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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의 죽음 | [제씨 펜 루이스] 다시 ‘십자가에서의 죽음’에서 부터 시작합시다 4212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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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씨 펜 루이스가 말하는 ‘십자가의 도’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방황하는 원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십자가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은 그것을 이기려는 노력에 있지 않고 단순히 그것에 대해 죽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십자가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경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이 계속적으로 십자가에 넘겨져 지속적인 죽임을 당할 때만이 그 육신의 행위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훈련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이 해결책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선포함으로 옛사람을 끝장내야 합니다.”
“이런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참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죽음에 연합된다는 뜻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그것을 이기려는 노력에 있지 않고 단순히 그것에 대해 죽는데 있습니다. 죽으면 이깁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말씀을 믿고, 이 말씀대로 사십시오.”
“십자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십자가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를 정말 괴롭히는 것은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십자가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가 없기에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 곧 죄로부터의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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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 Daum 블로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 인간이 풀어야할 세 가지 숙제가 있습니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하나님과 분리의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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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이 다른가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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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십자가 의 죽음

  • Author: 기록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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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wFe2il-zhg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인간이 풀어야할 세 가지 숙제가 있습니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하나님과 분리의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이요, 죽음은 곧 하나님과 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풀 수 있습니다. 첫째, 용서입니다.(34절) 죄는 십자가에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둘째, 낙원입니다.(43절)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심으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셋째, 휘장입니다. 45절을 보면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의 한가운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분리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이 선포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사건이 여러분과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서로 죄가 해결되었습니다

‘해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눅 23:33) 해골이라는 것은 언덕의 생김새가 사람의 해골처럼 생겼기에 지어졌습니다. 동일한 장소를 히브리말로 ‘골고다’, 라틴어로 ‘갈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십시오.(눅 23:34~38) 군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그 옷을 가지고 제비뽑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조롱했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도 않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상황을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평생 동안 말씀을 연구했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지도 못했고, 죄와 의를 구분하지도 못했고, 누가 옳고 그른지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을 조롱하며 빈정거리는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용서에 대해 말하십니다.(눅 23:34) 인간은 죄를 짓고 있고 예수님은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용서를 받게 하기 위해 죄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인간은 철저히 무지한 상태로 끝없이 죄를 짓고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그 죄를 용서받을 길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벧전 2:24)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힘든 문제인 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풀어놓으셨습니다. 죄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자와는 상관이 없어졌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훨씬 더 큽니다.

영생으로 가는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가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는 육신적으로 죽지 않을꺼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기 때문입니다.(히 9:27) 사람이 죽는 모습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암으로,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로, 어떤 사람은 총에 맞아, 어떤 사람은 칼에 맞아,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죽습니다. 죽는 모습을 가지고 저주다 복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잠을 자다 죽으면 복이고 차를 타고 가다가 죽으면 저주입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죽음은 저주였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십자가를 통해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영원한 죽음으로 가느냐 영원한 멸망으로 가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고백한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을 보면 “또 나는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렇게 기록해라.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더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나 우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처음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좋은 곳입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을 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회가 있을 때 예수님의 복음을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전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장애물이 사라졌습니다

세 번째 숙제인 하나님과 분리의 문제는 휘장이 찢어짐으로 해결됩니다.(눅 23:44 ~4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시점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휘장이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커튼을 말합니다. 이것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었습니다. 두께가 10cm정도나 되어서 칼로 찢을 수도 없었습니다. 지성소 안으로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첫째,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둘째, 제사장 중에서도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셋째, 자신의 죄를 용서 받아야 합니다. 넷째,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다섯째 일 년에 딱 한 번만 들어갑니다. 아무 때나 들어가면 즉사합니다. 지성소에서 사람이 종종 죽었기 때문에 들어갈 때 허리에 끈을 묶고 방울을 달고 들어갔습니다. 방울이 딸랑거리지 않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줄을 당겨서 끌어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날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열어젖히고 나오신 것입니다. 휘장을 열어 지성소에서 성소로 나오시고, 이방인의 뜰을 지나 여인의 뜰로 걸어서 성전을 나오신 것입니다. 그 후로 예루살렘으로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 끝까지 구원의 하나님이 운행하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늘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자기의 죄가 있더라도 예수님의 피로 열고 들어가면 죽지 않습니다. 일년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365일 나와도 죽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날마다 고백하며 사십시오 마지막 장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믿음을 고백하는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 출신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이분은 참으로 의로운 분이셨다”고 고백합니다.(눅 23:47~49) 그에게 용서가 임했습니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임했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희미하게 믿었던 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믿고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하나님과 분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열방가운데 선포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마태복음 27:45-56)

45-50절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한 대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비로소 운명하신 사건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제육시, 제구시(45) ; 제육시는 정오, 제구시는 오후 3시를 말한다.

약 3시간 동안 유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이 시간대는 가장 밝은 시간대이다. 그러므로 이 어두움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시간은 제 삼시, 즉 오전 9시이다(막 15:22). 예수님은 제삼시로부터 제구시까지 약 6시간 동안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어두움은

/ 일식 현상으로도 볼 수 있고 두터운 구름층이나 사막의 모래 바람 등의 영향으로 햇빛이 일시적으로 차단되어 일어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 그 원인이 무엇이든간에 이는 메시야를 저버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표시(암 8:9), 그리고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저버림의 표시로서 하나님의 직접적 간섭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입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누가는 여기에 ‘해가 빛을 잃고’라는 기록을 덧붙였다(눅 23:44).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하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은 아람어였다. 그러나 마태는 본문에서 ‘엘리 엘리’ 부분은 히브리어로 표현하였고 ‘레마 사박다니’ 부분은 아람어 그대로 표현하였다.

/ ‘엘리’는 히브리어 ‘엘리’의 역어인데, ‘엘리’는 ‘하나님’을 뜻하는 ‘엘’에 1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 ‘나의 하나님’을 뜻한다. 이에 대한 아람어는 ‘옐로이’이다(막 15: 34).

/ 마가는 예수님의 본래 말씀대로 기록했지만, 마태가 아람어 ‘엘로이’를 굳이 같은 뜻의 히브리어 ‘엘리’로 바꾼 이유는 아마도 본문을 시 22:1의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시킴으로 유대인 독자들을 고려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며, 또한 47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이를 듣고 오해하였던 ‘엘리야’라는 표현과 더 유사한 발음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레마’는 아람어로서 ‘왜?’라는 의문사인데, 표준 원문(Textus Receptus)에는 ‘라마’로 나와 있다. ‘라마’는 같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의문사 ‘람마’에 대한 역어이다.

/ ‘사박다니’ 역시 아람어이며 ‘당신이 나를 버리셨다’는 뜻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표현은 시 22:1 예언의 성취로서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 인해 일시적이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맛보셨음을 의미한다.

/ 실로 예수께서는 가시 면류관에 머리가 찔리고 십자가 상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못박히는 육체적 고난과 당신의 메시야 되심을 불신하는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정신적 고통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고난까지 당하셨다.

/ 제2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죄 범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전인격적이며 총체적인 고난을 맛보셨던 것이다.

/ 본문에는 그중에서도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예수의 영적인 고통스러움이 잘 나타나고 있다.

마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개의 말씀 중에 오직 네번째에 해당하는 이 말씀 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이 부르짖음은 사실에 입각한 절규였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에 빠진 인간들을 건지시기 위해 죄없는 대속 제물이신 예수를 십자가상에서 버리셔야 했던 것이다. 마치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사장이 홈없는 어린양을 번제단에 불태워 버린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되에서 구원하시기 위해'(마 1:21) 자신을 ‘대속물'(20:28)로 드림으로쏘 저주와 형벌을 받고(갈 3:13 ; 사 53:4-6), 하나님에게서조차 버림을 받는 순간에 당하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해 절규하신 것이다.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이 이 말을 듣고서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 하고 말하였다.

당시 유대교의 관념에는 죽지 않고 살아 숭천한 엘리야(왕하 2:1-12)가 고통 중에 있는 의인들 을 도와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 그래서 예수께서 참을 수 없는 고통 중에 ‘엘리(나의 하나님)’라고 절규한 것이 그들의 귀에는 ‘엘리야’로 들렸고, 따라서 그들은 고통 중에 있는 예수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러자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셔, 갈대에 꿰어서, 그에게 마시게 하였다.

해면을 가져다가…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48) ; 포도주에 적신 해면을 사형수에게 주는 것은 일종의 마취제를 건네는 것으로 온정어린 행동으로 간주하였다.

해면으로 번역한 ‘스퐁곤’의 원형 ‘스풍고스’는

/ 바다에 떠다니는 ‘해면(海綿)’ 또는 해면과 같이 물을 빨아들일 수 있는 스펀지와 같은 특성을 지닌 물건을 가리킨다.

/ 이것은 많은 양의 액체를 빨아들일 수 있어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는 예수께 신 포도주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 본문에서는 이를 ‘갈대(칼라모스)’에 꿰어 마시우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병행 구절인 요 19:29에서는 이 해면을 ‘우슬초(횟소포스)’에 매어 전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둘 모두 동일한 뜻으로 여긴다.

‘신 포도주’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된 발효가 많이 된 포도주로서 식초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 이것은 물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34절) 몇 시간 전과는 달리 이번에 예수는 이 신 포도주를 마셨다(요 19:30).

/ 십자가 주위에 있는 자들이 예수에게 신 포도주를 준 것은 요 19:28에 나오는 바, 예수께서 ‘내가 주리고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예수께 동정을 베푼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 그러나 그 동기와 관련없이 그들의 그런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 69:21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하여 주나 두고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던 사람’과 ‘그 나머지 사람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전자의 사람은 어떻게든 예수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우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라면 그 나머지 사람들은 오히려 이를 말라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 신 포도주를 마시우려 한 사람의 모습과 대조하여 예수께 아무런 동정심도 갖고 있지 않은 전체 무리들의 반응을 잘 보여 주고 있다.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예수께서는 다시 큰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다시 크게 소리 지르고’의 말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영혼이 떠나시다’에서 ‘떠나시다’로 번역된 ‘아페켄’의 기본형 ‘아피에미’는

/ 분리, 이탈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와 ‘보내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에미’가 결합된 동사로서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보내다’는 의미이 다.

/ 본문에서는 3인칭 단수 부정 과거 능동태로 쓰였으며, 주체는 ‘영혼’이 아니라 ‘예수’이다.

/ ‘영혼이’라는 주어로 번역된 ‘토 프뉴마’는 목적격이다.

/ 본문을 직역하면 ‘그가 그 영혼을 자기에게서부터 보냈다’이다.

/ 한글 개역 성경은 예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영혼이 주체적으로 떠난 것으로 번역했으나, 원어 성경은 예수께서 자기의 자발적 의지로 자신의 영혼을 포기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 원어 성경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의 죽음이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죄로 인하여 반드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어서 죽는 죽음과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 즉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자기의 영혼을 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 바로 본문에 표현된 이러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그 의 죽음이 단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내어 주신 희생적 죽음임을 보여 준다.

51-56절 ;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죽으시는 역사적인 순간에 일어난 기이한 이적들과 이에 대한 목격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휘장은 일년 중 대제사장만이 속죄 제사를 드리는 대속죄일에 단 한 차례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출 26:33).

신학적으로 이 휘장이 갈라진 것은

/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지성소가 개방됨으로써 구약의 성전에 더 이상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 즉 구약의 희생 제물이 예표하는 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사 구약 제사를 완성하심으로 그 구약 제사의 중심이었던 구약의 성전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 그러나 더 근본적 의미는 이 휘장은 예수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제 예수의 몸이 찢기신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허물어짐을 보여 준다.

/ 즉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동물 제사를 통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온전한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히 10:19,20).

51-53절까지의 내용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 마태는 구약에 거듭 예언된 바 있는 메시야가 죽으셨다는 놀라운 사건에 동반되어 일어난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다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바위가 터지고’란

/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처럼 본문에서 무덤을 막고 있는 바위들이 갈라짐으로 무덤의 문이 열려 죽었던 성도들이 일어나 무덤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52절).

/ 이렇게 볼 때 52절의 무덤문이 열리게 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본문은 이제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죄로 인한 인간의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고, 장차 그를 믿는 모든 사람 들을 생명의 부활로 일으킬 것임을 예표로 보여 주고 있다.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열리며’에 해당되는 ‘아네오크데산’의 기본형 ‘아노이고’는

/ ‘닫혀진 문을 열다’(7:7)는 뜻이다.

/ 본문에서 이 동사는 부정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어 지진과 바위들의 갈라짐으로 인해 무덤들이 열렸음을 보여 준다.

/ 당시의 유대 무덤들은 주로 동굴이었으며, 그 입구는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큰 돌로 단단히 막아 놓았다. 따라서 본문에서 그 무덤들이 열려지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입구를 막고 있었던 큰 돌들이 지진의 영향으로 갈라져 무덤의 통로가 열려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성도’로 번역된 ‘톤 … 하기온’에서 ‘하기온’의 원형 ‘하기오스’는

/ 특히 하나님이나 부모를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하조마이’에서 유래한 형용사로서 ‘존경할 만한’,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이란 의미이다.

/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관련성 때문에 구별되고 존경을 요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떼어 놓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한글 개역 성경은 관사와 함께 쓰인 용례를 ‘성도’로, 그리고 단독으로 쓰인 용례를 ‘거룩한’으로 번역하였다.

/ 본문도 관사 ‘톤’과 함께 쓰여서 ‘성도’로 번역되었으나 ‘톤…하기온’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된 자들, ‘존경받을 만한 거룩한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 본문에서 이는 신약 교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성도’의 개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이들은 예수 시대 이전의 의로운 유대인들, 즉 족장들, 선지자들, 또는 순교자들로 추측된다(D.A. Hagner).

마태는 이들이 ‘자고 있었다’고 기록했는데, 여기에서 ‘케코이메메논’의 원형 ‘코이마오’는 ‘잠자다’, ‘잠들다’는 의미이다.

/ 신약 성경 18회의 용례 중에서 ‘죽다’는 의미로 번역된 곳은 고전 7:39 단 한 경우이지만, 그 의미로 쓰인 곳은 13회나 된다.

/ 인간의 생은 육체적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를 위한 부활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하여 성경은 이러한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 특히 주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 소생 사건시에 그 아이의 소생을 전제로 하여 그와 같이 말씀하신 바 있다(막 5:39).

/ 본문에서도 이 동사의 주체가 무덤 안에 있던 자들이므로 이 동사는 인간의 육체적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 특히 본문에서는 완료 분사로 쓰여서 이미 죽은 자들의 그 죽음의 상태가 무덤이 열리는 순간까지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일어나되’로 번역된 ‘에게르데산’의 기본형 ‘에게이로’는

/ 기본적으로 ‘잠에서 깨우다’, ‘일어나게 하다’는 의미의 타동사이다(행 12:7).

/ 동시에 이 동사는 죽은 자를 ‘살리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10:8 ; 요 12:1).

/ 이 타동사가 본문에서처럼 수동태로 쓰이면 ‘일어나다’, ‘살아나다’는 자동사의 의미가 된다(요 11:29 ; 고전 15:43).

/ 앞에서는 ‘잠자다’는 뜻의 동사 ‘코이마오’를 사용하여 죽은 성도들의 그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가 하면, 본문에서는 ‘잠에서 깨다’는 의미의 ‘에게이로’ 동사를 사용하여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 이들이 어떤 몸의 형태로 다시 살아났는지, 그리고 살아난 후에 얼마나 생존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났으며, 이 부활이 3일 후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장차 온 성도들의 부활을 예표해 주는 실례가 되었다.

무덤들이 열리며 …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52-53) ; 해석이 분분한 난해 구절이다. 죽은 자들 중 누가 살아났는지, 죽었을 때의 몸과 나이 그대로 살아났는지, 살다가 다시 죽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만큼만 그대로 믿으면 된다.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52,53절의 상황에 대해 한글 개역 성경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번역했다.

a. 성도들의 몸이 무덤에서 일어났다.

b.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c. 그 후에 성도들이 무덤에서 밖으로 나왔다.

d. 그리고 거룩한 성에 들어갔다는 순서이다.

그러나 원어 성경에는 b와 c의 순서가 아닌, c와 b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즉 부활한 성도들이 무덤에서 밖으로 나온 이후에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이 거룩한 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는 ‘나와서’로 번역된 ‘엑셀돈테스’가 본절 맨 앞에 부정과거 분사로 쓰여서 본절 동사 중 시제가 제일 앞선다는 것을 보여 주며, ‘~후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메타’가 이끄는 ‘예수의 부활 후에’로 번역된 전치사구 ‘메타 텐 에게르신 아우 투’는 ‘들어가’에 해당하는 ‘에이셀돈’ 바로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어 성경은 ‘~ 한 후에’라는 뜻의 전치사 ‘메타’까지 사용하여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 성경의 순서를 따르면 번역이 올바르지 않다.

또한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이 예수의 부활 후에 무덤 밖으로 나왔다면 그때까지 3일간을 무덤 안에서 그대로 머물렀다는 비논리적 결론이 도출되고 만다. 그러므로 원어 성경의 표현대로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은 곧바로 무덤 밖으로 나왔으며, 그 이후에 예수의 부활이 있었고,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거룩한 성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덤 밖으로 나온 후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기까지 적어도 3일 동안은 성 밖 어딘가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보이니라’로 번역된 ‘에네파니스데산’의 기본형 ‘엠파니조’는

/ 다른 사람의 눈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요 14:21). 이 동사가 법적으로 사용될 때는 ‘고소하다’(행 24:1)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 따라서 이 동사는 공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거나 드러내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히 9:24).

/ ‘엠파니조’ 동사가 갖고 있는 이러한 의미를 볼 때 많은 성도들이 살아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보인 것은, 복음서 기자가 전설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공적으로 확증된 사건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진과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였다.

전숭에 의하면 그 백부장의 이름은 ‘페트로니우스(Petronius)’였고 후에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으며, 성경이 백부장의 이 고백을 굳이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때를 계기로 백부장은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거기에서는 많은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섬기려고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으로서 예수께로부터 고침을 받은 여인이다(눅 8:2,3).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이 여인에게 자기를 보이셨으며(막 16:9), 또한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 소식을 알리라고 당부하셨고(요 20:17), 그녀는 이러한 예수의 말씀대로 예수의 부활 소식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알렸다(요 20:18).

십자가의 죽음과 승리 — 늘푸른교회

로마서5:6-11절

Jessie Penn Lewis, The Centrality of the Cross. [십자가의 도],1998. 두란노.

번역자 이현수목사(하와이 갈보리 채플 담임)는 이 책이 “기독교 역사에서 쓰여진 모든 글들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위대한 영적 고전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사도바울 이후로 2000년 교회사 가운데 이토록 심오하고 세밀하게 십자가의 도를 제시한 주의 종이 있었는가 자문하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중심성

복음을 이해하는데 십자가는 ‘구심점’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주도하시고 우주를 다스리시는 모든 면에서 중심축입니다. 가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의 균형을 잃고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고 있는 이유는 이 십자가의 ‘구심점’으로부터 벗어나서 세상 학문과 철학에 기만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Dr. Forsyth, The Cruciality of the Cross. “오직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에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영적 권위와 생명력이 충족될 뿐아니라 복음의 올바른 방향 제시와 그 최종 목표가 달성된다”고 말했습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과 속죄를 위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 곧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진리는 로마서 5장 6절부터 11절에 다시 반복해서 강조되어 있습니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16:4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구절은 너무 간단 명료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2)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며, 3)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4)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5) 이런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운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아멘입니까 여러분? 여기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세가지 진리인 대속의 죽음, 하나님과 화목, 죄인의 구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1. 십자가는 죄에 대한 죽음과 승리의 선언입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죄와 육체와 세상과 사탄에 대한 승리입니다. 로마서 6장은 신약성경중에 가장 기본적인 십자가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죄인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술돼 있습니다. 로마서 6장은 복음을 깨닫는데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죄인이 어떻게 죄와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수 있는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탄은 로마서 6장이 복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게 혼미한 영으로 방해하고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2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이 구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죄인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알지도 못할 때 먼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사람들은 믿음으로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함께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나도 그 때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 실제로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해 사형당한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이처럼 내가 지은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것을 이기려고 대항하는 노력에 있는 게 아니고 그것에 대해 죽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비결을 깨달았다면 더 이상 죄의 권능, 사탄에 대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가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조롱하면서도 인간에게 아직도 고쳐쓸 수 있는 괜찮은 부분이 남아 있는 것처럼 속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완전부패와 타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에겐 선한 의지가 남아 있고, 교육을 잘 받고 노력하면 스스로 얼마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부추깁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이 거짓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불도를 닦아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구원얻겠다고 노력하는 건 바로 인간 스스로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도 사단이 주는 거짓된 것입니다. 인간이 모두 전적으로 타락했다가 예수님을 믿어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게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도를 뭐라고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때 여러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말마암아. 이것을 고백하는 의식이 바로 침례인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에서 바울 사도는“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1)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1)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침례로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믿고 침례받고 고백하고 표현하고 그랬으면서도 아직도 죄 사함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면 말이 안됩니다.

2.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과 승리의 선언입니다.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십자가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여기서 바울 사도는 “내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는 죄에 대해 죽었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고 세상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세상을 핑계대면 죄에 휩쓸려 다니고 예수님을 욕되게 하며 구원을 잃어버릴 지경까지 이른 사람들이 많다고 걱정들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렇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과거의 죄에 대해서만 죽고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영광에 유혹을 받고 또 그것을 얻으려고 얻은 후엔 그것을 즐기느라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책망하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가령 설교하면서 돈벌이에 너무 욕심내지 말라, 집 사고 좋은 차 사고 여행다니며 즐기려는 욕심을 너무 내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을 따라가다보면 이름 뿐인 교인으로 인생을 마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것 따라가면서 언제 한번 주님의 교회 위해 헌금하고, 시간 내어 봉사하고, 목자, 집사님, 장로님 되어 섬기고 그럴 기회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세상은 우리를 속여서 죄짓게 하고 멸망으로 빠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죄에 대해서 처럼 세상에 대해서도 죽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십자가는 육신에 대한 죽음과 승리의 선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 다시 살아난 체험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정욕’과 육신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의지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는 육신과 성령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장 19-21절을 보면 육체의 욕망이 어떤 것들인지 잘 예시되어 있습니다. 음란한 행동, 호색, 우상숭배, 원한, 분쟁, 시기, 분냄, 파당, 분열, 이단, 술취함, 방탕함, 등.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런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았고 아직도 다 정리 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다고 봐도 틀림없습니다. 겉으로는 선생님, 교수, 의사, 사장, 공무원, 사회사업가, 자선가, 목사, 승려, 정치지도자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생활을 들여다 보면 거의 죄가운데 살아갑니다.

금요일 인터넷 조선일보-중국 공무원들의 타락상에 대한 기사: 애인/정부를 두고 살아가는 게 능력의 상징처럼 되었다고 탄식하는 기사. 중국 뿐이겠습니까?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어 육신의 욕망을 소멸시키지 못하면 기회만 있으면 이렇게 될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버릇’과 ‘습관’, 육신에 속한 모든 정욕과 욕심을 고치려면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술 담배 끊으려고 애쓰는 것-자기 의지로만 고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믿고 나서 냄새도 맡기 싫어져서 습관을 고쳤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4. 십자가는 사탄에 대한 승리의 선언입니다.

골로새서 2장 14-15절에는 사단의 권세에 대하여 십자가로 승리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 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2)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이제 이 세상 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상 임금은 하나님을 거슬려 행하는 세상 통치자들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단의 권세가 십자가에서 깨뜨려졌습니다. 왠고하니 사단이 역사할 수 있는 근거는 죄악입니다. 그 죄악이 십자가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십자가는 사단의 세력을 깨뜨려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만들어 승리를 선포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마귀를 완전히 멸망시켰으니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당하겠습니까? 이건 마치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웠던 나무에 자신이 메달려 죽은 꼴과 똑같습니다(에스더7:10).

세상 사람들은 죄짓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아직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귀와 죄악이 주는 육신의 즐거움을 더 사랑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하며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즐거움을 모른다면 거듭난 성도가 아닙니다. 본문 11절을 보세요.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신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해볼려다 안되는 일이 있다면 그냥 내 버려두고 주를 따르며 즐겁게 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 외엔 영원한 게 없는 세상에서 뭘 이루고 싶어 그렇게 힘들어합니까?

늘푸른 교우 여러분!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세상으로부터의 벗어난 자유를 즐기며 삽시다. 성령께 속한 사람들이 세상의 영광을 위해 애쓰는 건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하마터면 지옥 갈 뻔했다가 천국가게 됐는데 뭘 더 바랍니까? 세상 욕심에 휘둘리지 마세요. 유행 따라 옷 입는 거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세상보다 천국에 부유한 사람이 됩시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아무리 21세기, 22세기를 살더라도 세속화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는 것도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은 또한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향하여 죽는 경험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에 진정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한 성도만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 풍조의 유혹을 이겨낼 것이며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속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지금은 주님을 따르지 못하지만 언젠가 따라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도 주님을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제가 뭘 말하려는가 하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백조와 오리 알이 함께 부화되어 깨어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오리새끼가 크면서 백조로 변할까요? 사과 나무가 크면서 배나무로 변할까요? 아닙니다. 처음부터 오리는 시간이 흘러도 오리로 남아 있고, 사과나무는 아무리 자라도 그냥 사과나무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신자들은 처음부터 출발할 때부터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커가는 것입니다. 교회 오래 다니다 보면 변해서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나중에 그렇게 사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 오래 다닌다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이 객관적인 십자가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붙잡고 십자가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아직 주관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십자가의 능력은 언제든 나타날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에 있는 것이지 우리 경험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Dr. Mabie는 “바울에게 십자가의 도는 우주의 신비를 열며, 모든 우주의 비밀을 풀며, 모든 것을 화목시키는 열쇠로 인식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어둠 : 은유인가, 사실인가?

This excellent resource contains 12 DVDs (each 30-40 min. long) that explore the biblical and scientific truths of the Bible’s opening chapters. The series lays a vital foundation for understanding both the world around us, and the Gospel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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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성경적 의미 제1회 예수님은 왜 죽어야 하셨나

제2회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나

제3회 예수님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셨나

제4회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이 무엇이 다른가

제5회 예수님의 부활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제6회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오해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죽음을 인간적인 면에서 접근하고 조명하며 이해하기 때문이다. 고난주간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의 조롱, 십자가에서 육적인 고통 그리고 육적인 죽음을 통해서 슬픔을 자아내게 만들려는 시도가 늘 있어왔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영화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 그 고통을 이해시키고 감동시키려 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오해하는 자들

작년 고난주간에 개봉되었던 멜깁슨 감독의 에 대한 감동을 간직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12시간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로 고난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으로 시작되는 고난의 여정, 성전 수비하는 유대 병사에게 잡혀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대제사장들과 공회의 정죄를 받으시고,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다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로마 병정들과 유대 군중들의 희롱과 채찍을 당하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면서 쓰러지시고, 구레네 시몬의 도움으로 골고다까지 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

그러한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재현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사실적으로 느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될까? 그것이 ‘자기 십자갗를 지는 행위(마 10:38, 16:24, 막 8:34, 눅 14:27)일까?

예수님 옆에서 함께 못 박힌 강도의 고통도 생각해보자. 그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로마 군인들의 창에 허리를 찔렸다. 그리고도 안식일 전에 숨이 끊어지지 않자 다리가 꺾여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고통스럽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 당연하며, 그 고통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인가?

예수님의 죽음이 남을 위한 죽음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라를 위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문 받고 죽은 독립투사의 죽음도 의미 있으며, 자신이 죽음으로서 남을 구하기 위해서 철길에 뛰어든 사람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일한 의미인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생각해 보자. 스데반의 죽음은 어떠한가? 죽기까지 돌에 맞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는 더욱 세찬 고난을 받았다.

다음은 교회사 저술의 시조로 알려지는 에유세비오스의 글인데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손도끼로 타살된 자들이 있었고, 갑바도키아에 있어서는 수족을 잘린 자가 있었으며, 메소포타미아에 있어서는 발을 묶인 후 거꾸로 매달리워 소살된 신자도 있었다. 안티오키아에 있어서는, 곧 살해되지 않고, 둔하게 불타는 화로 위에서 불고기처럼 되어 괴롭게 살해되는 신자도 있었다. 폰투스(Pontus성경:본도)에서는 손톱 아래에 갈대로 박힌 신자도 있었고, 불에 용해된 납으로 등 뒤에 부은바 된 자도 있었으며, 복부 및 기타의 부분에, 예절상 말할 수도 없는 야비하고도 욕된 고통을 받은 자도 있었다.” 그들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보다 덜 했을까?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이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이해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있고,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인식하게 하는 효과는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고통을 인간적인 고통만으로 접근하게 되면 더욱 고통스러운 고난을 당하면서 죽은 선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빛을 잃게 될 수가 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최대의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죽음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게 하셨을 것이 아닌가?

사람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나?

인간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한 모형으로서 죽음이 아니다. 인간 죽음의 의미는 인간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영생을 사모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 이 세상의 삶이 힘든 것은 고통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의미가 있다(창 3:17~19).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죽음의 원인은 무엇이며, 누구의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인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죽음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책임질 죄가 아닌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 아담을 통해서 왔기 때문에 ‘아담으로 인한 생명’을 가진 자는 그 생명의 근원인 아담과 동일한 생명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로 인해서 생명을 가진 모든 자들은 ‘그들의 생명, 생육, 번성 그리고 죽음’에 관한한 아담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도 동일한 동참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 인한 죽음의 영향은 모든 인간에게도 미치는 것이다(롬 5:14, 고전 15:22). 그래서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은 ‘정녕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곧 ‘정녕 죽을 생명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자들 중에서 스스로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들은 이 원리를 모르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처에 자칭 그리스도라는 자들이 자신들을 통한 ‘성결이나 거룩’을 주장하는 것은 100% 거짓 그리스도요 적그리스도다. 왜냐하면 그들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정녕 죽을 생명체’로서 어느 누구도 아담의 죄를 책임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아담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아닌 생명체로 출생한(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담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는 자격이 있다.

사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남을 위해서 대신 죽은 사람도 진정으로 남을 위한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다. 만일 한 사람이 남을 위해서 죽었다면 대신 생명을 받은 그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아담의 자손들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죽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죽은 그 사람도 단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시간, 즉 남이 죽을 시간에 남을 대신해서 일찍 흙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할 생명’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을 맛볼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정녕 죽을’ 인간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인간들을 위해서 내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만이 진정한 의미의 ‘대신 죽는 죽음’이 되는 것이고,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대신 얻게 되어서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창세전에 존재하셨던 생명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동정녀를 통한 탄생(여자의 후손)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인간의 몸을 빌어서 탄생하시기 때문에 여자만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교리가 되어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예수님이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아담을 비롯한 아담의 후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된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육체로 영원히 거하지 못하는 것이 육적인 죽음이고,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영적인 죽음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서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만일 범죄함이 없고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육체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가 있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육체는 원래의 요소인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고(창 3:19),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거하지 아니하는 육체가 되었다(창 6:3). 만일 범죄 후에 아담의 ‘생육, 번성하는 복’마저도 잃어버렸다면, 아담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육체적인 회복’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것은 ‘(정녕)죽을 육체’를 대신할 뿐만 아니라 ‘영생할 신령한 육체로의 회복’이라는 이중적인 사역이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인 탄생과 죽음이라는 사역을 통해서 완성하셨고(요 19:30), 후자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됨으로써 길을 열어 놓으셨다(고전 15:20, 약1:18). 그래서 아담으로 하여금 육체는 생육, 번성하는 사명을 감당하고는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령한 육체를 입게 하셨다(고전 15:44,46).

예수님의 죽으심이 왜 다른가

인간들의 육적인 죽음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일뿐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정녕 죽는 죽음’을 죽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결코 ‘정녕 죽는 죽음’을 맛볼 수가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죽지 않는다. 진정한 죽음은 예수님만이 가능하다. 인간은 단지 잘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정녕 죽는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고통은 죄로 인해 죽을 한 인간의 죽음 정도의 고통이 아니며, 한 인간이 십자가에 못 박혀봄으로서 맛볼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을 ‘자는 상태’로 표현하셨다(마 27:52, 요 11:11-13, 행 7:60, 13:36, 고전 15:6,18,20,51, 살전4:13-15, 벧후 3:4, 마 9:24, 막 5:39, 눅 8:52).

자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아니하는 정지의 행위일 뿐이나 죽는 것은 고통이 따르는 변화의 행위이다. 만일 예수님의 그 고통을 좁은 인간의 소견으로 헤아려 본다면 예수님의 고통은 모든 인류가 동시에 죽는 고통을 한꺼번에 겪으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나 고통이 크셨으면 보통 인간이 죽는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인 6시간 만에 돌아가셨을까?(막 15:25,33~37) 양쪽의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그 시간까지도 죽지 않아서 다리가 꺾여서 죽였는데,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물과 피를 쏟으셨다(요 19:31~4).

예수님의 죽으심은 여러 측면에서 인간의 죽음과 다르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의 의미를 통해서 살펴보면서 인간의 죽음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첫째, 인간의 죽음은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자는 것’인데 비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진정한 죽음의 의미와 그 고통을 아는 죽음’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죽음을 해결하러 오신 분을 죽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자신들이 달려야할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무지한 죄인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인간들은 죽지 않고 단지 잠만 자게 된다. 그래서 진정한 죽음의 고통을 모른다. 인간들은 그 자는 죽음의 고통도 감당하지 못해서 고통 없이 순식간에 잠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죄인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죄인들을 향해서도 죄사함을 간구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

둘째, 인간의 죽음은 ‘죽음을 선고받은 생명체의 죽음’인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은 ‘영생하는 생명체의 죽음’이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생명체(산 영)가 되었다가 범죄함으로 죽게 된 생명체지만, 예수님은 영생하는 생명체를 가지신 분으로서 죽을 생명체인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신 내어줌으로써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죽음이다(고전 15:45). 그러므로 아담을 통한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선고받아서 영혼이 떠날 때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체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살려주기 위한 생명체이시다. 죽기 전에 예수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도 영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인간에게는 죽기 전의 삶이 의미 있고, 예수님은 죽는 순간 이후가 더욱 의미 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셋째, 인간의 죽음은 ‘생명을 얻는 죽음’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잃는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으로서 아담으로 말미암은 생명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소유하실 수 있었던 생명을 잃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인간 세상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은 하나님 및 모든 인류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인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세상에서의 관계를 정리하시는 순간이다. 인간의 몸을 입기 위하여 마리아의 몸을 빌리셨지만 인간적인 생명체로 영원히 존재하실 수 없는 분이시고, 회복된 하나님 나라에서도 인간적인 관계의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랑하던 제자인 요한과의 관계를 맺어주신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넷째,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죽음’인데 비해서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죽음’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그래서 인간들이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버림받을 인간들 대신에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셨다. 자식을 버리기까지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관계성보다는 ‘하나님’의 공의와 위엄을 느끼셨다.

대신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고, 사랑을 받고 있다. 그것도 피조물로서 사랑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님이 받아야 할 자녀로서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인간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하여 ‘죽음이 생명의 끝이며, 모든 인간들이 죽어야 할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죽는 듯한 행위(흙으로 돌아감)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마감하게 하셨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다섯째, 인간의 죽음은 ‘한 생명체의 소멸’인데 비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의 근원의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은 한 생명체의 소멸이다. 그러나 ‘우주의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주의) 모든 생명의 근원이 소멸이 되는 것이므로 세상의 모든 생명이 소멸되는 것이다. 그 생명의 근원이 마르는 순간에 예수님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땀과 피를 쏟으신 고통 속에서 느끼는 갈증이 아니라 생명의 소멸로 인한 갈함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통을 이기도록 준 신(쓸개탄; 마 27:34) 포도주을 맛보신 후에는 마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생명을 소생하게 하는 생명수가 아니기 때문이다(계 21:6,22:17).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의 새 포도주를 마시기를 원하셨다(마 26:29).

“다 이루었다”(요19:30).

여섯째, 인간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인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게 하신 것은 범죄한 아담을 대신하여 범죄하지 않는 마지막 아담이 되어서 첫 아담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을 죽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사역을 사단의 유혹과 인간들과의 관계(가족, 제자) 및 큰 두려움 속에서도 십자가상에서 완성하신 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마 27:50, 막 15:37).

일곱째, 인간의 죽음은 ‘육체적인 소멸’인데 비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영과 육의 죽음’이다. 인간의 육체는 죽을 때에 소멸되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그 영혼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낙원에 가게 되고, 마귀에게 속하여서 거듭나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이 거하지 않으시는 음부에서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체가 십자가상에서 죽게 되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 음부에 내려가게 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혼의 문제를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맡기시고 영적인 죽음을 맞으신 것이다(눅 23:46). 그러나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살리셔서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셨다(삼하 7:12,행 2:27,30,롬 10:7, 벧전 3:19).

예수님이 겪으신 그 죽음의 잔을 인간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무지한 인간은 자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행위와 동일시하여 그 잔을 감당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필수적인 단계가 예수님의 죽으심인데, 그 죽음의 의미를 모르면서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잔을 감당하고서라도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좋은 자리에 앉게 하려고 하였다(마 20:20~23, 막 10:35~40).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0~23, 막 10: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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