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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7장 강해 | [하루 한 장] 욥기7장_내 인생이 바람 같음을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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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30 [하루 한 장]“내 인생이 바람 같음을” (욥7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분홍목사)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http://sungminch.com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욥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의 말을 쏟아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욥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합니까
죽을 것 같은데 어찌 견딥니까
참을 수 없는 아픔 중에서
불평을 하든 원망을 하든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말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들어주시고 받아주시고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지금 욥은 내 인생이 한낱
바람 같음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에노스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힘든 날들을 살아갑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날들
끝을 알 수 없는 아픔의 날들이
우리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우리의 인생의 참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는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을 붙잡읍시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영원히 그분의 평강 가운데
우리가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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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욥기 7장 강해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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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0.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L38FJQ5aNxg

2018/03/07(수) “욥기 7:1-21” / 작성: 정한조

본문 욥기 7:1-21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오늘 본문인 7장은 4-5장에 있었던 엘리바스가 욥에게 퍼부은 정죄에 대한 욥의 반론과 하소연의 뒷부분입니다.

단 하루 만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 몸에 악성종양이 뒤덮여 있는 욥에게, 엘리바스가 욥에게 했던 말의 근거는 자업자득과 인과응보였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네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삶을 따라서 상을 주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권선징악만의 하나님이셨다면, 우리는 모두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저주를 받고 형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욥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다’는 것을 예전에 사용했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힘든 노동’이라 표현한 이 단어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 중에 하나인, ‘만군의 여호와’라고 할 때에 ‘만군(萬軍)’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보다 ‘전쟁’이 더 적절하고도 훨씬 더 실감나는 번역입니다. 노동에 뛰어든 사람은 힘들거나 적성에 맞지 않으면, 퇴직하거나 이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나간 병사가 힘들거나 적성에 맞지 않다고 해서 부대를 나가게 되면, 탈영이 되고, 아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전쟁은 강제적입니다. 또한 노동은 나의 시간을 팔고서 그 대가로 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은 내 생명을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 현장보다 전쟁터가 훨씬 더 절박합니다.

그만큼 욥은 자신의 상황이 힘들고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짧게 끝나는 것이면 힘들어도 버텨볼만 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계속될 때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건설노동자들의 작업시간이 오전8시부터 오후5시까지로 정해져 있지만, 이렇게 시행된 것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그들의 노동시간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고대에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이나 품꾼은 매일매일 해가 지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해가 져야 종은 일을 그치고 비로소 쉴 수가 있고, 품꾼은 임금을 받아서 먹거리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과 품꾼이 해지는 시간을 기다렸다면, 욥은 해 뜨는 시간을 학수고대했습니다. 자신에게 임한 고통으로 인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개월동안 고통 가운데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빨리 아침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집는 전전반측(輾轉反側)하고 있는데, 그런 욥을 친구들이 이해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매일이 ‘베틀의 북’같다고 합니다. 베틀의 북은 베를 직조할 때의 틀로서 가로로 굉장히 빨리 지나갑니다. 욥은 4절에서는 언제 밤이 다 지나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한다고 했었습니다. 즉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배틀의 북과 같이 빨리 지나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 초점이 ‘속도’에 있지 않고, ‘의미’에 있습니다. 그렇게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보냈는데, 돌아보니 빨리 지나간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그 지난 세월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는 무가치했던 시간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욥은 이렇게 독백합니다. 7-8절입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은 자신의 생명이 ‘한낱 바람’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들판에서 서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람이 훅 불고 갑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낱 바람’을 개역한글성경에서는 ‘한 호흡’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이 더 깊이 와 닿습니다. 즉 욥은 자신의 인생이 “후-”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다시는 행복(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즉 이제는 자신 앞에는 끝없는 불행만이 전개될 것 같고, 앞으로는 험한 꼴만 볼 것 같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자기를 다시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찾으실 때도 자신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자신은 별로 살고 싶지도 않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욥의 하소연은 하나님에게로 향합니다. 11-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고대 사람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는 것을 표현할 때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다(사43:2)”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바다 괴물’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세상을 혼란시키는 존재를 대표’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은 그렇게 산 적이 없는데, 자기를 바다처럼 다른 사람들을 삼키는 존재로, 바다 괴물처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여겨, 자기를 감시하느냐고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욥의 하소연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7-1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욥의 이 하소연과 비슷한 표현인데, 정반대의 의미의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8:4-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라는 고백은 너무 엄청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은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차이는 인간과 하루살이와의 차이보다 억 만 배의 억 만 배보다 큽니다. 시편기자의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 존귀하게 만드셔서 감동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반면의 욥의 고백은 “하나님 제게 신경을 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를 좀 놔 주십시오. 내가 침을 삼킬 정도의 시간이라도 맘 편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의 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존귀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설교 말씀을 통해서 확인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의 주류에 편입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213km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려 연행하려고 가던 그를 돌려세우시고, 주님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고향 다소에서 13년 동안 침거하고 있던 그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바나바와 더불어 안디옥 교회의 공동담임으로 불러내시고, 또 전도자로 불러내셨습니다. 전도자로 살면서도 풍토병에 걸리기도 하고,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여김을 받아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셋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핏값을 주고 구속(救贖)해 주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도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혹 우리의 삶에 힘듦이 있을지라도,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걸고, 주님과 함께 걷고 달리십시다. 사도 바울의 인생 지도가 찢어지지도, 색이 바래지도, 삭아 없어지지도 않게 만들어 주신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지도도 동일하게 엮어지게 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려 가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욥이 “내가 무엇이라고 아침마다 찾아오셔서 단련하시며, 왜 나를 향한 눈을 떼지 않으십니까? 내가 침을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까”라고 하소연해도, 그 모든 과정이 욥으로 하여금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리고 있기 때문임을 압니다.

혹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고달픔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고 계시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님께 걸고 주님을 목적으로 삼고 살면, 우리의 인생 지도도 찢어지지도 않고, 색이 바래지도 않고, 삭아 없어지지 않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주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주류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찬찬히 다시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해 보십시오.

2. 욥은 자신의 인생이 힘든 노동(전쟁)과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그와 같았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3.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침을 삼킬 여유도 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느낀 때는 언제였습니다. 그 때의 일(상황)은 어떻게 정리가 되었습니까?

4.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욥기 7장 강해설교말씀]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욥 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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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7장에서는 욥의 탄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친 인생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욥이 갑자기 닥친 시련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고난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가져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육체적인 고통이 왔을 때 괴롭습니다. 하나님께 의문이 생깁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육체의 시련이 왔을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욥 7:1-21)

[1-5절]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 . . .

욥은 계속 말한다.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차바)[힘든 노동](BDB, NASB, NIV)이 있지 아니하냐? 그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야르케 솨웨)[헛된 달들 동안](욥이 고난받은 기간)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合瘡)되었다가(라가)[굳었다가] 터지는구나.”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 모세는 인생의 7, 80년 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주께서는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욥은 여러 달 동안 혹독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었다. 세상에 고난이 있는 까닭은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마 11:28; 요 14:27).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참된 안식의 세계인 천국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롬 14:17).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린다(히 4:9-11).

[6-10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 . .

욥은 또,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천을 짜는 베틀의 북은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욥은 자신의 날들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표현한다. 인생의 삶은 쏜살같이 빠르고 흐르는 물같이 신속하다. 모세는 7, 80년의 일생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하였다(시 90:10). 한 주간이 빨리 지나가고 한 해가 빨리 지나가며 어느덧 황혼이 찾아온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이 소망이 없고 한 호흡 혹은 바람(루아크) 같고 복된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짧고 허무하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시 39:5-6).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우리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약 4:14).

욥은 본문에서 또,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짧고 덧없이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인생의 지상의 삶은 끝난다.

[11-16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 . . .

욥의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었다. 그는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바다 짐승, 바다 괴물, 고래]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내 마음의 아픔’ ‘내 영혼의 괴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는 몸의 고통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 또 믿음이 약해지거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생기는 고통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인가, 또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다 짐승인가라고 묻는다.

또 욥은 침상에서도 평안치 못했다. 그는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침대]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愁心)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異像)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침상은 하루하루 피곤한 인생에게 휴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욥은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서운 꿈으로 인해 놀라고 이상(異像)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욥은 죽는 것을 소원하여 말한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에쳄)[아마 ‘뼈의 쑤심’] (BDB)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그는 이미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었다(욥 3:1).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기를 기뻐하시고 그 손을 들어 그를 끊으시기를 사모하였었다(욥 6: 8-9). 이제 그는 몸의 고통보다 숨이 막혀 죽는 것을 원한다.

[17-19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 . . .

욥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신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파카드)[살피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마음을 두신다. 시편 8:4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시편 144:3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사람은 죄가 많고 부족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중하게 여기시고 선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침마다, 분초마다 살피시고 시험하신다. 그는 사람을 잠시라도, 침 삼킬 동안이라도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전 포괄적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시 121:4). 시편 139:1-4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요한계시록 2:23에서, 주께서는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우리는 영원하고 충만한 안식의 세계인 천국만 사모하자.

[20-21절]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 . . .

욥은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고 우리의 혀의 말을 다 아신다(시 139:2-4).

후반부의 원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이다(MT, KJV).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욥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정한다. 또 그는 죄의 보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다. 욥기 34:21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4:12-13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진심의 순종으로 조금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그를 주목하셔서 그의 심령으로 무겁고 피곤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 해결책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간청한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이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헛된 세상일에 시간을 다 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오직 믿는 일과 주 안에서 선한 일들에 힘쓰자(엡 5:15-17).

우리는 평안할 때, 즉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침상에서의 평안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살자. 그러나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욥을 기억하고 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자.

우리는 무익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살피심을 감사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고 또 선하게만 살자.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의 죄인임을 인정하자.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죄와 칭의를 감사하며 천국을 사모하자.

[고린도전서 1장 헬라어 원문 강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문안 인사(고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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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강해 설교) 사람이 무엇이기에(욥기 7:17-21, 사도행전 20:7-12) – 사람이 사는 집

욥은 처음부터 정직하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이것이 욥기 1장 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욥이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사단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욥을 너무나 자랑하고 싶어서 그리고 욥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싶어서 사단의 시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 욥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욥기 7장은 사실은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머물러서 기도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의 기도, 저는 오늘 이 기도가 하나님 앞에 머물러있는 자들의 기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7장 17절부터 21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말하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조금 괜찮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죽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기도여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조차도 가면을 쓰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에게 뭔가 있는 것처럼 있어야 되는 것처럼 또 다른 사람들이 듣고서 어떻게 생각할지를 의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기도하지 못하고 여전히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욥은 7장 17절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마음을 두셨고 왜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고 계신 것입니까? 욥은 사람에게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솔직한 그 마음을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왜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늘 감찰하고 계십니까? 마음에 두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를 권징하고 계시고 인생 속에서 나를 단련시키고 계시고 어느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감찰하고 계시고 우리 인생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그 분이 왜 나만 야단치고 계시는 것처럼 또 나만 화살을 맞고 있는 것처럼 나를 왜 과녁으로 삼으셨고 완전히 내 죄악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그 죄 때문에 내가 죽을 것 같은 그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지 못하는 인생을 왜 나에게 허락하셨습니까? 라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욥의 기도를 들으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욥이 가장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마음에 두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힘들고 어렵고 죄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죄 때문에 나를 멀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마음에 두고 계시고 여전히 나를 감찰하고 계시다는 확신의 믿음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모세의 기도 바울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를 얘기했습니다. 모세가 믿음이 없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진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신, 그래서 그것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확신 때문에 아니 하나님이 나를 잡고 있는 그 확신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다할지라도 골육지친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하는 이 원망과 한탄의 소리가 사실은 하나님이 그런 순간에도 끝까지 그 손을 놓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그 확신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패배하는 것 같고 앞으로 나가자니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고 도대체 신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한 군데도 발을 디딜 곳이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오늘 욥의 기도든 모세의 기도든 바울의 기도든 예수님의 기도든 벼랑 끝에 서서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면서 뛰어내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시면서 죄 때문에 나를 죽일 것 같은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내면의 깊은 사랑이 흐르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어떤 순간 속에서도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처음부터 인도하고 계셨고 하나님이 나를 처음부터 보호하고 계셨고 하나님이 나를 처음부터 축복하고 계셨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생을 살다 뒤 돌아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잘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인도받고 보호받고 축복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의 시간 속에서 살다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건을 만나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또 어떤 사람을 통해서 인생의 바닥에 가보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도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먼저 보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몰라서 메시야가 누구이신지를 몰라서 여전히 고민하고 고뇌하고 있었는데 주님이 먼저 보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깨달아서 내려가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고뇌하고 있는 나다나엘을 먼저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먼저 보아야지만 내가 먼저 들어야지만 내가 먼저 뭔가를 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보호받고 인도받고 축복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식 악수처럼 내가 손을 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손을 먼저 잡고 계셨기 때문에 내가 손을 놓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도 아니 가장 깊은 죄 가운데 있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손을 놓지 않으시고 먼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싸우고 나서 먼저 얘기하면 지는 것 같아서 끝까지 말을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하는 것이 사랑의 모습,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때문에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떠나는 것(요일2:16)’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정과 욕에서 떠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게 하시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는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 두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인생 속에서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하려고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뒤집어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내가 다 책임지고 내가 다 좌지우지해서 인도하고 이루고야 마는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사랑, 먼저 하신 사랑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모든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이 하시는 사랑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고 계셨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 붙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 물질을 풍성하게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얘기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마지막은 인간이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마지막조차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하시는 것에 대해서 보면서 같이 공감하고 본 것에 대해서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중국에 갔더니 중국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동작구가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조선족 목사님들이 중국어를 못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별히 연변에 있는 분들은 중국어를 외국어처럼 하고 사셨습니다. 한족은 조선족 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한족은 더럽고 미개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용정교회를 나오신 분들인데 이분들이 갑자기 중국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중국에서 중국말을 배워야 된다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3년 동안 일반 한족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니시면서 중국어를 배워서 한족들을 전도하고 한족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물론 지하에 있는 가정교회입니다.

그 중에 한 목사님이 자신은 한국에 있는 총신대학교에 가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서 5년을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다 막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화가 나서 목회를 그만뒀답니다. 그리고 장사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연변에서 성도는 정말 먼 거리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1년 전에 그 곳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목사님을 만나러 성도에 가셨다고 합니다. 성도에서도 목회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는데 그 옆에 있는 중경이라는 도시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도시라는 마음이 생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개척을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사람들도 붙여주시고 정확하게 공동체를 만들어주셔서 그 분이 지금 한족교회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셨다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었는데 중경이라는 도시에 들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곳에서 40명에서 50명 정도 되는 한족교회를 하고 계십니다.

중국 사람들은 한 번 믿기 시작하면 굉장히 성실하다고 합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합니다. 깊은 관계가 맺어지고 나서 성실하게 다니기 시작하고 성실한 것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믿기 시작하면 온 가족을 다 데리고 나온다고 합니다. 처음에 눈에 뭐가 씌었는지 중경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도시라고 생각하고 목회를 하셨는데 이제 10년 쯤 되니까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도시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중경을 통해서 또 다른 소수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정직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때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욥이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마음에 두고 감찰하는 존재이다.’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존재가 자신이라고 욥이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두기고라는 청년이 졸고 있습니다. 졸고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졸다가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게으른 자,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것에 스스로 넘어져서 쓰러져 죽은 사람, 집중하지 않은 사람, 딴 짓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0장 말씀을 잘 읽어보시면 두기고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납니다.

‘사람들이 청년을 데리고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두기고가 너무나 게으른 사람이고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딴 짓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기고를 보면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두기고처럼 살지 말아야겠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상하게 위로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을 통해서 위로받았다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유티코스라는 이름인데 이 이름은 그 당시 종의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복이, 만득이 정도로 불리는 천한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사람의 이름이 우리들의 연약한 인생의 모습이고 피곤하고 지친 인생의 모습입니다. 졸다가 떨어져 죽었는데도 사도바울이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합니다. 유티코스, 두기고가 지친 인생의 모습으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졸음 때문에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졸고 있는 두기고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 위에 엎드려서 그 몸을 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체휼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떡을 떼어 먹습니다. 그를 살리고 나서 그는 다시 떡을 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이야기와 두기고의 이야기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두기고를 향한 기도가 연약한 모습, 게으른 모습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지만 그를 하나님의 몸으로 받아서 다시 부활의 이야기로 승화시키고 있는 부활의 믿음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두기고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약한 모습조차도 주님이 쓰실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욥과 같이 또는 두기고와 같이 인생의 고난과 슬픔 가운데서도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고상한 기도가 아니라 지치고 힘든 인생의 이야기들을 주님 앞에 보여주면서 다시 부활할 수 있도록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안고 체휼의 기도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 가운데서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실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마다 세 가지를 신앙의 원리로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능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믿고 있었는데 애매한 고난이 왔습니다. 그 때 그가 생각했던 것이 하나님은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시다면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에게 마음을 두시고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감찰하고 계실까? 하나님의 부재와 인생의 고난 가운데서 이기고 견딜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마지막을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최대의 사랑과 최고의 사랑과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기대면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있는 것 같은데 나를 가장 최고로 최대로 최선의 뜻으로 끌고 가신다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고 하나님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몰렉의 제사 앞에서 그런 하나님 믿기 싫다고 했다면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대한 신앙의 고백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고 그 아들을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욥과 같은 소망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에게 마음을 두시고 감찰하고 계십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나에게서 눈을 Ep지 않으시고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한 번도 내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5. 3. 8

히브리어 욥기 7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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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로 차바 레에노쉬 알 알레 아레츠 웨키메 사킬 야마우

개역개정,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새번역,1 인생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이, 고된 종살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그의 평생이 품꾼의 나날과 같지 않으냐?

우리말성경,1 “사람이 땅에서 사는 것이 고해가 아닌가? 그 삶이 품꾼의 삶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가톨릭성경,1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영어NIV,1 “Does not man have hard service on earth? Are not his days like those of a hired man?

영어NASB,1 “Is not man forced to labor on earth, And are not his days like the days of a hired man?

영어MSG,1 “Human life is a struggle, isn’t it? It’s a life sentence to hard labor.

영어NRSV,1 “Do not human beings have a hard service on earth, and are not their days like the days of a laborer?

헬라어구약Septuagint,1 ποτερον ουχι πειρατηριον εστιν ο βιος ανθρωπου επι της γης και ωσπερ μισθιου αυθημερινου η ζωη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militia est vita hominis super terram et sicut dies mercennarii dies eius

히브리어구약BHS,1 הֲלֹא־צָבָא לֶאֱנֹושׁ [כ= עַל] [ק= עֲלֵי]־אָרֶץ וְכִימֵי שָׂכִיר יָמָיו׃

성 경: [욥7: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 `전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바'(*)는 `군대’,`전쟁’, `부역'(사 40:2)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은 군대에 지용된 자가 무거운 고역을 강제적으로 해야하듯 인간 역시 고역스러운 삶을 영위해 나가야 되지 않느냐는 의미이다. 한편 여기에서 욥은 인생 일반을 취급함으로써 자신의 현재 고통스런 삶의 정황을직접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생 일반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현재 자신의 고통의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현 상황은 군인이 강제적(의무적)으로 힘든 고역을 수행해야 하듯, 자신에게 주어진 재난(1:13-1 9)을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현재 상황은 주인(하나님)에게고용되어 하루의 노동량(욥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를 `재난’으로 볼 수 있겠다)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품군'(본절 하반부)이나 다름 없었다.

케에베드 이쉬아프 첼 우케사키르 예카웨 파올로

개역개정,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새번역,2 저물기를 몹시 기다리는 종과도 같고, 수고한 삯을 애타게 바라는 품꾼과도 같다.

우리말성경,2 종이 땅거미 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같이, 품꾼이 하루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같이

가톨릭성경,2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영어NIV,2 Like a slave longing for the evening shadows, or a hired man waiting eagerly for his wages,

영어NASB,2 “As a slave who pants for the shade, And as a hired man who eagerly waits for his wages,

영어MSG,2 Like field hands longing for quitting time and working stiffs with nothing to hope for but payday,

영어NRSV,2 Like a slave who longs for the shadow, and like laborers who look for their wages,

헬라어구약Septuagint,2 η ωσπερ θεραπων δεδοικως τον κυριον αυτου και τετευχως σκιας η ωσπερ μισθωτος αναμενων τον μισθ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sicut servus desiderat umbram et sicut mercennarius praestolatur finem operis sui

히브리어구약BHS,2 כְּעֶבֶד יִשְׁאַף־צֵל וּכְשָׂכִיר יְקַוֶּה פָעֳלֹו׃

성 경: [욥7:2]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 고대 히브리 사회에 있어서 품꾼의 노동 시간은 엄격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날이 밝거나 해가 뜰 때 일을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 그것을 끝냈다. 따라서 품꾼에게 있어서 해가 저무는 것은 단순히 일의 종결 시간을 뜻하는 것 이외에 고역스러운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과 평화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욥은 고난의 때가 속히 끝나기를 소망하는 자신의 심경을 노동시간이 속히 끝나기를 염원하는 품꾼의 심경에 비유하고 있다.

켄 혼할티 리 야르헤 솨웨 웨렐로트 아말 민누 리

개역개정,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새번역,3 내가 바로 그렇게 여러 달을 허탈 속에 보냈다. 괴로운 밤은 꼬리를 물고 이어 갔다.

우리말성경,3 나도 몇 달 동안 허무한 일을 당하고 비참한 밤이 나를 위해 정해졌다네.

가톨릭성경,3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영어NIV,3 so 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 and nights of misery have been assigned to me.

영어NASB,3 So am I allotted months of vanity, And nights of trouble are appointed me.

영어MSG,3 I’m given a life that meanders and goes nowhere– months of aimlessness, nights of misery!

영어NRSV,3 so I am allotted months of emptiness, and nights of misery are apportioned to me.

헬라어구약Septuagint,3 ουτως καγω υπεμεινα μηνας κενους νυκτες δε οδυνων δεδομεναι μοι εισιν

라틴어Vulgate,3 sic et ego habui menses vacuos et noctes laboriosas enumeravi mihi

히브리어구약BHS,3 כֵּן הָנְחַלְתִּי לִי יַרְחֵי־שָׁוְא וְלֵילֹות עָמָל מִנּוּ־לִי׃

성 경: [욥7:3]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공허한(무익한) 달들을 부여받았다'(NIV, 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이다. 여기서 욥이 자신의 지난 날들을 `무익한’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고난을 타개하려는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재난이 자신에게 닥친 이후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산과 소유는 여전히 상실된 채로 있었으며 자손 또한 다시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육체의 질병은 더욱 가중되고(5절),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갈등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욥은 이제 절망의 벽에 부딪혀 지나간 날들이 마치 열매없는 무용지물과 다름없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임 솨캅티 웨아말티 마타이 아쿰 우믿다드 아레브 웨사바티 네두딤 아데이 나쉐프

개역개정,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새번역,4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구나.

우리말성경,4 내가 누울 때 ‘내가 언제나 일어날까? 밤이 언제 끝날까?’ 하지만 새벽까지 이리저리 뒤척인다네.

가톨릭성경,4 누우면 ‘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영어NIV,4 When I lie down I think, ‘How long before I get up?’ The night drags on, and I toss till dawn.

영어NASB,4 “When I lie down I say, ‘When shall I arise?’ But the night continues, And I am continually tossing until dawn.

영어MSG,4 I go to bed and think, ‘How long till I can get up?’ I toss and turn as the night drags on–and I’m fed up!

영어NRSV,4 When I lie down I say, ‘When shall I rise?’ But the night is long, and I am full of tossing until dawn.

헬라어구약Septuagint,4 εαν κοιμηθω λεγω ποτε ημερα ως δ’ αν αναστω παλιν ποτε εσπερα πληρης δε γινομαι οδυνων απο εσπερας εως πρωι

라틴어Vulgate,4 si dormiero dico quando consurgam et rursum expectabo vesperam et replebor doloribus usque ad tenebras

히브리어구약BHS,4 אִם־שָׁכַבְתִּי וְאָמַרְתִּי מָתַי אָקוּם וּמִדַּד־עָרֶב וְשָׂבַעְתִּי נְדֻדִים עֲדֵי־נָשֶׁף׃

성 경: [욥7:4]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전신에 퍼진 피부병(2:7,8)으로 인해 전전반측(轉轉反側)하는 욥의 참담한 심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밤은 휴식과 평안의 시간이요, 잠은 하루 동안의 피로와 고통을 풀어주는 묘약(妙藥)이다.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들이 여느 사람보다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부분의 낮 시간 동안에 친구들과 변론함으로써 심신이 지쳐 있었을 것이며, 또한 추한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밤은 더 큰 형극의 시간이었다. 여느 병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의 질병은 밤에 더욱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13-15절). 이러한 육체적 고통 이외에도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지 않나하는 영적 회의와 갈등 때문에도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라바쉬 베사리 림마 웨기쉬 웨구쉬 아팔 오리 라가 와임마에스

개역개정,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새번역,5 내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구나.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터져 버리는구나.

우리말성경,5 내 몸은 벌레와 흙먼지로 옷 입었고 내 살은 곪아 터졌다네.

가톨릭성경,5 내 살은 구더기와 흙먼지로 뒤덮이고 내 살갗은 갈라지고 곪아 흐른다네.

영어NIV,5 My body is clothed with worms and scabs, my skin is broken and festering.

영어NASB,5 “My flesh is clothed with worms and a crust of dirt; My skin hardens and runs.

영어MSG,5 I’m covered with maggots and scabs. My skin gets scaly and hard, then oozes with pus.

영어NRSV,5 My flesh is clothed with worms and dirt; my skin hardens, then breaks out again.

헬라어구약Septuagint,5 φυρεται δε μου το σωμα εν σαπρια σκωληκων τηκω δε βωλακας γης απο ιχωρος ξυων

라틴어Vulgate,5 induta est caro mea putredine et sordibus pulveris cutis mea aruit et contracta est

히브리어구약BHS,5 לָבַשׁ בְּשָׂרִי רִמָּה [כ= וְגִישׁ] [ק= וְגוּשׁ] עָפָר עֹורִי רָגַע וַיִּמָּאֵס׃

성 경: [욥7:5]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 여기서 `구더기'(*, 라마)는 흰 색의 길고 미끄러운 형태의 벌레로서(Quain’s, Dictionar of Medicine, vol. 1,p.512), 욥의 피부가 곪은 데에서 기생한 것으로 추측된다(17;14). 그리고 `흙 조각’은 (1) `때'(공동번역), (2) `피부로부터 나오는 흙덩이'(Keil & Delitzsch), (3)`먼지'(KJV, dust ; RSV, dirt), (4) `상처의 딱지'(NIV, scabs ; Lange, `굳어진 꺼풀’)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여기서는 기와 조각으로 긁고(2:8), 종기가 나서 지저분하게된 욥의 몸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본문의 묘사에 근거해 볼때 욥의 질병의 상태가 상당히 악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 구나 – 이는 욥의 피부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가(RSV, hardens) 다시 터지는 것을 가리킨다. 욥은 자신의 몸에 피부병이 발병한 이래로 여러 달이 흐르는 동안(3절) 이러한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문을 원문에 따라 정확히 번역하면 `나의 살갗이 깨어진다. 그리고 곪는다’ 인데,이것 역시 종기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곪아 터지고 그 위에 새 살이 돋아나는 피부병의 일반적 증상을 가리킨다.

야마이 칼루 민니 아레그 와이크루 베에페스 티크와

개역개정,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새번역,6 내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가니, 아무런 소망도 없이 종말을 맞는구나.

우리말성경,6 내 인생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가니 소망도 없이 끝나고 마나 보네.

가톨릭성경,6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영어NIV,6 “My days are swifter than a weaver’s shuttle, and they come to an end without hope.

영어NASB,6 “My days are swifter than a weaver’s shuttle, And come to an end wiYout hope.

영어MSG,6 My days come and go swifter than the click of knitting needles, and then the yarn runs out–an unfinished life!

영어NRSV,6 My days are swifter than a weaver’s shuttle, and come to their end without hope.

헬라어구약Septuagint,6 ο δε βιος μου εστιν ελαφροτερος λαλιας απολωλεν δε εν κενη ελπιδι

라틴어Vulgate,6 dies mei velocius transierunt quam a texente tela succiditur et consumpti sunt absque ulla spe

히브리어구약BHS,6 יָמַי קַלּוּ מִנִּי־אָרֶג וַיִּכְלוּ בְּאֶפֶס תִּקְוָה׃

성 경: [욥7:6]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베틀의 북 – 원문을 직역하면 `베틀짜는 사람의 북'(KJV, NIV, RSV, a weaver’s s-huttle)이다. 이것은 베를 직조할 때 실을 엮는 틀로서 대단히 빠르게 좌우로 움직인다. 이는 찰나(刹那)같은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고백은 4절의 말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4절에서 욥은 자신의 날이 더디 간다고 토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병중에 있는 자들은 그 기간을 매우 길게 느끼기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은 세월의 빠름에 그 초점이 있기 보다는 그 덧없음(허무)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여야 한다. 즉, 본절에서 욥은 아무런 성과(회복)없이 보낸지난 몇달(3절)이 자신에게는 전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절망과 무가치의 시간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본절 하반부).

제콜 키 루아흐 하야이 로 타슙 에니 릴오트 토브

개역개정,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새번역,7 내 생명이 한낱 바람임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내가 다시는 좋은 세월을 못 볼 것입니다.

우리말성경,7 내 인생이 바람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 눈이 다시는 좋은 것을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톨릭성경,7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영어NIV,7 Remember, O God, that my life is but a breath; my eyes will never see happiness again.

영어NASB,7 “Remember that my life is but breath, My eye will not again see good.

영어MSG,7 “God, don’t forget that I’m only a puff of air! These eyes have had their last look at goodness.

영어NRSV,7 “Remember that my life is a breath; my eye will never again see good.

헬라어구약Septuagint,7 μνησθητι ουν οτι πνευμα μου η ζωη και ουκετι επανελευσεται ο οφθαλμος μου ιδειν αγαθον

라틴어Vulgate,7 memento quia ventus est vita mea et non revertetur oculus meus ut videat bona

히브리어구약BHS,7 זְכֹר כִּי־רוּחַ חַיָּי לֹא־תָשׁוּב עֵינִי לִרְאֹות טֹוב׃

성 경: [욥7:7]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 `호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KJV, wind) `공기’, `영’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짧은 기간을 상징함과 아울러 허무와 덧없음을 의미한다(시 78:39; 전 1:14; 사 41:29; 렘 5:13). 아마 욥은 자기 병이 치유 불가능하다고 예견했을 것이며, 따라서 죽음만이 그것을 모면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욥의 변론의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6:1-7:6까지의 욥의 변론은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나 본절에서 부터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가 대화(dialogue)형식이었다면 후자는 독백(soliloquy) 형식을 띠고 있다.

󰃨 복된 것 – 좁게는 (1) 그의 질병이 완치되는 것(2:8, 9)을, 넓게는 (2) 그의 건강, 소유(1:3), 자손(1:2) 등이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5장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약속한 축복(5:17-27)과 동일하다. 그러나 욥의 현재 상황은그 같은 축복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무(全無)하였다. 이로써 욥은 끝없는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되었다.

로 테슈레니 에인 로이 에네카 비 웨에넨니

개역개정,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새번역,8 어느 누구도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눈을 뜨고 나를 찾으려고 하셔도 나는 이미 없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8 지금 나를 보는 눈이 더는 나를 못 보고 주의 눈이 나를 찾아도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8 저를 바라보던 이의 눈은 저를 보지 못하고 당신의 눈이 저를 찾는다 하여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

영어NIV,8 The eye that now sees me will see me no longer; you will look for me, but I will be no more.

영어NASB,8 “The eye of him who sees me will behold me no more; Your eyes will be on me, but I will not be.

영어MSG,8 And your eyes have seen the last of me; even while you’re looking, there’ll be nothing left to look at.

영어NRSV,8 The eye that beholds me will see me no more; while your eyes are upon me, I shall be gone.

헬라어구약Septuagint,8 ου περιβλεψεται με οφθαλμος ορωντος με οι οφθαλμοι σου εν εμοι και ουκετι ειμι

라틴어Vulgate,8 nec aspiciet me visus hominis oculi tui in me et non subsistam

히브리어구약BHS,8 לֹא־תְשׁוּרֵנִי עֵין רֹאִי עֵינֶיךָ בִּי וְאֵינֶנִּי׃

성 경: [욥7:8]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나를 본 자 – 원문을 정확하게 옮기면 `지금 나를 보는 자'(NIV, (the eye) that now see me)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를 보아왔던 자'(KJV, him that hath seen me)로 번역하는 것이 전후 문맥에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전자의 견해를 취할 경우 본문은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을 가리키며,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는 지금까지 욥을 알고 지내왔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 전절(前節)에서 욥은 친구들과의 사별(死別)을 토로한데 이어, 여기에서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토로하고 있다. 즉, 욥은 죽음이 현세에 있어서 인간관계의 단절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도 종결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죽음을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한편 우리는 본문을 `죽음의 종결성’이란 측면에서만 살필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욥의 갈망’이란 차원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이 닥친 이후로 줄곧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해 왔다. 이러한 그의 염원은 “내가 친히 그(하나님)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19:27)라는 고백 속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현재 욥의 상황은 이러한 그의심적 염원 상태와 정반대로 전개되어 구원의 여하한 가능성 조차 상실되어 가고 있다. 육체적 질고가 악화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도 희박해져 간다. 즉, 현재 욥은 영적.육적 생명의 위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칼라 아난 와예랔 켄 요레드 쉐올 로 야알레

개역개정,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새번역,9 구름이 사라지면 자취도 없는 것처럼, ㉠스올로 내려가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다시는 올라올 수 없습니다. / ㉠또는 ‘무덤’ 또는 ‘죽음’

우리말성경,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지듯이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는 돌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가톨릭성경,9 구름이 사라져 가 버리듯 저승으로 내려간 이는 올라오지 못합니다.

영어NIV,9 As a cloud vanishes and is gone, so he who goes down to the grave does not return.

영어NASB,9 “When a cloud vanishes, it is gone, So he who goes down to Sheol does not come up.

영어MSG,9 When a cloud evaporates, it’s gone for good; those who go to the grave never come back.

영어NRSV,9 As the cloud fades and vanishes, so those who go down to Sheol do not come up;

헬라어구약Septuagint,9 ωσπερ νεφος αποκαθαρθεν απ’ ουρανου εαν γαρ ανθρωπος καταβη εις αδην ουκετι μη αναβη

라틴어Vulgate,9 sicut consumitur nubes et pertransit sic qui descenderit ad inferos non ascendet

히브리어구약BHS,9 כָּלָה עָןָן וַיֵּלַךְ כֵּן יֹורֵד שְׁאֹול לֹא יַעֲלֶה׃

성 경: [욥7:9]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올'(*)은 `비었다’, `깊다’를 의미하는 동사 `솨알'(*)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음부’를 죽은 자의 영혼이 내려가는 어두운 지하 세계로 인식했던 것 같다(창 37:35; 민 16:30, 33; 시 55:15; 사 5:14). 그런데 본절에 기초해 볼 때 욥이 음부 세계에 관해 어떤 관념을 가졌는지 정확히 추측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본서는 그 분류상 시가 문학(詩歌文學)에 속하며, 따라서 죽음과음부 세계에 대한 욥의 묘사 역시 교리적 성격보다는 시적.비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은 음부에서 지속, 고정되며 현세로 되돌아오거나 다른 세계로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음과 음부 세계에 대한 욥의 이러한 관념은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지속된다고 믿은 고대 팔레스틴, 특히 애굽인들의 내세관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이 현세를 왕래한다고 믿은 반면, 욥은 이 양자(兩者)사이의 단절성을 믿었다는 측면에서 그의 내세관은 이방의 그것과 구별되며, 신약의 내세관의 한 토대를 형성했다 하겠다(마18:9; 눅 16:19-31; 계 20:10).

로 야슈브 오드 레베토 웨로 얔키렌누 오드 메코모

개역개정,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새번역,10 그는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고, 그가 살던 곳에서도 그를 몰라볼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0 그가 다시는 자기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가 있던 자리도 더는 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0 다시는 제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가 있던 자리도 그를 다시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영어NIV,10 He will never come to his house again; his place will know him no more.

영어NASB,10 “He will not return again to his house, Nor will his place know him anymore.

영어MSG,10 They don’t return to visit their families; never again will friends drop in for coffee.

영어NRSV,10 they return no more to their houses, nor do their places know them any more.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ουδ’ ου μη επιστρεψη ετι εις τον ιδιον οικον ουδε μη επιγνω αυτον ετι ο τοπο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0 nec revertetur ultra in domum suam neque cognoscet eum amplius locus eius

히브리어구약BHS,10 לֹא־יָשׁוּב עֹוד לְבֵיתֹו וְלֹא־יַכִּירֶנּוּ עֹוד מְקֹמֹו׃

성 경: [욥7:10]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 음부 세계와 현세와의 단절성을 의인법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8절 주석 참조). 고대 팔레스틴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생전에 그가 살던 집이나 아끼던 물건에 도로 돌아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애굽인들은 영혼이 육체에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들이 미이라를 만들어 무덤속에 보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욥은 이방 세계에 살았으나 그들의 이 같은 종말관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관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감 아니 로 에헤사크 피 아답베라 베차르 루히 아시하 베마르 나프쉬

개역개정,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새번역,11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1 그러므로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겠습니다. 내 영이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말하고 내 영혼이 이렇게 쓰라려 하면서 원망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1 그래서 이 몸은 입을 다물지 않겠습니다. 제 영의 곤경 속에서 토로하고 제 영혼의 쓰라림 속에서 탄식하겠습니다.

영어NIV,11 “Therefore I will not keep silent; I will speak out in the anguish of my spirit, I will complain in the bitterness of my soul.

영어NASB,11 “Therefore, I will not restrain my mouth; I will speak in the anguish of my spirit, I will complain in the bitterness of my soul.

영어MSG,11 “And so I’m not keeping one bit of this quiet, I’m laying it all out on the table; my complaining to high heaven is bitter, but honest.

영어NRSV,11 “Therefore I will not restrain my mouth; I will speak in the anguish of my spirit; I will complain in the bitterness of my soul.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αταρ ουν ουδε εγω φεισομαι τω στοματι μου λαλησω εν αναγκη ων ανοιξω πικριαν ψυχης μου συνεχομενος

라틴어Vulgate,11 quapropter et ego non parcam ori meo loquar in tribulatione spiritus mei confabulabor cum amaritudine animae meae

히브리어구약BHS,11 גַּם־אֲנִי לֹא אֶחֱשָׂךְ פִּי אֲדַבְּרָה בְּצַר רוּחִי אָשִׂיחָה בְּמַר נַפְשִׁי׃

성 경: [욥7:1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말하며…원망하리이다 – 본문은 앞으로 전개될 욥의 변론(불평)에 대한 서론격으로서, 욥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의 심각성으로 인해 심중(心中)에 있는 불만을 기탄없이 하나님께 털어놓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욥의 연설(演說)은 얼핏 보기에 매우 경거 망동(輕擧妄動)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본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욥의 하나님께 대한 질문에는 이러한 인상이 더욱 짙게 풍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욥의 이러한 언사(言辭)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유일성, 그리고 인격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것을 거두어 줄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인식했으며(하나님의 주권), 또한 그분을 고난에 처한 인간(욥)의 소리를 들어 주시는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하나님의 인격성). 만일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욥은 고난 중에 차라리 영원히 침묵해 버렸거나 아니면 자살 등의 방법으로 고난을 종결시켜 버렸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말들을 고통에 대한 불평과 비난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한 인간의 신앙적 갈등의 토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얌 아니 임 탄닌 키 타심 알라이 미쉬마르

개역개정,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새번역,12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내가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 / ㉡히, ‘얌’ ㉢히, ‘타닌’

우리말성경,12 내가 바다입니까, 아니면 바다의 괴물입니까? 주께서 왜 나를 감시하십니까?

가톨릭성경,12 제가 바다입니까? 제가 용입니까? 당신께서 저에게 파수꾼을 세우시다니.

영어NIV,12 Am I the sea, or the monster of the deep, that you put me under guard?

영어NASB,12 “Am I the sea, or the sea monster, That You set a guard over me?

영어MSG,12 Are you going to put a muzzle on me, the way you quiet the sea and still the storm?

영어NRSV,12 Am I the Sea, or the Dragon, that you set a guard over me?

헬라어구약Septuagint,12 ποτερον θαλασσα ειμι η δρακων οτι κατεταξας επ’ εμε φυλακην

라틴어Vulgate,12 numquid mare sum ego aut cetus quia circumdedisti me carcere

히브리어구약BHS,12 הֲיָם־אָנִי אִם־תַּנִּין כִּי־תָשִׂים עָלַי מִשְׁמָר׃

성 경: [욥7:12]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가 바다니이까 – 어떤 학자는(Delitzsch, Hirzel) 본문의 `바다'(*, 얌)를 나일강으로 보기도 한다. 그 증거는 사 19:5에 쓰인 히브리어 `얌’이 나일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정지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큰 강(예를 들면,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관개 시설이 발전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이들 강들은 우기(雨期)때에 삽시간에 흘러 넘쳐 주변 지역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특히, 상류 지역에 홍수가 날때에는 강바닥이 패이고 강둑이 유실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천시에 특별한 신경을 써서 강 수의(首位)를 관찰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다. 이처럼 흉용하고 격랑하는 바다를 지켜보는 것같이 욥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하나님으로부터 감찰 받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감찰(보호)이 도리어 현재의 욥에게 있어서는 부당한 처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바다’와 같이 취급될 만한 하등의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강물이 흘러 넘쳐 인명과 재산에 손실을 주는 것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과(1:1, 8) 사람 앞에서(4:3, 4) 공의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둘째, 그는 바다와 같이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성향(性向)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1:1)이었으며, 더구나 바다와는 구별되는 이성적 피조물이었다. 이상의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절에서 욥은 (1)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만한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자기의 주장), (2) 따라서 현재 자기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행위는 부당하며(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 (3) 자신은 그 같은 행위(재난)를 흔쾌히 수납(受納)하거나 끝까지 인내할 수 없다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 용이니이까 – 여기서 용은 (1) `고래'(KJV, a whale), (2) `심연의 괴물'(NIV, themonster of the deep), (3) `악어'(Delitzsch), (4) `용'(Lange), (5) `큰 짐승'(박윤선)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중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닌'(*)이 `뱀'(출 7:9, 10, 12; 신 32:33; 시91:13), `큰 물고기'(창 1:21), `악어'(겔 29:3; 32:2), `용'(사 27:1; 51:9; 렘 51:34) 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용은 전절에 나타난 `바다’와 마찬가지로 그 성질이 난폭하고 거세어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바다의 큰 생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욥은 어부(漁夫)가 큰 바다 괴물을 잡을때 그 시선을 집중하며, 때로는 매로 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또는 부당하게)다루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 속에서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시며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다.

키 아말티 테나하메니 아르시 잇사 베시히 미쉐카비

개역개정,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새번역,13 잠자리에라도 들면 편해지겠지, 깊이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덜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말성경,13 내가 내 침대가 나를 편하게 해 주겠지, 내 보금자리가 내 원망을 받아 주겠지 하면

가톨릭성경,13 ‘ 잠자리나마 나를 위로하고 침상이나마 내 탄식을 덜어 주겠지.’ 생각하지만

영어NIV,13 When I think my bed will comfort me and my couch will ease my complaint,

영어NASB,13 “If I say, ‘My bed will comfort me, My couch will ease my complaint,’

영어MSG,13 If I say, ‘I’m going to bed, then I’ll feel better. A little nap will lift my spirits,’

영어NRSV,13 When I say, ‘My bed will comfort me, my couch will ease my complaint,’

헬라어구약Septuagint,13 ειπα οτι παρακαλεσει με η κλινη μου ανοισω δε προς εμαυτον ιδια λογον τη κοιτη μου

라틴어Vulgate,13 si dixero consolabitur me lectulus meus et relevabor loquens mecum in strato meo

히브리어구약BHS,13 כִּי־אָמַרְתִּי תְּנַחֲמֵנִי עַרְשִׂי יִשָּׂא בְשִׂיחִי מִשְׁכָּבִי׃

성 경: [욥7:13]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 – 극난(極難)한 고통 중에 잠시나마 평안과 위로를 받고자 염원하는 욥의 심경이 의인법적 표현을 통해 드러나 있다. 그의 병은 발병(發病)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다(3절). 이 기간 동안 욥은 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러나 병이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세인(世人)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밤 역시 그가 갈구하던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도리어 전신에 퍼진 피부병이 밤중에 발작(發作)을 더 심하게 일으켜 그는 속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할 형편이 되었다(4절). 어느 한 순간에도 영육의 평안을 갖지 못했다는 욥의 고백속에서 그가 겪은 고통의 실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웨힡타타니 바할로모트 우메헤제요노트 테바아탄니

개역개정,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새번역,14 주님께서는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무서운 환상으로 저를 떨게 하십니다.

우리말성경,14 주께서는 꿈속에서 두렵게 하시고 환상으로 무섭게 하십니다.

가톨릭성경,14 당신께서는 꿈으로 저를 공포에 떨게 하시고 환시로 저를 소스라치게 하십니다.

영어NIV,14 even then you frighten me with dreams and terrify me with visions,

영어NASB,14 Then You frighten me with dreams And terrify me by visions;

영어MSG,14 You come and so scare me with nightmares and frighten me with ghosts

영어NRSV,14 then you scare me with dreams and terrify me with visions,

헬라어구약Septuagint,14 εκφοβεις με ενυπνιοις και εν οραμασιν με καταπλησσεις

라틴어Vulgate,14 terrebis me per somnia et per visiones horrore concuties

히브리어구약BHS,14 וְחִתַּתַּנִי בַחֲלֹמֹות וּמֵחֶזְיֹנֹות תְּבַעֲתַנִּי׃

성 경: [욥7:14]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심신의 질곡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수면과 평안이다. 욥 역시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13절).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단잠과 휴식이 아닌 불쾌하고 무서운 꿈이었다.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꿈’과 `이상’을 사단의 역사(役事)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Adam Clarke). 사단이 욥을 칠 수 있는 전권(全權)을 하나님께로 부여받았다(1:12; 2:6)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욥의 병고(病苦)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후유증)으로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특히 정신적 갈등을 동반하는 병자에게는 악몽(惡夢)과 환영(幻影)이 자주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욥은 병중에서 안식과 평안을 취하기 위해 잠을 청했으나 도리어 악몽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와티베할 마하나크 나프쉬 마웨트 메아츠모타이

개역개정,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새번역,15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우리말성경,15 내가 질식되기를 바라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습니다.

가톨릭성경,15 제 영혼은 이런 고통보다는 숨이 막혀 버리기를,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영어NIV,15 so that I prefer strangling and death, rather than this body of mine.

영어NASB,15 So that my soul would choose suffocation, Death rather than my pains.

영어MSG,15 That I’d rather strangle in the bedclothes than face this kind of life any longer.

영어NRSV,15 so that I would choose strangling and death rather than this body.

헬라어구약Septuagint,15 απαλλαξεις απο πνευματος μου την ψυχην μου απο δε θανατου τα οστα μου

라틴어Vulgate,15 quam ob rem elegit suspendium anima mea et mortem ossa mea

히브리어구약BHS,15 וַתִּבְחַר מַחֲנָק נַפְשִׁי מָוֶת מֵעַצְמֹותָי׃

성 경: [욥7:15]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 성경에서 `뼈’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가리킬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 실례로 아담이 하와를 `뼈 중의 뼈'(창 2:23)로, 라반이 야곱을 `나의 골육'(창 29:14)으로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다(삼하 5:1; 사 38:13 등). 그런데 본절에서는 욥이 오랜 질병으로 말미암아 몹시 수척해진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마아스티 로 레올람 에흐예 하달 밈멘니 키 헤벨 야마이

개역개정,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새번역,16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우리말성경,16 나는 사는 게 싫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나를 혼자 내버려 두소서. 내 인생이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6 저는 싫습니다. 제가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살날은 한낱 입김일 뿐입니다.

영어NIV,16 I despise my life; I would not live forever. Let me alone; my days have no meaning.

영어NASB,16 “I waste away; I will not live forever. Leave me alone, for my days are but a breath.

영어MSG,16 I hate this life! Who needs any more of this? Let me alone! There’s nothing to my life–it’s nothing but smoke.

영어NRSV,16 I loathe my life; I would not live forever. Let me alone, for my days are a breath.

헬라어구약Septuagint,16 ου γαρ εις τον αιωνα ζησομαι ινα μακροθυμησω αποστα απ’ εμου κενος γαρ μου ο βιος

라틴어Vulgate,16 desperavi nequaquam ultra iam vivam parce mihi nihil enim sunt dies mei

히브리어구약BHS,16 מָאַסְתִּי לֹא־לְעֹלָם אֶחְיֶה חֲדַל מִמֶּנִּי כִּי־הֶבֶל יָמָי׃

성 경: [욥7:16]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 여기서 `생명’은 문자적으로 `목숨’, `삶’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현재 처한 욥의 상황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욥이 자신의 생명(삶)을 혐오한 것은 (1) 질병의 악화(5절), (2) 정신적(신앙적) 고통의 심화(13-15절), (3) 회복의 가능성 전무(全無)(7,8절) 등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욥이 강력하게 삶을 저주하고 죽음을 희구한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간구하는 욥의 고투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 나를 놓으소서 – 절망의 한계 상황에 빠져 있으면서도 원초적 신앙을 견고히 고수하고 있는 욥의 자세를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즉, 욥은 자신의 현재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따라서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신했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삶(축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에게 죽음을 허락할 수 있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심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는 욥이 생사(生死)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했음을 드러내 준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일찍이 그가 사단의 시련을 받았을 때부터 피력되었으며(1:21), 그의 질병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서도 보여졌었다(6:4). 이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의 참신앙이라 하겠다.

마 에노쉬 키 테갇델렌누 웨키 타쉬트 엘라우 립베카

개역개정,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새번역,17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우리말성경,17 사람이 무엇인데 주께서 그를 크게 생각하시고 그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으십니까?

가톨릭성경,17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는 그를 대단히 여기시고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십니까?

영어NIV,17 “What is man that you make so much of him, that you give him so much attention,

영어NASB,17 “What is man that You magnify him, And that You are concerned about him,

영어MSG,17 “What are mortals anyway, that you bother with them, that you even give them the time of day?

영어NRSV,17 What are human beings, that you make so much of them, that you set your mind on them,

헬라어구약Septuagint,17 τι γαρ εστιν ανθρωπος οτι εμεγαλυνας αυτον η οτι προσεχεις τον νουν ει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17 quid est homo quia magnificas eum aut quia ponis erga eum cor tuum

히브리어구약BHS,17 מָה־אֱנֹושׁ כִּי תְגַדְּלֶנּוּ וְכִי־תָשִׁית אֵלָיו לִבֶּךָ׃

성 경: [욥7:17,18]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본문은 시 8:4; 히 2:6-8과 내용상 유사하다. 그러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시편 기자 및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과 다르다. (1) 동기(상황) : 욥의 고백은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와중에서 나온 것으로서 절망과 한탄조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기쁨과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2) 의도 : 욥의 고백은 실로 비천한 존재인 인간을 지속적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19절)에 대한 원망의 토로이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가지의 고백은 실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마치 하늘의 천사보다도 더 특별히 여기사 권고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관심과 눈길이 도리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불화살과도 같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욥은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으며(6:4), 그분의 눈길(관심)이 존속하는 한 그가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한 죽음(3장)마저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크게 여기사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가텔레누'(*)는 `창대케하다'(창 12:2), `더 크게 하다'(왕상 1:37), `(명성, 지위 등을)존귀하게 하다'(대상29:25), `(키를)자라게 하다'(사 44:14)등 다양하게 쓰였다. 여기서는 `존귀하게 하다'(magnify)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벌레와 같이 작은 존재(25:6; 시 84), 하나님과 비교할 때 메뚜기 같이 미천한 존재(시 90:10; 전 8:8)인 인간이 이렇듯 존귀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무한한 축복일진대 욥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도리어 불평과 원망의 요소가 되어버렸다는 고백속에서 우리는 그가 당한 고난의 심각도를 추측해 볼수 있다.

󰃨 마음을 두시고 – 히브리 관용법에 따르면 이 표현은 `관심을 기울이다'(pay heed to), `배려하다’등의 뜻이다(출 7:23; 삼상 4:20; 시 48:13, 14).

왙티프케덴누 리브카림 리르가임 티브하넨누

개역개정,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새번역,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우리말성경,18 왜 그렇게 아침마다 감시하시고 순간마다 시험하십니까?

가톨릭성경,18 아침마다 그를 살피시고 순간마다 그를 시험하십니까?

영어NIV,18 that you examine him every morning and test him every moment?

영어NASB,18 That You examine him every morning, And try him every moment?

영어MSG,18 That you check up on them every morning, looking in on them to see how they’re doing?

영어NRSV,18 visit them every morning, test them every moment?

헬라어구약Septuagint,18 η επισκοπην αυτου ποιηση εως το πρωι και εις αναπαυσιν αυτον κρινεις

라틴어Vulgate,18 visitas eum diluculo et subito probas illum

히브리어구약BHS,18 וַתִּפְקְדֶנּוּ לִבְקָרִים לִרְגָעִים תִּבְחָנֶנּוּ׃

캄마 로 티쉬에 밈멘니 로 타르페니 아드 빌레이 루키

개역개정,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새번역,19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우리말성경,19 주께서 언제까지 나를 떠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침을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습니까?

가톨릭성경,19 언제면 제게서 눈을 돌리시렵니까? 침이라도 삼키게 저를 놓아주시렵니까?

영어NIV,19 Will you never look away from me, or let me alone even for an instant?

영어NASB,19 “Will You never turn Your gaze away from me, Nor let me alone until I swallow my spittle?

영어MSG,19 Let up on me, will you? Can’t you even let me spit in peace?

영어NRSV,19 Will you not look away from me for a while, let me alone until I swallow my spittle?

헬라어구약Septuagint,19 εως τινος ουκ εας με ουδε προιη με εως αν καταπιω τον πτυελον μου εν οδυνη

라틴어Vulgate,19 usquequo non parces mihi nec dimittis me ut gluttiam salivam meam

히브리어구약BHS,19 כַּמָּה לֹא־תִשְׁעֶה מִמֶּנִּי לֹא־תַרְפֵּנִי עַד־בִּלְעִי רֻקִּי׃

성 경: [욥7:19]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나의 침 삼킬 동안 – 18절에 나타난 `아침마다’, `분초마다’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본문은 18절의 그것보다 더 세분된 시간을 가리킨다. 즉, `침 삼킬동안’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짧은 시간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18절에서 시작된 과장법적 표현이 본절에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서 매순간마다 고통을 당해야 하는 욥의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하타티 마 에프알 라크 노체르 하아담 라마 삼타니 레미프가 라크 와에흐예 알라이 레맛사

개역개정,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새번역,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 ㉣마소라 사본 가운데 일부와 고대 히브리의 서기관 전통과 칠십인역을 따름. 대다수의 마소라 사본에는 ‘내가 나에게 짐이 됩니다’

우리말성경,20 오 사람을 감시하시는 분이여, 내가 죄를 지었다 해도 그것이 주께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주께서 왜 나를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가 내 자신에게 짐이 되게 하십니까?

가톨릭성경,20 사람을 감시하시는 분이시여 제가 잘못했다 하여도 당신께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습니까? 어찌하여 저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께 짐이 되었습니까?

영어NIV,20 If I have sinned, what have I done to you, O watcher of men? Why have you made me your target? Have I become a burden to you?

영어NASB,20 “Have I sinned? What have I done to You, O watcher of men? Why have You set me as Your target, So that I am a burden to myself?

영어MSG,20 Even suppose I’d sinned–how would that hurt you? You’re responsible for every human being. Don’t you have better things to do than pick on me? Why make a federal case out of me?

영어NRSV,20 If I sin, what do I do to you, you watcher of humanity? Why have you made me your target? Why have I become a burden to you?

헬라어구약Septuagint,20 ει εγω ημαρτον τι δυναμαι σοι πραξαι ο επισταμενος τον νουν των ανθρωπων δια τι εθου με κατεντευκτην σου ειμι δε επι σοι φορτιον

라틴어Vulgate,20 peccavi quid faciam tibi o custos hominum quare posuisti me contrarium tibi et factus sum mihimet ipsi gravis

히브리어구약BHS,20 חָטָאתִי מָה אֶפְעַל לָךְ נֹצֵר הָאָדָם לָמָה שַׂמְתַּנִי לְמִפְגָּע לָךְ וָאֶהְיֶה עָלַי לְמַשָּׂא׃

성 경: [욥7:20]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하 아담 노첼)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부성애적(父性愛的) 관심과 그의 백성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나타낼 때 주로사용되었다(사 27:3). 이 표현이 성경에서는 `지키는 자'(시 25:10), `보호자'(시31:23), `포도원지기'(사 27:3), `파숫군'(렘 31:6), `상직군'(27:18)등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는 공히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를 지배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도리어 부담과 불평의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감찰하시는 주가 계시는 한 그는 자기의 뜻대로 죽음을 택할수도, 그리고 현재의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감찰은 도리어 그이 불안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극히 미천한 존재인 인간(욥)의 범죄가 초월적이고 광대하신 하나님(시 145:3)께 아무런 영향이 끼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까닭에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22:2-4; 35:5-8)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욥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며, 조그마한 범죄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죄의 심각한 본성을 알고 있었다. (2)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다고 탄식하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 철저히 경건 생활에 전력했던 욥이 그토록 큰 환난을 당한 데대해 깊은 의구심을 타나낸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맥상 비교적 타당하게 여겨진다.

우메 로 팃사 피쉐이 웨타아비르 엩 아오니 키 앝타 레아파르 에쉬카브 웨쉬하르타니 웨에넨니

개역개정,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새번역,21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숨져 흙 속에 누우면, 주님께서 아무리 저를 찾으신다 해도, 나는 이미 없는 몸이 아닙니까?

우리말성경,21 주는 왜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를 없애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흙먼지 속에 누울 것입니다. 주께서 아침에 나를 찾으셔도 내가 더는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1 어찌하여 저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저의 죄악을 그냥 넘겨 버리지 않으십니까? 제가 이제 먼지 위에 누우면 당신께서 찾으셔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

영어NIV,21 Why do you not pardon my offenses and forgive my sins? For I will soon lie down in the dust; you will search for me, but I will be no more.”

영어NASB,21 “Why then You not pardon my transgression And take away my iniquity? For now I will lie down in the dust; And You will seek me, but I will not be.”

영어MSG,21 Why don’t you just forgive my sins and start me off with a clean slate? The way things are going, I’ll soon be dead. You’ll look high and low, but I won’t be around.”

영어NRSV,21 Why do you not pardon my transgression and take away my iniquity? For now I shall lie in the earth; you will seek me, but I shall not be.”

헬라어구약Septuagint,21 και δια τι ουκ εποιησω της ανομιας μου ληθην και καθαρισμον της αμαρτιας μου νυνι δε εις γην απελευσομαι ορθριζων δε ουκετι ειμι

라틴어Vulgate,21 cur non tolles peccatum meum et quare non auferes iniquitatem meam ecce nunc in pulvere dormiam et si mane me quaesieris non subsistam

히브리어구약BHS,21 וּמֶה לֹא־תִשָּׂא פִשְׁעִי וְתַעֲבִיר אֶת־עֲוֹנִי כִּי־עַתָּה לֶעָפָר אֶשְׁכָּב וְשִׁחֲרְתַּנִי וְאֵינֶנִּי׃ ף

성 경: [욥7:2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 허물…내 죄악 – 이 말은 지금까지 전개된 욥의 고백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엘리바스가 욥의 범죄를 의심했을 때에도 자신은 결코 그같은 의심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거듭 주장한 바 있다(6:24).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욥의 변론의 범죄 : 욥은 고통을 토로하는 중에 심한 독설(毒舌)을 여러 차례 토로하였다(3장). 이러한 언설(言說)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비신앙적인 것으로 지적받았을 것이며, 그로 인해 욥은 자신의 말이 신앙의 길에서 일면 이탈되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2) 인간의 원초적 죄성 : 욥이 무흠한 이물로서 `자신의 의'(자기 의)를 주장하기는 하였으나(6:24)원론적 측면에서 볼 때 그를 포함한 모든 인생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직시하였다(9:2). 물론 이러한 그의 인식이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과 죄성을 인식하는 차원, 그리고 행위가 아닌 전적으로 신앙을 통해서 의로울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이신 득의(以信得意)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제 흙에 누우리니 – 이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날로 악화되어 가는 병고로 인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있는 것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흙에 눕다’는 표현은 `자다’, `흙으로 돌아가다'(창 3:19)는 표현과 더불어 인간의 죽음을 나타내는 히브리 관용 어법 중의 하나이다.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아직껏 욥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원의 시기가너무 늦을 것이라는 예감, 그래서 자신은 그 구원을 입지 못하고 음부로 내려갈 것(6-10절)이라는 생각이 욥을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한 반면,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욥에게 주어진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은 고로 그 구원을 베푸실 시기가 돌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주어진 사단의 시험(2:4-6)이 온전히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 계획을 갖고 계셨다(42:8). 바로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욥의 신앙은 긴장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욥은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고난받고 있는 바로 그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침묵속에 그를 섭리하고 계시며, 구원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했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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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을 고백하는 욥, 욥기 7장 1절-10절, 욥의고난 욥기강해 욥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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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여전히 답답하고 억울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천지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답답함을 쏟아 놓습니다. 하지만 그는 답답함 속에서도 우리와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이 답답함을 쏟아 내면서도 가졌던 마음들에 대해 욥기해석하고 욥기설교로 요약합니다.

성경 : 욥기 6장 14절-20절, 개역개정성경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강해설교 : 답답한 심정을 고백하는 욥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의 아픔을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받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욥의 마음은 고통의 절정을 달리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에게는 고통이었으며, 지금의 현실은 그의 정신을 어리접게 만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욥은 극한적인 고통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욥의 심정은 어떠합니까?

1 품삯을 고대하는 품꾼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기 7: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욥은 자신의 고통을 마치 품삯을 간절히 원하는 일꾼의 심정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빨리 날이 저물어 들판에서 일하는 수고를 끝나기를 바라는 일꾼처럼, 빨리 고통의 때가 지나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행동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있습니다. 욥은 괴로움 속에서 인내하는 믿음의 상급을 바라 보았기에, 품꾼같은 심정이라고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 현재 고난을 극복하는 소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기 7: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욥은 여러 달 동안이나 환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온몸의 퍼져버린 각종 피부병, 살이 곪아 터지는 고통, 옷감을 짜는 ‘베틀의 북’처럼 소망없이 보내는 삶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의 마음은 거기에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욥은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의 고통을 벗어나려는 것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신앙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진정 가치있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말한바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미리 삶으로써 보여 주고 있습니다.

3 사후의 세계를 긍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기 7: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욥이 지금 말하고 있는 7절의 주장은 허무주의나 현실도피주의가 아닙니다. 얼핏보면 현실을 외면하는 소리인 것 같지만, 욥은 ‘이 땅에서의 삶과 영원한 삶의 비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도 죽음을 통한 현재의 고통을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성도의 영광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욥과 같은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욥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했던 본문의 말들을 통하여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짐작할 뿐입니다. 하지만 욥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지켰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욥의 모습을 기억하며, 삶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본문의 욥기해석을 정리하여 욥기강해 욥기설교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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