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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13 장 강해 | [하루 한 장] 요한복음13장_끝까지 사랑 43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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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9 (금) [하루 한 장]“끝까지 사랑” (요13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세족식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단순히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윤리적 모범이 아니라
십자가사건이 어떤 의미인지
미리 보여주는 상징행위로서의
그 의의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발을 씻고
수건으로 닦아주신 이 모습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신비가
그대로 함축된 모습입니다
주님이 종이 되셔서 낮아져
그 힘으로 죄를 씻는
이 역전의 비밀이 십자가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겸손히
오직 감사하며 찬양할 뿐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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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 주석 강해 성경말씀] 새 계명을 주심(요 13:1-38)

주님께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나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앞에서 교훈하신 대로 용서와 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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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123.tistory.com

Date Published: 5/2/2021

View: 7515

헬라어 요한복음 1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프로 데 테스 헤오르테스 투 파스카 에이도스 호 예수스 호티 엘덴 아우투 헤 호라 히나 메타베 에크 투 코스무 투투 프로스 톤 파테라 아가페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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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8/5/2022

View: 5242

두란노

다른 방법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끝까지의 사랑”을 소개하면서 요한복음 13장을 폭넓게 강해해도 된다. 구체적 내용으로(1) 겸손한 행위로 나타난 섬김,(2) 유다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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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9/7/2022

View: 1495

요한복음 13장 주석 – Daum 카페

요한복음 제 13장 ====13:1-3 <마가의 다락방>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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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4/11/2022

View: 4178

메튜 헨리 주석, 요한복음 13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13: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한복음 13:1-17)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에 따른 교훈을 하신 것은 그가 배신을 당한 바로 그 저녁에 일어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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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2/25/2022

View: 6074

2020/08/10(월) “요한복음 13:1-20” / 작성: 최정운

본문 요한복음 13:1-20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13장부터 진행되는 요한복음 후반부의 핵심은 가장 위대한 표적인 십자가를 통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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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6/25/2022

View: 3296

2019.2.2.요한복음 13장 1-20절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

본문 : 요한복음 13장 1-20절. 유월절이 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모여서 저녁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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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ingoditrust.tistory.com

Date Published: 3/10/2021

View: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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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요한복음13장_끝까지 사랑
[하루 한 장] 요한복음13장_끝까지 사랑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13 장 강해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7,3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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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5.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Ktxi9fTYRlM

[요한복음 13장 주석 강해 성경말씀] 새 계명을 주심(요 1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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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에서는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룟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주심(요 13:1-38)

1-17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1-2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네 번째 유월절이다. 본장에 나오는 식탁은 공관복음들에 나오는 유월절 식탁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 곧 자신의 승천 시간이 가까웠음을 아셨고,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또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마귀는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을 범죄케 하여 멸망케 하는 자이다. 마귀는 악한 생각을 일으킨다. 택자들과 불택자들, 구원받은 자들과 멸망당할 자들은 생각부터가 다르고 또 말과 행동도 다르다.

[3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셨고, 아들 예수께서는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기 위해(요 6:39)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그는 그 일을 이루신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요 3:13), ‘하늘로서 오시는 이’로서(요 3:31) 하나님께서 계신 영광의 천국으로부터 오셨다가 이제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4-8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당시에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남을 섬기시는 행동이셨을 뿐 아니라, 10절이 암시하듯이, 특히 죄를 씻어준다는 뜻이 있었다. 시몬 베드로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감히 천한 죄인의 발을 씻길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신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한 섬김의 행동이 아니고 더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죄사함의 상징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해주지 않으시면,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도, 천국 백성도 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고 날마다 우리의 부족을 씻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끝까지 은혜 안에 거하다가 확실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9-11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시몬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주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말씀에 놀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기 때문이다. 온 몸을 깨끗케 하는 목욕은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고 거룩케 된 사실을 상징한다. 그것이 바로 중생(重生, 거듭남)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새 생명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도 때때로 범죄한다. 그러므로 목욕한 자들이 발을 씻듯이, 중생한 자들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주께서 다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제자들이 다 중생한 것이 아님을 보인다. 열두 제자들 중에는 불택자가 한 사람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죄사함을 받지 못했고 중생하지 못한 자이었다. 그는 주님을 배반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를 넘겨줄 자이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가라지나 쭉정이가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불택자들은, 비록 현재 교회 안에 있어 믿는 자와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중생치 못했고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다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진리를 배반하고 떠나갈 것이다.

[12-17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제자들도 서로의 발을 씻기게 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겸손히 서로를 섬기며 특히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남을 용서하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1-35). 사도 바울도 “[너희는]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이며 성령의 역사로 중생한 자들이며 또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는 자들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세상에는 환난과 핍박, 가난과 질병, 자연 재해와 사고와 전쟁 등이 있지만, 하나님과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둘째로,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주 예수께서는 종의 일을 하셨다. 그것은 그의 겸손과 남을 섬김과 함께 죄 용서하심을 보여주신다. 자기의 온 몸을 씻은 사람이라도 조금 무슨 일을 하고 나면 다시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 목욕은 중생(重生)을, 발 씻음은 중생한 후 짓는 죄에 대한 씻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아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난 중생의 은혜를 받은 후에도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죄를 짓는데, 그 죄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한다.

셋째로, 주께서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친히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도 그것을 본받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부족과 잘못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잘못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주의 피로 죄씻음을 받지만, 사람 앞에서의 잘못은 자신의 부족을 말하며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때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교훈이다. 우리는 우리의 편협한 마음이나 부족한 사랑과 이해심을 극복하고 주의 교훈과 본을 따라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자.

18-38절, 서로 사랑하라

[18-20절]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나와 함께 떡](전통본문)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시 41:9)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본장 10절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셨기 때문이었다(11절). 본문에서도 그는 자신을 팔 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가 친히 택하신 자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다. 이 말씀은 그를 배신할 가룟 유다가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임을 뜻한다. 유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를 배신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그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가 그를 영접하는 것이듯이, 그를 영접하는 자가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나타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를 나타낸다. 사람이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는가 여부는 그가 구주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로 판단된다.

[21-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괴로우셔서]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시몬의 (아들) 가룟인 유다](전통본문)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주여,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던 그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었다(요 21:20, 24). 예수께서는 빵 한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주셨고 그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요 6:64), 돈에 대한 욕심도 있었던 것 같고(마 26:14-15), 무엇보다 사탄의 역사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큰 악을 범하였다. 본장 2절은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했다. 이제 사탄이 직접 그 속에 들어가 그로 하여금 이런 큰 악을 행하게 할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님을 배신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겨주려는 그의 악한 계획을 속히 행하라는 뜻이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 유다의 영적 세계나 영원한 미래도 캄캄한 밤이었다.

[31-33절]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人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人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지금 인자(人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人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말씀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 밤에 잡히셔서 날이 새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죽음이요 그 일이 완성되면 그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내다보시면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그의 죽음과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으나, 후에는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그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옛날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과 대조된다. 옛 계명도 그 요점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마 22:37-39). 그러나 이제 주께서는 단순하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

주께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나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 곧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본장 앞부분에서 교훈하신 대로 용서와 연관된다. 서로 용서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해야 서로 용서할 수 있다. 사랑은 형제의 잘못과 부족을 오래 참고 용서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선을 베푸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행 2:44-45). 사랑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덕이며 교회의 일치의 덕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주께서 친히 십자가로 본을 보이셨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명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먼저 희생적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1-2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였다.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가 된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단과 적그리스도에 대해 경계할 것을 교훈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형제들에 대해 참된 형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 서신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빛 가운데 있는 증거이며 생명에 들어간 증거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36-38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가 되면 그는 주님을 따라 그가 가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를 위해 그의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였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그를 따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진실한 결심이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그는 그 날 밤에 닭이 울기 전에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인간의 결심이 얼마나 보잘것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가슴 아프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인지 아닌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아야 한다. 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목욕한 자와 같이 죄사함을 받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를 팔 자, 곧 그를 배신할 자를 가리킨 말씀이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요 6:64) 돈을 사랑했다(마 26:14-15). 그는 마침내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요 6:70; 13:2, 27).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구원하셨음을 확증하자. 데살로니가전서 1:2-4,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둘째로, 우리는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을 힘써 실천함으로 주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도 그 중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었다. 주께서는 친히 본을 보이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는 특히 우리가 서로 사랑할 대상이 제한된 수의 택자들임을 암시하셨다. 주님께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나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앞에서 교훈하신 대로 용서와 연관된다. 서로 용서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해야 서로 용서할 수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선을 베푸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덕이며 교회의 일치의 덕이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라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며 그것이 그의 제자된 표이며 참된 교회의 표이다.

[누가복음 18장 성경 주석 설교말씀]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눅 1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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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요한복음 1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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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데 테스 헤오르테스 투 파스카 에이도스 호 예수스 호티 엘덴 아우투 헤 호라 히나 메타베 에크 투 코스무 투투 프로스 톤 파테라 아가페사스투스 이디우스 투스 엔 토 코스모 에이스텔로스 아가페센 아우투스

개역개정,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새번역,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우리말성경,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됐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과월절이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신 그분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영어NIV,1 It was just before the Passover Feast. Jesus knew that the time had come for him to leave this world and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now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영어NASB,1 Now before the Feast of the Passover, Jesus knowing that His hour had come that He would depart out of this world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 to the end.

영어MSG,1 Just before the Passover Feast, Jesus knew that the time had come to leave this world to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dear companions, he continued to love them right to the end.

영어NRSV,1 Now before the festival of the Passover, Jesus knew that his hour had come to depart from this world and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 to the end.

헬라어신약Stephanos,1 προ δε της εορτης του πασχα ειδως ο ιησους οτι εληλυθεν αυτου η ωρα ινα μεταβη εκ του κοσμου τουτου προς τον πατερα αγαπησας τους ιδιους τους εν τω κοσμω εις τελος ηγαπησεν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1 ante diem autem festum paschae sciens Iesus quia venit eius hora ut transeat ex hoc mundo ad Patrem cum dilexisset suos qui erant in mundo in finem dilexit eos

히브리어Modern,1 ולפני חג הפסח כשידע ישוע כי באה שעתו לעבר מן העולם הזה אל אביו כאשר אהב את בחיריו אשר בעולם כן אהבם עד הקץ׃

성 경: [요13:1-3]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 이 귀절들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세가지 동기로써 제자들에게 사랑의 일, 곧, 발 씻는 일을 행하셨다. (1)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그의 인성(人性)편의 무거운 느낌에서 행하신 것. (2) “마귀가…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은 줄 아시고(2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가장 마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팔리운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장면이고, 낙심될 일이다. 그런데, 그가 계속하여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는, 가장 검은 미움의 활동이 일어난 곳에 가장 부드러운 사랑으로 대하셨다. (3)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그가 자기의 영광 받으실 사실을 아셨다는 뜻이다(마 28:18). 그는 저렇게 영광 받으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사람이 천국에서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비결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나타난 그의 겸손이다. “저녁 먹는 중.” 이것이 유월절 만찬을 가리킨 것일까? 혹은 다른 때의 저녁 식사를 의미한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유월절 하루 전(니산월 13 일 저녁)의 식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21-30절의 내용을 보니,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줄 자로 지적된 저녁인 것이 드러난다. 그 저녁은 유월절 만찬 저녁이다. 공관 복음은 그렇게 말한다(마 26:17-25; 막 14:17-21).

카이 데잎누 기노메누 투 디아볼루 에데 베블레코토스 에이스 텐 카르디안 히나 파라도이 아우톤 유다스 시모노스 이스카리오투

개역개정,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새번역,2 저녁을 먹을 때에, 악마가 이미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우리말성경,2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마귀는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반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가톨릭성경,2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가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팔아 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영어NIV,2 The evening meal was being served, and the devil had already prompted Judas Iscariot, son of Simon, to betray Jesus.

영어NASB,2 During supper, the devil having already put into the heart of Judas Iscariot, the son of Simon, to betray Him,

영어MSG,2 It was suppertime. The Devil by now had Judas, son of Simon the Iscariot, firmly in his grip, all set for the betrayal.

영어NRSV,2 The devil had already put it into the heart of Judas son of Simon Iscariot to betray him. And during supper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δειπνου γενομενου του διαβολου ηδη βεβληκοτος εις την καρδιαν ιουδα σιμωνος ισκαριωτου ινα αυτον παραδω

라틴어Vulgate,2 et cena facta cum diabolus iam misisset in corde ut traderet eum Iudas Simonis Scariotis

히브리어Modern,2 ויהי אחרי החל הסעודה והשטן נתן בלב יהודה בן שמעון איש קריות למסרו׃

에이도스 호티 판타 에도켄 아우토 호 파테르 에이스 타스 케이라스 카이 호티 아포 데우 엨셀덴 카이 프로스 톤 데온 휘파게이

개역개정,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새번역,3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말성경,3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주셨으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는

가톨릭성경,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영어NIV,3 Jesus knew that the Father had put all things under his power, and that he had come from God and was returning to God;

영어NASB,3 Jesus, knowing that the Father had given all things into His hands, and that He had come forth from God and was going back to God,

영어MSG,3 Jesus knew that the Father had put him in complete charge of everything, that he came from God and was on his way back to God.

영어NRSV,3 Jesus, knowing that the Father had given all things into his hands, and that he had come from God and was going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3 ειδως ο ιησους οτι παντα δεδωκεν αυτω ο πατηρ εις τας χειρας και οτι απο θεου εξηλθεν και προς τον θεον υπαγει

라틴어Vulgate,3 sciens quia omnia dedit ei Pater in manus et quia a Deo exivit et ad Deum vadit

히브리어Modern,3 וידע ישוע כי נתן אביו את הכל בידו וכי מאלהים בא ואל אלהים ישוב׃

에게이레타이 에크 투 데잎누 카이 티데신 타 히마티아 카이 라본 렌티온 디에조센 헤아우톤

개역개정,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새번역,4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우리말성경,4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가톨릭성경,4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영어NIV,4 so he got up from the meal, took off his outer clothing, and wrapped a towel around his waist.

영어NASB,4 got up from supper, and laid aside His garments; and taking a towel, He girded Himself.

영어MSG,4 So he got up from the supper table, set aside his robe, and put on an apron.

영어NRSV,4 got up from the table, took off his outer robe, and tied a towel around himself.

헬라어신약Stephanos,4 εγειρεται εκ του δειπνου και τιθησιν τα ιματια και λαβων λεντιον διεζωσεν εαυτον

라틴어Vulgate,4 surgit a cena et ponit vestimenta sua et cum accepisset linteum praecinxit se

히브리어Modern,4 ויקם מעל השלחן ויפשט את בגדיו ויקח מטפחת ויחגרה׃

성 경: [요13:4,5]

󰃨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유대인의 풍속에는 보통 식사 전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법인데, 이 때에는 식사 도중에 그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 때에 이 일을 할 종이 없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겉옷”은 저고리를 말함이 아니고 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일할 준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겸손의 극치(極致)이다. 그가 최종의 행동 교훈으로 식사 도중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의 별세 후에 제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겸덕을 고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저렇게 계급을 초월하시고 영광의 주님을 사랑의 발 씻는 종으로 삼으셨다. 고데이(F. Godet)는 추측하기를, 이 발 씻는 일이 아마도 제자들의 서로 다툰 사건(눅 22:24-27)을 동기로 하고 있은 듯하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이것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설교하신 셈이다(12-16). 실행으로 본을 보이는 설교자는 그 설교로써 사람들의 심령을 아주 점령해 버린다. (2)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속죄하시는 중보(中保)의 역사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지극히 크신 사랑의 행동이시다. 그가 피를 흘려서 그의 백성의 죄를 씻으신 일도 지극한 사랑이면서 역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낸다. 유명한 변증 학자 스킬더(Schilder)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하여 물을 휘저으신 주님의 손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그의 못 박히신 손에서 흐르는 피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되지 못함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뜻은, 그의 몇 제자들에게만 그의 친절과 겸손의 모본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위로써 온 세계를 찾으시는 그의 속죄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에이타 발레이 휘도르 에이스 톤 닢테라 카이 에릌사토 뉲테인 투스 포다스 톤 마데톤 카이 에크마쎄인 토 렌티오 호 엔 디에조스메노스

개역개정,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새번역,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우리말성경,5 그러고 나서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으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영어NIV,5 After that, he poured water into a basin and began to wash his disciples’ feet, drying them with the towel that was wrapped around him.

영어NASB,5 Then He poured water into the basin, and began to wash the disciples’ feet and to wipe them with the towel with which He was girded.

영어MSG,5 Then he poured water into a basin and began to wash the feet of the disciples, drying them with his apron.

영어NRSV,5 Then he poured water into a basin and began to wash the disciples’ feet and to wipe them with the towel that was tied aroun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5 ειτα βαλλει υδωρ εις τον νιπτηρα και ηρξατο νιπτειν τους ποδας των μαθητων και εκμασσειν τω λεντιω ω ην διεζωσμενος

라틴어Vulgate,5 deinde mittit aquam in pelvem et coepit lavare pedes discipulorum et extergere linteo quo erat praecinctus

히브리어Modern,5 ואחר יצק מים בכיור ויחל לרחץ את רגלי תלמידיו ולנגב במטפחת אשר הוא חגור בה׃

에르케타이 운 프로스 시모나 페트론 레게이 아우토 퀴리에 쉬 모 닢테이스 투스 포다스

개역개정,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새번역,6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우리말성경,6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제 발도 씻겨 주려 하십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6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6 He came to Simon Peter, who said to him, “Lord, are you going to wash my feet?”

영어NASB,6 So He came to Simon Peter. He said to Him, “Lord, do You wash my feet?”

영어MSG,6 When he got to Simon Peter, Peter said, “Master, you wash my feet?”

영어NRSV,6 He came to Simon Peter, who said to him, “Lord, are you going to wash my feet?”

헬라어신약Stephanos,6 ερχεται ουν προς σιμωνα πετρον και λεγει αυτω εκεινος κυριε συ μου νιπτεις τους ποδας

라틴어Vulgate,6 venit ergo ad Simonem Petrum et dicit ei Petrus Domine tu mihi lavas pedes

히브리어Modern,6 ויקרב אל שמעון פטרוס והוא אמר אליו אדני האתה תרחץ את רגלי׃

성 경: [요13:6]

󰃨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이것은 베드로가 너무 황송한 중에 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은, 그가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은 때에도 하였으니, 그 때에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였다(눅 5:8). 베드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취급하면서 그것을 황송하게 여겨 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수난하실 일에 대하여 들었을 때에도 역시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였다(마 16:22). 저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업 관계의 행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해석으로 잘못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겸손과 희생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황송(惶悚)하게 생각함은 좋으나 그 행하심이 구원의 행위인 것인 만큼, 그것을 감격하여 받아야 된다. 그것을 받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것은, 병자가 의사의 진료를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아페크리데 예수스 카이 에이펜 아우토 호 에고 포이오 쉬 우크 오이다스 아르티 그노세 데 메타 타우타

개역개정,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새번역,7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우리말성경,7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그러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7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영어NIV,7 Jesus replied, “You do not realize now what I am doing, but later you will understand.”

영어NASB,7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What I do you do not realize now, but you will understand hereafter.”

영어MSG,7 Jesus answered, “You don’t understand now what I’m doing, but it will be clear enough to you later.”

영어NRSV,7 Jesus answered, “You do not know now what I am doing, but later you will understand.”

헬라어신약Stephanos,7 απεκριθη ιησους και ειπεν αυτω ο εγω ποιω συ ουκ οιδας αρτι γνωση δε μετα ταυτα

라틴어Vulgate,7 respondit Iesus et dicit ei quod ego facio tu nescis modo scies autem postea

히브리어Modern,7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את אשר אני עשה אינך ידע כעת ואחרי כן תדע׃

성 경: [요13:7]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 이것은, 그 현재에 베드로가 죄로 인하여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나,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은, 그의 속죄의 고난으로 신자들의 죄 씻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1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본 뒤에야 그의 발 씻기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레게이 아우토 페트로스 우 메 닢세스 무 투스 포다스 에이스 톤 아이오나 아페크리데 예수스 아우토 에안 메 닢소 세 우크 에케이스 메로스 멭 에무

개역개정,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새번역,8 베드로가 다시 예수께 말하였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우리말성경,8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겨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가톨릭성경,8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영어NIV,8 “No,” said Peter, “you shall never wash my feet.” Jesus answered, “Unless I wash you, you have no part with me.”

영어NASB,8 Peter said to Him, “Never shall You wash my feet!” Jesus answered him, “If I do not wash you, you have no part with Me.”

영어MSG,8 Peter persisted, “You’re not going to wash my feet–ever!” Jesus said, “If I don’t wash you, you can’t be part of what I’m doing.”

영어NRSV,8 Peter said to him, “You will never wash my feet.” Jesus answered, “Unless I wash you, you have no share with me.”

헬라어신약Stephanos,8 λεγει αυτω πετρος ου μη νιψης τους ποδας μου εις τον αιωνα απεκριθη αυτω ο ιησους εαν μη νιψω σε ουκ εχεις μερος μετ εμου

라틴어Vulgate,8 dicit ei Petrus non lavabis mihi pedes in aeternum respondit Iesus ei si non lavero te non habes partem mecum

히브리어Modern,8 ויאמר אליו פטרוס לעולם לא תרחץ את רגלי ויען ישוע אם לא ארחץ אתך אין לך חלק עמי׃

성 경: [요13:8]

󰃨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베드로가 발 씻기시는 예수님의 봉사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 의미로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의 구원 은총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받으실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레게이 아우토 시몬 페트로스 퀴리에 메 투스 포다스 무 모논 알라 카이 타스 케이라스 카이 텐 케팔렌

개역개정,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새번역,9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우리말성경,9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여, 제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가톨릭성경,9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영어NIV,9 “Then, Lord,” Simon Peter replied, “not just my feet but my hands and my head as well!”

영어NASB,9 Simon Peter said to Him, “Lord, then wash not only my feet, but also my hands and my head.”

영어MSG,9 “Master!” said Peter. “Not only my feet, then. Wash my hands! Wash my head!”

영어NRSV,9 Simon Peter said to him, “Lord, not my feet only but also my hands and my head!”

헬라어신약Stephanos,9 λεγει αυτω σιμων πετρος κυριε μη τους ποδας μου μονον αλλα και τας χειρας και την κεφαλην

라틴어Vulgate,9 dicit ei Simon Petrus Domine non tantum pedes meos sed et manus et caput

히브리어Modern,9 ויאמר אליו שמעון פטרוס אדני לא לבד את רגלי כי אם גם את ידי ואת ראשי׃

성 경: [요13:9]

󰃨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베드로는 여기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또 실수함을 면치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심이, 구속의 사랑에 대하여는 상징하는 정도 뿐인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의 실제인 줄 오해하고 욕심을 부렸다.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호 렐루메노스 우크 에케이 크레이안 에이 메 투스 포다스 닢사스다이 알 에스틴 카다로스 홀로스 카이 휘메이스 카다로이 에스테 알 우키 판테스

개역개정,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새번역,1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발 밖에는’이 없음

우리말성경,10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기 때문에 발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지만 너희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가톨릭성경,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 몸이 깨끗하여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영어NIV,10 Jesus answered, “A person who has had a bath needs only to wash his feet; his whole body is clean. And you are clean, though not every one of you.”

영어NASB,10 Jesus said to him, “He who has bathed needs only to wash his feet, but is completely clean; and you are clean, but not all of you.”

영어MSG,10 Jesus said, “If you’ve had a bath in the morning, you only need your feet washed now and you’re clean from head to toe. My concern, you understand, is holiness, not hygiene. So now you’re clean. But not every one of you.”

영어NRSV,10 Jesus said to him, “One who has bathed does not need to wash, except for the feet, but is entirely clean. And you are clean, though not all of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0 λεγει αυτω ο ιησους ο λελουμενος ου χρειαν εχει η τους ποδας νιψασθαι αλλ εστιν καθαρος ολος και υμεις καθαροι εστε αλλ ουχι παντες

라틴어Vulgate,10 dicit ei Iesus qui lotus est non indiget ut lavet sed est mundus totus et vos mundi estis sed non omnes

히브리어Modern,10 ויאמר אליו ישוע המרחץ אין לו לרחץ עוד כי אם את הרגלים כי כלו טהור הוא ואתם טהורים אך לא כלכם׃

성 경: [요13:10]

󰃨 이미 목욕하는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예수님의 제자들은, 속죄를 받은 자들이라고 간주된 때 벌써 온 몸이 깨끗해진 셈이다(15:3). 그러나 그들도 매일 세상과 접촉하여 허물과 죄로 더러워진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하여 사죄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발 씻는 일로 비유된 것이다.

에데이 가르 톤 파라디돈타 아우톤 디아 투토 에이펜 호티 우키 판테스 카다로이 에스테

개역개정,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새번역,11 예수께서는 자기를 팔아 넘길 사람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말성경,11 예수께서는 누가 자신을 배반할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너희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1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 넘길 자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영어NIV,11 For he knew who was going to betray him, and that was why he said not every one was clean.

영어NASB,11 For He knew the one who was betraying Him; for this reason He said, “Not all of you are clean.”

영어MSG,11 (He knew who was betraying him. That’s why he said, “Not every one of you.”)

영어NRSV,11 For he knew who was to betray him; for this reason he said, “Not all of you are clean.”

헬라어신약Stephanos,11 ηδει γαρ τον παραδιδοντα αυτον δια τουτο ειπεν ουχι παντες καθαροι εστε

라틴어Vulgate,11 sciebat enim quisnam esset qui traderet eum propterea dixit non estis mundi omnes

히브리어Modern,11 כי ידע מי ימסרהו על כן אמר לא כלכם טהורים׃

성 경: [요13:11]

󰃨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히 겸손의 덕을 나타내신 것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을 속죄하여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파는 자는 천하에 가장 더러운 죄를 범하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만민을 구속하여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시지만, 그를 파는 유다는 깨끗지 못한 자들 중 하나이다.

호테 운 에닢센 투스 포다스 아우톤 카이 엘라벤 타 히마티아 아우투 카이 아네페센 팔린 에이펜 아우토이스 기노스케테 티 페포이에카 휘민

개역개정,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새번역,12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우리말성경,12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겨 주신 후 다시 겉옷을 걸치시고 자리에 돌아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가톨릭성경,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영어NIV,12 When he had finished washing their feet, he put on his clothes and returned to his place. “Do you understand what I have done for you?” he asked them.

영어NASB,12 So when He had washed their feet, and taken His garments and reclined at the table again, He said to them, “Do you know what I have done to you?

영어MSG,12 After he had finished washing their feet, he took his robe, put it back on, and went back to his place at the table. Then he said, “Do you understand what I have done to you?

영어NRSV,12 After he had washed their feet, had put on his robe, and had returned to the table, he said to them, “Do you know what I have done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τε ουν ενιψεν τους ποδας αυτων και ελαβεν τα ιματια αυτου αναπεσων παλιν ειπεν αυτοις γινωσκετε τι πεποιηκα υμιν

라틴어Vulgate,12 postquam ergo lavit pedes eorum et accepit vestimenta sua cum recubuisset iterum dixit eis scitis quid fecerim vobis

히브리어Modern,12 ויהי אחרי אשר רחץ את רגלים וילבש את בגדיו וישב להסב ויאמר אליהם הידעתם מה הדבר אשר עשיתי לכם׃

성 경: [요13:12-15]

󰃨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겸손한 봉사의 표본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일로써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위 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겸손히 봉사하신 고상한 정신이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대하여 겸손하기는 쉬우나, 윗 사람으로 아랫 사람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에 기준하여, 톨레도(Toledo)회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웠다(694 A.D.).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이 그것을 폐지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부탁하신 것은, 다만 제자들더러 서로 겸손하게 봉사하라는 것 뿐이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진하여 형제를 겸손히 봉사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크게 간주될 것을 가리킨다(마 18:4).

휘메이스 포네이테 메 호 디다스칼로스 카이 호 뮈리오스 카이 칼로스 레게테 에이미 가르

개역개정,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새번역,13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우리말성경,13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가톨릭성경,13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내가 사실 그러하다.

영어NIV,13 “You call me ‘Teacher’ and ‘Lord,’ and rightly so, for that is what I am.

영어NASB,13 “You call Me Teacher and Lord; and you are right, for so I am.

영어MSG,13 You address me as ‘Teacher’ and ‘Master,’ and rightly so. That is what I am.

영어NRSV,13 You call me Teacher and Lord–and you are right, for that is what I am.

헬라어신약Stephanos,13 υμεις φωνειτε με ο διδασκαλος και ο κυριος και καλως λεγετε ειμι γαρ

라틴어Vulgate,13 vos vocatis me magister et Domine et bene dicitis sum etenim

히브리어Modern,13 אתם קראים לי רב ואדון והיטבתם אשר דברתם כי אני הוא׃

에이 운 에고 에닢사 휘몬 투스 포다스 호 퀴리오스 카이 호 디다스칼로스 카이 휘메이스 오페일레테 알렐론 닢테인 투스 포다스

개역개정,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새번역,14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우리말성경,14 주이며 선생님인 내가 너희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가톨릭성경,14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영어NIV,14 Now that I,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also should wash one another’s feet.

영어NASB,14 “If I then, the Lord and the Teacher, washed your feet, you also ought to wash one another’s feet.

영어MSG,14 So if I, the Master and Teacher, washed your feet, you must now wash each other’s feet.

영어NRSV,14 So if I,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also ought to wash one another’s feet.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ι ουν εγω ενιψα υμων τους ποδας ο κυριος και ο διδασκαλος και υμεις οφειλετε αλληλων νιπτειν τους ποδας

라틴어Vulgate,14 si ergo ego lavi vestros pedes Dominus et magister et vos debetis alter alterius lavare pedes

히브리어Modern,14 לכן אם אני המורה והאדון רחצתי את רגליכם גם אתם חיבים לרחץ איש את רגלי אחיו׃

휘포데이그마 가르 에도카 휘민 히나 카도스 에고 에포이에사 휘민 카이 휘메이스 포이에테

개역개정,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새번역,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우리말성경,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 주었다.

가톨릭성경,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영어NIV,15 I have set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do as I have done for you.

영어NASB,15 “For I gave you an example that you also should do as I did to you.

영어MSG,15 I’ve laid down a pattern for you. What I’ve done, you do.

영어NRSV,15 For I have set you an example, that you also should do as I have done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5 υποδειγμα γαρ εδωκα υμιν ινα καθως εγω εποιησα υμιν και υμεις ποιητε

라틴어Vulgate,15 exemplum enim dedi vobis ut quemadmodum ego feci vobis ita et vos faciatis

히브리어Modern,15 כי מופת נתתי לכם למען תעשו גם אתם כאשר עשיתי לכם׃

아멘 아멘 레고 휘민 우크 에스틴 둘로스 메이존 투 퀴리우 아우투 우데 아포스톨로스 메이존 투 펨프산토스 아우톤

개역개정,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새번역,1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우리말성경,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내신 분보다 높지 않다.

가톨릭성경,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영어NIV,16 I tell you the truth, no servant is greater than his master, nor is a messenger greater than the one who sent him.

영어NASB,16 “Truly, truly, I say to you, a slave is not greater than his master, nor is one who is sent greater than the one who sent him.

영어MSG,16 I’m only pointing out the obvious. A servant is not ranked above his master; an employee doesn’t give orders to the employer.

영어NRSV,16 Very truly, I tell you, servants are not greater than their master, nor are messengers greater than the one who sent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6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υκ εστιν δουλος μειζων του κυριου αυτου ουδε αποστολος μειζων του πεμψαντο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16 amen amen dico vobis non est servus maior domino suo neque apostolus maior eo qui misit illum

히브리어Modern,16 אמן אמן אני אמר לכם כי העבד איננו גדול מאדניו והשלוח איננו גדול משלחו׃

에이 타우타 오이다테 마카리오이 에스테 에안 포이에테 아우타

개역개정,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새번역,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우리말성경,17 너희가 이것들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영어NIV,17 Now that you know these things, you will be blessed if you do them.

영어NASB,17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

영어MSG,17 If you understand what I’m telling you, act like it–and live a blessed life.

영어NRSV,17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7 ει ταυτα οιδατε μακαριοι εστε εαν ποιητε αυτα

라틴어Vulgate,17 si haec scitis beati eritis si feceritis ea

히브리어Modern,17 אם ידעתם זאת אשריכם אם כן תעשו׃

우 페리 판톤 휘몬 레고 에고 오이다 티나스 엨셀렠사멘 알 히나 헤 그라페 플레로데 호 트로곤 무 톤 아르톤 에페렌 엪 에메 텐 프테르난 아우투

개역개정,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새번역,18 나는 너희 모두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택한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나와 함께 빵을 먹은 자가’. 시 35:19; 69:4

우리말성경,18 내가 너희 모두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택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빵을 함께 먹는 사람이 나를 배반했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시35:19;시41:9;시69:4

가톨릭성경,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영어NIV,18 “I am not referring to all of you; I know those I have chosen. But this is to fulfill the scripture: ‘He who shares my bread has lifted up his heel against me.’

영어NASB,18 “I do not speak of all of you. I know the ones I have chosen; but it is that the Scripture may be fulfilled, ‘HE WHO EATS MY BREAD HAS LIFTED UP HIS HEEL AGAINST ME.’

영어MSG,18 “I’m not including all of you in this. I know precisely whom I’ve selected, so as not to interfere with the fulfillment of this Scripture: The one who ate bread at my table Turned on his heel against me.

영어NRSV,18 I am not speaking of all of you; I know whom I have chosen. But it is to fulfill the scripture, ‘The one who ate my bread has lifted his heel against me.’

헬라어신약Stephanos,18 ου περι παντων υμων λεγω εγω οιδα ους εξελεξαμην αλλ ινα η γραφη πληρωθη ο τρωγων μετ εμου τον αρτον επηρεν επ εμε την πτερνα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18 non de omnibus vobis dico ego scio quos elegerim sed ut impleatur scriptura qui manducat mecum panem levavit contra me calcaneum suum

히브리어Modern,18 לא על כלכם דברתי יודע אני את אשר בחרתי בהם אך למען ימלא הכתוב אוכל לחמי הגדיל עלי עקב׃

성 경: [요13:18]

󰃨 이 귀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의 상징적 의미, 곧, 구속에 관하여 말한다. 예수님께서 구속 사업을 이루시지만, 그 은혜에 참여할 자들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곧, 그의 제자들이 모두 다 “복이 있을”것(17절)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18절).

󰃨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이것은, 매우 친근하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큰 손해를 본 다윗의 경험을 들어 말씀하심이다(시 41:9).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다윗의 당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일의 예표였던 것이다.

앞 아르티 레고 휘민 프로 투 게네스다이 히나 피스튜세테 호탄 게네타이 호티 에고 에이미

개역개정,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새번역,19 내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곧 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말성경,19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지금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면 내가 그라는 것을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영어NIV,19 “I am telling you now before it happens, so that when it does happen you will believe that I am He.

영어NASB,19 “From now on I am telling you before it comes to pass, so that when it does occur, you may believe that I am He.

영어MSG,19 “I’m telling you all this ahead of time so that when it happens you will believe that I am who I say I am.

영어NRSV,19 I tell you this now, before it occurs, so that when it does occur, you may believe that I am he.

헬라어신약Stephanos,19 απ αρτι λεγω υμιν προ του γενεσθαι ινα οταν γενηται πιστευσητε οτι εγω ειμι

라틴어Vulgate,19 amodo dico vobis priusquam fiat ut credatis cum factum fuerit quia ego sum

히브리어Modern,19 מעתה אני אמר לכם בטרם היותה למען בבואה תאמינו כי אני הוא׃

성 경: [요13:19]

󰃨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를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 예언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그것이 성취될 때에, (1) 그 예언을 주신 이의 진실성과 권위를 믿게 되며, (2) 그 성취된 사건 자체를 믿게 되며, (3) 그 예언 성취가 지향한 장래 행복의 활실성도 믿어진다. “내가 그 인줄”(*)이란 말은, “나 곧 나만 중재자요 보내심을 받은 자요 메시야라”는 뜻이다(Grosheide).

아멘 아멘 레고 휘민 호 람바논 안 티나 펨프소 에메 람바네이 호 데 에메 람바논 람바네이 톤 펨프산타 메

개역개정,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새번역,20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이요,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사람이다.”

우리말성경,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가 보내는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이요,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사람이다.”

가톨릭성경,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영어NIV,20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accepts anyone I send accepts me; and whoever accepts me accepts the one who sent me.”

영어NASB,20 “Truly, truly, I say to you, he who receives whomever I send receives Me; and he who receives Me receives Him who sent Me.”

영어MSG,20 Make sure you get this right: Receiving someone I send is the same as receiving me, just as receiving me is the same as receiving the One who sent me.”

영어NRSV,20 Very truly, I tell you, whoever receives one whom I send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him who sent me.”

헬라어신약Stephanos,20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 λαμβανων εαν τινα πεμψω εμε λαμβανει ο δε εμε λαμβανων λαμβανει τον πεμψαντα με

라틴어Vulgate,20 amen amen dico vobis qui accipit si quem misero me accipit qui autem me accipit accipit eum qui me misit

히브리어Modern,20 אמן אמן אני אמר לכם כי כל המקבל את אשר אשלחהו אתי הוא מקבל והמקבל אתי הוא מקבל את שלחי׃

성 경: [요13:20]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이 말씀의 목적한 바는 이렇다. 곧, 비록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보낸자”. 곧,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그 만큼 사도들의 권위는 높은 것이다.

타우타 에이폰 호 예수스 에타라크데 토 프뉴마티 카이 에마르튀레센 카이 에이펜 아멘 아멘 레고 휘민 호티 헤이스 엨스 휘몬 파라도세이 메

개역개정,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새번역,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우리말성경,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심령으로 몹시 괴로워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1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영어NIV,21 After he had said this, Jesus was troubled in spirit and testified, “I tell you the truth, one of you is going to betray me.”

영어NASB,21 When Jesus had said this, He became troubled in spirit, and testified and said, “Truly, truly, I say to you, that one of you will betray Me.”

영어MSG,21 After he said these things, Jesus became visibly upset, and then he told them why. “One of you is going to betray me.”

영어NRSV,21 After saying this Jesus was troubled in spirit, and declared, “Very truly, I tell you, one of you will betray me.”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αυτα ειπων ο ιησους εταραχθη τω πνευματι και εμαρτυρησεν και ειπεν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εις εξ υμων παραδωσει με

라틴어Vulgate,21 cum haec dixisset Iesus turbatus est spiritu et protestatus est et dixit amen amen dico vobis quia unus ex vobis tradet me

히브리어Modern,21 ויהי ככלות ישוע לדבר הדברים האלה ויבהל ברוחו ויעד ויאמר אמן אמן אני אמר לכם כי אחד מכם ימסרני׃

성 경: [요13:21]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그의 심령에 민망하시게 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생각되는 것은, (1) 그의 제자가 그를 팔아 먹는 일이 너무도 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과, (2) 그런 일에 대하여 이제 공적으로 지적하여 말하기가 역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일을 지적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될 단계였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엄격한 법정 선언과 같이 “증거하여” 말씀하셨다. 여기 “증거”란 말이 법정 용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에블레폰 에이스 알렐루스 호이 마데타이 아포루메노이 페리 티노스 레게이

개역개정,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새번역,22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서, 서로 바라다보았다.

우리말성경,22 제자들은 자기들 중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몰라 당황해 하며 서로 쳐다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영어NIV,22 His disciples stared at one another, at a loss to know which of them he meant.

영어NASB,22 The disciples began looking at one another, at a loss to know of which one He was speaking.

영어MSG,22 The disciples looked around at one another, wondering who on earth he was talking about.

영어NRSV,22 The disciples looked at one another, uncertain of whom he was speaking.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βλεπον ουν εις αλληλους οι μαθηται απορουμενοι περι τινος λεγει

라틴어Vulgate,22 aspiciebant ergo ad invicem discipuli haesitantes de quo diceret

히브리어Modern,22 ויתראו תלמידיו ויתמהו איש אל רעהו לדעת על מי דבר׃

성 경: [요13:22]

󰃨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 이것은, 제자들이(유다를 제외하고는)강퍅하지 않은 증표이다.

엔 아나케이메노스 헤이스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 엔 토 콜포 투 예수 혼 에가파 호 예수스

개역개정,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새번역,23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우리말성경,23 제자들 중 하나인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 곁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영어NIV,23 One of them,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was reclining next to him.

영어NASB,23 There was reclining on Jesus’ bosom one of His disciples, whom Jesus loved.

영어MSG,23 One of the disciples, the one Jesus loved dearly, was reclining against him, his head on his shoulder.

영어NRSV,23 One of his disciples–the one whom Jesus loved–was reclining next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3 ην δε ανακειμενος εις των μαθητων αυτου εν τω κολπω του ιησου ον ηγαπα ο ιησους

라틴어Vulgate,23 erat ergo recumbens unus ex discipulis eius in sinu Iesu quem diligebat Iesus

히브리어Modern,23 ואחד מתלמידיו מסב על חיק ישוע אשר ישוע אהבו׃

성 경: [요13:23]

󰃨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일 것이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식사할 때 취하는 자세를 말함이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그 때 풍속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지 않고 왼 팔에 의지하여 옆으로 누워서 먹었다고 한다(Westcott).

뉴에이 운 투토 시몬 페트로스 퓌데스다이 티스 안 에이에 페리 후 레게이

개역개정,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새번역,24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 보라고 하였다.

우리말성경,24 시몬 베드로가 그 제자에게 손짓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쭤 보라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라고 하였다.

영어NIV,24 Simon Peter motioned to this disciple and said, “Ask him which one he means.”

영어NASB,24 So Simon Peter gestured to him, and said to him, “Tell us who it is of whom He is speaking.”

영어MSG,24 Peter motioned to him to ask who Jesus might be talking about.

영어NRSV,24 Simon Peter therefore motioned to him to ask Jesus of whom he was speaking.

헬라어신약Stephanos,24 νευει ουν τουτω σιμων πετρος πυθεσθαι τις αν ειη περι ου λεγει

라틴어Vulgate,24 innuit ergo huic Simon Petrus et dicit ei quis est de quo dicit

히브리어Modern,24 וירמז לו שמעון פטרוס לדרש מי הוא זה אשר דבר עליו׃

성 경: [요13:24,25]

󰃨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윗절에 말한바,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을 가리킨 것인데, 이제 베드로가 그더러 주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 알려 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는 측근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이것은, 유대인들이 음식 먹을 때에 원형으로 팔꿈치를 의지해서 서로끼리 가슴에 기대다시피 연접하여 누워서 먹는 풍속이 있었음을 말한다.

아나페손 운 에케이노스 후토스 에피 토 스테도스 투 예수 레게이 아우토 퀴리에 티스 에스틴

개역개정,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새번역,25 그 제자가 예수의 가슴에 바싹 기대어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말성경,25 그는 예수의 품에 기대어 물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입니까?”

가톨릭성경,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영어NIV,25 Leaning back against Jesus, he asked him, “Lord, who is it?”

영어NASB,25 He, leaning back thus on Jesus’ bosom, said to Him, “Lord, who is it?”

영어MSG,25 So, being the closest, he said, “Master, who?”

영어NRSV,25 So while reclining next to Jesus, he asked him, “Lord, who is it?”

헬라어신약Stephanos,25 επιπεσων δε εκεινος επι το στηθος του ιησου λεγει αυτω κυριε τις εστιν

라틴어Vulgate,25 itaque cum recubuisset ille supra pectus Iesu dicit ei Domine quis est

히브리어Modern,25 ויפל על לב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אדני מי הוא׃

아포크리네타이 호 예수스 에케이노스 에스틴 호 에고 밮소 토 프소미온 카이 도소 아우토 밮사스 운 토 프소미온 람바네이 카이 디도신 유다 시모노스 이스카리오투

개역개정,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새번역,2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빵조각을 적셔서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시몬의 아들 유다 가룟’ 또는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

우리말성경,26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 빵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빵 한 조각을 적셔서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가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영어NIV,26 Jesus answered, “It is the one to whom I will give this piece of bread when I have dipped it in the dish.” Then, dipping the piece of bread, he gave it to Judas Iscariot, son of Simon.

영어NASB,26 Jesus then answered, “That is the one for whom I shall dip the morsel and give it to him.” So when He had dipped the morsel, He took and gave it to Judas, the son of Simon Iscariot.

영어MSG,26 Jesus said, “The one to whom I give this crust of bread after I’ve dipped it.” Then he dipped the crust and gave it to Judas, son of Simon the Iscariot.

영어NRSV,26 Jesus answered, “It is the one to whom I give this piece of bread when I have dipped it in the dish.” So when he had dipped the piece of bread, he gave it to Judas son of Simon Iscariot.

헬라어신약Stephanos,26 αποκρινεται ο ιησους εκεινος εστιν ω εγω βαψας το ψωμιον επιδωσω και εμβαψας το ψωμιον διδωσιν ιουδα σιμωνος ισκαριωτη

라틴어Vulgate,26 respondit Iesus ille est cui ego intinctum panem porrexero et cum intinxisset panem dedit Iudae Simonis Scariotis

히브리어Modern,26 ויען ישוע הנה זה הוא אשר אטבל פתי לתתו לו ויטבל את פתו ויתן אל יהודה בן שמעון איש קריות׃

성 경: [요13:26,27]

󰃨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유다를 주시니 – 그 당시에 연회 주인이 떡 조각을 찍어서 손님에게 주는 것은 친절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이 행동은 가룟 유다의 회개를 독촉하신 사랑이다.

󰃨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이유는, 그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눅 22:3-6; 요 13:2 참조

카이 메타 토 프소미온 토테 에이셀덴 에이스 에케이논 호 사타나스 레게이 운 아우토 호 예수스 호 포이에이스 포이에손 타키온

개역개정,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새번역,27 ㉣그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 ㉣그, ‘빵조각 뒤에’ 또는 ‘한 입 먹은 뒤에’

우리말성경,27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가톨릭성경,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27 As soon as Judas took the bread, Satan entered into him. “What you are about to do, do quickly,” Jesus told him,

영어NASB,27 After the morsel, Satan then entered into him. Therefore Jesus said to him, “What you do, do quickly.”

영어MSG,27 As soon as the bread was in his hand, Satan entered him. “What you must do,” said Jesus, “do. Do it and get it over with.”

영어NRSV,27 After he received the piece of bread, Satan entered into him. Jesus said to him, “Do quickly what you are going to do.”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μετα το ψωμιον τοτε εισηλθεν εις εκεινον ο σατανας λεγει ουν αυτω ο ιησους ο ποιεις ποιησον ταχιον

라틴어Vulgate,27 et post buccellam tunc introivit in illum Satanas dicit ei Iesus quod facis fac citius

히브리어Modern,27 ואחרי בלעו בא השטן אל קרבו ויאמר אליו ישוע את אשר תעשה עשה מהרה׃

투토 데 우데이스 에그노 톤 아나케이메논 프로스 티 에이펜 아우토

개역개정,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새번역,28 그러나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도,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우리말성경,28 그러나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 중 아무도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톨릭성경,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영어NIV,28 but no one at the meal understood why Jesus said this to him.

영어NASB,28 Now no one of those reclining at the table knew for what purpose He had said this to him.

영어MSG,28 No one around the supper table knew why he said this to him.

영어NRSV,28 Now no one at the table knew why he said this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8 τουτο δε ουδεις εγνω των ανακειμενων προς τι ειπεν αυτω

라틴어Vulgate,28 hoc autem nemo scivit discumbentium ad quid dixerit ei

히브리어Modern,28 ומן המסבים לא ידע איש על מה דבר אליו כזאת׃

성 경: [요13:28,29]

이 부분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유다의 행할 악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티네스 가르 에도쿤 에페이 토 글로쏘코몬 에이켄 유다스 호티 레게이 아우토 호 예수스 아고라손 혼 크레이안 에코멘 에이스 텐 헤오르텐 에 토이스 프토코이스 히나 티 도

개역개정,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새번역,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자루를 맡고 있으므로, 예수께서 그에게 명절에 그 일행이 쓸 물건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우리말성경,29 어떤 사람들은 유다가 돈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에게 명절에 필요한 것을 사 오라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뭔가 나눠 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가톨릭성경,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우리가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거라.”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영어NIV,29 Since Judas had charge of the money, some thought Jesus was telling him to buy what was needed for the Feast, or to give something to the poor.

영어NASB,29 For some were supposing, because Judas had the money box, that Jesus was saying to him, “Buy the things we have need of for the feast”; or else, that he should give something to the poor.

영어MSG,29 Some thought that since Judas was their treasurer, Jesus was telling him to buy what they needed for the Feast, or that he should give something to the poor.

영어NRSV,29 Some thought that, because Judas had the common purse, Jesus was telling him, “Buy what we need for the festival”; or, that he should give something to the poor.

헬라어신약Stephanos,29 τινες γαρ εδοκουν επει το γλωσσοκομον ειχεν ο ιουδας οτι λεγει αυτω ο ιησους αγορασον ων χρειαν εχομεν εις την εορτην η τοις πτωχοις ινα τι δω

라틴어Vulgate,29 quidam enim putabant quia loculos habebat Iudas quia dicit ei Iesus eme ea quae opus sunt nobis ad diem festum aut egenis ut aliquid daret

히브리어Modern,29 כי יש אשר חשבו כי אמר אליו ישוע קנה לנו צרכי החג או לתת לאביונים יען אשר כיס הכסף תחת יד יהודה׃

라본 운 토 프소미온 에케이노스 엨셀덴 유뒤스 엔 데 뉰스

개역개정,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새번역,30 유다는 그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우리말성경,30 유다는 빵 조각을 받은 후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영어NIV,30 As soon as Judas had taken the bread, he went out. And it was night.

영어NASB,30 So after receiving the morsel he went out immediately; and it was night.

영어MSG,30 Judas, with the piece of bread, left. It was night.

영어NRSV,30 So, after receiving the piece of bread, he immediately went out. And it was night.

헬라어신약Stephanos,30 λαβων ουν το ψωμιον εκεινος ευθεως εξηλθεν ην δε νυξ

라틴어Vulgate,30 cum ergo accepisset ille buccellam exivit continuo erat autem nox

히브리어Modern,30 והוא בקחתו את פת הלחם מהר לצאת החוצה ויהי לילה׃

성 경: [요13:30]

󰃨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유다는 주님을 팔 자로 지적된 때에, 회기하지 않고 그냥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하려고 그 좌석에서 떠나 나갔다. “때가 밤이러라”고 한 것은, 영적 의미도 가진다. 곧, 회개하지 않는 그의 마음도 밤과 같이 캄캄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의 앞길도 영원히 캄캄할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호테 운 엨셀덴 레게이 예수스 뉜 에돜사스데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카이 호 데오스 에돜사스데 엔 아우토

개역개정,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새번역,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우리말성경,31 유다가 나간 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게 됐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인해 영광을 받게 되셨다.

가톨릭성경,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영어NIV,31 When he was gone,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영어NASB,31 Therefore when he had gone out,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영어MSG,31 When he had left, Jesus said, “Now the Son of Man is seen for who he is, and God seen for who he is in him. The moment God is seen in him,

영어NRSV,31 When he had gone out, Jesus said, “Now the Son of Man has been glorified, and God has been glorified i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1 οτε εξηλθεν λεγει ο ιησους νυν εδοξασθη 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και ο θεος εδοξασθη εν αυτω

라틴어Vulgate,31 cum ergo exisset dicit Iesus nunc clarificatus est Filius hominis et Deus clarificatus est in eo

히브리어Modern,31 הוא יצא וישוע אמר עתה נתפאר בן האדם והאלהים נתפאר בו׃

성 경: [요13:31]

󰃨 지금 인자가 영광을얻었고 여기서 “인자”란 말(* )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그의 부활 승천을 의미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가(유다가)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는 것을 보아서,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게 한 사건이다. 그 뿐 아니라, 다음 절에, “영광을 주시리니”(* )라고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을 보아서도, 이 귀절의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보셨다.

󰃨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인자를 인하여”란 말은 “인자 안에서”란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

에이 호 데오스 에돜사스데 엔 아우토 카이 호 데오스 돜사세이 아우톤 엔 아우토 카이 유뒤스 돜사세이 아우톤

개역개정,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새번역,32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32 하나님께서 인자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가톨릭성경,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영어NIV,32 If God is glorified in him, God will glorify the Son in himself, and will glorify him at once.

영어NASB,32 if God is glorified in Him, God wi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and will glorify Him immediately.

영어MSG,32 God’s glory will be on display. In glorifying him, he himself is glorified–glory all around!

영어NRSV,32 If God has been glorified in him, God wi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and will glorify him at once.

헬라어신약Stephanos,32 ει ο θεος εδοξασθη εν αυτω και ο θεος δοξασει αυτον εν εαυτω και ευθυς δοξασει αυτον

라틴어Vulgate,32 si Deus clarificatus est in eo et Deus clarificabit eum in semet ipso et continuo clarificabit eum

히브리어Modern,32 אם האלהים נתפאר בו גם האלהים הוא יפארהו בעצמו ובמהרה יפארהו׃

성 경: [요13:32]

󰃨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 여기 “자기로 인하여”란 말(* )은, 하나님 계신 곳을 가리킨다. 17:5에서는, 이 뜻이 “아버지와 함께”(* )란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 층천케 하셔서 자기의 계신 곳에 함께 계시도록 하심을 가리킨다(6:62, 17:5, 20:17; 빌 2:9-11).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곳에 가시게 되므로 그 제자들과는 당분간 나누이게 된다. 다음의 33절 말씀이 그 뜻이다.

테크니아 에티 미크론 멛 휘몬 에이미 제테세테 메 카이 카도스 에이폰 토이스 유다이오이스 호티 호푸 에고 휘파고 휘메이스 우 뒤나스데 엘데인 카이 휘민 레고 아르티

개역개정,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번역,33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우리말성경,33 자녀들아, 이제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전에 유대 사람들에게 말한 대로 너희에게도 말하는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가톨릭성경,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영어NIV,33 “My children, I will be with you only a little longer. You will look for me, and just as I told the Jews, so I tell you now: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영어NASB,33 “Little children, I am with you a little while longer. You will seek Me; and as I said to the Jews, now I also say to you,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영어MSG,33 “Children, I am with you for only a short time longer. You are going to look high and low for me. But just as I told the Jews, I’m telling you: ‘Where I go, you are not able to come.’

영어NRSV,33 Little children, I am with you only a little longer. You will look for me; and as I said to the Jews so now I say to you,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33 τεκνια ετι μικρον μεθ υμων ειμι ζητησετε με και καθως ειπον τοις ιουδαιοις οτι οπου υπαγω εγω υμεις ου δυνασθε ελθειν και υμιν λεγω αρτι

라틴어Vulgate,33 filioli adhuc modicum vobiscum sum quaeretis me et sicut dixi Iudaeis quo ego vado vos non potestis venire et vobis dico modo

히브리어Modern,33 בני עוד מעט מזער אהיה עמכם אתם תבקשוני וכאשר אמרתי אל היהודים כי אל אשר אני הולך לא תוכלו לבוא שמה כן אליכם אמר אני עתה׃

성 경: [요13:33]

󰃨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이 말씀이 윗절(32 절)과 무슨 연락을 가지는가? 그 연락은 이렇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신 결과(32절 하반)로 그는 아버지의 계신 곳으로 가시게 된다. 그의 제자들은 당분간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6절 참조.

엔톨렌 카이넨 디도미 휘민 히나 아가파테 알렐루스 카도스 에가페사 휘마스 히나 카이 휘메이스 아가파테 알렐루스

개역개정,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번역,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말성경,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가톨릭성경,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영어NIV,34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영어NASB,34 “A new commandment I give to you, that you love one another, even as I have loved you, that you also love one another.

영어MSG,34 “Let me give you a new command: Love one another. In the same way I loved you, you love one another.

영어NRSV,34 I give you a new commandment, that you love one another. Just as I have loved you, you also should love one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34 εντολην καινην διδωμι υμιν ινα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καθως ηγαπησα υμας ινα και υμεις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라틴어Vulgate,34 mandatum novum do vobis ut diligatis invicem sicut dilexi vos ut et vos diligatis invicem

히브리어Modern,34 מצוה חדשה אני נתן לכם כי תאהבו איש את אחיו כאשר אהבתי אתכם כן גם אתם איש את אחיו תאהבון׃

성 경: [요13:34]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여기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의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종말관적 동기.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수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누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유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임. 요 15: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임. 자식을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 시작해야 된다.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임.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주어야 된다.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닭.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3).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으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집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계된 벌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새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그 날자가 변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제 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엔 투토 그노손타이 판테스 호티 에모이 마데타이 에스테 에안 아가펜 에케테 엔 알렐로이스

개역개정,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새번역,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말성경,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영어NIV,35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영어NASB,35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have love for one another.”

영어MSG,35 This is how everyone will recognize that you are my disciples–when they see the love you have for each other.”

영어NRSV,35 By this everyone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have love for one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35 εν τουτω γνωσονται παντες οτι εμοι μαθηται εστε εαν αγαπην εχητε εν αλληλοις

라틴어Vulgate,35 in hoc cognoscent omnes quia mei discipuli estis si dilectionem habueritis ad invicem

히브리어Modern,35 בזאת ידעו כלם כי תלמידי אתם בהיות אהבה ביניכם׃

성 경: [요13:35]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이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를 실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다. 이것은, (1) 예수님의 제자된 표가 사랑이라는 말과 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레게이 아우토 시몬 페트로스 퀴리에 푸 휘파게이스 아페크리데 아우토 예수스 호푸 휘파고 우 뒤나사이 모이 뉜 아콜루데사이 아콜루데세이스 데 휘스테론

개역개정,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새번역,36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성경,36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으로 네가 지금은 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오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영어NIV,36 Simon Peter asked him, “Lord, where are you going?” Jesus replied, “Where I am going, you cannot follow now, but you will follow later.”

영어NASB,36 Simon Peter said to Him, “Lord, where are You going?” Jesus answered, ” Where I go, you cannot follow Me now; but you will follow later.”

영어MSG,36 Simon Peter asked, “Master, just where are you going?” Jesus answered, “You can’t now follow me where I’m going. You will follow later.”

영어NRSV,36 Simon Peter said to him, “Lord, where are you going?” Jesus answered, “Where I am going, you cannot follow me now; but you will follow afterward.”

헬라어신약Stephanos,36 λεγει αυτω σιμων πετρος κυριε που υπαγεις απεκριθη αυτω ο ιησους οπου υπαγω ου δυνασαι μοι νυν ακολουθησαι υστερον δε ακολουθησεις μοι

라틴어Vulgate,36 dicit ei Simon Petrus Domine quo vadis respondit Iesus quo ego vado non potes me modo sequi sequeris autem postea

히브리어Modern,36 ויאמר אליו פטרוס אדני אנה תלך ויען אתו ישוע אל אשר אני הולך שמה לא תוכל עתה ללכת אחרי אך אחרי כן תלך אחרי׃

성 경: [요13:36-38]

󰃨 이 부분의 말씀은, 베드로의 결심과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신다”는 것(33 절), 그가 죽어서 하나님 계신 하늘 나라에 가실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오해하고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였다(36 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것은, 진리대로 움직인 신앙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의 유적인 용기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적인 용기를 꺾어 겸손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으니,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38 절). 그가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육적 용기는 도리어 주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레게이 아우토 호 페트로스 퀴리에 디아 티 우 뒤나마이 소이 아콜루데사이 아르티 텐 프쉬켄 무 휘페르 수 데소

개역개정,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새번역,37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우리말성경,37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째서 제가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바치겠습니다.”

가톨릭성경,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영어NIV,37 Peter asked, “Lord, why can’t I follow you now? I will lay down my life for you.”

영어NASB,37 Peter said to Him, “Lord, why can I not follow You right now? I will lay down my life for You.”

영어MSG,37 “Master,” said Peter, “why can’t I follow now? I’ll lay down my life for you!”

영어NRSV,37 Peter said to him, “Lord, why can I not follow you now? I will lay down my life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37 λεγει αυτω ο πετρος κυριε διατι ου δυναμαι σοι ακολουθησαι αρτι την ψυχην μου υπερ σου θησω

라틴어Vulgate,37 dicit ei Petrus quare non possum sequi te modo animam meam pro te ponam

히브리어Modern,37 ויאמר אליו פטרוס מדוע לא אוכל עתה ללכת אחריך הן נפשי בעד נפשך אתן׃

아포크리네타이 예수스 텐 프쉬켄 수 휘페르 에무 데세이스 아멘 아멘 레고 소이 우 메 알렠토르 포네세 헤오스 후 아르네세 메 트리스

개역개정,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새번역,3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우리말성경,38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위해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가톨릭성경,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영어NIV,38 Then Jesus answered, “Will you really lay down your life for me? I tell you the truth, before the rooster crows, you will disown me three times!

영어NASB,38 Jesus answered, “Will you lay down your life for Me? Truly, truly, I say to you, a rooster will not crow until you deny Me three times.

영어MSG,38 “Really? You’ll lay down your life for me? The truth is that before the rooster crows, you’ll deny me three times.”

영어NRSV,38 Jesus answered, “Will you lay down your life for me? Very truly, I tell you, before the cock crows, you will have denied me three times.

헬라어신약Stephanos,38 απεκριθη αυτω ο ιησους την ψυχην σου υπερ εμου θησεις αμην αμην λεγω σοι ου μη αλεκτωρ φωνησει εως ου απαρνηση με τρις

라틴어Vulgate,38 respondit Iesus animam tuam pro me ponis amen amen dico tibi non cantabit gallus donec me ter neges

히브리어Modern,38 ויען אתו ישוע הכי תתן נפשך בעד נפשי אמן אמן אני אמר לך בטרם יקרא התרנגל תכחש בי שלש פעמי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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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은 후반부를 여는 장이다. 요한복음은 13장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데, 전반부를 ‘표적의 책’이라고 하며, 후반부를 ‘영광의 책’이라고 부른다. 후반부의 핵심은 가장 위대한 표적인 십자가를 통한 계시인데, 이는 전반부에 기록된 보통의 표적을 보고 반응한 제자들을 확실히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은 고별설교를 통해서도 제자들을 양육한다. 제자 양육은 후반부에 흐르는 예수님의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후반부를 제자들을 위한 계시라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3장은 후반부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유월절기이며, 영적으로는 이제 그만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제자들과의 작별을 위한 고별 만찬을 하셨는데, 이 만찬동안 제자들의 발을 씻고(4~20절),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며(21~30절), 사랑에 대해 가르치고(31~35절), 베드로가 부인(否認)할 것을 예언하셨다(36~38절).

13장의 첫 절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마지막 시간을 “끝까지의 사랑”1이라고 규정함으로 13장의 모든 내용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끝까지의 사랑”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또한 “끝까지의 사랑”은 14장에서 시작되어 17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주제이기도 하며, 18장부터 계속되는 수난과 부활, 그리고 제자들의 회복 이야기의 주제이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심으로 13장 말미에서 예고된 실패를 경험한 그를 회복하신다.

요한복음 13장은 ‘사랑 이야기’와 ‘실패 이야기’가 짝을 이루며, 반복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족식을 통한 예수님의 겸손한 사랑 이야기(4~20절)는 유다의 배신예고(21~30절)와 짝을 이루며, 영광의 때가 올 것과 사랑에 대한 계명(31~35절)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예고의 첨가로 긴장을 더한다(36~38절). 사랑 이야기들을 뒤따르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과 부인 이야기는 예수님 사랑의 강도를 더욱 진하게 보여준다.2

세족을 통해 선생이 제자를 섬기는 겸손한 사랑을 친히 보여주셨지만,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자기의 선생이신 예수님을 판다.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이 이룰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마땅히 서로 사랑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셨지만, 가장 앞섰다고 생각되던 베드로가 실패할 것도 예고하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도 사랑하셨다. 유다의 배신 이야기와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는 결국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 이야기 속으로 용해되고 있다.

요한복음의 때(13:1~3)

요한복음 13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유명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때가 유월절 직전이었는데, 요한복음은 이 때를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라고 한다. 요한복음 후반부를 ‘영광의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아버지께로 의연하게 돌아가시는 것(return)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신 것과도 연결된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오시기로 예언된 하나님이 아들이 정한 때에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설명하지만, 요한복음은 하늘에 처음부터 계시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것이며,3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수난’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명백히 드러내는 영광의 과정이다(요 13:31~32).

1절의 “때”는 공관복음의 “때”와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의 때는 구약에 예언된 구속이 도래한 것을 의미하고, 이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가리키는데, 요한복음의 때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때는 고난의 때가 아니라 영광의 순간이다.4 요한복음 후반부 영광의 책은 숙연하기보다는 풍요롭게 시작된다.5

유월절 만찬인가 최후의 만찬인가

본문은 유월절기에 관련된 저녁식사 시간에 생긴 일이다. 학자들은 이 만찬을 공관복음의 유월절 만찬과 같은 것으로 보지만, 여기에는 풀어야 하는 어려운 숙제가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사형 집행을 모두 마치고 유월절 만찬을 먹었다(요 18:28). 유월절 만찬 시간 전에 모든 처형이 끝난 것이다. 이런 불일치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지만, 모두 약점을 가지고 있어 어느 견해가 옳은 지 확정하기는 힘들다.

첫째 견해는 공식적인 유월절 만찬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미 식사를 했고, 이 식사는 유월절 만찬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요한복음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맞고, 공관복음의 기록에는 약간의 하자가 있다고 한다.6

유월절 만찬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하루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미 식사를 했고 그날 밤에 체포되어 다음 날 낮, 곧 유월절 양을 잡는 그 시간에 운명하셨다고 이해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양의 죽음과 단단히 연관시키지만 문제는 성전에서 공식적으로 양을 성전에서 하루 전에 잡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님이 드신 만찬은 최후의 만찬일 뿐, 유월절 만찬이 될 수 없다. 또한 공관 복음이 유월절 만찬을 드셨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공관복음 저자의 부주의로 인한 작은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7

둘째 견해는 공관복음의 기록이 역사적으로 맞고, 또한 요한복음에도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공관복음에서 제시하듯 유월절 만찬을 정식으로 드신 후 체포되어 그 날 밤에 심문 받고 유월절 낮에 처형되셨다는 것이다.8 “이날이 유월절 예비일”(요 19:14)이라는 표현은 유월절기의 한 주간 중에 맞이하는 안식일의 예비일이지, 문자 그대로 유월절 당일의 예비일이 아니라는 것이다.9

실제로 구약에서 ‘예비일’은 안식일의 예배일을 뜻하지, 절기의 예비일을 뜻하는 예가 없기 때문에 이 주장에는 약간의 설득력이 있다. 이 견해를 요약하면, 예수님이 처형된 날이 바로 유월절이며, 동시에 안식을 예비하는 금요일 낮이었다. 예수님은 공관복음이 제시하는 대로 공식적으로 유월절 만찬을 드셨지만, 유월절기 중에 맞이하는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에 의해 서둘러 안식일의 예비일, 곧 금요일/유월절날에 처형된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 날 예수님을 체포하였고, 제사장들이 유월절 날 한밤중부터 모여 꼭두새벽까지 예수님을 심문하고, 빌라도가 명절인 유월절 날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을 심판했다는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요한복음 18장 28절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명절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안식일과 무교절기를 더럽히지 않으려 했다면, 유월절도 마찬가지였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은 음력을 사용하던 당시 유대 지도들과는 달리 양력을 사용하셔서 유월절을 지키셨다는 것이다. 그해 양력에는 유월절이 화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양력을 따라 유월절 식사를 하신 후 처형을 당하셨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음력으로는 아직 유월절 식사의 때가 시작되지 않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처형이 음력에 따라 지켜지는 공식적인 유월절의 식사 시간 전에 끝났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10 유대인 문서인 쥬빌리서와 쿰란 문서에는 당시의 권력자를 따르지 않는 일부 보수 유대인들이 양력을 사용했다는 근거가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 견해 역시 예수님께서 드신 만찬은 공식적인 유월절 만찬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유월절 만찬이 아니라, 최후의 만찬인 셈이다. 예수님의 만찬에 사용한 양은 공식적으로 성전에서 잡은 양일 수 없다. 만약 예수님께서 양력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심으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 권세자들의 유월절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최후 만찬에 사용한 양은 성전에서 잡지 않은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비록 성전에서 잡은 양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마지막 식사는 분명히 유월절 만찬이었다. 아마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줄곧 양력을 사용하여 유월절을 지켜왔을 것이다.

세족식을 통해 가르쳐 주신 사랑의 교훈

(13:4~20)

세족식의 의미는 언뜻 보아도 겸손한 행위의 중요성을 가르친다(14~17절). 이런 겸손의 행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까지의 사랑’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세족식이 주는 교훈이 겸손한 행위를 가르치기 위한 것 뿐 이라면, 세족식 중에 있었던 베드로와의 대화(6~11절)는 무의미 한 것이다. 세족에는 단순한 ‘겸손’ 이상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세례라고 본다.11

그러나 이를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문맥에서 확실히 말하는 세족의 목적은 이를 통해 예수님과 상관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8절), 한번 씻은 자는 다시 씻을 필요가 없다. 세족은 반복이 필요 없는 단회로 충분한 은혜의 사건을 상징한다(10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세족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본다.12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예수를 믿는 자들과 예수님은 상관있게 되며, 이는 단회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와 상관이 없다’의 원어를 직역하면, ‘나와 함께 부분을 공유하지 못 한다’인데, 이 표현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와 ‘상관’있게 하려는 애타는 마음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는 세족식은 단순히 겸손한 행동을 통해 감동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음으로 제자들과 ‘상관’있게 하려는 깊은 사랑의 배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관있게 됨으로 늘 그들과 함께 하신다.13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상징적 의미를 정한 때가 올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7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장면을 보라(4절). 유대에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는 것은 ‘일하고 있음’을 상징한다(벧전 1:13). 요한계시록 1장 13절은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가슴에 금띠를 띤’ 모습이 나온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 끊임없이 일하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지, 금띠를 가슴에 띠지 않으셨다. 지상에 있는 동안 모든 제자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주님의 일을 하여야 한다. 그러면 영광 받는 날에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금띠를 띠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보여준 ‘끝까지의 사랑’은 쉼 없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일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랑은 행위인 것이다.14 세족에 담긴 상징적 의미는 베드로의 무지를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8절과 9절은 베드로의 무지를 보이며, 결국 이 무지는 36~38절에서 예수님에 대한 ‘부인(否認)’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 8절에도 이미 가벼운 ‘부인’이 있다(“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 하리이다”). 예수님의 세족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까지 하며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자기 열심이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무지를 낳고 있다.

10절은 해석상 난제를 포함한다. 앞서 가르치신 단회적 효과로서의 세족과 다른 가르침을 포함하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은 곧 발은 계속 씻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사본학적으로 보면 “발 밖에”는 원문에 없을 가능성이 더 많다.15 그렇다면, “이미 목욕한 자는 다시 씻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앞선 가르침과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목욕’과 ‘씻음’은 동의어이며, 반복을 피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만약 “발 밖에”가 원문의 일부라면, 예수님은 세족의 파생적 의미를 하나 더 부여하고 계신 것이 된다. ‘목욕’이 세족, 곧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죄를 씻음 받았어도, ‘발을 계속 씻음으로’ 이후 삶의 여정에서 범하는 죄를 계속 씻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다. 10절에서 ‘발씻음’은 앞에서 의미하는 세족과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16

세족식의 상징적 의미, 곧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제자들의 죄가 근본적으로 씻겼음을 아는 것은 12절 이하에서 계속되는 겸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수님의 가르쳐주신 겸손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제자들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성품이었다. 겸손한 행동의 중요성과 절대성에 대한 바른 지식을 알고 이것을 행하는 것이 참 제자들에게 요구된다. 이것은 31절 이하에서 가르치는 새 계명으로서의 사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다. 제자들의 죄가 근본적으로 씻겼고 예수님과 관계가 맺어졌다면, 그런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겸손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15절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세족이 제자들도 따라서 행할 모본임을 분명히 한다. ‘모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휘포데이그마’인데 신약성경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신약 성경 밖에서 이 단어는 ‘모범적 죽음’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17 이 단어를 근거로 학자들은 요한의 공동체가 세족식을 예배의 한 부분으로 정례화하여 시행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8

17절은 “알고 행하는 자의 복”을 소개한다. 이 복은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복으로 마태복음 5장의 8복과 연관지을 수 있다. 사도행전의 20장 35절에 소개된 ‘주는 자의 복’을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9복이라고 한다면, 이 복은 열 번 째 복이라고 볼 수 있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함을 알고 행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곧 겸손한 섬김이 복이란 뜻이다. 복이 되는 겸손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다. 높은 위치에서도 낮은 자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행위인데, 이것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된다.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이란 사랑이 제자들의 마음에 담겨 여기에서 우러나는 겸손한 행위이기 때문에 복이 된다. 세족식은 단순한 겸손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의 힘에서 비롯되는 겸손한 섬김을 가르쳐 준다. 자기의 잘못을 꾸준히 돌아보지 않을 때 겸손은 나에게서 멀어진다. 겸손한 행위를 통해 계속적으로 자신을 씻을 때, 제자들은 제자답게 된다.

유다의 배반 예고에 담긴 예수님의 사랑(13:21~30)

세족식이 끝난 후 만찬이 시작된다. 그러나 공관복음과는 달리 음식을 축사하시는 장면은 없고 장차 배반할 한 제자에 대한 예고가 중심을 이룬다. 가룟 유다에 대한 긴 기록은 유다의 배신을 예수께서 미리 알고 계셨음을 밝히는 데 있다.19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의연하게 정해진 길을 가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가슴 아파하며, 그에게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보낸다.

2절과 11절은 유다에 대하여 냉소적이다. 그러나 26절(“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은 예수님께서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20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심령이 “민망하였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11장 33절에서도 “민망히 여기셨다”. 이 표현 속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배신감과 연민의 정을 모두 드러내고 계신다.

가룟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대목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이다(23절).21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는 이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이라고 이해한다. 그는 분명히 12제자 중에 하나였고, 베드로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으며, 예수님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익명으로 한 것은 보다 객관적으로 모델이 되는 제자 하나를 소개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품에 있었다. 요한복음에는 ‘품’이란 단어가 한 번 더 나온다. 1장 18절에서 독생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품에 계셨다. 요한복음에서 ‘품’은 아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며, 예수님의 참 뜻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에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것을 연상케한다. 참 제자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22 예수님의 품에 있던 “사랑하는 제자”의 위치를 중심으로 당시 최후의 만찬을 하던 식탁을 재구성해 볼 수 있다.23 로마의 만찬에서 식탁은 말굽형으로 배치되었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13명이 만찬을 먹었기 때문에 헤드 테이블이 중앙에 그리고 그 좌우에 식탁이 각각 있었을 것이다. 좌우 테이블에 각각 5명씩의 제자들이 앉았고, 중앙 테이블에는 세 명이 앉았을 가능성이 크다. 헤드 테이블의 가운데 자리에 주빈인 예수님이 앉으셨고,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았었다. 그래서 그는 쉽게 예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주빈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자리는 주빈의 왼쪽 자리다. 놀랍게도 이 자리에 가룟 유다가 앉아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조각을 찍어 당신의 왼쪽에 있는 유다에게 손을 뻗어 쉽게 그에게 주실 수 있었다. 당시의 식사법은 왼손을 머리에 기대고 비스듬이 누워 오른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베드로의 위치는 중앙 테이블의 오른쪽 테이블 끝이었던 것 같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와 멀리 있었기 때문에 머리짓으로 의사를 전달하였다(24절). 베드로의 위치는 그가 열두 제자 중 가장 늦게 세족을 한 것과 잘 조화를 이룬다.24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의 행동이 둘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한 조각의 떡을 찍어(포도주에 적셔) 주심이다. 둘 다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행동으로 봄이 자연스럽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제공한 포도주에 적신 한 조각의 떡은 예수께서 흘리실 피와 찢기실 살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유다에게도 다른 제자들과 같은 “끝까지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예수님이 주신 “한 조각”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그는 받아들고 나갔다(30절). 30절의 밤은 유다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25 요한복음에서 사탄에 대한 언급은 이곳에만 나온다. 어둠은 이해하지 못한 상태를 상징한다(9:4; 11:10; 3:19).

우리가 스스로 어둠을 택하려 할 때도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피와 살을 제공하신다. 예수님이 주시는 “끝까지의 사랑”은 받아 누려야 한다. 그러나 유다는 이를 받아들고 어둠 속으로 내 달렸다. 배반의 길로!

사랑의 새 계명(13:31~38)

학자들은 고별설교가 13장 31절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잠시 따라올 수 없는 길이 있으며,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야 하는 기간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제자들이 힘써 행할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이런 사랑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신다.

사랑에 관한 계명은 사실 예수님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참고 요일 2:7~8). 요한복음이 제안하는 사랑이 산상설교에서 가르쳐주는 사랑에 비해 저급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26 산상설교에서 보여주는 박애적인 면,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이 요한복음에는 없고, 오히려 믿는 제자들끼리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축소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사랑의 범위가 아니라 사랑의 근원과 본질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사랑이 산상설교의 사랑보다 저급하다고 폄하할 수 없다. 요한복음은 제자의 사랑이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모든 사랑의 모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이다. 제자들의 사랑은 이런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본삼아, 이를 투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들의 사랑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제자들을 바로 사랑하도록 만든다. 사랑은 제자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표지이다.

베드로의 부인(否認) 예고에 담긴 예수님의 사랑(13:36~38)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랑에 대해 무지한 것은 유다만이 아니었다. 베드로도 한가지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다고 큰소리 쳤지만, 막상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에 베드로 또한 약속한 길을 갈 수 있었다(요 21:19).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제자로서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배워야 한다. 이곳에서 예고된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는 요한복음 후반부를 엮어가는 중요한 맥이 된다. 베드로의 실패는 요한복음이 기록한 수난이야기 중에 특별한 위치에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한 가야바의 법정은 거짓 증거자의 발호가 초점이며, 베드로의 부인(否認)은 딸린 스토리 정도지만, 요한복음은 가야바 법정을 기록하면서, 오직 베드로의 실패만을 이야기한다.27

그의 실패는 결국 마지막 장의 디베랴 바닷가에서의 회복(21:15~19)을 통해 반전(反轉)된다.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사랑에로의 초청에 응한 것이다. 베드로의 실패이야기는 “끝까지의 사랑”의 중요한 정점을 이룬다.28

설교를 위한 제안

요한복음 13장 전체를 한 번에 설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 번에 전체를 설교하려면, 세족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같다. 세족의 의미를 예수님의 죽으심, 겸손한 행위, 그리고 새 계명으로서의 사랑으로 발전시키면 되는데, 이렇게 하면 자칫 교리적 설교가 될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끝까지의 사랑”을 소개하면서 요한복음 13장을 폭넓게 강해해도 된다. 구체적 내용으로(1) 겸손한 행위로 나타난 섬김,(2) 유다에 대한 연민,(3) 베드로에 대한 사랑이야기 등으로 채워가면 된다.

요한복음 13장은 여러 주제를 설교할 때, 그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쉬지 않고 선을 행할 것을 권면할 때, 수건을 허리에 두른 예수님의 모습을 인용할 수 있고,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복을 설교하면서 산상수훈에서의 8복, 사도행전 20장 35절과 함께 겸손히 섬기는 자의 복으로 요한복음 13장 17절을 강해하면 적절할 듯 싶다. 또한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의 모습을 설교할 때, ‘예수님의 품’에 있던 제자의 모습은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주(註)

1. NIV 영어번역은 ‘끝까지’를 부사로 보고, 의역하여, ‘full extent’(최대로 늘린)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온전한 자기 드림’(total self donation)을 보여준다. “끝까지”를 시간의 개념으로 보아 죽으시는 순간까지 사랑하셨다고 이해해도 내용에는 별 차이가 없다.

2. 요한복음의 예수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틀 중에 하나가 ‘믿음(belief)’과 ‘불신(unbelief)’인데, 이 둘의 구별은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는가(knowledge/ understanding) 여부로 결정된다. ‘믿음’과 ‘불신’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이해한 대표적인 주석가는 비교적 오래된 Merill C. Tenny(Tenny, Merill C. & Richard N. Longenecker.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John and Acts. vol.9, Grand Rapids: Zondervan, 1981)와 최근에 권위자로 떠오른 Alan Culpepper(The Gospel and Letters of John. Nashville: Abingdon Press, 1998)이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이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일에 대한 지식이 있음을 보여 준다(13:1~3). ‘믿음’은 이런 예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에 근거하며, ‘불신’을 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에 생긴다. 제자로서의 삶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요 13:35; 비교 13:12 “너희가 아느냐?”).

3. 요한복음 전반부에서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반복적으로 말하다가 후반부에 오면서 때가 이름을 선언한다.

4. 비록 사탄이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전지한 분이기 때문에 위협 거리가 되지 못한다.

5. Brown, 주석, 556쪽; R. T. France, “Chronological Aspects of ‘Gospel Harmony’,” VE 16(1986) 50~54; Culpepper, 201쪽.

6. Brown, 주석, 556쪽.

7. Carson, 주석. 457쪽

8. Carson, 주석, 589, 604쪽.

9. A. Jaubert, The Date of the Last Supper(Stein Island, N.Y.:Alba, 1965); E. Ruckstuhl, Chronology of the Last Supper(New York: Desclee, 1965); Bruce, 주석, 279쪽.

10. 고전적인 주장은 터툴리안, 시프리안, 아프라테스, 알렉산드리아의 씨릴의 주장에서 나오며, 최근에는 O. Cullmann이 발전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Brown의 주석 567쪽을 참고하라.

11. Brown, 562쪽; Bruce, 283쪽; Carson, 466쪽.

12. 예수님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한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과 상관있는 영혼이 누리는 축복이다(참고, 눅 23:43).

13. 한규삼, 「요한복음 다시보기」(아가페 출판사, 2002) 148쪽.

14. 본문비평은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낯선 것임으로 상술을 피하기로 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발 밖에”가 원문에 없을 것으로 추정한다(Brown, 566~67; Carson, 464~65).

15. 참고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 요한복음은 제자를 씻는 것으로 말씀과 세족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겸손한 성품/행위임을 밝힌다.

16. 마카비 2서 6:27~28, 31; 마카비 4서 17:22~25; 시락 44:16.

17. Culpepper, 206쪽. 요 13:14~16과 눅 22:47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근거로 요 13:17은 유월절 만찬(혹은 최후의 만찬)에서 말씀하신 눅 22:19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는 투토 포이에이테(눅 22:19)인데 요한복음 13:17의 “이것을 … 행하라”도 “타우타 포이에이테”이다. “타우타”는 “투토”의 복수형이다.

18. 이런 경향은 요한복음 6:70~71에서부터 시작된다.

19. Carson, 주석, 474쪽.

20. 이 표현은 요한복음 후반부에만 나온다(19:26~27; 20:2~9; 21:1, 20~25). 영광의 책은 제자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21. 한규삼, 17~22쪽.

22. 이 시도는 오래전 F. Prat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최근 연구가 그의 제안을 뒷받침해 준다(RSR 15 [1925] 512~22).

23. 베드로가 가장 늦게 세족을 하였다고 주장한 초기의 학자는 오리겐이었다(Brown, 주석, 552쪽).

24. 누가복음 22:53과 연결하여 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요한복음에서 사탄에 대한 언급은 이곳에만 나온다. 어둠은 이해하지 못한 상태를 상징한다(9:4; 11:10; 3:19).

25. J. C. Fent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Clarendon, 1970) 27.

26. 한규삼, 177~80쪽.

27. 한규삼, 217쪽.

요한복음 13장 주석

요한복음 제 13장

====13:1-3

<마가의 다락방>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

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

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

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 이 귀절들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는, 세가지 동기로써 제자들에게 사랑의 일, 곧, 발 씻는 일을 행하셨다. (1) “아버지

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제자들을 떠나

신다는 그의 인성(人性)편의 무거운 느낌에서 행하신 것. (2) “마귀가…유다의 마음

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은 줄 아시고(2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것은 가장 마

음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팔리운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장면이고, 낙심될 일이다. 그런데, 그가 계속하여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심

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는, 가장 검은 미움의 활동이 일어난 곳에 가장 부드러운 사

랑으로 대하셨다. (3)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

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 절), 이 일을 행하셨음. 이

것은, 그가 자기의 영광 받으실 사실을 아셨다는 뜻이다(마 28:18). 그는 저렇게 영광

받으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사람이 천국에서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비결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나타난 그의 겸손이다.

“저녁 먹는 중.” 이것이 유월절 만찬을 가리킨 것일까? 혹은 다른 때의 저녁 식사

를 의미한 것일까?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유월절 하루 전(니산월 13 일 저녁)의 식사

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21-30절의 내용을 보니, 유다가 예수님을 잡

아 줄 자로 지적된 저녁인 것이 드러난다. 그 저녁은 유월절 만찬 저녁이다. 공관 복

음은 그렇게 말한다(마 26:17-25; 막 14:17-21).

=====13: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

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유대인의 풍속에는 보통 식사 전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법인데, 이 때에는 식사

도중에 그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 때에 이 일을 할 종이 없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겉옷”은 저고리를 말함이 아니고 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수건을 허리에 두

르시고”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일할 준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겸손의 극치(極致)이다. 그가 최종의 행동 교

훈으로 식사 도중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의 별세 후에 제

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겸덕을 고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저렇게

계급을 초월하시고 영광의 주님을 사랑의 발 씻는 종으로 삼으셨다.

고데이(F. Godet)는 추측하기를, 이 발 씻는 일이 아마도 제자들의 서로 다툰 사건

(눅 22:24-27)을 동기로 하고 있은 듯하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이것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설교하신 셈이다(12-16). 실행으로 본을 보

이는 설교자는 그 설교로써 사람들의 심령을 아주 점령해 버린다. (2)이것은, 그가 그

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속죄하시는 중보(中保)의 역사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지극히 크

신 사랑의 행동이시다. 그가 피를 흘려서 그의 백성의 죄를 씻으신 일도 지극한 사랑

이면서 역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낸다. 유명한 변증 학자 스킬더(Schilder)는, 주님께

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제자들의 발을 씻

기시기 위하여 물을 휘저으신 주님의 손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그의 못 박히신 손에서 흐르는 피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되지 못함과 같다”라

고 하였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뜻은, 그의 몇

제자들에게만 그의 친절과 겸손의 모본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위로

써 온 세계를 찾으시는 그의 속죄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이것은 베

드로가 너무 황송한 중에 한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은, 그가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

여 고기를 많이 잡은 때에도 하였으니, 그 때에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였다

(눅 5:8). 베드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렇게 인간적으로만 취급하면서 그것을

황송하게 여겨 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수난하

실 일에 대하여 들었을 때에도 역시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였다(마 16:22). 저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업 관계의 행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해석

으로 잘못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겸손과 희생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황송(惶

悚)하게 생각함은 좋으나 그 행하심이 구원의 행위인 것인 만큼, 그것을 감격하여 받

아야 된다. 그것을 받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것은, 병자가 의사의 진료를 받지 않겠다

는 것과 같은 일이다.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 이것은, 그 현재에 베드로가 죄로 인하여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나,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은, 그의 속

죄의 고난으로 신자들의 죄 씻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1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속죄

의 죽음을 본 뒤에야 그의 발 씻기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13:8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베드로가 발 씻기시는 예

수님의 봉사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 의미로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의 구원 은

총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받으실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베드로

는 여기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또 실수함을 면치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기심이, 구속의 사랑에 대하여는 상징하는 정도 뿐

인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이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일의 실제

인 줄 오해하고 욕심을 부렸다.

=====13:10

이미 목욕하는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예수님의

제자들은, 속죄를 받은 자들이라고 간주된 때 벌써 온 몸이 깨끗해진 셈이다(15:3).

그러나 그들도 매일 세상과 접촉하여 허물과 죄로 더러워진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

므로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하여 사죄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

것은 발 씻는 일로 비유된 것이다.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히 겸손의 덕을 나타

내신 것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을 속죄하여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파는 자는 천하에 가장 더러운 죄를 범하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만민을 구속

하여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시지만, 그를 파는 유다는 깨끗지 못한 자들 중 하나이다.

=====13:12-15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겸손한 봉사의 표본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일로써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위 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겸손히 봉

사하신 고상한 정신이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대하여 겸손하기는 쉬우나, 윗

사람으로 아랫 사람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에 기준하여, 톨레도(Toledo)회

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웠다(694 A.D.).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

이 그것을 폐지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부탁하신 것은, 다만

제자들더러 서로 겸손하게 봉사하라는 것 뿐이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진하여 형제를 겸손히 봉사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크게 간주될 것을 가리킨다(마 18:4).

=====13:18

이 귀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의 상징적 의미, 곧, 구속에

관하여 말한다. 예수님께서 구속 사업을 이루시지만, 그 은혜에 참여할 자들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다 가리

켜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곧, 그의 제자들이 모두 다 “복이 있을”것(17절)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18절).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이

것은, 매우 친근하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큰 손해를 본 다윗의 경험을 들어 말씀하

심이다(시 41:9).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다윗의 당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일

의 예표였던 것이다.

=====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를 때에 내가 그 인줄 너

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 예언이란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

어진다. 그것이 성취될 때에, (1) 그 예언을 주신 이의 진실성과 권위를 믿게 되며,

(2) 그 성취된 사건 자체를 믿게 되며, (3) 그 예언 성취가 지향한 장래 행복의 활실

성도 믿어진다.

“내가 그 인줄”(* )이란 말은, “나 곧 나만 좆재자요 보내심을

받은 자요 메시야라”는 뜻이다(Grosheide).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

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이 말씀의 목적

한 바는 이렇다. 곧, 비록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보낸자”. 곧,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영접하

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그 만큼 사도들의 권위는 높은 것이다.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

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그의 심령에

민망하시게 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생각되는 것은,

(1) 그의 제자가 그를 팔아 먹는 일이 너무도 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과, (2) 그런

일에 대하여 이제 공적으로 지적하여 말하기가 역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

나 그는, 이제 이 일을 지적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될 단계였다. 그것은 너무도 확

실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엄격한 법정 선언과 같이 “증거하여” 말씀하셨다. 여기 “증

거”란 말이 법정 용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13: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 이것은, 제자들이(유

다를 제외하고는)강퍅하지 않은 증표이다.

=====13:23

“그의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일 것이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식사할 때 취하는 자세를 말함이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

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그 때 풍속은, 사람들이 식탁에 앉지

않고 왼 팔에 의지하여 옆으로 누워서 먹었다고 한다(Westcott).

=====13:24,25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

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 윗절에 말한바, “그의 사랑

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을 가리킨 것인데, 이제 베드로가 그더러 주님을 팔 자가 누구

인지 알려 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는 측근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이것은, 유대인들이 음식 먹을 때에 원형으로

팔꿈치를 의지해서 서로끼리 가슴에 기대다시피 연접하여 누워서 먹는 풍속이 있었음

을 말한다.

=====13:26,27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유다를 주시니 – 그 당시에 연회 주인이 떡 조각을 찍어서

손님에게 주는 것은 친절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이 행동은 가룟 유

다의 회개를 독촉하신 사랑이다.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사단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간 이유는, 그가 끝까지

회기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눅 22:3-6; 요 13:2 참조

=====13:28,29

이 부분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유다의 행할 악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유다는 주님을 팔 자로 지적된 때에,

회기하지 않고 그냥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하려고 그 좌석에서 떠나 나갔다. “때가 밤이

러라”고 한 것은, 영적 의미도 가진다. 곧, 회개하지 않는 그의 마음도 밤과 같이 캄

캄하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의 앞길도 영원히 캄캄할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13:31

지금 인자가 영광을얻었고 여기서 “인자”란 말(*

)은, 메시야를 가리킨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그의 부활 승천을 의미한다는 학

자들이 있다. 그러나 저가(유다가)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는 것

을 보아서,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킨다. 유다가 나간 것은, 예수님에게 고난

이 닥칠 것을 알게 한 사건이다. 그 뿐 아니라, 다음 절에, “영광을 주시리니”(*

)라고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을 보

아서도, 이 귀절의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보셨다.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 “인자를 인하여”란 말은 “인자 안에

서”란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

=====13:32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 여기 “자기로 인하여”란 말(*

)은, 하나님 계신 곳을 가리킨다. 17:5에서는, 이 뜻이 “아버지와 함께”(*

)란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면, 이 귀절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 층천케

하셔서 자기의 계신 곳에 함께 계시도록 하심을 가리킨다(6:62, 17:5, 20:17; 빌

2:9-11).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곳에 가시게 되므로 그 제자들과는 당분간

나누이게 된다. 다음의 33절 말씀이 그 뜻이다.

=====13:33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

도 이르노라 – 이 말씀이 윗절(32 절)과 무슨 연락을 가지는가? 그 연락은 이렇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신 결과(32절 하반)로 그는 아버지의

계신 곳으로 가시게 된다. 그의 제자들은 당분간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6절 참조.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

로 사랑하라 – 여기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

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의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종말관적

동기.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

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숯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

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

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

누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

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

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

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

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

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유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

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

임. 요 15: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고 하였

다.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임. 자식을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

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 시작해야 된다.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임.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

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주어야 된

다.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닥.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3).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

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

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

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감

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

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

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계

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

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

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으 것이든

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

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

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집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

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계된

벌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

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새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

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그 날자가 변한 것

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제 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

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이

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

를 실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다. 이것은, (1) 예수님의 제자된

표가 사랑이라는 말과 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

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13:36-38

이 부분의 말씀은, 베드로의 결심과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신다”는 것(33 절), 그가 죽어서 하나님 계신 하늘 나라에 가실 것을 가리킨 것이

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오해하고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

였다(36 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

하였다. 그것은, 진리대로 움직인 신앙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의 유적인 용기였다. 예

수님은, 베드로의 육적인 용기를 꺾어 겸손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으

니,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38 절). 그가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육적 용기는 도리어 주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메튜 헨리 주석, 요한복음 13장

13: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한복음 13:1-17)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에 따른 교훈을 하신 것은 그가 배신을 당한 바로 그 저녁에 일어난 일이며, 또 유월절 식사와 성만찬 규례를 제정하신 그 자리에서였다고 보는 견해에는 모든 주석가들이 일치하고 있으나, 그 일이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는지, 아니면 후에 있었는지 또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 복음서의 기록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생략해 버린 부분을 기록에 넣고, 다른 복음에 기록된 부분들과 기록해 넣기에 어려움이 있는 부분들을 생략해 버리는 일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기록해 나가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기록된 대로라면 30절에서 유다가 밖으로 나간 것은 뜰에서 그리스도를 체포하기 위하여 이미 약속된 사람들을 부르러 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트푸트(Lihgtfoot)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분명한 의견을 제시한다. 즉 본장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이 14잘 끝까지 계속되고는 있으나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근거해 볼 때 유월절 저녁이 아니고 마태복음 26장 2-6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월절 이틀 전에 베다니의 만찬자리에서 마리아가 그녀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었던 저녁이었을 것이라 한다. 만일 이 저녁이 아니라면 또 다른 유월절 이전의 만찬 자리에서 되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자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처럼 많은 사람이 있었던 자리가 아니고 그의 제자들만 있어서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를 읽게 되는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써 결코 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혹은 겸손의 기적).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자, 주님은 그녀의 기름 부음을 허락하신 것이 자신이 존귀케 되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기름 부음과 조화를 이루는 겸손한 일을 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일을 하셨을까? 만일 제자들의 발이 더러웠다면 그들 자신이 발을 씻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공연히 이상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 거기엔 언제나 충분한 이유가 담겨져 있는 법이다. 이 일도 장난거리로 웃어대면서 실시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엄숙하고 심각한 분위기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네 가지 이유를 살필 수가 있다. 1. 주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1, 2절).

2. 아랫 사람을 섬기는 자발적인 겸손의 예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3-5절).

3. 베드로와의 말씀 중에 나타내신 대로 영적으로 청결케 됨의 중요성을 drkfmcl시기 위해서(6-11절).

4. 제자들에게 한 본보기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12-17절). 주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서(1, 2절).아랫 사람을 섬기는 자발적인 겸손의 예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3-5절).베드로와의 말씀 중에 나타내신 대로 영적으로 청결케 됨의 중요성을 drkfmcl시기 위해서(6-11절).제자들에게 한 본보기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12-17절). 이러한 4가지 이유에 대한 설명이 이 부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의 내용이 되겠다. 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신 대로 그의 제자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증거로써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1, 2절). 1. 주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실이다(1절).

(1)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이 열두 제자는 가장 가까운 그의 추종자들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요, 가족이요, 진실한 마음의 친구들이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그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오직 이들만을 그의 것으로 삼으셨다. 주님은 다른 세상에 그의 것들을 가지고 계셨으나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사람들을 돌보시기 위하여 그것들을 잠시 떠나 오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불러 내셔서 친구로 삼으시고 한 가족처럼 대화를 나누시면서 그들의 위로자와 존경의 대상이 되셨다. 주님은 그들을 자유로이 행동하시도록 해 주셨고 그들의 결점들을 보시고도 너그럽게 용납하셨다. 그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에게 사랑과 친절 베푸시기를 그만두시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실이다(1절).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이 열두 제자는 가장 가까운 그의 추종자들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요, 가족이요, 진실한 마음의 친구들이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그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오직 이들만을 그의 것으로 삼으셨다. 주님은 다른 세상에 그의 것들을 가지고 계셨으나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사람들을 돌보시기 위하여 그것들을 잠시 떠나 오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불러 내셔서 친구로 삼으시고 한 가족처럼 대화를 나누시면서 그들의 위로자와 존경의 대상이 되셨다. 주님은 그들을 자유로이 행동하시도록 해 주셨고 그들의 결점들을 보시고도 너그럽게 용납하셨다. 그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도 그들에게 사랑과 친절 베푸시기를 그만두시지 않으셨다. 주님의 주위엔 그들보다 좀더 나은 자질을 지니고 있으면서 주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밀어내시지 않았고, 더 좋은 새 제자들을 더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한 어부들을 끝까지 제자로 삼고 그들을 지키셨다. 제자들은 연약하고 지식이 모자라며 은총을 받지 못한 자들이었고 우둔하며 기억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주님은 때때로 그들을 꾸짖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심에는 끝이 없었다.

(2) 이들 열두 족장들이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들이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이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소유로 삼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 가지고 계셨다. “자기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이들 열두 족장들이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들이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이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소유로 삼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 가지고 계셨다. “자기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첫째,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로서 그가 세상 가운데서 직접 찾아 내어 지극히 사랑하셨고 그 자신의 사명을 위하여 성별시켜 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특별한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람”(his own)이란 말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질 때에는 타 이디아(ta i;dia)라고 기록이 되었는데, 이는 그의 것에 해당하는 말로써 “그의 소” 등과 같이 그의 것이지만 주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 소유권이 바뀔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tou.j ivdiuj – 즉 그의 사람들(his own persons)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한 사람의 아내나 자녀 등과 같이 영원히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는 말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우했다. 그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함으로 선의의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그들을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그들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써 만족스러운 사랑을 주었다. 비록 그들이 이 어둡고 부패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제 주님은 그가 이럴 수도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 가시려고 하시면서도 이 땅에 남아 있을 그의 사람들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계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아픈 어린 아이에게 더욱 마음을 두는 것과 같은 주의 돌보심이 필요했다.

[3] 주님은 그의 사람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은 무궁한 사랑이며(렘 31:3) 시작에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무엇도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주님은 그의 사람들을 ei`j tevloj – 즉 끝까지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과의 모든 관계에서 완전하시며 결국에는 그들을 완전한 사랑의 세계로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2. 회개한 한 여인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닦음으로써 자기사랑을 나타낸 것처럼(눅 7:38) 그리스도는 제자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그들의 발을 씻김으로 나타내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그의 사랑이 변함없고 또 겸손한 사랑임을 보여 주려고 하셨고, 또 “충성스러운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주인이 나아와 수종하리라”(눅 12:37)고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며, 주인이 종을 수종들므로써 그들에게 말할 수 없니 크게 놀라운 영광을 맛보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은 여인이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을 보고 인색한 마음으로 불평을 터뜨림으로써 그들의 부족한 신앙을 드러내었으나(마 2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의 증거를 주신 것이다. 우리들의 연약함이 주님의 친절을 무시하고 말살시킨다.

3. 주님께서 유월절 이틀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교훈을 보여 주신 것도 두 가지 이유에서 연유된 것이다.

(1) 첫째는 그가 떠나온 아버지께로 돌아갈 날을 오랫 동안 기다리던 중에 그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1] 주님이 떠나 가심으로써 생겨지는 변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변화는 주님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승천에서 완성에 이른다. 주님께서 떠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떠나게 될 터인데 그 때에 아버지께로 가서 먼저 가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사납고 악하고 불충실하며 고통과 유혹의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업적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2] 이 변화의 때가 지금 그리스도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시간을 때로는 그의 원수들이 승리하는 시간(눅 22:53)이라고 했고, 때로는 주님이 승리하시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주님께서 받으실 고통의 때는 정해졌고, 그 고통의 깊이는 한때에 불과했다.

[3] “예수께서 그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지니신 통찰력을 본다. 주님은 그의 공생애의 처음부터 그때가 올 것과 언제쯤이 될 것까지도 아셨고, 그리고 지금 그때가 온 것을 알아 차리셨다. 우리는 우리의 때가 언제 오게 될는지를 모르므로 마땅히 해야 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예고를 통하여 우리의 때가 온 것을 안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모든 준비를 갖추기에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벧후 3:14). 주님께서 그의 이별에 대한 재빠른 통찰력 속에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주께서 장례되기에 앞서 그의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성결케 되신 것처럼, 50일 후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별케 될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행동이었다(레 8:6). 우리도 우리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뒤에 남아 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도움될 일을 해 주어야 한다.

(2) 둘째는 이때에 사탄이 유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유혹했기 때문이다(2절). 이 삽입된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1] 유다가 배신하게 된 근본을 살펴 보면 사탄의 형상을 나타내는 본래적인 악이 작용한 것이다. 사탄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여 그에게 암시를 주며, 또 그 암시가 인간의 본성과 어떻게 뒤섞여 작용을 하는지를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는 아주 강력한 죄의 요소가 있고 이 죄의 요소에 세상과 육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이 접촉될 때에 바로 사탄이 죄악의 알을 낳고 부화시킬 수 있는 둥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있는 그의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우했다. 그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함으로 선의의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그들을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그들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써 만족스러운 사랑을 주었다. 비록 그들이 이 어둡고 부패하고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제 주님은 그가 이럴 수도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 가시려고 하시면서도 이 땅에 남아 있을 그의 사람들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계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아픈 어린 아이에게 더욱 마음을 두는 것과 같은 주의 돌보심이 필요했다.주님은 그의 사람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은 무궁한 사랑이며(렘 31:3) 시작에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무엇도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주님은 그의 사람들을 ei`j tevloj – 즉 끝까지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들과의 모든 관계에서 완전하시며 결국에는 그들을 완전한 사랑의 세계로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이다.회개한 한 여인이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닦음으로써 자기사랑을 나타낸 것처럼(눅 7:38) 그리스도는 제자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그들의 발을 씻김으로 나타내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그의 사랑이 변함없고 또 겸손한 사랑임을 보여 주려고 하셨고, 또 “충성스러운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주인이 나아와 수종하리라”(눅 12:37)고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며, 주인이 종을 수종들므로써 그들에게 말할 수 없니 크게 놀라운 영광을 맛보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은 여인이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을 보고 인색한 마음으로 불평을 터뜨림으로써 그들의 부족한 신앙을 드러내었으나(마 2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의 증거를 주신 것이다. 우리들의 연약함이 주님의 친절을 무시하고 말살시킨다.주님께서 유월절 이틀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교훈을 보여 주신 것도 두 가지 이유에서 연유된 것이다.첫째는 그가 떠나온 아버지께로 돌아갈 날을 오랫 동안 기다리던 중에 그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주님이 떠나 가심으로써 생겨지는 변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 변화는 주님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승천에서 완성에 이른다. 주님께서 떠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떠나게 될 터인데 그 때에 아버지께로 가서 먼저 가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사납고 악하고 불충실하며 고통과 유혹의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업적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다.이 변화의 때가 지금 그리스도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시간을 때로는 그의 원수들이 승리하는 시간(눅 22:53)이라고 했고, 때로는 주님이 승리하시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주님께서 받으실 고통의 때는 정해졌고, 그 고통의 깊이는 한때에 불과했다.”예수께서 그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지니신 통찰력을 본다. 주님은 그의 공생애의 처음부터 그때가 올 것과 언제쯤이 될 것까지도 아셨고, 그리고 지금 그때가 온 것을 알아 차리셨다. 우리는 우리의 때가 언제 오게 될는지를 모르므로 마땅히 해야 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예고를 통하여 우리의 때가 온 것을 안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모든 준비를 갖추기에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벧후 3:14). 주님께서 그의 이별에 대한 재빠른 통찰력 속에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주께서 장례되기에 앞서 그의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성결케 되신 것처럼, 50일 후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성별케 될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행동이었다(레 8:6). 우리도 우리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뒤에 남아 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도움될 일을 해 주어야 한다.둘째는 이때에 사탄이 유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유혹했기 때문이다(2절). 이 삽입된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유다가 배신하게 된 근본을 살펴 보면 사탄의 형상을 나타내는 본래적인 악이 작용한 것이다. 사탄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여 그에게 암시를 주며, 또 그 암시가 인간의 본성과 어떻게 뒤섞여 작용을 하는지를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는 아주 강력한 죄의 요소가 있고 이 죄의 요소에 세상과 육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이 접촉될 때에 바로 사탄이 죄악의 알을 낳고 부화시킬 수 있는 둥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다의 배신에 있어서 구가 그처럼 아무런 적의도 없이 쉽게 선생을 배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탄이 구원자의 왕국을 파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행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사탄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고 말았다.

[2] 왜 하필 이 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가? 그 이유를 살펴 보자. 왜 하필 이 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가? 그 이유를 살펴 보자. 첫째, 주님이 떠나실 시기가 가까워진 이때에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성취 속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나는 지금 고난받을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다”라고 말했던 것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원수들로부터 받을 위협이 악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그것에 대비하여 더욱 열심히 준비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유다는 이미 사탄의 덫에 걸렸고, 다음으로 사탄은 베드로와 남은 제자들을 목표로 공격을 시도하려 하고 있으므로(눅 22:31)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견디어 낼 수 있도록 강화시키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리가 양떼를 공격하여 한 마리를 물어가면 이때야말로 목자가 남은 양들을 더 잘 보존할 때인 것이다. 상처에 감염이 시작될 때 소독약을 뿌리는 법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지적하기를 예수께서 머리에 기름 부움을 받았을 때 유다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중얼거리는 것을 다른 제자들이 들었다고 한다(요 12:4; 마 26:8 참조). 그러므로 유다의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그와 더불어 악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님은 겸손한 교육을 통하여 제자들을 강하게 무장시켜서 임박한 위험에 대비케 하신 것이다. 셋째, 주님을 배반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다가 바로 주님의 12 제자 중 하나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여기서 그의 제자 중의 하나가 잘못을 저지름으로 인하여 모든 제자들이 다 버림을 받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들의 발을 씻기셨다. 동료 중의 하나가 사탄의 마음을 품고 배신자가 됐지만, 남은 자들이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 안에 위선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하시며 그의 제자들 속에 유다 같은 사람이 섞여 있음을 아시면서도 그의 제자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신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주님의 훌륭한 겸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세상으로 하여금 주께서 지니신 사랑이 얼마나 겸허한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이다. 주님께서는 중재자로서의 그의 사명을 알고 계셨고, 지금 그 사명을 신중히 생각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셨다”고 하시며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놀라움과 아울러 주께서 하시려는 일에 대하여 의아심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말을 씻기시기 시작하셨다. 1. 바로 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가 중재자라고 불리우는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1)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하늘과 땅의 소유자로서 주께서 그의 맡으신 위대한 모든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한 모든 것을 중재하고 화해를 이루는 중재자의 권리가 그의 손에 주어졌고, 인간들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처리하고 다스릴 권세가 그에게 위탁되어졌다. 따라서 주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법적인 상속자로서 그것들을 통치하고 심판할 권리를 그 손에 가지게 된 것이다.

(2)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말의 뜻은 주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만이 아니고,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영광 가운데 존재하고 계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위탁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가 중재자라고 불리우는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다.”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하늘과 땅의 소유자로서 주께서 그의 맡으신 위대한 모든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한 모든 것을 중재하고 화해를 이루는 중재자의 권리가 그의 손에 주어졌고, 인간들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처리하고 다스릴 권세가 그에게 위탁되어졌다. 따라서 주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법적인 상속자로서 그것들을 통치하고 심판할 권리를 그 손에 가지게 된 것이다.”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말의 뜻은 주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만이 아니고,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영광 가운데 존재하고 계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위탁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아들로서 오셨으며, 바로 하나님께서 보낸 자이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선택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고용된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신 자이시다.

(3)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란 주께서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그 영광을 다시 입으실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갈 것이고, 하늘로부터 난 자는 하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이, 이제는 우리의 대리자로서 하늘의 아버지께로 가셨다. 주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느낀다. 그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단 7:13)에게로 가셨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시 110:1)고 하셨다.

(4)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다.” 자기의 영광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요람 속에 누워 잠자고 있는 왕자가 아니라, 주님는 자신의 위치와 영광받으실 때에 대하여 분명히 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허리를 낮게 구부려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을 어떻게 하셨을까?

[1] 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이버지께로 갈 때(1절)가 가까이 온 줄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교훈과 유산을 남겨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2] 또한 이 일은 배신한 제자로부터 당하는 고통 속에서 주님을 굳세게 해 주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고 있었고, 주님은 그것을 또한 아셨고, 그 결과로 일이 어떻게 진전될 것도 아셨다. 그러나 반면에 주님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임을 아시고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수행하셨다.

[3] 이 사건은 주님의 겸양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며 칭송하게 해 준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이해할 수 없고 놀라운 사건으로써 나타나는데(사 57:17, 18; 호 2:13, 14) 여기의 본문에서도 이 사건은 주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며 동시에 이렇게 허리를 굽히는 겸손을 통하여 우리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다. 이 구절의 겸양과 다음 구절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들과를 비교해 보라(시 65:45; 사 57:15; 66:1, 2).

2. 이 같은 겸양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스스로 실제의 굴욕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받으며 중재자로서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것을 아시므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예복을 갈아 입으신 후 제자들을 물러서게 하시고 주님께 충성을 표시하는 예식을 수행하게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은 그 반대로 당신의 위대한 겸손을 본보기로 보여 주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자만심으로 사람을 추켜 세우는 것보다 하늘나라와 행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의 영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확신과 함께 그의 마음을 지극히 낮은 자리에 둘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길 만큼 낮은 자리에 처하였던 것이다.

(1) 주께서 행하신 행위 자체는 노예들이 하는 일로써 하인 중 가장 천한 계급의 사람이 이 일에 고용되었었다(아비가일이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삼상 25:41). 만일 주님께서 제자들의 손이나 얼굴을 씻겼더라도 그것은 큰 겸손의 표가 되었겠는데(엘리사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었다. 왕하 3:11) 그리스도는 이처럼 고역을 치루시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셨으니 우리가 열정적으로 찬양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 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이웃의 형제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2) 제자들은 낮과 비참한 처지에 처해 있으면서 그것의 몸이나 발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자주 목욕도 안했으므로 무척 더러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행하신 이 일은 실로 위대한 겸손의 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볼 때 그들은 생도요 하인이며 따라서 그들이 주님의 발을 씻겨야 했고, 또한 그들은 주님께 의존되어 모든 희망을 주님께 걸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수많은 활동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상사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천한 일을 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착 달라붙음으로써 그들의 눈에 들고 진급을 꾀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천한 일을 하신 것은 결코 정책적인 의도에서가 아니고 순수한 겸손에서 하신 일이다.

(3) 주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하여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식사하던 중에 이 일을 하신 것은,

[1] 마음의 동요나 불안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식사 중일지라도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필요한 음식보다도 의무를 다하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요 4:34).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은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신 설교가 아니고,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여 주는 이 만찬의 광경을 길이 남겨 두시는 것이었다.

[2]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더러운 발을 씻김으로써 비위가 약한 자는 속이 메스꺼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무례함과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청결함과 경건함은 잘 어울린다) 지나친 호기심이나 열정으로 덤비지 않으며, 욕망과 사심에서 벗어나서 훌륭한 예절을 몸에 익히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다.

(4) 그는 곧 일을 하기 위한 하인의 복장이 되셨다. 그의 길게 늘어진 겉옷을 벗어 둔 것은 그가 하고자 하는 봉사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안일한 평온보다 오히려 고통의 길을 자초한 사람들의 길에 우리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자만심을 고취시키고 진로를 방해하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정진해야 한다.

(5) 주님은 검박한 예식처럼 이 일을 수행하셨고, 한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고 발을 씻기셨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이제까지 해왔던 사람처럼 아무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이 일을 다 해내셨다.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라고 기록된 말씀은 하인들이 그의 한쪽 팔에 수건을 걸치거나 앞치마를 하는 것처럼 하셨다는 말이다. 옆에 세워져 있는 물항아리(2:6)에서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일이 끝난 후에 수건으로 닦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모든 제자의 발을 다 씻기신 것이 아니고 네뎃 사람의 발만을 씻기셨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추측에 찬성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 주님께서 제자들 모두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것은 주께서 그의 제자들 중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포용적이고 관대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6) 주님께서 유다의 발까지 씻겨 주셨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다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26절). 디모데서에 보면 명부에 올려 교회가 돌보아 줄 과부의 자격 중에 성도의 발 씻겨 준 경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과부들은 교회가 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는데(딤전 5:10), 주님은 가장 악한 죄인을, 지금 발을 씻김 받으면서도 주님을 배신할 것을 궁리하고 있는 자의 발을 씻겨 주셨기에 축복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란 주께서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그 영광을 다시 입으실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갈 것이고, 하늘로부터 난 자는 하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이, 이제는 우리의 대리자로서 하늘의 아버지께로 가셨다. 주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느낀다. 그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단 7:13)에게로 가셨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시 110:1)고 하셨다.주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다.” 자기의 영광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요람 속에 누워 잠자고 있는 왕자가 아니라, 주님는 자신의 위치와 영광받으실 때에 대하여 분명히 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허리를 낮게 구부려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을 어떻게 하셨을까?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이버지께로 갈 때(1절)가 가까이 온 줄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교훈과 유산을 남겨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또한 이 일은 배신한 제자로부터 당하는 고통 속에서 주님을 굳세게 해 주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고 있었고, 주님은 그것을 또한 아셨고, 그 결과로 일이 어떻게 진전될 것도 아셨다. 그러나 반면에 주님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임을 아시고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수행하셨다.이 사건은 주님의 겸양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며 칭송하게 해 준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 이해할 수 없고 놀라운 사건으로써 나타나는데(사 57:17, 18; 호 2:13, 14) 여기의 본문에서도 이 사건은 주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며 동시에 이렇게 허리를 굽히는 겸손을 통하여 우리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다. 이 구절의 겸양과 다음 구절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들과를 비교해 보라(시 65:45; 사 57:15; 66:1, 2).이 같은 겸양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스스로 실제의 굴욕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받으며 중재자로서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것을 아시므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예복을 갈아 입으신 후 제자들을 물러서게 하시고 주님께 충성을 표시하는 예식을 수행하게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은 그 반대로 당신의 위대한 겸손을 본보기로 보여 주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자만심으로 사람을 추켜 세우는 것보다 하늘나라와 행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의 영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확신과 함께 그의 마음을 지극히 낮은 자리에 둘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길 만큼 낮은 자리에 처하였던 것이다.주께서 행하신 행위 자체는 노예들이 하는 일로써 하인 중 가장 천한 계급의 사람이 이 일에 고용되었었다(아비가일이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삼상 25:41). 만일 주님께서 제자들의 손이나 얼굴을 씻겼더라도 그것은 큰 겸손의 표가 되었겠는데(엘리사가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었다. 왕하 3:11) 그리스도는 이처럼 고역을 치루시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셨으니 우리가 열정적으로 찬양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 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이웃의 형제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제자들은 낮과 비참한 처지에 처해 있으면서 그것의 몸이나 발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자주 목욕도 안했으므로 무척 더러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행하신 이 일은 실로 위대한 겸손의 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볼 때 그들은 생도요 하인이며 따라서 그들이 주님의 발을 씻겨야 했고, 또한 그들은 주님께 의존되어 모든 희망을 주님께 걸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수많은 활동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상사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천한 일을 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착 달라붙음으로써 그들의 눈에 들고 진급을 꾀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천한 일을 하신 것은 결코 정책적인 의도에서가 아니고 순수한 겸손에서 하신 일이다.주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하여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식사하던 중에 이 일을 하신 것은,마음의 동요나 불안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식사 중일지라도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필요한 음식보다도 의무를 다하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요 4:34).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은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신 설교가 아니고,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여 주는 이 만찬의 광경을 길이 남겨 두시는 것이었다.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더러운 발을 씻김으로써 비위가 약한 자는 속이 메스꺼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무례함과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청결함과 경건함은 잘 어울린다) 지나친 호기심이나 열정으로 덤비지 않으며, 욕망과 사심에서 벗어나서 훌륭한 예절을 몸에 익히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여 행하신 것이다.그는 곧 일을 하기 위한 하인의 복장이 되셨다. 그의 길게 늘어진 겉옷을 벗어 둔 것은 그가 하고자 하는 봉사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안일한 평온보다 오히려 고통의 길을 자초한 사람들의 길에 우리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자만심을 고취시키고 진로를 방해하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정진해야 한다.주님은 검박한 예식처럼 이 일을 수행하셨고, 한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고 발을 씻기셨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이제까지 해왔던 사람처럼 아무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이 일을 다 해내셨다.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라고 기록된 말씀은 하인들이 그의 한쪽 팔에 수건을 걸치거나 앞치마를 하는 것처럼 하셨다는 말이다. 옆에 세워져 있는 물항아리(2:6)에서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일이 끝난 후에 수건으로 닦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모든 제자의 발을 다 씻기신 것이 아니고 네뎃 사람의 발만을 씻기셨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추측에 찬성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 주님께서 제자들 모두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것은 주께서 그의 제자들 중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포용적이고 관대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주님께서 유다의 발까지 씻겨 주셨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다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26절). 디모데서에 보면 명부에 올려 교회가 돌보아 줄 과부의 자격 중에 성도의 발 씻겨 준 경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과부들은 교회가 주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는데(딤전 5:10), 주님은 가장 악한 죄인을, 지금 발을 씻김 받으면서도 주님을 배신할 것을 궁리하고 있는 자의 발을 씻겨 주셨기에 축복을 받으신 것이다. 많은 성서 번역자들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주님의 모든 사명 중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며 모든 것이 그의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그는 영광의 책상에서 일어나셔서 빛의 겉옷을 벗으시고 인간성으로 허리띠를 두르시고 하인의 형태로 오셨다. 그는 누구의 도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돌보아 주시기 위해 오셨고 피를 쏟고 영혼까지고 쏟아 주시고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는 대야가 준비되어진 것이다(계 1:5). Ⅲ.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영적인 청결과 죄의 오염으로부터 영혼이 깨끗하게 됨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베드로와의 말씀 가운데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6-11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항들을 주목하게 된다. 1. 베드로는 그의 주께서 이 천한 봉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6절). 주님께서는 수건을 허리에 두른 후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그에게 오셔서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내어 뻗으라고 명하셨다. 베드로는 그의 주께서 이 천한 봉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6절). 주님께서는 수건을 허리에 두른 후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그에게 오셔서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내어 뻗으라고 명하셨다. 크리소스톰은 추측하기를, 주님께서 제일 먼저 발을 씻긴 사람은 선생이 발을 씻어 주는 영광을 받아들일 준비를 가장 먼저하고 있던 유다였을 것이며, 유다는 그의 선생이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 내려 앉으신 것을 보면서 속으로 즐거워했을 것이라고 한다. 5절에 나타난 바에 따른다면 주님은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가 베드로에게 오셨고 처음으로 그의 발 씻기심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 같다. 주님께서 누구에게 처음으로 가셨던지 간에 베드로에게 오셨을 때에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여기에서 인칭을 나타내는 말에 강조점이 있다. 즉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주인이신 줄 알고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이 세상의 구주와 통치자로서 믿고 있는데 그러한 신이 어떻게 이 세상 벌레같이 같이 아무 가치도 없는 죄인인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한 번 만져 주심으로 문둥병이 깨끗해지고 장님이 보게 되고 죽은 자를 일으키신 그 손으로 내 발을 씻기실 작정이십니까?” 이 의미가 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기쁨으로 대야와 수건을 들고 주님의 발을 씻기고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눅 17:7, 8). 마땅히 이렇게 되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려 하니 “이런 일은 전에도 없었던 격에 맞지 않는 일이옵니다. 이런 일을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베드로는 말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될 때 겸손 특히 우리를 향하신 그의 겸손에 대하여 우리는 감탄과 감격할 것뿐이라는 것이다(14:22). “주여!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 내 아버지의 집을 내게 주신단 말입니까?” 2. 이처럼 놀라움으로 하는 질문에 주님은 즉시로 만족을 주셨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7절)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의 반대를 침묵케 하기에 충분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순순히 주님의 하시는 일에 복종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 그는 지금 이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을 무조건 반대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무엇을 말씀하시거나 행하실 때에는 항상 그 속에 선한 것을 나타내시던 그 분의 의지와 지혜에 묵묵히 따르기로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무조건 따를 것을 가르치시면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을 판단하려고 애쓰지 말고 다만 내가 행하는 일이니 그것이 유익한 것인 줄만 알고 믿으라”라고 하셨다. 이처럼 놀라움으로 하는 질문에 주님은 즉시로 만족을 주셨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7절)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의 반대를 침묵케 하기에 충분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순순히 주님의 하시는 일에 복종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그는 지금 이 일의 중요성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을 무조건 반대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무엇을 말씀하시거나 행하실 때에는 항상 그 속에 선한 것을 나타내시던 그 분의 의지와 지혜에 묵묵히 따르기로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무조건 따를 것을 가르치시면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을 판단하려고 애쓰지 말고 다만 내가 행하는 일이니 그것이 유익한 것인 줄만 알고 믿으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두움 속에서 수고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서와 또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들이 전혀 무지와 무능 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불평도 말하지 못하고 겸손히 입다물게 되는 것이다(히 11:8).

(2) 베드로가 잠잠했던 이유 중 또 하나는 이후에 알게 될 그 무엇이 어렴풋이나마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네가 지금 씻김을 받는 것이 필요한 줄은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셨고 이 말씀 속에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중죄를 저지를 때가 지적된 것 같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까지도 그 의미를 현재에는 모르다가 장래에야 비로소 알게 될 일들을 행하셨다.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실 뿐더러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미천한 인간이 되시고 인간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신 것은 그가 죽으신 후에도 이해되지 않다가 결국은 그것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히 2:17). 잇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의 사건들이 먼저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줌으로, 우리가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고난의 사건들이 가장 친절한 은혜 가운데 되어진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 자체 안에 의미심장한 무엇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것의 의미가 재생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줄 때까지, 또 성령이 위로부터 그들에게 임하실 때까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통하여 역사하시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섭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든지 간에 그의 뜻에 맡겨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 그것이 우리에게도 최선의 길이 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8절). 이 말은 굳은 결심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1) 겸손과 공손의 예를 본다. 베드로는 과거와 똑같이(눅 5:8) 지금도 그의 주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러 겸손한 체하는 것은 그 받은 상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법이다(골 2:18, 23).

(2) 베드로의 이러한 겸손 속에는 주님의 뜻에 대한 반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네 발을 씻으리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그렇게는 절대로 못하십니다”라고 하면서 “그건 합당한 일이 되지를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대답의 결과는 그리스도보다 자신을 더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받기에 너무 값지고, 진리라고 믿기에 너무 기쁜 소식이어서 복음이 제공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고 오히려 불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그리스도도 그가 하실 일을 계속 주장하시면서 베드로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1) 불복종에 대한 심각한 경고로써, 만일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고 이렇게 적은 일에까지 네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는 내 제자 중 하나가 될 수 없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보다 더 지혜로움을 자처하고 나서서 복종을 요구하는 주의 명령에 계속 논쟁을 했더라면, 그는 실제로 주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말씀을 따라서 주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을 최대한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 이상의 예절은 필요가 없다.

(2) 또한 이 말은 영적 청결의 필요성을 선포하신 것으로써 이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내가 너의 영혼을 죄악의 오염에서 씻어내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고, 내 흥미를 조금도 끌지 못하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씻기심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고 그들만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1]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모든 행복을 가졌다는 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는 말이며(히 3:14),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왕에 그리스도와 좋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이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으시도록 그와 관계를 갖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소유하시고 보살피시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성결케 하시는데, 이것은 그들을 씻으시는 일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훌륭하신 업적, 그리고 의로우심과 그의 영과 은혜에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결코 그의 영광에도 함께 참여할 수가 없다.

5. 이제 베드로가 발 씻겨짐에 대하여 단순한 복종 이상으로 가진 열심을 보자(9절)뿐 베드로의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뀌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신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마자 그는 곧 그의 잘못을 인식하고 마음을 변경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결심 이외의 일에는 단호하게 결심하지 말아야겠다. 왜냐하면, 곧 그 결심을 철회해야만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목표를 세움에 있어서는 인내심으로 집요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마음을 주목하자.

(1) 베드로는 “주여 제가 그렇게 서둘러 말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철회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를 씻어 주시는 행위가 마땅히 거절해야 할 주님의 수치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의 권세요.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게 된다.

[1]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취소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2] 조만간에 주님은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하실 것이다.

(2)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와 그 우주적 영향력을 깨닫게 되었을 때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귀찮을 정도였다. 그는 이와에 그의 손과 머리까지고 씻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스도로부터 격리되거나 그와의 관계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들이 볼 때에 가장 엄청난 죄악이다. 따라서 이 죄악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열심히 매달려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씻겨 주셔서 의롭고 정결케 하여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간청하여야 한다. “주님, 제가 주님에게서 잘려나가지 않도록 갱생케 하시는 청결을 통하여 주께 합당한 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주여, 타락의 때가 묻은 내 발뿐 아니라 악한 계획으로 인한 오점과 분별없는 잘못으로 인하여 땀흘려 더러워진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베드로가 잠잠했던 이유 중 또 하나는 이후에 알게 될 그 무엇이 어렴풋이나마 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네가 지금 씻김을 받는 것이 필요한 줄은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셨고 이 말씀 속에는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중죄를 저지를 때가 지적된 것 같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까지도 그 의미를 현재에는 모르다가 장래에야 비로소 알게 될 일들을 행하셨다.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실 뿐더러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미천한 인간이 되시고 인간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신 것은 그가 죽으신 후에도 이해되지 않다가 결국은 그것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히 2:17). 잇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의 사건들이 먼저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줌으로, 우리가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고난의 사건들이 가장 친절한 은혜 가운데 되어진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 자체 안에 의미심장한 무엇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것의 의미가 재생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줄 때까지, 또 성령이 위로부터 그들에게 임하실 때까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통하여 역사하시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섭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든지 간에 그의 뜻에 맡겨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 그것이 우리에게도 최선의 길이 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8절). 이 말은 굳은 결심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겸손과 공손의 예를 본다. 베드로는 과거와 똑같이(눅 5:8) 지금도 그의 주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러 겸손한 체하는 것은 그 받은 상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법이다(골 2:18, 23).베드로의 이러한 겸손 속에는 주님의 뜻에 대한 반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네 발을 씻으리라”고 하시자 베드로는 “그렇게는 절대로 못하십니다”라고 하면서 “그건 합당한 일이 되지를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대답의 결과는 그리스도보다 자신을 더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받기에 너무 값지고, 진리라고 믿기에 너무 기쁜 소식이어서 복음이 제공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고 오히려 불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그리스도도 그가 하실 일을 계속 주장하시면서 베드로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불복종에 대한 심각한 경고로써, 만일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고 이렇게 적은 일에까지 네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는 내 제자 중 하나가 될 수 없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보다 더 지혜로움을 자처하고 나서서 복종을 요구하는 주의 명령에 계속 논쟁을 했더라면, 그는 실제로 주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말씀을 따라서 주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을 최대한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 이상의 예절은 필요가 없다.또한 이 말은 영적 청결의 필요성을 선포하신 것으로써 이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내가 너의 영혼을 죄악의 오염에서 씻어내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고, 내 흥미를 조금도 끌지 못하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씻기심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고 그들만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된 모든 행복을 가졌다는 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는 말이며(히 3:14),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왕에 그리스도와 좋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으시도록 그와 관계를 갖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소유하시고 보살피시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성결케 하시는데, 이것은 그들을 씻으시는 일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훌륭하신 업적, 그리고 의로우심과 그의 영과 은혜에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결코 그의 영광에도 함께 참여할 수가 없다.이제 베드로가 발 씻겨짐에 대하여 단순한 복종 이상으로 가진 열심을 보자(9절)뿐 베드로의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뀌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자신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마자 그는 곧 그의 잘못을 인식하고 마음을 변경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결심 이외의 일에는 단호하게 결심하지 말아야겠다. 왜냐하면, 곧 그 결심을 철회해야만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목표를 세움에 있어서는 인내심으로 집요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마음을 주목하자.베드로는 “주여 제가 그렇게 서둘러 말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철회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를 씻어 주시는 행위가 마땅히 거절해야 할 주님의 수치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의 권세요.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게 된다.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취소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조만간에 주님은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하실 것이다.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와 그 우주적 영향력을 깨닫게 되었을 때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귀찮을 정도였다. 그는 이와에 그의 손과 머리까지고 씻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스도로부터 격리되거나 그와의 관계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들이 볼 때에 가장 엄청난 죄악이다. 따라서 이 죄악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열심히 매달려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씻겨 주셔서 의롭고 정결케 하여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간청하여야 한다. “주님, 제가 주님에게서 잘려나가지 않도록 갱생케 하시는 청결을 통하여 주께 합당한 자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주여, 타락의 때가 묻은 내 발뿐 아니라 악한 계획으로 인한 오점과 분별없는 잘못으로 인하여 땀흘려 더러워진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진정으로 성결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전체가 다 성결케 되기를 원하며, 혼과 영과 몸이 잘 보전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살전 5:23)는 사실이다. 6. 그리스도께서 부연하여 더 설명하신 말씀들은 영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1) 주님은 그에게 충실했던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말씀하신다(10절). “이미 목욕한 자는” (집에 목욕 시설이 없어서 밖에서 목욕하고 돌아와야 하는 나라들에서 흔히 있는 대로) 집에 돌아왔을 때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으니,” 그의 손과 머리는 이미 깨끗하고 발만이 걸어오느라고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극에서 극으로 전환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자기의 발을 씻기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주께서 자기의 세례식에서 하신 일과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는 손과 머리까지고 씻어달라고 외쳤다. 이때에 주님은 다음과 같은 교훈 가운데로 그를 인도하셨다. 즉, 발을 씻을 필요가 있으나 손과 머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 의롭게 된 상태에서 발만을 씻김받는다는 것은 무슨 유익을 말해 주는 것인가를 살펴 보자. 그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씻김을 받았고 온 몸이 깨끗하여졌다는 말은 그들이 마치 자격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은혜로써 용납되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또 다시 죄를 범하고, 나서 후회할 때에 재차 의로운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절차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 절차가 또 다시 필요하다면 우린 자주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때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확증이 구름에 가린 듯 모호하고 그로부터 오는 위안과 평강이 중지된 것 같아도, 이미 인정된 의롭다 하심은 아직도 변경되거나 취소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하지만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은 한 번도 후회없이 이루어진다. 마음은 청소되고 장식될 수 있지만 사탄의 궁전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씻겨지고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면 결코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2]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매일 주의해야 할 일을 살펴 보자. 그것은 발을 씻는 일이다. 즉 그들이 죄악으로부터 깨끗게 되기 위하여 자신들의 연약함과 과오를 반성하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믿고 날마다 그 은총과 계약을 맺는 일이다. 우리는 또한 신성을 모독하는 모든 잘못된 일들을 끊임없이 주시함으로써 우리의 발을 씻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을 삼감으로 우리의 길과 발을 청결케 해야 하기 때문이다(시 119:9). 제사장들은 성별되었을 때에 물로 씻겨졌고, 따라서 또 씻을 필요가 없는 데도 회막에 들어갈 때는 그들의 발과 손을 대야에 씻음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출 30:19, 20). 우리를 깨끗게 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모든 준비는 우리를 거만하게 하기보다는 좀더 주의하도록 만든다. 내가 내 발을 씻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더럽힐 수가 있을까! 어제 받은 용서로의 고마움으로 오늘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가야 한다.

(2) 유다를 생각하시면서 주님은 “너희가 깨끗하다, 나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10,11절).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하신 말씀으로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하셨다(15:3). 주님은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가 깨끗하다고 하시고 나서 그런데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다는 제외해 놓으셨다. 제자들은 유다를 포함해서 모두가 세례를 받았으나 모두가 다 깨끗해진 것은 아니었다.

[1]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우며, 스스로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에 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2] 주님은 그의 백성과 그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알고 계시다(딤후 2:19). 주님의 눈은 참된 사람과 비열한 사람, 깨끗한 사람과 불결한 사람을 구분하실 수가 있다.

[3] 주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다가 후에 배반자로 드러난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의 배신이 위선의 분명한 증거가 됨을 알게 된다.

[4] 주님은 제자들 모두가 다 깨끗지는 않다는 것을 제자들 스스로가 알도록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왜냐하면 이런 사실을 알므로써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것이 혹시 내가 아닐까? 그리고 주님께 대하여 “주여 나는 끼끗한 쪽에 속합니까? 더러운 쪽에 속합니까?” 라고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위선자가 누리는 것이 판명될 때에, 그것이 결코 놀라움이나 우리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연하여 더 설명하신 말씀들은 영적인 청결을 의미한다.주님은 그에게 충실했던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말씀하신다(10절). “이미 목욕한 자는” (집에 목욕 시설이 없어서 밖에서 목욕하고 돌아와야 하는 나라들에서 흔히 있는 대로) 집에 돌아왔을 때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으니,” 그의 손과 머리는 이미 깨끗하고 발만이 걸어오느라고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극에서 극으로 전환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자기의 발을 씻기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주께서 자기의 세례식에서 하신 일과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는 손과 머리까지고 씻어달라고 외쳤다. 이때에 주님은 다음과 같은 교훈 가운데로 그를 인도하셨다. 즉, 발을 씻을 필요가 있으나 손과 머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의롭게 된 상태에서 발만을 씻김받는다는 것은 무슨 유익을 말해 주는 것인가를 살펴 보자. 그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씻김을 받았고 온 몸이 깨끗하여졌다는 말은 그들이 마치 자격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은혜로써 용납되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또 다시 죄를 범하고, 나서 후회할 때에 재차 의로운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절차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 절차가 또 다시 필요하다면 우린 자주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때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확증이 구름에 가린 듯 모호하고 그로부터 오는 위안과 평강이 중지된 것 같아도, 이미 인정된 의롭다 하심은 아직도 변경되거나 취소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하지만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은 한 번도 후회없이 이루어진다. 마음은 청소되고 장식될 수 있지만 사탄의 궁전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씻겨지고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면 결코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매일 주의해야 할 일을 살펴 보자. 그것은 발을 씻는 일이다. 즉 그들이 죄악으로부터 깨끗게 되기 위하여 자신들의 연약함과 과오를 반성하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믿고 날마다 그 은총과 계약을 맺는 일이다. 우리는 또한 신성을 모독하는 모든 잘못된 일들을 끊임없이 주시함으로써 우리의 발을 씻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을 삼감으로 우리의 길과 발을 청결케 해야 하기 때문이다(시 119:9). 제사장들은 성별되었을 때에 물로 씻겨졌고, 따라서 또 씻을 필요가 없는 데도 회막에 들어갈 때는 그들의 발과 손을 대야에 씻음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출 30:19, 20). 우리를 깨끗게 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모든 준비는 우리를 거만하게 하기보다는 좀더 주의하도록 만든다. 내가 내 발을 씻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더럽힐 수가 있을까! 어제 받은 용서로의 고마움으로 오늘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가야 한다.유다를 생각하시면서 주님은 “너희가 깨끗하다, 나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10,11절).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하신 말씀으로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하셨다(15:3). 주님은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가 깨끗하다고 하시고 나서 그런데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다는 제외해 놓으셨다. 제자들은 유다를 포함해서 모두가 세례를 받았으나 모두가 다 깨끗해진 것은 아니었다.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리우며, 스스로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에 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주님은 그의 백성과 그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알고 계시다(딤후 2:19). 주님의 눈은 참된 사람과 비열한 사람, 깨끗한 사람과 불결한 사람을 구분하실 수가 있다.주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다가 후에 배반자로 드러난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의 배신이 위선의 분명한 증거가 됨을 알게 된다.주님은 제자들 모두가 다 깨끗지는 않다는 것을 제자들 스스로가 알도록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왜냐하면 이런 사실을 알므로써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것이 혹시 내가 아닐까? 그리고 주님께 대하여 “주여 나는 끼끗한 쪽에 속합니까? 더러운 쪽에 속합니까?” 라고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위선자가 누리는 것이 판명될 때에, 그것이 결코 놀라움이나 우리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한 예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주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설명은 그 일을 모두 마친 후에 얘기되어졌다(12-17절).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주님께서 그가 하신 일의 의미를 말씀하실 때에 얼마나 엄숙한 분위기였는가를 생각하자(12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고 하셨다.

(1) 주님은 그 설명을 하시는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보류하셨다.

[1] 그들의 복종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주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 없었고, 자기들이 사건의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할 때에는 묵묵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했다.

[2] 수수께끼를 풀기 전에 수수께끼 문제 자체에 해당하는 일을 완전히 마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고난이 모두 끝나고 영광의 옷을 다시 입으신 후에 그가 앉으셨던 자리에 앉을 준비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고”(눅 24:45, 46) 그의 영을 부어 주셨다.

(2) 주님은 그가 발을 씻어 주는 일의 의미를 설명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설명할 수 있는지 물어 보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주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고 단순히 가르치기 위한 필요성에서 뿐만이 아니고, 이 교훈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관심을 더욱 추켜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 속에서 “내가 너를 알게 하리라. 네가 주의를 집중하면 내가 말하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주님께서 그가 하신 일의 의미를 말씀하실 때에 얼마나 엄숙한 분위기였는가를 생각하자(12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고 하셨다.주님은 그 설명을 하시는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보류하셨다.그들의 복종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주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 없었고, 자기들이 사건의 이유를 분명히 알지 못할 때에는 묵묵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했다.수수께끼를 풀기 전에 수수께끼 문제 자체에 해당하는 일을 완전히 마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고난이 모두 끝나고 영광의 옷을 다시 입으신 후에 그가 앉으셨던 자리에 앉을 준비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고”(눅 24:45, 46) 그의 영을 부어 주셨다.주님은 그가 발을 씻어 주는 일의 의미를 설명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설명할 수 있는지 물어 보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주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고 단순히 가르치기 위한 필요성에서 뿐만이 아니고, 이 교훈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관심을 더욱 추켜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 속에서 “내가 너를 알게 하리라. 네가 주의를 집중하면 내가 말하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주님의 뜻은 성례전적 암시들이 설명되어지고, 그의 제자들이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그 의미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젖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예식이 무슨 뜻입니까?”(출 12:26)라고 질문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기반 위에서 주님은 이 말씀들을 하고 계신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이 명칭들은 너희가 나와 얘기할 때에 내게 준 명칭들인데, 실로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절). 너희는 내 제자들이고 나는 너희의 선생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다음을 주의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생이요, 주님이시다. 구원자시며 구세주이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요 선생이란 것이다. 그가 우리의 선생(dida,skaloj)이란 말은 모든 필요한 진리와 규율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과 교사이시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예언자이시라는 것이고, 우리의 주님 ku,ri/oj – 즉 우리의 지배자와 소유주로서 우리들을 맘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권력과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란 말이다.

(2) 예수를 선생과 주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그것은 단순히 치켜 세우는 인사로서가 아니고 실제의 사실이며,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이다. 아주 경건한 생활을 하던 허버트씨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록할 때에는 꼭 “나의 주인”이라고 표현했다. 여기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나의 선생이시여! 당신의 음성이 어찌나 달콤한 지요! 마치 용연향(향수의 원효)이 감별사에게 같은 향기를 풍기듯 당신의 부드러운 말씀은 보배로운 향기를 풍기는군요. 나의 선생이시여!”

(3)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생과 주님으로 부름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주님은 그의 명령이 인간의 육과 혈기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생과 주님이 되시는 것이 우리 자신의 승낙에 의한 것이고 자주 그를 선생과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영광 가운데 주님의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 주님께서 여기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절)라고 가르치신다.

(1)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교회에서 일어서서 행하는 예식의 하나로 제도화하여 가르쳤다. 그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상대방을 향한 겸손한 사랑의 표로써 서로의 말을 씻겨 주었다. 성 암브로스는 이 제도를 택하여 밀란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실시했다. 성 어거스틴은 손으로 이 행위를 행하지 않고 마음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도 찬성하지만 때때로 기회가 오면, 손까지고 병행하여 사용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딤전 5:10).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업신여기고 포기해선 안 된다. 칼빈은 말하기를 “수난 주간 목요일에 연례적인 관습으로 교황이 행하는 이 예식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우리의 의무는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로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절). 그리고 안세니우스는 또 말하기를 교황의 이 예식은 아주 무뚝뚝하게 진행이 되었는데 원래 주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의무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2) 이 말씀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써, 가르치기 위한 모범이었을 뿐,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비유로써 주님은 여기서 세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1] 겸허한 자기 비하이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낮아지셨고(마 11:29), 또 비천한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거니신 것을 배워야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비천하게 생각하고 형제에게는 존경해야 한다. 또한 죄악 이외의 모든 것을 자신보다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비록 이처럼 비천하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의 유익을 드러내게 된다(삼하 6:22, 네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주님은 자주 제자들에게 겸손함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그들은 그 교훈을 잊고 있었으나. 지금은 주님께서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여 가르치시니 그들은 이 교훈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2] 자기를 낮추는 겸양이란 봉사적인 것이어야 한다.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은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사랑으로 허리를 낮게 숙이는 봉사적 행위를 말한다. 이런 일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면서도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사도 바울과 섬김 받으러 오시지 않고 도리어 섬기러 오신 주님에게서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생이요, 주님이시다. 구원자시며 구세주이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요 선생이란 것이다. 그가 우리의 선생(dida,skaloj)이란 말은 모든 필요한 진리와 규율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과 교사이시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예언자이시라는 것이고, 우리의 주님 ku,ri/oj – 즉 우리의 지배자와 소유주로서 우리들을 맘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권력과 소유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란 말이다.예수를 선생과 주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그것은 단순히 치켜 세우는 인사로서가 아니고 실제의 사실이며,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이다. 아주 경건한 생활을 하던 허버트씨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록할 때에는 꼭 “나의 주인”이라고 표현했다. 여기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나의 선생이시여! 당신의 음성이 어찌나 달콤한 지요! 마치 용연향(향수의 원효)이 감별사에게 같은 향기를 풍기듯 당신의 부드러운 말씀은 보배로운 향기를 풍기는군요. 나의 선생이시여!”우리가 그리스도를 선생과 주님으로 부름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주님은 그의 명령이 인간의 육과 혈기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생과 주님이 되시는 것이 우리 자신의 승낙에 의한 것이고 자주 그를 선생과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영광 가운데 주님의 돌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주님께서 여기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절)라고 가르치신다.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교회에서 일어서서 행하는 예식의 하나로 제도화하여 가르쳤다. 그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상대방을 향한 겸손한 사랑의 표로써 서로의 말을 씻겨 주었다. 성 암브로스는 이 제도를 택하여 밀란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실시했다. 성 어거스틴은 손으로 이 행위를 행하지 않고 마음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도 찬성하지만 때때로 기회가 오면, 손까지고 병행하여 사용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딤전 5:10).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업신여기고 포기해선 안 된다. 칼빈은 말하기를 “수난 주간 목요일에 연례적인 관습으로 교황이 행하는 이 예식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우리의 의무는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로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절). 그리고 안세니우스는 또 말하기를 교황의 이 예식은 아주 무뚝뚝하게 진행이 되었는데 원래 주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의무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이 말씀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써, 가르치기 위한 모범이었을 뿐,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비유로써 주님은 여기서 세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겸허한 자기 비하이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낮아지셨고(마 11:29), 또 비천한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거니신 것을 배워야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비천하게 생각하고 형제에게는 존경해야 한다. 또한 죄악 이외의 모든 것을 자신보다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비록 이처럼 비천하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의 유익을 드러내게 된다(삼하 6:22, 네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주님은 자주 제자들에게 겸손함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그들은 그 교훈을 잊고 있었으나. 지금은 주님께서 이런 방법까지 동원하여 가르치시니 그들은 이 교훈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자기를 낮추는 겸양이란 봉사적인 것이어야 한다.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은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사랑으로 허리를 낮게 숙이는 봉사적 행위를 말한다. 이런 일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면서도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사도 바울과 섬김 받으러 오시지 않고 도리어 섬기러 오신 주님에게서 발견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들에 대하여 아무런 의무를 지지 않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돌보아 주고, 위하여 고통 당하며, 시간을 소모시키면서 자신을 낮추는 일에 대하여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여행 후에 발을 씻음으로 예절을 지킴과 동시에 피로를 풀어 주는 안락함을 얻듯이 서로의 발을 씻어 줌으로 피차간에 신임과 평안을 주게 되고, 형제의 이름을 높여 줌으로써 피차에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전 10:24; 히 6:10 참조). 의무란 상호 교류적인 것으로써, 우리는 형제의 도움을 받음과 동시에 또한 형제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3] 주님은 “죄악의 오염으로부터 서로의 발을 씻기라”고 하심으로 서로가 성결케 되기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오스틴과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다. 주님께서 그랬듯이 우리는 형제의 범죄함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피차에 성결케 되기 위하여 서로 도와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을 씻어야 한다. 이 자비로운 행위는 먼저 자기 점에서부터 시작하여(마 7:5)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형제들의 실패와 서로 싸우는 것과 특히 그들에게 임한 죄악의 오염을 슬퍼하면서 그들의 죄로 더러워진 발을 우리의 눈물로 씻어 주어야 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그들을 견책하고 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며(갈 6:1) 다시는 죄의 진흙탕 속에 빠지지 않도록 충고함으로 그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다.

4.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방금 보여 주신 본보기에 따를 것을 강하게 명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절실하게 나타내 보여 주신다.

(1) “나는 너희의 선생이고 너희는 내 제자이므로 너희는 내게서 배워야 한다”(15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으니 내가 행한 것과 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하셨다.” 주님은 “죄악의 오염으로부터 서로의 발을 씻기라”고 하심으로 서로가 성결케 되기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오스틴과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다. 주님께서 그랬듯이 우리는 형제의 범죄함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피차에 성결케 되기 위하여 서로 도와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을 씻어야 한다. 이 자비로운 행위는 먼저 자기 점에서부터 시작하여(마 7:5)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형제들의 실패와 서로 싸우는 것과 특히 그들에게 임한 죄악의 오염을 슬퍼하면서 그들의 죄로 더러워진 발을 우리의 눈물로 씻어 주어야 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그들을 견책하고 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며(갈 6:1) 다시는 죄의 진흙탕 속에 빠지지 않도록 충고함으로 그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다.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방금 보여 주신 본보기에 따를 것을 강하게 명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절실하게 나타내 보여 주신다.”나는 너희의 선생이고 너희는 내 제자이므로 너희는 내게서 배워야 한다”(15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으니 내가 행한 것과 같이 너희도 행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해 보자.

[1] 주님은 얼마나 훌륭한 선생이신가! 그는 교리를 가르치듯 본보기로써 가르치셨고, 이 목적을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가 보여 주신 것은 그의 거룩한 종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은혜와 의무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보여 주신 본보기는 조금도 잘못이나 실수가 없이 수행되었다. 여기서 주님은 그 자신이 법을 지적하고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군사들에게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라”(삿 7:17)고 말한 기드온이나 아비멜렉(삿 9:48, “너희는 나의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그리고 씨저(그는 그의 부하들을 “나의 전우”라고 불렀고, 그의 평상 용어는 “가라”가 아니고 “오라” 였다)와 같은 지휘관이었다.

[2] 우리는 성실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가 써 준 것을 우리는 그대로 노트에 필기하는 학생이 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되고, 또 그가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보기는 특별히 목사들이 본받아야 할 것으로써, 그들에게는 겸손함으로 베푸는 자비심과 거룩한 사랑이 나타나야 하고, 또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가르치셨던 것을 그들의 목회의 최종 목표로 삼고 봉사해야 한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의 대리자로서 내보내시면서 분부하시기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도 받지 말고 돈도 가지지 말며 이러한 사람들의 형편에 맞도록 여러 모양을 취하라(고전 9:22)고 하셨다. 또, 내가 너희들의 더러운 발에 대하여 행한 일을 너희도 죄로 더러워진 모든 죄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라. 그들을 씻어 주어라고 하셨다. 이 일이 유월절 저녁만찬 자리에서 되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의 의미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한 규율을 선포하는 것으로써, 성 참예자들은 먼저 생활이 새로워지고 참된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성결된 사람이어야 하며, 그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제단 주의에 나아 올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건은 주님께서 행하신 것과 같이 요청이 없을지라도 그렇게 하고, 보수가 없을지라도 자발적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서로 남을 낫게 여기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이 사랑의 봉사를 결코 보수를 바라며 하거나 또는 맘에 없는 데도 억지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2) 주님은 “나는 너희의 선생이고 너희는 내 제자이므로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일이 아무리 비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행하기에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아무리 화려하고 또 대사로서의 권능을 지녔다 할지라도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가운데 주님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든지 또는 지나치게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행하신 일을 우리들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마 제자들은 서로 발을 씻겨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속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고상함을 지니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을 막기 위해서 주님은 제자들의 위치가 주님의 종이 위치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곧 그들은 선생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선생의 명성과 관련된 일은 제자들의 명성과도 깊은 관련이 됨으로 제자들은 선생의 하시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얼마나 훌륭한 선생이신가! 그는 교리를 가르치듯 본보기로써 가르치셨고, 이 목적을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가 보여 주신 것은 그의 거룩한 종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은혜와 의무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보여 주신 본보기는 조금도 잘못이나 실수가 없이 수행되었다. 여기서 주님은 그 자신이 법을 지적하고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군사들에게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라”(삿 7:17)고 말한 기드온이나 아비멜렉(삿 9:48, “너희는 나의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그리고 씨저(그는 그의 부하들을 “나의 전우”라고 불렀고, 그의 평상 용어는 “가라”가 아니고 “오라” 였다)와 같은 지휘관이었다.우리는 성실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가 써 준 것을 우리는 그대로 노트에 필기하는 학생이 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되고, 또 그가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보기는 특별히 목사들이 본받아야 할 것으로써, 그들에게는 겸손함으로 베푸는 자비심과 거룩한 사랑이 나타나야 하고, 또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가르치셨던 것을 그들의 목회의 최종 목표로 삼고 봉사해야 한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의 대리자로서 내보내시면서 분부하시기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도 받지 말고 돈도 가지지 말며 이러한 사람들의 형편에 맞도록 여러 모양을 취하라(고전 9:22)고 하셨다. 또, 내가 너희들의 더러운 발에 대하여 행한 일을 너희도 죄로 더러워진 모든 죄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라. 그들을 씻어 주어라고 하셨다. 이 일이 유월절 저녁만찬 자리에서 되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의 의미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한 규율을 선포하는 것으로써, 성 참예자들은 먼저 생활이 새로워지고 참된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성결된 사람이어야 하며, 그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제단 주의에 나아 올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건은 주님께서 행하신 것과 같이 요청이 없을지라도 그렇게 하고, 보수가 없을지라도 자발적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서로 남을 낫게 여기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이 사랑의 봉사를 결코 보수를 바라며 하거나 또는 맘에 없는 데도 억지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주님은 “나는 너희의 선생이고 너희는 내 제자이므로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일이 아무리 비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행하기에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아무리 화려하고 또 대사로서의 권능을 지녔다 할지라도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가운데 주님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든지 또는 지나치게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행하신 일을 우리들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마 제자들은 서로 발을 씻겨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속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고상함을 지니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을 막기 위해서 주님은 제자들의 위치가 주님의 종이 위치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곧 그들은 선생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선생의 명성과 관련된 일은 제자들의 명성과도 깊은 관련이 됨으로 제자들은 선생의 하시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주의해 보자.

[1] 우리는 부패된 인간의 본능을 발동시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친절한 겸손과 우리의 유익을 도모하시는 그의 뜻을 업신여김으로 우리 자신을 높이고 주님을 낮추어 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마음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주님이 우리보다 더욱 위대하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안에 어떠한 형태의 겸손을 나타내시든지 간에 우리는 그보다 더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주님은 자신이 겸손해지심으로 겸손함이 얼마나 고귀하고 영예로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고 제자들에게는 죄를 제의한 모든 것을 자기들보다 낫게 여기도록 명하셨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당신이 최선을 다하여 그 일을 행하여 보면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선생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참 진리이다. 주님께서 봉사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오직 권세를 가지고 횡포를 부린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깨닫게 될 뿐이다.

5. 주님은 제자들이 복종해야 할 것을 명하시며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끝마치신다. “만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또는 보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행복한 줄로 알고 있다.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일은 재물을 늘리거나 지위가 올라가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못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생각이 옳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행복한 사람은 서로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하여 허리를 숙이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이해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궁금증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세상 왕국에 대한 깊은 환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의무를 그들의 환상에 배치되는 것으로 여겨 버렸는지, 아니면 이 의무를 옳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이 훌륭한 교훈을 통해서 한층 격려된 것은 사실이고, 또한 이것이 훗날 그들이 바라는 행복을 성취시킬 수 있는 필요 조건이 된 것이 틀림 없다.

(1) 이것은 일반적인 주님의 분부에 적용할 수 있다. 다음을 유의하자. 우리가 의무를 깨닫는다는 것은 큰 유익이지만, 그러나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행복은 감소된다. 안다는 것은 행동에 옮기기 위한 것으로써,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지식은 공허하고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아니, 오히려 죄를 더욱 악화시키고 파멸을 촉진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옮을 것이다(눅 12:47, 48; 약 4:17). 알고 행하는 사람에게만 그리스도의 왕국은 확증되고 그들이 바로 현명한 건축가들이다(시 103:17, 18).

(2) 여기서 행함이란 특별히 겸손과 남을 도우라는 분부에 적용된다. 우리가 실제로 겸손하게 되는 것보다 더 깊은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열정적이고 과격한 사람은 않은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적은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악과 증오 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법도대로 참으로 겸손하고 서로 복종하며 섬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소수라도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부패된 인간의 본능을 발동시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친절한 겸손과 우리의 유익을 도모하시는 그의 뜻을 업신여김으로 우리 자신을 높이고 주님을 낮추어 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마음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주님이 우리보다 더욱 위대하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안에 어떠한 형태의 겸손을 나타내시든지 간에 우리는 그보다 더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주님은 자신이 겸손해지심으로 겸손함이 얼마나 고귀하고 영예로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고 제자들에게는 죄를 제의한 모든 것을 자기들보다 낫게 여기도록 명하셨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당신이 최선을 다하여 그 일을 행하여 보면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선생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가 참 진리이다. 주님께서 봉사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될 때에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오직 권세를 가지고 횡포를 부린다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깨닫게 될 뿐이다.주님은 제자들이 복종해야 할 것을 명하시며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끝마치신다. “만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또는 보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행복한 줄로 알고 있다. 서로의 발을 씻기는 일은 재물을 늘리거나 지위가 올라가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못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생각이 옳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행복한 사람은 서로의 발을 씻겨 주기 위하여 허리를 숙이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네가 만일 이것을 알고”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이해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궁금증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세상 왕국에 대한 깊은 환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의무를 그들의 환상에 배치되는 것으로 여겨 버렸는지, 아니면 이 의무를 옳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이 훌륭한 교훈을 통해서 한층 격려된 것은 사실이고, 또한 이것이 훗날 그들이 바라는 행복을 성취시킬 수 있는 필요 조건이 된 것이 틀림 없다.이것은 일반적인 주님의 분부에 적용할 수 있다. 다음을 유의하자. 우리가 의무를 깨닫는다는 것은 큰 유익이지만, 그러나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행복은 감소된다. 안다는 것은 행동에 옮기기 위한 것으로써,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지식은 공허하고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아니, 오히려 죄를 더욱 악화시키고 파멸을 촉진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옮을 것이다(눅 12:47, 48; 약 4:17). 알고 행하는 사람에게만 그리스도의 왕국은 확증되고 그들이 바로 현명한 건축가들이다(시 103:17, 18).여기서 행함이란 특별히 겸손과 남을 도우라는 분부에 적용된다. 우리가 실제로 겸손하게 되는 것보다 더 깊은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열정적이고 과격한 사람은 않은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적은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악과 증오 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법도대로 참으로 겸손하고 서로 복종하며 섬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소수라도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일들을 잘 알며,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복종하고 봉사하면서 살기를 바라면서도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13:18 유다의 배신(요한복음 13:18-30) 주님은 여기서 선생을 배반하려는 유다의 음모를 알고 계셨으나 이제서야 최초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드러내 놓으셨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배반을 당하시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로써 때때로 주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자기들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일 것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아니했었다. 이제 여기서, Ⅰ. 주님은 그 일에 대하여 공공연히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18절). 나는 “내가 택한 자들과” 내가 지나쳐버린 자들이 누구인지 알므로 너희들 모두가 나의 분부한 일들을 행하기를 바랄 수가 없다.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 말씀은 성취될 것이다(시 41:9). 주님은 아직도 그 죄와 범죄자에 대하여는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의 궁금증만 더해 놓으셨다. 1.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모두 옳지는 않다고 선언하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 주신 좋은 것들이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소떼를 구별하여 나눌 수 있을 만큼 분별력있는 말씀으로써 자기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구별해 내여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으시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신 말씀은 제자들과 아울러 그를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유다가 제자들 속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선한 사람들의 집단 속에서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랑이 함께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부정하고 선을 가장한 사람들은 하나도 들어갈 수 없는 축복된 사회에 우리가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2. 주님 자신은 누가 바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를지를 아셨다.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일반적으로 불러내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소수의 선택된 사람인가를 아신다는 말씀이다. 다음을 살펴 보자.

(1) 선택된 사람들이란 주님께서 선택권을 가지고 지명하여 불려낸 사람들이다.

(2) 선택된 사람들을 주님은 아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가 한 번, 사랑으로 지명하여 불러내신 사람은 그 누구도 잊으시는 법이 없으시기 때문이다(딤후 2:19).

3. 주께서 배신당하리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님은 그의 가족 속에 장차 배신할 것으로 예상하는 한 사람을 넣으시고 그의 배신하려는 생각이 진전되어 가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범죄함을 막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동일한 범죄는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모두 옳지는 않다고 선언하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 주신 좋은 것들이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소떼를 구별하여 나눌 수 있을 만큼 분별력있는 말씀으로써 자기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구별해 내여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으시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신 말씀은 제자들과 아울러 그를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유다가 제자들 속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선한 사람들의 집단 속에서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랑이 함께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부정하고 선을 가장한 사람들은 하나도 들어갈 수 없는 축복된 사회에 우리가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주님 자신은 누가 바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를지를 아셨다.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일반적으로 불러내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소수의 선택된 사람인가를 아신다는 말씀이다. 다음을 살펴 보자.선택된 사람들이란 주님께서 선택권을 가지고 지명하여 불려낸 사람들이다.선택된 사람들을 주님은 아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가 한 번, 사랑으로 지명하여 불러내신 사람은 그 누구도 잊으시는 법이 없으시기 때문이다(딤후 2:19).주께서 배신당하리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님은 그의 가족 속에 장차 배신할 것으로 예상하는 한 사람을 넣으시고 그의 배신하려는 생각이 진전되어 가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범죄함을 막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동일한 범죄는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인용하고 있는 이 말씀은 다윗이 그의 대적들의 배신에 대하여 한 불평으로써 유다의 주석가들은 그 대적이 아히도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로티우스는 유다의 죽음이 아히도벨의 죽음과 같을 것임을 암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인용된 시편 구절(시 41:9)에 나타난 다윗의 형편은 병중이라는 것을 참작할 때, 배신의 사건은 아히도벨의 도망이라기보다는 다윗의 다른 친구 중 하나가 저지른 잘못일 가능성이 더 짙다. 이 사건을 주님은 유다에게 적용하신 것이다.

(1) 제자로서의 유다는 최고의 특권 집단 곳에 받아들여져서 주님과 함께 앉아 떡을 먹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서 사랑도 받았고 그리고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닌한 가족이 되었다. 제자로서의 유다는 최고의 특권 집단 곳에 받아들여져서 주님과 함께 앉아 떡을 먹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서 사랑도 받았고 그리고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닌한 가족이 되었다. 주님은 그의 친구들을 친절히 대해 주셨고 유다를 포함한 제자들은 주님을 정성껏 섬겼다. 어디를 가시든지 누님은 유다를 데리고 다니셨고 그들은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접시에서 음식을 나누며 같은 컵으로 마시며 사제의 정을 나누셨다. 유다는 주님과 함께 발효된 빵으로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놀라운 영광도 가졌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않은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이 다 진실한 제자는 아니라는 점이다(고전 10:3-5).

(2) 배신자로서의 유다는 가장 비열한 배신을 행함으로 죄를 범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

[1] 그는 주님을 버리고 등을 돌려 제자들의 집단을 떠나 버렸다(30절).

[2] 그는 주님을 멸시하고 발의 먼지까지도 떨어버리면서 주님과 그 복을 비웃었다. 아니 오히려,

[3] 그는 주님의 원수로 돌변하여 레슬링 선수가 자기의 상대방을 집어 던지기 위하여 먼저 걷어 차듯이 발로 주님을 차버렸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이런 일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고 한때 주님의 제자였다가 후에 주님의 원수로 변하는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발견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주님을 찬양하는 듯이 가장했다가 이제는 주님을 대항하여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은혜를 망각했다는 이유에서 뿐 아니라 배신과 불충이라는 죄목으로도 정죄된다. 배신자로서의 유다는 가장 비열한 배신을 행함으로 죄를 범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그는 주님을 버리고 등을 돌려 제자들의 집단을 떠나 버렸다(30절).그는 주님을 멸시하고 발의 먼지까지도 떨어버리면서 주님과 그 복을 비웃었다. 아니 오히려,그는 주님의 원수로 돌변하여 레슬링 선수가 자기의 상대방을 집어 던지기 위하여 먼저 걷어 차듯이 발로 주님을 차버렸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이런 일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고 한때 주님의 제자였다가 후에 주님의 원수로 변하는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발견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주님을 찬양하는 듯이 가장했다가 이제는 주님을 대항하여 자기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은혜를 망각했다는 이유에서 뿐 아니라 배신과 불충이라는 죄목으로도 정죄된다. Ⅱ. 주님은 유다가 배신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말하는 이유를 설명하신다(19절).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그것이 거침돌이 되어 너희가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며 내가 너희의 기다리는 그 분인 줄을 믿게 하려함이로다.” 1. 주님은 닥쳐 올 일에 대한 명석한 통찰력으로 이번 일에 있어서도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참 하나님인 것을 확실히 증거하여 주셨다. 사실 의심할 만한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주님은 유다가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을 예언함으로써 자신이 인간의 마음 곳의 의도와 생각까지도 파악하실 수 있는 영원한 말씀임을 증명했다. 배신에 대한 신약 성서의 예언들이 후에 성취된 것을 보면, 이 글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는 거이며 따라서 성서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확립된다.

2. 구약 성서의 모든 구조와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해 가면서 주님은 자기가 진정한 메시야라고 증거하며 모든 예언자들은 이 메시야에 대하여 증언했다고 한다. 따라서 성서의 기록대로 그리스도는 고난받아야 한다고 하셨다(눅 24:25, 26; 요 8:28). 주님은 닥쳐 올 일에 대한 명석한 통찰력으로 이번 일에 있어서도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참 하나님인 것을 확실히 증거하여 주셨다. 사실 의심할 만한 아무 근거가 없는데도 주님은 유다가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을 예언함으로써 자신이 인간의 마음 곳의 의도와 생각까지도 파악하실 수 있는 영원한 말씀임을 증명했다. 배신에 대한 신약 성서의 예언들이 후에 성취된 것을 보면, 이 글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는 거이며 따라서 성서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확립된다.구약 성서의 모든 구조와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해 가면서 주님은 자기가 진정한 메시야라고 증거하며 모든 예언자들은 이 메시야에 대하여 증언했다고 한다. 따라서 성서의 기록대로 그리스도는 고난받아야 한다고 하셨다(눅 24:25, 26; 요 8:28). Ⅲ. 주님은 제자들과 그가 불러내어 돌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이 말씀의 의도는 다른 성경에 나타난 바와 동일한 것이지만 여기서 그 통일성을 논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겸손하고 스스로 비천한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의 스스로 비천한 행위를 보고 너희를 멸시할 사람들이 있겠으나, 반면 너희의 그 일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너희의 행한 그 일로 인하여 너희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은 부활하신 일을 통하여 자기가 존귀하게 된 것을 깨닫는 사람은 이 세상의 여론에 의하여 비방을 받아도 만족해 할 것이다. 세상 여론은 제자들 중에 배반자가 하나 있었던 것을 지적해 내면서 지금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고는 “너희가 과연 진실했느냐?” “다 똑같지 않느냐?”고 다구쳤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의 범죄로 인하여 제자들 모두를 나쁘게 생각지 않으셨고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을 소유하시며 영접하실 것이다. 유다가 설교자로 있을 때에 그럴 영접했고 그의 설교에 의하여 회심하고 교화된 사람들은 유다가 후에 배신자로 증명되었다 할 지라도 무엇이 잘못되거나 또 후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유다를 보낸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은 인간이 무엇인지 잘 모르며 더욱이 그가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는 더욱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내서 우리 앞에 나타난 사람들을 우리는 그에게 어떤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는 영접해야 한다. 낯선 사람을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도적을 대접한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계속 그들을 접대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천사를 대접하는 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에 대한 모든 비난과 공격이 아무리 잘 계획된 것일지라도 결코 우리의 사랑을 꺾지 못할뿐더러 우리가 받은 상급을 가로막지도 못한다. 1. 여기서 우리는 기쁨으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목회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다. “비록 내가 보낸 자가 연약하고 가난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다분히 감정적 기분에 좌우된다고 할지라도, 그가 만일 나의 가르침을 전하며 정기적으로 그 직임을 수행하고 기도의 생활과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그를 영접하며 환대하는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될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는 지금 세상을 떠나려 하시면서 또한 제자들에게 자기의 다리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기를 분부하셨다. 그리고 이 분부를 소중히 여겨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그의 법도에 복종하며 그의 말씀 속에 제시된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2.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 요구되고 있다. “나를 영접하는 자와 그의 대리자를 영접하는 자는 동시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심부름으로 와서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같이 아버지 이름으로도 세례를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쁨으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목회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다. “비록 내가 보낸 자가 연약하고 가난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다분히 감정적 기분에 좌우된다고 할지라도, 그가 만일 나의 가르침을 전하며 정기적으로 그 직임을 수행하고 기도의 생활과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면, 그를 영접하며 환대하는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될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는 지금 세상을 떠나려 하시면서 또한 제자들에게 자기의 다리자가 되어 말씀을 전하기를 분부하셨다. 그리고 이 분부를 소중히 여겨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그의 법도에 복종하며 그의 말씀 속에 제시된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 요구되고 있다. “나를 영접하는 자와 그의 대리자를 영접하는 자는 동시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심부름으로 와서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같이 아버지 이름으로도 세례를 주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적으로 “나를 자기 주권자와 구주로서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자기 몸의 일부분으로 그리고 최고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으므로 그의 종교를 택하는 것만 유일한 진리의 종교를 택하는 결과가 된다. Ⅳ. 주님은 제자들 중 하나가 계획하고 있는 음모를 모두들 앞에 밝히 드러내 놓는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잠시 시간을 두어 제자들로 하여금 그 다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동안”심령에 민망”하셨다. 어떤 몸짓으로든지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 보이신 후에 증거하였다. 그는 엄숙하게 선언하셨다(마치 법정에서 증인이 손을 들고 선서하듯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언제나 나를 따르던 너희들 중 하나가!” 아무도 감히 주님을 배신할 수 없었으나 주님께서 믿고 후일 주께서 떠난 다음에 그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배신했다. 이것은 운명론적 필요성에 의하여 유다가 이 죄를 담당하게 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예언에 뒤따라 일어나긴 했으나 예언이 그 원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죄를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 흉악한 죄를, 1. 주님께서 예견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비밀에 싸이고 미래에 일어날 일로써 모든 생물의 눈에 감추어져 있다고 할 지라도 그리스도의 눈 앞에서는 낱낱이 벗겨지고 공개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행할 것을 알기 이전에 벌써 인간의 마음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므로(왕하 8:12) 그들에 의하여 되어질 일까지도 보신다. “네가 패역한 지라 칭함을 입을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사 48:8).

2. 주님은 남은 제자들의 안전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유다 자신까지도 구원하고 악마의 덫에서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배신의 사건을 미리 말씀하셨다. 배신자들은 자신들이 발각된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음모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유다는 주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알고 계심을 알고 시간을 지연시켰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더욱 큰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3. 주님은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일을 묘사하실 때에 “심령이 아주 민망”하셨다. 주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서 그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지금 유다의 망은과 배신을 말씀하실 때처럼 심령이 민망하셨던 때는 없었다. 이 일은 주님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의 제자들의 실수와 낙오는 주님의 심령에 무거운 부담을 주고 그리스도인의 범죄는 주님의 슬픔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온 너희들 중의 하나가 나를 배신하다니! 나는 너희를 신실하다고 믿었고 너희는 내게 존경을 표하더니, 이제 내게서 무슨 잘못을 발견했기에 나를 배신한단 말이냐?”라는 생각이 주님의 가슴속에 파고 들었다. 그들은 마치 불효 자식이 자기를 먹여 주시고 키워 주신 부모의 마음에 슬픔을 가져다 주는 것과 똑같았다(사 1:2; 시 95:10; 사 63:10). 주님께서 예견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비밀에 싸이고 미래에 일어날 일로써 모든 생물의 눈에 감추어져 있다고 할 지라도 그리스도의 눈 앞에서는 낱낱이 벗겨지고 공개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행할 것을 알기 이전에 벌써 인간의 마음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므로(왕하 8:12) 그들에 의하여 되어질 일까지도 보신다. “네가 패역한 지라 칭함을 입을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사 48:8).주님은 남은 제자들의 안전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유다 자신까지도 구원하고 악마의 덫에서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배신의 사건을 미리 말씀하셨다. 배신자들은 자신들이 발각된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음모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유다는 주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알고 계심을 알고 시간을 지연시켰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더욱 큰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주님은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일을 묘사하실 때에 “심령이 아주 민망”하셨다. 주님께서 여러 번에 걸쳐서 그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지금 유다의 망은과 배신을 말씀하실 때처럼 심령이 민망하셨던 때는 없었다. 이 일은 주님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의 제자들의 실수와 낙오는 주님의 심령에 무거운 부담을 주고 그리스도인의 범죄는 주님의 슬픔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온 너희들 중의 하나가 나를 배신하다니! 나는 너희를 신실하다고 믿었고 너희는 내게 존경을 표하더니, 이제 내게서 무슨 잘못을 발견했기에 나를 배신한단 말이냐?”라는 생각이 주님의 가슴속에 파고 들었다. 그들은 마치 불효 자식이 자기를 먹여 주시고 키워 주신 부모의 마음에 슬픔을 가져다 주는 것과 똑같았다(사 1:2; 시 95:10; 사 63:10). Ⅴ. 제자들이 이 경고의 말씀을 재빨리 파악했다. 그들의 주님께서 거짓말이나 농담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는 “서로 보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뉘게 대하여 하시는 말씀인지”궁금히 여겼다. 1. 그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자기들에게 집중된 시선으로 난처함을 표명했다. 이 말씀을 그들에게 공포감마저 주어서 주님을 어떻게 쳐다봐야 할지 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자기들에게 집중된 시선으로 난처함을 표명했다. 이 말씀을 그들에게 공포감마저 주어서 주님을 어떻게 쳐다봐야 할지 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심히 고통당하시는 것을 보았고 따라서 그들도 고통을 당했다. 이 일은 제자들이 후히 대접받던 잔치 자리에서 일어난 일로서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또한 그와 함께 슬퍼하며 고민하는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의 반역을 보고 울 때에 그를 따르던 모든 신하들이 함께 울었듯이(삼하 15:30) 주님의 제자들도 지금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주님의 슬픔은 특히 주의 이름으로 종된 사람들이 악한 행실을 저지르는 것으로써, 이것은 마땅히 주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슬픔이어야 한다. 2. 제자들은 누가 반역자인가를 찾아 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누가 마음속의 죄로 인하여 얼굴이 붉어지는지 또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충성스런 제자들의 양심에 가책이 없기 때문에 떳떳이 얼굴을 들 수 있는 반면, 죄를 저지른 자는 이미 양심에 화인을 맞아 부끄러워하거나 얼굴을 전혀 붉히지 않았으므로 이런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해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을 혼동시켜 어 줄 모르게 만드신 후 잠시 동안 자신의 마을 가라앉히고 일의 내막을 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고, 제자들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셨다. 때때로 주위를 휘돌아보며 잠시 쉬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법이다. 제자들은 누가 반역자인가를 찾아 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누가 마음속의 죄로 인하여 얼굴이 붉어지는지 또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충성스런 제자들의 양심에 가책이 없기 때문에 떳떳이 얼굴을 들 수 있는 반면, 죄를 저지른 자는 이미 양심에 화인을 맞아 부끄러워하거나 얼굴을 전혀 붉히지 않았으므로 이런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해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을 혼동시켜 어 줄 모르게 만드신 후 잠시 동안 자신의 마을 가라앉히고 일의 내막을 말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고, 제자들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셨다. 때때로 주위를 휘돌아보며 잠시 쉬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법이다. Ⅵ.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의 생각을 설명하시며 특히 그들 중 누가 주를 배신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두려워했다. 그러나 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명백한 말만이 그들을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길이며 주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배반자를 알려 주여야 하는 고통을 벗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1. 제자들 중에서 주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이며 주님 다음 자리에 앉아 있던 요한이 이 문제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는 최적격자였다(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한복음 21장 20, 24절과의 비교에서 보면 이 제자는 요한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제 다음의 사항들을 주목해 보자.

(1) 주님께서 이 제자에게 대하여 가지신 특별한 친절을 표현함에 있어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하였다. 주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으나(1절) 요한은 특히 사랑스러웠다. 요한이란 이름이 은혜스럽다는 뜻이다. 구약 성서에서 계시로 인하여 영광을 얻었던 다이엘은 신약의 요한처럼 대단히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단 9:23)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지금 요한이 앉은 자리의 위치와 그의 자세를 살펴 보자.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어떤 나라에서는 식탁에 앉을 때에는 모두 기대는 자세를 취하여 첫째 사람의 가슴에 둘째 사람의 머리를 기대고 계속해서 셋째 사람, 넷째 사람 순으로 앉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써는 자유롭게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하여튼 요한은 주의 품에 기대고 있었고, 이것은 바로 그 당시에 가장 사랑받는 취하는 자세였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누워서 주님과 더불어 남들보다 좀더 자유롭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라. 제자들 중에서 주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이며 주님 다음 자리에 앉아 있던 요한이 이 문제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는 최적격자였다(23절,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한복음 21장 20, 24절과의 비교에서 보면 이 제자는 요한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제 다음의 사항들을 주목해 보자.주님께서 이 제자에게 대하여 가지신 특별한 친절을 표현함에 있어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하였다. 주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으나(1절) 요한은 특히 사랑스러웠다. 요한이란 이름이 은혜스럽다는 뜻이다. 구약 성서에서 계시로 인하여 영광을 얻었던 다이엘은 신약의 요한처럼 대단히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단 9:23)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지금 요한이 앉은 자리의 위치와 그의 자세를 살펴 보자.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어떤 나라에서는 식탁에 앉을 때에는 모두 기대는 자세를 취하여 첫째 사람의 가슴에 둘째 사람의 머리를 기대고 계속해서 셋째 사람, 넷째 사람 순으로 앉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써는 자유롭게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하여튼 요한은 주의 품에 기대고 있었고, 이것은 바로 그 당시에 가장 사랑받는 취하는 자세였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누워서 주님과 더불어 남들보다 좀더 자유롭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독생자를 사랑하사 그의 품에 품으시고(요 1:18) 저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요 17:21). 모든 성자들이 얼마 안 있어 아브라함의 품안에서 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발 앞에 눕는 자는 그의 품에 기대어 눕게 될 것이다.

(3) 요한의 이름이 여기에 숨겨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이 이야기의 기록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는 대신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란 말을 쓰고 싶어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궁전에는 언제나 왕의 친구가 하나씩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기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다는 사실을 명예로운 명칭으로 삼았다. 그가 자기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자기가 자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와 똑같은 경우를 당면했던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안에 한 사람을 안다”고 했다.

2. 모든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가장 열심히 누가 배반지인가를 알려고 했다(24절). 좀 떨어진 거리에 앉었던 베드로는 요한에게 신호하여 질문하게 했다. 베드로는 일반적으로 지도자격이었고 매사에 앞장 서기를 원했다. 요한의 이름이 여기에 숨겨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이 이야기의 기록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는 대신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란 말을 쓰고 싶어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궁전에는 언제나 왕의 친구가 하나씩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기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다는 사실을 명예로운 명칭으로 삼았다. 그가 자기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자기가 자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와 똑같은 경우를 당면했던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안에 한 사람을 안다”고 했다.모든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가장 열심히 누가 배반지인가를 알려고 했다(24절). 좀 떨어진 거리에 앉었던 베드로는 요한에게 신호하여 질문하게 했다. 베드로는 일반적으로 지도자격이었고 매사에 앞장 서기를 원했다. 인간의 본성이 이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만큼 담대해져서 답변해 달라고 질문할 때에도 겸손과 지혜의 법을 지킨다면, 이 법들은 그를 인내심 많고 봉사적인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형태의 사물을 주신다. 그러나 교회에서 항상 앞장서는 사람은 생각이 좀 모자라며, 조심성이 있는 사람은 용기가 부족하다. 주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베드로가 아니고 요한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는 그 배신자가 자기 자신이 아닌 것과 도대체 누가 배신자인지를 알기 원했고, 다른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물러서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가능하면 주님의 제안까지도 가로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 우리를 기만할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결국 그것은 주님께서만 아시는 일이다. 왜 베드로가 직접 질문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요한의 자리가 책상에 가까웠기 때문에 주님의 귀에 대고 살짝 물어 볼 수 있었고, 또 사담을 나누듯 쉽게 답을 얻어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어떤 흥미있는 관심사가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흥미를 충족시키며 그들의 기도에 우리 자신을 의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3. 따라서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속삭이기에 편리한 위치에서), 주여 누구오니이까”(25). 여기서 요한이 보여 주는 것은,

(1) 그의 동료들과 자기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자세에 대하여 감사한 것이다. 이 순간에 요한이 가진 영광을 베드로는 가지지 못했으나, 그러나 주님께서 요한에게 들려주시는 힌트와 선언의 말씀을 소홀히 넘겨버리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은 때로 주님의 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배우게 되며 자신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임을 상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요한은 자기가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베드로에게 감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두 받은 바 은사가 각기 다르니 받은 대로 행할 것이다(롬 12:6).

(2) 선생께 대한 경외심이다. 그가 여기서 선생의 귀에 대고 속삭이면서도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보면 그가 한 가족의 일원으로 용납되고 함께 생활해 왔으면서도 그의 선생께 대한 존경심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무엇을 표현하든지 간에 존경심을 가지고 할 것과, 또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비밀의 헌신을 한다고 할 지라도 공중 앞에서와 같이 단정한 태도로 행할 것을 일깨워 준다. 정중한 영혼은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고 또한 주님의 위대하심과 아울러 자신의 비천함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

4. 주님께서는 이 질문에 곧 답해 주셨는데 그 사실을 다른 제자들이 계속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면 요한의 귀에 대시고 속삭여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주님께서 한 조각을 찍어다가 유다에게 줄 때에 요한은 엄밀히 그 행동을 관찰했고, 유다는 이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그 떡을 받고 맛있는 떡조각을 검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1) 주님은 암호로 배신자를 지적해 내셨다. 그는 배신자의 이름을 요한에게 말로 가르쳐 줄 수도 있었으나 이렇게 하심으로써 요한의 관찰력을 시험해 보실 수 있었고 또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악한 형제들은 말로써 알려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풍기는 암시, 즉 그들이 맺는 열매라든지 그들의 명을 판단함으로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을 바로 판단하기 위하여는 부지런함과 계속적인 주시함이 필요하다.

(2) 주님께서는 떡조각으로 표시를 삼으셨는데 이는 아주 적절한 암시였다. 그것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배신자는 그와 함께 떡을 먹는 자로서 그 일행 중의 하나이라는 말씀을 성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위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행위로써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쳐 준다.

[1] 주님은 때때로 배신자들에게 떡조각을 주신다. 말하자면 세상에서의 부귀, 명예, 쾌락 등이 떡조각들인데 이같은 신의 섭리가 악한 사람들 손에 때로 주어진다. 유다는 자기가 떡조각을 받은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했을 서이다. 이와 같은 바보스런 사람들의 번영은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2] 우리는 우리에게 악의를 가지고 대드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유다의 음모를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식탁에서 아무에게도 행하지 않은 친절을 베풀어 떡을 떼어 주었다. “남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대로 주님은 행동하셨고, 우리도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 따라서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속삭이기에 편리한 위치에서), 주여 누구오니이까”(25). 여기서 요한이 보여 주는 것은,그의 동료들과 자기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자세에 대하여 감사한 것이다. 이 순간에 요한이 가진 영광을 베드로는 가지지 못했으나, 그러나 주님께서 요한에게 들려주시는 힌트와 선언의 말씀을 소홀히 넘겨버리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는 사람들은 때로 주님의 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배우게 되며 자신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임을 상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요한은 자기가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베드로에게 감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두 받은 바 은사가 각기 다르니 받은 대로 행할 것이다(롬 12:6).선생께 대한 경외심이다. 그가 여기서 선생의 귀에 대고 속삭이면서도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보면 그가 한 가족의 일원으로 용납되고 함께 생활해 왔으면서도 그의 선생께 대한 존경심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무엇을 표현하든지 간에 존경심을 가지고 할 것과, 또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비밀의 헌신을 한다고 할 지라도 공중 앞에서와 같이 단정한 태도로 행할 것을 일깨워 준다. 정중한 영혼은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고 또한 주님의 위대하심과 아울러 자신의 비천함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주님께서는 이 질문에 곧 답해 주셨는데 그 사실을 다른 제자들이 계속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면 요한의 귀에 대시고 속삭여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주님께서 한 조각을 찍어다가 유다에게 줄 때에 요한은 엄밀히 그 행동을 관찰했고, 유다는 이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그 떡을 받고 맛있는 떡조각을 검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주님은 암호로 배신자를 지적해 내셨다. 그는 배신자의 이름을 요한에게 말로 가르쳐 줄 수도 있었으나 이렇게 하심으로써 요한의 관찰력을 시험해 보실 수 있었고 또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악한 형제들은 말로써 알려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풍기는 암시, 즉 그들이 맺는 열매라든지 그들의 명을 판단함으로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을 바로 판단하기 위하여는 부지런함과 계속적인 주시함이 필요하다.주님께서는 떡조각으로 표시를 삼으셨는데 이는 아주 적절한 암시였다. 그것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배신자는 그와 함께 떡을 먹는 자로서 그 일행 중의 하나이라는 말씀을 성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위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행위로써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쳐 준다.주님은 때때로 배신자들에게 떡조각을 주신다. 말하자면 세상에서의 부귀, 명예, 쾌락 등이 떡조각들인데 이같은 신의 섭리가 악한 사람들 손에 때로 주어진다. 유다는 자기가 떡조각을 받은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했을 서이다. 이와 같은 바보스런 사람들의 번영은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우리는 우리에게 악의를 가지고 대드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유다의 음모를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식탁에서 아무에게도 행하지 않은 친절을 베풀어 떡을 떼어 주었다. “남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대로 주님은 행동하셨고, 우리도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 Ⅶ. 유다 자신은 여기서 그의 악한 생각을 깨닫는 대신, 오히려 그 마음을 굳혔고 그에게 주어진 주님의 경고는 그의 죽음을 끌어들이는 냄새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은, 1. 사탄이 그를 포로로 삼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이 그를 지배함으로써 유다의 마음이 우울해지고 혼란을 일으켰거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날뛰게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극한 상황이 벌어지고 유다가 돼지떼와 함께 바다에 빠져 질식했더라면 그것이 유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를 지배함으로써 그에게 주님 자신과 주님의 교훈에 대한 편견을 주어 주님을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경멸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의 마음속에 불의한 마음의 소산인 탐욕이 불붙게 하여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구애되지 않고 행할 결심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1) 전에는 그에게 사탄이 들어와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 사탄이 그에게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유다는 처음부터 파멸의 아들로서 마귀였으나(요 6:7)) 지금은 사탄이 완전히 그를 지배하여 그 속에 꽉 들어찬 것이다. 선생을 배신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은 이제 완전히 무르익어 단단히 결심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지금 더 악한 일곱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눅 11:26). 다음의 사항을 유의해 보자.

[1] 사탄은 육의 일만을 행하는 모든 죄인들 속에 거하고 있으나(엡 2:2) 어떤 때는 다른 때보다 더 분명하고 강하게 몰려 들어가 큰 악을 심어 줌으로써 그의 인간성과 양심을 자극시킨다.

[2] 주님은 배신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많은 수의 사탄들이 거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유다의 죄가 그의 다른 박해자들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2) 떡조각을 받은 후에 사탄이 어떻게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갔는가? 아마도 유다는 그 떡조각이 자기를 지적하는 것임을 이 때에 알고서 그의 결심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주님께서 주신 자비의 선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더 악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고 회개를 일으키는 대신 더욱 마음이 굳어지게 했다. 머리 위에 쌓은 숯불이 녹이기는커녕 더욱 굳어지게 만든 셈이다.

2. 여기서부터 주님은 유다를 제자의 무리로부터 제외해 놓으시고 그의 마음의 욕망대로 실행하라고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말씀은 유다의 악한 생각을 권하거나 정당화시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1) 유다를 사탄의 행위와 권능 속에 포기해 버리는 말씀이다. 주님은 사탄이 이미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아무 어려움이 없이 그를 정복한 것을 아셨고 유다는 지금 아무 힘없이 사탄에게 항복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주님께서 사용하신 여러 가지 방법들은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므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만일 네가 너 자신을 파괴할 결심을 했거든 지체 말고 계속하라. 그리고 그 결과를 네가 차지하라”고 하신 것이다. 악령이 환영을 받으며 들어오면 선한 영은 당연히 물러서는 법이다.

(2) 유다에게 그의 악행을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도전적인 말씀이다. “너는 내게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어서 실행에 옮겨라. 빠르면 빠를수록 나는 환영한다. 나는 너의 배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다음을 유의해 보자. 사탄이 그를 포로로 삼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이 그를 지배함으로써 유다의 마음이 우울해지고 혼란을 일으켰거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날뛰게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극한 상황이 벌어지고 유다가 돼지떼와 함께 바다에 빠져 질식했더라면 그것이 유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를 지배함으로써 그에게 주님 자신과 주님의 교훈에 대한 편견을 주어 주님을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경멸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의 마음속에 불의한 마음의 소산인 탐욕이 불붙게 하여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구애되지 않고 행할 결심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전에는 그에게 사탄이 들어와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 사탄이 그에게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유다는 처음부터 파멸의 아들로서 마귀였으나(요 6:7)) 지금은 사탄이 완전히 그를 지배하여 그 속에 꽉 들어찬 것이다. 선생을 배신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은 이제 완전히 무르익어 단단히 결심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지금 더 악한 일곱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눅 11:26). 다음의 사항을 유의해 보자.사탄은 육의 일만을 행하는 모든 죄인들 속에 거하고 있으나(엡 2:2) 어떤 때는 다른 때보다 더 분명하고 강하게 몰려 들어가 큰 악을 심어 줌으로써 그의 인간성과 양심을 자극시킨다.주님은 배신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많은 수의 사탄들이 거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유다의 죄가 그의 다른 박해자들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떡조각을 받은 후에 사탄이 어떻게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갔는가? 아마도 유다는 그 떡조각이 자기를 지적하는 것임을 이 때에 알고서 그의 결심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주님께서 주신 자비의 선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더 악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고 회개를 일으키는 대신 더욱 마음이 굳어지게 했다. 머리 위에 쌓은 숯불이 녹이기는커녕 더욱 굳어지게 만든 셈이다.여기서부터 주님은 유다를 제자의 무리로부터 제외해 놓으시고 그의 마음의 욕망대로 실행하라고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 말씀은 유다의 악한 생각을 권하거나 정당화시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유다를 사탄의 행위와 권능 속에 포기해 버리는 말씀이다. 주님은 사탄이 이미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아무 어려움이 없이 그를 정복한 것을 아셨고 유다는 지금 아무 힘없이 사탄에게 항복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주님께서 사용하신 여러 가지 방법들은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므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만일 네가 너 자신을 파괴할 결심을 했거든 지체 말고 계속하라. 그리고 그 결과를 네가 차지하라”고 하신 것이다. 악령이 환영을 받으며 들어오면 선한 영은 당연히 물러서는 법이다.유다에게 그의 악행을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도전적인 말씀이다. “너는 내게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어서 실행에 옮겨라. 빠르면 빠를수록 나는 환영한다. 나는 너의 배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다음을 유의해 보자.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하시는 고통과 죽음에 자발적이셔서 그의 맡으신 일이 지연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주님은 유다가 그를 배신하는 일이 마치 자기가 지금 막 하려고 하는 어떤 일인 양 말씀하신다. 악한 일을 구상하거나 고안해 낸 사람은 반드시 그 악한 일을 실천하고야 만다. 3.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속삭이시는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떡조각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요한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이거나 다른 손님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다.”(28절)었다.

(1) 다른 사람들이 주님께서, 유다가 배신자라고 말씀하셨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유다가 그런 사람일 줄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다음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속삭이시는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떡조각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요한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이거나 다른 손님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다.”(28절)었다.다른 사람들이 주님께서, 유다가 배신자라고 말씀하셨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유다가 그런 사람일 줄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다음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주님의 제자들이 그들 중 하나가 배신자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아 염려하는 바람에 주님의 하시는 일을 재빨리 파악하지 못한 우둔함은 용서받을 수 있는 과오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주님께서 “바로 그 사람은……”이라고 거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만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도록 잘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들 중의 누구를 함부로 의심하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사랑은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2)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행위가 주님께서 재정을 맡고 있는 유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 무엇을 명시하는 줄로 생각했다. 이 경우에 그들이 추측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얼마 안 되는 재정을 지출해서까지 하시려고 하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를 배운다.

[1] 경건해지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잔치에 필요한 것들을 사야 한다. 주님께서도 유월절 음식을 잡수기 위하여 방은 빌렸지만 그 식탁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행위가 주님께서 재정을 맡고 있는 유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 무엇을 명시하는 줄로 생각했다. 이 경우에 그들이 추측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얼마 안 되는 재정을 지출해서까지 하시려고 하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를 배운다.경건해지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잔치에 필요한 것들을 사야 한다. 주님께서도 유월절 음식을 잡수기 위하여 방은 빌렸지만 그 식탁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나가기에 필요한 서들은 정확히 계산되고 잘 쓰여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 비용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우리의 복음적인 예배는 값비싼 제물을 필요로 하는 모제의 율법에 근거한 예배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2]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은,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은, 첫째, 주님은 여러 여인들의 손으로 거두어진 현금으로 살으셨지만(눅 8:3) 그의 적은 것을 나누어서 비록 적으나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님은 가난해서 뿐만 아니라, 무료로 치료를 해 주는 등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의무에서 충분히 예외일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위하여 제자들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 중에서 꺼내어 나누어 주는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엡 4:28). 둘째, 종교적 잔치의 때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적절한 때로 생각되었다. 유월절을 기념하시면서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자비로움을 경험할 때에, 동시에 우리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로움을 지녀야 한다. 4. 여기서 유다는 자기의 계획을 수행하기로 각오를 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중요하게 관찰해야 한다.

(1) 유다의 재빠른 동작을 보라. 그는 곧 나가서 그 집을 떠났다.

[1] 제자들의 무리 중에서 자기의 정체가 명백하게 밝혀질 것을 두려워했고 딴 제자들이 모두 자기에게 달려들면 혹시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최소한도 그의 계획을 진행시켜야 할 이유 때문에 그 자리를 뜬 것이다.

[2] 그는 마치 주님의 무리들과 사도들의 사회에 싫증을 느낀 사람처럼 나갔다. 주님은 그를 내쫓을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는 자기 스스로를 쫓아내버린 것이다.

[3] 그는 자기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기와 이미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만나 약속을 해 두려고 나갔다. 이때 사탄은 그의 속에 들어가서 그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유다로 하여금 서두르게 만들었다.

(1) 그가 나갈 때는 “밤이었다.”

[1] 직업에 종사할 때에 계절이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때가 밤이었으나 사탄은 유다 속에 들어가니 그는 밤의 찬 공기나 어두움이 문제되지 않았다. 사탄의 종이 이처럼 사탄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모험적 봉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게으르고 겁쟁이였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2] 이 때가 밤이었기 때문에 유다는 그의 자존심을 상하거나 위장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대제사장들과 만나는 모습이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 같은 어두움의 일을 행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로써 밤을 생각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다(욥 24:13).

여기서 유다는 자기의 계획을 수행하기로 각오를 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중요하게 관찰해야 한다.유다의 재빠른 동작을 보라. 그는 곧 나가서 그 집을 떠났다.제자들의 무리 중에서 자기의 정체가 명백하게 밝혀질 것을 두려워했고 딴 제자들이 모두 자기에게 달려들면 혹시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최소한도 그의 계획을 진행시켜야 할 이유 때문에 그 자리를 뜬 것이다.그는 마치 주님의 무리들과 사도들의 사회에 싫증을 느낀 사람처럼 나갔다. 주님은 그를 내쫓을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는 자기 스스로를 쫓아내버린 것이다.그는 자기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기와 이미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만나 약속을 해 두려고 나갔다. 이때 사탄은 그의 속에 들어가서 그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유다로 하여금 서두르게 만들었다.그가 나갈 때는 “밤이었다.”직업에 종사할 때에 계절이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때가 밤이었으나 사탄은 유다 속에 들어가니 그는 밤의 찬 공기나 어두움이 문제되지 않았다. 사탄의 종이 이처럼 사탄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고 모험적 봉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게으르고 겁쟁이였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이 때가 밤이었기 때문에 유다는 그의 자존심을 상하거나 위장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대제사장들과 만나는 모습이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 같은 어두움의 일을 행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로써 밤을 생각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다(욥 24:13).

13:31 그리스도의 떠나심이 예언됨(요한복음 13:31-35) 이 부분부터 14장 마지막 부분까지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책상 앞에서 나눈 대화였다. 만찬이 끝나자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님과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들은 아주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것은 우리들이 책상 앞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나누는 대화가 종교적으로 유익한 것이 되도록 노력할 것을 가르쳐 준다. 주님은 이 대화를 시작하신다. 우리가 만일 이처럼 선한 관계를 조성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 관계를 교육적 목적에 사용하기 위하여 좀더 겸손해지면 질수록 우리는 또한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특히 지위나 평판, 재능 등으로 통솔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흥미를 저들의 유익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실제에 있어서는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이었겠지만) 살펴 보자. Ⅰ. 그리스도께서 받게 될 고통과 죽음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신비성을 제자들은 몰랐다. 따라서 그들은 그러한 일이 그리스도에게 생기지 않기를 바랐음으로 주님은 그의 십자가의 거침돌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이 교훈의 말씀을 들려주신 것이다. 주님은 거짓 형제인 유다가 나갈 때까지는 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악한 자들이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유익한 대화에 지장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가자 주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셨다. 유다가 그들의 사랑이 충만한 만찬을 더럽히고 제자들의 집단의 거침돌인 것을 발견하고 그를 제해버린 때가 인자의 영광받은 때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회가 정결함으로써 영광을 받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가 부패하면 그리스도가 비난을 받게 되고 그 부패함을 깨끗게 함으로써 그 비난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유다는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한 수레바퀴를 굴리러 나갔고, 즉시 성사될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지금 그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다. 1. 여기서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말씀이 있는데 우리에게 한없이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1) 주님은 그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셔야 한다. 가장 큰 치욕과 불명예로움을 입고 악이용되며, 그의 친구들의 비겁과 원수들의 오만함으로 인하여 모욕을 당케 되실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1] 주님은 사탄과 어두움의 세력을 쳐부수고 영광의 승리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까지 감추어 두셨던 듯한 확신으로 갑옷을 삼고 하나님과 인간의 적들을 몰아내실 것이다.

[2] 주님은 인간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시는데, 이 피는 만인에게 줄 끊임없이 마르지 않는 기쁨과 은혜의 샘이며, 인간 모두에게 영원한 정의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3] 주님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의 고난에서의 인내, 용기 등에 대한 위대한 표본으로써 세상의 멸시를 견디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뜨거운 정열과 인간의 영혼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베풀었던 많은 기적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고통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고통을 통하여 받으실 영광이 과거의 어떠한 영광보다도 도 큰 영광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1]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으로써 이 수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주님께서 받으셨던 모든 수난의 대가는 엄청난 이익이었다. 율법의 목적은 풍성하게 이루어졌고, 주께서 통치하시게 될 영광을 결국 선포되고 지탱되었다.

[2] 주님의 수난은 그의 거룩하심과 자비로우심의 명백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그의 창조와 섭리를 통하여 나타나지만 구속의 사업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밝혀진다(고전 1:24; 고후 4:6).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서 그 사랑을 인간에게 나타내신다.

(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계시다면, 주님은 그의 수난 이후에 놀라운 영광을 받을 것이 분명해진다. 주님은 이같은 사실을 역설하고 계시다. 즉,

[1]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사람들은 진정으로 영화로와진다. 지옥과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비방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마음먹으시고, 그대로 실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마음먹으시고, 그대로 실행하셨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놀라운 표적과 기적들로써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만들자, 이 놀라운 사건이 핍박자들로 하여금,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말씀이 있는데 우리에게 한없이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주님은 그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셔야 한다. 가장 큰 치욕과 불명예로움을 입고 악이용되며, 그의 친구들의 비겁과 원수들의 오만함으로 인하여 모욕을 당케 되실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주님은 사탄과 어두움의 세력을 쳐부수고 영광의 승리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까지 감추어 두셨던 듯한 확신으로 갑옷을 삼고 하나님과 인간의 적들을 몰아내실 것이다.주님은 인간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그의 피를 흘리시는데, 이 피는 만인에게 줄 끊임없이 마르지 않는 기쁨과 은혜의 샘이며, 인간 모두에게 영원한 정의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주님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의 고난에서의 인내, 용기 등에 대한 위대한 표본으로써 세상의 멸시를 견디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뜨거운 정열과 인간의 영혼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베풀었던 많은 기적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고통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고통을 통하여 받으실 영광이 과거의 어떠한 영광보다도 도 큰 영광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으로써 이 수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주님께서 받으셨던 모든 수난의 대가는 엄청난 이익이었다. 율법의 목적은 풍성하게 이루어졌고, 주께서 통치하시게 될 영광을 결국 선포되고 지탱되었다.주님의 수난은 그의 거룩하심과 자비로우심의 명백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그의 창조와 섭리를 통하여 나타나지만 구속의 사업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밝혀진다(고전 1:24; 고후 4:6).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서 그 사랑을 인간에게 나타내신다.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계시다면, 주님은 그의 수난 이후에 놀라운 영광을 받을 것이 분명해진다. 주님은 이같은 사실을 역설하고 계시다. 즉,주님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사람들은 진정으로 영화로와진다. 지옥과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비방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마음먹으시고, 그대로 실행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하시기로 마음먹으시고, 그대로 실행하셨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놀라운 표적과 기적들로써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만들자, 이 놀라운 사건이 핍박자들로 하여금,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고난 중에서 영화롭게 만드신 후에 더욱 큰 영광을 주셨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시고 그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있게 하신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 안에서(evn e`outw/|)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신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인 자기 속에서 영광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 형성되어 있는 그의 나라 안에서만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인간성 자체 내에서도 영광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의 빠른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은 후에 그의 추억 속에서 영광을 얻지만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주님은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7장 5절에 기록된 대로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그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계 3:21) 진실로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랴!

[3] 주님의 영광은 즉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그의 앞에 다가온 기쁨과 영광의 위대함을 보시지 않고 그 임박함을 또한 보셨다. 이는 그의 슬픔과 고난이 곧 끝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왕자들이 행한 선행은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오랫 동안 보류되어 있는 수도 있으나 주님은 당장에 그 보상을 받으신 것이다. 물론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40시간과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로 영광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시 16:10).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리고 그 고난으로 영화로와 지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며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다음을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 안에서(evn e`outw/|)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신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인 자기 속에서 영광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 형성되어 있는 그의 나라 안에서만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인간성 자체 내에서도 영광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의 빠른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은 후에 그의 추억 속에서 영광을 얻지만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주님은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7장 5절에 기록된 대로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그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계 3:21) 진실로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랴!주님의 영광은 즉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그의 앞에 다가온 기쁨과 영광의 위대함을 보시지 않고 그 임박함을 또한 보셨다. 이는 그의 슬픔과 고난이 곧 끝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상의 왕자들이 행한 선행은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오랫 동안 보류되어 있는 수도 있으나 주님은 당장에 그 보상을 받으신 것이다. 물론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40시간과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이란 기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로 영광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시 16:10).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리고 그 고난으로 영화로와 지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며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다음을 주목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신다는 데는 그의 겸손과 함께 그에게 주어진 보상이 이미 고려되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을 겸손케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케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놀라운 영광을 얻으신다면 그 아들 역시 영광을 받게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사 53:12 참고).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 사람들은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되는 행복을 가지게 될 것이 틀림 없다. 2.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가르쳐 주실 때에 제자들의 마음은 그 뜻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먼 거리에 있었으므로 우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33절)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현재 당면한 상황에서 두 가지 기회를 포착하여 선용하도록 제시하신다.

(1) 주께서 그들과 함께 이 세상에 계실 기간이 지극히 짧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소자들”이라고 부르셨다. 이 말씀은 그들이 연약함을 보시고 사랑스러움과 염려심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아버지로서 그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가셔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하신 말씀으로써 그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이란 말씀을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승천에 대한 말씀인지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지 간에 하여튼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리한 점을 잘 이용하라고 하신다. 만약 주님께 물어 볼 질문이나 바라고 싶은 말씀, 훈계 등이 있으면 지금 곧 물어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계실 시간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이 도움을 받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그 도움을 이용해야 한다. 잠시 후면 더 이상 도움을 얻지 못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셔야만 행복과 위안이 있는 줄로 생각하지 말고, 마치 어린 아이가 유모의 보살핌 없이 걸어 가듯이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길과 방법을 제시된다 하여도 우리가 그 속에 언제까지나 쉬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과 방법은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할 뿐이다.

(2) 이제 주님께서 가시는 그 세계에까지 제자들이 따라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시는데(7:4), 이는 죄인들을 설득시키고 각성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으로 제자들도 재빨리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1]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떠나가신 이후에 주님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으리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와 다시 함께 있게 되기를 너희가 원하리라”는 뜻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온 대로 자비심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절실히 요구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안위자이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이 고생을 할 때마다 실제적 위안을 직접 주셨으나 그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여 그가 주시는 위안의 진정한 가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너희가 나를 찾되 만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는 “너희가 나를 찾으리라”라고만 말씀하신다. 즉 제자들도 유대인들처럼 주님의 육체적 모습을 찾지는 못할 것이나 그에게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 무엇을 찾게 됨으로써 그 수고가 헛되지는 않을 것임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비록 찾지는 못했을지라도 선한 의도를 가지고 무덤 속에서 주님의 사체를 찾으려 했었다.

[2]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는 세계에서 빛과 더불어 거하시러 가시는 주님의 높으신 뜻과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낮고 미래에 대한 심각한 생각들을 나타내 준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신 이유는(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를 섬길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좀더 부지런하고 조심성있게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겐 용기와 결단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에까지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도망해 버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또 그들의 사명과 이 세상과의 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면류관에꺼지 따라갈 수 없다.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가르쳐 주실 때에 제자들의 마음은 그 뜻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먼 거리에 있었으므로 우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33절)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현재 당면한 상황에서 두 가지 기회를 포착하여 선용하도록 제시하신다.주께서 그들과 함께 이 세상에 계실 기간이 지극히 짧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그들을 “소자들”이라고 부르셨다. 이 말씀은 그들이 연약함을 보시고 사랑스러움과 염려심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아버지로서 그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가셔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하신 말씀으로써 그들에게 축복을 빌어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이란 말씀을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승천에 대한 말씀인지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지 간에 하여튼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리한 점을 잘 이용하라고 하신다. 만약 주님께 물어 볼 질문이나 바라고 싶은 말씀, 훈계 등이 있으면 지금 곧 물어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계실 시간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이 도움을 받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그 도움을 이용해야 한다. 잠시 후면 더 이상 도움을 얻지 못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셔야만 행복과 위안이 있는 줄로 생각하지 말고, 마치 어린 아이가 유모의 보살핌 없이 걸어 가듯이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길과 방법을 제시된다 하여도 우리가 그 속에 언제까지나 쉬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과 방법은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할 뿐이다.이제 주님께서 가시는 그 세계에까지 제자들이 따라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다른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시는데(7:4), 이는 죄인들을 설득시키고 각성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으로 제자들도 재빨리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떠나가신 이후에 주님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으리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와 다시 함께 있게 되기를 너희가 원하리라”는 뜻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배워온 대로 자비심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절실히 요구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안위자이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이 고생을 할 때마다 실제적 위안을 직접 주셨으나 그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여 그가 주시는 위안의 진정한 가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너희가 나를 찾되 만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는 “너희가 나를 찾으리라”라고만 말씀하신다. 즉 제자들도 유대인들처럼 주님의 육체적 모습을 찾지는 못할 것이나 그에게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 무엇을 찾게 됨으로써 그 수고가 헛되지는 않을 것임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비록 찾지는 못했을지라도 선한 의도를 가지고 무덤 속에서 주님의 사체를 찾으려 했었다.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는 세계에서 빛과 더불어 거하시러 가시는 주님의 높으신 뜻과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낮고 미래에 대한 심각한 생각들을 나타내 준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신 이유는(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를 섬길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좀더 부지런하고 조심성있게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겐 용기와 결단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에까지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도망해 버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또 그들의 사명과 이 세상과의 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면류관에꺼지 따라갈 수 없다. Ⅱ. 주님은 형제 사랑에 대한 위대한 의무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35절). 유다는 밖으로 나감으로써 자기가 거짓 형제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에 해독을 주는 질투나 의심을 서로 해서는 안 된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의 유다가 섞여 있긴 했으나 그들 모두가 유다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유대인의 적대심이 최고조에 달했으므로 제자들도 주님께서 당하시는 어려움을 함께 당할 각오를 해야 했고, 바로 이러한 곤경 가운데서 형제적 사랑은 서로서로에게 큰 힘을 이루는 것으로써 절대 필요하였다. 상호간에 주고받는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주장을 살펴 보자. 1. 이 사랑은 주님의 명령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34절)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하나의 사교적이고 유쾌한 것으로써 또는 훌륭하고 유익한 것으로써만 가르치시지 않고 그의 나라의 가장 근본적 법으로써 명령하신다. 이 사랑의 법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명령과 병행하여 주장된다. 이 명령은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통치자의 명령이요, 또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구원자의 명령으로써 우리의 영혼의 병을 치료하는데 필요하고, 영원한 행복을 준비시키는 데 필요한 명령이다. 이 명령은 새 계명으로써,

(1) 다시 새로워진 계명이다. 이 계명은 태초로부터 있었고 자연의 법칙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모세의 율법 중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이었다. 그런데 이 계명이 신약에서는 새 법의 수여자이신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계명 중 하나로써 새 계명이라고 불리워진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책이 새로 간행될 때 수정되고 증보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계명이 유대 교회의 전통에 의하여 밀려나고 부패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 계명을 소생시키시고 새 계명이라고 부르셨다. 복수와 앙갚음을 정당화하는 율법이 그 시대를 지배했고 자기 사랑이 성행했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시대감각에 뒤진 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던 때에 주님께서 이 계명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2) 새로 작곡된 노래가 새로운 붐을 일으키듯이 이 계명을 특별한 감사를 내포한 훌륭한 명령이다.

(3) 이 계명은 결코 쇠하지 않을 새 계약처럼 늘 새롭게 보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계명이다. 믿음과 소망은 앍아질지라도 이 계명은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4) 주님께서 이 계명을 주실 때, 이 계명 자체가 분명히 새 계명이었다. 전에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너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나, 지금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서로 서로 짊어지는 상호적인 의무를 말씀하심으로 이 계명은 더욱 강한 힘을 지닌 새 계명이 되는 것이다.

2. 주님께서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이 형제적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이유와 그 같은 사랑의 법칙은 오랜 세대 동안 감추어진 채로 있었는데, 지금 완전히 새 것으로 드러나면서 새 계명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본보기로 보여 주신 사랑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은 그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셨고 진심으로 염려하여 주셨으며, 그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하여 가르치시기도 하고 의논도 해 주셨다. 그들과 함께 기도도 하셨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셨으며, 그들이 비난을 받을 때에는 변호하여 주셨고 약해졌을 때에는 편을 들어 주셨다. 그리고 공중 앞에서 그들이 자신의 어머니나 누이나 동생보다 더 가깝다고 말씀하셨다. 때로는 제자들의 잘못을 꾸짖기도 하셨으나 또 때론 공감도 해 주셨고 용서도 해 주셨다. 진정으로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방금도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여야 하며, 끝까지 사랑하여야 한다.

(2) 주님께서 그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은 특별한 사랑의 본보기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는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을 행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당연히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바라시고 계시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으로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잡아야 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은 거저 주는 사랑으로써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공들인 것이어야 하며, 값비싸고 변함없고 끈기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각자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실천해야 한다(롬 15:1, 3; 엡 5:2, 25; 빌 2:1-5).

3. 제자들의 행함에 대한 평판이 따르게 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 이 사랑은 주님의 명령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34절)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하나의 사교적이고 유쾌한 것으로써 또는 훌륭하고 유익한 것으로써만 가르치시지 않고 그의 나라의 가장 근본적 법으로써 명령하신다. 이 사랑의 법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명령과 병행하여 주장된다. 이 명령은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통치자의 명령이요, 또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구원자의 명령으로써 우리의 영혼의 병을 치료하는데 필요하고, 영원한 행복을 준비시키는 데 필요한 명령이다. 이 명령은 새 계명으로써,다시 새로워진 계명이다. 이 계명은 태초로부터 있었고 자연의 법칙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모세의 율법 중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이었다. 그런데 이 계명이 신약에서는 새 법의 수여자이신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계명 중 하나로써 새 계명이라고 불리워진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책이 새로 간행될 때 수정되고 증보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계명이 유대 교회의 전통에 의하여 밀려나고 부패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 계명을 소생시키시고 새 계명이라고 부르셨다. 복수와 앙갚음을 정당화하는 율법이 그 시대를 지배했고 자기 사랑이 성행했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시대감각에 뒤진 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던 때에 주님께서 이 계명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새로 작곡된 노래가 새로운 붐을 일으키듯이 이 계명을 특별한 감사를 내포한 훌륭한 명령이다.이 계명은 결코 쇠하지 않을 새 계약처럼 늘 새롭게 보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계명이다. 믿음과 소망은 앍아질지라도 이 계명은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주님께서 이 계명을 주실 때, 이 계명 자체가 분명히 새 계명이었다. 전에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너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나, 지금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서로 서로 짊어지는 상호적인 의무를 말씀하심으로 이 계명은 더욱 강한 힘을 지닌 새 계명이 되는 것이다.주님께서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이 형제적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이유와 그 같은 사랑의 법칙은 오랜 세대 동안 감추어진 채로 있었는데, 지금 완전히 새 것으로 드러나면서 새 계명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본보기로 보여 주신 사랑을 이해해야 한다. 주님은 그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셨고 진심으로 염려하여 주셨으며, 그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하여 가르치시기도 하고 의논도 해 주셨다. 그들과 함께 기도도 하셨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셨으며, 그들이 비난을 받을 때에는 변호하여 주셨고 약해졌을 때에는 편을 들어 주셨다. 그리고 공중 앞에서 그들이 자신의 어머니나 누이나 동생보다 더 가깝다고 말씀하셨다. 때로는 제자들의 잘못을 꾸짖기도 하셨으나 또 때론 공감도 해 주셨고 용서도 해 주셨다. 진정으로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방금도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여야 하며, 끝까지 사랑하여야 한다.주님께서 그의 생명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은 특별한 사랑의 본보기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는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을 행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당연히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바라시고 계시다. 이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으로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잡아야 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은 거저 주는 사랑으로써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공들인 것이어야 하며, 값비싸고 변함없고 끈기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각자의 영혼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실천해야 한다(롬 15:1, 3; 엡 5:2, 25; 빌 2:1-5).제자들의 행함에 대한 평판이 따르게 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 다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즉 우리는 사랑을 갖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 근본을 가져야 하고 습관화해야 한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주님의 제자임을 나타내 보여 주는 표식임을 알아야 하겠다. 이 행위로써 주님는 제자들을 아시고, 제자들 자신이 자신을 알며, 또한 남들이 제자들을 알아 본다. 따라서 이 사랑의 행위는 주님의 가족들의 통일된 차림새요 드러난 특징이며 아울러 주님은 이 행위로써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하셨고 제자들을 남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다. 이제 누구든지 서로 다정한 사람들을 보면 “저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어”라고 말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1)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무척 바라며 신경을 쓰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각자가 자기의 길을 가는 세상이었으나 제자들은 서로 간에 진심을 주고 받는 관계였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기적을 행함으로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이 기적만을 행하는 자는 “소리나는 꽹과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전 13:1, 2).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참 교회의 핵심이 되신다.

(2) 제자들이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한결 나을 때에 주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무엇보다도 남을 존경하도록 가르치는 데는 형제적 사랑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러한 사랑이 지닌 매력적 능력을 사도행전 2장 46,47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터둘리안은 초대 교회의 영광을 말할 때에, 서로를 위하여 염려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나타낸 그들의 사랑에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던 자들이 말하기를 “보라, 저들의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이라고 했다(Apol. cap. 39).

(3) 만일 주님의 추종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직책에 대한 비난 뿐만 아니라 신실성까지 의심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 주님이시여, 이들이 당신의 신도입니까? 이 감정적이고 악하고 원한을 품고 나쁜 성격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고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우리의 의견과 상충되고 모든 습관이 다를 때에 그들에 대하여 겸허해지고 그들을 용납해 줄 수 있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다운 모습을 지녔다고 확인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무척 바라며 신경을 쓰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각자가 자기의 길을 가는 세상이었으나 제자들은 서로 간에 진심을 주고 받는 관계였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기적을 행함으로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이 기적만을 행하는 자는 “소리나는 꽹과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전 13:1, 2).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참 교회의 핵심이 되신다.제자들이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한결 나을 때에 주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무엇보다도 남을 존경하도록 가르치는 데는 형제적 사랑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러한 사랑이 지닌 매력적 능력을 사도행전 2장 46,47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터둘리안은 초대 교회의 영광을 말할 때에, 서로를 위하여 염려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나타낸 그들의 사랑에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던 자들이 말하기를 “보라, 저들의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이라고 했다(Apol. cap. 39).만일 주님의 추종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직책에 대한 비난 뿐만 아니라 신실성까지 의심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 주님이시여, 이들이 당신의 신도입니까? 이 감정적이고 악하고 원한을 품고 나쁜 성격을 가진 자들이?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고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우리의 의견과 상충되고 모든 습관이 다를 때에 그들에 대하여 겸허해지고 그들을 용납해 줄 수 있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다운 모습을 지녔다고 확인되는 것이다.

13:36 베드로의 자기 확신(요한복음 13:36-38) 이 귀절들에서 우리는, Ⅰ. 베드로의 호기심과 그것에 대한 확인을 알 수 있다(35절). 1. 베드로의 질문은 대담하고 솔직했다. 주님께서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33절)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 형제적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에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넘겨버리더니, 이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이 모르도록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질문하고 있다. 베드로의 질문은 대담하고 솔직했다. 주님께서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33절)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 형제적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에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저 넘겨버리더니, 이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자들이 모르도록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질문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왜 우리 자녀들에게 계시되고 속해있는 것보다 하나님께만 비밀로 속해 있는 것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갖는다든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 보다 하늘에서 되어질 것을 더 알고 싶어하고, 주어진 양심보다 호기심에 끌려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우리의 실수들이다. 평이하고 교훈적인 대화는 곧 시들해지고 할 말이 없어지는 반면에, 의심스러운 문제에 관한 논쟁은 끝없는 말의 싸움으로 계속 되어지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대화 중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2. 주님의 대답은 교훈적이었다. 주님은 그가 가시려고 하는 세계에 대한 어떤 특별한 말씀이나 또는 전에 그의 고난을 말씀하시던 때처럼 장차 받으실 영광과 기쁨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36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금 너는 나를 따를 수 없으나 후에는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1)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베드로가 십자가에까지 그리스도를 뒤따를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가 아직은 주님의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실 만큼 믿음과 결심이 강건치 못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주님께서 고난 당하실 때 베드로가 겁먹은 것에서 증명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잡히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올 수가 없을 터이니 그들의 길로 가게 해 주라고 하셨다. 그들의 현재의 능력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과 고난을 아직 정해 주시지 않으신다. 각자의 능력에 맞는 나날이 그들에게 전개될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순교할 각오를 했다 하여도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그로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으며, 다만 후일에 그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선생처럼 결국은 십자가의 형을 받응 것이다. 베드로가 지금 고난을 피했으므로 그는 영원히 고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한 번 십자가를 놓치면 그것으로 끝장 나는 것이 아니고 여지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더 큰 시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을지도 모라는 것이다.

(2) 또 우리는 그것을 베드로가 주님의 면류관에까지 따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제 주님은 그의 영광을 입으실 것이며 베드로는 그와 동행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안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면서 “네가 지금은 나를 따라 올 수 없다. 너는 아직 천국에 들어갈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또한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먼저 있었던 자들이 너의 자리를 준비하러 들어가야만 하고, 너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에 약속된 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신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자마자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홍해와 가나안 땅 사이에는 황무지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대답은 교훈적이었다. 주님은 그가 가시려고 하는 세계에 대한 어떤 특별한 말씀이나 또는 전에 그의 고난을 말씀하시던 때처럼 장차 받으실 영광과 기쁨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36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금 너는 나를 따를 수 없으나 후에는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베드로가 십자가에까지 그리스도를 뒤따를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가 아직은 주님의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실 만큼 믿음과 결심이 강건치 못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주님께서 고난 당하실 때 베드로가 겁먹은 것에서 증명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잡히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올 수가 없을 터이니 그들의 길로 가게 해 주라고 하셨다. 그들의 현재의 능력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과 고난을 아직 정해 주시지 않으신다. 각자의 능력에 맞는 나날이 그들에게 전개될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순교할 각오를 했다 하여도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그로서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으며, 다만 후일에 그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선생처럼 결국은 십자가의 형을 받응 것이다. 베드로가 지금 고난을 피했으므로 그는 영원히 고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한 번 십자가를 놓치면 그것으로 끝장 나는 것이 아니고 여지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더 큰 시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을지도 모라는 것이다.또 우리는 그것을 베드로가 주님의 면류관에까지 따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제 주님은 그의 영광을 입으실 것이며 베드로는 그와 동행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안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면서 “네가 지금은 나를 따라 올 수 없다. 너는 아직 천국에 들어갈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또한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먼저 있었던 자들이 너의 자리를 준비하러 들어가야만 하고, 너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운 후에 약속된 때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신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자마자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홍해와 가나안 땅 사이에는 황무지가 있기 때문이다. Ⅱ. 베드로의 확신과 그것에 대한 확인을 알 수 있다. 1.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뒤에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아서 “주여, 왜 지금 내가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단 말입니까? 주님은 저의 성실성과 결단을 의심하십니까? 제가 분명히 약속합니다만 그런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주님을 위해 제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라고 요청한다. 이같은 베드로의 태도는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7:35) 그리스도께서 어떤 먼 나라로의 여행을 계획하시는 줄로 알고, 그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갈 것이라는 자부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주님께서 그 자신의 고난을 종종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는 주님께서 죽으러 가실 것을 말씀하시는 줄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로마처럼 주와 함께 가서 죽을 결심을 하고, 주님 없이 사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죽는 것이 더 낫다고 결심한다. 다음을 보라.

(1) 베드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주님을 위해 제 생명을 바치겠나이다. 제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베드로는 그가 생각한 그대로를 말했으며, 그의 결단은 경솔하기는 했으나 불성실하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다음을 주목하자.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뒤에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아서 “주여, 왜 지금 내가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단 말입니까? 주님은 저의 성실성과 결단을 의심하십니까? 제가 분명히 약속합니다만 그런 기회가 오기만 한다면 주님을 위해 제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라고 요청한다. 이같은 베드로의 태도는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7:35) 그리스도께서 어떤 먼 나라로의 여행을 계획하시는 줄로 알고, 그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갈 것이라는 자부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주님께서 그 자신의 고난을 종종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는 주님께서 죽으러 가실 것을 말씀하시는 줄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로마처럼 주와 함께 가서 죽을 결심을 하고, 주님 없이 사는 것보다는 그와 함께 죽는 것이 더 낫다고 결심한다. 다음을 보라.베드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주님을 위해 제 생명을 바치겠나이다. 제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베드로는 그가 생각한 그대로를 말했으며, 그의 결단은 경솔하기는 했으나 불성실하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다음을 주목하자. 주님은 우리들의 생보다도 우리들 자신을 더 사랑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행 20:24).

(2) 베드로는 자신감에 넘쳐서 “주여, 왜 제가 지금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까? 주님께 대한 저의 충성심을 의심하십니까?(삼상 29:8)”라고 반문하였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진실된 사랑이 그 신실성에 대하여 힐책을 듣는다는 것은 유감된 일이라는 것이다(21:17). 주님께서는 제자들 중의 하나가 악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누구인지 판명이 되고, 그리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곧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의 신실함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실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을 따를 수 없다는 밀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우린 스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고, 반면 우리가 이런 저런 것들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면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실상 우리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다.

2.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예언을 하셨다(38절).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시며, 또한 또 우리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시고, 결코 자만하지 못하게 하신다.

(1) 주님은 베드로의 지나친 자만을 나무하셨다(주님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야, 네 약속은 너무 허황되어 믿을 수가 없구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투쟁적이어야 하는지 너는 아느냐” 그리고 죽는다는 것이 네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니라”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을 것 같다. 베드로는 자신감에 넘쳐서 “주여, 왜 제가 지금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까? 주님께 대한 저의 충성심을 의심하십니까?(삼상 29:8)”라고 반문하였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진실된 사랑이 그 신실성에 대하여 힐책을 듣는다는 것은 유감된 일이라는 것이다(21:17). 주님께서는 제자들 중의 하나가 악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누구인지 판명이 되고, 그리고 밖으로 나가버리자 곧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의 신실함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실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을 따를 수 없다는 밀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우린 스스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고, 반면 우리가 이런 저런 것들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면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실상 우리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다.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예언을 하셨다(38절).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시며, 또한 또 우리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시고, 결코 자만하지 못하게 하신다.주님은 베드로의 지나친 자만을 나무하셨다(주님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야, 네 약속은 너무 허황되어 믿을 수가 없구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투쟁적이어야 하는지 너는 아느냐” 그리고 죽는다는 것이 네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니라”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을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결심을 철회시키도록 하시지 않고,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드셨는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함께 갖도록 하셨다. “주여, 주님의 은혜가 저를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신다면, 저는 주님을 위하여 생명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속해서, “네가 나를 위하여 죽을 수 있겠느냐? 너는 물 위를 걸어서 내게로 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느냐” 내가 고난에 대하여 얘기할 때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던 네가 아니냐? 배와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는 일은 쉬운 일이나 네 생명을 바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열심히 투쟁해 오셨는데, 그의 제자들은 결코 선생만 하지 못했다. 우리는 주제넘는 자신감을 가지고 떠드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상처난 갈대로 어떻게 기둥을 삼으며 병든 아이가 어떻게 승리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을 가리켜 매우 크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2) 주님은 지금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침착한 마음으로 베드로의 소심함에 관하여 예언하셨다. 베드로가 그의 자랑하기 좋아하는 입을 열어 “주여,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라고 엄숙히 선고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 밤”이란 말씀을 하시지 않은 이유는 이때가 유월절 이틀 전쯤 되었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 아니 닭이 처음 우는 시각과 나중 우는 그 짧은 시각 사이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여기서 닭의 울음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고요한 밤중에 주님의 수난의 사건이 발생하고 또 베드로는 그의 호언장담한 것이 실패하게 될 것을 선포하는 울음소리였다. 주님의 통찰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2] 닭의 울음 소리는 베드로의 회개의 기회로써, 만일 주님께서 이 예고의 말씀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결코 뉘우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이 이미 마음 곳에서 계획되고 있음을 아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경우는 전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예견하시고 계셨다. 죄인의 사악함 뿐만 아니라 성자의 연약함도 아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은 지금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침착한 마음으로 베드로의 소심함에 관하여 예언하셨다. 베드로가 그의 자랑하기 좋아하는 입을 열어 “주여,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라고 엄숙히 선고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 밤”이란 말씀을 하시지 않은 이유는 이때가 유월절 이틀 전쯤 되었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 아니 닭이 처음 우는 시각과 나중 우는 그 짧은 시각 사이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여기서 닭의 울음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고요한 밤중에 주님의 수난의 사건이 발생하고 또 베드로는 그의 호언장담한 것이 실패하게 될 것을 선포하는 울음소리였다. 주님의 통찰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닭의 울음 소리는 베드로의 회개의 기회로써, 만일 주님께서 이 예고의 말씀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결코 뉘우치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이 이미 마음 곳에서 계획되고 있음을 아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경우는 전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예견하시고 계셨다. 죄인의 사악함 뿐만 아니라 성자의 연약함도 아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첫째, 그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으로써, 주님을 따로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까지 따라 다닌 것까지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둘째, 그는 급한 김에 한 번만 이런 실수를 범할 것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거듭거듭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대로 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예언이 평범한 사건처럼 자세히 기록된다면 숙명론적 생각으로 인하여 일부러 그렇게 꾸며지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결과를 이루게 될 것이므로, 예언은 불분명하고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에 대한 예언은 간단하고 분명한 예언이지만 베드로의 죄에 있어서 주님은 공모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같은 예고의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얼마나 통분해 했을까! 혹시 그는 하자엘(Hazael)처럼 “주의 종을 개취급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의 마음이 심히 동요된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가장 안전할 서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상은 가장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연약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또한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2020/08/10(월) “요한복음 13:1-20” / 작성: 최정운

본문 요한복음 13:1-20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13장부터 진행되는 요한복음 후반부의 핵심은 가장 위대한 표적인 십자가를 통한 계시입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여러 표적들을 통해 예수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제자들을 훈련하시기 위함이었고, 이제 후반부의 가르침과 고별 설교 역시 제자들을 양육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13장은 후반부 전체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세족식을 통한 예수님의 겸손한 사랑이야기는 이어지는 유다의 배신 이야기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계명에 대한 이야기는 베드로의 부인 예고와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심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잠시 후면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음에도 사랑해 주셨고, 그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역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거나 멀어졌던 모든 순간과 행동을 잘 아심에도 그런 우리를 향해 사랑을 베푸시며 우리에게 손 내밀어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주님을 배신할 제자도 있었습니다.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마귀는 생각 속에서 역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생각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루터의 유명한 말처럼,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탐심과 욕망이 생각을 사로잡을 때 사단은 우리를 이용합니다. 자칫 그 생각을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순간 사단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록 자신을 배신하여 팔 제자가 섞여 있었지만, 주님은 그를 포함하여 중심으로부터 올라오는 사랑을 표현해 주시는 세족식을 거행하십니다.

(3-5)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실습은 교육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방법입니다. 직접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제자훈련을 거의 이러한 방법으로 진행하셨는데, 곧 모델링 교육입니다. 당시 발을 씻어주는 사람은 이방인 노예이거나, 아내 또는 자녀 중에서 남자의 발을 씻을 경우가 있었지만 남자가 씻어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이 행동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 순간 아마 주님은 당신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 주었던 마리아를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섬김의 표현을 했던 마리아처럼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친히 섬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일렬 아니면 식탁을 중심으로 디귿자 모양으로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순서대로 제자 한 명 한 명의 발을 친히 씻어 주셨습니다. 발을 내밀기에 너무도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주님의 그 행동에 제자들은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 한 사람씩 발을 만지시며 물로 씻어주시고, 이어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직접 닦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중간이었는지 마지막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속으로 가장 당황해했던 것 같습니다.

(6-9)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상관이 있다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함께 받을 유산, 함께 할 몫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아들과 함께 영원한 유업을 상속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발 씻기를 거절했던 베드로는 이제 자신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한 번 당황하고, 베드로 때문에 한 번 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족식 자체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며 서로 섬기는 삶을 살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실 때는 세족과 목욕을 연결하여서 세족에 회개의 의미를 포함시키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영적으로 죄를 씻어주시는 행위이자, 또한 섬김의 모습임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의 발을 모두 씻으시고 다시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섬김에 대해 가르치심(12-20)

(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며,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기꺼이 도와주는 것을 또한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필두로 자기가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또한 예수님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로 인해 옆에 있는 다른 제자 동료, 동역자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나 혼자 열심히 주님을 믿고 따르며 최고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동료와 동역자들을 챙기고, 그가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 먼저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달은 때는 성령을 받은 이후일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이 가르침이 생각나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먼저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대접을 받고 아랫사람을 하대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특권을 누리지만, 너희들은 앞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가 될 터인데, 그리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너희는 겸손하거라. 그리고 섬기는 자가 되거라. 가질 수 있는 권리, 특권을 내려 놓거라.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거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바라보거라.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찾아서 먼저 하거라. 대접받기 원하지 말거라. 인정받기 위해 섬기지 말거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와 선생이 되어 먼저 제자들을 섬겨주신 예수님처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지금 섬겨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가정에서 어떤 섬김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있는 학교나 직장에서 내가 섬겨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 구역 안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섬김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포함하여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 힘이 되는 작은 선물 하나,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 모두가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한 섬김이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공동체일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알고 행하는 것, 곧 섬김이 복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5-17)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복이 되는 겸손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높은 위치에서도 낮은 자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본받아 많은 선교사님들이 이 땅을 찾아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서서평,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님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줍니다. 1912년 32세 나이에 독일계 미국인 간호사로 한국에 온 서서평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한복을 입고 된장찌개를 먹으며 한국인으로, 한국인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전라도 궁핍한 지역의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열 네 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서른여덟 명이었습니다.

약한 자들을 위해 많은 헌신과 섬김을 베풀다 54세 나이에 영양실조로 삶을 마감한 그녀는 자신의 몸마저 의학연구용 시신으로 기증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녀가 떠난 남루한 방에 남은 것은 낡은 옷가지 몇 개와 반쪽이 된 담요, 동전 일곱 전, 강냉이 두 홉, 그리고 그의 좌우명이 적힌 메모지 한 장이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그녀는 우리를 섬겨 주신 주님을 본받아 그 길을 걸었으며 그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성공을 위한 길인지 섬김의 길인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세족식 교훈 말미에 주님은 다시금 가룟 유다를 대상으로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시편 41편 9절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구약시대부터 식탁 교제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식탁 교제를 한 이후에 배신을 한 행위는 특별히 더 악한 행위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찔림이 있었겠지만, 그는 양심을 저버리고 자신의 길로 향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 주신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주님을 믿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9-20)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곧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허락됩니다.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주님이 보여주셨던 섬김을 본받고 닮아가며,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섬김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형제의 이야기는 마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겸손한 섬김의 삶이었던 것을 봅니다. 안수현 형제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 있습니다.

“고려대 의대를 나온 안수현 형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환자들에게는 친절한 의사였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로 전국의 의사들이 파업을 했을 때, 그는 병원에 홀로 남아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환자들을 두고 병원을 떠날 수 없어서였습니다. 며칠 밤을 새우고, 하루 한 끼 먹을 시간도 없이 격무에 시달렸지만, 자신의 소명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를 따라 병원을 지켰습니다. 돌보던 환자들의 병실을 밤마다 몰래 찾아가 조용히 낫기를 기도해 주던 그였습니다. 환자가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찾아가 유족을 위로하던 참 이상한 의사였지요.

그는 선물을 주는 의사였습니다. 암투병을 하는 환자에게는 찬송가테이프를,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에게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환자들만 아니라 병원에 근무하는 동료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방사선기사, 환자들의 침대를 옮기는 분들, 구두 닦는 아저씨와 매점 아주머니에게까지 그 청년은 겸손하고 따뜻한 선물을 나누었습니다. 돈이 없는 조선족 할아버지의 검사비를 대납해 주고, 백혈병이 걸린 소녀에게는 집까지 찾아가 생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청년을 자기 차에 태워 콘서트장까지 동행해 주는 깜짝 선물을 하기도 했고, 집에만 누워 있는 어린 환자를 찾아가 책을 읽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당연히 살려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2006년 1월 5일, 그 청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3세, 아주 짧은 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통해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되었습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귀한 흔적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섬김의 삶, 사랑을 실천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길은 분명 쉬운 길은 아닐 것이며 하루아침에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걸어간다면, 어느새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내려놓고 중심으로 주님을 따를 때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앞으로 남은 우리 인생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섬김을 받은 자로, 이제 우리도 누군가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며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 구원자요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우리 역시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사람들을 또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발을 씻어 줄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시고 이를 잘 행하여 복된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일평생 그리고 오늘 하루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과감히 내려 놓고 우리 중심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모시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귀한 삶의 걸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때는 언제이며 앞으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본을 보이심으로 모델링 교육을 하셨습니다. 부모 또는 리더의 자리에서 나는 본을 보이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3.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이 우리도 그런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발을 씻어주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4. 오늘도 예수님을 영접하여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며 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작성: 최정운)

2019.2.2.요한복음 13장 1-20절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요한복음 44)

날짜 : 2020년 2월 2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3장 1-20절

유월절이 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모여서 저녁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웃옷을 훌렁 벗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허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 매시더니 대야에 물을 떠 오셨습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종들이 주인이나 귀한 손님들의 발을 씻어줄 때의 차림새였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식사를 하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리고 메시야일 거라고 생각하던 높은 분이 식사를 하다 말고, 갑자기 가장 비천한 종들의 모습이 되어 그런 사람들조차도 자존심 상해 하는 일을 하시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늘 1절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3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놓치기가 쉬운데요. 사실 1절과 2절은 본 스토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당황스러운 행동을 하신 것에 대한 배경설명으로 덧붙여 진 것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더라” 1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이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비천한 종의 자리로 내려가서 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2절과 3절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급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은 가룟 유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없으니까요. 그 자리에는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발도 씻겨 주셨지요. 그러면서 씻음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 중에 넌지시 유다가 들어야 할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유다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든 유다의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 앞에서 당사자만 알아들을 수 있게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종이 되어 자신의 발을 씻겨 주실 때, 그리고 넌지시 자기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씻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 마음에 찔림과 깨달음이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있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유다도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에는 정말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너무 너무 가슴아파 하셨고요.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말 그대로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그 사랑은 유다에게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거기 있었던 제자들은 두고 두고 이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함께 식사를 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으며, 발을 씻겨 주셨던 그 일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을 것입니다. 특히 실수를 하고 죄를 지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면 그 날 가룟 유다의 발을 씻겨 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다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시되 정말로 끝까지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끝이 없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아무리 죄스런 마음과 생각을 품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스스로도 용납하지 못할만큼 큰 죄를 짓고, 그 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예수님이 이래도 날 사랑하실까, 이렇게 못되고, 이렇게 더디 믿고, 이렇게 완악한 나를 사랑하실까 의심이 되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가룟 유다에게 떡을 떼어주시고 발을 씻겨 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들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다시 제 자리로 돌려놓아 주실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또 수건으로 깨끗이 물기까지 닦아 주셨습니다. 마치 그 발이 깨끗해 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 질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무래도 예수님께 발을 씻겨 달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은 너희가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거라고 하시면서 발을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계속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가만히 곱씹어 보면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내가 네 발을 씻어주어야만 너는 나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셨으니까요. 베드로는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깜짝 놀라서 이번에는 그러면 발 뿐 아니라 몸을 전부 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괜한 고집을 부렸습니다. 예수님이 내 발을 씻길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말씀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억지 덕분에 이 말씀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거기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목욕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온 몸이 깨끗한 사람들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온 몸이 아니라 발을 씻어 주셨던 이유입니다. 목욕한 사람은 발 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고,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여러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애초에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덕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예수님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되었으며, 그래서 예수님과 전혀 ‘상관 없던’ 우리가 예수님과 깊이 ‘상관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욕’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 분의 보혈로 우리의 전 존재를 덮고 있던 죄라는 숯검댕이를 씻음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목욕을 한 다음에도 우리에게 계속 필요합니다. 우리가 한 번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우리 발을 더럽히는 죄를 처리하지 않은 채로 그냥 내버려 두면 그것이 우리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 합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를 편들어 주는 이야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부담 없는 이야기만 좋아하지요. 실제로 미국의 어느 유명한 부흥강사는 설교자들에게 충고하기를 설교를 할 때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청중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강단에서 죄에 대한 설교가 울려 퍼지면 청중들은 강단 아래에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환한 얼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좀처럼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눈물도, 그 죄를 용서받은 기쁨이 넘치는 얼굴도 희귀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선배들보다 죄를 덜 짓고 살아서 그럴까요? 의롭고 깨끗하게 살아서 죄를 생각해도 덤덤하기만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이야기, 회개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듣지 않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죄 자체에 대해서 무뎌져 버렸기 때문에 그런 값진 것들을 다 잃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우리 주님과 상관있는 사람이 되었지요? 우리의 온 몸에서 죄악의 숯검댕이를 당신의 보배로은 피로 씻어 주셨던 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떻게 유지되어지고 깊어져 가지요? 그것도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또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발을 주님 앞에 내놓고서 그 발을 씻어달라고 부탁드려야 합니다. 때로는 그 일이 부끄럽고 꺼려지더라도 그 더러운 발을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그 발은 우리 주님만 씻어 주실 수 있고, 그래야 우리가 주님과 상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옿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 주와 스승이 되셔서 우리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 분의 제자요 성도들인 우리가 예수님처럼 서로의 발을 씻겨 주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때로 그 안에 가룟 유다같은 사람들이 끼어있을 때도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 한 명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겨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분명한 섬김의 행동이었습니다. 종들처럼 식사를 하는 도중에 섬기기 위해서 일어나신 것이나, 웃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신 것이나, 특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나 모두가 다 비천한 종의 행동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성도들이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가 바로 예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의 핵심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을 낮춰 서로를 섬겨야 하며, 그렇게 서로를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겨 주시고, 또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은혜로 시작되고 지금도 그 은혜 안에서 풍성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 사이의 관계,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지고 또 유지되어질까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사이의 관계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를 섬기시듯이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섬김과, 예수님께서 늘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 그 용서를 통해서 이어지고 유지되어 집니다. 그 섬김과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 ‘상관 없는’ 관계가 되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천국의 지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천국을 닮은 곳, 천국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의 지점이라는 말이 허무한 미사여구가 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과연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여러분은 천국이 어떤 곳이며, 천국은 왜 천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하는데요. 여기에 천국이 천국이 천국인 이유가 정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아들의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예수님의 사랑이 물처럼 흐르고, 그 분의 사랑이 다스리는 그런 나라이지요. 우리가 천국을 그렇게 좋아하고 소망하는 것도 다 그래서 입니다. 그 나라가 ‘예수님의 사랑이 강처럼 흐르는 나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니까요. 그래서, 천국은 결국 섬김과 용서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늘 우리들을 섬기셨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까요. 우리는 천국에서 예수님의 섬김 속에서 기뻐하며, 그 분의 용서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는 그 행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있는 교회가 조금이라도 더 천국을 닮은 곳이 되려면, 교회의 혈관 인 성도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섬김을 닮은 섬김이 흐르고, 서로를 향한 용서가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천국을 맛보며, 서로가 맺은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천국을 닮은 행복하고 기쁨 넘치는 곳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 아시듯이 사랑하는 것,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용서하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누가 남들 밥 먹고 있는데 일어나 시중을 들고 싶겠습니가? 누가 나서서 험한 일 굳은 일 하고 싶어하고 남들 발이나 씻어주며 살고 싶어하겠습니까? 누가 뉘우칠 줄 모르는 가룟 유다같이 구는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우리의 교만한 본성으로는 도무지 오를 수 없는 산과도 같지요. 주님도 그게 참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로 낮아지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렇게 인간이 되어서 가룟 유다를 끝까지 사랑해 보셨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너희도 나처럼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너희 안에 있는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도 끝까지 사랑하며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졌던 것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처럼 말이지요. 주님은 그런 모습을 너무나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복을 주려고 이런 말씀을 들려 주시는 것이니까요. 우리 15절부터 17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 볼까요? 다 찾으시고요.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성도 여러분,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고 심지어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은 자신을 낮추어 가룟 유다같은 우리들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이런 높고 큰 은혜 덕분에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싶지 않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때마다 우리가 받은 이 은혜를 기억낼 수 있다면, 우리는 높아져만 가는 우리의 가당치 않은 마음을 주님의 마음처럼 낮고 복된 자리로 내려보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게 해 주시는 하늘 백성의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우리의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발을 내어 계속 내어드리고 또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매일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죄를 씻어주시는 은혜 안에서 예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몸을 낮추어 서로를 섬기며, 마음을 낮추어 서로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하늘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아들의 사랑의 나라를 닮은 행복하고 향기로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더러운 발을 주님께 내어드리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본을 따라 서로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십시다. 그렇게 주님의 섬김을 받고 용서를 받으며, 그 힘으로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용서하는 하늘 백성들이 되십시다. 그러면 주님이 하늘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며 사는 특별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더 많이 낮추고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용서하는 예수 향기 가득 품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늘 더럽혀 지기만 하는 나의 발을 주님께 내놓으며 살게 하소서. 용서하시고 씻어 주시는 은혜 안에 살게 하소서. 우리도 주님처럼 할 수 있게 하소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 안에 섬김과 용서가 강처럼 흐르게 하소서. 이 곳이 주님 다스리시는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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