 죄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디도서와 디모데후서는 A. D. 64년 이후에, 즉, 바울이 풀려났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쓴 것이라는 결론을 가진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의 순교에 대한 자료는 성경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로마 주변에서 고고학 자료를 섭렵하고 현장을 답사하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바울 사도의 순교에 대한 기록

바울 사도의 순교나 무덤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이나 기록은 희귀하고 성경도 이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순교했다고 하는 말은 바울이 죽고 나서 40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인 A. D. 100년경에 쓰인 클레멘트의 편지에 처음으로 나온다. 클레멘트는 바울의 순교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저 바울이 순교했다고만 기록했다.

바울의 순교 장면을 자세하게 기록한 첫 문서는 『바울의 행전』(Acts of Paul)이다. 이 책은 칼이 바울의 목을 내리치자 목에서 우유 같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고 바울은 살아났다고 한다. 이 책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4. 바울 사도의 순교 시기

바울 사도는 A. D. 60-62년 어간에 로마에 도착했다. 그 후 네로 황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다. 그런 와중에 두 사도들이 같은 해 같은 날 순교하였다는 구전(口傳)과 날은 같은데 년도는 바울의 순교가 늦다는 설도 있고 거의 비슷한 때라는 설도 있다. 현재 대략 정립된 것은 바울 사도의 죽음이 베드로 사도의 죽음 보다 이태 정도 늦은 것으로 본다.

대략 베드로 사도가 A. D. 65년경에 순교하였고, 그 뒤를 이어서 바울 사도가 67년이나 68년경에 순교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견해이다. 4세기에 활동했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책에서 로마에서 네로 황제 때에 바울 사도가 목 베임을 당하고 순교하였다는 구전을 그대로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5. 바울 사도의 순교 장소

바울의 순교 장소로는 일반적으로 로마 도시 근교에 있는 San Paolo alle Tre Fontane(세 분수에 있는 바울)이라는 교회 터로 보고 있다.(사진 1)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여기에서 바울 사도가 목베임을 당하여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로마는 죄수들에게 십자가형을 많이 내렸는데, 그것은 주로 로마 국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행한 처형 방법이었다고 한다.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바울 사도가 목베임을 당한 것은 그가 로마 국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망나니가 바울 사도의 목을 치자 땅에 떨어진 머리는 세 번이나 튀어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마다 기적적으로 분수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분수들을 라틴어로 ‘Aquae Salviae’(물의 현자)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세 분수는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있었고 고고학 발굴로 모자이크 바닥이 드러났다. 이미 바울 사도의 순교 전에 여기에 물분수와 사람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바울의 순교와 이미 있던 지리적 특징이 결합되어 생긴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지방에는 바울이 순교 당한 곳에 소나무가 있었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그 소나무는 영어로는 ‘stone pine tree’라고 하는데 가지들이 뻗어 올라가서 우산처럼 퍼지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지중해 연안에 자라는 소나무이다. 그런 소나무가 바울이 순교를 당하는 장소에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1857년에 그 곳에서 고고학 발굴을 할 때에 그런 소나무의 솔방울들이 고대에 떨어져서 묻힌 것을 발굴하게 되어 그 구전의 사실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A. D. 5세기였다. 그 건물을 1599년에 추기경 알도브란디니의 명으로 중건하였다. 현재 교회는 트래피스트 수도원에 속해 있다. 세 분수들은 식수원이 오염되어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교회 안에는 바울의 목을 칼로 치기 위해서 그의 목을 얹어 놓았었다는 기둥이 있다. 이것이 당시의 돌기둥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학자들은 교회 근처에 있는 로마시대 유적에 있던 건물의 기둥을 가져다 놓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교회 입구의 왼쪽 벽에는 바울 사도를 죽이는 장면이 대리석으로 부조되어 있고(사진 2), 오른쪽 벽에는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처형되는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 교회의 회중석 바닥에는 로마시대 모자이크 바닥이 있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시대에 로마의 항구도시였던 오스티아에서 가져다가 교황 파이우스 9세가 헌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의 순교 장소는 ‘San Paolo alle Tre Fontane’(세 분수에 있는 바울) 교회가 있는 곳이다. 그 장소에 있는 세 분수들이나 바울을 처형할 때에 쓴 돌기둥 따위는 후에 교회의 구전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6. 바울 사도의 무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들의 무덤들이 유세비우스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존재했고 무덤에는 명문들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유세비우스는 그러한 사실을 카이우스라는 경건한 사람이 자기가 그 무덤들을 직접 보고 알고 있다고 하는 말을 인용해서 그의 교회역사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순교장소라고 하는 San Paolo alle Tre Fontane(세 분수에 있는 바울)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마에서는 두 번째로 큰 바실리카 교회가 있다.(제일 큰 것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바실리카이다.) 이 바실리카의 이름은 성 바울 바실리카이다.(사진 3) 이 교회의 문에는 돌기둥 위에 바울의 목을 놓고 망나니가 긴 칼로 내려친 직후의 장면이 부조되어 있다.(사진 4)

구전에 의하면, A. D. 65년경에 타르수스의 바울이 로마에서 투옥되었고, 얼마 있다가 참수되었으며, 경건한 귀족이었던 마트로나 루씰라의 가족 무덤에 장사되었다고 한다. 그 무덤 위에 콘스탄틴 황제 때인 A. D. 325년에 교회를 지었고, A. D.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 교회를 증축하였고 바울의 유해를 석관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A. D. 433년에 지진이 나서 교회가 무너졌고, 교회를 재건하면서 교회의 바닥이 높아졌으나 석관은 그 밑에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1823년에 불이 나서 교회가 완전히 타버리자 새로운 건물을 지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이탈리아 여행을 가면 보게 되는 성 바울 바실리카이다.(공식명칭은, 로마 성 밖에 있다고 하여, St. Paul’s outside-the-walls이다.)

성 바울 바실리카 안에 들어가면 본당의 밑바닥 보다 낮은 곳에 석관이 안장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현재 제단보다 1.37 미터 낮게 대리석 무덤 돌이 있다.(크기는 2.12m x 1.27m) 그 돌에 라틴어로 ‘PAULO APOSTOLO MART’(순교자 사도 바울)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무덤 돌 밑에 석관이 있다. 석관(sarchophagus)은 2.55미터 길이에 1.25미터 넓이와 0.97미터 높이인 대단히 크고 무거운 관이다. 지금은 제단 밑에 철망으로 가려 놓고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사진 5)

1823년에 교회를 다 태워버린 화재가 났을 때에 석관의 존재가 뚜렷이 드러났다. 구전에는 바울의 두개골의 뼈 조각들과 몸의 뼈들은 다른 바실리카인 성 요한 라테란 바실리카에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2002년에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서 실시된 고고학 발굴에서 그 석관 안에는 인골과 예배 의식 때 피우는 분향 가루, 금으로 만든 장식이 달린 값비싼 보라색 천, 아마 실로 짠 청색 천, 따위가 들어 있었다.

발굴을 주도한 고고학자들은 이 석관이 인공적으로 흐트러지지 않은 원래의 유적 환경에서 보존되어 있었다고 보고했다. 교회의 바닥 밑에 있던 이 석관은 1,600년 동안 보존되어 온 것이다.

석관 위의 제단에는 ‘바울 사도가 차고 있던 쇠사슬’이라는 쇠사슬이 전시되어 있다.(사진 6) 사슬은 고리가 아홉 개가 연결된 것이다. 각 고리는 8자 모양인데 동그란 쇠고리를 비틀어서 8자 모양을 만든 것이 아니라, 양쪽을 눌러서 8자 모양이 되게 한 것이다. 이런 쇠고리 형식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이 쇠사슬이 바울시대의 것이라고 하는데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과연 바울이 차고 있던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 바울 바실리카의 자리에 처음 교회가 세워진 것은 A. D. 325년이고 석관이 안치된 것은 A. D. 390년이다. 바울의 순교 당시 보다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상대적으로 볼 때에는 그래도 퍽 이르게 바울에 대한 사실들이 확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거리나 거주지가 유적이 있는 자리 보다 높아진다고 하는 것은 이미 지난 호에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석관이 있는 곳이 원초적으로 2-3세기의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바울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목이 잘린 바울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고 구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고학 발굴은 석관 안에 있는 인물이 바울이라고 단정 지어 주지는 못한다.

7. 결론

스테판 집사가 당하는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울은 바울 사도가 되어서 스테판이 하던 복음 전도를 감당하며 약 35년 정도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에는 스테판처럼 순교를 당하였다. 스테판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긴 바울은 자신의 순교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지 않았을까 싶다.

(사진 제공: 고세진 교수)

고세진 l 교수는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였으며(M. A.), 미국 Wesley Biblical Seminary에서 수학하고 이스라엘 Jerusalem University College에서 히브리어로 석사학위(M. A.)를 취득하였다. 미국 University of Chicago에서 고대근동고고학을 전공하였으며(M. A., Ph. D.) Jerusalem University College에서 고고학연구소장과 학장을 역임하였다. 이스라엘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0년을 포함하여 20여 년 동안 성지에서 벧샨, 레호브, 도르, 팀나, 하르 투브, 길로, 라맡 라헬, 야쿠시, 등 주로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유적지들을 발굴하였다. 한국에 귀국하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한성서고고학회 회장 및 월드비전 운영위원이다.

2022년 7월호(통권 7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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