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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12 | 요한복음 12장 14558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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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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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

요한복음 12. …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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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2/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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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요한복음 12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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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1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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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 KLB –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름

요한복음 12 … 12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로 가셨다. … 12:13 ‘구원하소서’ 라는의미로여기서는찬양의외침이다. 12:15 슥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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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3/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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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성경 요한복음 12장

12:1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 유월절 육 일 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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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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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 (한국 성경 (Korean)); New Beginnings

요한복음 12. Study. |.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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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christianbiblestudy.org

Date Published: 1/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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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37-50, 요한복음 13:1-17 KLB | Biblica

요한복음 12:37-50.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베푸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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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ica.com

Date Published: 4/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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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주석 – Daum 카페

요한 복음 제 12장 요한복음 제 12장 ====12:1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 나사로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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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4/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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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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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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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bu4Di_RZTBo

요한복음 12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다(마 26:6-13; 막 14:3-9)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1)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2)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다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8-40)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ㄱ)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3)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4)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4)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4)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3)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ㄴ)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ㄷ)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쉬운성경 요한복음 12장

12:1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 유월절 육 일 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던 그 사람입니다.

12:2 그 집 사람들은 예수님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12:3 마리아가 매우 비싼 나드 향유 약 300그램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습니다.

12:4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사람 유다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었습니다. 유다가 말했습니다.

12:5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것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인데 말이야.”

12:6 그러나 유다가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종종 돈주머니에서 돈을 제 마음대로 꺼내 쓰곤 하였습니다.

12: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마리아는 내 장례를 치를 날을 위해 이 향유를 준비해 둔 것이다.

12:8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12:9 <나사로를 죽이려고 모의함>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크게 무리를 지어 그 곳으로 왔습니다.

12:10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

12:11 이렇게 그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께 가서 그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12:12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 다음 날, 유월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2:13 그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12:14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발견하시고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 위에 타셨습니다.

12: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아라, 너의 왕이 오신다. 그분은 어린 나귀를 타셨다.”

12:16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비로소 이 말씀이 예수님에 관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과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17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 밖으로 불러 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많은 군중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언하였습니다.

12:18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12:19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계획은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이 저 사람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12:20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심> 유월절에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12:21 이 사람들이 갈릴리 벳새다 출신인 빌립에게 와서 요청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였고, 안드레와 빌립은 다시 예수님께 그 말을 전했습니다.

12: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12:24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12: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12: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서 높이실 것이다.”

12:27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지금 내 마음이 무척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온 것입니다.

12: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그 때, 하늘로부터,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다시 영화롭게 할 것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12:29 곁에 서서 이 소리를 들은 많은 사람이 천둥 소리가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2:30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소리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린 것이다.

12:31 이제 이 세상을 심판할 때가 되었다.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12:32 내가 땅에서 들려 올라가게 되면,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

12:33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가를 보이려는 것이었습니다.

12:34 군중은 이 말을 듣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실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당신이 말씀하시는 ‘인자’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12:35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빛이 잠시만 더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빛이 있을 때에 다니면 너희는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12:36 빛이 너희에게 있을 동안 빛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빛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 숨으셨습니다.

12:37 <유대인들의 불신앙> 예수님께서 이 모든 표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12:38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12:39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하였습니다.

12:40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2:41 이사야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에 관하여 말했기 때문입니다.

12:42 그러나 동시에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습니다.

12:43 그들은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을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12:44 <예수님의 말씀으로 심판받음> 그 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12:45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12:46 나는 세상에 빛으로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12:47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내가 그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실 분이 계시다. 내가 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12:49 내가 한 말은 내 스스로 한 말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내게 명령하셨다.

12:50 그리고 나는 그분이 하신 명령이 영생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그렇게 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2 (한국 성경); New Beginnings

Life can seem terribly dreary. Familiar patterns are repeated over and over again. Ruts appear. Dishes keep getting dirty. Bills keep coming. The house always needs something done to it. And as we grow older, our bodies signal the rapid passing of time. Energy levels decline. Aches and pains come from nowhere. From being unthinkable, one’s own death is seen as a real possibility.

Emotionally we can feel trapped by what has gone before. Previous actions, mistakes, and evils close in on our minds. We can be haunted by what has happened. The depressing patterns of petty frustrations and useless arguments scar and desensitize us. We can become numbed wandering through the day trying not to feel anything.

Ezekiel’s vision of the valley, filled with dried out bones, is addressed to such a lifeless and hopeless frame of mind. But, as Ezekiel prophesied, the bones came together, flesh was put upon them, and breath entered them. From dry bones came a great army.

Our bones are dry. Our hope is lost. How pitiful!

And how false!

Life is repetitive and dreary ONLY if we choose to look at it that way. For all around us there is a renewal of life. New beginnings are taking place constantly. Consider the natural world. Plants and animals are constantly reproducing, much more than this world could support. Every day the sun comes up anew. Each new year is ushered in with festivity. Even in the fall when the leaves turn and life seems to drain away, there is the promise of rebirth. “Unless a grain of wheat falls in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f it dies, it produces much grain” (John 12:24).

Consider also some events in the life cycle. A child leaves home for school. A person leaves school for a job. Single life is given up for marriage. Children grow up and establish their own homes. Retirement comes. Each of these changes involves loss and gain – a new beginning.

Even death itself is growth. The Heavenly Doctrines show that when a person awakens in the other world, “at this point his life begins” (AC 186), and his entrance into his eternal heavenly home “marks a new beginning” in his life (AC 1273).

Even as natural life has changes new beginnings so spiritually there can be a constant renewal of life. Above our consciousness the Lord is gently guiding our thoughts and feelings. While we are unaware of it, He is inspiring new ways of looking at life, stimulating new feelings of warmth and concern (see AC 6645e). The Lord is working with our spirits so that we are renewed every moment of every day. The fact is, there are new beginnings in our lives all the time. The Lord is raising up or apparently dry bones, putting flesh upon them, and breathing life into them.

We can choose to feel trapped by the past or dulled by routines. Or we can look at what is happening as the opportunity for one of the many new beginnings in life. For the Lord does not control what happens to us. Yes, His Providence is overseeing all that happens, but that does not mean He is causing specific events to occur good or bad. In one sense He is not concerned for what happens; rather He is concerned with how we respond, for that determines what good He can then bring about. Retirement, for example, is not important, but how a person then uses his or her time is. The response can be gloomy, for the loss of coworkers, status, or income; or it can be of renewal more time for friends, family, church work, or others. A newness of life can be born in any situation any time, anywhere.

Our participation in renewal is critical. The Lord never forces us to grow. He never forces us to change our minds or actions. While He is always working, urging and pressing to influence us in heavenly ways, He will not change our outlook if we do not want Him to. We can remain in the trenches. We can look upon life as a deterioration of our physical and mental abilities. We can see the dark side of every event, pessimistically awaiting the next cruel blow of fate. We can cry about dry bones and hopelessness.

But those dry bones can have flesh on them, breath in them. Regardless of what has occurred in the past, new beginnings are possible if we are willing. They do not start outside of ourselves. They start with our thoughts and intentions (see AC 1317). We have the freedom to think about life in any way we wish. We can think negatively or positively. We can desire, intend, anything we wish. We can want what is good. We can want what is evil. We are not trapped by previous choices or patterns of behavior. We are trapped only by our fears and refusals to think and try.

Our attitude makes all the difference in how we view the world and how easy we make it for the Lord to renew us. From a negative, doubting viewpoint we see the world and ourselves through a warped lens. We reject or give up on the ideals the Lord has shown us in His Word. But if we attempt to trust in what He has said, if we will be positive, affirmative to Him, then wonders can be worked (see AC 3913:5). “If you have faith as a mustard seed, you will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t will move; and nothing will be impossible for you” (Matthew 17:20).

Our basic assumptions can never be proven. And if we assume, have faith, that the Lord speaks to us in His Word, and our lives will be improved if we listen, then a new beginning can occur. For regeneration is the new creation of life spiritual life. It begins when a person affirms the truth and intends to live according to it. This is the start of regeneration. It does not occur at any set time in life, nor does it happen only once. Each and every time we positively turn our minds to the Lord’s way, a new beginning occurs. Such beginnings are like seedlings. They are planted in the soil of our lives. With watering, with light and warmth, they take root. As they grow, as we walk in the Lord’s way, the earth of our life is made more secure. The interlocking root systems stop the erosion of false ideas, evil desires. The more that take root the better, for the roots hinder the washing away of good by selfishness.

But for seedlings to grow strong they need weathering. The storms and bitter cold which could harm the trees actually serve to strengthen them. So in regeneration. Each new beginning of spiritual life will be challenged. Where honesty is growing, the harsh wind of theft will blow and try to destroy it. Where compassion is developing, cold disregard for others and apathy will also be present.

Spiritual struggles ensue. These raging storms are painful, as the new beginnings of spiritual life are threatened and buffeted. Yet, as we endure, as we resist the forces of hell, a greater strength is acquired. More spiritual life grows perhaps a clearer idea of His ways, a deeper appreciation of our need for the Lord’s presence, or a greater intensity of affection for His good (see AC 2272). Whatever is gained, our spirits are growing flesh upon dry bones, breath giving life.

As the Lord promised: “I will bring the blind by a way they did not know; I will lead them in paths they have not known. I will make darkness light before them, and crooked places straight” (Isaiah 42:16).

The Lord leads us through all the many byways of life, through the valleys up to the peaks. He would have each day be a new beginning for us, not in a dramatic sense, for we are not meant to have radical changes often. The new birth, or regeneration, is not a series of sudden changes in direction. Yes, it can begin with that when a person first realizes the importance of spiritual values, when a person experiences the grief of repentance. But rebirth is an evolving process. It is made up of many small beginnings. The small beginnings of regeneration are a series of purifications the regular washing away of evils in the spirit, of saying, “No, I won’t do that because it is wrong.” And as the Heavenly Doctrines note, ” … such purification ought to go on all the time and so always to be taking place as if from a new beginning” (AC 2044).

“As if from a new beginning.” In one sense, each time we resist an evil, each time we intend on doing something good, it is a new beginning. Something new has started in our lives. But in another sense, every positive step is a continuation of what was begun before. It is a resurfacing of the seeds planted years before from parents, from teachers, from whatever good we had willingly done. The Lord keeps working with the good He has established in everyone’s life. While it may not be seen for a time, it is carefully preserved, awaiting the occasion to be seen again. Hellish choices and life styles shut it up, but it is still there. The Lord is very patient, always leading us so that the good we have might be protected, develop, and eventually blossom in the fruit of an angelic life.

What this means is that life is never pointless. While we will certainly go through times when we feel our life is dry or our lot hopeless, the Lord can put flesh on our bones, breath in our lungs. All our patterns which seem so fixed and limiting, all the painful baggage we carry from the past, need not defeat us. For every day the Lord is providing us with new beginnings small, almost imperceptible opportunities to renew our lives. If we are not utterly downcast, if we have not given up if we will be open and affirmative to what He has said then new life may grow. Seedlings are planted which, though they may not bear visible fruit until the next life, will give us strength, will renew our spirits. And the prophecy of Isaiah will come true for us:

“But those who wait on the Lord shall renew their strength; they shall mount up with wings like eagles; they shall run and not be weary; they shall walk and not be faint” (Isaiah 40:31).

(References: Arcana Coelestia 186, 1273, 2044, 3913, 6645; Isaiah 40:31, 42:16; John 3:1-8, 12:24)

요한복음 12장 주석

요한 복음 제 12장

요한복음 제 12장

====12:1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 나사로를 부

활시키신 이적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여기서 그 사실을 다시 관설한다.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마태와 마가는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마 26:7; 막 14:3),

그 연회 장소를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다. 어떤 학자는 상상하기를, 시몬은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몬은 알려진 문둥이었으니 만큼, 결혼

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Grosheide). 그러므로 시몬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과

는 가족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등도 아마 청함

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 곧, 그가 연회 배설(排設)과 음식물 준비에 봉사한 것을 가

리킨다. 눅10:40 을 보면, 그는 이 방면 봉사에 능하였다. 이런 인물도 귀하지만, 그

보다도 주님의 진리와 영적 생활에 열중하는 인물이 더욱 귀하다(눅 10:39, 42)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는, 그 부활한 몸으로 그 자

리에 와서 앉은 것만으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를 보는 자마다 주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었다.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

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특

별히 술을 향기 있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흑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

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수 없다.

막 14:8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

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

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절).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

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곧,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

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 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

이다.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마 26:8에 의하면, 마리아

의 향유 부은 일에 비평한 이들이 “제자들”이라고 하였다(막 14:4에는 “어떤 사람들”

이라고 했음).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가룟 유다만 거론한다. 유다가 그 다른 제자들보

다 지도적 처지에서 저런 비평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이 여기서 그의 이름만 말하고

그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

니 –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300날 동안의 노동 품 값이라고 한다. 유다

는, 가난한 자를 예수님보다 귀히 여긴다고 여기 말한 셈이다(Grosheide). 이것은 세

상 생각으로만 타산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어난 불평이다. 이 불평은, 한 영혼이 예

수님에게 사랑을 붓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어두움이다. 마리아와 유다 두

사람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는 희생자임. 그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아낄 줄 모르는 인물이었

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니, 주님의 말씀과 같이 행한 자이다. 곧,

마 22:37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악한 일에 최선을 다 할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께 그리할 줄은 모른다. 인도의 어떤 선교사가 한 번은 이상한 일을

보았다. 곧, 간지스강 가에 한 여자가 섰는데, 앓는 갓난 아이는 팔에 안고 건강한 아

들은 옆에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오랫 동안 거기 서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선교사가 다시 와서 보니 그 옆에 섰던 건강한 아이가 없어졌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그를 강에 넣어 악어들로 먹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 대답은, “나의 신(악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져서 이렇게 악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2) 유다는 옳은 것을 비평하였음. 유다는 마리아의 봉사를 비평하였으니, 그것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뜨거운 관계를 맺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사상

이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태도이다. 예수님은 천

하의 몇 만배보다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귀한 예수님을 위하여 천

하를 바친들 아까우랴? 그러나 유다는 물질만 귀한 줄 알았으며, 빈민 구제를 구실로

삼아 트집을 잡았다.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마 26:8; 막 14:4)은,

부주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귀절에 나타난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악행이

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악까

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 마음 속에 자라나던 죄악(탐심)이 결국 그로 하

여금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그 여자로 하여금 지금 향유 붓고 남은것을 보관시

켜 후일에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 때에 사용하게 하라”는 뜻이라 함. (2) “그 여자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 그 행동이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

미를 가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이 옳다.

“이를 두게 하라”란 말(* )은, “향유를 보관한 일이 되게 하

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보관해 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 한 때에 사용하기 위하

여 향유를 그때까지 보관하였던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귀중한 뜻을

지적한다. 곧, “마리아는 그런 값 비싼 의식(儀式)을 흔히 실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

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렇게 희귀한 행위를 취한 것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흔히

외부적으로 찬란한 의식에 치중함을 금하신다. 어떤 해석가들이 마리아의 이 일에 기

준하여 추론하기를, 의식을 성대히 갖춘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리아의 한 일은 그 한 때에 필요하였으나 신약 계시가 완성 된 후

에는 그런 방식의 의식(儀式) 행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 John’s Gospel, Vol. , 가가. 13-14).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서부 사본(西部寫本)의 대표격인 베사 사본(D)에는 이 말씀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보

다 유력한 사본들에 있으니, 이 말씀은 원본대로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Godet). “가

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란 것은 신 15:11 의 말씀과 같다. 예수님께

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돌아볼 책임이 있음을 지시하

신다(13:29). 다만 시간적 순서로 볼 때, 그 때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중요성을 예언

적으로 표시하는 의미에서 그 값 비싼 향유를 사용함이 합당하다는 것 뿐이다. 예수님

의 죽음에 대한 예언 행위는, 복음 전파의 행위이다. 그것은 지극히 귀한 일이며, 따

라서 그 일을 위하여 값 비싼 향우라도 소비할만하다. 스킬더(K. Schilder)는 말하기

를,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말씀하시면서 “먼저 나요 다음에 너희들이라”

고 하신 셈이라고 하였다(Christus in Zijn Lijden, Kampen, p. 45).

=====12:9-11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

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

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 예수님의 계신

곳으로 찾아 온 무리 중에는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온 자들도 있었다(11:46). 이렇게

피상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때에 베다니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도 많았다(11:45). 나사로

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이적의 절정이다. 편견 없이 그 사건을 본 자들은 예수님을 믿

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이적의 목격자들이 많도록 하기 위하여 대중을 동원시

키신 것이다. 믿고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이적을

어떤 캄캄한 모퉁이에 감추시지 않으셨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대중이 친히

목격한 사실이며, 또 그들이 믿은 진리이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의 행동은 참으로 악독하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실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고 하여, 그를 다시 죽여 버리자고

모의하였다.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적인 반면에, 그를 다시 죽

이려고 한 것은 마귀의 행동이다. 이 들은 서로 정반대이다. 대제사장들의 이 행동은

시기심의 극단이요, 잔인성의 절정이며, 하나님과 싸우는 강팍한 행동이며, 대중 인기

를 탐하여 날뛰는 괴악한 명예주의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극악한 원수들이 대적

한 이 진리(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극치(極致)이시다.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함을 듣고 – 이

부분에 기록된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자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아니

라,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여 온 나그네들이었다. 칼빈(Calvin)은 이 사실에서 영적 교

훈을 찾아 본다. 곧, 예루살렘에서 성전 예배에 관습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

하여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진정한 종교적 열심은 식어졌고 외식(外飾)에서 움

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온 나그네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불타는 마음

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예수님에게 대하여 열광적인 환영

을 하게 되었다.

=====12:13

종려 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호산나”란 것은 히브리 말(* )의 음역(音譯)이니, 그 뜻은, “도와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주의 이

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란 것은 시 118편에서 나온 말씀이나, 메시

야를 가리킨 것이다.

=====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그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신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메시야의 영광 얻으실 것을 예표하는 행동 설교이

다. 그가 장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만민이 그를 따르게 될 것이었다. 이 사실

은 바리새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예언하였다. 곧, 19절에 말하기를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고 하였다. 요한은 이런 무의식

적 예언을 흥미 있게 취급하였다. 그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뒤에 있었던 대제사장의

무의식적 예언에도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한다. 요한 복음의 특색 중 하나는, 표적의 책

(book of signs) 곧, 신령한 뜻을 나타내는 이적들과 상징적 행동들을 기록한 책이라

는 것이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은, 바리새인들의 말(19절)을 인용한 뒤에, 헬라

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사실을 말하였다(20-22). 그것은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

신 뒤에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세계적 복음 전파)을 표적으로 말함이다. 예

수님은 사실상 그것을 그렇게 해설하셨다(23-3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전쟁하

는 것이 보통이었다. 카일(Keil)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이 그의 낮아지심을 상

징한 것이로 하였으나, 그 의견도 평화의 뜻을 제외함이 아니다(Grosheide). 우리 본

문에 인용된 예언은 슥 9:9의 말씀이다. “시온 딸”이란 말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메시야께서 평화를 가지고 오실 터인즉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것 없다. 스가랴 시대의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도 그 소망(메시야가 장차 오실 소

망)중에서 평안을 가지라고 부탁 받았으니, 그가 오신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욱 평안을 가져야 할 것인가?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

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 제

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그의 주(主)되신 영광이 나타날 때까지는, 예수

님의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그 일이 슥 9:9의 성취하였음을,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이

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교훈을 받는다. 곧, 현재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잘모르지만, 세월이 지난 뒤에 알게 되기 위하여 그 동안에 파란 곡절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그 당시에는 깨

닫지 못하였는데, 후에 그들이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때까

지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는 과정이 단순치 않

은 줄 알아야 된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고개를 넘은 뒤에 비로

소 일찍부터 움직인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알게 되어 기뻐하게 된다. 시 119:71에 말

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

이다”라고 하였다.

=====12:17,18

여기서는, 그 무리가 예수님을 성대히 영접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곧, 그들

은,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신 예수님의 권능에 대하여 들은 까닭이었

다. 그 사실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한 자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직접 본 자들이었다(17

절).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

를 좇는도다 하니라 –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그 때의 군중의 동태를 바로 보고 지적

하였다. 그들의 말에,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한 것은, 무의식 중에 나온 예

언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세계적 선교의 확실성을 예언한 셈이다. 그들의 말에

뒤이어 예수님께서 자기의 세계적 선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20-32).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 여기 이른바 “헬라인”은

순연한 헬라인으로서, 개종(改宗)하고 그 때의 구약 종교에 들어왔던 자들을 의미한

다. 이제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장체 이방인들이 무수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사실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12:21

저희가 갈릴리 벱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 그들은, 직접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 빌립의 소개를 받고

자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경외(敬畏)하는 증표였다(Calvin). 그런데,그들

은 하필 다른 제자들보다도 빌립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일까? “빌립”이란 이름이 헬라

식 이름인 사실을 보아서 그가 누구보다도 헬라어를 잘 한 관계였든지, 혹은 그들이

빌립의 고향 벱새다(헬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온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이 말씀은, 그의

개인적인 영화를 말함이 아니고 메시야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내포한 것이다. 구원의 갈증을 느낀 헬라인들이 찾아

온 마당에 있어서, 이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죽었

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다. 크로솨이데

(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 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만 된다”라고 하였다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P. 215-216).

12장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서 그를 영화롭게 함(1-8)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영화롭게

함(12-19) 헬라인 몇이 그를 베옵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다(20-33). 그러나 이 일들

이 모두 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사건을 보여 줌과 관련되었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및느니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많은 이방인들이 천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가리킨 비유인데, 사

53:10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거기 말하기를,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의 속죄적 희생은 많

은 열매를 맺는 것인 만큼, 그를 따르는 자들(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

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여기 기록된 희생의 원리는, 일반 사회에도 적용되는 진

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의 지켜야 할 원리를

보여주신다. 곧,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만 따라가야

하는 신령한 희생의 도리를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

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으니 만큼(24 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따르지 말고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그만 따라가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위한 자

기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신 뒤에는, 이어서 그를 믿기(따르기) 위한 우리의 희생

을 권고하시곤 하셨다(마 16:21-26; 눅 9:20-26).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란 말은, 자기 힘으로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제 예수님의 속죄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므로(24 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구원을 그에게 맡기고 그만 믿고 따라야 된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은 생명을

잃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듯이 주님만 사랑하며 바라보아야 구원

을 얻는다. 사람이 이렇게 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용이하게 그렇게 되는 길이 있

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미워함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푹 적시움이 있다”라고 하였다.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이것은, 위의 말씀에 이어

서 참된 신자 되는 원리를 더 자세히 가르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곧,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25절 하반), 여기서

주님을 따른다(믿는다)는 말로 바뀌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을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주님과 함께 받게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장차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하반절). 딤후 2:11-12 참조.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신자의 구원을 내세의 장소와 관

련시키는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에 많다(14:2, 17:24). 8:21, 33 참조. 그러나 이

와 같은 내세 사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하고 있다. 곧, 그 장소가 그리스도의 계

신 곳이라는 것이다. “나 있는 곳”,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들이 그 뜻이다. 공관 복

음도 내세의 장소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마 19:28; 눅 23:43), 주로

“천국”이란 말에 내세(來世)를 포함시킨다. 천국이란 말이 내세의 장소성(場所性)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운동의 경역(곧, 하나님의 통치 경역)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말하는 내세적 구원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혹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사실을 그 중심 요소로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과 및 그를 섬기는 자들이 동일한 곳에 들어감에 대하여, 볼트만(R.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잘못 말하였다. 곧, “여기에 나타난 교훈은 노시스(露智派)

신비의 구속 교리와 부합한다. 노시스는 우주적 관련에서 그런 구속자의 구원 받는 자

들의 연합을 가리키고, 여기 요한 복음은 역사적 관련에서 그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Johannes Evangelium, p. 326). 그는, 특별히 32절의 모든 사람을 이끄는 “들리움”이

란 말 해석에서도 이와같은 견해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다시 여기서 신비

(노시스 신비)의 술어로써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30). 그

러나 예수님의 돌리우심은, 노시스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우주 전쟁을 통과하여 성

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구원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들리우심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순종하

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사 부활 승천케 하신 것을 가리킨다.

=====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

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가 왔나이다 – “지금 내 마음이 민망

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란 것은, 주님께서 그의 인성(人性)에서 그의 당하실 속죄의

죽음을 느끼시고 하신 탄식이다. 그는 무죄하신 이로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의 진상(眞

相)을 맛 보신 유일한 사람이시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죄로 물들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져서 죄의 결과인 사망의 비참한 진상을 참으로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 곧, 과거에

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

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

하였다고도 하니 – 그 때에 대중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계시(啓示)의 말씀(28 절)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계의 뇌성으로 오해하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임하였던 하

늘의 소리가 역시 그 동행자들에게 오해되었다. 그 동행자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있었다고 하였다(행9:7). 그 때의 군중은 저렇게 심령이 어

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다. 인간은 죄

로 어두워졌으므로 천지를 진동할 능력 있는 복음을 들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고 딴 것

으로 오해한다(Calvin). 어떤 이들은, 그것을 천사의 말로 오해하였으니, 그것을 뜻

있는 말로는 안 셈이다. 그것을 보니, 그 때에 들린 소리가 무의미한 소리 뿐만은 아

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소리는 예수님 밖에 다른 사람들도 들었으니

만큼, 그것이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인 것이 분명하다.

=====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

한 것이니라 – 위의 28절의 계시, 곧,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그리스도 죽으시리라

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일설에 의하면, 여기 “너희를 위한

것”이란 말씀은, 그 뜻 모를 이상한 소리가 그들로 하여금 신앙에 이르도록 함에 필요

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경이감(驚異感)으로 인하여 신앙에 이르게 되는 일도 있

다. 그러나 이 귀절 말씀이 그런 뜻을 가진다고 하기는 어렵다.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 이 말씀은, 예수

님께서 자기의 고난 받아 죽으신 뒤에 나타날 결과를 표시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세상

의 죄는 처분되고(1:29), 마귀의 계획은 파괴된다.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영적 질서는

오기 시작하여 마침내 만물이 새롭게 되는 우주적 구원이 임한다(계 21:5). 곧, 예수

님은 자기의 죽었다가 부활하심이 가져올 구원 운동의 전폭(현재와 미래를 포함함)을

여기 진술 하셨다. “이 세상 임금”이란 말은 사단을 의미한다. 눅 10:18 참조.

=====12: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리킨다(3:14). 이렇게 그가 속죄의 죽

음을 죽으심으로 만국에서 그의 모든 백성을 모으신다. 곧, 만국에서 그를 믿을 자들

이 생긴다. 희생은 사람들을 끈다. 특별히 흠과 티가 없으시며 전연 허물과 죄가 없으

신 하나님 아들의 속죄하시는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실 뿐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나아와서 그 안에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의하여 사람들을 거듭 나게 하시어 자기에게로 오게 하신

다. 6:44 참조.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나 –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이것은, 그들이 시 110:4; 사 9:6; 단 7:14등에 근거하여 생

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사야서 53장의 말씀)

은 몰랐던 것이다.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가는 바를 알지 못 하느니라 –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여기 “잠시 동안”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가리킨다. 기회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두근거리며 긴장을 느낄 줄 알

아야 된다. 그 이유는, 기회는 언제나 잠간 동안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기회라는 것은

사람이 당면한 그 현재 밖에 없다. 그는 미래를 자기의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미래

는 그에게 감취어 있다. 혹 그것이 그의 것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의 것이 되지 못

할 수도 잇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받은 기회는 현재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회를

잠간 동안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다. 청년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지금 준비하는 시기이고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부나 다 해

가지고 이 다음이 정규적 살림을 차려 놓은 뒤에 신앙 생활을 바로 해 보겠다”고 한

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속은 생각이다. 청년들은, 그 준비하는 중에도 그 준비가

역시 정규적 살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준비가 바로 살림이다. 그러므로 그 때에

도 하나님 없이 살지 말아야 된다. 이 다음에 잘 믿겠다고 하는 것은, 이 다음에도 잘

못 믿을 것을 약속함과 같다. 노인들은 낙오자의 심리를 가지고 기회를 허송하기 쉽

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시대는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노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을 좋은 환경에 처햐여 있다. 그들은,

한 평생 모든 것을 다 지내보고 헛된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이야 말로 그 당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을 만하다.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70세 때에 선교사로 출발하였고, 크랜멀(Cranmer)은, 60세 때에 비로소 복음 진리를

크게 깨닫고 그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이 귀절과 다음 귀절에 “빛”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온다. 여기서 “빛”은 그리스도를

비유한다. 36절에 말하기를,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

스도를 빛으로 비유하였을 때는 그 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하나님께서 만물 중에 빛을 가장 먼저 지으셨으니, 그것을 보아도 빛이 얼마나 중

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이 없는 세계에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슐라텔

(Schlatter)은 말하기를, “생명은 존재보다 높고, 빛은 그 중에도 가장 높다. 그 이유

는, 그것이 생명에게 깨닫는 내적 성정(內的性質)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Hoher

als das Dasein ist die Lebendigkeit, und das Hochste ist das Licht, womit dem

Leben die bewusste, enkennende Innerlichkeit verliehen ist. – Der Evangelist

Johannes, p.6).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을 보여주시는 빛이신가? 그는 우리에게 하

나님을 보여주신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실 때에 어떤 이론에 의하여 보여

주시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보여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 속에 모실 때에

는 하나님이 환하게 우리에게 알려진다. 슐라텔(Schlatter)은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

는 교훈에서 교훈을, 또는 신학에서 신학을 해설하시는 이가 아니다. 그는 빛으로 역

사하신다”라고 하였다. (Er hat nicht Lehre durch Lehre, Theologie durch Theologie

ersetzt. Er wirkt als Licht. – Der Evangelist Johannes, p. 273).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참으로 접촉하는 자마다 참되이 하나님

을 알고 믿게 되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보다 귀한 빛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을 수 있는 기회처럼 중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 보다 그 분을 중

요하게 생각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전파할 때에 생명을 아끼지 않

았다. 행 20:24에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

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생각한 원인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

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니 만큼,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제일 주의로 살아야 된

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나를 위

하여 죽으셨던 분으로 내 영혼을 구원하게 하여라”고 하였다.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

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서 숨으시니라 – 여기서 “빛”은 윗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신 만큼, 그도 빛이시다

(요일 1:5; 요 8:12).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심은 그 때 팔레스틴에만 한 번 있

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는 중에 있었다. 그것은 천재

일우의 귀한 기회를 놓치는 불행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 뒤에는, 그가 육신으로 세상

이 계실 수는 영원히 없을 터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아 그를 믿

어야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별세 후에는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기회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던 주님을 오랫 동안 보면

서도 그렇게 완강하게 끝까지 배척하던 자들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

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두 번이

나 역설(力說)하신 것이다(35절 참조).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나 – 요한 복음의 특

징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탄식함이다. 1:5, 10-11 참조.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메시야심을 보여주시는 표적(곧, 증표)인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았으니, 그들 자신에게 죄책이 돌아갈 것 밖에 없다.

=====12:38

이는 선지자 아시아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

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니이까 하였더라 – 이 말씀은, 사 53:1의 인용이

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수효가 많지 못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주의

팔”이란 것은 주님의 능력(곧, 사람의 마음 눈을 열어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 예언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그 때에 별로 많지 못하였다.

=====12: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 은혜가 많

을술록 불신앙을 고집하는(37 절) 원인은, 그들이 택함을 받지 못한 사실에 있다. 우

리가 이 원리를, 현재에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할 것은 아니다. 그 이유

는, 그들 중에 믿을 자도 있기 때문이다.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것은, 이사

야서에 있는대로 이사야가 주님의 영광을 본 뒤에 받은 말씀이다(사 6:10).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선한 인간들을 강팍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는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화되는대로 버려 두심을 의미한다. 그런

데, 그의 이렇게 하심이 그의 거룩하신 계획에 들어 있었다는 뜻도 여기 포함되어 있

다. 물론 유대인들이 저렇게 되는(40절의 내용과 같이 되는) 죄책은 저희 자신들에게

있었다.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이사야

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들었다.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 말씀이 앞질러 인용된 내용이었다(사 6:9-10).

=====12:42,43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

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여기 “관원”들은, 산헤드린공의회의 지도층 인물들을 가리킨다. 그들

은 세상 영광에 사로잡혀 있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이신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본문 “그러나”란 말과

“에도”란 말이 이 사실을 역설(力說)하며 지적한다. 그들이 그 믿은 바를 공적으로 고

백하지 않았던 원인이, 진리 지식의 부족이 아니고 도덕력의 부족이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그들이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더욱 약해질 위험성이 있는 것

이다. 신자가 마땅히 강해야 할 자리에서 어떤 육적 이유로 강하지 못하면, 그는 강해

질 방향을 등지고 약해 가는 방향으로 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계속하여 약해

진다. 그것은, 사람이 경사진 어름판에서 미끄러져 내림과 같다. 그러면 그 때에 믿는

관원들이 왜 저렇게 약하여졌던가? 그것은 우리 본문이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사람

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까닭이었다. (1)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욱 사랑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니, 곧 존

재자란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인즉, 본래 없던 자요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없앨

려면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인간의 칭찬이나 영광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

의 칭찬과 영광을 찾아야 된다(Hengstenberg).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판단보다도 사람의 박수를 택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기보다, 차라리 짐승 같은 행동

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명예를 탐하면 명예의 종이

됨. 이런 사람은 혹시 의(義)를 행하다가도 명예를 위하여 얼른 중단한다. 명예주의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 중에서 명예주의에 속한 자를

사용하시지 않고 버리신다. 무디(Mody)가 하나님께 사용된 이유도 그가 언제나 자기를

감추었으며, 명예를 좋아하지 않은데 있었다고 한다. 그의 후계자인 트레이(Torray)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남의 말을 많이 인용하기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단에도 될 수

있는대로 남들을 내세웠다고 한다.

=====12:44-46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권고하신 말씀이다. 이 권고의 내용

은 그가 바라 신인 간(神人間)의 중보자란 것이다. 곧,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를 믿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중보자)라는 것이, 요한 복음

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영적으

로 보게)하시니,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12:47-50

이 귀절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가 어떻게 큰 것을 가리킨다. (1) 그 말씀은 하

나님 아버지의 말씀인데 세상 끝날에 그 말씀이 심판한다고 하시며(47-48), (2) 그 말

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며(49절), (3) 그 말씀이 영생을 주는 것이니

만큼, 그 말씀을 “영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신다(50 절). 요 6:6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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