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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설교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이찬수 목사 | 분당우리교회 특별새벽부흥회 | 2019-09-26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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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분당우리교회 특별새벽부흥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 5:6)
이찬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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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 목사 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크리스천투데이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의에 굶주림과 목마름이 항상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도는 이미 이룬 칭의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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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3/11/2022

View: 8030

설교말씀 – 의에주리고 목마른 자 – 양의문교회

죄를 버리고 좀 더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갈망, 자신의 임무와 소명에 충실하며,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 이런 갈망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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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sheep.org

Date Published: 12/8/2021

View: 8225

신구약설교 – 마 5: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1)/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밖에 있는 모든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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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ologia.kr

Date Published: 9/4/2022

View: 1303

[이수용 목사의 ‘팔복 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 국민일보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은 이미 주어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 받기를 사무치게 원하는 자,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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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3/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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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5:1-6) – mission.bz

4월 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5:1-6) 글을 쓰는 한 젊은 작가가 어느 때부터인가 자신의 능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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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7/21/2022

View: 106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 마태복음 5장 3절-12절 말씀 설교

기도에 목마른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부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입니다. ​. 팔복의 말씀 중 네 번째 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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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jin2nul2.tistory.com

Date Published: 12/21/2021

View: 9210

팔복: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유평교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 예수님은 물질적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비교하시면서 물질적 필요에 대해서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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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30/2022

View: 6100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 5:6) – 기독정보넷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배 부를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그 주림과 갈증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뜻이다. 영국의 신학자인 아더 핑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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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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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리고 목마른 갈급함으로 구해야 할 의 – Korea Times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팔복의 설교를 하시는 가운데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 주림의 목적이 ‘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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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icagokoreatimes.com

Date Published: 6/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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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이찬수 목사 | 분당우리교회 특별새벽부흥회 | 201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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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설교

  • Author: 분당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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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0.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_a8AzpOagM

의에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 5 장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말씀요약 —-

산상수훈의 팔복의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품과 인격의 특징에 관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삶의 태도와 모습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복되고 귀한 것으로 여기고, 이런 것들이 그의 제자된 자들에게서 더욱 증진되어 나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고 낯선 것으로 여기지 말고, 이것을 복으로 알고 붙잡고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주리고 목마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사람의 갈망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갈망할 때 복 있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불행하고 허무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갈망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세상은 무엇을 갈망합니까? 세상은 돈을 갈망합니다. 권력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도 많습니다. 쾌락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참된 배부름과 만족이 없습니다. 이런 갈망과 탐욕이 만들어내는 갈증은 해갈을 얻지 못합니다.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관심사와 좋아하는 것, 그들의 소원과 갈망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가장 주리고 목말라 있습니까?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갈망과 현저하게 다릅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갈망과 비슷한데 그저 취향과 색채에 있어서만 다른 것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갈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할 때 가장 보람을 느끼고 기쁘며, 무엇에 가장 열심을 내고, 무엇에 가장 큰 관심과 소원을 두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와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란 무엇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의(義)”라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의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도덕적, 윤리적인 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갈망을 두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갈망을 가진 자들은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선하게 살고자 하는 것, 사회적 공의를 갈망하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의는 그런 차원의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를 말할 때에는 여러 다양한 차원의 의, 다양한 기준에 따른 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른 의가 있고, 사람이 기준이 되는 의도 있습니다. 이런 의는 천차만별의 의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의는, 세상이 말하는 의리나 세상적 의미의 의, 사람이 기준이 되는 상대적인 의,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런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의라고 하신 헬라어 단어는 옳은 것, 바른 것, 올곧은 것, 의로운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 하나님 앞에서의 의, 영원한 의를 말합니다. 의는 하나님의 본성이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통치에 완전하게 합치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입니다. 이런 의를 갈망하고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팔복의 모든 복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오직 믿음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팔복의 갈망도 예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갈망이요 굶주림이요 목마름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은, 자기가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자”(칭의를 획득하고자)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불신자들은 이런 소원 자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참된 의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의를 갈망할 수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사람은 칭의에 대해서는 갈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고 칭의의 은혜를 참으로 귀히 여기고 사모할 따름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팔복의 의에 칭의가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사람이 보다 갈망하는 것은 성화입니다. 의인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라기보다는, 의인으로 “살고자” 하는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갈망은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아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 되었으니, 의인으로서 남은 삶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갈망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좋아하고 사모하고 귀히 여기고 그 의를 힘입어 살고자 하는 열망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불의(不義)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하기에 좀 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욱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고, 더 의롭고 더 진실하게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것, 이런 것을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로 알고 살아가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의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거듭나서 새 성품, 새 소원을 가지게 된 사람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은 이 의를 다 사모하고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갈망은 절대적인 갈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상태는 절대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상대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갈망은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점점 더 갈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의 의가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어느 정도의 성화를 이룬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이 갈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죄를 버리고 죄를 피하고 죄를 짓는 자리에서 떠나고 싶어하고 죄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좀더 가까이 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기를 가장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복음을 위하여,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을 제일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고 살기를 소원하는 갈망을 말합니다.

이 갈망은 의롭고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갈망입니다. 성경을 더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예배를 갈망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고, 사랑의 봉사를 소원하고, 겸손히 주님을 섬기는 것을 무엇보다 보람으로 여기는 품성, 그런 일을 할 때에 가장 기쁘고 즐겁고 열심을 내는 태도 이런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영적인 것에 대해 그렇게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칭의에 대해서는 한없이 감사하면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따라 의로운 자로 살고자 하는 갈망을 의미합니다. 죄를 버리고 좀 더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갈망, 자신의 임무와 소명에 충실하며,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 이런 갈망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저희는 배부를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배부를 것이라는 말은 그저 세상적으로, 물질적으로 모든 것 다 잘되게 해주시고, 불로장생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배부를 것이라고 하신 것은 참된 만족이 거기에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코 그런 갈망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갈망은 참된 만족을 모릅니다. 더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영적 갈망은 만족과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 금생과 내세에서 칭찬이 있고 만족이 있고 하나님의 인정과 복주심이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전혀 엉뚱한 것을 목말라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의는 전혀 갈망하지 않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의는 사실 너무 값비싼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살 수 없고, 우리가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갈망하는 자에게 배부르게 주시겠다는 약속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가장 좋은 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위하여 사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의를 열심히 추구합시다. 이런 것들에 정말 목말라합시다. 영적 갈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헛된 갈망,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만족과 영원한 배부름이 있는 이 영적 갈망을 가지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가는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수용 목사의 ‘팔복 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3가지 방식으로 정의를 말했다. 그것은 행복 자유 미덕 그리고 좋은 삶이다. 샌델 교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가치들을 반영할 수 있는 공정한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무슨 말인가. 곧 샌델 교수도 의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 가진 의의 실상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하는 의(justice)란 무엇인가. 그 바른 정의를 살펴본다.먼저 하나님 관점에서 보는 인간의 의를 살펴보자.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얘기한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정직하게 대면해 보면, 단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당시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대상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이었다. 이것이 팔복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그들에게는 남아 있는 의가 없었고, 또한 제공되는 의가 하나도 없었다. 늘 손해 보고 억울하고 빼앗기고 답답했던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그들은 이런 억울함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누군가 이 부당함을 풀어주기를 사무치게 기다렸다. 심지어 ‘주리고(페이나오)’라는 뜻은 뱃속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의가 완전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선언하셨다.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은 ‘의’의 부당함으로 인해 메시아(구원자)를 사무치게 기다리는 상태였음을 말한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의에 주리고 목말랐기’ 때문이다.이 말은 곧 우리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고 고통 가운데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황이 구원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참 복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의를 통해서는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다.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의는 단 하나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다고 얘기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그 단순한 믿음이 곧 하나님의 의를 내게 이룰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얘기한다.(롬 3:21~24)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은 이미 주어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 받기를 사무치게 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갈급함이 절대 굶주림(페이나오)으로 여겨 그분으로 채우기를 원하는 믿음을 가진 자이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이다.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당시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제자들뿐만 아니었다. 그 시대를 겪고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참 의가 이 땅에 왔는데 유대인들이 몰라봤다. 왜일까. 그들이 생각하는 의(세상의 의)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의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우리는 무엇이 정의인지 모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가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에 대해 목마른 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진리다.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5:1-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5:1-6)

글을 쓰는 한 젊은 작가가 어느 때부터인가 자신의 능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까?”

마크 트웨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딱 한번 그랬던 적이 있었소. 글을 쓰기 시작한지 대략15년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저술 능력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지.”

“그러셨어요? 그럼 그 때 어떻게 하셨나요? 글쓰기를 포기하셨나요?”

그러자 마크 트웨인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난 그 때 이미 유명해져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우리의 믿음생활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처음 구원받은 감격,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신기했고, 감사했습니다. 이 상태로 계속살 수 있다면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냉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화인 맞은 듯, 영혼은 메마르고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도 감격보다는 의무로 참석하곤 합니다. 내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데 남에게 전도를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단 한 번의 영적인 변화의 체험으로 영원에까지 이를 수는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선포하며 시작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기도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세례 받은 후에 광야로 가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을 시작으로 하여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셨고, 저녁이면 습관적으로 겟세마네로 들어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또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 바쁜 일정가운데도 수시로 기도하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로 기도하시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남기신 일곱 말씀 중에 세 말씀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사셨는지를 알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 기도가 있었기에 현실에서 굴복하지 않고, 늘 풍성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마침내 그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라고 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쓰고 있는 헬라어 δικαιοσ?νη ‘의(義)는 단어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올바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말합니다. 언약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구원의 행위입니다.

1.이 하나님의 구원을 목말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의 시대에 이집트로 이주했다가 430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해방이 필요했습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가 이스라엘사람들을 노예로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을 이집트 땅에 내리셨는데, 그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유월절 사건이었습니다.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인방과 설주에 바르게 하였습니다. 그 날 밤 이집트전역에 죽음의 사자가 집집마다 휩쓸어 갔습니다. 장자와 처음난 모든 짐승들이 다 죽을 때, 양의 피가 있는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입니다. 다른 것이 아닌 어린 양의 피가 구원의 증거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한 세례요한은 바로 이 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예수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로마서4:25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요한복음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의가 됩니다.

에베소서2:8,9,10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우리 구원의 감격이 시작된 것이 바로 여기서부터 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 그 무거운 죄의 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던 우리에게, 주님은 그 어떤 의로운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인간들이 지은 모든 죄의 대가를 완벽하게 청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6:4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십자가의 속죄의 죽음과 함께 죽고, 그의 의로우심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그 구원받음의 감격과 기쁨이 사라지고 있다 함은 이 원초적인 사건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십자가를 다시 붙드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그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행하신 그 구원의 사건에 근거해 있습니다. 변화되어진 의로운 내 삶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조금도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흉악한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말은 그냥 포장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희망은 오직 죄인인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다시 그 감격이 살아나게 됩니다.

찬송가465입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 만 바라봅니다.”

<(후렴)>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 만 바라봅니다.”

“맘속에 눈물을 흘릴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주께서 그 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 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요한계시록2:1이하에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안타깝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교회들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으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의 많은 좋은 점들을 아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소망으로 인내하였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타협하지 않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면 교회를 어지럽히려는 자들을 척결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오는 핍박을 견디어 내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나무랄 데 없는 최상의 교회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교회에는 교회의 문을 닫아야할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버렸습니다.”

주님은 어디에서 어쩌다가 잃었는지를 알아서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만약에 돌이켜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셨습니다. 교회 문을 닫겠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 처음 행위입니다.

건강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신앙인에게서 이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잃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의 간절함이 진실한 믿음의 삶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지금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구원의 감격을 이루어주신 그 십자가의 의와 그 은혜를 사모하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배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다 된 것입니까?

믿음의 삶에 따른 변화가 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칭의’의 문제입니다. ‘이신득의’라고 하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믿음 이후의 삶이 문제가 됩니다.

변화 받은 삶, 곧 ‘성화’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6:1의 고민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믿음생활에 처음 감격과 기쁨이 사라지고, 마음이 냉랭해지는 데는 바로 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으면 내 삶에 변화가 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믿음생활을 시작한지 3년이 되어도, 5년이 되어도 아니 몇 십 년이 되었어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는데 믿음에 대한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저희가 배부를 것입니다.

2.삶의 의를 목말라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의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로 이루는 의를 목마름으로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드라큐라’ 라고 하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사단을 상징하는 ‘드라큐라’에게 물리게 되면 같이 또 하나의 ‘드라큐라’가 되어 사망의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큐라’가 무서워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마늘과 십자가와 빛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힘을 잃고, 빛 앞에서는 그 존재자체가 무너져버립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단은 늘 우리 주변의 어둠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드라큐라’와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 놈 에게 잡히면 그 놈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전혀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붙들고 있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빛 되신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로마서6:10-14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한 번만 죽으신 것이요, 그가 지금 살아계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의 몸이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

내 스스로가 내 자신에 대하여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은 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죄는 우리를 충동질 합니다. 그 때마다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것에 대하여는 나는 죽었다고 선언해야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를 그렇게 선언하고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몸을 정욕에 굴복시키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죽었다면 죽은 줄로 알아!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죽은 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의에 대하여 살아난 사람이다.’ 선언하고 적극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의를 사모하되 간절히 찾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1)나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선언하십시오. 사단과 죄가 내 주인이 아닙니다. 사단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사실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게 행동함으로서 사단의 종이 되었음을 교훈삼아 언제어디서든지 고백하십시오.

“예수는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자원으로 삼으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선언하십시오. 당장 배부르고 만족한 삶의 길을 선택하지 말고 주님이 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사십시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119:105)

“말씀이 우리를 죄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말씀으로부터 분리합니다.”

그 말씀에서 벗어나 좌왕우왕하지 마십시오. 말씀으로 기준을 잡아 곧게 서십시오.

무엇보다 삶의 주인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오뚜기를 아십니까? 중심에 무거운 납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내 던져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듯 하다가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친 세상 풍파 속에서도 달콤한 유혹 앞에서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습니다.

3)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며 주님의 다스리심을 사모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십시오. 기도는 독백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우리의 믿음의 기도는 하늘보좌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 말이 유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시간이 길기 때문도 물론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믿음 때문입니다.

4)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성령은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리스도인 당신에게 성령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아니 “성령님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라고 선언하십시오.

기독교리더십의 탁월한 지도자, ‘존 맥스웰’은 “관계의 기술” 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지도자들이 끝까지 자신을 바르게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경고의 벨”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다음과 물어야 할 10가지 질문 가운데 2가지는 이렇습니다.

1.나는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가? 요셉처럼 날마다 하나님을 내 삶 속에서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2.나는 우선순위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이 “성공을 하고 난 후에 그 성공의 비극적인 대가로 부부생활의 붕괴와 건강의 상실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성공으로 가는 도중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첫째 하나님, 둘째 가족, 셋째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고, 가족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지킬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사역을 수행하는데 온전히 충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6:33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주님의 의를 부지런히 구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 더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현할 지혜를 구하였더니 그가 구하지 아니한 재물도, 영광도 함께 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배부를 것입니다.”

출처/최이우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 마태복음 5장 3절-12절 말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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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

본문: 마5: 3- 1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절)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마실 물이 동이 났습니다. 물은 찾을 길이 없고 목은 점점 말라왔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타고 있는 낙타를 죽여 그 속에 있는 물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자살 행위와 같다는 것을 알았지만 타는 듯한 목마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배고픔과 갈증은 이렇게 강렬합니다.

인간은 주릴 때에 음식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목이 마를 때에 물을 구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겸하면 얼마나 갈급하겠습니까?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인간 심령의 가장 강렬한 욕망을 표시합니다. 인간에게는 물론 여러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지식, 물질, 사랑, 권세, 명예 등이 있습니다. 이런 욕망 외에 인간에게는 의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옳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옳은 일을 하면 좋겠다 하는 욕망도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욕망이 어느 정도는 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악하기로 유명한 네로 황제도 젊어서 사형을 허락하는 첫 번 싸인을 할 때에 『내가 차라리 글씨 쓰는 것을 안 배웠더라면..』 하고 탄식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의(義)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우리에게 강렬한가가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물과 지식과 명예와 이성은 추구할지언정 가장 중요한 의를 위해서는 작은 희생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의』입니다. 우리는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죄와 싸워 이겨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배부름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기본이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모든 생명체가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배고픔의 고통을 압니다. 목마름의 고통도 압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먹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 보다 가장 힘이 드는 것입니다. 서러움 중에 배고픈 서러움보다 더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배고프면 어떤 체면도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라는 것은 전심전력하라는 것입니다. 열성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42:1)함과 같습니다. 사람이 배고프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은 배고픈 것을 모릅니다. 젊은이는 먹고 나면 곧 배고픕니다. 이는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먹고 나서 돌아서면 배고픕니다. 마시고 나면 곧 목마릅니다. 이것이 젊음이요 건강하다는 표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다 욕구불만에 빠져 있습니다. 욕심이 한이 없습니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대단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돈도 명예도 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욕망에 한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두가 다 불만투성입니다. 남 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자기주장이 앞서야 합니다.

지금 세상일에 전념하는 사람은 나중에 허탈해 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찌꺼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세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TV 광고를 보는데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모 카드사의 광고 멘트가 나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은 그 광고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소망의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행복을 위해 돈을 벌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돈으로 행복해지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 앞에서 과시욕을 부리며 다른 사람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한 구절로 경고하고자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절∼5절을 보면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혹 외모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10년이면 시들어버릴 외모보다 더 값진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아름답고도 겸허한 마음입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며 천국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외모에 들이는 공의 반만이라도 마음을 살피고, 그릇되고 악하고 음란한 생각들을 버린다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게 바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학벌이 없어 불행하십니까? 배운 사람들이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무시하며 행복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학벌이 매우 중요시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해마다 너 나 할 것 없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밤잠 못 자는 우리의 아이들을 보면 참말로 교육문제로 이민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들어간 대학인데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했고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학위를 땄겠습니까마는 그것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로 쓰여진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행복하다면 노력하고 돈을 들여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세상 지식과 학벌은 잠깐이고 모두가 허무하고 헛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자랑하면 넘어지고 패망하게 됩니다.

위에서 행복의 조건으로 열거한 돈이나 아름다운 외모나 학벌 위주의 지식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목적으로 쓰여진다면 그것은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결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행복에 눈먼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마5:6),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 쓰기보다는 『마음이 청결하게 되라』(마 5:8)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걸고 열심히 쌓아놓고 만들어놓지만 행복을 느끼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따라서 마음가짐을 고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다녔는데 하루는 그 교회에 계신 미국인 선교사가 장작을 한 차 사들여 왔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에게 장작을 쌓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청년은 교회의 한 귀퉁이에 장작을 가지런히 쌓아놓고 청소까지 말끔히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오시더니 『이곳은 비를 맞을 염려가 있으니 저쪽으로 옮겨 쌓았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불평할 법도한데 선교사님이 시키는 대로 말없이 장작을 옮겨 쌓았습니다. 그 해 눈이 많이 내린 크리스마스 날 선교사님은 청년에게 선물을 한 가지 주셨습니다. 선교사님은 이미 이 청년의 유학길을 마련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청년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눈 여겨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의롭고 공평하게 살면 재물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우리에게 『의롭고 공평하게 사는 지혜로운 자는 재물을 얻되 곳간까지 채울 정도로 많이 얻는다』고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의 인도함을 받아 의로운 길, 공평한 길로 행합니다. 이처럼 의를 행하고 공평한 길로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다음은 어느 무명 성도의 선행을 위한 고백입니다.

『저는 이 세상을 단 한 번만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과 친절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게 하옵소서. 제가 그것을 미루거나 핑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는 제가 다시 이 길을 지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아침이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을 우리가 의미있게 살 수 있는 길은 선한 길을 걸어가, 공의와 정직을 행하는 것입니다. 공의와 공평과 정직 안에 모든 선한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길’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행동 방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여 얻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공의롭고 공평하며 정직하게 살아야겠습니다.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잠2:9)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잠8:20- 21)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들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해갈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에는 물이, 배고픔에는 음식이 최고입니다. 목마름이 있는 자에겐 물을, 배고픈 자에겐 음식을 줘야합니다. 원하는 것들을 채워주고 채움을 받을 때 그것이 행복이요 만족입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원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원하는 것도 다양하고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아주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 있다면 물입니다. 물도 같은 물이 아닙니다. 생수(生水)가 있고 건수(乾水)가 있습니다. 생수는 깊은 암반에서 솟구쳐 터져 나오는 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건수는 땅속에 스미어있었던 것이 잠시 나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지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냥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건수는 사람의 수고가 없이도 구할 수 있는 물입니다. 이 물은 공급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수는 암반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물이기에 그 물을 얻는 데는 수고와 노력이 수반 되어야 한다.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은 쉽게 쉽게 무엇을 이루려고 합니다. 빨리빨리, 여기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습니다. 목마름을 영원히 해결할 수도 줄 수도 없습니다. 수고를 드리고 땀 흘려 파놓은 암반에서 솟구치는 물은 가뭄에도 메마르지 않습니다. 퍼 올리면 올릴수록 더 맑고 시원한 물이 계속하여 올라옵니다. 쉽고 편한 잠깐의 물을 원하는가? 아니면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원하는가? 생수를 얻으려면 나의 수고와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고 줄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건수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 우리는 너무 편하고 쉬운 것만을 원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암반의 수로를 찾는데 수고를 아끼지 말자 그 수고는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법칙과 우주의 법칙은 여전히 오늘도 진리입니다. 줄 수 있는 자가 행복한자입니다. 줄 수 있으려면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줄 것을 준비해야합니다. 이 땅에 목마른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늘 갈증 나는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생수가 되어주고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 그들도 우리처럼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44:3)

중국은 문화대혁명 때 선교사들을 다 내쫓고 성경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기독교를 장사 지냈다고 선언했지만, 성령까지 그 땅에서 내쫓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중국 땅에 지하 교회를 남겨 두셨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 보면 1982년 둥이라는 한 자매가 여자 죄수들만 600여 명 갇힌 감옥을 천국처럼 변화시킨 간증이 나옵니다. 감옥에서 새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성경을 원하자 성경을 몰래 갖고 있는 자매들은 낮에 무려 10시간이나 힘들게 노동한 후에도 밤에 다른 죄수들이 다 잠든 틈을 타 이불 속에서 전등 빛을 비춰 필사적으로 성경을 노트에 베끼고 또 베껴서 다른 사람에게 줬습니다. 이렇게 손으로 베낀 성경이 한 권 한 권씩 각 호실로 전해지면 서 자매들은 목마른 사슴처럼 밤에 이불 속에서나 화장실에 가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해 감옥은 성령의 역사로 점차 놀랍게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말씀(진리)과 기도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쏟아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배부른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에 굶주린 자들을 찾으십니다. 기도에 목마른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부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입니다.

팔복의 말씀 중 네 번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입니다. 의에 목마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 = 말씀 = 진리 = 하나님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에 목마르고

어떤 사람은 사랑에 목마르고

어떤 사람은 지식에 목마르고

어떤 사람은 권력에 목마릅니다.

그런데 의에 목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영혼이기에 재물에 주리지 않고, 명예에 주리지 않고, 자리에 주리지 않고 ……

성도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목말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마른 자를 찾으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어떤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영혼으로 이생을 지나가고 있습니까?

길을 막고 물어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의 눈빛을 보고, 그의 웃음을 보고, 그의 걸음걸이를 보고, 눈이 멀어 그 사나이와 같이 길을 떠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길을 나서버린 베드로와 안드레의 무너져 내렸던 그 영혼들처럼 아, 그렇게 복된 성도로 이 광야를 지나고 싶습니다.

찬송가 526장 (통 316장) 『목마른 자들아』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

2. 이 샘에 나는 물 강같이 흘러 온 천하 만국에 다 통하네 빈부나 귀천이 분별이 없이 다 와서 쉬고 또 마시겠네

3. 신기한 샘물을 마신자마다 목 다시 갈하지 아니하고 속에서 솟아나 생수가 되어 영원히 솟아 늘 풍성하리

4. 이 샘의 이름은 생명의 샘물 저 수정빛 같이 늘 맑도다 어린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쟎네

▣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복음성가)

1.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하늘의 아버지 날 주관 하소서

의의길로 인도하사 자유케 하소서

새 일을 행하사 부흥케 하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우소서

2. 성령으로 채우사 주 보게 하소서

주의 임재속에 은혜 알게 하소서

주 뜻대로 살아가리 세상 끝날까지

나를 빚으시고 새날 열어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우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오늘 성경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義)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의(義)입니다. 예수님이 곧 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입니다. 의를 목숨 걸고 사랑하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일에는 늘 뒤로 미루어 버립니다. ‘다음에 하지’ 하는 식입니다. 여기에 목숨을 걸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의를 갈망하고 의를 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의를 행하는 자가 복이 있고 그 후손에 이르기까지 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지는 못했으나 세울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중에 혹 마음에 “나는 아직도 죄를 계속하여 짓습니다. 그러나 이 죄를 꼭 끊기를 원합니다. 오 주여! 이 죄를 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아직도 나쁜 성질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꼭 고치고 싶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오 주여! 우리 사회에 얼마나 불의가 많습니까? 그러나 좀 더 옳은 사회, 좀 더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내 정성을 다 하려고 합니다.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며, 기도하며, 힘쓰는 이들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속에 새 생명이 이미 싹트고 움직이고 자라는 중인 까닭입니다.

내가 할 일이 과연 하나님 앞과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가? 인간이 의롭게 살려고 하여도 의롭게 살아지지 않는 것이 삶입니다. 그런데 옳게 살려고 하는 믿음과 의지조차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때론 의롭게 사는 일에 실패하고 좌절할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보며 의를 향한 불의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신12:28)

2.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돈에 대하여 혈안이 되어 뛰어다니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랑(이성)에 대하여 갈급하는 이도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백만의 사람이 서울 거리를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의(義)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야곱은 팥죽 한 그릇보다 장자의 명분이 더 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문에 가정을 떠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루터는 의를 갈급하다가 결국은 종교개혁의 선봉자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생명보다 믿음이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생명을 버렸습니다.

저의 삶의 목표는 많은 사람을 의로운 길,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의로운 길을 따라 살겠다는 자기 포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의를 따라 살며 손해보는 삶이 때로는 어리석은 것 같아도 그것이 참 지혜로운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매사에 먼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손해를 본 것의 갑절이나 풍성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의의 결과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32:17)

3. 의를 인하여 구원을 얻고(잠11:6), 장차 의를 따라 상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세상에서 불의와 거짓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길게 놓고 보면 궁극적으로 의와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힘이 의가 아니고 의가 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돌아가지만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불의를 심판하고 의를 이루며 돌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를 믿고 오늘 불의한 세상에서 의를 위한 고난을 기쁨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잠11:6)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삼하22:21, 시18:20)

4. 의를 행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창18:19), 의를 굳게 지키는 자가 생명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너무 욕심이 많습니다. 이 세상 것에 욕심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안약을 사서 발라라 한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라 한 것입니다. 이 세상 것으로 너무 많이 채워져 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 세상 일 때문에 밤잠을 자지 않습니다. 땀을 흘립니다. 머리가 돌 정도로 고민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러지 못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의를 위해 목숨을 걸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삽니다. 하나님에 대해 해바라기가 되야 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하나님을 피해 다니려고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우리 방법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행복해 질 수가 있습니까. 어림없지요. 날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럼 의가 무엇입니까. 의란 『디카이오수네』라 합니다. 이 말은 『의』 『옳음』 『올바름』『정의』 『선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말씀을 지키는 일이라는 뜻이고, 옳은 것, 옳은 사람, 올바른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양심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그릇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표준은 예수님이고,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은 누구도 거룩하지 않습니다. 정의롭지 않습니다. 아무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나무랄 자격이 없습니다. 다 흠이 있습니다. 다 결격사유가 많습니다. 사람은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릇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변합니다. 우리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가치가 없고, 만물 보다 거짓됩니다. 날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장 거룩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아야 합니다. 송이 꿀보다 더 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보다 더 많이 하나님 말씀을 갈망해야 합니다. 목마른 것처럼 사모해야 합니다. 배고픈 것처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얼마나 세상은 변해가고 있습니까.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의 의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점점 세상은 빗나가고 있습니다. 사슴이 포수에게 쫓깁니다. 이 산 저 산으로 도망갑니다. 온 몸은 땀으로 젖어 있습니다. 힘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기진맥진합니다. 더 이상 갈 힘이 없습니다. 산꼭대기에서 숨을 몰아쉽니다. 이젠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는 것처럼 갈급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의를 사모하기를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다 욕망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망이 많습니다. 사랑에 대한 욕망도 있습니다. 명예에 대한 욕망도 있습니다. 지식에 대한 욕망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말을 잘 아시지요. 그런 것처럼 우리는 의에 대해서도 욕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찾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워하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늘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는 이 시대의 증인입니다. 빛입니다. 소금입니다. 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삶을 말합니다.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잠11:19)

5.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잠15:9)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5)

6.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21: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7.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정말 배고픈 허기진 시대입니다. 목마른 시대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다 그렇습니다.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다 그렇습니다. 돈을 모아도 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자살하는 숫자가 늘어납니까. 다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다 늙은이가 아닙니다. 젊고 건강하고 잘 난 사람이 자살합니다. 정말 대책이 없다고 합니다. 가난해도 부자처럼 삽니다. 부자이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부르다는 것은 만족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불만이 목에까지 차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도 욕합니다. 장관도 욕합니다. 학생은 선생님을 욕합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큰 일 날 것입니다. 살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창고이십니다. 축복의 근원입니다. 배부르게 하시는 주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만나를 하루도 그치지 않으시고 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누구도 굶어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목말라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늘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늘 가난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배부르게 한다는 말씀에는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늘 정직합니다. 늘 진실합니다. 말씀이 떠나지 않습니다. 항상 즐겁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없습니다. 늘 사랑이 넘칩니다. 허기진 인생에게 하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처럼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족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변방만 두드리면 안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가장 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에게 엎드리십시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늘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족하고 배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의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늘 그렇게 살아 하나님의 복을 받고 진리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 의로우신 하나님, 주님께서 구하시는 의를 우리도 구하게 하시고 의를 따라 사는 길이 때로 힘들고 손해되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우리가 의를 추구함으로 영적인 배부름을 얻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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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2007년 미국 아이오와주에 있는 엠마오 성경 학교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방학 때 학교 식당이 문을 닫는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방학 기간 동안 한국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도 쉽지 않았고, 결국 기숙사에서 어떻게든 생존해보기로 했다. 길다면 긴 두 달여 동안 매 끼니를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급한 대로 아마존 웹사이트를 통해, 라면 한 박스를 구입 했고, 일주일에 한 번 지역 제과점에서 팔다 남은 빵을 학교에 와서 나눠줄 때면 나가서 줄 서 있다가 빵을 원하는 만큼 받아오기도 했다. 출석 중인 교회에서는 난민이나 노숙자에게 나눠줄 음식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원하는 음식을 가져가도록 은혜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배고팠다. 굶주림이 무엇인지 조금은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당신은 주려본 적이 있는가? 너무 배가 고파 그것이 심각하게 느껴져 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가 돼본 적이 있는가? 오래된 속담 중에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라는 말이 있다. 굶주리면 평소에 하지 않았던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이 배부른 사회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한국 전쟁 후에 한국은 아주 오랜 시기를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도 ‘배고픔’은 매우 익숙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로마의 군사 정치를 통해 많은 것을 빼앗기는 피지배국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부패한 유대교의 종교적 탈취로 인해 백성들은 지독한 배고픔의 문제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채우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주린 자”가 복이 있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의에 주린다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5)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고 그 결과로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배고픔과 배부름을 각각 조건과 약속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배고픔’은 음식으로 포만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구를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다. 나아가 몸에 필요한 양분을 섭취하여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 하는 자연스럽고 순수한 욕구를 말한다. ‘배부름’은 그 필요가 흡족하게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한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여 배부름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참고로 ‘주리다’에 사용된 헬라어 페이나오(πεινάω)는 ‘시장하다’(마 12:1, 3; 21:18), ‘주리다’(눅 6:21)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누가복음 4장 2절에서는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느끼신 극심한 굶주림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목마르다’(디파오, διψάω)는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을 설명하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요 4:13-15; 7:37; 계 21:6; 22:17).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영원히 해갈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팔복에서 가르치시고 약속하신 ‘배부름’ 역시 우리 영혼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다. 그냥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 예수님은 물질적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비교하시면서 물질적 필요에 대해서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6:32). 동시에 예수님은 영적 필요를 구하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여기서 예수님은 “의”에 대한 굶주림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갈급하라.’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라.’ 한 마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라’는 명령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신다고 노래했다(시 33:5).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노래했다(시 89:14). 다윗 역시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라고 요청했다(시 36:10). 영적으로 부패하고 심각한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선지자 이사야는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라고 노래했다(사 1:27). 또한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며 그가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보존하실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9:7).

‘하나님의 의’로 성경 전체를 바라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창조-타락-구속-영원의 관점에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시기 심히 좋은 상태로(의로운) 창조하셨으나, 죄로 인해 만물이 그분의 의로우심 앞에 불의하게 되어 사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의의 보좌에서 내려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자기를 믿는 모든 죄인에게 의가 되셨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불의를 심판하시고 자기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택하신 자들과 함께 영원히 의와 공의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리실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는 자들에게

팔복의 말씀을 듣는 이들 그리고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의로운 자인가?” “그리스도 안에 의롭다함을 얻은 그분의 제자는 과연 그분이 온전히 이루실 의를 갈급해 하고 있는가?”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한다. 불의한 일을 보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즉각적으로 알고 반응한다. 가령 지하철에서 노약자가 학생에게 사정없이 맞고 있다면,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뭔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담대한 사람은 나서서 그 학생을 뜯어말릴 것이다. 소심한 사람도 마음속으론 꿈틀대는 분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의로움의 기준이 제멋대로인 것이다. 가령 인신매매로 여성을 납치하고 불법으로 성매매를 하게 만든 이들에 대하여 불같이 화를 내고 공정한 심판을 요구하는 사람도 유사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성인 영상을 즐겨 보는 일에는 관대하다. 힘들게 만든 고가의 물건을 훔친 도둑을 처벌하라고 요청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많은 수고와 노력으로 만든 저작물을 불법으로 받아 사용한다. 남이 하면 공의의 잣대를 급히 내밀면서도 내가 하면 그 잣대를 구부러뜨리고 왜곡시키려 한다. “우리는 의로운 자인가?” 솔직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는 온전히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없다. 우리의 행위가 악하므로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요 3:19).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앞에 죄인은 마땅히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의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은 영적으로 고장 난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열쇠다. 자신이 불의를 사랑하고 의를 미워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아는 자가 의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시는 그리스도께 속에서 솟아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샘물을 구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 다섯을 두고 사람들을 피해 물을 길러 나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녀가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낱낱이 밝혀 주셨다. 그리고서야 그녀에게 영생의 샘물을 권하셨다.

당신의 불의를 자백하라. 의에 주리거나 목말라 하지 않는 자신, 불의를 사랑하는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라. 정의와 공의를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하는 메마른 당신의 영혼에 친히 생수의 근원 되는 웅덩이가 되어주실 것이다. 당신의 영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주실 것이다. 어둠이 아닌 빛을, 불의가 아닌 의를 사랑하고 갈급해 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다(벧전 2:2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그렇다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에 대하여 살게 된 자라면 스스로 이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진실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나는 나의 물질적 필요보다 먼저 그의 의를 구하는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시선이 이 땅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의한 세상은 주께서 언젠가 공의로 심판하여 불로 모두 태워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 의의 보좌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 나라와 의가 실현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명령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골 3:2).

예수님이 약속하신 “배부름”을 생각해보라.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다면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무엇으로 배부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평생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는다면 천국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공의와 정의에 흡족히 만족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불의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고 걱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먼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 영생의 생수를 누구든지 목마른 자에게 와서 마시라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에게 부탁하고 명령하신바, 영생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영혼의 목마른 자들에게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의 영원한 배부름이 되신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증거함으로써 그리해야 한다.

그런 자들에게 참된 복이 있다. 천국에서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공의로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불의가 제거되고 온전한 공의가 세워지는 날이 마침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날을 진정으로 기다리는가? 진실로 예수님께서 공의와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그 나라를 기대하는가?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만인의 심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속히 오시겠다 약속하신 그분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누가 상을 받을 것인가? 불의를 행하는 자? 더러운 자? 그들은 성 밖에 있어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상을 받는 이들은 의로운 자, 거룩한 자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다 여기신 ‘성도’들이여, 당신은 의로운 자로서 의를 행하며 주를 기다리고 있는가? 거룩한 자로서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는가? 주께서 속히 오실 것이다. 당신에게 주실 상을 가지고 보상하실 것이다. 배부르게 하실 것이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자.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고 계신다(딤후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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