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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3편 강해 | [하루 한 장] 시편63편_주는 나의 하나님 12702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시편 63편 강해 – [하루 한 장] 시편63편_주는 나의 하나님“?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Ar.taphoamini.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ar.taphoamini.com/photos.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홍융희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5,178회 및 좋아요 124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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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7 [하루 한 장]“주는 나의 하나님” (시63편)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http://sungminch.com
시편 63편은 “하나님이여”라고
주께 항복하면서 애타는 마음으로
주만 바라보는 시편중 하나입니다
다른 답이 없고 해결책이 없어
주님만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 아니시냐고
나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고
주님을 노래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을 위한, 나의 하나님!
나를 창조하시고 도우시고
나 때문에 잠 못 주무시는
바로 나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었기에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물이 아니라
주님을 갈망하며 앙모합니다
내 삶의 해결책이 물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그는 응답을 받고
그의 입술은 찬양하게 되고
그의 손은 경배하게 됩니다
이전과는 용도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는 삶을 삽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곳은 바로
하나님을 뵙는 성소였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역사입니다
내일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간절히 소망하며 붙잡아
주님의 크신 인자하심이
내 생명보다 나음을 깨닫는
복된 예배시간이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63편은 “하나님이여”라고
주께 항복하면서 애타는 마음으로
주만 바라보는 시편중 하나입니다
다른 답이 없고 해결책이 없어
주님만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 아니시냐고
나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고
주님을 노래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을 위한, 나의 하나님!
나를 창조하시고 도우시고
나 때문에 잠 못 주무시는
바로 나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었기에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물이 아니라
주님을 갈망하며 앙모합니다
내 삶의 해결책이 물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그는 응답을 받고
그의 입술은 찬양하게 되고
그의 손은 경배하게 됩니다
이전과는 용도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는 삶을 삽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곳은 바로
하나님을 뵙는 성소였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역사입니다
내일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간절히 소망하며 붙잡아
주님의 크신 인자하심이
내 생명보다 나음을 깨닫는
복된 예배시간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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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5(목) “시편 63:1-11” / 작성

그래서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었던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 무릎을 꿇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복을 주시다’는 뜻입니다.

+ 여기에 보기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12/2021

View: 9184

Không có tiêu đề

본문 시편 63편 8절에 보면,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생활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적 친밀함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10/24/2022

View: 1133

시편 63편 & 성경주석

시 63편은 시편에서 가장 감미로운 시들 중 하나이다. 이 시에는 탄원이 들어 있지 않다. 즐거움, 찬양, 감사,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열망 등은 있지만 …

+ 여기에 보기

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8/27/2021

View: 8509

시편 63편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본문 …

매일성경본문을 따라 시편 63편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먼저 통독하고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과 주석을 확인한 후, 새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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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7/14/2021

View: 5548

히브리어 시편 63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새번역,3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말성경,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기에 내 입술이 …

+ 더 읽기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8/12/2022

View: 7817

생명보다 나은 사랑(시63편) – 유평교회

본문 : 시편 63편. 설교자 : 최종혁.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죽어서 천국이라는 좋은 곳에 갈 수 있게 된다는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2/1/2022

View: 9204

시편 63편 아침 묵상: 광야의 시기를 버티는 방법

Psa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 …

+ 여기를 클릭

Source: www.xn--9d0bqnz9v7ldq4jll2ac5f.org

Date Published: 5/22/2022

View: 3007

시편강해 – (63). 주를 갈망하는 영혼 – 벧샬롬교회

시편 63편은 초대교회가 주일 아침예배를 드릴 때 가장 먼저 부르는 시편 찬송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왜 그들은 많은 시편 찬송 중에서 63편을 첫 찬송으로 불렀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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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9/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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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3편) 내 영혼아, 어떻게 살래 – 다음블로그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하며 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무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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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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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시편63편_주는 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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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63편 강해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5,178회
  • Likes: 좋아요 124개
  • Date Published: 2018. 4.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D4Vs0-3jhY

2018/07/05(목) “시편 63:1-11”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63:1-11

찬송가 183장 ‘빈들에 마른 풀 같이’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을 바라보기(1-7절)

오늘 본문의 표제어에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에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었던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때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있을 때입니다. 특히 사무엘하 15:23과 28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다윗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에게 쫓김을 당하여 광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때, 마음이 아주 참담할 때에 이 시편을 지었습니다.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이여’라는 말로 입을 엽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기도를 드릴 때, 특히 하나님께 올려드릴 내용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더 줄여서,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 말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듯이, 다윗이 부르는 “하나님이여!”에도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 예루살렘 왕궁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지라도 “하나님! 어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좌절하지도, 원망하지도, 항의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다윗은 마른 풀 외에 다른 것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그 풀과 흡사한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찬송가 183장 가사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처럼, 빈들의 마른 풀과 시든 자기 영혼이 동일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들에 있는 풀에게 물이 필요하듯이,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을 찾되 ‘간절히’ 찾는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새벽’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찾되 아침 일찍부터 하나님을 열심히 찾았음을 의미합니다. 광야에 사는 사람은 아침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습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물을 받아서 와야 합니다. 그래야 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삼 일 또는 일주일 금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40일을 금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을 금식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을 며칠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금식할 때에는 물을 평소보다 몇 배로 많이 마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물을 금식하는 것과 같이 갈급하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갈급함과 하나님을 소망함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이것은 과거의 시절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했던 때가 얼마나 좋았었는지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가진 것을 다 허비하고, 빈들에 있게 되었을 때에, 게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주는 사람이 없을 때에 아버지가 계신 집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읊조립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또한 다윗이 성소를 바라보았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계신 집을 그리워하고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귀향하고 싶었을 때에 귀향하면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집에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계셨지만, 다윗에게는 예루살렘에 다윗의 목을 노리는 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간절한 고백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3-4)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자(헤세드)’는 ‘자비’, ‘변함없는 사랑’, ‘온전한 친절’ 등으로 바꿀 수 있는데, 신약성경의 ‘사랑(아가페)’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생명인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사랑)이 더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처럼,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이, 육체의 생명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은 사람을 배신하여, 짓누르고 심하면 생명까지 앗아가는 일도 행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사람을 배신하거나 사람을 생명을 앗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살려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으므로, 자신의 평생(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송축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송축하다’는 단어는 인간의 편에서는 ‘무릎을 꿇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복을 주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손을 들다’는 것은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고,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놓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서서 손을 펴고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서 우리들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 손을 펴야 한다는 것도 일깨워 주었습니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다윗은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것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는 것과 같이 만족스럽다고 고백합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지방과 기름끼’인데, ‘최상의 음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육고기를 선호하든, 생선을 선호하든, 채식을 선호하든 가장 맛있게 먹는 음식이 풍성한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아하는 음식이 차려져 있으면, 입이 귀에 걸리고 노래가 저절로 나올 지경의 상태가 됩니다. 그것을 확대할 수 있을 때까지 확대를 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영적인 맛을 느끼게 되는 5절의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6-7)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침상에서 주를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잠을 잘 자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다윗이 침상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칼을 겨누고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키우면서 온갖 정성을 다했던 것을 떠올리면 한없이 서글펐을 것입니다. 또한 침상에서 아히도벨을 비롯한 자신의 신하였다가 압살롬에게 붙은 사람들을 기억했다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은총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숙면하게하신 은총에 감사하며, 새벽 일찍 깨어, 자신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날개 아래 머무는 기쁨을 누리겠노라 결단합니다.

광야에서 누리는 승리의 확신 (8-11절)

다윗의 고백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머물겠노라 고백했던 다윗은,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겠노라 고백합니다. ‘따르다’는 단어의 원 의미는 ‘달라붙다’입니다. 마치 우리의 몸의 살이 뼈에 달라붙듯이 붙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그만큼 하나님과 동행하고픈 마음이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자신을 붙드신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의 ‘오른손’, ‘오른’, ‘오른편’ 등은 대부분이 ‘하나님의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사야 41:10에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입니다. 하나님은 왼손이 힘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오른손, 왼손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오른손으로 붙들어 준다”입니다. 시편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시편 60:5에도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주의 왼손을 붙드시고’나 ‘하나님의 왼손으로 구원하시고’와 같은 표현은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꼭 붙어있고, 하나님은 다윗을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과 다윗의 친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대적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잘 말하고 있습니다.

(9-10)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대적을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는 그들’이라고 명명했다. 압살롬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다윗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역전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적들이 땅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죽고), 승냥이(여우 또는 자칼)의 밥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히도벨과 압살롬의 마지막을 압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가다가 그의 긴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리고, 노새만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요압장군의 부하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왕’이라는 말 앞에 ‘그’라는 정관사를 붙여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다윗’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하나님 안에서’입니다. 즉 ‘그 왕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입니다. 또한 다윗이 ‘나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라고 하지 않고, ‘그 왕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라고 한 것은, 비록 자신은 지금 광야에 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확실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편은 표제어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다윗이 유다 광야로 나간 것은 사냥이나 산행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을 돌아보기 위함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아들의 반란에 쫓겨 간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시편은 대적자들의 잘잘못은 낱낱이 고발하지 않고, 신앙적 다짐으로 가득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다윗은 지금 그 자리에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심으심의 결과임을 인정했기에, 거기서 온 삶과 신앙을 다하여 하나님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은 상황보다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학교, 삶의 자리 등, 우리를 심으신 곳에서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늘 하루도 온 마음과 온 의지를 다하여 살아가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다윗이 아들에게 반란을 당하고,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해 마른 풀 외에는 다른 것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광야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대적들을 증오하며 복수를 결심하거나, 세상을 향해 불평과 저주를 퍼붓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의 상황이 다윗과 같이 처참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은 것을 잊지 않게 하시고,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산해진미를 먹는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에서 오는 만족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임을 잘 새겨놓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우리가 매일 잠자리에서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하시고, 아침에 일어날 때에 말씀과 함께 함으로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으신 삶의 자리가 어느 곳이든지, 또 어떤 환경이든지, 또한 거기서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께 붙어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고, 온 마음과 온 의지를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행하는 일을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에 겸손하게 우리를 내어드리는 은총의 한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다윗은 아들에게 반란을 당하여 광야에 있을 때에도 대적자들보다 하나님께 더욱 집중했습니다. 당신의 지난 삶에서는 어떠하셨습니까?

2.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변함없는 사랑, 자비)이 생명보다 낫기에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도 그와 같은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3. 다윗은 침상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새벽에 주님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합니다. 당신의 밤과 새벽은 어떠합니까? 어떻게 바꾸시겠습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시편 63편 & 성경주석

<시편 63편 서론>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다윗은 사울 왕의 분노를 피해 유다 광야에 있을 때 시 63편을 지었다(표제를 참조하라. 참조 삼상 23:13, 14, 23, 24; 24:1~3). 시 63편은 시편에서 가장 감미로운 시들 중 하나이다. 이 시에는 탄원이 들어 있지 않다. 즐거움, 찬양, 감사,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열망 등은 있지만 세속적, 영적 이익을 구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 이 찬미는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갈망(1~4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느끼는 그의 기쁨(5~8절), 악인들의 궁극적 파멸과 하나님 안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9~11절)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시편 63편 개역한글>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 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시편 63편 성경주석>

63:1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히브리어 샤하르(s∨ah.ar), “새벽에 찾다.” 이는 곧 “간절히 찾다” 혹은 “열렬히 찾다”를 의미한다.

63:1 곤핍한.

참조 시 42:2 주석.

63:1 내 영혼.

“나”를 일컫는 관용어(참조 시 16:10 주석).

63:1 앙모하나이다.

곧 “사모함으로 쇠하나이다.”

63:2 주의 권능과 영광을.

다윗이 셰키나 같은, 성소 봉사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증거들을 상기하고 있는 듯하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349).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의 가장 큰 증거는 사람의 변화된 삶이다.

63:3 생명보다 나으므로.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생명보다도 더 감미로운 일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소유한 것들 중 생명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63:4 이러므로.

즉 “그 결과로서” 또는 “따라서.”

63:4 송축하며.

히브리어 바라크(barak). 이 단어는 경우에 따라서 의미가 약간씩 다르게 쓰인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크하실 때는, 하나님이 그에게 유익한 선물을 주시는 것 또는 그가 그 같은 선물을 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크할 경우에는 그가 하나님을 유익한 선물들을 베푸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참조 시 63:4; 103:1, 2, 20~22; 145:2 등).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크할 경우에는, 그 사람이 상대가 하나님께로부터 유익한 선물들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70인역」에서는 바라크가 보통 “~에 대하여 좋게 말하다”라는 의미의 율로게오(eulogeo-)로 번역되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바라크가 정반대로 “저주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들도 있다(참조 욥 1:5 주석).

63:4 내 손을 들리이다.

참조 시 28:2 주석; 시 134:2.

63:5 만족할 것이라.

참조 시 36:8 주석. 1절에서는 갈증을 해소해 주는 물의 비유가 사용된 반면, 여기서는 배고픔을 만족시켜 주는 음식의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63:6 나의 침상에서.

즉 밤 동안에. 밤에는 낮에 당했던 어려움들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다윗은 광야에서 고뇌의 밤 동안에 상당히 많은 시간 하나님을 생각하며 보냈음이 분명하다. 우리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간에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63:6 밤중에.

밤은 보통 삼경으로 구분되었다(참조 애 2:19; 삼상 11:11). 다윗은 추격받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분명 쉽게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잠 못 이루는 시간들을 명상으로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63: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하나님이 과거에 베풀어 주신 은총은 현재의 감사 조건인 동시에 미래에 받을 도움의 보증이기도 하다.

63:7 주의 날개 그늘.

참조 시 17:8 주석; 시 36:7; 57:1; 61:4.

63:8 가까이 따르니.

히브리어 다바크(dabaq), “부착하다”, “달라붙다”(참조 신 4:4; 10:20 주석; 창 2:24).

63:9 저희는.

시인은 원수들의 운명과 하나님이 인도하는 자신의 미래를 서로 대비시키고 있다. 시인을 파멸시키려는 모의를 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파멸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애정을 가지고 그의 오른손으로 의인들을 붙잡아 준다. 그 동일한 오른손이 악인들을 멸망시키는 일에도 사용될 것이다.

63:10 칼의 세력에.

문자적으로 “칼의 손에 의하여.” “칼”이 마치 손을 가진 것처럼 의인화되었다.

63:11 왕.

시인은 이제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일컫는다. 비록 사울이 언제 죽일지 몰라서 도망다니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이 자신에게 기름부은 것에 대한 성취로서 결국에는 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고 있다(참조 삼상 16:13). 다윗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는 억제할 수 없는 생각이 스며 있는 듯하다. 그의 말은 자기의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낸 것이다.

63:11 주로.

즉 하나님으로. 맹세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신 6:13 주석을 참조하라. 참조 신 10:20; 사 65:16.

63:11 거짓말하는.

거짓말을 해서 승리를 얻고자 시도한 자들은 그 계획이 좌절될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살해 계획으로부터 보호될 것과 자기의 원수들이 파멸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들 중 하나는 자신이 분명히 궁극적인 기쁨과 승리를 누리게 될 것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시편 63편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본문해설 및 설교준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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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3편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밀감을 갈망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과 찬양,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이루어져 있는 63편에는, 그러나 공식적인 청원은 없습니다. 본문의 주된 목적은 예배자가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의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평생토록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예배자를 성전으로 들어오도록 끌어 들이고(1-2절), 성전 속에 있어야 하는 이유와 이점(3-8절) 그리고 동료 예배자와 예배자를 반대하는 대적에 대한 결과(9-11절)를 담고 있습니다.

매일성경본문을 따라 시편 63편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먼저 통독하고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과 주석을 확인한 후, 새벽예배설교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시편 제63편

1. 이 시편의 저자

– 다윗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2. 이 시편을 쓰게 된 원인

–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었을 때 쓰여졌습니다. 아마도 압살롬의 반역으로부터 도망 가 있는 동안에 쓰여졌을 것입니다(삼하 15:1-17:24).

3. 이 시편에 대한 풍부한 찬사

– 많은 주석가들은 이 시편이 시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시편들 중에 하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성(聖)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성도들은 시편 63편을 읽지 않고서 하루를 보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4. 이 시편의 주제

– 저자는 역경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가득한 시간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5. 이 시편의 개요

– 다윗이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63:1, 2)

그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곳 : 다윗은 지금 “물이 없어 메마르고 목마른 광야”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 광야가 자연 속의 광야인지 아니면 그의 영혼이 영적으로 황무지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는 때 : “아침 일찍 당신을 찾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다윗의 이 말은, “아침 일찍”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는 방법 : 목마르고 갈망하며 즉, 그의 영혼과 육체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 :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나타내신 예루살렘의 성전에 돌아가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삼상 4:21; 시 78:61)

–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다윗의 결심(63:3, 4)

다윗은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63:3) :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친절과 사랑을 찬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이 생명(자연적인 생명이 제공해 줄 수 있는 모든 것들)보다도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63:4a) : 왜 그렇습니까? 무덤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시 6:5; 30:9; 요 9:4).

그는 손을 들어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63:b) : 신약 시대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처럼 하나님께 예배할 때 손을 드는 관습을 따랐습니다(딤전 2:8).

–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기대(63:5-7)

그는 새벽에 하나님을 묵상할 것입니다(63:6) : 유대인들은 밤을 세 부분으로 분류하였습니다(로마인들은 네 부분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밤 동안에 다윗이 예루살렘의 성소에 갈 시간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행하심과 과거에 베풀어 주신 선하심을 깊이 묵상할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만족을 받을 것입니다(63:5) : 다윗이 주님을 묵상할 때, 우리의 육체가 풍성한 잔치 속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과 같이 그의 영혼도 만족함을 누리고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즐거운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63:5a) : 영적으로 만족함을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미래에 그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63:7) :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다윗은 미래에도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지켜 주시는 안전함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갈망하는 다윗(63:8)

히브리 성경에는 “내 영혼이 당신의 뒤를 따라 갈라졌습니다. 당신의 오른손이 나를 받쳐 주십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 다윗의 미래와 적들의 미래는 대조적입니다(63:9-11)

원수들은 칼에 쓰러지고 그들 중의 일부는 여우들에게 잡아 먹힐 것이고 무덤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63:11).

6. 이 시편의 교훈

우리는 이른 아침에 하나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새벽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뒤를 열심히 따라 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적들에 대하여 최후 승리를 얻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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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시편 63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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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모르 레다위드 비흐요토 베미드발 예후다

엘로힘 엘리 앝타 아솨하레카 차메아 레카 나프쉬 카마흐 레카 베사리 베에레츠 치야 웨아예프 벨리 마임

개역개정,1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새번역,1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우리말성경,1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내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를 간절하게 찾습니다. 물이 없어 메마르고 지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목말라하며 내 육체가 주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톨릭성경,1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

영어NIV,1 A psalm of David. When he was in the Desert of Judah. O God, you are my God, earnestly I seek you; my soul thirsts for you, my body longs for you, in a dry and weary land where there is no water.

영어NASB,1 {A Psalm of David, when he was in the wilderness of Judah.} O God, You are my God; I shall seek You earnestly; My soul thirsts for You, my flesh yearns for You, In a dry and weary land where there is no water.

영어MSG,1 God–you’re my God! I can’t get enough of you! I’ve worked up such hunger and thirst for God, traveling across dry and weary deserts.

영어NRSV,1 A Psalm of David, when he was in the Wilderness of Judah. O God, you are my God, I seek you, my soul thirsts for you; my flesh faints for you, as in a dry and weary land where there is no water.

헬라어구약Septuagint,1 εις το τελος ψαλμος τω δαυιδ

라틴어Vulgate,1 in finem psalmus David

히브리어구약BHS,1 מִזְמֹור לְדָוִד בִּהְיֹותֹו בְּמִדְבַּר יְהוּדָה׃

히브리어구약BHS,1 אֱלֹהִים אֵלִי אַתָּה אֲשַׁחֲרֶךָּ צָמְאָה לְךָ נַפְשִׁי כָּמַהּ לְךָ בְשָׂרִי בְּאֶרֶץ־צִיָּה וְעָיֵף בְּלִי־מָיִם׃

성 경: [시63:1]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 ‘엘로힘적’ 시편들(Elohistic Psalter,42-83편)에서 ‘하나님이여’라는 강조적 호명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나타내는 ‘야웨’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뜻을 시사한다(Vangemeren). 그리고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문자적으로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라’이다. ‘하나님'(*, 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이처럼 다윗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함으로써, 압살롬에 의해서 쫓겨가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내어 맡기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 ‘간절히…찾되'(*, 솨하르)는 ‘날이 새다’, ‘일찍 일어나다’, ‘부지런하게 구하다’ 라는 뜻으로서 이 어근에서 ‘새벽’ 혹은 ‘미명'(未明)을 뜻하는 명사 ‘솨하르'(*)가 유래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 문구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던 일을 뜻하는 듯하다(57:8).

󰃨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당 – 이는 구체적으로 다윗이 피신햇던 유대 광야를 가리키기도 하지만(삼하 15:23; 17:29), 은유적 의미에서 메마른 사막 지대를 방황하는 자가 물을 갈급해 하듯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구하는 시인의 내면 상태를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anderson). 특히 ‘곤핍한'(*, 아예프)은 피로와 허기에 지친 상태를 가리킨다(창 25:29; 욥 22:7).

󰃨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여기서 ‘영혼'(*, 네페쉬)과 ‘육체'(*, 바사르)는 별개의 뜻을 나타내기 보다는 둘 다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갈망하며'(*, 차마)는 ‘목마르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며, ‘앙모하나이다'(*, 카마)는 구약 성경 중 여기서만 유일하게 나오는 동사로서 마지막 힘까지 쇠잔시켜버리는 열렬한 갈망을 뜻하며 앞의 ‘갈망하며’와 거의 동일한 뜻이다. ‘목마름’은 종종 인간의 가장 절박한 결핍 상태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정도의 내면 상태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42:2; 143:6).

켄 바코데쉬 하지티카 릴오트 웆제카 우케보데카

개역개정,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새번역,2 내가 성소에서 주님을 뵙고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우리말성경,2 내가 주를 성소에서 보았듯이 주의 능력과 주의 영광을 보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이렇듯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영어NIV,2 I have seen you in the sanctuary and beheld your power and your glory.

영어NASB,2 Thus I have beheld You in the sanctuary, To see Your power and Your glory.

영어MSG,2 So here I am in the place of worship, eyes open, drinking in your strength and glory.

영어NRSV,2 So I have looked upon you in the sanctuary, beholding your power and glory.

헬라어구약Septuagint,2 εισακουσον ο θεος της φωνης μου εν τω δεεσθαι με απο φοβου εχθρου εξελου την ψυχην μου

라틴어Vulgate,2 exaudi Deus orationem meam cum deprecor a timore inimici eripe animam meam

히브리어구약BHS,2 כֵּן בַּקֹּדֶשׁ חֲזִיתִיךָ לִרְאֹות עֻזְּךָ וּכְבֹודֶךָ׃

성 경: [시63:2]

주제1: [광양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본절과 3절에서 다윗은 그토록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거룩함'(성소에서), ‘권능'(*, 오즈), ‘영광'(*, 카보드), 그리고 ‘인자'(*, 헤세드) 가운데 계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사6:1-3). 특히 본절에서 다윗은 성소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과거사(過去事)를 회상함으로써(출 29:43; 레 9:6; 민 16:19), 다시 그러한 복된 경험을 갖고 싶음을 강력히 암시한다(삼하 15:25).

󰃨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기 전, 곧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의 경험이다. 성소 내에서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다(삼상 4:21). 한편 ‘바라보았나이다'(*, 하자)는 주로 영적 시각(視覺)으로의 관찰 혹은 응시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개시나 환상을 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데 특별히 많이 사용되었다(욥 15:17; 19:26; 애 2:14).

키 토브 하스데카 메하이임 세파타이 예솹후네카

개역개정,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새번역,3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말성경,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기에 내 입술이 주께 영광 돌릴 것입니다.

가톨릭성경,3 당신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합니다.

영어NIV,3 Because your love is better than life, my lips will glorify you.

영어NASB,3 Because Your lovingkindness is better than life, My lips will praise You.

영어MSG,3 In your generous love I am really living at last! My lips brim praises like fountains.

영어NRSV,3 Because your steadfast love is better than life, my lips will praise you.

헬라어구약Septuagint,3 εσκεπασας με απο συστροφης πονηρευομενων απο πληθους εργαζομενων την ανομιαν

라틴어Vulgate,3 protexisti me a conventu malignantium a multitudine operantium iniquitatem

히브리어구약BHS,3 כִּי־טֹוב חַסְדְּךָ מֵחַיִּים שְׂפָתַי יְשַׁבְּחוּנְךָ׃

성 경: [시63:3]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 ‘인자'(*, 헤세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2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각양의 은혜 혹은 변함없는 사랑을 뜻한다(36:7,8). 그리고 ‘생명'(*, 하임)은 ‘목숨’ 그 자체를 포함하여 인간이 세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울러 가리킨다(Keil, weiser, Calvin). 물론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들임에 분명하다(골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은 까닭은, ‘주의 인자’가 있을 때 사람은 참된 행복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 4:14).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벗어난 생명은 그 자체가 죽음이나 다름없음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켄 아바렠카 베하야이 베쉬메카 엣사 캎파이

개역개정,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새번역,4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손을 들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우리말성경,4 이렇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를 찬양하고 주의 이름 때문에 내 손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저의 두 손 들어 올리오리다.

영어NIV,4 I will praise you as long as I live, and in your name I will lift up my hands.

영어NASB,4 So I will bless You as long as I live; I will lift up my hands in Your name.

영어MSG,4 I bless you every time I take a breath; My arms wave like banners of praise to you.

영어NRSV,4 So I will bless you as long as I live; I will lift up my hands and call on your name.

헬라어구약Septuagint,4 οιτινες ηκονησαν ως ρομφαιαν τας γλωσσας αυτων ενετειναν τοξον αυτων πραγμα πικρον

라틴어Vulgate,4 quia exacuerunt ut gladium linguas suas intenderunt arcum rem amaram

히브리어구약BHS,4 כֵּן אֲבָרֶךְךָ בְחַיָּי בְּשִׁמְךָ אֶשָּׂא כַפָּי׃

성 경: [시63:4]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이러므로 – 칼빈(Calvin)은 이를 ‘이와같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여건 속에서도’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압살롬에 의해서 쫓기는 등의 다윗의 곤고한 생활은 결코 계속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다음 문구에 속한 ‘내 평생’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은, 3절 전반절과 직접 연결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사역, 그분의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창 25:19-26 강해, ‘이름 짓기’; 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보다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보호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말한다. 한편, ‘내 손을 들리이다’는 간절한 기도 자세를 보여 준다(28:2; 딤전 2: 8). 이러한 자세는 고양된 심령을 상징한다기 보다는, 높이 든 빈 손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감 섞인 신뢰심을 나타내는것 같다(Anderson).

케모 헤렙 와데쉔 티세바 나프쉬 웨시페테 레나노트 예할렐 피

개역개정,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새번역,5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듯이 내 영혼이 만족하니, 내가 기쁨에 가득 찬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우리말성경,5 내 영혼이 진수성찬으로 배부른 것 같고 기뻐하는 입술로 내 입이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5 제 영혼이 비계와 기름을 먹은 듯 배불러 환호하는 입술로 제 입이 당신을 찬양합니다.

영어NIV,5 My soul will be satisfied as with the richest of foods; with singing lips my mouth will praise you.

영어NASB,5 My soul is satisfied as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offers praises with joyful lips.

영어MSG,5 I eat my fill of prime rib and gravy; I smack my lips. It’s time to shout praises!

영어NRSV,5 My soul is satisfied as with a rich feast, and my mouth praises you with joyful lips

헬라어구약Septuagint,5 του κατατοξευσαι εν αποκρυφοις αμωμον εξαπινα κατατοξευσουσιν αυτον και ου φοβ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5 ut sagittent in occultis inmaculatum

히브리어구약BHS,5 כְּמֹו חֵלֶב וָדֶשֶׁן תִּשְׂבַּע נַפְשִׁי וְשִׂפְתֵי רְנָנֹות יְהַלֶּל־פִּי׃

성 경: [시63:5]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 본시 초두의 극심한 갈증과(1절) 대조되는 본문은, 극심한 환난을 믿음으로 극복해가는 중에 마치 사막에 샘이 솟는 듯한 역설적 체험을 하게 된 시인의 영적 승리의 면모를 보여 준다(Kidner).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은 ‘영양가 높고 살진 동물을 잡아 잔치를 벌이는 일’을 상기시킨다(Keil, 신 32:2; 렘 31:13). ‘골수'(*, 혤레브)와 ‘기름진 것'(*, 데쉔)은 모두 짐승의 살진 부분 혹은 제일 좋은 부분을 가리킨다(73:7; 민 18:29,30; 렘 31:14).

임 제카르티카 알 예추아이 베아쉬무로트 에흐게 바크

개역개정,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새번역,6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말성경,6 내가 침대에서 주를 기억하고 밤에 보초를 서면서도 주를 생각합니다.

가톨릭성경,6 제가 잠자리에서 당신을 생각하고 야경 때에도 당신을 두고 묵상합니다.

영어NIV,6 On my bed I remember you; I think of you through the watches of the night.

영어NASB,6 When I remember You on my bed, I meditate on You in the night watches,

영어MSG,6 If I’m sleepless at midnight, I spend the hours in grateful reflection.

영어NRSV,6 when I think of you on my bed, and meditate on you in the watches of the night;

헬라어구약Septuagint,6 εκραταιωσαν εαυτοις λογον πονηρον διηγησαντο του κρυψαι παγιδας ειπαν τις οψεται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6 subito sagittabunt eum et non timebunt firmaverunt sibi sermonem nequam narraverunt ut absconderent laqueos dixerunt quis videbit eos

히브리어구약BHS,6 אִם־זְכַרְתִּיךָ עַל־יְצוּעָי בְּאַשְׁמֻרֹות אֶהְגֶּה־בָּךְ׃

성 경: [시63:6]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 잠을 자야 하는 밤의 대부분을 주님께 대한 묵상의 시간으로 삼았음을 가리킨다(Keil). 사실, 밤중 특히 ‘침상’위에 있을 때에는, 낮 동안의 모든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경건의 시간이 되기에 적절하다. 여기의 ‘기억하며'(*, 자카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베푸셨던 은총 및 언약을 되새겨보는 일을 가리킨다(창 9:15; 대하 6:42). 신자들은 이같이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면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된다(욘 2:7).

󰃨 밤중에 주를 묵상할 – 앞의 문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데 ‘밤중에'(*, 베아쉬무로트)는 ‘지키다’ 혹은 ‘경계하다’를 뜻하는 동사 ‘사마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통념적으로 ‘밤중’은 종종 악령들이 많이 활동하는 위험한 때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는 조용한 밤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와 묵상을 위해 더 없이 좋은 때였다(119:62, Anderson).

키 하이타 에즈라타 리 우베첼 케나페카 아란닌

개역개정,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새번역,7 주님께서 나를 도우셨기에 나 이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거이 노래하렵니다.

우리말성경,7 주는 내 도움이시니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7 정녕 당신께서 제게 도움이 되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 아래서 제가 환호합니다.

영어NIV,7 Because you are my help, I sing in the shadow of your wings.

영어NASB,7 For You have been my help, And in the shadow of Your wings I sing for joy.

영어MSG,7 Because you’ve always stood up for me, I’m free to run and play.

영어NRSV,7 for you have been my help, and in the shadow of your wings I sing for joy.

헬라어구약Septuagint,7 εξηρευνησαν ανομιας εξελιπον εξερευνωντες εξερευνησει προσελευσεται ανθρωπος και καρδια βαθεια

라틴어Vulgate,7 scrutati sunt iniquitates defecerunt scrutantes scrutinio accedet homo et cor altum

히브리어구약BHS,7 כִּי־הָיִיתָ עֶזְרָתָה לִּי וּבְצֵל כְּנָפֶיךָ אֲרַןֵּן׃

성 경: [시63:7]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 ‘주의 날개 그늘’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보호’를 뜻한다(17:8; 36:7;61:4; 91:4). 그리고 ‘즐거이 부르리이다’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섭리를 의지하여 압살롬의 반란이 필경 평정될 것이라는 확신을 반영하는 말이다(Calvin).

다베카 나프쉬 아하레카 비 타메카 예미네카

개역개정,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새번역,8 이 몸이 주님께 매달리니,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꼭 붙잡아 주십니다.

우리말성경,8 내 영혼이 주께 끝까지 매달리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가톨릭성경,8 제 영혼이 당신께 매달리면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

영어NIV,8 My soul clings to you; your right hand upholds me.

영어NASB,8 My soul clings to You; Your right hand upholds me.

영어MSG,8 I hold on to you for dear life, and you hold me steady as a post.

영어NRSV,8 My soul clings to you; your right hand upholds me.

헬라어구약Septuagint,8 και υψωθησεται ο θεος βελος νηπιων εγενηθησαν αι πληγαι αυτων

라틴어Vulgate,8 et exaltabitur Deus sagittae parvulorum factae sunt plagae eorum

히브리어구약BHS,8 דָּבְקָה נַפְשִׁי אַחֲרֶיךָ בִּי תָּמְכָה יְמִינֶךָ׃

성 경: [시63:8]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7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 역시 계속적인 보호와 도움을 받기위해서는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기를 기대하신다. 시인이 적극적으로 응답한 것을 나타낸다(신4:4; 10:20; 11:22; 13:4; 30:20). 한편 ‘따르니'(*, 다바크)는 ‘불다’ 혹은 ‘연합하다’의 뜻이며(창 2:24; 욥 19:20; 애 4:4), 구체적으로는 본 시편에 계속 나타나 있는 다윗의 모든 경건과 신앙적 행위를 가리킨다.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 ‘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한다(17:7; 출 15:6; 사 41:10). 그리고 ‘붙드시거니와'(*, 타마크)는 원래 ‘받치다’ 혹은 ‘쥐고 있다’의 뜻으로서, ‘오른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문맥에서 대개 ‘돕다’의 의미로 사용된다(41:12; 사 41:10).

웨헴마 레쇼아 예바케슈 나프쉬 야보우 베타흐티요트 하아레츠

개역개정,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새번역,9 나를 죽이려고 노리는 자는 땅 아래 깊은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

우리말성경,9 그러나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들은 땅속 저 아래로 내려갈 것이며

가톨릭성경,9 그러나 내 목숨을 노리는 저들은 멸망으로, 땅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리라.

영어NIV,9 They who seek my life will be destroyed; they will go down to the depths of the earth.

영어NASB,9 But those who seek my life, to destroy it, Will go into the depths of the earth.

영어MSG,9 Those who are out to get me are marked for doom, marked for death, bound for hell.

영어NRSV,9 But those who seek to destroy my life shall go down into the depths of the earth;

헬라어구약Septuagint,9 και εξησθενησαν επ’ αυτους αι γλωσσαι αυτων εταραχθησαν παντες οι θεωρουντες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9 et infirmatae sunt contra eos linguae eorum conturbati sunt omnes qui videbant eos

히브리어구약BHS,9 וְהֵמָּה לְשֹׁואָה יְבַקְשׁוּ נַפְשִׁי יָבֹאוּ בְּתַחְתִּיֹּות הָאָרֶץ׃

성 경: [시63:9]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8절이 의인의 축복된 결국을 말하고 있다면, 본절과 다음 절은 악인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 준다.

󰃨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 ‘땅 깊은 곳’은 죽은 자들이 가게 되는 음부 세계를 가리킨다(16:10; 86:13). 따라서 이 구절은 악인들이 그들의 악행에 대한 보응을 받아 육신적으로도 멸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다윗의 예언적 확신은, 압살롬의 죽음과 함께 성취되었다(삼하 8:9-15). 한편 혹자는 다윗의 이러한 표현을 고라 일당의 최후와 연관시키기도 한다(Alexander).

약기루후 알 예데 하레브 메나 슈알림 이흐우

개역개정,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새번역,10 그들은 칼을 맞고 쓰러지고, 그 주검은 승냥이의 밥이 될 것이다.

우리말성경,10 칼로 쓰러져 여우들의 밥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0 칼날에 내맡겨져 여우들의 몫이나 되리라.

영어NIV,10 They will be given over to the sword and become food for jackals.

영어NASB,10 They will be delivered over to the power of the sword; They will be a prey for foxes.

영어MSG,10 They’ll die violent deaths; jackals will tear them limb from limb.

영어NRSV,10 they shall be given over to the power of the sword, they shall be prey for jackals.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και εφοβηθη πας ανθρωπος και ανηγγειλαν τα εργα του θεου και τα ποιηματα αυτου συνηκαν

라틴어Vulgate,10 et timuit omnis homo et adnuntiaverunt opera Dei et facta eius intellexerunt

히브리어구약BHS,10 יַגִּירֻהוּ עַל־יְדֵי־חָרֶב מְנָת שֻׁעָלִים יִהְיוּ׃

성 경: [시63:10]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칼의 손에 넘겨줄 것이다’로 번역되며, 전투 중에 죽게 됨을 뜻한다(렘 18:21; 겔 35:5).

󰃨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 전투중 죽음을 당한 후 들판에 버려질 것을 뜻한다. 이때에 썩은 고기를 주식(主食)으로 하는 동물인 ‘시랑’은 그 송장을 모두 먹어치울 것이다. 본문은 시체가 고이 안장되지 못하고 훼손되는 것을 큰 수치와 불행으로 여겼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사 18:6; 렘 7:33, Anderson).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의 경우에도, 시체가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것을 대단히 불운하고 끔찍한 심판으로 여겼던 기록의 흔적이 있다(A.Heidel, the gilgamesh epic and Old testament Parallels).

웨함멜렠 이세마흐 베로힘 이트할렐 콜 한니쉐바 보 키 잇사케르 피 도베레 솨켈

개역개정,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새번역,11 그러나 우리의 왕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사람들은 모두 왕을 칭송할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말문이 막힐 것이다.

우리말성경,11 오직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이며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사람마다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쟁이들은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1 그러나 임금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은 모두 자랑스러워하리라. 정녕 거짓을 말하는 입은 틀어막히리라.

영어NIV,11 But the king will rejoice in God; all who swear by God’s name will praise him, while the mouths of liars will be silenced.

영어NASB,11 But the king will rejoice in God; Everyone who swears by Him will glory, For the mouths of those who speak lies will be stopped.

영어MSG,11 But the king is glad in God; his true friends spread the joy, While small-minded gossips are gagged for good.

영어NRSV,11 But the king shall rejoice in God; all who swear by him shall exult, for the mouths of liars will be stopped.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ευφρανθησεται δικαιος επι τω κυριω και ελπιει επ’ αυτον και επαινεσθησονται παντες οι ευθεις τη καρδια

라틴어Vulgate,11 laetabitur iustus in Domino et sperabit in eo et laudabuntur omnes recti corde

히브리어구약BHS,11 וְהַמֶּלֶךְ יִשְׂמַח בֵּאלֹהִים יִתְהַלֵּל כָּל־הַנִּשְׁבָּע בֹּו כִּי יִסָּכֵר פִּי דֹובְרֵי־שָׁקֶר׃

성 경: [시63:11]

주제1: [광야에서의 기도]

주제2: [주를 갈망하는 자의 기도]

히브리 원문상 본절 초두에 있는 접속사 ‘웨'(*)를 ‘그러나’로 번역하면, 문맥을 매끄럽게 할 수 있다.

󰃨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 ‘왕’은 다윗 자신을 지칭한다(18:50; 72:1). 이처럼 갑자기 다윗이 자신을 ‘왕’이라고 한 까닭은, 자신이 백성들의 대표임을 시사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럼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신앙행위로 인한 축복이 신정(神政) 왕국의 모든 백성들에게 까지 내려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 여기서 ‘주’는 원문상으로 다만 3인칭 단수대명사일 뿐이다. 혹자는 이를 왕 곧 다윗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고, ‘왕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는 자…’의 뜻으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한다(Anderson). 물론 하나님의 이름으로 뿐 아니라 왕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던 기록이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삼상17:55; 25:26; 삼하 11:11; 15:21). 그러나 이 대명사가 지시하는 말은 ‘왕’보다 ‘하나님’이 더가깝고, 또한 본문이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문맥 중에 있다는 점에서’주’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봄이 나을 것 같다Alexander). ‘주로 맹세하는 것’은하나님을 자신의 신뢰 대상으로 삼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가리킨다(신 6:13; 사 65:16, Calvin).

󰃨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 원문에는 본 문구 앞에 접속사 ‘키'(*)가 있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왜냐하면’의 뜻보다는 ‘반면에’로 번역함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NIV). 여기서 ‘거짓말하는 자’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불의한 재판을 일삼았던 압살롬과 그 부하들을 가리킨다(삼하 15:1-6). 그들은 한때 ‘주로 맹세한’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거역을 통해서 거짓임이 분명해졌다. 바로 이 같은 점에서, 그리고 불의한 재판을 했다는 점에서, 그들이’거짓말하는 자’임은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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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보다 나은 사랑(시63편)

제목 : 생명보다 나은 사랑

본문 : 시편 63편

설교자 : 최종혁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죽어서 천국이라는 좋은 곳에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렇다면, 딱히 하나님을 믿지 않을 필요도 없다. 더구나 성경은 행위는 아무 필요 없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니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훨씬 편하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고 나서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누군가에게는 결혼이나 사업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자녀가 잘 되게 하려고, 부모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교회에 다닌다는 말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지금 언급한 것들의 공통점은 결국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나님을 통해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땅에 살 때 원하는 것인지, 이 땅을 떠나고 원하는 것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일까? 하나님이 원하는 무언가를 우리가 주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무언가를 주는 것이 기독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을 그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세상의 종교들이 다 그렇기 때문이다. 종교는 초월적 존재를 통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앞서 말한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한다. 고행을 하든, 수행을 하든, 돈을 내든, 쌀을 내든, 뭔가를 해야한다. 그렇게 해서 신을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그런 의미가 될 수 없다.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행 17:25). 시편 50편에서 아삽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시 50:12). 사람이 만들어낸 신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종교를 가진다는 것과는 다르다.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 언약은 계약과는 다르다. 계약은 계약의 두 당사자의 상호 합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하면 상대가 무엇을 하는 식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랑의 언약으로 조건이 없다. 마치 결혼 서약과도 같다. 요즘에는 혼전계약서 같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본래 결혼 서약은 ‘당신이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할거다’라고 조건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조건 없는 사랑을 약속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나이가 들어도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는 변함없는 사랑을 할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표현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자녀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살아계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 오셨고 먼저 사랑해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에 화답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 얻고 못얻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문제인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더 알기 원했고 경험하길 원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의무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명령들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사랑하여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 그들이 원했던 삶이다.

다윗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게 붙은 별명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어쩌면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시편 63편은 그런 다윗이 하나님께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잘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갈구 :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1-2절) 사랑의 표현 :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함(3-7절) 사랑의 다짐 : 하나님을 가까이 따름(8-11절)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의 표현인 예배를 돌아보고, 다윗과 같은 사랑의 다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I. 사랑의 갈구 :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1-2절)

먼저 이 시의 표제는 다윗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다윗은 광야에 있다. 1절의 표현에 따르면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있다. 광야에 놀러간 것은 아니고 9절의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이라는 표현을 보면 도망해서 광야에 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11절의 ‘왕’이란 표현을 고려하면 왕으로서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니 가장 적합한 때는 압살롬의 반역 때로 추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은 지금 실제로 광야에 있다는 것이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피해서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피해있다면 어떤 마음일까? 다윗과 동일한 상황에 처할 일이 아마 우리에게는 없겠지만 가정을 해본다면, 참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왜 또 다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이해가 안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범죄 때문에 벌어진 상황인 것을 알기 때문에 죄책감이 컸을 수도 있다. 전쟁에 대한 걱정, 차기 왕으로 생각했던 아들 압살롬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에 광야에 있기 때문에 먹을 것, 입을 것, 피할 곳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그런 걱정보다는 바로 이것이었다.

시 63:1-2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다윗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고, 그래서 지금의 광야 생활은 그런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그림처럼 보였다. 메마른 땅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간절히 찾듯이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다.

“간절히 주를 찾는다”는 표현은 어떤 번역에서는 “일찍 주를 찾는다”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본래 단어가 “새벽”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기 싫은 일은 최대한 미루려고 하고 하고 싶은 일은 최대한 빨리 하려고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는데 밤 늦게까지 하고 새벽 같이 일어나서 하는 일은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이다. 6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시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이만큼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 목마른 사람처럼 하나님을 갈급했고, 또 하나님을 앙모했다. “앙모하다”는 특이한 표현이긴 한데, 비슷한 아랍어 동사는 “창백해지다. 시력이 약해지다”는 뜻이 있다. 너무나 간절히 원해서 눈이 어둡게 될 정도라는 의미가 될텐데, 우리말에도 어느 하나를 간절히 원할 때 ‘눈에 뵈는게 없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여튼, 그렇게 몸이 힘들정도로 하나님을 간절히 원한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이런 특별한 표현들을 사용해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하는지, 그래서 만나고 싶은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바라고 있다. 2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때를 회상하는데, 바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었을 때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실제로 보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누구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윗이 본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였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종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보았다.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태우는 장면이다. 하지만 다윗에게 보였던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예배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그는 보았고, 하나님을 보았다.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때 그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지금 그가 광야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예배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얼마나 찬양팀이 찬양을 잘 하는지를 보는가? 얼마나 설교자가 내 마음을 잘 위로하고 나하고 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는가? 만찬에 참여하는 형제들이 얼마나 기도를 잘하는지를 보는가? 애찬을 나눌 때 얼마나 반찬이 맛있는지를 보는가? 봉사를 하면서는 누가 보고 있는지를 보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예배이고, 예배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 보기를,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광야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다.

II. 사랑의 표현 :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함(3-7절)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의 성전과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 그때 그의 입에서 이런 찬양이 흘러나왔다.

시 63:3-7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언급한다. 무엇으로? 그의 입술로(3절), 언제? 그의 평생에(4절), 어디서? 주의 날개 그늘에서(7절).

그럼, 어떻게 찬양하는가? “손을 들고”(4절), “기쁜 입술로”(5절), “즐겁게 부르리이다”(7절). 즐겁게 찬양하는 것이다. 억지로, 겨우, 해야하니까 입만 뻥긋뻥긋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할까? 그것도 광야에서. 물론 다윗은 음악인으로서 좀 더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다윗은 자신이 기뻐했던 근본적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3절)

이것이 다윗의 기쁜 찬양의 가장 중심에 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 여기서 다윗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다윗을 잠깐 불러 세울 것이다. “다윗, 하나님 믿는건 좋은데, 너무 그렇게까지 빠지지마. 다 먹고 살자고 하는거고, 다 잘살아보자고 하는 건데, 생명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더 낫다니, 그건 너무 극단적이야. 종교는 사는데 도움이 되어야 종교지, 그게 사는 것보다 낫다니 말이 안되잖아.”

하지만 다윗은 여기서 전혀 과장하고 있지 않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말은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을 넘어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수만 있다면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생명이 좋은 것은 맞다. 그것은 귀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서의 삶’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라.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도 동일하게 생명,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 중요한 목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모순적인 말이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한 진리인 것은 우리의 목숨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땅이 전부라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그냥 잃는거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고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길게 사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영원한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다. 그 영원한 삶을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다. 그 영원한 삶을 진노의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심판이다.

그러니 실제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기 때문이고 그 삶은 이 땅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던 것이다.

다윗이 광야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헤세드, 변하지 않으시는 사랑이 그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좋은 것들은 있다가도 없어진다. 없어지지 않아도 그 가치를 금세 잃는다. 좋은 TV를 사도 얼마 못가고 좋은 차를 사도 마찬가지다. 삶 자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겠다고 선택하신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잃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 주일에 배웠던 말씀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8-39).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0:28-29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든 다윗의 도움이 되시고 안전한 피난처가 되신다(7절).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면(6절),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한다(5절). 다른 어떤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히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보다 낫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 천하를 가지고도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에게 참된 만족이 없고 온전한 기쁨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참된 만족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 땅의 다른 것들이 우리를 채워줄 것 같지만, 사실 그것들은 이 참된 만족을 빼앗아갈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느냐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속이려 할 때,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봐야할 것이다. 하니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고 더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6절에서 다윗은 그런 노력을 넌지시 언급했다.

시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계속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이다. 자기 전에 그렇게 하고 자고 일어나서 그렇게 한다. 먹고 사는데 바빠서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곱씹고 되새길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게 될 것이고, 온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사랑의 다짐 : 하나님을 가까이 따름(8-11절)

다윗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만나서 온전히 기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기를 다짐했다.

시 63: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가까이 따른다”는 말은 딱 붙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된다고 할 때 사용한 표현이고,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붙좇았다고 할 때 사용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하심에 따라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신 것처럼 다윗 역시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짐에 기초해서 다윗은 광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을 멸하시고 하나님께 충성된 사랑을 맹세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즐거워할 날을 바란다.

시 63:9-11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한 자들은 결국 그 생명까지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계속해서 가까이 따르는 자는 함께 하나님을 자랑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보게 될 삶의 결말이다.

도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 다윗의 시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따른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생명보다 나은 사랑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고 계속해서 변함없이 그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고,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고, 교제를 하고, 봉사를 하고 하는 모든 것들의 동력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더욱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고, 복음을 정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사랑 때문이다. 다윗의 말대로 생명보다 나은 주의 인자하심(헤세드, 언약의 사랑) 때문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사랑과 관계없이 하는 모든 일들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다. 해야되니까 하는 일, 하던 일이라 하는 일,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위해 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랑이 없는 사랑의 행위는 위선이고 기만일 뿐이다.

어쩌면 광야에 있던 다윗의 상황이 지금 코로나로 인해서 함께 모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할 때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께 딱 붙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할 때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말씀을 묵상해야할 때다.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모일 때, 우리는 함께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63편 아침 묵상: 광야의 시기를 버티는 방법

Psa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Psa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Psa 63:3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Psa 63:4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손을 들리이다

Psa 63: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Psa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Psa 63: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Psa 63: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Psa 63: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Psa 63:10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Psa 63: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 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오늘 시편의 제목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여러분 광야라는 장소는 성경에 늘 등장하는 주요 소재입니다. 광야를 지난다는 말은, 시험의 시기이고, 삶이 굉장히 고달프고 지친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에서는 내가 즐겼던 모든 편의함이 박탈당하고, 하루 하루 사는 것이 걱정이 될 수 가 있습니다. 거기는 먹을 것도 희귀하고, 거할 것도, 마땅치 않으며, 마실 물이 보장되지 않는 곳입니다. 길이 없으며,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곳입니다. 누가 척박한 광야에 살고자 하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늘 신앙인들이 광야를 지나가는 삶을 보여줍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광야 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잘 되던 사업이 안 되었을 때, 막막합니다. 평안한 것 같던 가정에 불화가 찾아오고, 소중했던 관계, 내가 안락함과 쉼을 얻었던 관계가 깨어질 때, 우리는 막막한 광야를 봅니다. 갑자기 건강이 문제가 생겨도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없이 누리고 있던 좋은 것들이 하나 둘씩 내 삶에서 빼앗겨 질때, 푸른 초장이 광야로 변해 버리는 느낌일 겁니다. 그럼, 광야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광야를 즐길 것입니까? 광야를 헤져나갈 것입니까? 광야에서 뿌리를 내리고, 땅을 개간하고, 광야를 내 편으로 만들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광야를 벗어나고자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물질의 도움을 구하고, 계획을 세우고, 많은 시도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광야에서 주저않고, 포기하며, 삶의 끈을 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다윗은 긴 시간을 광야에서 도망다니는 신세였습니다. 1절에 나온 것처럼, 당장 마실 것이 문제였고, 먹을 것, 입을 것이 문제였고, 거할 곳이 문제였습니다. 하루 하루 가 걱정이 없는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오늘 시편 63편의 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불편함과 그의 긴급한 필요를 우리에게 시로써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내가 얻는 다해서 광야에서 살아남는게 아니였다는 겁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오랜기간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그 광야의 기간을 나오면서, 왕이 된 케이스입니다. 왕이 될 자격과 조건을 다윗은 광야에서 얻은 것입니다. 만약 그가 광야의 기간 없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됐다면, 사울보다 나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광야는 다윗에게 있어 연단의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 연단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다윗을 왕으로 만드시기 위한 연단입니다.

왕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왕이라는 자질을 만들기 위해서 광야가 주어집니다. 찌끼를 솎아내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기간, 이것이 다윗에게 광야의 기간입니다. 이 사실을 다윗이 광야에서 몰랐을 까요? 지금 광야의 연단이 결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자신을 왕같은 자로 연단하시기 위해, 베푸시고 있는 하나님의 배려이고, 시험의 기간이라, 늘 생각하고, 버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내 피부로 와 닿는 광야의 고통은 내가 이 시기를 통해 더 낳아질 거라는 긍정적 미래를 붙들고 있다 한들 매일 날 부서뜨리고 넘어뜨리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럼, 다윗이 어떻게 버텼느냐,, 어떻게 그는 날마다, 조금 더 위대하고, 더 지혜롭고, 더 고상한 왕의 모습으로, 광야에서 변화해 갔느냐, 이것을 우리가 63편에서 좀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12절 전체의 말씀의 요지를 1절에서 찾아보면 됩니다. 읽어봅니다 Psa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이 한절에서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에 우리가 밑줄을 그어 봅시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오늘 시편 63편 전체의 내용은 다윗이 광야에서 주를 찾는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광야에서 주를 찾음으로 광야의 기간을 버텨내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우리가 좀 생각해 봐야합니다.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물을 간절히 찾는 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주를 찾고 있다라고 심지어 그의 육체조차 주를 앙모한다라고 고백합니다.

잘 아시지만,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 복무를 해야 합니다. 한국 남자에게 군복무는 그야말로 광야입니다. 지금은 2년 미만인 걸로 아는데, 2년으로 치면 짧다고 할 수 있지만, 막상 군대에 복무하는 사람은 절대 짧지가 않습니다. 광야에 들어가 본 사람은 그게 일주일이든, 한달이든 절대 짧지가 않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군대에 막 들어간 보통의 사람이 간절히 바라보고 찾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또 다른 훈련 뛰는 날? 아니겠죠, 외박나가고 휴가나가는 날, 뭐 그럴 수 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바라고 찾는 것은 이 들어오게 된 군대에서 하루빨리 완전히 나가는 날입니다. 아직 2년이 남아 있어도 막 들어온 사람에게 조차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나가는 날입니다. 그런데,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까? 아무리 찾고 찾아도, 2년전에 나가는 정상적인 방법은 없어요. 그래서 대부분 이런 말로 위로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런데, 즐겨지는 사람은 거의 없는 줄로 압니다.

무슨 말이냐,, 우리에게 주어지는 광야는 대부분 그 기안이 정해져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길수도 짧을 수도 있지만, 광야는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광야에서 나갈 길을 모색한 적이 없습니다. 다윗도 이 광야의 기간이 단축되어지기를 기도 왜 안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도, 광야를 버텨내는 방법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나가는 방법이 아니라, 버텨내는 방법을 찾아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오늘 63편에서 보여지는 다윗의 노하우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를 찾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를 찾는 것.. 그럼, 그 구체적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군생활 동안 그 기간에 몸을 만들고 또 공부를 해서 지성을 쌓아 나오는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서 그 시기를 지나고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 입니다.이 방법대로 한다면, 광야의 시기에서 내가 몸을 만들고 영혼을 만드는 것 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전수되고 있는데, 한번 1절부터 8절을 한번 훑어 봅니다. 모두 내가 라는 단어로, 내가 지금 광야에서 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한다..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 이게 1절이죠. 또 2절을 보면. 내가 성소에서 주를 바라본다. 그렇죠. 3절을 보면 내 입술로 주를 찬양한다. 4절을 보면 내 손을 들어 주를 평생 송축한다. 5절을 보면 내 영혼이 만족한다 6절을 보면 내가 내 침상에서 주를 기억한다, 새벽에 내가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 7절을 보면, 내가 즐겁게 노래한다 8절을 보면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른다 … 그리고, 그에 맞는 이유들이 모두 나오고 있습니다. — 주를 찾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 내 육체가 동반되고, 내 영혼이 동반되는 행위입니다. 나의 지적, 감정적, 육체적 에너지가 하나님에게 집중되서 소비되는 행위입니다. 주를 갈망하며, 주를 앙모하며, 주를 바라보며, 주를 찬양한다. 손을 들고 주를 송축하고, 주를 기억하고, 주의 말씀을 읊조리며 주를 가까이 따른다.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들은 여기서 찾으시면 됩니다. 내 지적, 감정적, 육체적 에너지가, 이런 행위들에 소비되는 일입니다. 거기는 즐거움이 있어야 되기도 하고, 갈급함과, 간절함이 동원되야 하며, 나의 생각과 내 영혼이 모두 쓰여져야 하는 일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에요. 지금 광야의 삶은 내게 당장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지금 문제를 바라보게 하고,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게 하지, 보이지 않는 주를 바라보며 거기에 내 지, 정, 의 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행위는 낭비처럼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을 나의 삶의 최우선 순위로 놓을 때, 궁전에서 살던 껍데기만 입고 미쳐가던 왕, 사울이 아니라, 광야에서 살더라도, 왕같은 자태와 위엄을 입어가고 있던 다윗같이 변모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왕은 궁전의 교육을 받고, 궁전의 음식을 먹고 되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도, 다윗도, 심지어, 예수님도 같은 방법을 거치셨습니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 2021년 지금이 나의 삶이 광야에 때라고 생각되면, 하나님을 찾는 것에서 돌파구를 찾읍시다. 이렇게 말씀에서 말하죠. Isa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 — 광야에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이시간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닫고 실천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성소에서 바라보며, 하나님을 위해 내 손을 들고, 내 자러가는 자리, 일어나는 자리 모두 주를 기억하며 주의 말씀을 읊조리는 삶, 하나님과 내가 분리될 수 없는 삶,,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늘도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 숨어 계셔서, 발견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두번째, 어려운 믿지 않는 두 가정이 있습니다. 사업도 힘들고 또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 있는 가정이 두 군데 있습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고, 또 도울 수 있는 손길이 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2021년 하나님께 어떤 서원으로 나아가야 할 지 기도합니다. 이제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게 맞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 서원을 이루며 하나님과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관계를 가질 수 있기 위해 기도합니다.

(63). 주를 갈망하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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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시편 63편은 초대교회가 주일 아침예배를 드릴 때 가장 먼저 부르는 시편 찬송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왜 그들은 많은 시편 찬송 중에서 63편을 첫 찬송으로 불렀던 것일까요? 4세기의 교부였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서 명설교가이기도 했던 요한 크리소스톰도 이 시편을 특별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전체의 정수가 이 시편에 압축되어 있다.”(Quoted in J. J. Stewart Perowne, The Book of Psalms, 2 vols. (1878; repr., Grand Rapids: Zondervan, 1976), 1:486., Phillips, R. D. (2019). Psalms 42–72.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에서 재인용).

존 칼빈의 후임자였던 종교개혁자 데오도르 베자(Thoeodore Beza)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이 시편을 찬송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해지는 경험을 누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편이 이토록 특별한 사랑을 받았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 시편은 마땅히 사랑을 받을 만하고,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줄 수 있는 시편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63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쓰여진 정황

63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이거나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을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라는 부분을 보면, 이것은 왕이었던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났던 상황임을 추정하게 합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왕위와 모든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궁을 떠난 다윗 왕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이 시편을 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시편의 내용에, 아들의 배신으로 인한 불평과 원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잃어버린 왕위와 명예, 다시 궁으로 돌아가는 일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63편은 분명히 기도이지만, 간구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소원이나 기쁨, 찬양과 교제의 내용은 있지만 간구는 없습니다. 도리어 다윗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자신의 생명과 안전과 영원을 위해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2. 고난과 갈망의 법칙(1)

1절은 다윗이 처한 물리적 상황과 내면의 상황을 놀랍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편 63:1).”

다윗이 처한 물리적 환경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광야입니다. 다윗이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윗은 간절히 주를 찾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이 주를 갈망하고 자기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하게 찾고 있는지, 갈망하고 앙모하는지를 표현하려고 자기가 현재 물리적으로 처해있는 광야를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목이 말라서 거의 죽게 된 것 같은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럴 만큼 다윗은 지금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페로운(J.J.Stewart Perowne)은 ‘앙모한다’는 말은 실신할 정도로 너무나 사모하여 시력을 잃을 만큼 갈망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영혼만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주를 앙모합니다. 육신과 영혼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언약으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가진 개인적이고 친밀한 고백입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할 만큼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 선하심을 맛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인간의 가장 큰 갈망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이런 큰 갈망을 우리가 거의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관심과 갈망이 쇠퇴하는 것 때문에 우리에게 역경과 시련을 보내십니다. 우리가 이런 갈망을 놓치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개는 분주해서 그렇거나 삶이 적당히 만족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을 멈춰 서게 하시거나 또는 삶이 불만족스럽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계속 세상의 우선순위들에 의해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밀려나도록 허용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심하게 쇠약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와 함께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재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의 모든 것이 멈추어 서 버렸고, 우리는 전과 같은 일상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이 바라는 바, 또는 여러분이 취하는 태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하나님을 갈망할 수도 있고, 그저 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외적으로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둘은 매우 큰 차이를 가집니다.

로이드존스의 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역경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생명의말씀사, 1991), p.128). 역경이나 고난이 언제나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다가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역경 속에서 마음에 쓴 뿌리를 내리게 되고 불평과 원망으로 강퍅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역경과 고난은 우리 믿음의 진위를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심으로써 그것을 깨우쳐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의 재난 속에서 주일예배를 정상적으로 모이지 못하고 3개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겪어본 적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당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멈추어 섬의 기회를 통해서 우리는 공예배—공동체가 모여서 함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가 그것의 가치를 얼마나 잊고 살아왔는지, 단지 모임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은 영적 결속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여기서 진짜 우리 속에 가장 깊이 감추어져 있던 갈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윗이 지금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궁에서 쫓겨나 유대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그는 잃어버린 왕위가 아니라,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자신 안의 깊은 갈망,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아는 친밀한 지식을 향한 갈망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아래 구절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8–9).”

시편 63편은 우리가 한가하게 종교 놀음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은 기독교의 진수, 기독교의 우선순위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이런 점이 많은 믿음의 선배들로 하여금 이 시편을 사랑하게 만든 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르고 황폐한 광야는 종종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가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일깨우고 우리로 본래의 우선순위로 돌아가게 합니다.

3. 과거의 은혜(2)를 기억하며 만족하는 영혼(3-5)

사람이 이런 갈망을 재차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미 과거에 그런 은혜를 경험한 바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편 63:2).”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가진 현재의 갈망을 과거에 자신이 성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목도하였던 은혜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메마른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깊어지면서, 다윗은 과거에 성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고서 큰 은혜를 누렸던 때를 생각합니다. 그때 그의 영혼을 만족할 수 있었고 기쁨과 즐거움을 충만했었습니다. 사실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했던 공예배의 은혜를 추억하는 말입니다.

이런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 안에 있는 영적 갈망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과거에 체험한 큰 은혜를 회상하게 마련입니다. 지금 다윗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다윗은 자기 생명이 최고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가장 귀하다고 말합니다. 생명은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이지만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인자하심은 결코 잃어버려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고백한 말의 의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세상의 애착하는 것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고 수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붓고 살지 않습니까? 정작 생명 보다 귀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쏟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말은 입술만의 고백에 머물 수 없는 말입니다.

다윗은 현재의 갈망을 직면하면서 과거의 은혜와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다윗의 마음은 더 나아갑니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편 63:4).”

단지 입술만의 찬송이 아니라, 평생의 찬송으로, 그리고 손을 드는 몸짓이 동반되는 찬송으로 확장됩니다.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말입니다. 다윗의 갈망은 어느새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은 그 고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시편 63:5).”

‘골수와 기름진 것’은 가장 기름진 음식을 말합니다. 요즘에는 기름진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여기지만, 성경 시대에 이것은 가장 좋은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다윗의 이 말은 마치 영혼이 축제를 즐기면서 가장 좋은 것들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영혼의 만족감과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4. 결심(6-8)

다윗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6절은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갈망이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시편 63:6).”

다윗이 ‘침상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밤에’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밤에 ‘주를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기억한다’는 말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말합니다. ‘읊조린다’는 말은 ‘묵상하다, 표현하다’라는 뜻인데, 자기가 기억한 것을 생각하고 조용히 읊조리고 이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윗이 언제 그것을 합니까? 밤과 새벽에 한다고 말합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갈망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절에서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라고 했었지요? 이 말이 KJV에서는 ‘일찍(early) 주를 찾되’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찾는다’는 말과 ‘일찍’이 같은 어근을 가진 히브리어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찾는다는 것은 6절에서 ‘새벽에’ 주의 말씀을 읊조린다고 다시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깊어진 영혼은 새벽, 하루의 첫 시간에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7절입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편 63:7).”

주님이 도움이 되심은 그 인자하심 때문에 얻게 되는 혜택이고 복락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도우심 때문에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른다고 말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날개를 가지셨을 리 없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룹이나 스랍들이 가진 날개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넓고도 안전한 품을 상징합니다.

이제 다윗은 이런 하나님 앞에서 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8절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편 63:8).”

사실 이것은 결심이라기 보다, 다윗의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라는 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의미입니다. ‘가까이 따르니’는 창세기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할 때 ‘합하여’라는 말과 같습니다(창 2:24). 부부가 한 몸이 되어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에게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부 보다 가까운 관계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또 이 말은 룻기 1:14에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시어머니를 붙잡고 유대 땅으로 돌아올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기 1:14).” ‘붙좇았더라’가 ‘가까이 따르니’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룻이 얼마나 신실하게 시어머니 나오미를 가까이서 섬겼는지를 압니다. 다윗이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주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섬기고 사랑하고 충성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때 자기를 붙들어주는 것은 주님의 오른손인 것을 다윗은 압니다.

5. 원수들의 운명(9-11)

9-11절에서는 분위기가 전환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영혼의 갈망이 채워진 다윗은 확신 중에 자기 원수들이 멸망하게 될 운명을 선언하면서 기도를 마치게 됩니다. 9-10절입니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시편 63:9–10).”

일반적으로 자신이 억울한 일이나 곤란을 겪게 될 때에는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고정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상황에서 자기가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하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맛보게 되자 이제 비로소 아주 여유롭게 원수들의 멸망할 운명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발견 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 모든 광야 같은 경험 속에서 그 갈망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옮겨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성도들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유롭고 자신감 있게 악인들의 멸망할 운명을 말할 수도 없습니다.

11절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시편 63:11).”

다윗은 자신을 왕으로 부릅니다. 그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맹세한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한 자입니다. 누가 그런 자입니까? 믿고 고백함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세례는 일종의 충성 서약입니다. 그리스도께만 충성하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찬양한다는 뜻인데 할렐루야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설령, 다윗처럼 아들의 반역으로 비참한 현실을 겪고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반면,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힐” 것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3:19).”

6. 교훈과 적용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깊은 갈망이 있다는 것 조차 잊어버리고 살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지친 심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우리 영혼의 갈망은 좀체 만족스럽게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고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강제로 멈춰 서게 하십니다. 인생의 광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가십니다. 우리 영혼의 깊은 갈망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호세아 2:14).”

‘거친 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우선순위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 마르고 황폐한 광야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그 갈망을 발견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라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그 갈망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힘든 상황만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광야 효과를 경험했습니까? 아니면 광야에서 마음이 강퍅해지기만 합니까? 삼위 하나님을 향하여 다윗과 같은 갈망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버지의 사랑을 더 잘 알고 싶은 열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더 가까이 따르는 제자가 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서 성령님을 더 강력하게 체험하기를 사모하고 앙모하십니까?

이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는 오늘 말씀이 보여주는 대로, 그 영혼이 만족하고 배부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 새 그 갈망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부르는 찬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 보다 낫다고 고백하면서, 더욱 주를 가까이 따를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사랑했던 시편 63편에 기록된 이 모든 복된 은혜를 직접 체험하고 영혼의 만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일에, 우리는 거의 반년 만에 주님의 상에서 먹게 될 것입니다. 리처드 필립스(Richard Phillips)는 본문에서 보는 다윗의 갈망과 성찬식에 임하는 자신의 기도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기도입니다. “주님, 이 잔과 잔이 상징하는 것으로 저는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을 얻고 믿음으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면, 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을 얻습니다. 제게 은혜를 주셔서 주님을 붙잡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제 삶을 신실하게 바칩니다.” (Phillips, R. D. (2019). Psalms 42–72.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 217).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주님 한 분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고 여기는 마음, 이것이 다윗의 갈망의 정체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갈망을 보게 하시고,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우리 갈망을 채워 주시기를 구합니다.

솟아나는 샘물

본문성경 : 시편 63:1-11

주 제 : 결심

제 목 : 내 영혼아, 어떻게 살래?

성경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선지자 엘리야와 그 생도 엘리사가 함께 길을 걷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는 스승의 가르침과 활동을 보면서 스승을 본받아 훌륭한 선지자가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제자에게 “하나님이 나를 베델로 가라한다. 너는 여기 머물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의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절대로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길갈에서 베델은 북서쪽으로 11킬로나 떨어진 높은 지대였지만 열심히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도착하기가 무섭게 또 여리고 지역으로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베델지역에 있는 선지자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따라가지 말라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도 안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스승을 따라 여리고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있지 않아서 이번에는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겠다고 합니다. 또한 여리고의 생도들도 마찬가지로 엘리사를 극구 만류하면서 걸음을 멈추라고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을 끝까지 따르기로 굳게 결심했기에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요단까지 따라갔습니다. 요단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으로 하늘로 데려가셨고 엘리사는 홀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스승이 지녔던 성령의 능력을 갑절이나 받아서 엘리야의 뒤를 이은 진정한 예언의 계승자가 되었던 것입니다(왕하2:1-14).

사람은 자기 인생에 어떤 것이 승리의 길이며 성공을 이루는 길인지를 깨닫게 되면 굳게 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난관이 있다 할지라도 나에게 옳은 길이라면 뜻을 굽히지 말고 끝까지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의 표제에는 “유다 광야에 있을 때”라고 했고, 11절에서 “왕”이라고 한 것을 보면 다윗이 셋째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어 유다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쓴 시편인듯 합니다. 내용적으로는 비록 환경은 메마르고 척박한 환경이지만 찬양하고 즐거워한다는 말과 함께 밝은 모습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이 주님을 대단히 사랑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시인은 “내 영혼”이라는 주어를 세 차례나 사용하면서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나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주를 갈망하라”, “내 영혼이 만족하리라”,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리라”

오늘 우리들도 환경이 비록 척박하고 힘들다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으로서 신앙적 결심을 할뿐 아니라 그로 인한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나의 영혼은 간절히 주를 갈망하면서 살 것입니다(1-2절).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여기 ‘영혼’(נפשׁ, 네페쉬)이란 인간의 지, 정, 의의 모든 욕구의 중심지로서 마음의 좌소(座所)를 가리킵니다. 사람의 중심을 가리키기에 인간으로 사용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한다’는 것은 내 심령, 내 삶 전체를 가지고 주를 갈망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여기 ‘간절히 찾다’, ‘갈망하다’, ‘앙모하다’는 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사모하고 사랑하여 간절히 찾고 갈망하고 앙모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처절하고 곤비한 환경에서 주를 암모할 것입니다(1절).

시인이 처한 환경은 광야, 즉 마른 땅, 물이 없어 곤비하고 황폐한 땅으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으며 삶을 영위하기도 힘든 환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마치 광야에서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시42:1-2). 여기 ‘간절히 찾다’, ‘갈망하다’, ‘앙모하다’는 단어들이 전부 강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보고 싶은지 간절히 찾아 헤매고 갈급해하고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나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2) 거룩한 성소에서도 주를 바라볼 것입니다(2절).

광야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소에서도 주님을 사모하여 바라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소(קדשׁ, 코데쉬)는 하나님이 임재한 장소로서 그의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왕상8:10-11, 대하5:13-14). 여기 ‘본다’(חזה, 하자)는 단어는 환상이나 계시 등 영적인 것을 바라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이 있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예배 속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듯이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를 사모한 것입니다.

(3)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한 것입니다(2절).

하나님을 갈망한 것은 그의 권능과 영광을 보고, 깨닫고, 경험하기를 소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서 나타나는 구원하심, 은혜주심, 능력이 나타나심, 죄인을 변화시키는 역사,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등 영적인 은총과 역사를 가리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변화하였듯이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의 역사와 능력을 경험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때에 위대한 기독교의 부흥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행2:1-4).

교우 여러분!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갈망하고 사모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과 같이 위대한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을 때에 인생과 운명이 바뀌었으며, 주님의 120명 제자들이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을 때에 위대한 역사를 창출해 냈던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나의 영혼은 주 안에서 만족스러워 하면서 살 것입니다(3-6절).

5절에는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골수’는 최고의 음식을, 그리고 ‘기름진 것’은 특별히 맛이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최고의 음식으로 만족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누리게 되는 영적 만족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러 만족하듯이, 목이 말라 갈증을 느끼던 사람이 시원한 물을 마시므로 만족하듯이 오늘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갈망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한 인생을 살겠다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자세인 것입니다.

(1) 영혼이 만족하는 것은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3절).

3절을 보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생명’(חיים, 하이임)이란 목숨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 즉 세상에서 누리는 부귀와 영화, 행복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신앙인은 세상에서 맛보는 부귀영화, 쾌락과 만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하심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하고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이 너무나 귀하고 존귀하여 과거에 누렸던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던 것입니다(빌3:8).

(2) 침상에서도, 밤이 맞도록 주를 기억하고 묵상하며 만족할 것입니다(6절).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시시각각 간절한 마음으로 찾고 갈망해야 합니다. 특히 모든 사람이 잠든 시간, 천지가 고요한 시간에 주님을 갈망하는 것은 더욱 간절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도 침상에서도 주를 기억하고, 잠을 이룰 수 없는 깊은 밤에도 주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와 함께 그 은혜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어찌 그 은혜에 만족하여 찬송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 내가 살아있는 동안 목숨을 다해 손을 들고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4절).

주님의 은혜에 만족함을 얻는 신자는 찬양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아니 목숨이 붙어있는 시간까지는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두 손 들고 찬양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늘 주님의 은혜에 만족 해 하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혼의 갈증, 심령의 침체, 신앙생활의 기쁨과 희열의 상실, 만족이 없는 교회생활과 봉사활동에 허덕이면서도 그냥 방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만족을 추구하십시오.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찬양과 기쁨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3. 나의 영혼은 주를 가까이 따르며 살 것입니다(7-11절).

8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여기 ‘따른다’(דבק, 다바크)는 단어는 ‘착 달라붙다’(to cleave), ‘추종하다‘(to adhere), ‘찰싹 들러붙다’(to stick fast)는 뜻으로 자기 인생은 주님의 뒤를 바싹 따라다니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도(道)에서 주님의 뒤를 바싹 따르는 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멀찍이 따르다 보면 시험에 빠지고 사탄으로 그 중간에 파고들게 하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마26:58). 주님을 가까이 따르는 생활을 해야 그의 사상, 그의 목적, 그의 인격, 그의 행실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주께서 나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7절).

전쟁에서 위기에 몰렸을 때에, 삶의 곤고한 처지에 놓일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원하고 돕는 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십니다. 세상 군대의 도움은 헛되지만 하나님의 도움은 참되십니다(사30:7, 31:3). 그러므로 그와 가까이하는 것이 안전을 보장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대하14:11, 사41:10, 13-14).

(2)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8절).

여기 ‘오른 손으로 붙든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붙들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도록 사용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페르샤의 고레스를 붙들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하시고 승승장구하여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만드시는 것처럼(사42:1) 그를 가까이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용사의 칼처럼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슥9:13, 참조 사41:13-14).

(3) 원수들 앞에서 역전의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9-11절).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붙들어 사용해 주시므로 원수를 이기어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입니다. 대적자들은 패배할 것이고, 땅 깊은 곳으로 내려갈 것이고, 칼의 세력에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마치 원수들은 하나님이 붙들어 사용하는 자 앞에서 지푸라기처럼 될 것이며 발바닥 밑의 재와 같이 될 것입니다(말4:1, 3).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곁에서 사람들이 다 떠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홀로 외로운 가운데 방황하게 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하며 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만이 나의 돕는 자이심을 깨닫고 가까이 하십시오. 꽉 붙들고 따라가십시오. 구원해 주실 것이며 붙들어 위대하게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 목회멘토링연구소 김성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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