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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에서 말하는 죽음 | [짧은설교] 성경이 말하는 죽음 3가지 | 분당우리교회 이찬수목사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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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Death): 성경에서 죽음 혹은 사망은 일차적으로 분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먼저 육체의 죽음은 몸과 혼이 분리되는 것이며(창 35:18)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그분의 진노를 받는 것도 죽음으로 표현되어 있다(요일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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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성경 에서 말하는 죽음

  • Author: JOY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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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2.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IoKIXE0zOA

14.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무엇인가요?

출처:www.cbck.org

성경 Q&A

14.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무엇인가요?

사망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부가된 형벌(창 2:17; 3:19).

죄를 범한 순간 영적 교제가 끊어짐(직접 대화하던 시절이 끝남), 그분의 임재에서 추방됨(창 3:24), 결국 육체적 죽음(창 5:5)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19)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그분께서 그 남자를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5:5) “아담이 산 전 생애는 구백삼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

죽음(Death):

성경에서 죽음 혹은 사망은 일차적으로 분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먼저 육체의 죽음은 몸과 혼이 분리되는 것이며(창 35:18)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그분의 진노를 받는 것도 죽음으로 표현되어 있다(요일 3:14). 특별히 영원한 저주를 받아 하나님 앞을 떠나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 불 호수에 들어가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계 20:14-15; 유 12).

(창 35:18) “그녀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이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더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비노니라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냐민이라 하였더라.”

(요일 3:14)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

(계 20:14-15)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 유 12) “이들이 너희와 함께 잔치를 할 때에 두려움도 없이 먹으니 그들은 너희의 사랑의 잔치에 얼룩이라. 그들은 바람에 밀려다니는 물 없는 구름이요, 열매가 시들고 열매가 없으며 두 번 죽어 뿌리째 뽑힌 나무요,”

**선악과 먹고도 죽지 않은 게 아닌가?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아담이 직접 하나님과 대화를 했음. 죄를 범한 순간부터 불가능해진 것임. 즉 성경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끊어졌다는 것임. 즉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이 아담을 심판하시니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쫓겨나게 됐음.(창 3:24)

**아담은 추방된 후 900년 이상 살다 결국 육신적으로도 죽게 됨.(창 5:5)

**성경에 죽음(사망)-

⓵첫째 사망? 누구나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이 죽는 것. 즉 혼과 영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

⓶둘째 사망?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에서 분리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일임. 즉 마귀와 마귀의 천사들과 모든 불신자들과 함께 영원히 타는 불 호수(지옥 불)에 격리되는 것.

둘째 사망은 언제?

① 천년 왕국 이후에 불신자가 부활해서 큰 흰 왕좌 심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토록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불 호수에 들어가는 것.

② 사탄과 그의 마귀들은 흰 왕좌 심판 바로 전에 둘째 사망인 불 호수에 들어가고

③ 사망과 지옥은 불신자들과 함께 불 호수에 던져진다(유 12; 계 2:11;20:6, 14; 21:8).

(계 2:11)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

(계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능을 갖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로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

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부활 또는 휴거 되고, 예수님 밖에서 죽은 자들은 천년왕국이 끝나는 시점에, 즉 백보좌 심판 때 아담 이후로 죽은 불신자들은 모두 부활함.

사망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부가된 형벌이며(창 2:17; 3:19) 그의 모든 후손은 범죄자이고(롬 5:12-19) 따라서 그에게 부과된 저주를 공유한다(창 5:1, 3 설명).

(롬 5:12-19)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13.(율법이 올 때까지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

15. 그러나 거저 주시는 이 선물은 또한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죽었을진대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더욱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이니라.

16. 또 이 선물은 죄지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심판은 정죄에 이르렀으나 많은 범죄로 인한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칭의에 이르기 때문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한 사람을 통하여 군림하였을진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더 생명 안에서 군림하리라.)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창5:1, 3) “이것은 아담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그를 만드시되

아담이 백삼십 년을 살며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모양) 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100% 아담의 모양과 형상만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임. 즉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은 아담 형상을 따라 태어난다는 것임.

**사람을 구원하려면 죄가 없는 뭔가가 죽어야 된다는 게 하나님의 엄중한 원리임. 그래서 사람을 구원할 유일한 대속물(희생 예물)은 사실은 하나님 외에는 없는 것임.

**삼위일체 하나님이(세 분의 인격체가) 사람을 창조 이전에 계획을 세우고, 아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서 죽기로 작정하셨음.

**하나님이 ‘전가’를 사용함. ‘전가 행위’?

원래 그 사람의 것이 아닌데 그 사람의 계좌로 뭔가를 넣어 주는 것. 즉 아담이 죄를 지을 때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이담과 함께 똑같이 죄를 지었다고 보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전가 행위’라는 것임.

** 왜 ‘전가 행위’가 필요한가?

하나님이 ‘전가 행위’에 따라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해서임. 그래서 둘째 아담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온 인류를 위해서 죽으심.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함께 죽은 것으로 하나님이 봐 주시는 것임.(롬 5:12,15)

**사람은 모두 마귀의 자녀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자들로 태어남. “죄와 범법 기운데 죽어 있다‘? 즉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하나님과 교제가 안 되는 상태로 살아 있다는 것임.

**왜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죄에서 구원된다고 하는가?

불공평한 것 아닌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빚(죄)를 졌음. 그 빚을 갚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나님이 규정해 놨으니까 그런 것임.

** 하나님은 살 길을 주신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오라, 양심 창조 등의 계시, 아들 계시, imputation의 중요성.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므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그분의 생명을 공유한다.

부활 때에 마지막으로 정복되어 발밑에 깔릴 원수는 사망이다(롬 5:12-21; 고전 15:1-58).

(롬 5:20-21)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

이것은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 같이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죽음은 아담 때문에, 둘째 사망은 각 사람의 죄 때문에,

<육체적으로 죽는 것은>?

‘숨을 내어 주다’(우리말 성경은 ‘숨을 거두다’로 되어 있음)로 표현되거나(시 104:29)

‘땅으로 돌아가는 것’(창 3:19; 전 12:7),

‘혼이 몸을 떠나는 것 혹은 입는 것’(고후 5:3-4)

또는 ‘몸이 거하던 장막을 떠나는 것’(고후 5:1; 벧후1:13-14) 등으로 표현되었다.

(시 104:29) ”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시면 그것들이 소동하고 주께서 그것들의 숨을 거두어가시면 그것들이 죽어 자기들의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전 12:7)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

(고후 5:3-4) “우리가 옷 입고 있으면 벌거벗은 채 드러나지 아니하리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 벧후1:13-14) “참으로 내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에 너희가 기억하게 하여 너희를 일깨우는 것이 합당한 줄로 생각하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같이 내가 머잖아 반드시 나의 이 장막을 벗어야 할 줄 알기 때문이라.”

<신자들의 죽음은>?

‘떠나서 집으로 가는 것’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빌 1:23; 마 26:24; 요 11:11; 살전4:13) 등으로 표현되었다.

(빌 1:23)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 마 26: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사람의 아들을 배반하여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 요 11:11)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니.”

( 살전4:13)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구원받은 사람: 두 번 태어나고, 한 번 죽음,

구원받지 못한 사람: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죽음

그러나 두 부류 모두 부활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됨.

6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는 사망이다.(롬6:23)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찌라“.(겔18:20)고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2:17)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그 열매를 따먹은 인류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용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본질(本質)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음에 관해서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하며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刑罰)을 내리셨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불순종의 죄에 대한 대가(代價)는 성경에서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이었다.

창세기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겔28:13)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시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영적(靈的)죽음이라고 부른다.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시체에는 썩는 냄새가 나며 독수리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 속에서도 죄의 악취가 나며, 악한 영(靈)의 독수리들이 날아들게 된다.

누가복음 17: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둘째로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 놓고 각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말씀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생명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영은 즉시 죽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자체 생명력으로 몇 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끊임없이 그 속에 작용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육체가 흙으로 돌아 갈 때까지 계속 역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자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리고 남자 아담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창3:17)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3:19)고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 기(氣)가 진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의 결과로서, 죄인들의 죽음은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라 부른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永生)할 것을 염려하셨다.(창세기3: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으시되,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고 죄인들이 영생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은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생명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서 영생할 수 없게 된 상태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에게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소멸(消滅)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들에게는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심판이 따라오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어두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요한복음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해 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요한계시록을 통해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다시 말하면 의인(義人)이 되어 영생에 들어가지 못하면 죄인들은 무서운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전영복 박사 ⑫ 2015,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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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죽음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곽혜원)

좋은 신앙인으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적으로 ‘잘 죽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제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풍요로운 자산이었던 존엄한 죽음의 전통을 다시금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평소에 삶 속에서 죽음을 깊이 성찰하고 준비하면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훈련을 해야 한다.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존엄하게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본문 중)

곽혜원(21세기교회와신학포럼)[1]

성서의 죽음 이해를 상고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중 의외로 많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비성서적으로, 심지어 미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을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의 주님’으로 믿지 않고, 오직 ‘산 자만의 주님’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죽음의 세계가 명백히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며 죽은 자는 역사의 종말에 임할 부활을 소망하는 존재라는 초대교회의 신앙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결정적 분기점이 되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이 임했고 죽음과 죽음의 세계, 죽은 자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2]

하지만 성서는 로마서 14:8-9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함으로써, 하나님이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의 주님’이심을 분명히 선언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그곳을 하나님이 임재하는 공간, 하나님의 통치 영역임을 암시하며(시 139:8; 호 13:14)[3], 특히 베드로전서 3:19과 4:6 말씀은 예수께서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셔서 저주받은 죽음의 땅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생명의 땅으로 만드신 것을 선포한다.[4] 그리하여 죽음의 세계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영역으로 귀속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맺은 관계가 육체적 소멸을 넘어서 영원히 존속한다는 사실을 확증한다.[5]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으로서 죽음의 세계도 다스리신다면, 우리는 과연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죽음의 양면성·이중성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필요성이 있는데, 이를 통해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죽음은 동서고금(東西古今) 어느 종교·문화권을 막론하여 양면적이고 이중적으로 이해된다. 특별히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에서는, 천수를 누린 사람은 선신(善神)이 된다고 믿어지고 따라서 자연사(自然死)는 생명의 자연적 순환 원리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요절이나 비명횡사한 사람은 악신(惡神)이 된다고 여겨지고 비자연사(非自然死)는 일생일대 최악의 부정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또한 죽음은 본질상 슬프고 비통한 사건인 동시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건으로 표상되기도 하는데, 죽음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신적인 존재 혹은 다른 생물체로 환생하기 때문이다.[6] 아마도 한국의 전통적 상장례(喪葬禮)에서 죽음의 이중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의례는, 장례식 전야에 슬픔으로 가득 찬 상갓집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아기가 태어나는 장면을 연출하는 다시래기(=다시나기)[7]가 아닐까 싶다.

성서에는 죽음에 대한 이중적 전통이 병행하여 연면히 내려오는데, 즉, 죽음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자연적 순리이자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 보는 전통과, 죽음을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형벌로 보는 전통이 그것이다. 유복한 삶을 향유하고 천수를 다한 아브라함의 죽음, 이삭의 죽음 등은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 보지만(창 25:8; 35:29; 대상 29:28; 욥 42:17; 전 3:1-4), 수를 누리지 못한 요절이나 비명횡사는 죄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다(창 2:17; 신 30:15-16; 삼상 2:31-33; 잠 10:27; 겔 18:20-21; 롬 5:12; 6:23; 약 1:15). 그러나 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기점으로 완전히 새롭게 조명된다. 즉, 그리스도 이전에는 죽음에 대한 패배주의가 팽배했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관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8] 그러므로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극복되었다’, ‘죄가 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이 당해야 할 저주의 죽음을 친히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는 저주의 죽음에서 해방되었다’, 바로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죽음 이해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이자 성서가 말하는 죽음 이해의 핵심이다.

성서의 죽음 이해를 기반으로 초기 교부들은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을 했는데, 특히 죽음이 주는 유익에 대해 이렇게 설파하였다.[9]

죽음은 죄의 영원성을 단절시키고 영혼 안에 심어진 악이 불멸하지 못하도록, 죄의 몸으로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지혜와 선, 자비의 섭리에 따라 영혼의 그릇인 육체가 일시적으로 부패하도록 역사한다. 죽음은 주님 안에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독려함으로써 영혼에 해로운 정욕과 탐욕, 사탄의 교만과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제어하게 하는 확실한 구원의 약이 된다. 죽음은 인생의 온갖 수고와 질고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상사의 온갖 근심과 염려에서 해방하며, 모든 슬픔과 고통에 종지부를 찍게 함으로써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로하는 은혜로운 사건이기도 하다. 죽음은 우리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어 준다. 죽음은 썩어 없어질 지상에서 천상, 이생에서 영원, 필멸에서 불멸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와 같은 성서가 말하는 죽음과 그에 대한 초기 교부들의 성찰을 보면서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만유일회적으로(萬有一回的, 결정적으로 단번에) 깨뜨렸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롬 8:11).[10] 그러므로 죽음은 비록 삶 속에 현존할지라도, 그 무서운 위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고전 15:55).[11]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아무 공로 없이 구원받게 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삶이 죽음과 함께 끝나 버린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존재이며, 우리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교통 속으로 들어감, 곧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은, 죽음을 결코 미화하거나 정당화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죽음 그 자체는 역사의 종말에 결국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반신적(反神的) 존재,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고전 15:26)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죽음이 지닌 양면성, 곧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서의 죽음(죽음의 자연성)과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죽음의 비자연성)을 바라보면서 죽음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종결로만 받아들일 경우, 자칫 죽음이 지닌 치명적 폐해를 간과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형태의 억울한 죽음, 폭력적 죽음, 강제적 죽음에 대해 무감각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의 비자연적 측면을 올바로 인식할 때에만, 부당한 죽음을 야기하는 사회의 구조적 불의, 조직화·합법화된 생명의 파괴에 저항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12]

이 사실을 고려해 보면, 죽음이 지닌 양면성은 각각 나름의 의미를 내포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를 부과함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우리는 한편으론 삶의 영역에서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고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순응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죽음의 치명적 폐해를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억울한 죽음, 폭력적 죽음, 강제적 죽음을 초래하는 불의한 세력에 반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어떠한 세력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부당한 죽음으로 몰아가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궁극적으로 이 악을 제거하려는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계 21:4)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죄와 고난과 슬픔과 죽음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 도래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갖게 되면, 인생사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죽음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정신적·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영적으로 깊어지는 계기가 되며, 나아가 우리의 죽음이 ‘인간다운 존엄으로 충만한 복된 죽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데까지 나아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을 희망하는 공동체라는 자부심을 갖고, 성도들로 하여금 삶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차근차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실 삶 속에서 죽음을 성찰하는 일은 일견 고통스러운 일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죽음을 깊이 묵상한 사람 중에 죽음을 두렵기만 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 사람이 거의 없다. 오히려 죽음의 현실을 의식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는, 오랫동안 죽음을 연구한 신학자로서, 죽음을 깊이 묵상할 때 참되고 가치 있는 삶,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좋은 신앙인으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적으로 ‘잘 죽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제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풍요로운 자산이었던 존엄한 죽음의 전통을 다시금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평소에 삶 속에서 죽음을 깊이 성찰하고 준비하면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훈련을 해야 한다.[13]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존엄하게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존엄한 삶을 영위하다가 존엄하게 생애를 마무리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삶과 죽음을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기독교회의 귀중한 전통을 회복해 나갈 때,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회복할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전래 이래 봉착한 교회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도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1]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한세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튀빙엔(Tübingen) 대학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현재 21세기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연구공동체 <21세기교회와신학포럼>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Das Todesverständnis der koreanischen Kultur(한국문화의 죽음이해), 『삼위일체론 전통과 실천적 삶』(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자살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저작) 등 다수가 있다.

[2] 곽혜원,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 기독교 생사학의 의미와 과제』(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93.

[3]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호 13:14).

[4]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6).

[5] 위의 책, 101-102.

[6] 위의 책, 164-165.

[7] 발상 후 상갓집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분위기로 가득하지만, 장례 전야에는 온 마을 주민들을 위한 잔치가 배설된다. 이것이 바로 ‘다시래기’인데, 그 중심부에 아이를 낳는 장면을 연출하는 연극이 진행된다. 이 연극을 통해 태어남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태어남이어서 태어남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발상 후 깊은 시름에 잠겼던 유족들은 잃었던 웃음을 되찾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래기’는 유족들에게 고인이 저승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함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슬픔을 극복하여 현실의 삶에 적응케 함으로써, 상례 후 다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곽혜원, 『현대세계의 위기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한들, 2008), 276.

[8] 곽혜원,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 178-180.

[9] 니콜라오스 바실리아디스, 『죽음의 신비: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정교회의 신학』, 박용범 옮김(서울: 한국정교회출판부, 2010).

[10]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11]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후 15:55).

[12] 김균진, 『죽음과 부활의 신학』(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245.

[13] 김동건, 『빛, 색깔, 공기: 우리가 죽음을 대할 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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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복음: 08. 성경이 말하는 죽음 그 이후

핵심구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장 11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 이후 아무것도 없으며 인간은 소멸된다’라고 말하면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개인이 느끼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생활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성경 또한 이를 확증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① ’죽음 이후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유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인간은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존재’에서 ‘무존재’의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종료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의 끝장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소멸을 믿는 사람도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갖습니다. 자신이 지금 죽음의 문턱을 지나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안타까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이 ‘소멸되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는 평안하세요’ ‘그곳에서는 행복하세요’라고 말합니다. 정말 소멸을 믿는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류는 그 어떤 사회, 문화, 배경 속에서도 죽음 그 이후의 삶을 인지해왔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 이후에 어떤 세계가 있음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전도서 3:11).

② 동양의 유명한 사상인 환생은 ‘죽음 이후에 다른 형태로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고차원적 생물 혹은 저차원적 생물로 환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저차원적 생물체인 곤충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 사람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저는 제 주위의 동물들 중 허다하게 많은 동물들이 자기 본능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보았지만, 의지를 가지고 착하게 살아서 다음 세상엔 반드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동물을 본 적은 없습니다. 환생을 말하는 자들은 ‘전생’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전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 그 이후 다시 이 세상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는 바로 그 죄의 결실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 이 저주를 피해 간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③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이생에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접촉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또한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진실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 한 천사’를 가리킵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귀신’이라고 말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어 의식을 가지고 축복의 장소인 하나님 앞으로 가든지(고린도후서 5:8)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고통의 장소로 가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요한계시록 20:10, 15). 중간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혼은 없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④ 마지막으로 사후 세계는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어봐야 알지’라는 말을 어르신들은 종종 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죽음이 주는 공포입니다. 세상엔 죽은 이후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들이 존재합니다. 삶에 대한 최종 평가가 이루어지며 ‘심판’ 또는 ‘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워합니다. 죽음 그 이후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부활은 ‘일어난다’ 혹은 ‘서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됩니다. 육체는 땅에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육체를 떠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부활이 있다고 말합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다니엘 12:2)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8-29) …악인과 의인의 부활이 있으리라…(사도행전 24:15)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부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선인(의인)과 악인(죄인)이 맞이할 사후 세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의인은 생명을 악인은 심판을 맞이합니다.

악인의 죽음, 그 이후의 삶

누가복음 16장 19-31절을 보면 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날마다 호화롭게 살다가 죽고 나서 어떤 현실을 마주했는지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악인이 어떤 일을 받게 될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다음은 이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악인의 영원 세계입니다.

1. 죽음 이후에 사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2. 악인의 영혼은 잠자거나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3. 다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4. 환생이나 이 땅에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습니다. 5. 불신자들에게 고통의 끝이나 변화의 가능성이란 없습니다. 6. 정화는 없고 오직 영원한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악인이 당할 일들에 대해 “꺼지지 않는 불”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3:12, 18:8; 마가복음 9:44, 48). 또한 “세세토록 고통 당할 것”이라 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14:11). “바깥 어두움”에 처할 것이라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13; 25:30).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3:42, 50; 24:51; 누가복음 13:28).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니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요한계시록 20장 12-15절)

‘영원한 형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영원하다는 것은 한 마디로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형벌’이라는 말은 징계나 훈계가 아니라 처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범죄 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리고 ‘죗값을 다 치렀다’고 말하며 다시 사회로 돌아옵니다. 때로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무기징역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범수로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다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제도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형을 시행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죗값을 다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토록 씻어지지 않는 죄가 있다면 어떨까요? 끝이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 앞에서 악인으로 심판을 받는다면 영원토록 끝이 없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더 잘 되라고 받는 징계가 아닙니다.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훈계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끝없는 처벌입니다.

어떻게 영원히 처벌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가혹한 처벌을 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16). 그래서 죄인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에스겔 33장 11절).

예수님은 또한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누가복음 19:41). 영원한 처벌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엄한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분이고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주 엄격하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신명기 32:4; 느헤미야 9:33). 이미 인류는 한 차례, 여덟 명을 제외한 전 인류가 하나님의 엄격한 분노 아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그분은 엄격하십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종교가 이렇게 사람을 겁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지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믿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무조건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장담합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그 어떤 참혹한 지옥의 모습도 실제 지옥의 모습보다 더 심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공포심을 강조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거짓된 것이지만, 심판에 대한 모든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강하게 이 무서운 심판에 대해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지옥에 대해 가장 많은 설교를 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이런 면에서 특별합니다.

영원한 형벌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악인의 죽음, 그 이후 삶의 모습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제 발로 떠나버린 죄, 계속해서 돌아올 것을 요구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거절한 죄,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죄악 된 욕구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조금도 입지 못한 채,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된 고통스러운 결말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선인(의인)의 부활

이제 의인의 부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만날 때입니다. 악인의 부활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의인은 죽음 이후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합니다(요한복음 14:3; 17:24).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연약한 육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몸을 가지고 삽니다(빌립보서 3:21).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35-44; 마태복음 28:9, 17; 누가복음 24:31, 39, 40). 더 이상 삶을 어렵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죽음, 슬픔, 부르짖음, 아픔 등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요한계시록 21:4). 천국은 무한한 아름다움이 있는 곳입니다(요한계시록 21:18-21). 그곳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높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의인의 죽음, 그 이후 삶의 모습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며, 생명의 근원 되신 그분께 영원토록 생명과 그 풍성한 것을 받아 누리고,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영광의 왕께 돌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인이 거할 그곳은 더러운 것이나 거룩하지 못한 것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한계시록 21:27). 하나님의 의의 기준 앞에서 조금이라도 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는 악인입니다. 그리고 악인이 처할 영원한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거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어떤 판결을 받게 될 것 같습니까? 당신은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당신은 죽음 이후의 영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과 부활과 영생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과 부활과 영생

성경의 핵을 이루는 결론은 부활이라 할 수 있으며 만약에 기독교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성경 66권이 모두 해명되고 그 예언이 실상으로 이루어진다 한 들 또 그리스도의 강림이 목전에 도래한다고 해도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신앙을 할 필요가 있겠냐는거다.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요14: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1. 부활

우리 신앙인들의 최대의 소망은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다.

과연 이 부활의 참 모습은 무엇일까?

믿다가 죽어간 성도들의 시신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부활일까?

음부에 잠들어 있는 혼백이 깨어나는 것이 부활일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이라는 것은 무덤에 장사한 죽은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거나 시체가 썩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그 땅에서 다시 홀연히 죽은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등 너무나도 허구적인 관점으로 부활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부활을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을 내세워 무지한 성도들에게 마치 진리인 마냥 허구를 말하는 무리들의 말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라는 정확한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문자를 사용하여 문자의 이면에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에 권세와 물질에 눈이 어두운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은 문자라는 껍질만 만지다 결국은 알맹이를 말하지 못하고 껍데기를 참인 마냥 성도들에게 거짓으로 말하고 있으니 결코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5:20)

고전15:12~14, 19~21 〔죽은 사람의 부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51~54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 25:8〕

계11:15 〔일곱째 나팔 소리〕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20:4~6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계22:1~5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2. 죽음

우리는 죽음을 무수히 보아왔다. 이 지상의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 동시에 죽음이 결정되었던 사실을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였다. 범부는 물론 영웅호걸이라도 죽음 앞에는 예외가 없었다. 죽음이란 어떠한 인간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영원한 장벽으로 남게 된 것이다.

오직 예수님 한 분 만이 사망의 장벽을 뛰어 넘어 영생의 지평을 우리들 앞에 열어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영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믿을 만한 사건으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죽음의 옥에 갇힌 우리들에게는 그 죽음이라는 장벽을 뛰어 넘어 생명의 도 곧 영생의 진리를 깨닫고자 함이 차라리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속의 하나님의 영생의 도가 진정 살아 있다면 이제 끝날에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어둠을 걷어내시고 우리에게 영생의 도를 밝게 보여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의미를 알아야 하겠다.

마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중대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육신이 죽어 매장되어야 할 죽은 자와 그 시신을 장사할 죽은 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당초에 죽은 자들이 있었고 그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또 죽어(육적으로도) 시신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단 모든 사람을 죽은 자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죽었으니 죽은 자가 다시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육신이 살아 움직이는 자를 가리켜 죽었다 한 그 죽음과 그들 가운데 육신의 호흡이 끊어져 시체가 되어버린 자를 가리켜 죽었다 한 그 죽음을 구분해서 편의상 전자를 원인적 죽음(비유적 죽음)으로 후자를 결론적 죽음(문자적 죽음)으로 이름 짓고 앞으로 이것을 기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이 두 가지 죽음 가운데서 원인적 죽음은 육신은 살아 움직이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없는자를 가리켜 말함이다.

엡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요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절대로 먹지 말라는 금령을 내리셨다.

(창2:16~17)

왜냐하면 그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금령을 어기고 죽음을 취하게 된다.(창3:1~6,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그 실과를 따 먹은 후 930살까지 이르도록 육신이 살아 움직였으니 아담이 그 실과를 따 먹음으로서 맛보게 된 죽음은 육신의 죽음(결과적 죽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창5:3~5)

즉 아담은 하나님의 도를 버리고 사단의 도를 받아들이게 되어 그 영혼이 사망의 권세에 종노릇 하게 되었으므로 이것이 아담에게 임한 사망이요 원인적 죽음인 것이다. (창6:2~7)

롬5:12, 17, 21 〔아담과 그리스도〕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겔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결국 아담은 두 가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고(영적죽음과 육적죽음) 예수님 제자의 부친 또한 두 가지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원인적으로(영적으로) 죽어 있으므로 언젠가는 결과적인 죽음을 맛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며 운명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땅의 사람들은 원인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를 몰랐으므로 결과적인 죽음만을 죽음으로 생각하고 오직 결과적인 죽음을 뛰어 넘기 위하여 고독과 단절의 밀실에서 진정한 생명을 이미 상실한 채 몸부림치다가 결국 인간의 비애를 맛보아 온 것이다.

창6:2~3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①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육체이므로 범과함이라 〕

민19:11~13 〔시체를 만진 자〕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 그는 ①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제 삼일에 이 물로 정결케 하면 제 칠일에 정하려니와 제 삼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제 칠일에 정하지 못하며 /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잠30:2~4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시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82:5~7 저희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시90:10~13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23:26~28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눅11:44 화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⑧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헬, 보이지 않는〕

계3:1 〔사데 교회에 보내는 말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20:11~15 〔크고 흰 보좌에서 심판을 내리시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3. 성경을 주신 이유?

이러한 상태에 예수님께서 오시어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주시기 위해 약속으로 모든 것을 남기셨으나 이 날까지 성경의 약속이 밀봉되어 그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어찌 인생들이 영생의 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잎만 무성한 채 열매 없는 나무 마냥 풍진 세월에 시달려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가 있다. 이 빛바랜 고목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 또는 나아가 이 시대 모든 종교계의 현실이라면 이제 고목의 뿌리에서 새로운 순이 나야 한다. 그 길만이 이 시대의 기독교가 부활하는 길이며 나아가 신앙인들이 참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이제 약속이 응하는 이 시대에 곧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이 시대에 영생의 샘이 열려 사망을 향해 흐르고 이 부활의 생수를 마시는 자마다 죽음의 영원한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이상의 성구에서 우리는 사망의 원인은 죄이며 죄는 욕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나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에게도 사망이 이르게 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 것은 큰 범죄를 행한 것이다.

호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요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8:32, 34, 51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요12:48~50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롬8:9~11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②산 것이니라 〔헬, 생명〕/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벧전3:18~19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③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어떤 사본에, 고난을 받으사〕/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벧전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요일5:13 〔영생을 아는 지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4.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사망의 열매를 따먹지 않았다면 그에게 죽음이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택하였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하고 사망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참 생명이시오 사단은 사망이다.

아담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이어져 있을 때 아담은 산자가 될 수 있으나 사망의 주인공인 사단과 하나가 될 때에는 생명의 선이 끊어지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아담의 죽음 가운데 원인적인 죽음 곧 영적인 죽음이다. 또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곧 죽은자로다 하는 말도 이와 같은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그 후 아담은 정한 수한을 누리다가 육신도 죽어 그의 자손에게 시신을 남겨 놓고 생을 마감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언급해온 죽음은 앞에서 언급한 결과적인 죽음을 말한 것이다. 한 인간이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끊어진 상태 즉 육신의 죽음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육신의 죽음이 영혼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죽음의 상태를 이해 했으니 원인적인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약속이 있으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말씀을 좇아 썩지 아니할 씨 곧 항상 있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 거듭난 자라면(벧전1:23),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맞이했으며 나아가 거룩한 영들이 신랑으로 찾아올 때에 신부로서 신랑을 맞이하여 진정한 영생을 맛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선악을 분별하고 깨닫아 믿고 지키는 온전한 신앙인이 되시길 간구드림니다

*거듭남(다시 나라) = 세례 = 장사 = 부활 = 할례 = 해탈

—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

전3:1, 15, 19~21〔모든 일에 때가 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 인생의 ①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①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히, 영〕 〔히, 영〕

눅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14:27~29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요3:5~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롬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6:11~12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롬8:10~11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②산 것이니라 〔헬, 생명〕/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고전15:27~28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시 8:6〕/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①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혹 아들도 그 때에 스스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하리라 〕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창 2:7〕

골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살전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②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혹 자는 자들을 예수로 말미암아〕

살전5:16~23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성령을 소멸치 말며 / 예언을 멸시치 말고 /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①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혹 목숨〕

히9:26~28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3:20~21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④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혹 실체〕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계2:7, 17, 26~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3:12, 20~21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계22:1~5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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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스도인의 죽음

죽음 이후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은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죽은 후 심판을 받는다(히 9:27). 엄밀히 말하면 죽는 것 자체도 심판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에 대한 결과로 내려진 것이기 때문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범죄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고(창 2:17),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사망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롬 5:12). 즉 죽음은 범죄한 인류를 향한 저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떠한가? 멸망할 죄인들에게는 저주가 임해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에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 받은 자들인데 그들에게도 이 저주가 임해 있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일시적인 저주만 남아있다. 우리도 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육신의 저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은 이 세상의 저주 가운데 놓여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고 승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궁극적으로는 승리할 이 사망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며, 그것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1. 성도의 죽음은 안식이다.

장례식장에 가 보면 흔히 “편히 잠드소서.” “고통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어라”하는 말들을 듣게 된다. 이 세상의 고난을 끝내고 편안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사람에게 하는 말들이다. 늙어서 죽든, 사고로 비명에 죽든 모든 고인들에게 이런 말들을 한다. 하지만 그들 고인들이 정말 안식에 들어갔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죽음으로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뿐이다 .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예비되어 있지만, 죄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보다 훨씬 심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안식이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에 대해서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계 14:13)라고 말씀한다. 다니엘도 그의 지상에서의 소임을 다했을 때 “네가 평안히 쉬다가”(단 12:13)라는 말을 들었고, 누가복음 16:23에서는 거지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 품으로 갔다. 이곳은 낙원이요, 여기에서 그는 안락하게 쉬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만 구약에서와 신약에서의 안식은 그 장소가 다를 뿐인데, 구약에서는 낙원이 음부 안에서 지옥과 다른 한 구역으로 제시되는 반면, 신약에서는 셋째 하늘로 제시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이기 때문에 아직 구약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부자와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이 커다란 구렁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로 그 낙원에 있던 성도들은 셋째 하늘로 옮겨졌다. 에베소서 4:8은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낙원에 있던 구약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후에 죽은 신약 성도들은 하늘에 있는 낙원으로 올라간다. 사도 바울이 잠시 죽음의 경험을 했을 때 그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으로 끌려 올라갔다고 말했다(고후 12:2,4).

이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해 올라가신 곳이다. 그곳에는 아버지 보좌가 있고, 그 오른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실 때 성도들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집은 아주 큰 저택이다(요 14:1-3). 갈라디아서 4:26에 따르면 그곳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요한계시록 21:1,2에 따르면 그 도성은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는데, 그 성은 영원 세계가 펼쳐질 때 새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는 그 도성의 화려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가게 될 곳이다. 앞서 죽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현재 저 하늘의 낙원에서 편히 쉬고 있다. 이 지상에서 어떠한 고난과 고생을 당한 성도들일지라도 그곳에 가면 우리를 구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또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무수한 천사들과 더불어 안식 가운데 거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렇게 행복한 것이다 .

2. 성도의 죽음은 새 옷을 입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2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여기서 “집”이란 몸을 말한다. 하늘에서 오는 집으로 덧입게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입고 있는 육신은 장막 집이며, 후에 입게 될 집은 영원한 집이다.

성도의 죽음은 그러한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과 같다. 현재 이 썩을 몸, 죽을 몸을 입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각종 질병과 허약함으로 우리 장막 집은 고통을 겪고 있다. 이는 죄의 결과이다. 만약 이러한 고통의 몸을 안고 영원을 산다면 그 얼마나 비참할까? 그런 점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를 가려버리신 것은 오히려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범죄한 인류는 질병과 허약함으로 고통당하다가 죽는다. 그러나 성도들은 새 몸을 입는다.

현재의 육신은 질병뿐 아니라 죄로 인해서도 고통을 겪고 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수많은 죄들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죽음은 오히려 해방이고 자유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상의 몸을 입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땅 속으로, 혼은 셋째 하늘, 혹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3:21). 물론 성도의 영은 그가 구원받는 순간 이미 천상에 앉혀있지만(엡 2:6), 궁극적으로는 죽으면 하나님께로 간다. 이 경우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혼”인데(벧전 1:9), 바로 이 혼이 “나 자신”으로서 육신을 입고 살다가 그 육신이 죽으면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올라가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혼이란 보이지 않는 내면적 존재다. 보통 이 혼을 “인격” 혹은 “정신”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몸을 벗고 혼으로 하늘에 가게 될 때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분명히 알아본다는 사실이다. 혼은 인격을 가진 주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단지 인격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존재가 아니다. 혼은 나 자신, 즉 진정한 나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나는 몸의 형태를 갖는다. 지금은 육신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이 육신에서 해방되면 그 자체가 몸처럼 보여질 것이다. 이것을 “혼적인 몸”(soulish body)이라 말한다.

지옥에 간 죄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그 부자는 지옥에 갔으나 아브라함이나 나사로를 알아보았다. 그는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또한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서라도 떨어뜨려 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보니, 각 지체가 분명히 있는 몸의 모습이다. 이처럼 지옥에 있는 죄인들이나 천상에 있는 성도들이나 혼적인 몸을 입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옥에 있는 혼적인 몸들은 절대로 해방되는 몸이 아니다. 오히려 불꽃 가운데서 더욱더 고통을 받을 것인데, 심지어 벌레가 될 정도로 비참하게 변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묘사하시면서 “거기에서는 구더기(their worm-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4,46,48)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명해진다. 반면에 성도의 혼적인 몸은 자유함에 이르는 몸, 영광스런 몸, 영원한 몸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을 누리는 몸이 될 것이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새 옷”을 입는다고 말한다.

3. 성도의 죽음은 부활을 기다리는 과정이다.

성경은 종종 죽음을 잠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잠을 잔다는 것은 깬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죽음이 잠이라면 깬다는 것은 부활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고전 15:51).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이나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잠들었다고 말씀하셨다(막 5:39, 요 11:11). 그리고 그들이 깨었던 것처럼 성도들도 죽음이라는 긴 잠에서 깰 것이다.

부호ᅟᅪᆯ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약속 중에서 가장 확실한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소망을 주셨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제로 놓고,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논리로 전개해 나간다(고전 15: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성도의 부활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도 성도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히브리서 2장은 설명해 준다.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죽지 않게 된다는 것보다는 죽음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아예 죽지 않으셨다면 죽음과 싸워 이긴 것이 아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셔야 죽음과 싸웠다가 이긴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것으로써 주님은 죽음에 대해서도 승리자가 되신 것이며, 또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승리를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으로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우리는 휴거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죽은 성도들은 모두 부활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 따르면, 그들의 부활이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의 휴거보다 먼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죽은 성도들을 장례치른 사람들에게 매우 귀한 위로가 될 것이다(살전 4:18).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이유이다. 그들이 다시 일어나 우리와 만나게 될 것인데 왜 슬퍼하는가? 단지 지금 다시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좀 아쉬울 뿐이다.

부활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변화된 육신을 입게 된다. 지금 천상에는 혼이 가는 것이며, 그는 혼적인 몸을 갖게 되지만, 부활 때에 우리는 지금처럼 육신을 입게 된다. 하지만 지금과는 현저히 다른, 완벽한 육신을 입는다. 그 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3:2에서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부활하신 몸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초자연적인 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었을 때 벽을 통과해서 들어오셨다. 또 부활하신 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 20:17)고 하셨으나 잠시 후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마 28:9). 즉 그 사이에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오셨다는 말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음식을 드시기는 하셨으나 그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확실히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지, 결코 배고파서가 아니었다(눅 24:41-43). 즉 우리의 부활할 몸은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먹을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 몸에는 더 이상 죄가 없다. 지금은 아담의 성품을 갖고 있는 육신을 입고 있지만, 그때에는 예수님과 같고 또 하늘에 속한 완벽한 몸을 입는지라 죄와는 상관없는 몸이 될 것이다. 이것만 해도 부활은 우리의 큰 소망이 된다. 죄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위대하고도 멋진 일인가? 뿐만 아니라 그분처럼 변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그분과 같은 몸을 입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받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이 땅을 통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의 왕이 되실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서 그분과 더불어 이 땅을 통치할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의 비유에 따르면 신실한 종들은 열 고을, 다섯 고을 등을 다스릴 권세를 얻는다. 그런데 만약 혼만이라면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시편 8:4-6에 보면 인자, 즉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다스릴 통치권을 주셨다고 했다. 아담이 바로 그러한 통치권을 받은 것이다. 시편 115:16에서도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통치를 위해서라도 육신을 입으셔야 했다. 초림 때 그분은 그 몸으로 속죄제물이 되셨지만, 재림 때 그분은 그 몸으로 위대한 통치를 이루실 것이다. 그때 우리 역시 그분의 통치에 동참할 것인데,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위대한 몸을 입어야 한다.

성도들은 부활한 몸으로 영원토록 살 것이다. 이 더러운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도, 저 하늘에 올라갈 수도 없다. 그러나 부활하여 변화될 때 우리는 주님께서 계신 저 하늘에 혼만이 아닌 몸으로 올라갈 수 있고, 다시 내려와서 주님과 함께 통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부활로만 가능하며, 그것은 또한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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